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36화 (36/125)

# 36

심온은 엽상이 처음 절벽을 무서운 기세로 올라오다가 갑자기 돌 무더기가 무너져 추락한 것이 순전히 담유설 때문이고, 지금 이러는 것 또한 예쁜 여자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이런 모습들 때문에 자신이 엽상을 좋아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심온은 언제 화가 났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엽상에게 손을 내밀었고, 엽상은 빙긋 웃으면서 그 손을 마주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장난기를 거두고 서로 말없이 뜨거운 가슴으로 포옹했다.

심온에게 있어 오늘날 엽상은 수하였으나 지난 시간들 속에서는 무서운 교관이었다. 물론 그 무서움이란 건 사부가 살피고 있을 때의 경우고 사부가 없을 땐 그 누구보다 다정한 교관이었다.

심온은 다섯 살 때부터 열네 살 때까지 십 년간에 걸쳐 지옥 같은 수련의 날들을 보냈다.

당시 사부는 수련을 위해 아홉 명의 교관을 두었는데 지금의 총관 오교와 화원을 담당하는 화노, 그리고 접수당주 엽상, 그리고 나머지 여섯은 현 후흑문의 장로들이었다.

이들 아홉은 심온의 작은 스승들이자 한편으로는 친구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

“자, 그럼 몸 구석구석에다 술을 부어볼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하하하하하!”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며 산길을 따라 내려가자 뒤에 남은 담유설은 고개를 갸우뚱하다 알게 뭐냐는 미소를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접수당의 총인원인 서른둘이었다.

그중 사람만을 센다면 스물다섯이었고 일곱은 절벽에 던져진 사연을 낚아채는 독수리들이었다. 그러나 후흑문에서는 접수당원하면 반드시 독수리들까지 한 식구로 쳤다.

이곳에서 스물다섯의 접수당원이 하는 일이란 주로 독수리들을 돌보는 일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외부 침입자나 깽판을 놓으려 하는 놈들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왜냐 하면 강호에서 조금 잔뼈가 굵은 자라면 후흑문을 건드려서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기본 상식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다른 일은 없겠지?”

심온은 언제나 그러하듯 반말을 찍 갈겼다. 그건 십 년의 수련 과정 중의 하나이기도 했던 것으로 만일 존댓말을 하는 경우엔 사부의 혹독한 처벌을 감수해야만 했다.

“하아, 언제 물어보시나 했습니다.”

두 사람이 앉은 곳은 산 중턱에 자리한 가옥의 평상이었다. 접수당원들과 담유설은 그 주변의 평상에 앉아 흐드러지게 술판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으잉?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엽상이 자랑이라도 하듯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신기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동작이었다.

“두 가지나?”

“그렇다니까요. 그중 하나는 어이없음의 최고봉을 달리는 일이랍니다. 카아! 글쎄, 흑막 놈들이 시비를 걸어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온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애매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댔다.

그가 알고 있는 엽상은 유달리 살수들을 싫어했다.

언젠가 심온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엽상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엽상이 후흑문에 들어오기 전에 그는 화혈광마(火血狂魔)로 불렸다.

불타는 피[火血]란 그의 독문 무공이 화혈신공(火血神功)이었기 때문이며, 미치광이 마인[狂魔]이란 그가 정(正)과 사(邪)에 속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 관여하며 제멋대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런 엽상의 타협을 싫어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은 강호상에서 많은 오해를 낳았고, 또 원치 않는 원수를 만들게 되었다.

원래 세상사란 것이 꼭 옳은 것이 옳다 인정받는 것이 아니고, 또 그른 것이 모두 그르다고 판정나지는 않는 법이다.

적절한 타협과 외면이야말로 험한 강호를 편하게 살아가는 지름길이 되건만 엽상은 그렇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 막대한 돈을 들여 살인 청부 조직에 의뢰하기에 이르렀고, 그는 밤낮으로 살수들의 표적이 되어 살아갔다.

그의 무공은 눈이 부실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으나 살수들의 끊임없는 공격과 다양한 살해 시도에 의해 그는 결국 함정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목숨을 구한 이가 바로 후흑문의 전대 문주이자 심온의 사부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엽상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은혜자가 아무 말도 없이 등을 돌리고 제 갈 길을 가려 하자 힘을 다해 존성대명을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따뜻한 시선과 정겨운 말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었다. 험한 주먹과 발길질이 무참히 가해졌다. 간신히 살수들에게서 죽음을 면했던 엽상은 그때 거의 죽을 뻔했다.

엽상으로서는 자신이 왜 맞아야 하는지 맞는 와중에도 생각해 보려 했지만 도무지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자신이 한 말이라곤 고작 존성대명을 알고 싶다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얼마나 맞았을까. 엽상의 마음속 질문을 듣기라도 한 듯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정작 이유를 듣고 난 엽상은 그만 태풍에 휩쓸리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이유란 것이 처음 봤는데 다짜고짜 이름을 묻는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엽상은 길길이 날뛰며 외쳤다.

