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21화 (21/125)
  • # 21

    “썩어 빠진 의식 세계 진룡표국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남녀 차별 웬 말이냐! 죽고 싶어 환장했냐!”

    “환장했냐! 환장했냐! 환장했냐!”

    “자격 요건 완화하여 아름다운 세상으로!”

    “세상으로! 세상으로! 세상으로!”

    하지만 각종 협박과 시위가 이어져도 진룡표국은 산처럼 굳건하여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근본적으로 자격에 관해 분통을 터뜨린 사람들의 공통점은 혹여 기이한 술법이나 요법으로 설사 나이나 성별을 조건에 맞게 되돌려 놓는다 해도 결코 이들은 예선조차 통과할 수 없는 사람들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금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은 그 돈이 원래 자기 것이라도 되는 양 큰 소리로 분노를 터뜨리길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시간은 흐르고 흘러 예정된 날짜 구월 초하루가 되었다.

    낙양은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순심선행대전에 참가하겠다고 접수한 사람들만 해도 만 명이 넘는 데다 구경을 온 사람들은 그 열 배가 되는 십만 명이 모여들었으니 가히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혹시 소문만 요란하고 사람들의 반응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하던 낙양 일대의 상가들은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리고 좋아했다. 이제껏 여러 차례 대목을 맞아보긴 했으나 이런 경우는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대목이었던 것이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혼잡하긴 했으나 질서가 붕괴되어 난장판이 되거나 하진 않았다. 대회가 지니는 의미가 클 뿐 아니라 진룡표국의 국주 진우종의 명망도 드높아 각 무림정파마다 많은 고수들을 파견하여 통제원의 일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소림, 무당, 화산, 개방 등의 구파일방은 물론이고 여러 군소 방파들도 아낌없는 후원을 하였는데, 거기엔 단순히 대회의 의의만을 고려한 건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관심은 훌륭한 인재에 대한 것이었다. 정파 무공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곧 정심한 마음이었기에 순수한 영혼을 지닌 기재를 거두는 것은 문파의 백년대계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다.

    더불어 대회의 규모가 거대하여 세인들의 관심이 지대한 만큼 자파를 홍보하는 수단으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대회장 주변에는 각 문파의 홍보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중원무림(中原武林)의 태산북두(泰山北斗) 소림사(少林寺).

    ―검(劍), 장(掌), 권(拳)! 태극의 힘이 그대에게. 무당파(武當派)

    ―그 누가 화산파(華山派) 앞에서 검을 논할 수 있는가?

    ―정심, 정대한 기운 곤륜(崑崙).

    ―그대, 청성인(靑城人)이 되어라.

    ―진정한 힘은 가장 낮은 곳에 웅크리고 있다. 개방.

    ―신묘하고 표홀한 기상, 그 누가 짐작이나 하랴. 점창파(點蒼派).

    나름대로 큰 세력을 갖춘 문파들은 후원이 많았던 만큼 거대한 깃발을 나부꼈고, 그에 반해 군소 방파들은 상대적으로 작은 깃발을 내걸었다. 그 때문에 조금 더 홍보 효과를 내기 위해 자극적인 문구를 넣기도 했다.

    ―무공이 강한들 무엇 하랴. 평생 숫총각으로 산다면 그건 차라리 지옥이리라. 천약문(天約門).

    ―평생 숙식 무료 제공. 몸만 오시라. 소오방(昭悟幇).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함께 커나갑시다. 진충문(眞忠門).

    그중 천약문의 문구는 소림파를 걸고 넘어가는 것이었던 탓에 소림파의 강력한 항의와 협박으로 인해 며칠 뒤 다른 문구로 바뀌었다.

    ―십 년 후의 지상 최강의 문파 천약문(天約門).

    이처럼 순심선행대전을 둘러싸고 수많은 사건과 사연들이 뒤얽힌 가운데 드디어 때가 이르렀다.

    넓은 평지에 일만 명을 상회하는 참가자들이 자리했고, 그곳을 빙 둘러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인파가 둘러쌌다.

    워낙 많은 사람들인지라 각기 옆 사람과 조그맣게 웅성거리고 있는 것임에도 그 소리가 모이고 모여 파리 떼 수백만 마리가 윙윙거리는 것처럼 소란스러웠다.

    개최자인 진룡표국의 국주 진우종이 삼단으로 쌓아 올린 연단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기를 머금은 눈, 지혜의 말을 담고 있을 입, 태산의 무게라도 감당할 것만 같은 어깨, 흐트러짐없는 몸가짐. 어느 것 하나 대인의 풍모가 느껴지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그의 등장으로 대회장 주변의 웅성거림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워낙 많은 인파로 인해 아직까진 제아무리 내력을 기울여 음성을 발한다 해도 목소리가 전달될 성싶진 않았다.

    그때였다.

    “지금부터 국주님의 대회 개최에 대한 말씀이 있겠습니다. 참가자나 관전자 모두 경청해 주시길 바랍니다!”

