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눈에 불을 켜고 폭풍처럼 노를 발하자 순간 담유설이 깜짝 놀란 토끼눈이 되어 바라보다가 금세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죄, 죄송해요. 이렇게까지 문주님의 기분이 상하실 것이라곤 생각을 못했습니다. 흐흐흑.”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살짝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도리어 심온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심온은 마땅히 담유설의 다음 행동으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야, 네가 문주면 다야? 그래, 어디 한 판 붙어볼래?’ 정도의 반응을 기대하고 그에 대한 응수를 대비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전례에도 없는 눈물을 흘리자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욱이 문제는 여자의 눈물에 심온이 한없이 약하다는 점이었다.
“담 당주, 미, 미안하네. 참았어야 하는데 내가 잘못했어.”
그러면서 심온은 담유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담유설이 느린 동작으로 고개를 들어 심온을 바라봤다. 서글거리는 눈은 눈물을 쏟고도 또다시 눈물을 그득 담아냈다.
“야, 너, 속은 거냐? 벼어엉신~ 크크크크.”
담유설은 어느새 한쪽 입 꼬리를 올리고―그러는 와중에도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비웃음을 가득 담은 채 말했다.
“커억! 이, 이런…….”
심온은 가슴을 움켜쥐고 그대로 허물어졌다.
일 식경 후.
“자자, 문주님, 그만 엄살 부리고 어서 일어나세요. 아이, 어서요.”
가슴을 움켜쥐고 심근경색 초기 증세를 호소하던 심온을 향해 담유설이 콧소리를 내가면서 애교스럽게 격려했다.
사건의 전모를 아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러한 가증스러운 변모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격려가 아니라 짓밟음이라고, 애교가 아니라 험한 욕설이나 진배없다고 핏대를 세우며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까? 하하하, 일어나야지. 내가 좀 많이 지체했지?”
심온은 담유설이 건넨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켜서는 힘차게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럼요.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도록 해요.”
“담 당주가 있어 힘을 내지 않을 수 없군. 자, 가지.”
두 사람은 나란히 선 채 패기 넘치는 시선으로 전면을 노려보다가 약속이나 한 듯 신형을 날려 나아갔다.
두 사람은 경공을 펼치는 중에 지난날 순심선행대전 때의 이야기며, 어제 있었던 객잔에서 시비를 돌아보면서 껄껄, 호호거리면서 흥겨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진정 그 대화는 유쾌한 중에 상대를 배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지나치게 가볍거나 또한 진중함으로 흐르지 않는 적절함을 갖추었다.
“당시 문주께서 진법 안에서 진룡표국의 국주와 정파무림의 수뇌들을 향한 일침의 통쾌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으신지 저는 그저 탄복할 따름입니다.”
“하하하, 그렇게 통쾌했단 말인가? 지금에야 하는 말이네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다네. 근데 이대로 끝난다면 꼭 밥을 먹다가 만 것 같은 기분이 들겠다 싶지 뭔가. 게다가 우린 진룡표국의 배후에 대해서도 전혀 알아내지 못했으니 이게 또 억울한 거야.”
“호호호, 그렇군요. 정말 당시 바라보던 사람들의 안색이 가관도 아니었지요. 호호호호.”
두 사람의 대화는 조화롭게 어울리는 화음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대화의 껍질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그 속에는 무시무시하고 사나운 이빨이 번뜩거리고 있었다.
‘호호, 이 녀석, 그래도 제법인걸. 꽤 참을성도 있고 말야. 그렇지만 녀석아, 넌 뭘 해도 내 밥이란 걸 잊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킬킬킬킬.’
‘그래, 실컷 웃어라. 너의 웃는 낯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후후, 감히 당주 주제에 문주를 희롱해?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마.’
“호호호호, 하아, 날씨가 너무 좋지 않나요?”
“그렇군. 참 마음까지 풍요로워지네그려.”
“호호호호!”
“하하하하하!”
이렇게 어딘가 모자라고 또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두 인간은 그렇게 웃고, 이를 갈고, 조롱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설마 여기는 아니겠죠?”
담유설의 말투는 ‘문주님, 이거 농담이 좀 심하군요’라는 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보이는 모옥은 초라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허술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후흑문주의 사숙이라면 고풍스러운 외관에 방이 적어도 십여 개는 넘고, 부리는 시종들이 오십여 명은 족히 되어야 하지 않나 싶었건만 이건 어디 애써 좋은 점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는 외관이니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맞는데?”
쾌활하게 말을 받은 심온은 대문 앞에 서서 안쪽을 향해 크게 외쳤다.
“사숙, 심온입니다! 어디 계시는 겁니까?”
말이 끝나자 마당 건너 집 안쪽의 문이 빼꼼히 열리면서 이제 십 세를 막 넘겼을 듯한 어린 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종종걸음을 치며 걸어나오는 모습에 담유설은 초라한 집에 실망하고, 이젠 어린아이가 나서자 맥이 탁 풀렸다.
