# 38
“약속드리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노인은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더니 다시 전면 허공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강호는 오로지 새로운 영웅만을 생각한다네. 그 영웅이 탄생하기까지 수고하고 애쓴 이들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 난 그 뒤에 숨겨진 이들을 ‘그림자 고수들’이라고 부른다네. 방금 전 호위들의 애환을 들으면서 난 그들도 슬픔을 간직한 그림자 고수로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 그리고 나 또한 그림자 고수들 중 한 명일세.”
잠시 간격을 둔 후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래, 나는 그림자 고수지. 그들 중 기연 전달자였어. 기연 전달자란 말일세. 허허허허.”
그렇게 노인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는 오랜 시간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자신이 겪었던 일은 물론이고 자신과 같은 입장에 처한 경우까지 곁들어가면서 설명했다.
거기엔 깊은 애환, 공허가 난무했다. 귀를 기울이던 심온과 엽상, 그리고 호위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 고통의 무게가 느껴져 점점 몸이 움츠러들 지경이었다.
스스로를 기연 전달자라고 칭한 노인의 말을 정리해 보자면 대략 아래와 같았다.
기연 전달자, 그들의 슬픈 삶.
인연자(因緣者)를 기다리는 시간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자 고독과의 싸움이다. 기다림도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을 보인다.
짧게는 십 년, 이십 년도 있으나 대개는 기본이 오십 년이며 길게는 천 년을 훌쩍 넘기도 한다.
외부에서 볼 때는 멋있어 보일지 모르나 그건 사실 감옥 생활과 다를 바 없다. 3년형을 받아도 까마득할진대 오십 년 동안 기다린다면 그 고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백 년을 기다리기로 되어 있는 자는 오십 년을 기다리는 자를 부러워하고, 오십 년을 기다린 자는 십 년짜리들을 부러워하겠으나 짧다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짧으면 그만큼 강도가 심한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명이 다한 후 예정된 인연자와 만나는 경우에는 ‘이백 년 후에 만나게 될 후인에게’라는 거창한 인사말을 남기고 먼저 하늘로 가든지, 아니면 대충 살다가 세상을 떠나든 여러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만나야만 하는 경우 그 곤혹스러움은 말로 하기 힘들 정도다. 물론 이런 상황도 두 가지로 구분되기도 한다.
하나는 언제 어느 시에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상황과 다른 하나는 전혀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생짜로 기다리는 경우다.
전자(前者)의 경우야 여러 가지 특혜를 누릴 수 있어 좋지만 후자(後者)의 경우엔 참담하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들이야말로 촌각 대기조(寸刻待機組)이기 때문이다.
바깥으로 바람 좀 쐬러간다든지 산을 한 바퀴 휘돌고 온다든지 하는 일 따윈 있을 수 없다.
왜냐?
대부분 인연이 될 족속들과의 조우는 그들의 몸에 극심한 내(內), 외상(外傷)을 입은 상태가 많기 때문에 바람 쐬러 나갔다가 시간이 지체될 경우엔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괴로움은 세월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대(古代)의 기인(奇人)이나 전대(前代)의 영웅(英雄)인 이들은 시대의 영웅을 만남에 있어 절대적인 ‘자세’, 즉 뭔가 있어 보이는 ‘자세’를 요구당한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자세는 뭐니 뭐니 해도 가부좌다.
허리는 꼿꼿이 펴고 눈은 정면을 응시해야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시간도 채 견디지 못하고 다리가 마비되고 저려와 견디지 못할 그 엄청난 고행의 자세를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하루 이틀이 아닌 수 개월, 수십 년을 말이다.
심지어 해골로 조우해야 하는 경우에도 예외는 없다.
볼품없이 벽에 기대어 죽어 있다든지, 똑바로 누워 죽어 있다든지, 모로 누워 죽어 있다든지 이런 것들은 절대적으로 삼가야 한다.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도 마음 편히 갈 수 없는 것이다.
이해를 위해 상황을 상상해 보도록 하자.
자신의 죽음을 감지한 백발이 성성한 전대고수!
“끄응! 자, 이젠 나의 죽을 때가 다 되었구나. 후인이 날 찾았을 때 절이라도 한 번 받으려면 품격있는 자세를 갖춰야겠지. 끄응! 가부좌 틀어야지. 아고, 이거 다리가 말을 듣질 않네. 이러면 안 되는데……. 으라차차!”
기운이 다해 숨을 헐떡이며 가부좌를 틀고 두 눈을 조용히 감고 죽을 때를 기다린다. 이때 바로 세상을 떠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시간이 좀 걸리면 난감하기 그지없게 되고 만다.
자세를 풀자니 이것도 힘들고 버티자니 여간 곤욕이 아닌 것이다.
도대체 이보다 괴로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그들에겐 기다리는 동안 대화할 상대조차 없다.
그렇다고 먹을 것이 풍족한가?
