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저 문신을 제거할까 합니다만…….”
“그래요? 좀 아플 텐데요?”
“괜찮습니다.”
“그럼 한 번 봅시다. 어, 아니 왜 바지는 벗는 거요?”
“그게 벗어야만 문신이…….”
“아, 그런 것이구려. 난 또 왜 그러는가 싶어 깜짝 놀랐구려.”
스르륵, 스륵.
“뭐, 뭐요? 속옷까지 벗는 거요?”
“그게 말입니다. 여기에 문신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니, 뭐야? 이 새끼, 이거 완전히 변태잖아! 썩 꺼져, 자식아! 내가 네놈 고추를 만지면서 문신을 제거해야겠냐, 이 고깃 덩어리 같은 놈아? 썩 꺼져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갈로 문지르든지 솔잎으로 문지르든지, 좌우지간 피가 나도록 문지르든지 너 알아서 하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이 망할 놈아!”
이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비참한 대화는 그저 상상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때의 비참함은 이루 형용하기 힘들 것이다.
필사방주 노제강은 그 뒤 한 시진 정도가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의복을 걸치고 따뜻한 차를 마신 후였지만 결코 예전의 그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넋을 빼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수하들은 방주의 슬픔이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방주의 귀와 눈을 피해 속삭였다.
“왠지 알 것 같아.”
“나도 그러이.”
“얼마나 슬플까?”
“말로 표현이 되겠나?”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다니까.”
“시술을 받을 때 얼마나 끔찍했을까?”
“생으로 내시가 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지.”
“미친다, 정말.”
“하, 대체 우리는 어떤 놈들한테 걸려 버린 것일까?”
“알면 뭐 하겠나?”
“하긴.”
방주의 처참한 등장 이후 탈출했던 다른 단주들도 한 명씩 돌아왔다.
물론 그들의 의지로 돌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섭외단주 금율은 나무에 매달린 채로, 홍보단주 정포는 길바닥에 버려진 채로, 수호단주 장송수는 바위에 걸쳐진 채로 발견되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 속에서 발견되었지만 공통점은 모두 벌거벗은 상태라는 것과 방주와 같이 성기에 육(肉) 자 를 새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망쳤던 이들이 모두 육적으로든 심적으로든 처참한 몰골로 돌아온 뒤로 필사방인들은 바른 사나이들이 되었다.
물론 그 뒤부턴 후흑문의 고수 중 그 어느 누구도 뒤따르며 감시하는 이가 없었으나 그들은 하늘의 눈을 대하듯 두려워하며 명령을 시행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
3. 그림자 고수 천암
무학(武學)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다.
그 길을 찾아감은 수백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천재라 할지라도 망망대해(茫茫大海)나 끝없이 펼쳐진 대지(大地)를 걷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어서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마는 것이다.
이런 무학의 과정을 진정 뼈가 저릴 정도로 사무치게 느낀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천암(千暗)이었다.
천암은 처음 동혈로 추락하게 되었을 때를 떠올리며 절벽을 따라 올라갔다. 깎아지른 절벽이었지만 그에겐 도리어 내리막길이나 다름없을 만큼 손쉬운 길이었다.
십오 년 전에 보았던 산야와 지금 보는 산야는 크게 다름이 없었지만 그의 눈엔 명백히 달라 보였다.
과거의 산은 푸르고 거칠며 거대했지만 이젠 감싸주고 싶을 만큼 연약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산은 과거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고 정작 커져 버린 건 그 자신이었으나 그는 이러한 광경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한낮의 햇살이 바람결을 타고 정겹게 비춰왔다. 그의 색이 바랜 청색 의복이 바람에 나부끼며 햇살에 드러나자 그의 면모는 가히 절세고수의 그것답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잠시 우뚝 선 채로 지난 칠 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천암(千暗) 그는 명석한 두뇌를 지니고 무공에 대한 열망이 남다른 피 끓는 젊음으로 소년기를 보냈다.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갈 때마다 천암은 세상을 내려다보는 대호(大虎)의 기상과 자유로운 날갯짓으로 하늘을 움켜쥔 응익(鷹翼:매의 날개)의 포부를 키워갔다.
마음을 기울이고 정성이 가득 차면 소망은 이루어지는가.
그는 스무 살의 생일을 맞아 산천을 유람하던 중 뜻밖의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산봉우리를 따라 사람 하나 정도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길을 지나다 급작스럽게 바닥이 붕괴되는 사고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그의 마음엔 만감이 교차했다. 이미 삼 년 전 부모님께서 산비탈이 무너지면서 세상을 떠나게 된 터라 자신까지 이런 사고로 죽는다 생각하니 원통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천암은 그리 호락호락 목숨을 내놓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의지의 발현 때문인지 손을 휘젓던 중 불쑥 튀어나온 돌 조각을 붙들게 된 것이다.