“이봐, 꼬마야. 어른은 안에 계시니?”
이때 어린 동자는 거의 문 가까이 이르렀기에 문을 열면서 대답은 하지 않고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담유설을 바라보았다.
“하하, 녀석. 그렇게 쳐다보니까 제법 귀여운걸.”
찰싹!
소리가 난 곳은 담유설의 뺨이었고, 갈긴 건 어린 동자였다.
“야! 이 어린 놈의 자슥이 버르장머리없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담유설은 채 울화를 다 터뜨리기도 전에 다시금 정신없이, 무차별적으로, 맹렬하게, 사정없이 뺨을 가격당했다.
그리고 그녀는 맞는 와중에서 아프다는 감각과 함께 비로소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가 꼬마에게 맞고 있다. 내가 맞고 있을 사람이던가? 아니지, 그럼 나는 왜 맞고 있는 걸까? 꼬마가 나보다 더 센 거지? 근데 이렇게 강할 수 있는 걸까? 하하, 무슨 소리야? 그건 말도 안 되지. 문주 놈의 말이 문득 생각나는군. 사숙이 매우 특별하다고 했었지, 아마? 설마 이 꼬마가 사숙? 에이, 이건 너무 특별하잖아. 그럴 리 없다구. 내가 알고 있기로 외경이비 중 희락동자를 제외하곤 이런 모습일 수가 없지. 허허, 근데 말이야. 이 양반이 희락동자가 아니라곤 어떻게 확신하지? 커억! 그렇군. 제기럴.’
이런 단상이 끝날 때쯤 어느새 동자의 사나운 손길도 멈춰졌다.
쭈우욱.
담유설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피를 닦아내곤 침을 꿀꺽 삼켰다. 코피가 목으로 넘어가 맛이 비릿했다.
“후흑문의 방종당주 담유설이 인사 올립니다. 아직 강호의 경륜이 짧아 고인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한 죄 용서하십시오.”
담유설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음성이었다. 다시금 손이 날아들지 않자 자신의 추측에 확신이 생긴 담유설이 말을 이었다.
“저는 이곳에 오는 내내 문주님께 공손히 여쭈었답니다. 어르신이 어떤 분이시며 얼마나 대단한 명성을 지닌 분인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지요. 한데 문주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네, 지금 저 표정처럼요.”
이때까지 심온의 얼굴엔 화사한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당했던 고초에 대한 보복을 자신은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풀 듯 해소해 버렸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담유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저 특별한 분이라고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거의 문주로서 수하를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골탕 먹이려고 작정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말입니다만… 전 말이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맨 끝말을 길게 고함치듯 하면서 담유설은 신형을 날려 심온을 덮쳤다.
그녀는 자신이 맞았던 그대로 심온의 뺨을 사정없이 연속으로 후려갈겼다.
“이 자식아, 문주면 다냐? 옆에서 기침이라도 해서 일깨워 줘야 할 것 아니야! 전음도 있고, 등에다 손가락으로 글을 쓸 수도 있고, 아주 아주 많잖아. 근데 그냥 생글거리면서 웃기만 해? 이 자식, 알고 보니 아주 악질이야!”
무차별적으로 왕복하는 손바닥에 심온이 대책없이 가격당하는 꼴을 보며 어린 동자는 처음엔 황당함에 겨워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박수를 치면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푸하하! 재밌다, 재밌어! 바로 그거야! 문주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은 아주 혼쭐을 내줘야 해! 지가 문주면 다야? 아주 죽여 버려! 우후~”
한참 동안의 뺨 치기가 끝난 후 담유설은 어린 동자, 아니, 희락동자 이호가 건넨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야호’를 외쳤다.
그러나 양 볼이 새빨갛게 부어오르고 쌍코피를 주르륵 흘리며 아랫입술을 깨무는 심온은 당장이라도 이 서글픈 심정에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 안면을 씰룩거렸다.
그가 사숙을 만나러 온 것은 사실 생일 선물을 받기 위함이었다.
한 달 뒤에 있을 자신의 생일에 사숙이 착실하게 찾아올 리 만무한지라 미리 찾아뵙겠노라고 서신을 띄우고서 이렇게 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 만남의 주인공인 자신은 온갖 모욕을 당하고, 맞고, 지금에 이르러선 왕따를 당하니 서럽기 그지없었다.
“사숙, 제가 이렇게 맞았는데 어떻게 기분이 그렇게 좋아 보이시는 겁니까?”
심온이 볼멘소리를 내뱉자 희락동자가 그 말똥거리는 눈망울을 떼구르르 굴리더니 담유설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린 들어가자.”
“호호호, 그러는 게 낫겠어요.”
신난 걸음을 옮기면서 희락동자는 뒤도 안 돌아보고 말했다.
