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취임식 날, 거의 대부분의 흑막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 중엔 험한 고문으로 목발을 짚고 선 진요도 있었는데 그의 표정은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신임 막주 도총의 취임사는 사뭇 열정적이었다.
“우리의 오늘은 분명 어제와는 달라야 한다! 우리는 비록 살수계(殺手界)에 있어서는 수위(首位)에 섰으나 전체 무림의 세력을 놓고 보았을 때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아직 갈증을 느낀다! 나는 굶주림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도총이 잠시 말을 멈췄다. 앞으로 토해낼 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강호를 먹어치우자! 무림을 삼켜 버리자! 우리 앞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 해치우는 것이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오른팔을 높이 쳐들고 외치는 도총의 말에 한순간 흑막의 모든 고수들이 함성을 터뜨렸다.
“와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질 때, 그중 유일하게 외치지 않는 이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한쪽 구석에 서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진요였다. 그는 속으로 전임 막주와 신임 막주를 오징어처럼 씹어댔다.
??새끼, 지랄하네. 네놈이 아무리 떠들어도 네 뿌리가 바뀌겠냐. 네 멍청한 아버지마냥 너도 설치다 죽지나 마라. 강호를 삼켜 버리겠다고? 허허, 강호가 그렇게 물렁해 보이든? 그저 아가리 디밀면서 ‘어서 드세요, 막주님! 저는 막주님께 먹히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답니다’라고 할 줄 아는가 보지? 에라, 이 썩을 놈아. 그냥 잠자코 있을 일이지 또 무슨 염병을 하면서 삼킨다 어쩐다 해서 수하들을 병신 만들려고 그러냐???
그의 마음은 이미 흑막을 떠난 상태였기에 좌우간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들리는 모든 것들이 짜증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아직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은 반병신이 된 상태로 마땅히 갈 곳도 없고 괜히 혈기를 부려 나가봤자 객사하기 딱 좋기 때문에 잠시 참고 있는 것뿐이었다. 몸이 회복된다 싶으면 사정없이 소금을 뿌리고 떠나 버릴 참이었다.
진요가 씹어대는 와중에도 신임 막주 금총의 연설은 계속 이어졌다.
“모두 잘 들어라!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목표를 선포하겠다! 2년, 2년 안에 나는 넘어서고야 말겠다!”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떠올랐다.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은 후흑문이다.”
모두의 얼굴로 이번에는 ‘머뭇거림’, ‘설마’, ‘알 수 없는 전율’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떠올랐다.
후흑문은 지금까지도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의 문파였다.
얼굴이 두껍고 마음이 새까맣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하는 이 황당한 이름을 가진 문파는 문제 해결 능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문파였다.
그들이 살인 의뢰를 받지 않기에 망정이지 만일 살인 청부까지 받는다면 오늘날 살인 청부를 업으로 삼는 조직들은 모두 망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건 살인 청부 조직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막주가 바로 그 후흑문을 넘어서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역시 사람일 뿐이다! 그들이 하는 일을 우리가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 짓지 말라! 그대들의 마음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와 망설임이라는 단어를 제거하라! 그 뒤 자신을 돌아보라! 그대들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 자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와아아아!!”
열정에 찬 연설은 일단 피를 뜨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 광경에 신임 막주 금총은 물론이고 이러한 발언이 있기 전 의견을 교환했던 흑막의 수뇌부들도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흑막의 늙은 여우들로 일컬어지는 수뇌부들은 솔직히 신임 막주 금총이 후흑문을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삼겠다고 했을 때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만류했었다.
그 까닭인즉, 강호무림에 회자되는 말 중엔 천하제일고수로 불리는 신비무영(神秘無影:그 존재가 과연 실재하는지에 대한 여부조차 막연한 것이긴 했지만)이 후흑문주일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문파에서도 후흑문과 시비가 일지 않길 바랐고, 적으로 삼는다거나 파헤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신임 막주가 젊은 패기로 후흑문을 들먹이니 늙은 여우들의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금총이 설명하는 말을 듣고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금총의 말인즉, 지향점이 클수록 얻어지는 결과물이 클 것이기에 이왕 목표를 잡을 바에야 후흑문을 설정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부모님께 용돈을 달라고 떼를 쓸 때 크게 불러야만 그 절반이라도 받을 수 있는 이치와 같아서 후흑문을 목표로 정하면 흑막은 후흑문을 뛰어넘지는 못하더라도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도는 열렬한 호응을 받았으니 첫 출발로는 만족스런 일이었다.
