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23화 (23/125)

# 23

“지존께서 이번 일에 거는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잊지 않았으렷다?”

“속하, 단 한시도 마음에서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심조극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선은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정파 놈들로부터 아이들을 빼내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한 계책은 마련되었느냐?”

그의 말속엔 많은 부분이 생략된 상태였다.

이 시대 마교에게 있어 순심선행대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순수한 영혼을 어떤 목적에서 찾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마교의 목표는 무림을 제패하는 일이었다.

오늘날 마교의 고민은 교의 위세가 과거에 비해 크게 쇠락해진 상태라는 점이었다.

약 오백여 년 전만 해도 마교의 힘은 정점에 달해 있었다. 정파의 모든 힘, 심지어 은거한 모든 고수를 다 끌어 모은다 해도 마교의 힘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천하무림 정벌을 선포한 마교의 승리는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규모 진격을 하루 앞둔 날 밤 짐작도 하기 힘든 비극이 임하게 될 줄을 짐작한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황당무계한 일이었다. 당시 교주를 비롯한 수뇌부 칠십여 명이 모두 전멸하는 사태를 맞고 만 것이다. 초절정고수들의 죽음 이후 마교는 지금까지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건 오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떤 이유로, 누구에 의해서 절대고수 반열에 선 수뇌부 칠십여 명이 살해당한 것인지 전혀 밝혀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뒤로 마교의 후예들은 절치부심하여 마공을 연성하며 꾸준히 힘을 키웠으나 초절정고수들과 그 무공의 핵심 구결을 전수받은 후계자들이 거의 한꺼번에 사망한 까닭에 제대로 마공 비급을 연마할 수 없게 되어 과거의 명성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오늘날 사파의 위상 중 마교의 위치는 혈전문(血戰門), 마곡(魔谷), 수라궁(修羅宮) 다음으로 거론되고 있는 입장이었다.

이런 와중에 마교에서는 십여 년 전 뜻하지 않게 ‘흑련강시(黑練R屍)’에 관한 비급을 발견하게 되었다. 교주는 물론이고 수뇌부들이 뛸 듯이 기뻐한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즉시 연구에 돌입하여 지상 최강의 강시를 완성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것의 핵심은 가장 순수한 영혼을 지닌 이를 취해 강시로 제련했을 때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었다.

십 년의 계획 속에 마교에서는 강시로 제련할 수많은 독물과 약물을 준비하였고, 바로 십 년이 찬 이 시점에서 철저히 정파의 가면을 두르도록 심어놓은 진룡표국을 이용하여 순심선행대전을 개최케 한 것이다.

본선에서 거르고 걸러질 순수한 영혼의 아이들은 흑련강시가 되어 마교의 충성스런 살인 무기로 재탄생하게 될 것이다.

“염려 놓으십시오. 정파 놈들은 결코 그 아이들을 차지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 말에 이어 진우종은 상세한 계획을 보고했다.

“본선을 통해 열 명 이하로 남게 된 아이들은 곧바로 모종의 누명을 뒤집어쓰게 될 것입니다. 원래 근본이 악한 아이들인 것처럼 세상에 공표하면 천하는 수많은 실망과 탄식이 흐르고 정파무림은 비통에 잠길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순수한 영혼들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고, 그때 표국에서 나서서 주최자인만큼 이들의 형벌 또한 맡겠다고 말한다면 그 누구도 토를 다는 자는 없을 겁니다. 그 뒤 순수한 영혼들을 은밀히 교로 옮기면 세상은 마교의 부활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설명을 다 들은 심조극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두운 밤이었다.

“취조 결과는?”

“그게 말입니다.”

“왜?”

“강호를 위해서랍니다.”

“뭔 소리야?”

“순심선행대전은 오직 정파의 번영을 위한 것이라는 말뿐입니다.”

“환사(幻士) 네가 직접 시술했는데도?”

“그렇습니다.”

“난감하군. 진우종을 잡아야 하나?”

“그건 좀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렇죠.”

“음, 제길, 그럼 내가 다 감당해야잖아.”

“그 길밖에 없겠습니다.”

“이런 젠장할. 알았어. 그만 가봐.”

“후흑!”

“그래, 후흑!”

환사(幻士) 초균(超均)의 신형이 연기처럼 스러지고 나자 심온은 짜증스런 시선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분명 이번 순심선행대전에는 구린 냄새가 났기에 직접 대회에도 참가하였고 그와 동시에 진룡표국의 부국주를 잡아다 환사가 자랑하는 취명심법(醉冥心法)의 환심술(幻心術)로 표국의 뒤에 숨은 실체를 캐내려 했던 것인데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이다.

국주 진우종을 잡아다 취명심법을 펼치기엔 그의 무공이 약하지 않아 환심법에 저항할 우려도 있었기에 난감해지고 만 것이었다.

만 명 중에서 예선을 거뜬히 통과한 순수한 영혼의 심온은 쓰게 입맛을 다시다가 ‘커억’ 하며 가래침을 뱉고는 은밀히 숙소 쪽으로 안개처럼 사라져 갔다.