“너도 들어오려거든 따라오고 아니면 얼른 집에 가라.”
“사숙!!”
밖에서 보던 풍경과 달리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되고 안정적인 공간배치를 이루고 있었다.
세 사람은 탁자에 앉아 희락동자가 손수 타온 주약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흠, 그러니까 네가 정녕 변왕의 딸이란 말이냐?”
듣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희락동자가 말했다.
그러나 정작 믿기지 않는 건 담유설 쪽이었다.
그녀는 머리로는 틀림없이 눈앞의 어린 동자가 외경이비(畏敬二秘:두려운 중에 공경해야 할 비밀스러운 두 사람)로 불리는 초절정의 고수 중 하나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아직 다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표정이나 목소리가 영락없이 어린아이라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볼따구를 꼬집어 흔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손목이 날아갈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지라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은 강호의 명망있는 분들을 많이 알고 계셨지만 저는 나이가 어려 많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어르신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전대 후흑문주님에 대해서도 제대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히히, 네 아비는 아마 네게 무공을 전수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런 이야기를 할 여가가 없었겠지. 덕분에 너는 역용에 대해서는 상당한 경지에 오르지 않았더냐.”
담유설은 희락동자가 단 한 번의 견식도 없이 그저 자신을 대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놓인 무공의 경지를 파악하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애써 기색을 감추고 답했다.
“과찬의 말씀에 이 후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태산과 같습니다. 어르신께서 많이 깨우쳐 주십시오.”
“하하, 아주 겸손하구나. 이 녀석하고는 아주 딴판인걸.”
희락동자 이호는 손가락으로 오른쪽 옆에 앉은 심온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아이, 간지러워요.”
“네가 진짜 간지러운 것이 뭔지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한 번 시작해 볼까?”
“앗, 항복입니다! 절대적으로 항복이라구요!”
심온은 거의 경악을 하면서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뿐 아니라 엉덩이까지 뒤로 쭉 내미는 품이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였다.
그 광경을 보면서 담유설은 대충 짐작이 갔다.
다른 어른들이 간질이겠다면 그건 그냥 장난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어쩐지 희락동자의 경우엔 끝까지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의 상대가 게거품을 물고 계속 웃다가 끝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사정을 할 때까지 가게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런 구경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으나 불행히도 희락동자 이호의 손은 거두어졌다.
“좋아, 항복이 빨라서 봐주는 거야. 그 대신 그동안 뭘 하고 지냈는지 한번 읊어보거라. 히히.”
티없이 맑게 웃으면서 이호는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차를 홀짝거리며 다리를 앞뒤로 굴렸다. 그 모습은 어린 아이가 어른들과 어쩌다 자리를 같이하게 되어 까부는 모습과 영락없이 같아서 담유설은 하마터면 ‘풋’ 하고 입에 머금고 있던 찻물을 쏟을 뻔했다.
‘담유설아, 조심해야 해. 이 어린 꼬마는 저 대책 안 서는 문주도 설설 기게 하는 사람이란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조차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람이야.’
그녀가 속으로 다짐을 할 때 심온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심온은 기연 서적에 빠져 행방불명된 이들을 찾아나섰던 이야기며, 그 뒤 너무 화가 나서 기연 서적을 전문적으로 제작, 유통한 필사방을 찾아내 혼쭐을 내주었던 일 등을 흥미진진하게 설명했다.
그때마다 이호는 다양한 반응으로 심온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던 걸 가까스로 낚아챘다는 말을 할 땐 두 손을 꼭 움켜쥐고 목을 움츠린 채 긴장했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 매일 밤 육체 봉사를 하며 나날을 보낸 화명운의 이야기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은 탁자를 두드리면서 웃겨 죽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필사방인들이 글쟁이들을 잡아다 혹사시켰다는 대목에서는 무척 화가 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쌍심지를 곤두세웠다.
그중 가장 격정적인 반응은 조성의 어머니가 심온을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린 때에 나타났다.
이호는 너무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다시 한 번 진짜냐고 물을 정도였다.
“물론 진짜죠. 제가 감히 사숙 앞에서 허풍을 떨겠습니까. 게다가 그 일은 제가 굳이 자랑할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 그렇지. 역시 대단한 거야. 그치? 어머니란 존재 말이야.”
“그럼요. 이미 수년 전에 뼈저리게 느꼈지만 지난번에 겪고 보니 새삼스럽더라니까요. 제가 무슨 공깃돌이 된 줄 알았으니까요.”
이 대화에서만큼은 담유설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일에 관해 들었지만 그냥 웃자는 뜻으로 꾸민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전혀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여자가 문주를 날려 버리는 일은 너무 터무니없었기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웃긴 이야기쯤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외경이비 중 한 명인 희락동자가 진중한―그래봤자 어린아이의 귀여운 심각함에 불과했지만―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니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