전 흑막인들을 향한 막주 금총의 외침은 이제 결말로 치달았다.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하면 제일 먼저 어떤 문파를 떠올리는가? 바로 후흑문이 아니더냐? 그들은 모든 의뢰를 다 수락하는 것이 아님에도 곤경에 처한 이들은 일단 후흑문부터 떠올린다! 우리가 그러해야만 한다! 어떤 갈등이 벌어졌을 때, ‘저 새끼 죽여 버리고 싶다’라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이름이 바로 ‘흑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흑막이 될 터이냐?”
“와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렇게 흑막은 신임 막주의 거대한 일성으로 전임 막주의 죽음을 역사 속에 묻고 뜨거운 열정과 사나이의 기개,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새 날을 맞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느 누구도 흑막의 이 큰 변화, 그리고 이 새로운 도전이 있기까지 후흑문의 그림자가 크게 드리워져 있음을 아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후흑문의 그림자는 흑막에 이어 화화궁(花花宮)에도 깊게 드리워졌다.
흑막의 막주처럼 화화궁의 궁주가 급사한 것은 아니었지만 화화궁으로선 거의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문제는 필사방인들의 마지막 고난의 장소인 ‘과부촌’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평범한 과부촌이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화화궁의 별지(別地)였다.
그런 까닭에 분명 과부촌 습격 사건―솔직히 그건 습격이라기보단 내동댕이쳐짐이었지만―으로 인해 덕을 본 건 그곳에 거하고 있는 숱한 과부들이었으며, 필사방인들이야말로 눈물겨운 하루하루 속에서 몸을 바친 것이랄 수 있었으나 화화궁은 결코 기뻐할 수 없었다.
까닭은 과부촌 안에 화화궁의 차기(次期) 궁주(宮主)로 내정된 여인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궁주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최고의 음기(陰氣)를 품기 위해 과부촌에 머물러 있으면서 음기증폭공(陰氣增幅功)을 익히며 나날을 보내고 있던 차에 느닷없이 필사방인들이 알몸으로 던져지자 그만 이성을 잃고 확 돌아버리고 만 것이다.
그건 마치 열흘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고양이가 생선을 발견한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어서 차기 궁주를 위시로 뭇 여인들이 광기(狂氣)를 드러내며 달려들게 된 것이다.
음기(陰氣)가 강하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양기(陽氣)를 간절히 원하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지라 차기 궁주는 다짜고짜 달려들어 미친듯이 굶주림을 채워 버린 것이다.
물론 과부촌은 명색이 화화궁에서 운영되는 것이라서 진법(陣法)으로 외부와 단절되게 한 상태였으나 문제는 안타깝게도 후흑문을 막기엔 그다지 강력한 진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또한 차기 궁주를 곁에서 보필하는 이들도 있긴 했으나 그녀들도 말리기보다는 자신의 차례가 되기만을 기다리는 간절한 상태가 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음기증폭공이 워낙 강력하여 그녀들까지도 양기를 대하자 보필이고 자시고가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파악한 것은 어느덧 필사방인들이 후흑문의 고수들에 의해 빼돌려진 지 일주일가량이 지난 뒤였다.
그들은 마치 술에 중독된 이들이 끊는 와중에 극심한 금단 현상을 겪는 것처럼 남자 대신 바위나 나무에 몸을 비벼대더니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면서는 자신들이 얼마나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곤 통곡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 사실이 본궁에 알려지게 되면서 화화궁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화화궁주가 평생 남자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라는 식의 규칙 같은 건 없었지만 화화궁주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는 처녀를 유지해야 했으며, 그 상태에서만이 궁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을 전수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기반이 허물어지고 말았으니 어찌 화화궁의 분노가 간단한 것일 수 있겠는가.
흑막과 화화궁에 견준다면 필사방의 사정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그들에게 고난은 이미 지난 일이었고, 조금 귀찮긴 해도 지시받은 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과부촌의 고난으로 삼장삼막에 이르는 고초가 끝났을 때 필사방이 받은 명령은 각 지역을 다니면서 기연 따윈 없으니 돌아서라는 팻말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힘을 다해 명령을 수행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열심을 기울인 건 아니었다.
그들 중 몇 명, 정확히는 방주를 합한 네 명이 열흘이 채 되기도 전에 도주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필사방주 노제강(櫓制强)과 세 명의 단주인 섭외단주(涉外團主) 금율, 수호단주(守護團主) 장송수(張訟手), 홍보단주(弘報團主) 정포(鄭布)가 그들이었다.
남은 단주는 수정단주(修正團主) 묵해영(墨海影)이 유일했는데 그는 수하들을 통솔하여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해나갔다.