    진우종이 서 있는 연단 오른쪽에 모여 있던 백 명의 ‘송음조(送音組)’가 외친 소리였다. 이들은 내력이 심후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소리를 보내는 이들이라는 뜻처럼 미리 정해진 안내 말을 내공을 일으켜 박자에 맞춰 공포했다.

    쩌렁하며 퍼져 간 소리는 일순간에 대회장을 압도해 사방은 한순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함에 빠졌다.

    비로소 진우종이 입을 열었다. 역시 내공을 일으킨 상태에서였다.

    “이곳까지 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원대한 꿈을 안고 기획한 대회(大會)에 기대한 바 컸지만 기대를 훨씬 넘는 뜨거운 호응을 받게 되어 그저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순심선행대전을 개최한 데는 각자 근본을 돌아볼 시간을 가져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인도에 혼자 살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곳에는 큰 전각이 있고 최고급 술과 맛있는 음식들로 가득합니다. 비단옷이 수백 벌이며 각종 보석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과연 그의 삶이 행복하고 만족스런 풍요롭다 할 수 있을까요? 그의 풍요는 단 며칠에 불과할 겁니다.”

    진우종이 잠시 말을 멈추고 연단 위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듣는 이들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종이 말을 이었다.

    “그 후엔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어떻게든 무인도를 탈출하고픈 마음뿐일 겁니다. 사람 인(人) 자를 떠올려 보십시오. 사람 인 자는 두 존재가 서로 기대어 선 형상입니다. 만일에 그중 하나가 떠나 버린다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아무짝에나 쓸모없는 폐인(廢人)이 되어 한일(一) 자로 바닥에 드러누워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를 발한 탓에 그것이 모여 큰 감탄사가 되어 대회장을 울렸다.

    “어떤 분들은 왜 일개 표국에서 이번 대회를 개최했는지 궁금해하십니다. 표국은 세상천지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길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음을 직접 체험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호위를 부탁하는 이들이 전에 비해 부쩍 늘었습니다. 표국의 일이 많아졌다는 말씀을 드리려 함이 아닙니다. 그만큼 불신이 만연되고 있다는 겁니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세태를 돌아보며 본 표국에서는 이번 대회를 통해 새로운 중원 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삭막함이 아닌 따스함으로, 질시의 눈이 아닌 함께 기뻐하는 눈으로, 기쁨은 나누어 두 배가 되게 하고 슬픔은 나누어 반으로 줄이는 그런 세상이 오도록 말입니다!”

    진우종이 오른손을 쭉 뻗어 올리자 군중들로부터 열렬한 박수 갈채와 휘파람 소리가 쏟아졌다. 장대비가 지붕을 때리는 소리들을 모두 모아 한곳에 집중시킨 듯 엄청난 소리였다.

    저대로 가만 내버려 두면 하루 종일 박수가 끊이질 않을 것 같았다. 열렬히 환호하는 소리에 진우종은 고개를 숙여 정중히 답례했다.

    잠시 후, 진우종이 손을 들어 군중들을 진정시키자 서서히 박수는 잦아들었다.

    “끝으로 대회 기간 동안 참가하신 분들이나 관전하시는 분들 모두 질서있는 행동을 보여주시어 대회의 의의를 더욱 빛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혹여 불미스런 일을 자행하려는 분이 있다면 곁에 계신 분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만류해 주십시오. 시작을 함께한 것처럼 끝도 모든 분들과 함께 기쁨으로 마치고 싶습니다.”

    다시금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1차 예선은 그 후 곧바로 속개되었다.

    사전에 어떤 형태의 시험을 치를 것인지 알려진 바가 없었기에 참가자들과 그 가족, 친지들은 긴장과 초조 속에 송음조의 음성을 기다렸다.

    전방에 청의로 일관된 복장을 갖춘 진행 요원 백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가슴패기에는 금박으로 순심(純心)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등 쪽엔 선행(善行)이라는 글귀가 박혀 있었다.

    그들은 길게 횡으로 나란히 늘어섰다.

    기다렸다는 듯 송음조의 안내가 쩌렁하며 울렸다.

    “청색 장삼의 진행 요원들을 기준으로 참가자들은 두 줄로 정렬하시오!”

    잠시 우왕좌왕하긴 했으나 또 다른 진행 요원들인 백색 장삼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참가자들 사이를 오가며 정돈을 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반듯하게 정렬되었다. 진행 요원들은 하나같이 각 정대문파의 제자들로 구성된 까닭에 참가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면서도 통제에 잘 따르도록 선도하여 특별한 마찰은 없었다.

    배치가 완벽히 이루어지자 송음조의 안내가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예선 첫 관문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주제는 눈[目]입니다. 예로부터 눈은 마음의 창(窓)이라 했습니다. 사람과의 대화에서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눈을 보면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말로 표현되기 전에 먼저 반응하는 것도 눈입니다. 그러나 결코 눈의 모양을 따지진 않을 것입니다. 눈빛이 맑거나 빛나는 여부, 혹은 눈이 크고 작고로 부당한 판결을 내리진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수많은 관중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로 잠시 송음조의 말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대부분의 여론이 공감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수군거림은 점차 줄어들었다.

