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결국 이것이 마지막 시험이었음을 파악한 그는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 되어서 머리를 땅에 박아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죽으려고 했지만 죽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온 머리와 얼굴에 피 칠을 한 채 기절해 어디론가 옮겨졌다.
세 번째 동혈에 들어갔던 감무에게 사람들이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삼세판이라고 설마 감무까지 그런 식으로 무너질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감무는 모두를 실망의 구렁텅이로 처박아 버렸다.
감무가 진에서 나왔을 때 감무와 모든 지켜보는 이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완전히 침묵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누군가가 ‘야, 이 미친 새끼야! 그래, 사람을 다 때려죽일 셈이냐? 나도 죽여봐라, 죽여봐!’라고 외치는 말이 터져 나오자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저놈을 아주 찢어 죽여야 한다는 외침이 산과 바다를 이루었다.
사방에서 온갖 오물들이 감무에게 던져져 감무는 비참한 몰골로 진룡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장내를 벗어났다.
“믿을 수가 없구려.”
“이렇게 허탈할 수가……!”
“정녕 이대로 다 무너진단 말이오.”
“아니겠지요. 아닐 겝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기대해 봅시다. 이 마지막 관문이 아니었다면 어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겠소.”
“그렇지요. 다 속는 것보단 낫습니다. 진정한 보석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바람은 계속해서 속절없이 무너져 갔다.
천규가 멈춰 섰다. 사람들의 얼굴로 긴장이 흘렀다.
긴장한 것은 비단 관중들만이 아니었다.
이 대회를 개최한 진룡표국, 그리고 그 배후 세력인 마교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혹시 이러다가 모두 다 탈락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천규의 눈에는 뭔가가 보인 것 같았으나 아직까지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천규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안의 환경은 오로지 천규의 내면이 만들어낸 환상인 것이다.
천규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천하요검(天下妖劍)! 검은 스스로 주인을 찾는다. 요검은 오직 주인을 맞아 뽑힐 것이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제발 천규가 요검을 무시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바람이 헛된 것이 되리라는 걸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정작 천하요검 따윈 존재하지 않건만 그것이 눈에 보였다는 건 천규가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하하, 당연히 내 차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천규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더니 마치 검을 뽑아 드는 시늉을 하고는 높이 쳐들었다.
모두의 얼굴로 어두운 그림자가 임했다.
연리호, 석운천, 방약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연리호는 비급, 석운천은 영약, 방약은 여자 때문에 넘어졌다.
그중 방약은 완전히 벌거벗은 채 혼자 정사를 치르는 상황까지 가는 바람에 관중들은 뜨악함을 금치 못했다.
관중 속에 여인들은 온갖 소리를 질러대면서 내 살다 살다 이렇게 흉악스런 광경은 처음이고, 여기에 온 것을 후회한다고 외치면서 손으로 눈을 가리기에 바빴지만 그러는 중에도 볼 것은 다 보고 있었다.
여덟 중 일곱의 탈락. 기막힌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희망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신묘혼열진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설충(심온)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시선이 설충을 향했다.
황금 글씨로 보여준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것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혼자 묵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 사람들은 순심선행대전의 진정한 우승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마교도 마찬가지였다.
심온은 가히 초월적인 관념, 무소유, 무념무상의 신비로움 속에 파묻힌 듯 끝없는 명상의 세계를 유영하다 문득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앞에 뚫린 여덟 개의 동혈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신비혈이라니?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 한다는 것인가?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순심선행대전의 뜻이 무엇인가? 왜, 왜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도다.”
심온의 말은 고스란히 모든 이들의 귀에 아로새겨졌다.
관중들과 진룡표국, 그리고 마교, 더불어 지켜보는 정파 인사들까지 그 어느 누구 하나 감동에 빠지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앞서 일곱 명의 탈락이 있었던 터라 감동은 한없이 깊었다.
“그래, 바로 이런 것이야.”
“우리가 기다리던 영웅의 탄생일세.”
“내 살아 생전에 이와 같은 멋진 광경을 보게 되다니.”
“아직 세상은 희망이 있는 게지? 그렇게 믿어도 되는 게지?”
“아무렴. 난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구먼.”
“대단허이. 대단허이.”
“흐흐흑, 흑흑…….”
모두는 감격에 겨워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곁에 앉은 낯선 이를 몇십 년 함께한 친구라도 된 듯 허물없이 어깨를 걸치고 포옹을 하는 광경은 그 자체로 감동의 물결이었다.
진룡표국의 국주 이하 모든 마교와 관련된 이들도 감사의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 사실 그 기쁜 마음은 어떻게 형용하기 힘들 정도였다.
비록 얼마 후엔 잡아다 강시로 제련하는 데 쓰이게 될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고맙고 기특하기만 했다.