고수에겐 실오라기 하나만큼의 저항조차도 얼마나 요긴한 줄 모른다. 그 힘을 이용하여 몸을 튕겨낼 수도 있고, 물의 수면의 작은 출렁임만으로도 자신의 몸을 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천암의 무공 수준은 경신법이나 내공 따위를 거론할 입장조차 못 되는 것이었다.
그가 몸을 끌어 올리려 손아귀에 힘을 주는 순간, 튀어나온 돌부리는 속절없이 바스러졌고, 그의 몸은 하염없이 추락했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불행(不幸)으로 여겨진 그 추락은 곧바로 거대한 행운(幸運)으로 다가왔다. 그는 훗날 이러한 행운은 먼저 돌아가신 부모님이 돌봐주셨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다.
끝없는 추락으로 결국 온몸이 부서지는 충격 속에서 최후를 맞을 것으로 보였던 천암은 중도에 넝쿨에 걸리고는 그 탄력으로 절벽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동혈로 들어서게 되었다.
천암은 온몸이 욱신거리는 통증 속에서 이 동혈에 이른 것이 얼마나 대단한 기연을 만난 것인지 전혀 짐작조차 못했다. 단지 절벽을 다시 기어올라 가기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동혈 안쪽을 따라 걸어가며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는 통로 따윈 없었다. 그럼에도 천암은 뛸 듯이 기뻤다. 동혈 안에는 그토록 갈구해 온 무공 비급과 수많은 기이한 서적들, 그리고 무공을 익히기에 충분한 식량과 기이한 영약과 영초들이 즐비하게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천암은 무공 비급을 대략 훑어본 후 망연자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동안 일어서질 못했다. 또한 그의 눈은 대번에 황소눈이 되었고, 입은 귀 바로 옆까지 찢어지고 말았다.
그를 놀라게 한 건 첫 장을 넘기자 나타난 서장 내용 때문이었다.
하늘과 땅을 넘어서고 싶은가. 여기에 하늘을 가두고 땅을 쪼개는 거대한 힘이 담겨 있노라. 그대, 힘을 다한다면 능히 천고에 우뚝 서리라.
그날로 천암은 하늘을 향해 감사의 제단을 쌓은 후 무공 연마에 돌입했다. 뼈를 깎아내고 피를 짜내는 고통이 수반된 칠 년의 세월이 지났다.
어느덧 그의 나이 이십칠 세.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 시작된 연공은 이제 성숙함을 갖춘 나이로 그를 데려다 놓았다. 강산이 조금씩 모습을 바꾸어갈 칠 년여의 세월동안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다.
지난날을 빠르게 되돌아본 천암의 눈에 추억이 대롱거리며 매달렸다. 스무 살 생일을 맞아 선물을 받듯 기연을 얻은 그는 이십칠 세가 되어 오늘 다시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떼는 것이다.
그는 정파와 사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상을 지닌 터라 강호를 횡행하며 나름의 일가를 이루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가 출도 전 정한 좌우명은 이러했다.
―시비를 걸지 않는 자는 벌하지 않는다.
이 말인즉, 시비를 걸어오는 자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느긋한 걸음으로 산 이곳저곳을 구경하듯 내려오던 그는 문득 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딱히 정해진 산길을 규칙적으로 내려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가 밟고 가는 길은 엄연히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음…….”
그가 침음성을 흘린 것은 당연히 이어져야 할 길이 사라진 것 때문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참으로 어이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땅히 길이어야 하는 곳에 염치없는 어떤 인간이 밭을 갈아놓은 것이다. 상식없음을 초월한 몰염치의 극치였다.
그의 눈에 저만치 밭을 일구는 노인, 아니, 그냥 노인이 아닌 염병할 노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참으로 자기 이익만 아는 욕심 많은 영감탱이 같으니. 어찌하여 길에다 밭을 일굴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저 나만 잘살고 보자는 속셈인 거냐?’
마음 중심에서 울화가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강인한 무공 연마 후 강호 첫 출도인 지금 첫 번째 타도의 대상으로 밭을 일구는 노인을 개 패듯 팬다는 것은 기분은 한결 좋아질지 몰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모양새가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뒷날 무릎에 앉은 손자가 ‘할아부지, 무공을 배워져 제일 먼저 어떤 악당을 혼내주었쪄요?’라고 물을 때, ‘허허, 녀석. 그게 궁금한 게냐? 이 할아비는 말이다, 힘없는 농부를 아주 반 죽여놨단다. 손맛이 지리할 정도로 좋았지’란 식의 말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적당히 노인을 타이를 요량으로 밭의 채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 들어갔다.
그때였다.
“어이! 이보게, 젊은이! 어딜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눈이 있으면 똑바로 보란 말일세! 거긴 밭이잖아! 젊은 사람이 그리도 상식이 없어서야 원. 얼른 저만치 돌아가도록 하게!”
솔직히 노인의 말이 틀린 건 없었다. 하지만 이건 억지 위에 세운 논리의 탑일 뿐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천암도 할 말은 넘쳐 났다. 애초에 길에다 밭을 일군 것부터가 잘못이니까. 천암은 노인의 말을 명백한 시비(是非)요, 도발(挑發)이라고 판단했다.
