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24화 (24/125)

# 24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하늘의 눈과 하늘의 그물은 피할 수가 없는 법이지요. 어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하늘이 지켜보고 있음까지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도 보지 않은 곳에서 죽인다는 말은 하늘 아래에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음, 바로 그것이 옳은 말이오. 축하드립니다. 그대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하였소이다.”

놀랍게도 아홉 명 중 여덟이 하늘의 눈을 의식했다고 답했다. 결국 본선 두 번째 문제로 여덟만이 합격하게 되었다.

송음조가 결과를 받아 들고 내공을 운용해 큰 소리로 발표했다.

“여기 여덟 분의 공자가 본선 두 번째 과정을 통과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늘의 눈은 천라지망과 같아서 어떤 방법으로도 피할 수 없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여 새를 살려온 분들이었습니다!”

모두들 그 답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정 그 마음 씀씀이가 어찌 그리 아름답냐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관문에서 떨어진 이들 중에는 그제야 사악한 늑대의 이빨을 드러내는 이들도 등장했다.

“문제를 똑바로 내야 할 것 아니냐! 우리는 그저 순종했을 뿐이다! 죽여오라고 해서 죽여온 것뿐인데 우리가 뭘 잘못 했더란 말이냐? 이건 인정할 수 없다! 무효다, 무효!”

“여기까지 왔으니 얼마라도 돈을 내놔야 할 것 아니냐? 그동안 내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값은 받아야겠다!”

그런 모습에 관람객들은 역시 사람을 제대로 구별했다면서 저런 이들이 끝까지 남았다면 그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 있겠냐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여덟 명.

심옥천(深玉穿), 방약(坊躍), 도엽(度獵), 감무(甘巫), 연리호(淵悧豪), 천규(擅叫), 석운천(石殞泉), 그리고 설충(雪蟲)이란 이름으로 참가한 심온이었다.

***

외전. 마운봉의 결투(강호 X파일을 공개한다)

영웅 백무결(白無缺)!

‘결점이 없다[無缺]’는 이름의 뜻만으로는 사실 그를 전부 표현하긴 힘들었다. 그는 결점이 없는 것을 초월하여 장점으로만 가득한 인간이었다.

천재적인 두뇌와 극한의 고난을 극복해 내는 강인한 의지, 거기에 눈부신 외모와 덕망 넘치는 인품은 진정 영웅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세상을 아수라로 몰고 가던 수라교의 붉은 야망을 잠재운 것도 바로 백무결이었다. 숱한 고수들을 짚단처럼 쓰러뜨린 그는 끝내 수라교의 교주(敎主)인 이 시대의 진정한 악당 불사천마(不死天魔) 도천혁(度千革)과 마주 섰다.

마운봉(摩雲峰)의 정상.

이곳까지 이르는 동안 백무결은 열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일곱 번의 기연과 만났다.

그 과정을 훗날 전해 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입을 벌린 채 다물지를 못했다. 그것은 가히 사람으로서 넘을 수 없는 역경과 인연이라 그것을 달성한다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숱한 불행과 만났지만 그때마다 강인한 의지로 극복하여 더 큰 행운이 되게 했고, 천고의 무학들을 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쉬잉~

한줄기 바람이 산봉우리를 휘돌아 지나쳤다.

영웅 백무결과 악의 화신인 도천혁이 서로 마주 선 채 바라보고 있는 광경은 사뭇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도천혁의 수하들은 남김없이 죽은 터라 그의 곁에는 허허로움만이 감돌 뿐이었다.

그에 비하자면 백무결의 주변은 호화찬란 그 자체였다.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혁혁한 공을 세운 천위십대고수(天位十代高手)와 백무결의 무공과 용모에 반하여 처와 첩이 되길 바라 마지않은 약 이십여 명의 여인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솔직히 이들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건 백무결에게 한 팔의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천위십대고수도 나름대로는 절정의 실력자라 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백무결이 없는 상태에서는 불사천마 도천혁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저 처첩과 십대고수의 동행은 사실상 과시용이라고 봐야 했다.

그래서인지 백무결의 주위는 환한 태양 빛이 내리쬐는 것 같은 데 반해 도천혁이 서 있는 공간은 고작 초승달이 떠 있는 것마냥 어딘가 침침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나 마지막 승부를 점하는 시점에 수라교주 도천혁의 신위(神威)는 가히 일대 종사다운 면이 있었다. 그는 비록 홀로 남았지만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장부의 기상이 산맥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도천혁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새하얀 양털구름 한 가닥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이것이 운명이란 말인가?’

그는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라교를 통해 모든 사파를 일통하고 정파를 궤멸하여 전 무림을 손아귀에 넣으려 하는 순간 절세기재인 백무결의 등장으로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가 정보를 통해 듣게 된 백무결의 살아온 길은 가히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신비한 영초들이 무더기로 백무결의 입으로 기어들어 갔고, 이미 죽은 줄로만 알았던 전대 고수들이 정신 나간 놈들마냥 내공을 송두리째 건네주고는 뒈지고 말았다.

