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사흘째를 맞아 떠날 채비를 할 때쯤 심온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먹고 노느라고 정작 이곳에 온 목적을 잊고 있었음을 상기한 것이다.
“사숙, 생일 선물 주셔야죠.”
“음, 그건 내 생각해 둔 바가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넌 조금 기다려야 할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뭔가 거창해 보이는 걸요?”
“하하하, 거창하긴 하지. 앞으로 한 달 정도 뒤에 서역으로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그곳에 여행 중인 통증왕(痛症王)이 재밌는 게 많다고 전갈을 보냈지 뭐냐. 그 작자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 보면 틀림없이 재미는 있을 것 같더구나. 뭐, 만약 재미없으면 아주 갈아 마셔 버릴 생각이다. 그래서 이번 길에 통증왕을 만나면 네게 몇 가지 재주를 가르쳐 달라고 말해 볼 참이다.”
심온의 얼굴에 환희가 넘쳤다. 통증왕(痛症王)이라면 칠대기왕(七大奇王) 중 한 명으로 고문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였다.
그의 고문 수법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이어서 심온이 그의 고문 수법 중 하나라도 익혔으면 좋겠다고 지나는 말로 한 것을 사숙이 기억하고 있다가 길을 열어준다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사숙,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방광급속완충(膀胱急速完充), 항문압박공(肛門壓迫功) 정도가 좋지 않을까?”
“하하, 이름만 들어도 벌써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걸요.”
“아무렴. 내 장담하건데 네가 그 두 가지만 익혀도 이 세상에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옆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담유설이 끝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방광급속완충이라면 방광을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 버린다는 뜻인가요? 이, 이거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데요.”
“나도 궁금해서 그 인간한테 물어본 적이 있었단다. 그 작자가 그러더구나. 인간의 몸은 칠 할이 물로 이루어졌기에 그 물 가운데 아주 적은 양이라도 방광에 채워 넣는다면 방광이 감당하기 힘들게 된다고 말이다. 그럼 어떻게 되겠냐? 가득 찼으니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냐? 그럼 어디에다든 싸야 하는 거거든. 그런데 문제는 한 번 소변을 봤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야. 비워내면 또다시 방광이 가득 차고 비워내면 또 가득 차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계속 싸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아주 몸에 있는 물기란 물기가 싸그리 빠져나오게 된다는 것이지. 탈수증은 기본이고 더 나아가서는 아예 사람 자체가 모래처럼 푸석푸석해져 버린단 말이다. 이래가지고서야 견뎌낼 사람이 있겠느냐? 여기에 약간만 응용을 한다면 아예 오줌을 누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생각해 봐라. 계속 방광은 부풀어 오를 테고 그러다가 터져 버리기라도 하면 뱃속이 완전히 물바다가 되어버리는 거야. 아주 생각만 해도 지랄 맞지 않냐?”
“캬하~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군요. 사숙, 그럼 항문압박공은 어떻습니까?”
“응? 그런데 쟤는 왜 저러고 있는 거냐?”
이호의 시선이 닿는 곳엔 어느새 자리를 벗어난 담유설이 구토를 해대고 있었다.
“호오, 의외로 비위가 약한가 보네요.”
“그러게. 음, 항문압박공은 말이다. 이것도 방광급속완충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이건 그야말로 빠른 시간 안에 온몸의 힘을 빼버리는 것이라더구나. 처음에 여기에 당하면 묵직한 덩어리들이 나온다는 거야. 그리고 좀 지나면 묽은 설사가, 그 다음엔 아주 주르륵주르륵이라는 거야.”
거기까지 말했을 때 이제 슬슬 안정을 찾아가던 담유설이 또다시 ‘우웨엑’ 하고 거창하게 토를 했다.
“그래가지고선 완전히 몸의 기운을 쏙 빼놓는 거지. 근데 이건 고문도 고문이지만 내공 수련에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거야.”
“그럼 고문이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 독이 되었다가 약이 되었다가 그러는 게야. 몸의 찌꺼기들이 나오면서 몸 안의 탁기들을 모조리 배출하게 되니까 정순한 기운이 감돈다는 거지.”
“하하, 이건 그래도 어느 정도 연민이 가는 적에게 시전하면 좋겠군요.”
“그렇지. 당시엔 고통스러워 이를 갈더라도 나중엔 얼마나 고마워하겠느냐. 만나면 복수해야겠다는 생각보단 술 한잔 사야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걸.”
“하하, 역시 멋집니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가운데 담유설도 한마디를 보탰다.
“우웨에엑!!”
***
5. 접수당주 엽상
심온은 원래 예정했던 대로 사숙 이호에게 작별을 고한 후 후흑애로 향했다. 직선 길은 아니었지만 약간만 돌아갈 뿐이어서 그리 멀다고 할 순 없었다.
가는 동안 심온은 머리가 윙윙거리며 쉴 새 없이 울려 혹시나 귓구멍으로 파리 두 마리가 들어가 대뇌에서 소뇌에 이르기까지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파리를 창조한 건 담유설이었다.
