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27화 (27/125)

# 27

도엽이 그녀를 등에 업고 잠시 방향을 가늠해 보고는 지체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도엽은 올해 십육 세였으나 덩치만을 보자면 거의 스무 살 정도로 보일 만큼 또래보다 체격이 컸기에 자그마한 체구의 여인을 업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약 일 식경 정도가 지나갈 무렵 도엽은 어쩐지 그녀의 상태가 조금 나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얼음장만 같던 몸이 조금 따뜻해진 것 같았고, 숨결도 안정적으로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착각이라고 생각한 건 그녀가 결코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좋아질 리가 없을 정도로 방금 전까지의 상태가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저 자신이 그렇게 느끼고 싶어한 것이어서 그럴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래도 일단 확인만 해보자.’

“낭자, 견딜 만하신지요?”

“네, 아까보다 많이 좋아진 듯합니다. 공자님의 은덕입니다.”

도대체 무슨 조화이며 어떤 까닭인지는 모르나 그녀의 목소리 또한 차분하고 옅게나마 기력이 담겨 있어 보인 것이 그저 신기하고 다행스러울 따름이었다.

“천만다행입니다. 한데 어쩌다 이 산중에서 곤란을 겪게 되신 건지요?”

“…….”

그녀가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망설이자 도엽이 호기롭게 말했다.

“하하, 제가 괜한 것을 물었나 봅니다. 제 물음은 듣지 못한 것으로 여기십시오.”

“아니, 그게 아니라… 휴, 공자께는 말씀드려도 상관없겠지요. 사실 저는…….”

그때 도엽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간직하고픈 비밀이 있기 마련이죠. 이제 소저께서 말을 한다고 해도 저는 두 귀를 막고서라도 결코 소저의 말씀을 듣지 않겠습니다.”

그런 도엽의 말은 반대로 여인의 마음과 입을 활짝 열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를 업고 계시니 귀를 막진 못할걸요.”

“하하, 이거 정말 난처하군요.”

두 사람 사이로 따스한 기운이 흘렀다.

그녀는 그때부터 입을 열어 사연을 밝히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진정 믿기 힘들 정도로 기묘한 것이었다.

그녀는 음양현묘지체(陰陽玄妙之體)를 타고났다고 한다.

도엽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으로 질문을 대신하자 그녀는 음양현묘지체의 특징을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남자는 양기(陽氣)를, 여자는 음기(陰氣)를 타고나기 마련인데 음양현묘지체를 타고 난 자는 음기와 양기가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첫 번째 월경이 찾아올 때 음기가 극도로 성하게 되는데 바로 그때 유능한 의원이 혈을 소통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찾아가려는 팽 대인이 그녀의 몸을 돌봐줄 뛰어난 의원이었다.

“하지만 여기엔 또 하나의 비밀이 있답니다.”

“비밀이라뇨?”

도엽은 묻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 비밀이라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산중에서 홀로 신음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음기가 극도로 성할 때 남자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녀의 목소리는 부끄러움으로 뒤로 갈수록 속삭임이 되고 있었다.

더불어 도엽의 심장도 어느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최상승의 내공을 얻게 된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 후 저는 더 이상 생명을 부지할 수 없게 되지요. 그러나 제가 무사히 월경의 위기를 넘길 경우엔 저는 생사현관을 타동하게 되어 지혜가 열리고 노도(怒濤)와 같은 내공을 얻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팽 대인을 찾아가는 길에 괴한의 급습을 당해 호위하던 이들이 막아선 사이 저는 홀로 도망쳤고 결국 이처럼 힘이 다해 쓰러지고 말게 된 것이지요.”

도엽을 철저히 믿지 않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도엽은 무거운 침음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걸음을 멈췄다.

“정녕 고약한 무리들이로군요. 그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의 생명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 아닙니까?”

도엽은 어깨를 미세하게 떨며 울분을 토해내더니 이대로는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다는 듯 등에서 그녀를 내려놓았다.

“강호인들은 강한 힘의 욕망에서 벗어나기 힘든 모양입니다. 하지만 공자님 같은 분만 계시다면 강호는 평안함을 누릴 테지요.”

도엽이 돌아섰다.

“흐흐, 내가 뭘? 최상승의 내공이라 이거지?”

턱을 치켜든 채 내려다보는 도엽의 모습은 탐욕(貪慾)과 귀기(鬼氣)가 범벅이 되어 있었고, 두 손은 아랫도리 의복을 벗어젖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 공자!”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몸이 뻣뻣해졌다. 그 다음엔 누군가 짐짝처럼 자신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어딘가로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

이것이 현재 세 번째 동혈로 들어섰던 감무가 느끼는 전부였다.

그러나 감무는 이 정체불명의 상황에도 걱정보다는 기대가 앞섰다.

