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내 너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다.”
승부 직전에 던진 말에 백무결과 그 주변인들은 조소를 머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조금이나마 삶을 연장하려 시간을 끌어보자는 수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냐?”
백무결이 청명정음(淸明淨音)이라는 음공의 수법으로 맑은 음색을 내며 말했다. 청명정음은 사파의 기운을 흐트러뜨리는 공능이 담겨 있어 잠시나마 도천혁의 마음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역시 대단한 놈이다. 목소리만으로 내 마음을 흔들어놓다니……. 근데 저 새끼는 정말 존댓말을 모르는구나. 나이 어린 놈이 어째 저리도 버릇이 없을까.’
그는 속으로는 부글거렸지만 애써 참고 말했다.
“목숨에 대한 미련은 없다. 단지 우리 둘이 승부를 겨루게 되면 누가 이길지 모르는지라 그전에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말을 전하려는 것뿐이다.”
“후후, 좋다. 무슨 말인지 들어보도록 하마. 하지만 다른 뜻을 품고 허튼짓을 하려 한다면 그것은 명을 재촉하는 일이 될 뿐이라는 것을 알아두어라.”
“나는 사파의 대종사다. 네가 사람을 무시해도 도가 지나치구나.”
“후후, 좋다. 대종사라는 말 무지 좋아하는 인간이니 믿도록 하마.”
백무결의 말에 주변에 있던 그의 수하들과 애첩들이 키킥거렸다.
“조심하셔야 해요, 가가. 저 쥐방울 같은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잖아요.”
“그러지 마시고 무릎을 꿇려놓은 다음에 이야기를 나누세요.”
“저 녀석은 늘 대종사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답니다. 하지만 얼마나 못돼먹은 놈인데요. 조심하세요, 가가.”
도천혁의 첩자로서 보내졌다가 배신한 구옥미가 도천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조잘거렸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의 말보다 더욱 도천혁의 마음은 쓰라렸다.
자존심이 상해 하려고 했던 말이고 뭣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그래도 숨을 몰아쉬며 꾹 눌러 참았다. 지금은 인내를 발휘해야 할 때였다.
백무결이 처첩들을 안심시키려는지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안심들 하오, 거리를 둔 채 전음으로 말을 주고받으면 되니까. 그렇지, 도 교주?”
“좋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전음을 교환해도 충분했지만 그래도 형식상 주변인들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 두 사람은 마주 섰다. 서로 간에 대략 십 장(33미터) 정도 간격이었다.
먼저 백무결이 전음을 발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도천혁은 똑바로 백무결을 바라보았고,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았다.
“…….”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백무결이 이상히 여겨 다시 물었다.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하라. 비밀스럽게 하겠다는 말이 뭐냐?”
도천혁은 더욱 눈을 부릅뜬 채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음…….”
“도대체 뭐냐?”
“이봐, 한 번만 봐주라.”
순간 백무결의 양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느라 빠져나오려던 공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까닭이었다.
한 번만 봐달라니? 그는 설마 하니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살려달라고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못나도 이렇게 못난 놈이었나 싶었다. 그래도 대종사 운운하기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줄 알았건만 한편으로는 맥이 빠졌다.
웃음을 간신히 삼킨 후 백무결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전음을 날렸다.
“뭘 봐달라는 것이냐?”
무슨 뜻인지 알고 있으면서 천연덕스럽게 되묻는 말에 도천혁은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방금 듣지 않았느냐? 나를 살려주면 앞으로는 절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 죽을 때까지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 테니 제발 한 번만 살려주라. 부탁한다.”
“흐흐흐, 글쎄…….”
“살려줘!”
눈알을 부라리며 전음을 보내는 도천혁의 표정에서는 비장미까지 흘러나왔다.
백무결의 수하와 애첩들은 백무결이 돌아서 있는 까닭에 그의 등만을 볼 수 있었고, 도천혁의 얼굴만 볼 수 있는 위치였던지라 비장미가 흐르는 도천혁의 표정을 보면서 은근히 마음을 졸였다.
멀리서 보기에 도천혁의 얼굴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붉게 상기되는가 싶었는데 난데없이 눈알을 부라리니 급작스럽게 기습을 전개해 혹여 그들의 주군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외적으로 보여지는 모습과는 달리 진정 속마음의 도천혁은 마지막으로 사정을 하느라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백무결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피식 하고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천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안 된다는 것이냐?”
“대종사답게 마지막을 깔끔히 장식하도록 해주는 것이 나로선 예의라고 생각한다.”
“무슨 소리냐? 내가 살려달라는데. 대종사 같은 거 다 필요없단 말이다!”
“안 된다. 그만 물러서라. 멋지게 죽는 것이 더 낫다.”
“으윽.”
도천혁은 이를 악물고는 뒷걸음으로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마지막 희망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만 것이다. 자결도 안 되고 타협도 안 되니 더 이상 다른 선택은 없었다.