“당신은 그럼 왜 처음 본 나를 구해준 겁니까? 이름 물어본 것보다 사람 구해준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닙니까? 게다가 사람을 구해놓고는 죽일 듯이 패버리면 어쩝니까? 그러다 정말 죽으면 무슨 낭패냐구요!”

“내 맘이야. 너, 나보다 싸움 잘하냐? 한 번 붙어볼래?”

순간 엽상은 그 뻔뻔한 말투에 큰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감동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의 심령은 크게 외치고 있었다.

‘바로 이 사람이다. 이 사람과 함께해야 한다. 이 사람만이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다.’

원래부터 엽상이 좀 특이한 인간인지라 그는 자신이 모셔야 할 분으로 후흑문주를 확정했다. 후흑문주는 연신 따라오지 말고 꺼지라면서 발길질을 가했지만 엽상은 맞아가면서도 꿋꿋이 그 뒤를 따랐다.

그 와중에 그가 포기하지 않은 것은 때리면서도 결코 기절시킬 정도로는 때리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결국 허락한다는 것이나 어느 정도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려는 뜻 같았다.

그 뒤 엽상이 만난 사람이 희락동자 이호였다.

엽상은 이호의 진면목을 못 알아보고―알아볼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함부로 ‘꼬마야’ 라고 불렀다가 그야말로 복날의 개처럼 얻어맞았다.

그러나 그 험한 구타 중에도 엽상은 기분이 좋았다. 그가 변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주 이 인간들이 워낙에 특이한지라 도리어 자신이 평범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굉장히 특별하고 괴상한 자라고 생각했으나 후흑문에 정식으로 들어온 후로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얼마나 큰 위안을 받았는지 모른다.

이렇듯 엽상이 후흑문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살수들 때문이었건만 흑막의 살수들이 시비를 걸어왔다는 것에 심온은 그 뒷이야기가 자못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래서?”

“처음엔 단순하게 생각했었답니다. 흑막주가 고민했던 것과 비슷한 사연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크크, 그래. 흑막주 그 괴상한 작자가 의뢰를 했었지.”

“하하하, 그 답장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혹시 그거 때문에 흑막주가 열받아서 시비를 거는 건가?”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흑막주가 세상을 떴으니까요.”

“으잉? 그게 무슨 말이야?”

“저도 이번에 그놈들을 고문하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만 어쨌든 죽은 건 확실합니다.”

“속병이 도졌나? 그 인간, 마음이 모질지 못하더라구.”

정녕 심온은 흑막주가 자신의 농담으로 범벅된 충고를 곧이곧대로 실천하여 도끼에 찍혀 죽었다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온 건 철저히 우리에게 시비를 걸기 위함이었지 뭡니까?”

“허허, 이놈들이 뭘 잘못 처먹었나?”

“처음 한 놈이 와서는 서신을 거의 천 장 정도를 뿌려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헉, 그런 망할 놈들이.”

“수리들이 이런 경우를 처음 겪는지라 아주 돌아버리려 하지 뭐겠습니까? 그래서 냅다 쫓아가서 조져 놨죠. 한 시간 정도 이리 틀고 저리 조이니까 흑막이라고 실토를 하더군요. 근데 이놈이 하는 말이 개인적으로 기분이 상한 일이 있어서 화풀이하려고 왔다고 하더군요. 저는 얼마 전에 흑막주도 나름의 고민이 있어 이곳에 온 것도 있었기에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돌려보냈죠. 흐흐, 제 성질도 많이 죽었습니다.”

“근데 또 온 거야?”

“그렇죠. 이 망할 놈들이 또 온 겁니다. 이번에는 더 황당한 짓거리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놈들이 암기를 던져 수리를 공격하더란 말입니다.”

심온은 아까처럼 놀라진 않았다. 도리어 이런 일에는 사부의 조련을 철저히 받은 탓에 암기를 피하는 건 어렵지 않은 독수리들이었던 것이다. 도리어 천 장의 종이가 뿌려졌을 때 그것을 부리로 물고 다리로 낚아채려고 발광하는 것이 진정 고생스런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심온은 그저 ‘허허’ 하는 표정을 지었고, 엽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다섯 놈을 잡아다가 일단 족쳤죠. 두 시진 정도 족쳤을 겁니다. 입을 열더군요.”

“그렇게 빨리?”

“흐흐, 놈들이 그러더군요. 배가 고파서 독수리를 잡아먹으려고 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다섯 시진을 냅다 조져 버렸죠.”

“음, 그래?”