신비혈에 들게 되면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황금빛 글자의 암시가 구체적인 상황으로 자신에게 임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동굴의 벽과 너무 빨라 코와 입으로 바람이 거칠게 파고들어 숨 쉬기조차 힘든 것만으로도 감무는 자신을 들쳐 멘 사람이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가만히 기원을 올리듯 중얼거렸다.

‘이런 분을 스승으로 모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공할 속도로 짓쳐 가던 움직임이 멎은 건 그로부터 약 일 다경이 지난 뒤였다.

감무가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폭이 십 장(약 30미터) 정도 되는 정방형의 석실이었다. 수정과 비슷해 보이는 돌 여섯 개가 천장에 박힌 채 밝은 빛을 뿌려주어 석실 내부는 사물을 구분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털썩.

감무의 몸이 무슨 고깃덩어리마냥 바닥에 던져졌다. 던져지면서 어깨 쪽이 땅에 닿아 손으로 아픈 어깨를 비비는 중에 감무는 어느새 자신의 몸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곳까지 붙잡혀 오는 내내 손가락 마디 하나도 움직이지 못했던 그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수법을 사용했기에 몸이 아무 이상 없이 움직이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등령존자(騰靈尊者)라 한다.”

괴인의 음성이었다. 그는 감무의 시선으로부터 비스듬히 서 있는 까닭에 감무는 그의 옆 얼굴만을 볼 수 있었다.

‘등령존자?’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 한둘인가.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등령존자라 칭한 노인의 얼굴이 인자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선택 따윈 없다. 너는 오늘부터 나의 제자가 된다. 이 등령존자의 제자가 되어 세상을 굽어보는 것이다.”

너무나 급작스럽고 단도직입적인 말이었지만 시공을 압도하며 넘쳐 나는 기백에 감무는 알 수 없는 전율에 사로잡혔다.

말을 마침과 함께 등령존자는 감무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등령존자의 드러나지 않았던 절반의 얼굴, 그것은 정녕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악을 끌어 모아 압축해 놓은 듯한, 그래서 계속 보고 있을수록 눈을 통해 잔혹과 능멸, 흉포, 혐오가 스며드는 형상.

등령존자를 바라보는 감무의 눈이 기대에서 놀람으로 바뀌었다.

“나는 후회한다, 내 사는 날 동안 만 오천 명밖에 죽이지 못한 것을. 크크크, 나의 천수(天壽)는 이제 고작 보름이 남았을 뿐. 그렇기에 너를 만난 건 결코 간단한 인연이 아니다. 내 모든 힘을 네게 주겠다. 너는 내 뒤를 이어 세상을 멸하라. 겉으로 미소 지으며 속으로는 온갖 이기와 자만과 욕망으로 꿈틀대는 인생들을 벌하는 것이다.”

감무, 그가 누구인가? 순심선행대전에서 마지막 남은 여덟 중 하나가 아닌가? 그런 감무에게 등령존자는 저주의 살인 병기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손으로 땅을 짚은 채 바닥에 앉아 있던 감무가 결연한 태도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이 제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쿵!

단호한, 어떤 거리낌도 없는 외침이었다. 결코 이제껏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순심선행자라고는 볼 수 없는 답변이었다. 더 기괴한 건 감무는 억지로, 아니면 생명의 위협 때문에 그와 같이 말한 것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등령존자의 얼굴로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하하하, 마음에 든다. 너를 만나 기쁘다.”

“결코 사부님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진정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감무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의 상황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 같았다.

“크하하하! 아무렴.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등령존자의 말이 끝나면서 변화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무슨 까닭인지 등령존자의 모습이 흐릿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투명하게 하는 붓이 등령존자의 몸을 조금씩 지워 나가는 것만 같았다. 조금씩 옅어지는 중에 등령존자의 입술 사이로 그가 뱉어낸 마지막 말이 반복되었다.

“그래야 하고말고.”

“그래야 하고말고.”

“…하고말고…….”

그러나 감무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런 광경은 또 다른 신비한 그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사부의 의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등령존자의 모습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그의 목소리도 더 이상 울려 나오지 않았다.

‘자, 이제 슬슬 보여주셔야죠?’

감무는 장차 이러한 고도로 뛰어난 술법을 자신도 익힐 수 있다는 생각에선지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

맞은편 벽이 마치 물이 번지듯 찰랑였다. 그리고 이어 벽을 뚫고 사람의 머리가 거짓말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벽이 부서지거나 작은 먼지조차 일지 않았기에 감무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감무는 자신이 얼마나 경악하게 될 것인지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벽을 뚫고 들어온 사내는 뜻밖에도 등령존자가 아니었다. 조금은 어두운 기색을 띤 낯선 사내는 물끄러미 감무를 바라보더니 감정없이 말했다.