그녀는 희락동자를 만나고 온 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하염없이 재잘거려 심온의 귓구멍에 파리를 연신 파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지친 심온은 계획보다 이른 시간에 객잔을 찾았다.
“작은 방으로 두 개!”
심온의 말에 점소이가 막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려고 할 때 담유설이 끼어들었다.
“돈 아깝게 왜 방을 두 개나 잡아요? 이봐요, 여기 방 하나로 주세요.”
심온이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싶어 멀뚱하니 담유설을 바라보았다.
이제까지의 여행길에서 그들은 단 한 번도 하나의 방에서 숙박을 해결한 적이 없었다. 어쩌다 방이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객잔을 만났을 때 심온이 농담 삼아 ‘그냥 여기 머물까?’라고 할 때면 담유설은 슬그머니 주먹을 들어 보이며 거부 표시를 해 다른 객잔을 알아보기도 했었다.
점소이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심온에게 다시 물었다.
“하나로 하시겠는지요?”
점소이는 심정적으론 하나를 잡는 것에 동의했지만 자신의 직업상 마땅히 두 개의 방을 잡는 것을 권해야 하는지라 다시 물은 것이었다.
심온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다시 담유설이 끼어들었다.
“어허, 물어볼 것 없수다. 어서 인도하기나 해요.”
“아, 네. 그럽지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두 사람이 막 점소이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휘우, 대단한걸. 세상이 어떻게 되려나. 이젠 여자들이 저렇게 설치니 말이야. 이거 좀 심한 거 아냐?”
희롱이 가득한 목소리가 객잔 안을 울리자 주위 사람들이 그동안 참느라 힘들었다는 듯 일제히 웃음을 터뜨려 객잔은 웃음바다로 변해 버렸다.
심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점소이를 향해 말했다.
“우린 먼저 올라가세.”
“네? 그래도 여기 소저는…….”
“저기 저 사람이 부르니까 가봐야잖아.”
“아, 네.”
점소이는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점소이의 직무 중에는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태반인지라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느릿한 걸음으로 앞장섰다.
“예쁘장한 아가씨는 안 따라가나?”
담유설이 뾰로통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하고 뒤따라가지 않자 희롱의 말을 던졌던 사내가 다시 염장을 질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동조자들이 한 마디씩 보탰다.
“술 한잔 하고 싶은가 보지?”
“새침한 얼굴도 아주 보기 좋은걸?”
“그래도 사내놈보단 낫군. 사내놈은 꽁무니를 빼잖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여. 세상 모든 여자들이 설치고 다니면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다구.”
“하하하하, 그것 괴이하면서도 일리가 있군.”
“이 친구야, 내가 언제 틀린 말 한 적 있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사이로 담유설이 뚜벅뚜벅 걸어 희롱한 사내의 탁자 앞에 섰다. 그는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고급스런 의복을 입고 있었다. 또한 그 옆자리로는 무복을 걸친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한눈에도 개인 호위인 것처럼 보였다.
“소저, 자리에 앉으시겠소? 내 한잔 따르리다.”
사내의 말에 주위는 웃음을 멈추고 어떤 대화가 오갈 것인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재밌냐?”
담유설이 툭 던지듯 하는 말에 순식간에 객잔의 공기는 싸늘하게 변했다.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을 뿐 아니라 그 말투의 신랄함이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은 불량배의 건들거림을 능가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람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담유설이 옆에 놓인 의자를 들어 사내를 그대로 찍어버린 것이다.
“재밌냐고!”
파악!
의자가 산산이 부서지고, 사내가 고꾸라지고, 그와 동시에 호위가 앉은 상태에서 일어나며 검을 그어갔다.
검(劍)의 선(線)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정확히 대각으로 흘렀다. 그 길대로라면 가장 신속하고 정확히 담유설의 목을 그을 수 있는 진로였다.
그 순간 담유설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삼백육십 도를 돌았다. 그저 선 채로 돌았다면 검은 앞 목 대신 뒤쪽 목을 베었을 테지만 담유설이 빠르게 회후퇴법(回後腿法:돌려차기와 비슷한 다리 공격)을 시전한 까닭에 검은 하릴없이 허공을 갈랐고, 그사이 담유설의 발은 호위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호위의 몸은 실 끊어진 연처럼 훨훨 날아 벽면에 부딪쳐 쓰러졌다.
이렇듯 담유설이 거짓말처럼, 하지만 도저히 믿지 않을 수 없게 두 사람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자 사람들의 눈은 경악으로 물든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까 웃었던 놈들 모두 대가리 박아!”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객잔 안의 손님들은 의자를 밀치고 나와 머리를 박느라 정신이 없었다.
담유설이 모퉁이에서부터 쭉 훑어보자니 주인장과 세 명의 점소이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너흰 뭐야?”