천암의 머리로 좌우명(座右銘)이 떠올랐다.
‘시비를 걸지 않는 자는 패지 않는다.’
아무리 노인이라도 막무가내로 걸어오는 시비는 방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천암은 장차 자신의 무릎 위에 앉을 손자를 떠올리며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했다.
‘참자. 한 번 더 기회를 주자.’
“허허, 괴이하기 짝이 없구려. 여긴 원래 길이 이어진 곳으로 노인장이 엉뚱하게도 밭을 만들어놓았으니 도리어 노인장 쪽에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소이다만.”
그의 신법 수준으로는 저만치 밭의 끝까지 붕 날아올라 착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성큼거리며 걸음을 옮겨 밭을 가로질렀다.
“나는 지나가야겠소!”
노인이 버럭 화를 냈다.
“이봐! 야, 뭐 하는 거야, 지금? 야, 이 자식아! 어서 나가래두! 왜 그러는 거야? 너 정말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러면 못써!”
노인은 헐레벌떡 천암에게로 뛰어왔다. 밭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전형적인 농부의 우악스런 걸음걸이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밭을 밟고 가는 천암과 우당탕거리며 달려오는 노인이 중간 지점에서 맞부딪쳤다.
“내가 이 녀석들을 얼마나 정성스레 키우고 있는 줄 알기나 하는 거냐? 아무렇게나 지나오면 어떡해?”
그러나 천암은 여유만만이었다.
‘노인장,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는 지불해야지 않겠소?’
천암은 노인이라도 나잇값을 못한다면 그건 결코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담함마저 나이로 굴복시키려는 노인네들은 떼쓰는 어린아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은 어느새 지척에 이르렀다.
순간 노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천암을 강타했다.
그러나 천암이 누구인가? 칠 년여의 세월 동안 뼈를 깎아내는 수련 속에서 극강의 무공을 연마해 온 그다.
설혹 외공의 달인, 철사장을 십이 성까지 익힌 자라도 그의 몸을 타격하는 순간 자신들의 손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말 것이 분명한 그가 아닌가 말이다.
‘허허, 진정 가소롭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눈 위로 일곱 별이 떠올랐다. 대낮임에도 별들은 명확히 보였다. 별들은 그의 눈 주위로 번쩍거리면서 돌고 있었다. 별의 색상은 대부분이 노란색이었고, 그 중간중간 백색 섬광을 발하는 별도 보였다.
‘별이 참 아름답기도 하지.’
그러면서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쿵!
풀썩.
뭔가가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잠시 후 그 뭔가가 무엇인지는 손 터는 소리와 함께 걸죽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명확히 드러났다.
“난 분명히 밭을 밟지 말라고 경고했다. 내 잘못 아니야.”
믿을 수 없게도 뻗어버린 건 천암이었다. 그는 뭇 별들과 함께 아득히 정신을 잃고 말았는데 쓰러지는 와중에도 그는 자신이 왜 별들을 봐야만 했고,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 버렸는지 알지 못했다. 별들에게 물어볼 시간조차 없었다.
노인장은 태연스럽게 천암의 두 다리를 자신의 옆구리에 끼고는 질질질 끌어 뒷걸음질치면서 밭 바깥쪽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한 중간 정도 갔을 때였다.
“끄응.”
한줄기 신음 소리에 노인이 놀란 눈을 붕어마냥 뻐끔거리더니 소리의 진원지가 버르장머리없는 젊은 놈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때 천암이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맷집도 맷집이지만 바닥의 뾰족한 돌이 그의 등판 요추를 훑으며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정신이 된 것은 아니어서 자신이 왜 이런 몰골로 누워 있는지, 왜 턱이 얼얼한지 정확히 감을 잡지 못했다.
“매 좀 맞아본 게로군. 이봐, 정신이 드나?”
전혀 걱정없는 표정으로 묻는 말에 천암은 윗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이때까지도 노인은 천암의 두 다리를 양 옆구리에 걸쳐 들고 있는 상태여서 천암의 몸은 계곡 형태[V]를 띠게 되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절 어디로 데려가시려는 거죠?”
“허허, 이거 생각보다 타격이 심했나 보군. 머리가 돌아버린 건가? 이봐, 나한테 맞은 거 기억 안 나? 밭에서 나가라는 내 말을 무시해서 맞은 거니 절대 원망 같은 거 하면 안 돼.”
천암은 두 팔로 몸을 지탱한 상태로 기가 막혔다. 자신이 이 밭이나 가는 영감한테 맞아 잠시 기절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쓰러진 것은 외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몸에 갑자기 이상 반응이 생기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도무지 노인에겐 어떤 무공의 흔적도 엿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감쟁이야, 사람을 도대체 어디까지 희롱할 셈이야? 영감이 마음대로 길에다 밭을 만든 것이나 내가 내 마음대로 갈 길을 가겠다는 것이나 다를 게 뭐가 있다고 큰소리야? 나이를 먹었으면 나잇값을 해야 할 것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