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거기서 다시 한숨을 내쉬고 난 후 심온은 말을 이어갔다.
“그 아이는 어릴 적부터 영특하였습니다. 아니, 영악했다고 하는 편이 옳겠군요. 그 녀석을 생각할 때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차라리 똑똑한 체하려거든 끝까지 할 것이지 왜 그렇게 속닥여서 화를 자초하느냐는 것이죠. 제가 이곳에서 사연의 서신을 던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이유는 차마 그 아이를 찾아달라고 할 염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뢰를 수락함에 있어 까다로운 후흑문이기에 과연 그 아이를 찾는 의뢰를 받아줄지도 의문이고 말입니다.”
심온의 말은 끝을 맺었지만 두 사람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전혀 반응이 없었다. 애초에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들 같았다.
심온은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절벽 맨 가장자리에 섰다.
“내가 차라리 동생을 대신할 수만 있다면.”
바람이 불어오자 심온의 몸이 휘청거렸다.
“공자, 무슨 소립니까? 어찌 이리 약해졌단 말입니까?”
황급히 엽상이 붙들지 않았다면 심온의 몸은 곧바로 아래로 추락하고 말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이보게, 젊은 친구. 혼자만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지 마시게. 세상엔 누구라도 다 나름대로의 고난의 짐을 지고 있다네. 단지 각자가 자기 짐이 제일 무겁다고 생각하는 것뿐 아니겠나. 괜찮다면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군. 듣고 나서 자네의 짐과 견주어 작은 위로가 된다면 좋겠네.”
말한 이는 사십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심온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사내는 헛헛한 웃음을 날렸다.
“자리에 앉으시게. 뛰어내리는 것이야 언제라도 가능하잖은가.”
심온이 힘없이 뒤로 물러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얼마 전까지 비밀 호위로 지냈다네. 어떤 조직, 누구의 호위였는지는 말하지 않음세. 그건 내 마지막 의리라고 봐주면 되겠군.”
그때부터 그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강호무림엔 지존(至尊)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존재만으로도 상대를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그들이 죽는다면 단숨에 힘의 균형이 무너져 강호의 판도가 바뀌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존들은 언제나 끊임없는 위협을 받는다.
물론 그들은 각기 큰 힘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일일이 모든 적을 상대하는 것은 여간 번잡스러운 일이 아닌지라 그들에겐 따로 비밀 호위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비밀 호위들은 완벽한 은신으로 지존(至尊)의 그늘에 숨어 언제 어느 때 습격할지 모르는 적들을 막아낸다.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 중엔 비밀 호위에 대한 선망 어린 마음을 품곤 하는데 그건 그들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고 몸이 혹사당하는지 모를 걸세.”
그의 얼굴이 쓸쓸해졌다.
“먼저 화려한 등장은 기본이자 필수라네. 이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비밀 호위를 동경하곤 하지. 하지만 그건 겉만 번드르르할 뿐일세. 스스슥 뿌연 안개와 같이 피어나 어느새 그 자리엔 검은 무복을 입은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워낙 은밀하고 신비스럽게 나타나기 때문에 원래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닌가 착각이 들 지경이지. 이것이 바로 비밀 호위들의 유일한 위안거리라 할 수 있는 등장 모습이네.”
심온은 말로 묻는 대신 의문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멋지기만 한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는 뜻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가 이 말을 꺼낸 건 이 화려한 등장의 이면에 감춰진 그들의 수고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네.”
그러면서 그가 이어가는 내용은 이러했다.
일단 지존의 부름은 극히 은밀한 목소리이거나 모기만한 소리일 경우가 태반이라는 점이었다.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소리인지라 과연 비밀 호위를 부른 것인지, 아니면 혼자 중얼거린 것인지 가끔은 분간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저 혼잣말이었는데 뜬금없이 안개를 일으키며 나타났다가 ‘넌 뭐야? 놀랐잖아, 자식아’라는 말과 함께 뺨을 얻어맞은 호위들이 부기지수고, 간혹 지존의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뇌옥에 갇히는 일까지 있다고 한다.
또 그와는 반대로 부름을 그만 독백으로 착각하여 튀어나가지 않았을 때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인격적인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되는지라 단 한시도 초긴장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언제 어느 때 부를지 모른다는 점이 문제일세.”
그에 첨가된 말에 따르자면 특히 한참 잠이 쏟아질 새벽 무렵에 부를 때가 많아 수면 시간의 불규칙으로 인해 비밀 호위 오 년이면 몸이 정상인 사람이 없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로 돌고 있는 판국이라고 한다.
또한 나타나는 모습에 관해서는 언제나 신비스러움을 잊어서는 안 되며, 특별히 누가 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옷이 더럽거나 머리 모양이 흐트러져 있는 것은 지존에게 누를 끼치는 것으로 간주되어 호되게 욕을 먹는다.