그뿐이라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겠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수라교 내에 삼백여 명의 기민한 수하들을 두고는 전설의 신공을 찾아내도록 명했다.

그들은 신공을 탐지하는 대원들이라 하여 ‘탐공대(探功隊)’라 이름 붙였는데, 죽도록 노력한 탐공대가 찾지 못한 것을 백무결은 너무도 간단간단히 신공들과 조우했다.

오백여 년 전의 절대고수 마영환영(魔影幻影)의 비밀 묘지를 발견하고는 기기묘묘신기막측(奇奇妙妙神奇莫測)한 무공을 익히게 된 것을 시작으로 우내쌍선(宇內雙仙)이 남긴 검선오검(劍仙五劍)을 익혔고, 추혼노괴(追魂老怪)가 남긴 적반신공(賊反神功)을 얻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추혼노괴가 남긴 적반신공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적반신공은 도천혁이 익힌 하장신공(荷杖神功)의 극성이라 가히 천적과도 같은 무공이었다.

실제로 도천혁이 탐공대를 통해 가장 찾고 싶어했던 무공도 적반신공이었다.

물론 오늘에 이르는 동안 백무결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무림제패의 야욕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기재로 보이는 싹들을 잘라 버리는 데 빨랐고 또 그만큼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하늘의 뜻인지 백무결에게만큼은 수많은 살인 계획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아 결국 오늘에 이르고 만 것이다.

도천혁은 극한 상황이 아니고선 절대로 쓰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미인계까지 동원했지만 백무결의 목숨을 취하는 데는 실패했다. 아니, 실패가 아닌 참패였다. 도리어 꼬드기라고 보낸 절정의 미인들이 모조리 백무결에게 마음을 빼앗겨 역으로 정보를 건네주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만 것이다.

지금 백무결 주변에 있는 여인들 중 절반가량이 미인계를 위해 보낸 절세미녀들이었다.

도천혁 자신도 ‘영웅은 호색이다’를 부르짖었는데 두 눈 멀거니 뜨고 빼앗겨 버렸으니 뱃가죽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그 후로도 암살 시도는 계속 이루어져 무공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의 백무결을 수하 중 다섯 명이 척살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만 사지를 절단내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하고 말았다.

도천혁이 제일 경계하고 주의를 주었던 부분이 바로 절대 절벽에서만큼은 떨어지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기에 당시 그의 분노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놈들아, 내가 뭐라고 그러던? 절대로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했지? 내 말이 우습게 들리던? 이제 어쩔 거냐, 이 죽일 놈들아! 으아악!!”

그가 심장이 터져 버릴 기세로 분노한 것은 이제껏 수많은 악당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볼 때 그들은 꼭 한 번씩 기재들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얻었지만 그때마다 절벽 아래로 놓치고 말아 훗날 큰 후회의 결실을 낳고 말았기 때문이다.

도천혁은 전 인원을 동원해 절벽 아래를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시체를 찾지 못했고, 그로부터 일 년 뒤 백무결은 추혼노괴의 절세무공인 적반신공을 터득해 강호에 등장해 오늘날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는 도천혁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자신의 인생만큼은 역대 악인 선배들과는 다를 것이라고 자부했건만 어쩔 수 없이 똑같은 입장에 서게 되자 참으로 허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화창한 날씨는 도천혁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 같아 못내 하늘에 대해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나의 마지막을 이리도 맑은 날씨로 비췸은 온 세상이 기뻐한단 말인가? 내가 그리도 나쁜 놈이었더란 말인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백무결과 그 일당들이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밝고 화기애애하게 웅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당장에라도 잔치를 벌일 기세였다.

‘그래, 좋기도 하겠지. 휴, 젊은 놈이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할 줄 모르고 죽이려고 기세등등해 있는 꼬락서니하고는. 말세다, 말세. 노인을 공경할 줄 모르는 시대가 오고 만 것이야.’

도천혁은 속으로 말세를 부르짖었지만 솔직히 그가 노인 공경 운운하기엔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열두 살 때 육십대 노인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하는 것으로 노인 공경과는 담을 쌓고 지낸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때 백무결 곁에 있던 천위십대고수 중 수장이랄 수 있는 절세신권(絶世神拳) 오주가 백무결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 소리는 나름대로는 작게 속삭인다고 한 것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의 무공 경지를 감안하고 보자면 들으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주군, 어서 목을 따버리죠.”

백무결은 여유롭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도천혁은 흠칫하면서 오주 쪽을 바라보았다.

‘저, 저 새끼를……!’