사람이 사는 재미로 으뜸은 먹는 재미라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들은 종일토록 땅바닥만 긁으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다. 그래도 그들은 사명을 완수코자 외롭지만 꿋꿋이 버티고 또 버틴다.
자, 그럼 살아서 후계를 이을 인연자들을 만나면 그때는 행복한 생활이 시작될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연자와의 만남은 대개 큰 상처를 입은 후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급선무는 가진 바 의술(醫術)을 총동원하고 영약(靈藥)과 영초(靈草)를 적절히 사용해 목숨을 살려내는 일이다.
시대의 영웅으로 내정된 족속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회복력을 보이는지라 곧바로 의식을 되찾고 상황을 파악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치는 기재들인지라 깨어나는 순간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알아차리고 만다.
모든 것이 이들을 위해 준비된 것들인지라 절세의 무학도 전수하고 그 외의 절학들을 전수하여 이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싶을 때는 눈빛을 번들거리며 남겨진 영약과 영초들을 내놓으라며 큰소리치기에 이른다.
“뭘 자꾸 숨기려는 겁니까? 내가 영웅입니다. 내가 세상을 구할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에 놔두어봤자 아무 소용 없으니 다 가져와 보세요. 어서요!”
사실 영약과 영초라는 것이 무조건 많이 먹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기에 주지 않았을 뿐이건만 좋은 건 일단 먹고 보자는 심보로 마구 먹어치운다.
혹시라도 강호에 나가게 되면 다른 기재들에게 나눠 줄 수도 있고 여러 사용 방법이 있을 터인데도 막무가내다. 이미 하늘이 자신의 몫으로 안배해 놓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털어내고 이별할 시기가 되어 작별을 준비한다.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 아쉬움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중원에 나가서도 훌륭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고 악인들을 벌해 정의가 바로 서는 강호를 만들어주렴.”
“하하! 두말하면 잔소리죠.”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도무지 갈 생각을 않는다. 어서 이곳을 떠나 어려운 중원을 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버티면서 빈둥거리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헤어지기가 아쉬운 것이겠지. 내 마음도 그러한데 어찌 마음이 가벼울 리 있겠는가.’
기연 전달자는 마음이 감성에 사로잡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자칫 말을 하면 눈물이 나올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시대의 주인공의 입이 열린다.
“준비되셨죠?”
“……?”
뜬금없이 무슨 준비란 말인가?
“그거 있잖아요, 그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에이, 아시면서 왜 그러시는 거예요? 흐흐흐.”
“글쎄, 아직 잘 모르겠다만…….”
그러면 뻔뻔한 안색을 굳히면서 말한다.
“허허, 자꾸 이러시면 곤란하죠. 이거, 이거, 왜 이러시나. 이제껏 잘 하시다가 끝에 가서 초를 치시면 저보고 어떻게 혈겁(血劫)에 빠진 중원을 구하라는 겁니까?”
거의 협박이다.
“구체적으로 말을 해야 하지 않느냐? 게다가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빠짐없이 주었지 않느냐 말이다.”
“자꾸 이러실 겁니까?”
“왜 그러는데?”
“그거 말입니다, 내공 주셔야죠. 가지고 있어서 뭐 하시려고 그렇게 버티시는 겁니까? 어서 주입해 주세요.”
싸늘하게 말하고 냉큼 뒤돌아 앉으며 등을 내보인다.
그렇다.
강호를 평안케 할 사명을 띤 내게 모든 것을 다 건네주고 깨끗이 죽으라는 말이다.
‘이런 씨발.’
속으론 욕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지만 어쩔 수 있는가.
“그래, 미안하구나. 내 생각이 짧았다.”
“뭐, 지금이라도 아셨으면 된 거죠. 자, 어서 하죠.”
양손을 쭉 뻗어 파도처럼 내공을 몸 안으로 주입한다. 두 손으로 피 같은 내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진정 사는 게 뭘까.’
내력을 주입받은 시대의 주인공은 충만히 차올라 오는 내공에 감당치 못할 기쁨으로 몸을 부르르 떤다. 개중에 아주 싹수없는 놈들은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커억 하고 트림까지 해댄다.
어느덧 내력을 다 건네준 후 그는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비실대다가 바닥에 털퍼덕 쓰러져 모로 눕는다. 눈에는 정기가 사라졌고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람이란 태어나 각자의 사명을 타고나기 마련인데 이제 그 사명을 다했으니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죽은 목숨을 살려주고, 영약과 영초를 쏟아 붓고, 절세의 무학을 전수했으며, 끝내 내공까지 건네주었건만 웬일인지 ‘장차 영웅’은 쓰러져 있는 기연 전달자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말할 기운도 없어 생각에 잠긴다.
‘도대체 이 염치없는 놈은 뭐가 또 아쉬워서 이렇게 가지 않고 있단 말인가.’
간신히 손을 들어 어서 가라고 저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제게 모든 것을 주셨는데 마지막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으으…….”