“부족한 수면에 귀는 늘 예민하게 깨어 있어야 하고, 깔끔한 옷차림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네. 또한 멋진 등장도 필수지. 가장 많이 쓰이는 것으론 안개처럼 흐려진 상태에서 점점 윤곽이 드러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땅에서 서서히 솟아올라 사람의 형상을 띠는 것인데 문제는 이런 등장술(登場術)은 신비해 보이긴 하지만 많은 내력을 소모한다는 점이네. 그냥 나타나도 되는 것을 왜 굳이 이렇게 해야만 하냐는 걸세.”
“그래도 자주 부르지 않으니 내력 소모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심온은 점점 들을수록 흥미진진해져서 이젠 은근히 질문을 던지기까지 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 하지만 어떨 때는 짧은 시간 안에 수 차례 부를 경우도 있는데 그때는 급작스럽게 내력이 고갈되어 몸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기도 하네. 실제로 내 주위에서 그리 된 사람만 해도 세 명이나 보았으니 결코 적은 숫자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나. 아마도 전 무림을 통틀어 본다면 훨씬 많은 숫자가 나올 걸세. 하지만 이런 것뿐이라면 사실 견딜 만할 거네. 이건 단지 시작일 뿐이야.”
그가 말한 두 번째 애환은 이러했다.
―최소한의 공간에 온몸을 구겨 넣고 대기한다.
“비밀 호위들은 특성상 지존 외에 다른 이들이 눈치챌 수 없는 곳에 은신해야 한다는 점이네. 그렇다 보니 주로 숨을 만한 곳은 후미진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경우가 대다수지. 조금 심한 경우에는 천장 모퉁이의 어두컴컴한 곳에 매달려 있어야 하기도 하고 말이네.”
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심온도 머리 속에 그 광경을 그려보니 아찔했다.
솔직히 말로는 무슨 일이든 간단해 보이지만 몇날 며칠이고 그 비좁은 공간에 몸을 구겨 넣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꽉 끼인 자리에서 거의 이틀 정도 지내게 되면 제아무리 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몸의 한쪽으로 피가 몰리거나 다리가 저려오는 것은 피할 수가 없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급기야는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때 만약 지존의 부름이 있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낭패스러울 것인가.
“그런데 말일세. 참 희한하기도 하지. 지존은 몸 상태가 좋을 때는 아무 말이 없다가도 꼭 몸 어딘가가 마비되어 올 때면 긴급하게 부른단 말일세. 하지만 어쩌겠나.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앞에 서지. 다리는 후들거리고 저려와 견딜 수가 없는데도 말이네. 그런데 그때 마침 하는 말이 ‘아니 그냥 불러본 거다’라든지, ‘시험해 본 것뿐이다’라는 말이 나올 때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은 자괴감에 빠진단 말일세.”
심온과 엽상은 무슨 말로 위로해 주어야 할지 몰라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더 심한 경우는 몸 어느 한 부분이 마비가 올 때 침입자가 들어서는 경우네. 그야말로 낭패지. 내 이런 경우는 직접 겪어보지 않았지만 늘 마음속으로 기원했네. 부디 내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게 해달라고 말일세.”
열악한 근무 여건.
절묘한 침투.
마비된 다리.
실력이 부족해서 죽는 것이라면 원통하지도 않으련만 그 절박한 순간에 먼저 발견하고도 신형을 날릴 수 없는 안타까움이란 상상을 초월하리라.
마음을 굳게 먹고 몸을 날렸으나 발바닥이 퉁퉁 부어 둥그렇게 느껴지는 중에 어찌 제대로 검을 날릴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우리 호위들이 아예 쉬는 날도 없이 일하는 것은 아닐세. 하지만 과연 그것을 쉰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
호위들의 근무는 이틀 일하고 하루 쉬고, 다시 이틀 일하는 식이었다.
이렇듯 많은 근무 시간이 배정된 것에는 호위들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 탓이었다. 도대체 호위들이 하는 일이 뭐고 힘들 게 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호위들은 하루 쉬는 날 부족한 수면을 채우기에도 급급한 실정이었다.
“어느 날 나는 친구 웅외의 일기장을 보게 된 적이 있었다네. 난 그걸 읽고 나서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지.”
그가 말한 친구의 일기 내용은 이러했다.
쉬는 날을 맞아 두 시진(네 시간)이라는 길고 긴 시간 동안 꿀 맛 같은 잠을 청했다. 그리고 특별히 외곽에서 근무하는 동기 묵겸이 보내준 고기파전을 먹었다. 비록 차갑게 식었지만 녀석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눈물이 나려 했다.
오늘 무공 수련은 그냥 젖힐 참이다. 누가 침입한다고 무공 수련이란 말인가.
아, 요즘 들어서 외곽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부럽기 그지없다.
속을 모르는 친구들은 지존의 처소에서 근무하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고 부러워한다. 만약 그들이 한 달간 일해보고 난 후 그래도 신기해하고 기뻐한다면 난 그를 평생 아버지라고 부르겠다. 그러나 한 달 뒤, 땅을 치고 통곡한다면 난 가차없이 ‘씨발 놈’이라고 말해 주리라.