심온의 외침은 계속 이어졌다.
“세상이여, 깨어라! 일어나라! 이제 우리 모두 악을 물리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자!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순수함의 열정으로 말이다!”
더 이상 지켜볼 의미는 없었다.
국주는 이제 순심선행대전의 결말을 위해 손을 들어 올려 진법을 해제시키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흐흐흐.”
심온이 느닷없이 음침하게 웃는 탓에 국주는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진을 해제하려던 것을 뒤로 미루었다.
속삭이는 듯한 웃음. 진법의 특성인 음의 증폭으로 여실히 들리긴 했지만 그건 분명 속삭이는 웃음이었다.
“이놈들, 완벽히 속아넘어갔겠지? 멍청한 놈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큰소리쳤잖아. 상금은 내 것이라고 말이야. 이제 남은 여생, 배때기 토도동 두드리면서 두 다리 쫙 펴고 살 수 있겠다. 캐캐캑, 거기다가 그 멍청한 놈들이 무공까지 가르쳐 줄 거 아냐. 크크크, 뭐, 귀찮은 마음이 없진 않지만 배워둔다 해도 나쁠 건 없겠지.”
심온의 작은 중얼거림은 진법의 위력을 타고 크게 증폭되어 모두의 귓구멍을 후볐다.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함에 빠졌다.
유일한 희망! 마지막 기대! 중원의 설레임! 이 모든 것이 속절없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때마침 그런 착잡함을 위로하듯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부슬비였다.
심온의 속삭임은 계속 이어졌다.
“진룡표국의 국주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제일 웃기지.”
진룡국주 진우종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머리가 있으면 제놈도 생각을 했어야 할 거 아냐. 세상에 진짜 착한 애가 이런 대회에 나오기나 하겠어? 크크크, 멍청이 같으니. 여기 나왔다는 건 이미 착한 것이 아니란 거잖아. 케케케, 게다가 그 시험들이란 게 얼마나 뻔해. 멍청한 놈, 그런 무식한 머리로 거대 표국의 국주라니. 미련한 놈아, 차라리 내가 국주에 오르는 것이 백번 낫겠다. 크카카, 미련퉁이. 진짜 감당하기 힘든 바보 자식이야.”
국주 진우종의 얼굴은 이제 분을 바른 듯 하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심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거기에 순진하게 휘둘린 명문정파라는 인간들의 꼬락서니는 또 뭐야? 바보 같은 놈들, 주먹과 칼부림만 할 줄 알지 머리는 쇠야, 쇠. 하긴 뭐, 그런 멍청한 놈들이 있으니까 내가 좀 편하긴 하지만 말야.”
이번엔 이 자리에 참석해 있던 구파일방, 그리고 명문정파 수뇌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은 모두 부끄러움과 분노가 범벅이 되어 일어서지도 앉지도, 화를 내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국주는 더 이상 내버려 뒀다간 무슨 수치를 당하게 될지 모르는지라 손을 들어 진법을 해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순간, 분홍빛 연무가 완연히 사라졌다.
원래 모든 이들은 분홍빛만 없다 뿐이지 심온이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상태라 그다지 특별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으나 심온은 동굴이 사라지고 주변 환경이 급변하면서 수많은 관중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동자에 어느새 별빛이 찰랑였다. 심온은 그런 눈을 순진무구한 표정과 함께 연신 깜박거렸다. 그건 바로 ‘내가 제일 착한 것으로 결정난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어떻게 된 거죠?’라고 묻는 표정과 같았으나 그 표정을 본 사람들은 속이 울렁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그때 부슬비는 느닷없이 강한 빗줄기로 바뀌면서 대지를 강타했다.
광장 한가운데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선 심온과 그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은 그렇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 채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났을 때 강호엔 현상금이 걸린 방이 나붙었다.
현상범은 다름 아닌 심온, 아니, 정확히는 심온이 변장한 모습인 설충이었다.
마교에서는 처연한 심정으로 물러났으나 곰곰이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어 진룡표국의 이름으로 현상금을 내걸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정파의 다수 문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아 현상금은 어마어마한 지경에 이르렀다.
숙원 사업이 한 소년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것에 그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헤아리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평생 동안 설충을 찾아도 설충을 찾을 수 없으리란 것을 알지 못했다.
얼마 뒤 마교에서는 이 일을 제이(第二)의 수난이라고 불렀다.
(작가 주:마교 제1수난은 2권의 맨 마지막에 부록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
2. 흑막, 화화궁, 필사방!
온 중원이 순심선행대전의 열풍에 휘말려 있을 때, 도무지 눈곱만큼의 관심조차 기울일 수 없는 세 곳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흑막과 화화궁, 그리고 필사방이었다.