‘제기랄이구나.’
백무결이 도천혁의 사실상 완전 항복을 거절한 이유는 대종사의 위엄이나 혹여 나중에 있을 반격과 보복을 염려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멋지게 역사에 남겨지길 바랐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결투를 벌이고자 했다. 너그러운 마음에 살려둔다는 것도 좋지만 그건 아무래도 역사적인 관점으로 볼 때 영 찜찜한 일이었다.
“자, 모두들 멀찌감치 떨어져 있도록!”
백무결이 비장한 어조로 말하자 수하들과 처첩들이 물러나면서 한마디씩 응원을 보냈다.
“지존이시여, 이 시대의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십시오.”
“악의 뿌리를 파내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주소서.”
“가가,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혼내주세요.”
“끝내고 나면 제가 어깨를 주물러 드릴게요.”
“너무 오래 끄시면 안 돼요.”
하나같이 백무결에게는 어깨를 으쓱하게 해주는 말이었고 도천혁에게 있어서는 염장을 질러대는 말들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도천혁을 응원하는 이가 없어 도천혁은 뻘쭘하게 있기 뭣해 양팔을 휘두르며 몸을 풀었다.
솔직히 절정의 고수가 양팔을 휘둘러 몸을 푼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냥 있기가 여간 멋쩍은 일이 아니라 좌우지간 뭐라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중앙에서 서로 십여 장의 거리를 둔 채 마주 섰다.
백무결이 한 줌의 진기를 호흡해 기를 운행시키자 그의 어깨로부터 백색 광휘가 일어나 팔에서 손 쪽으로 이동하면서 신비한 광경을 드러냈다.
극렬순백장(極烈純白掌)이었다.
한편 도천혁도 기를 운집했다. 그의 허리로부터 자줏빛 광채가 일며 은은하게 몸 주변을 감돌았다.
“자, 이제 시작하도록 하자.”
백무결이 여전히 반말로 지껄였고, 거기에 도천혁이 답했다.
“오시오.”
도천혁은 엉겁결에 말하고는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조금 쫄고 있었던 터라 자신도 모르게 공손한 어투로 말하고 만 것이다.
저만치 물러서 있던 백무결의 애첩 중 하나인 옥선랑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야, 혁팔이! 벌써 주눅 든 거냐? 임마, 웃기지도 않다!”
도천혁도 실수했다고 느꼈던 터에 옥선랑에게 비웃음까지 듣게 되자 마음이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옥선랑은 그가 백무결을 침상에서 암살하라고 보낸 절정 미녀 중 하나였다.
그녀는 암살녀로 키워질 때만 해도 주군이라며 얼마나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혁팔이라고 놀려대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헤유, 이 무슨 망신발이란 말이냐.’
모욕을 당하느니 그냥 빨리 죽어버리자는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한편 백무결은 나름대로 철저히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가볍게 극렬순백장을 이용해 견제하며 초식을 교환하도록 하자. 그리고 다음에는 은하장(銀河掌)을 이용해 지치게 만든다. 그리고 거의 천여 초를 교환할 때쯤에 비로소 천세만세초박살공을 이용해 대폭발에 가까운 공격으로 매듭을 짓는 것이다. 아마 그때쯤이면 도천혁도 최후의 무공을 끄집어 내놓겠지. 후후후.’
대충 공격에 대한 계산을 끝낸 후 백무결은 신형을 날렸다.
“간다.”
그의 몸이 빗살처럼 움직이며 흰 광채를 그리며 날아갔고, 그와 거의 동시에 도천혁도 달려들었다. 두 신형이 거의 동시에 중간 지점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크게 충돌했고 거대한 폭발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퍼어엉!
너무도 강력한 충돌이었다.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던 이들조차 몸이 흔들리며 다시금 더 뒤로 물러서야 할 지경이었다.
충돌이 이루어졌던 곳은 뿌연 흙먼지가 오 장여의 높이까지 치솟아 잠시 동안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 뿌연 먼지 속에서 힘겨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쿨럭쿨럭…….”
숨이 차 쿨럭거리는 소리는 도천혁의 목소리였다. 그것을 들은 백무결의 애첩들과 수하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한 방에 끝나 버렸구먼.”
“애구, 이거 너무 싱거운걸.”
“미친놈, 그러게 자결을 하는 것이 훨씬 나았지.”
“웃흥! 가가, 너무 멋져요!”
“야호~”
“혁팔아, 이젠 안녕이구나!”
그칠 줄 모르는 환호성 속에 잠시 뒤 먼지가 내려앉았고, 상황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도천혁은 허리를 숙인 채 거칠게 콜록이는 것이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이 보였고, 백무결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였지만 두 다리를 굳건히 한 채 서 있었다.
“끝내 버리십시오.”
“가가, 마무리하세요.”