그들은 화들짝 놀라서는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담유설은 의자의 부러진 나무 다리 하나를 들고는 손바닥에 탁탁 치면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이놈들아, 도대체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은 겁니까? 이렇게 살면 못 써요. 알겠어요? 부모님이 욕을 먹는다는 것, 니들 정말 모르겠어요? 여자라고 함부로 막 대하는 건 정말 싸가지없는 짓이랍니다. 생각해 보세요. 니들을 낳아주신 분부터 여자잖아요. 모든 여자들은 예비 어머니들인 것이죠. 그러니까 같잖게 보고 막말을 일삼으면 정말 이 누님은 화가 나요. 막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니들 모두 이해하겠어요?”
“이, 이해합니다, 누님.”
구석에서 한 사람이 용기있게 대답하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서 누님을 외쳤다.
“이해한다니 이 누님 마음이 기뻐요. 여러분들의 개 싸가지는 아마 이 누님이 힘이 좀 있다는 걸 알았으면 발휘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척 보니까 만만하게 보인 거죠. 얼굴 붉히고 수줍어하면서 쪼르르 달려갈 줄 안 거예요. 그런 엿 같은 마음 자세는 진정 이 시대를 좀먹는 썩은 사상이란 걸 아셔야 해요. 상황에 따라 엿가락 늘어나듯 자신의 의식이 늘어나서는 안 된단 말이지요,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 이해되는 거죠?”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물론입니다, 누님.”
“존경스럽습니다.”
처음보다는 다양한 대답이 나왔다.
그러다 누군가가 아부가 지나쳐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
“사랑합니다, 누님.”
그 순간 그나마 좋아지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아직까지 정신 못 차린 싸나이가 있었군.”
담유설은 그곳으로 가서는 들고 있던 몽둥이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퍽퍽 하고 울리는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모든 이들은 소리에 맞춰 몸을 움찔거렸다.
“내 말을 건성으로 듣지 마세요. 그러다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망의 길로 달음질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음,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엿가락까지 이야기하셨습니다.”
“이런, 이걸 그냥 확! 막 생각나려던 참인데 왜 참견이야, 참견은.”
그러면서 담유설은 다다닥 달려가 조언한 사내의 볼기짝을 난타했다.
“으윽! 죄, 죄송합니다.”
“좋아, 어쨌든 이제 슬슬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어요. 이 세 가지는 죽는 날까지 반드시 명심해야 해요. 첫째, 여자라서 무시하지 말 것. 둘째,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곧 어머니가 될 사람이고 결혼한 여자는 이미 어머니이니 그들을 존중할 것. 셋째, 너희들의 어머니께 효도할 것. 기억할 수 있겠어요?”
“기억할 수 있습니다.”
“평생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겠습니다.”
“지금 당장 어머니를 뵈러 가겠습니다.”
“누님, 존경스럽습니다.”
담유설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제 다들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내가 말한 세 가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잊는 거예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가 없어요. 아시겠어요?”
“네!”
“자, 일어나서 각기 자기 일을 하도록 해요.”
모두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눈치를 봐가면서 각기 자신들의 탁자에 앉았다. 그들은 연설하는 내내 머리를 박고 있었던 터라 머리 가운데 털들이 꾹 눌린 상태가 되어 하나같이 우스꽝스런 모습들이었다. 게다가 피가 머리로 쏠려 피부가 시뻘게진 탓에 꼬락서니는 말이 아니었다.
담유설은 쪼르르 객잔의 주인장에게 다가갔다.
“방으로 식사하고 술상을 좀 올려주세요.”
슬쩍 홍조를 띠고 부끄러운 표정으로 하는 말에 주인장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면서 더듬거렸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누님.”
그는 그제야 다 잊으라는 말이 생각나 실언했다고 생각해선지 갑자기 허둥댔다.
“아, 아니, 아가씨. 아니, 소저.”
“호호호, 아주 재밌는 분이시로군요. 그럼 전 이만.”
담유설이 몸을 돌려 객방으로 올라가자 주인장은 울상을 짓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제길, 어제 꿈이 정말 이상하더라니. 용이 나온 것까진 좋았는데 막판에 이 미친 용이 지렁이한테 청혼을 할 게 뭐야.’
담유설의 활약(?) 탓에 식사와 술상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돈은 염려하지 마시고 마음껏 드십시오’라는 점소이의 말에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동이째로 술을 마셔댔다. 급기야 자정을 넘길 쯤엔 술이 두 사람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고, 얼마 못 가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널브러져 잠이 들었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후후, 이런 걸 죽음의 잠이라고 하지.”
“너무 간단히 죽이는 것 같아서 서운한데요.”
“아니야. 최대한 소리없이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좋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장검을 멘 다섯 사람. 그들은 심온과 담유설이 잠든 이층 객실의 외곽 담 너머에서 죽음의 예고장을 쓰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저녁 나절에 담유설에게 맞아 날아간 호위무사였다.
얼마나 잤을까.
심온은 잠결에 가슴 쪽이 서늘한 느낌이 들어 부스스 눈을 뜨며 손으로 가슴께를 만지다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