아!
평범한 삶이 그립다.
그냥 편안히 어느 이름 모를 산골짜기에 은거하고 싶구나.
“물론 가끔씩은 즐거움이 없는 것도 아니라네. 어떤 날은 지존으로부터 영약 찌꺼기를 얻어먹기도 하거든.”
그러나 정작 그의 말투는 즐거움이 아닌 비참함이 서려 있었다.
“비밀 호위들 만큼 지존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볼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한데 문제는 늘 멋지고 좋은 모습만 보는 건 아니라는 것일세. 난 솔직히 지존이 처첩들과 정사를 치르는 것을 보고 비밀 호위가 된 것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네. 지존은 정력에도 지존이어서 매일 밤 아름다운 여인들과 뜨거운 밤을 보냈으니 눈은 즐거움에 흠뻑 빠졌지. 인간의 욕망 중 몰래 훔쳐본다는 것, 그것도 지존의 비밀을 엿본다는 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이었다네.”
심온과 엽상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만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리 속에 침상이 그려지고 그 위에 나뒹구는 두 남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떠올랐고, 그 위쪽 어딘가에서 숨죽이며 살피고 있을 호위를 생각하니 그저 생각만으로도 흥분이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난 얼마 못 가 비참해지고 말았지. 어느 날인가 지존과 여인은 욕정을 채우고 이불도 덮지 않고 나란히 침상에 누워 대화를 나누더군. 지존이 말했네. ‘저기 보이지. 저쪽에 한 놈, 그리고 저기 저쪽에 둘, 그 반대편 쪽에 나란히 셋, 이렇게 있지’. 지존이 손가락으로 내가 있는 곳을 가리킬 때 난 그만 숨이 멎어버리는 것만 같았네. 그런데 여인은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까르르 웃더니, ‘저것들, 흥분했을까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나? 그들은 옷을 다 벗고 있고 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도리어 내가 수치심이 일어 견딜 수가 없더군. 지존과 여인은 우리 호위들을 이용해서 더 강한 쾌락을 추구했던 것이지. 그 상황에서조차 우리는 이용당하고 있었던 게지. 휴, 그 후 여인이 지존을 올라타고 억지로 소리를 지르는데 난 그만 견딜 수 없어 귀를 틀어막고 말았네.”
“왜, 왜 그러십니까?”
엽상이 황급히 심온에게 전음을 날렸다. 갑자기 심온의 눈이 벌겋게 변하더니 입술을 실룩이는 것이 사고를 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엽상의 전음에 심온이 잠에서 깨어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어? 어. 어떻게 하면 비밀 호위가 될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그게 지금 말이 됩니까? 저 사람하고 사생결단 낼 일 있습니까?”
“음, 아무래도 무리겠지?”
“당연하죠.”
“나중에 따로 알아봐야겠다.”
심온이 한심한 생각을 하는지라 엽상은 이야기의 방향을 돌릴 생각으로 물었다.
“그런 점에서는 정파 계열의 지존을 호위하는 이들이 아무래도 이점이 있겠군요.”
호위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닌 성싶습니다. 비밀 호위는 워낙 지존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라 무림맹주나 정파의 높은 인사들의 호위를 서다가 그들이 부적절한 여자 관계나 이해하기 힘든 불법을 저지르는 것을 목격할 땐 도리어 더 큰 충격에 빠지게 되니 말이외다. 솔직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하지만 호위들은 호위를 서기 전까진 그들의 지존이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하다가 작은 흠결을 발견하게 되면 곧바로 ‘내가 왜 이 사람의 호위를 서는 것인가’, ‘이 사람은 과연 목숨을 다해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심한 혼란에 이르게 되고 만다오.”
그의 말은 거기에서 잠시 멈췄다가 이어졌다.
“휴우, 난 사실 어렵게 호위의 삶을 버리고 빠져나왔다오. 처음 나올 때만 해도 온통 미움뿐이었는데 이곳에 이르러 가만히 되돌아보니 미움도 다 부질없는 것이더구려. 그래도 오늘 여러분들에게 사연을 고하고 나니 한결 내 마음이 가볍소이다.”
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호위를 향해 예를 갖췄다.
“저를 위해 어려운 말씀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짐이 무겁다고 하나 막상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저보다 더 험한 삶을 사신 분 앞에서 언행을 가볍게 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허허, 너무 정색을 하고 말하니 부담스럽군. 그저 오늘 이야기는 우리 모두 다 토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다 잊도록 하세.”
“아무렴요. 그래야지요.”
심온은 밝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노인의 입을 열어야 할 차례였다. 나름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호위가 돕고 나섰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르신의 사연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때까지 오직 공허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노인의 얼굴이 천천히 돌아 호위에게 이르렀다.
“이제 내가 이야기해야 할 차례인가 보군.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오늘 일은 다 잊는 걸세.”
노인의 목소리는 공허한 시선만큼이나 힘이 없었다.
“물론입니다.”
호위의 말에 이어 심온과 엽상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