그제야 좀 납득이 간다는 심온이었다. 후흑문에 시비를 거는 데 어설픈 녀석을 보낼 리 없고, 그렇다면 고작 두 시진 만에 모든 것을 실토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데 그 녀석들이 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지 뭡니까? 새로운 막주가 취임식에서 선포하기를 후흑문을 뛰어넘는 것이 목표네 어쩌네 했다고 말입니다.”

“뭐 그런 미친놈들이 다 있어? 뛰어넘다니? 우리가 무슨 담벼락이야? 왜 우릴 가지고 지랄이야, 지랄은.”

심온은 지랄이란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옆에서 진짜 지랄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담유설이 술에 절어서는 깽판을 치고 있었다.

그 광경에 엽상이 허허거렸다.

“진짜 방종당주답군요.”

“그렇지. 술만 마시면 아주 개가 된다니까. 저러다 쭈쭈 먹겠다고 하는 건 아닌지 몰라.”

“쭈쭈요?”

“어? 어. 그런 게 있어.”

“저… 혹시 문주님, 훗날을 약속하신 분인가요?”

“허억! 그게 무슨 저주냐?”

“어째 더 놀라시는 것이 아주 수상한데요?”

“확 그냥! 아니라니까 그러네!”

“좋습니다. 뭐, 그렇게 믿는 것으로 치고요.”

“음마?”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어쨌든 흑막 놈들은 정말 손을 좀 봐줘야겠군.”

“맞습니다. 가만 두면 안 됩니다. 아주 기어오를 거라구요.”

“그래, 또 하나는 뭐지?”

“삼 일 정도 되었네요. 이상한 사람 둘이 뭔가 사연이 가득 담긴 얼굴로 절벽 위에 서 있다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돌아서는 겁니다.”

“동행인가?”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오는 시간도 다르고, 또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으니까요.”

“희한하네. 이거 좀 구미가 당기는걸.”

“마침 지금 시각이면 거의 올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럼 한 번 만나볼까?”

그러면서 심온은 아직도 깽판을 치고 있는 담유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엽상이 빙긋 웃고 말했다.

“제가 해결할까요?”

엽상이 곁에 세워진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흐흐, 그것 가지고 되겠어?”

심온은 바닥에서 짱돌을 들어 올렸다.

“하하하하!”

“푸하하하!”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는 몽둥이와 돌을 내려놓고 절벽 위로 향했다.

***

6. 그들의 사연

심온과 엽상이 후흑애의 절벽에 올라섰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간단히 계획을 수립한 상태였다.

나의 허물을 먼저 드러내어 상대방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고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그렇게 약 일 식경가량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멀리서 두 개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두 발자국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걷고 있었는데 아무 대화도 없었다.

“저들입니다.”

엽상이 전음으로 알려왔다.

“음, 좋아. 잠시 후 시작한다.”

나타난 두 사람은 부근에 자리를 잡고 하염없는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잠시 동안 절벽 위의 네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머릿결과 옷이 흩날리지 않았다면 정교히 깎은 석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었다.

“휴우~”

한순간 심온이 적막을 깨뜨렸다.

“이 답답한 마음을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사연의 절벽에 내 고민을 던지느니 차라리 이 몸을 절벽 아래로 내던지고 싶구나.”

“공자, 그리 심약한 말씀을 하시면 어쩌십니까?”

만류하는 엽상의 말엔 온통 근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진정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정작 이곳에 오고 나니 허망함만이 더하는구나.”

가슴으로부터 울리는 깊은 탄식에 절벽 위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시금 정적이 주변을 휘돌았다.

이번에도 정적을 깨뜨린 건 심온이었다.

“두 분도 무슨 사연이 있으신 게로군요. 비슷한 처지인가 본데 제 사연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심온은 그들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혹시 두 분은 순심선행대전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물론 들어보셨을 겁니다. 강호를 떠들썩하게 한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끝이 났는지 아시지요? 마지막에 여덟 명이 남았고, 다시 그들 중에 일곱이 떨어졌답니다. 그리고 최후에 남은 소년이, 허허허, 기가 막히게도 제 동생이랍니다.”

심온은 말을 하면서 두 사람의 반응을 점검했으나 좀체 귀를 기울이는 낌새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현상금이 걸려 쫓기고 있지요. 우습지 않습니까? 순심선행대전은 선한 자를 뽑는 대회이었건만 그 대회가 도리어 가장 음산하고 깊은 심기로 악을 꾀하는 자를 가려내는 대회가 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후에 생각하니 어쩌면 하늘의 높은 뜻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더군요. 저희 집에서는 그래도 아들인지라 찾고 있습니다만 찾는다 해도 걱정이지요. 그 아이를 숨기도 있는 것도 죄가 될 테니까요.”

“공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세상엔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많으니 이제 그만 하시죠.”

엽상의 이 말은 지금은 경청하고 있는 두 사람의 입을 시원스럽게 열게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내 지금 죽는다 해도 상관없으니 세상의 눈과 귀가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내 말을 가로막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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