* * *

드디어 본선 첫째 날이 밝았다.

이날은 아침부터 대회장 주변으로 긴장이 감돌았다.

안개는 없었지만 구름 낀 하늘 때문인지, 긴장과 묘한 기대 심리 때문인지 안개가 가득 끼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아침이었다.

본선에 오른 구십팔 명의 면면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

정갈한 눈빛에 몸가짐마다 교양이 자연스럽게 배어났다. 언뜻 보더라도 그들 중에서 우열을 가리긴 매우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만 명이 넘는 인원 중에서 구별된 이들다웠다.

본선 관문이 시작되기 전, 오전 시간을 통해 진룡표국의 국주 진우종은 일일이 본선에 오른 소년들에게 악수로서 격려했다.

관람객들과 참가자들의 궁금증을 안고 송음조가 우렁차게 본선 첫 번째 관문에 대해 외쳤다.

“본선 첫 번째 관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예선 때와는 달리 각자에게 서로 다른 지시 사항이 내려질 겁니다! 번호표를 나누어 드릴 테니 순서에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오시고, 그때 지시하는 내용을 실천하시면 됩니다!”

1번 번호표를 받은 이는 허목(許穆)이었다.

그가 들어간 천막 안에는 진우종이 탁자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거기 앉게.”

허목은 분위기에 압도된 중에도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걸 잘 챙겨두게나.”

진우종이 탁자 위에 내어놓은 건 한눈에 보기에도 꽤 값어치가 있어 보이는 팔찌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보는 바대로 팔찌네. 그것도 대단한 값어치가 있는. 긴말하지 않겠네. 이 팔찌의 값어치는 주루 하나를 통째로 살 만한 정도지. 자넨 이것을 가지고 마을로 내려가 전표로 바꾸어오면 되는 것이야. 이것은 귀중한 물건이고 또한 공자에게만 주어진 관문이니 다른 사람에게 노출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주게. 만일 이것이 노출되면 괜한 탐욕을 불러일으킬까 두려워서 하는 말이네. 자네에게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제값에 바꿔오느냐일세. 자, 그럼 나가보게. 반드시 해가 지기 전까진 돌아와야 함을 잊지 말게.”

설명을 들은 후 팔찌를 챙기는 허목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부들거렸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자가 받는 상금은 은 열 냥이건만 이 팔찌는 거의 두 배 내지 세 배 정도의 값어치를 지닌 것이었던 것이다.

“염려 마십시오. 그럼 조금 뒤에 뵙겠습니다.”

허목이 나간 뒤 순번의 배치에 따라 다섯 번째 응시자가 들어왔다.

그를 한 번 쓰윽 본 진우종은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허목에게 준 것과 한 점 다를 것 없는 팔찌였다.

“자리에 앉게. 자, 그러니까 말이야. 자네에게 주어진 임무란 이 팔찌를…….”

진우종의 발밑에는 세 개의 큰 보따리에 팔찌가 약 사십여 개가 담겨 있었으며, 그가 들은 내용의 말은 거의 대부분 허목에게 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먼저 나간 허목의 걸음은 거의 날아갈 듯했다.

‘이건 내게 주어진 인생의 기회다! 그래, 멀리 도망가는 거야. 1등이면 뭐 하겠는가, 이만큼의 돈도 받지 못할 것을. 차라리 이것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되고 내 남은 생애도 보장해 줄 것이다. 어쩌면 본선까지 오른 나에 대한 하늘의 선물일지도 모르잖는가.’

허목의 발걸음은 어느새 대회장과 멀어져만 갔다.

그렇게 허목처럼 떠나간 사람의 숫자는 절반이 약간 넘는 오십사 명이었다. 이들은 보물에 대해 제시받고서 자신에게만 특별한 보물이 주어진 줄로 착각하고 한몫 단단히 붙들었다는 마음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씩 그들에게 들려준 말이 다르긴 했는데 허목에게는 전표로 바꿔오라 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지도를 함께 건네며 각기 정해놓은 장소에 그 보물을 놓아두라는 식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만나서 실상을 파악하는 일이 없도록 안배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는 일 중 결정적인 건 이 보물이 전부 모조품이라는 것이었다. 팔찌를 들고 튄 이들은 훗날 봉변을 당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팔찌만 팔면 얼마든지 큰돈을 챙길 수가 있다는 생각에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마구잡이로 빌려 쓴 사람도 있었고, 도박에 빠져든 사람도, 심지어 팔찌를 자랑하며 여자를 사귀어 이제 대단한 부자가 될 거라며 혼인하자고 말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건 비참함이었다. 한낱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판정을 받은 후 일생을 고리대금업자의 추적을 받는 몸이 되었는가 하면, 재수없이 붙들린 경우엔 섬으로 팔려 가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팔찌로 인해 강도를 당해 고통 중에 죽어간 이도 있었고, 정신 분열 상태에 빠지는 한편 팔찌로 여자를 유혹했던 이는 혼인 빙자 간음죄로 고소당해 관가로 끌려가 옥에 갇히게 되기도 했다. 욕심이 빚어낸 결과는 그처럼 참담함뿐이었다.