    송음조의 말이 이어졌다.

    “앞에 선 청색 장삼의 진행 요원들은 각 정파에서 오랜 기간 정신적 수련을 거친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한 사람씩 눈을 통해 합격과 탈락을 결정할 터이니 모두 질서있게 임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첫 번째 관문인 ‘눈은 마음의 창’은 거의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끝을 맺었다. 주최 측의 예상보다 훨씬 늦은 시각에 끝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엔 판결에 불복한 이들의 항의와 자격 요건에 맞지 않는 자들을 가려내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뭐야? 얼굴 생김새는 전혀 보지 않는다고 하더니 왜 날 저버리는 것이냐?”

    “말도 안 돼! 내가 왜? 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탈락시키는 것이냐?”

    “이 새끼들 이거, 다 사기야!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거라구!”

    “우리 아이는 원래부터 잠 오는 눈이란 말이다! 아무리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인상을 쓰려 해도 보는 사람들마다 잠이 오나보다 생각하는데 이 일을 어쩌란 것이냐, 이 자식들아! 제발 통과시켜 줘!!”

    “눈빛이 어쨌다고 탈락시키는 것이냐? 우리 아이는 눈병이 걸려 붉게 된 것이란 말이다! 이걸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우리는 억울하다! 이 판결은 무효다, 무효!!”

    그들의 눈엔 독기가 가득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질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기에 곁에서 지켜본 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들의 탈락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합격한 무리들 중에서 눈이 붕어처럼 튀어나오거나 한쪽 광대뼈만 불쑥 돌출된 이, 사각턱과 주걱턱, 심지어 어린 나이에 머리숱이 별로 없어 대머리에 가까운 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코 미추(美醜)를 통해 당락을 결정한 것이 아님을 안 것이다.

    첫 번째 관문의 결과는 육천여 명의 탈락으로 남은 이는 약 사천여 명이었다. 탈락자가 많았던 것은 탈락자 중 삼분의 일이 나이와 성별의 자격 요건에 맞지 않아 가려진 까닭이었다.

    거의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했다가 탈락하게 된 소년들 중에는 도리어 부모에게 화를 내는 이들도 있었다.

    “제길, 이게 뭐야!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돈 좀 더 써서 옷도 새로 사고 머리 모양도 잘 다듬자니까! 거지꼴로 나오니까 이렇게 된 거 아냐? 이제 앞으로 창피해서 어떻게 살라고 그래!”

    “엄마는 내 눈이 호수 같다더니 이게 뭐야? 진실은 대체 뭔데?”

    그러다 부모에게 대든다고 뒤지게 얻어 터졌다.

    조금은 감동적인, 그리고 조금은 소란스러운 순심선행대전의 첫째 날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2차 예선에 참가한 인원은 사천 명가량이었지만 관람객은 더욱 늘어 탈락하고 돌아간 육천여 명과 그 가족들의 자리를 메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송음조 백 명이 열을 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의 얼굴엔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주제가 제시될 것을 생각지 못했기에 두 번째 관문에 대한 기대가 커져 있었던 것이다.

    송음조의 커다란 음성이 쩌렁하며 울려 퍼졌다.

    “2차 예선은 불러주는 문장(文章)을 바로 듣고 바르게 적어야 하는 관문입니다! 글을 쓰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충분한 공간을 두고 자리에 앉아주시길 바랍니다!”

    요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응시자의 앞쪽에 지필묵을 가져다놓았다. 거의 반 시진(한 시간)에 걸쳐 지필묵 전달이 끝나자 송음조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지금부터 문장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아까부터 전전긍긍하는 무리들이 때가 되자 비로소 웅성거렸다.

    “저는 글을 잘 모르는데요. 배운 적이 없어요.”

    “집안일만 돕느라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소년들의 말과 함께 멀리서 지켜보는 부모들도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이리도 어려운 게야?”

    그래도 이번 항의자들은 순진한 편이라 별다른 소란은 없었다.

    진룡표국에서 아주 간단하나마 이런 문제를 출제하게 된 것은 아무리 선한 영혼을 찾는다 해도 바보를 뽑을 순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순하다는 것과 바보스럽다는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훗날 무공을 익히게 될지도 모르는 터에 구결을 전수하는 데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눈만 멀뚱거리고 있다면 그보다 난감한 일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송음조가 크게 외쳤다.

    “잘 들으십시오! 일일불념선 제악 개자기(一日不念善 諸惡 皆自起:하루라도 착한 일을 생각지 않으면 모든 악한 것이 저절로 일어나느니라)!”

    이 글귀는 장자(莊子)가 남긴 선한 행실에 관한 것이었다.

    송음조는 간격을 두고 세 번을 크게 외쳐 듣지 못해 기록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다. 넉넉히 붓을 놀리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을 때 송음조가 다시 쩌렁하며 음성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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