상황이 이쯤 되면 기연 전달자는 속이 뒤집어질 지경에 빠지고 만다. 마지막 순간만큼은 죽음을 홀로 음미하고 지난날을 돌아보고 싶었건만 그마저 허락지 않는 것이다.
“꼭 제 손으로 묻어드리겠습니다.”
비록 그 뒤의 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러니 빨리 죽으십시오.
적어도 사오 일은 버틸 수 있건만 하루가 지나도 살아 있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지겨운지 동혈 여기저기를 따분하게 한숨을 내쉬면서 혼자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목숨 한번 끈질기네. 거참, 세상 뭐 더 볼 것이 있다고 이렇게 버티는지 모르겠군.”
그 말에 내장이 토막나는 심정이다.
기연 전달자는 조용히 눈을 감고,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다.
‘장차 영웅’은 강호에 출두하여 이후 많은 영광을 얻고 칭송을 받으나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을 구하고 가르친, 촛불처럼 자신을 태워 중원을 밝힌 그림자 고수는 모르고 있으니 그 안타까움을 어찌한단 말인가.
위와 같이 노인의 이야기가 끝을 맺자 좌중엔 어느 누구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그야말로 분위기는 ‘퀭’ 자체였다.
바람만이 제멋대로 불어와 한 바퀴 휘돌다 저만치 물러가고, 또 다른 바람이 불어와 옷깃과 머리를 나부끼게 할 따름이었다.
심온은 멍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믿어지지 않지만 믿지 않을 수 없다. 왜 저렇게 힘이 없어 보이나 했더니 이제야 겨우 이해가 되는구나. 불쌍한 노인, 아주 쫙 빨려 버린 것이 아닌가.’
그러자 이어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노인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모양인데, 그럼 그 영약이며 내공이며 다 빨아가 버린 작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리 시대에 존재하는 인물이지 않겠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심온만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심온과 동시에 엽상과 호위도 일제히 물었다.
“그 염병할 놈이 누굽니까?”
“그 썩을 놈이 누굽니까?”
“그 사람이 누굽니까?”
노인은 세 사람을 쓱 훑어보고는 다시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허허허, 말해서 무엇 하겠나. 내가 후흑애에 온 것은 그 녀석을 혼내달라는 생각에 온 것이 아니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곤란함과 한을 털어넣고 도움을 구하는 곳이니만큼 다소나마 내 마음을 달랠까 하는 생각에서 온 게지. 다행히 오늘 같은 시간을 갖게 되어 한결 마음이 가볍네. 모두들 고마우이.”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만 가네. 자네들은 아직 젊으니 무엇이든 생각하는 대로 할 수 있네. 훗날 기력이 쇠할 때 후회하는 삶이 되지 않도록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게나.”
노인의 음성은 세속을 초탈한 기운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등을 보이고 느리게 걸어가는 노인을 심온 등은 붙들 수가 없었다.
기연 전달자로서의 기구한 삶을 산 노인이 아스라이 멀어지고 난 후 호위 사내 또한 작별을 고했다.
걸음을 옮기기 전 그의 표정은 그전에 비해 밝아져 있었다.
“노인장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느끼는 고통은 고통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구려.”
호위가 그와 같이 말하고 홀연히 떠나자 남겨진 심온과 엽상은 그들이 떠난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보고는 약속이나 한 듯 배꼽을 잡고 웃었다.
“푸하하하하! 이거 도대체 뭐야?”
“크하하하하! 세상이 완전히 웃기군요!”
두 사람은 그렇게 실컷 웃다가 어느 순간에선가부터 점점 웃음을 거두더니 끝내는 시무룩해져서 자리에 앉았다.
전면을 응시한 채 심온은 손으로 코를 후볐고, 엽상은 머리 비듬을 털어냈다.
원래 사람은 지나치게 웃고 나면 괜한 허무함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지금 심온과 엽상이 그러했다. 거기에 두 사람은 노인의 말까지 들은 뒤라 더욱 헛헛한 마음이 되고 말았다.
멍하니 앉아 두 눈만 끔벅거리고 있던 중 엽상이 품을 뒤적이다 두루마리 서신 하나를 건넸다.
심온이 ‘뭐야?’라는 표정으로 쳐다보곤 받아 들고 두루마리를 펼쳐 읽어나갔다. 먹먹하기만 하던 심온의 얼굴에 다시금 서서히 웃음이 번지더니 키킥거렸다.
“뭐야, 이거? 화화궁의 의뢰라……. 그럼 그때 그 일 때문이로군.”
“묘안이 떠오르신 겁니까?”
“흐흐, 아까 흑막에서 귀찮게 한다고 했었지? 잘 엮으면 그럴싸한 작품 하나 나오겠는걸.”
심온의 얼굴로 장난기가 스멀거리며 피어났다.
***
7. 화화궁과 흑막
“아주 꼴값을 떠는구나.”
화화궁의 요화는 전당포의 문을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원인은 이곳이 후흑문과의 접선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화화궁은 독자적으로 조사를 했었으나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자 결국 후흑문에 사건을 의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