“나를 따라오게.”

감무는 아직도 마음을 진정치 못한 터라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사내 곁에 바짝 다가섰다.

“내게서 일 보 밖으로 벗어나선 안 되네.”

사내는 들어왔던 것처럼 다시 벽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감무도 눈을 질끈 감으면서 사내를 따라 벽을 통과했다. 혹시 딱딱한 벽에 부딪칠 뿐 통과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근심과는 달리 마치 허공을 지나듯 몸이 빠져나왔다. 벽 너머로는 하늘과 땅, 보이는 모든 공간이 새하얀색이었다.

사내는 아주 천천히 한 걸음씩 발을 뗐는데 좌로 두 걸음에 이어 앞으로 한 걸음, 다시 우로 세 걸음 식의 움직임은 명확한 형식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뒤따르는 감무는 조금이라도 간격이 벌어지면 사내의 몸이 백색 광채에 휘감겨 흐릿해지는 터라 일 보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해 뒤를 밟았다.

“이제 다 왔군.”

그 말과 함께 사내가 좌로 두 걸음을 꽃게의 움직임마냥 가볍게 옆으로 이동했다. 그 뒤를 감무가 따르며 똑같이 밟아 나간 순간 주변 환경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감무는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고, 혈도가 찍힌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보고 말았다. 아니, 사실은 그가 보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낯선 곳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순심선행대전이 펼쳐졌던, 아니, 펼쳐지고 있는 광장의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가상인지 감무는 알 수가 없었으나 명백히 알 수 있는 건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시선이 경악 속에서 경멸과 혐오, 실망을 물씬 풍겨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얼빠진 모습으로 자신이 나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옅은 주홍빛 안개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아직도 그곳이 동혈이라고 착각하는 몇몇의 모습이 여실히 내비췄고, 중얼거리는 소리 또한 마치 곁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이 들려왔다.

감무는 넋이 나간 상태의 곱빼기처럼 되어버렸다.

자신이 취했던 모든 행동과 말을 모든 관중들이 보았다는 것. 이제 평생 이 추악한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한다는 것. 두려움이 해일처럼 심장을 덮쳤다.

곁에 선 사내가 경악에 차 있는 감무를 향해 화룡점정의 일격을 가했다.

“자넨 탈락일세.”

순심선행대전은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마지막 관문을 남겨놓고 있었다.

신묘혼열진(神妙魂閱陣)!

가상의 공간 속에서 그 사람의 진심을 엿볼 수 있는 희대의 역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진법이 최후의 시험이었다.

신묘혼열진은 제령문이 배출한 진법의 천재 막요(莫嶢)가 만든 것이었다. 그는 칠대기왕 중 한 명에 꼽히는 바 사람들은 그를 ‘기묘현진자’라 불렀다.

원래 막요는 진법을 연구하는 데 심혈을 쏟을 뿐 정작 그것으로 뭔가를 하는 것엔 관심이 없는 자였다.

그러나 진룡표국에서 순심선행대전을 여는 취지를 듣고 ‘하하, 그래? 그거 재밌겠는걸?’이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이곳에 진을 펼쳐 보인 것이었다.

남은 여덟 명의 소년은 간밤에 미혼약에 당해 깊은 잠에 빠졌고, 그들이 깨어난 건 오늘 아침 나절이었다.

그들은 깨어난 곳이 동굴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들이 놓인 곳은 수많은 관중들로 둘러싸인 순심선행대전의 대전장이었다.

신묘혼열진의 묘용은 무궁무진한데 그중 하나가 어떤 소리도 밖에서 진 안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며, 또 반대로 진 안의 소리는 크게 증폭되어 밖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옅은 분홍빛 연무 속에 자리한 여덟 소년의 말과 행동을 낱낱이 지켜보면서 놀라움과 함께 이들이 과연 어떤 행동을 보일지 사뭇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이고 탈락이 결정난 건 심옥천으로 관중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물론 밖에서 지켜보는 가운데서는 심옥천이 무엇을 보았으며 어떤 상황에 놓인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왜냐 하면 정작 심옥천은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면서 힘들어했고, 처음 장소에서 고작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무슨 비급을 발견했노라며 광오한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이들은 진룡표국의 송음조의 도움말을 듣고서 그것의 이치를 이해했다.

진법 안에서 보는 건 바로 자신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이 가장 원하던 것, 바랐던 것이 형상으로 나타나고 그것들에 스스로 빠져 허우적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두 번째 도엽의 경우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도엽은 거의 속옷까지 벗어젖히는 중에 외부의 제지를 받고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그의 얼굴은 경악을 넘어 거의 지옥의 한복판에 발을 들이민 사람처럼 되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