거의 만여 명에 이르던 참가자의 수는 본선 두 번째에 이르러 마흔여섯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들이야말로 그 어떤 보물에도 흔들림없는 마음을 소유한 자들이란 칭송과 함께 뭇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저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영웅이군.”

“앞으로 강호는 저들의 것이 아니겠나!”

“얼굴을 잘 기억해 두세.”

“아무렴. 얼굴도 오늘 이날도 잊어선 안 되지.”

여기저기 쏟아지던 찬사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송음조가 본선 두 번째 관문에 관해 발표했다.

“먼저 지금까지의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분들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보냅니다! 자, 그럼 본선의 두 번째 과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잠시 후 진행 요원들로부터 각기 한 마리씩의 새를 받게 될 겁니다! 여러분들이 할 일은 그 새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몰래 죽여오는 것입니다. 절대 누군가에게 새를 죽이는 장면을 보이면 안 됩니다. 시간은 총 세 시진(여섯 시간)입니다.”

거기까지 송음조의 설명을 듣던 관람객들이나 응시자들은 모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번 과제는 순심선행대전과는 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일상 속에서 새 요리는 여러 음식 중의 하나일 뿐이었지만 지금 이 대회의 성격상 대회의 한 과정으로 새를 잡아 죽인다는 건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송음조의 이어지는 큰 음성이 가라앉혔다.

“참가자 분들은 저기 오른쪽 편에 보이는 화극산(華極山)으로 올라가시길 바랍니다! 대회의 진행을 위해 관람객들에 한하여 입산을 금하오니 이 점 유의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모두는 약간 어리둥절한 상태였지만 이제껏 뜻 없이 제시된 문제가 없었던 터라 깊은 속뜻이 담겨 있으리라 믿고 저마다 흩어져 산에 올랐다.

두 시진가량이 지나면서 한두 사람씩 대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대부분의 손엔 머리를 축 늘어뜨린 새의 주검이 들려 있었다.

세 시진이 거의 임박해 오자 마흔여섯 명의 응시자가 모두 대회장으로 돌아왔다.

진행 요원이 세 개의 깃발을 삼 장의 간격으로 꽂고서 응시자들에게 말했다.

“제일 왼쪽 깃발 쪽으론 새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죽여온 분들이 서주시고, 중앙 깃발 쪽에는 보는 곳에서 죽여온 분들이, 맨 오른쪽 깃발엔 새를 죽이지 못하고 오신 분들이 서주시길 바랍니다.”

제일 왼쪽에 자리한 이들의 숫자는 열아홉 명이었고 중앙에 자리한 이들은 열다섯 명, 그리고 새를 버젓이 산 채로 들고 있는 열두 명이 오른쪽에 섰다.

질서있게 정돈되자 국주 진우종이 성큼거리며 나왔다. 그는 제일 왼쪽으로 다가가 그들을 향해 물었다.

“그대들은 정녕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새를 죽여온 것이 확실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진우종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대들은 새를 죽이긴 했는데 누구에게 발각된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이려고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그만 눈에 띄고 말았습니다.”

“속일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 사실대로 말하는 것입니까?”

“하하, 그거야 제가 천성이 거짓을 싫어하다 보니…….”

그러면서 소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누가 보더라도 ‘너무 착하다 보니 늘 손해만 본답니다’라는 몸짓이었다.

진우종이 그들을 향해 몇 번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에 제일 왼쪽에 서 있던, 즉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가운데 새를 죽여왔다는 이들의 속이 뒤집어졌다. 왠지 자신들이 큰 실수를 저지른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진우종의 발걸음은 새를 산 채로 들고 있는 오른쪽 무리들에게로 갔다.

“그대들은 새를 죽이지 않고 여전히 살려서 왔군요. 자, 이 중에서 차마 마음이 여려서, 새가 불쌍해서 차마 죽일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분은 여기에 남고 다른 이유로 새를 살려서 온 이들은 이 옆으로 따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열두 명 중 아홉 명이 따로 옆으로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중앙 쪽에 자리한, 착한 심성 때문에 사람들 보는 곳에서 죽여왔다는 이들의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짜 선한 것을 따지자면 새를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는 걸 그제야 느낀 것이다.

“그럼 여기 아홉 분들은 다른 뜻이 있었나 보군요. 그 뜻이 무엇이었는지 천천히 들어보고 싶소이다.”

진우종이 뒤로 손짓하자 요원 아홉이 다가와 각기 한 명씩 인도해 밀실로 들어갔다. 그들이 무슨 뜻으로 새를 살려온 것인지 듣기 위함이었다. 따로 구별함은 함께 줄을 지었다가 말을 듣게 되면 혹여 앞에 말한 사람의 말이 그럴싸할 경우 그 말을 고스란히 따라 할 수 있음을 우려한 까닭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요원이 물었다.

“설 공자, 그대는 어찌하여 죽이지 않았소이까?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오?”

그 말에 설충이란 이름으로 위장하여 대회에 참가한 심온이 순수함의 극치를 이루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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