백무결은 주변을 한 번 돌아보더니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의 처첩들이 오주의 말에 덧붙여 한마디씩 간지러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가가, 아잉~”

“어서 끝내고 오세요.”

“저런 버러지가 세상에 남아 있다는 게 너무 싫어요.”

“그럼요. 세상이 오염되잖아요.”

“서방님, 저놈을 죽인 후 제가 이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드리겠사와요.”

“가가,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실 작정이세요. 저 인간하고 한 하늘 아래 있기 싫어요.”

이외에도 차마 글로 적어내기 어려울 정도의 닭살의 언어들이 휘몰아쳤다. 도천혁에게 있어서는 피눈물이 날 만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저, 저것들이! 아주 떼로 지랄이냐. 썅.’

도천혁의 당황스러움에 비해 백무결은 그런 반응들을 즐기는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수하들과 애첩들은 모두들 빨리 끝내기를 바라지만 결코 그럴 순 없다. 이런 대결이야말로 세대를 이어가며 역사에 기록될 것이며 전설이 되어 남을 터이니 멋진 대결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법이다.’

그는 역대 수많은 영웅과 대악인의 대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접할 때 가장 마음에 남았던 내용들은 주로 ‘칠 일 밤, 칠 일 낮’을 싸워 끝내 승리했다는 것이나, ‘삼 일을 주야’로 싸워 승리했다는 식의 장대한 결투 끝의 결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대결이 전해져 내려갈 때 멋지기는 하겠으나 막상 직접 실천하려고 하니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백무결이 판단할 때 그와 도천혁 사이엔 엄연한 실력 차가 있었다. 질질 끌면서 시간을 끄는 것은 그다지 재미가 없을 터였다.

그래서 마음으로 정한 대결 구도는 일단 초반, 중반, 종반으로 나누어서 약 한 시진(두 시간) 안에 끝내는 계획이었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무공인 적반신공 중 천세만세초박살공(千歲萬歲超撲殺功)을 사용한다면 단박에 끝나 버릴 것이지만 그래선 재미가 없을 것이다.

역사에 기록되길 ‘한 방을 날렸더니 적이 가루가 되어버렸더라’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심심한 기록이 되겠는가.

적어도 초식이 난무한 상황에서 점점 승리를 점하다가 절정에 이르러 둘 다 마지막 비장의 능력을 사용해 승부를 갈라야 멋진 승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법칙과 같았다.

‘후후, 도천혁 네놈도 악당 중의 악당이라 자부해 왔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을 터. 역사에 길이 남아 나 백무결과 천 초를 겨루어졌다 정도로 남도록 해주마. 후후후.’

이제 점점 승부의 순간이 다가오게 되자 도천혁의 마음도 더불어 급해졌다.

손을 쓰게 되면 백전백패는 당연한 일이었다. 믿었던 수하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던 것을 그가 직접 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한 번 손을 교환해 보기도 했다. 결론은 ‘이길 수 없음’이었다.

‘장렬히 싸우다 죽어야 하는가, 아니면 자결을 하는 것이 나을까.’

그는 죽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어떻게 죽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결이 낫겠지?’

하지만 곧바로 생각이 바뀌었다.

막상 자결을 하려고 하자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올랐는데 여간 혼돈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손을 들어 장력으로 머리를 칠 생각을 하자니 뇌수가 사방으로 튀고 머리도 없이 목만 남게 될 것을 생각하니 그 모습이 영 볼썽사납게 여겨진 것이다. 죽는 마당에 그렇게 꼴불견스럽게 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무렴. 자세는 필수지.’

다음으로는 사혈(死穴), 즉 죽음에 이르는 혈도를 짚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도 단점이 있었다. 필히 몸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게 되는데 자칫 배설물까지 쏟아져 나오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독약이 최고긴 한데…….’

물론 간단하고 좋긴 했는데 현재 지니고 있는 마땅한 독약이 없었다. 그는 지존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독약을 늘 상비하고 있었다. 혹여 더 큰 힘을 지닌 적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거나 비밀을 폭로하게 될 것을 염려해 지니고 있었던 것인데 지존의 자리에 올라서는 더 이상 그런 것이 필요없게 된 것이다.

독약이 제격이긴 해도 가지고 있질 않으니 백무결 일당에게 ‘독약 있으면 조금 줄 수 있냐?’고 말할 수도 없으니 이것도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목을 매자니 밧줄이 없었고, 게다가 밧줄을 매달 나무도 한참 걸어야만 있었다. 이래저래 자결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제기랄, 되는 것이 없구나. 죽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군. 벼락이라도 내려 죽는다면 후대에 이르러 ‘아깝게 승부 직전에 죽은 사파의 대종사 도천혁’이라고 기록될 수 있을 텐데 왜 이리 화창한가!??

그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어쩔 수 없이 자결을 포기하고 당당한 어조로 백무결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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