흑막은 막주 금어림이 피살된 지 두 달이 넘도록 공황(恐慌)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까닭인즉 막주를 무식하게도 도끼로 찍어 죽인 적막대주 진요의 증언―사실 그는 증언이라기보단 절규에 가깝게 외쳐 댔다―이 너무도 황당무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막주께서 제게 도끼를 건넵디다. 나는 멀뚱하게 쳐다봤지요.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막주께서 말했소. ‘이걸로 나를 찍어라’라고 말이오. 나는 솔직히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었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 바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소. ‘막주께서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온 터라 어떤 강력한 신공을 연마하신 게로구나. 그럼 머뭇거리는 것도 수하로서의 도리가 아니지’ 하고 말이오. 그래서 난 어설프게 도끼를 휘두르는 건 막주를 무시하는 것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온 힘을 다해 도끼를 날린 것이었단 말이오. 그런데, 그런데… 흐흑흑.”
처음 이와 같은 주장을 들은 흑막의 수뇌부들은 각기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이런 주장은 세 살짜리 아이라도 속일 수 없을 것이었으므로 뭔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현실임을 인지한 뒤로 그들은 게거품을 물면서 당장 내 손으로 저놈을 때려죽이겠다고 고함을 쳐댔다.
그 뒤 지독한 고문이 행해졌다.
고문이 시행된 지 한 달.
흑막 수뇌부의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어쩌면 대주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흘러나오더니 하나둘 동조하는 분위기가 감돈 것이다. 고문에 관한 한 최고의 실력을 갖춘 고문 기술자 점근형(霑根刑)의 말도 거기에 힘을 보탰다.
“이상한 일입니다.”
“뭐가 말인가?”
“혹독한 고문에 버티는 것도 버티는 거지만 말입니다, 너무 변명이 일관성이 있다는 말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뭔가 자신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변명을 하는 것이라면 그럴싸한, 어딘가 납득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대주는 마치 미치광이같이 터무니없는 말만 계속해 대고 있단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어린아이조차 믿지 않을 이야기를 눈알이 튀어나올 기세로 외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짓을 말하려면 뭔가 논리적으로 수긍이 갈 만한 말을 해야 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독문 병기인 검(劍) 대신 도끼[斧]로 찍어 죽였다는 것도 또 다른 의문으로 떠올랐다.
흔히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를 죽이려 할 때는 비록 그것이 암습(暗襲)일지라도 자신의 최고의 기술과 힘을 쏟아 부어도 성공할까 말까다. 그런데 도끼라니?
“열흘만 더 고문해 보도록!”
그러나 고문은 닷새가 되어서 끝이 났다.
서신(書信)이 발견된 것이다.
막주의 옷을 세탁하는 전담 세탁원이 뒤늦게 옷 안쪽에 구겨진 채로 박힌 종이를 펴보고는 경악을 한 채 들고 달려왔다.(작가:1권과 충돌되는 부분 해소)
그건 바로 심온이 흑막주에게 보낸 충고의 서신이었다. 물론 서신 어디에도 후흑문에서 발송된 것이라는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막주가 이 웃기지도 않은 충고를 따랐을 가능성은 농후했다. 무엇보다 대주의 말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적막대주 진요는 약간의 확인 절차를 밟은 후 풀려났다. 그는 불행 중 다행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몸을 돌릴 수 있게 되었고, 당연히 많은 이들의 위로가 뒤따랐다.
“정말 다행일세. 사실 난 처음부터 자네가 결백하다고 생각했었네.”
“무릎이 아프군. 왜 그러냐고 물어봐 주지 않겠나? 흠, 이런 말을 직접 하기엔 쑥스럽네만 남몰래 자네를 위해 하늘을 향해 기원을 올렸던 걸세. 자네를 다시 보게 되어 기쁠 따름이네.”
“다들 속히 처형하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 하지만 난 윗옷 섶을 풀어헤쳐 가슴을 드러내고 말했네. 그를 죽이기 전에 먼저 나부터 죽이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말이네.”
흑막의 수뇌부들이 건넨 위로의 말들이었다.
진요는 가슴 뜨거운 사나이들의 위로에 복장(腹臟)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대가리들을 쪼개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 외 서열이 비슷한 대주들과 부하들의 잔잔한 위로가 이어졌지만 어느 누구의 말도 진요를 과거의 그로 돌아가게 할 순 없었다. 이미 그의 몸은 갖은 고문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오랜 세월 요양을 해야만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신임 막주는 전대 막주의 아들이자 특급 살수인 금총이 맡게 되었다. 비록 그는 삼십이 세라는 젊은 나이에 혼인하지 않은 몸이었으나 전대막주인 금어림이 거의 십 년 전부터 후계자로 내정한 터였기에 흑막인들은 그의 막주 취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