“제가 어깨를 주물러 드릴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백무결은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평상시의 그라면 애첩들의 환호성에 뒤돌아 방긋 웃어주거나 손을 흔들었을 텐데 말이다.
그때 콜록이며 곧 쓰러질 것 같던 도천혁이 가만히 손을 뻗어 백무결의 가슴께를 살그머니 밀었다. 그 광경은 아주 천천히 이루어진 것이었고 마치 시간이 느려져서 모든 만물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도천혁의 손은 특별히 힘을 세게 준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그냥 가볍게 밀었을 뿐이다. 하지만 백무결의 몸은 맥없이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니, 결코 저렇게 돼서는 안 되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순간 아무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털퍼덕.
끝내 백무결의 몸이 지면에 닿아 축 처졌고, 입가와 눈가에서 피가 새어 나와 땅을 적시고 있었다.
혹시 꿈인가 생각하고 있던 백무결의 애첩들은 그제야 놀라 비명을 질러대며 난리도 아니었다. 천위십대고수는 체통을 지키느라 차마 비명은 지르지 못하고 깊은 신음만을 내뱉었다.
도천혁은 기침을 멈추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기운찬 웃음이었기에 전혀 몸에 이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으하하! 이놈, 알고 보니 별거 아니로구나! 으하하하!”
도대체 이 상황은 어찌 된 것이란 말인가? 애첩들과 십대고수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의 진실은 의외로 간단했다.
백무결은 계속해서 이 대결을 역사에 길이 남을 대결로 남기고자 노력했고, 도천혁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으로 이 상황은 설명할 수 있었다.
백무결은 과거 수많은 영웅과 악당들의 결투가 마지막에 이르러 비장의 무공을 꺼내 최후의 격전을 벌였던 것을 염두해 두었던지라 처음에는 중간 정도 수위의 무공을 펼쳐 낸 것이고, 도천혁은 이미 포기한 상태라 마지막 비장의 무공을 인정사정없이 처음부터 그냥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것이다.
결국 백무결의 오만방자함이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만 셈이었다.
왜 꼭 비장의 무공은 마지막에 펼쳐야 한단 말인가.
그는 너무도 강호를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바람에 맥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만 것이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이제 다급하게 된 것은 백무결의 수하들과 애첩들이었다.
사실 백무결과 비교했을 때 도천혁의 무공이 낮은 것이지 백무결의 수하 백 명을 갖다 놔도 결코 도천혁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고만장하던 이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겁 많은 애첩들은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요.”
“사실 백무결 저놈이 협박하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 따라다녔을 뿐입니다.”
아까까지 욕을 해댄 옥선랑은 애걸의 정도가 더욱 심했다.
“저는 극독을 복용시키고 해독제를 주지 않으면서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중 염치없는 여인들은 꽃웃음을 짓고 쾌활하게 움직이며 도천혁에게 엉겨붙었다.
“아잉, 가가, 수고 많으셨어요.”
“어깨 아프시죠?”
“얼마나 힘드셨어요? 그래, 어린 놈이 까부는 것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하셨죠? 까르르르!”
백무결을 추종하던 천위십대고수들은 서로 당혹스런 눈빛을 교환하다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저희의 충성을 받아주십시오.”
도천혁은 연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승리는 좋은 것이다.
권력은 무공에서 비롯되는 강호의 생리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지 않는가.
게다가 아까까지 상당히 비굴한 입장이었지만 이젠 아무 염려도 할 것이 없었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니 이 대결도 멋지게 왜곡시킨다면 훌륭한 전설과 신화로 남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하하하, 도대체 백무결 이 자식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어리벙한 장력을 펼쳤더란 말인가? 다 이긴 것으로 생각하고 낭만을 꿈꾼 것이냐? 후하하하!’
그는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
천하의 절세미녀들과 고수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다가 그는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한 대씩 후려갈겼다.
“그래, 아까는…….”
파악~
“다들 신났었지?”
파악~
“재밌더냐? 응? 어땠어?”
파팍!
“말을 해봐!”
파악~
“재밌었냐구?”
파팍!
“뭐, 혁팔이? 너, 진짜 죽고 싶냐?”
파파파팍! 파파팍!
“아까 너, 나보고 혀 찼지?”
파파팍! 팍팍!
내공을 싣지 않은 타격이라 죽지는 않을 터였지만 어찌나 세게 쳤는지 맞은 이들은 모두 몸이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그들은 머리가 땅에 처박힐 만큼 얻어맞고서도 얼른 자세를 가다듬고는 바르게 무릎 꿇는 자세를 취했다.
몇 대 후려갈기고 나자 도천혁은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이제 천하는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아무도 몰래 슬그머니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흐흐, 진짜 아프다.’
어느새 하늘은 붉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겨 절벽에 이르러 어깨를 활짝 펴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먼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낭만이여~ 그대가 나를 살렸구나! 고맙다! 낭만 만세!! 하하하하!!”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