묵 단주가 탈출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필사방인들은 그가 배짱이 부족하다고 하는 자도 있었고, 원래는 도망치려고 했는데 모두 먼저 빠져나가자 차마 자신까지 도망치고 나면 통솔자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은 것이 아니겠느냐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탈출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용기가 없어서도, 또한 통솔자의 필요성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심장 속에 담겨진 진심을 알아보자면 사실은 이젠 더 이상 험한 고초를 겪고 싶지 않다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탈출에 대한 마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만일 탈출을 하게 되면 한 달 정도가 지난 뒤 결행할 생각이었다. 이유인즉, 자신들을 괴롭혔던 그 ‘정체불명의 망할 놈들’이 잘하고 있나 없나 은밀히 지켜본다고 했으니 진정으로 그들이 지켜보는 것이라면 한 달 안에 도망친 방주와 단주들은 처참한 몰골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탈주자들의 소식이 없다면 그때 그는 망설임없이 탈출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거의 한 달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무리가 하루는 숲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을 때 일행은 지난밤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 중 누구도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그것은 미리 입을 다물자고 약속을 한 것과 같았는데, 그 까닭은 굳이 입을 벌려 말하지 않고도 보따리 속에 무엇이, 아니, 정확히는 어떤 인간이 들어 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따리 겉 표면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육(肉) 자가 새겨져 있었기에 혹 살아서 도망쳤던 방주가 다져진 고기가 되어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에 휩싸여 그 누구도 보따리를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모두가 얼음이 되어버린 상황. 심지어 모두의 정신적 기둥이자 실질적인 지도자인 수정단주 묵해영마저 심장이 털컥 내려앉고 다리가 굳어져 발가락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특히 그는 한 달이 다 되도록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자 이틀 후에 탈출을 결행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 심장 박동은 거의 초절정고수의 발걸음마냥 빠르게 뛰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곧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는 것을 의식한 묵해영은 천천히 다가가 보자기를 열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디마디마다 토막나 있고, 잘려진 머리가 마침 위쪽을 향하고 있어 그 부릅뜬 눈이 자신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단주님!”
옆에서 부르는 소리에 묵해영은 흠칫하며 바라봤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보자기를 풀다 말고 환상에 잠겼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줄기 식은땀과 함께 보자기를 풀어헤쳤다.
“헉!”
“이럴 수가?”
“방주, 방주님이다!”
주위에 있던 필사방인들이 놀라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 놀람 속에는 기실 안도의 기운이 절반 정도는 서려 있었다. 죽은 줄로만 여겼던 방주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비록 속옷조차도 걸치지 않은 알몸의 상태였지만 살아 있다는 것이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다.
말려 있던 방주 노제강의 몸은 보자기가 풀리면서 차르륵 펼쳐졌다. 모두 남자뿐인지라 그의 알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어도 아무 문제될 것도 없었으나 모두의 얼굴은 당혹과 의문으로 가득 찼다.
“저건 뭐지?”
“웬 화살표?”
“그 아래를 보라는 건가?”
기이하게도 방주의 배꼽 부분에 아래쪽을 향한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화살표가 지목한 곳엔 그의 남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눈에 힘을 주고 ‘대체 뭘 보라는 거야?’란 표정으로 바라보던 모두는 경악성을 지르면서 뒤로 서너 걸음씩을 물러섰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방주의 성기엔 육(肉) 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모두가 진정으로 뜨악해져 버린 이유는 그 글자가 정녕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문신으로 새겨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살면서 문신을 새긴 사람을 여럿 보고, 또 직접 문신을 하기도 했지만 ‘거기’에 문신을 한 사람을 본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필사방인들은 모두들 식은땀을 쏟아내면서 속으로 굳게 다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코 도주하지 않으리라.’
‘내 인생에 도망은 없다.’
‘내가 받은 명령은 반드시 완수하리라.’
문신 시술에 관해선 굳이 방주가 깨어나길 기다려 물어볼 것도 없었다.
답은 뻔했다.
도망쳤으며 잡혔고, 맞았을 것이다. 그리고 울면서 문신이 새겨졌을 것이다. 그 다음엔 눈물로 탄식하다 보따리에 싸매진 채 이렇게 돌아오고 만 것이리라.
모두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떠올리며 마치 자신에게도 그러한 재앙이 닥칠까 두려운지 손으로 중심부를 가리며 당혹스러워했다.
생각해 보라. 이제 앞으로 방주는 문신을 지우려 할 것이다.
문신 제거 전문가에게 간다 해도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