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14화 (14/125)

# 14

그러나 그가 비록 그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더라도 이미 뭇 사람들 앞에서 하체를 드러내는 추태와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기에 그가 받은 정신적 타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건 후일담이지만, 그로 인해 부양배는 사건이 벌어진 지 열흘 뒤 양치파 부두목의 자리에서 물러나 환원객잔에서 구애했던 여인에게 진심을 보이고 두 사람이 한적한 시골 마을로 들어가 남은 일생을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심온과 엄장, 그리고 강 노인은 사람들의 놀란 시선을 뒤로하고 환원객잔에서 이백여 장 정도 떨어진 상보객잔으로 자리를 옮겼다.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객방 하나를 빌려 술과 안주를 가져오게 한 후 세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대들은 보상에 대한 결정을 할 만한 위치에 있소이까?”

강 노인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 마구간 앞에서 외칠 때부터 지금까지 강 노인의 태도는 유유자적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도 대개 엄장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는데 강 노인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사실 엄장은 이곳에 이르는 동안 강 노인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위해서 고의로 기세를 높였었다. 그로 인해 무공의 고하를 판별하고, 또한 거짓으로 꾸며 후흑문을 등치려는 수작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강 노인은 기세에 크게 대응하지 않았고 주눅이 드는 것도 아니라 심온과 엄장은 기이하게 여기는 중이었다.

“물론이오.”

엄장이 답했고, 심온이 바로 설명을 보충했다.

“우리는 비록 하급자들에 불과하지만 선량하시고 호남아이시며 무림에서 최고로 멋진 문주님께선 우리의 말을 백이면 백 다 믿어주실 것이오. 그러니 염려는 마시구려.”

엄장은 심온이 자기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을 보며 눈을 흘기자 심온이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살아 있는지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면서 ‘흠흠’ 하고 잔기침을 했다.

강 노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어 빈 잔에 술을 따라 심온과 엄장에게 건네고는 한숨을 내쉬듯 입을 열었다.

“좋소. 그럼 이제부터 길고 긴 내 이야기를 하리다.”

도둑질 이백오십 회.

강도질 구십팔 회.

강도 짓하러 갔다가 혹해서 강간한 것이 십오 회.

강도 짓하다 그만 살인까지 저지르고 만 것이 일 회.

이것은 강두(姜逗)가 스물여덟의 나이 동안 이룩한 업적(?)이었다.

그러다 스물아홉의 생일을 맞게 된 날 강두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바로 그날 객잔에서 홀로 자작하고 있을 때 눈앞에서 펼쳐진, 이제껏 흥미로운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고수의 눈부신 무공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아야 삼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근육질의 다섯 사내에 둘러싸여 곤란한 상황을 맞았다. 조만간 코피를 쏟고 뼈가 두서너 개 부러진 다음 객잔 밖으로 내던져질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엉뚱하게도 다섯 명의 건장한 주먹들의 뼈가 제멋대로 어긋나 버리고 말았다. 다소곳해 보이던 사내가 몸을 한 번 솟구치는 것을 시작으로 투다닥, 타닥,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상황은 아주 간단하고도 우습게 끝나 버리고 만 것이다.

솔직히 강두는 사내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도 못했다. 그것은 강두에게 있어 대충격이었다.

마치 신선이 내려와 나비처럼 나부끼니 악한 자들이 팔랑거리며 쓰러져 버렸더라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것 같은 결투에 강두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사이 삼십대 초반의 고수는 한 손으로 부채를 차락 하고 펼치고는 또 다른 손으로 뒷짐을 진 채 인파들 사이를 뚫고 유유히 사라졌다.

강두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쩐지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 뒤를 쫓았으나 인(人)의 장막(帳幕)을 헤치고 난 후엔 어디에도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부터 강두의 머리 속에는 절세고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찼다.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잠을 잘 때나 음식을 먹을 때나 어느 한순간 절세고수에 대한 꿈을 꾸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렇게 재밌던 강도 짓과 그 와중에 덤으로 얻게 되는 상큼한 강간마저도 시큰둥하게 여겨질 따름이었다.

하루하루 무림고수가 되는 꿈에 사로잡혀 살던 강두는 나이도 나이인지라 한 방의 기연으로 뜻을 이루어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강호 인맥(人脈)이 전무(全無)하고 그다지 뛰어난 기재라고 볼 수 없었기에 한탕이 아니고서는 절세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의 이 년여 동안 험한 산과 강, 바다까지 두루 다녔으나 강두는 기연 쪼가리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동안의 여정이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다.

무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그는 이 년이라는 기간 동안 무림의 기이한 조직과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중 마음을 붙든 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후흑문이었다.

해결의 벼랑이라 불리는 후흑애(厚黑崖)에 자신의 간절함을 담은 의뢰서를 던진 지 한 달가량이 지났을 무렵 홀연히 한 노인이 그 앞에 나타났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는 기운을 풍기는 노인이었다.

“절세고수가 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유는?”

“약한 자들을 돕고 사악한 무리를 응징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바른 대답이라면 ‘멋지잖습니까? 여자들도 많이 따를 테고’가 될 테였지만 사실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훌륭한 생각이군.”

“후흑문은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물론이지.”

“그럼 가능하단 말씀이십니까?”

“의심하는 건가?”

“용서하십시오. 실언하였습니다. 어르신,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힘을 얻는다는 건 그만큼 힘든 여정이 따른다는 점이다.”

“어떤 역경도 극복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이라도?”

“그렇습니다.”

“좋다. 너는 악한 자를 응징하겠다고 하니 물론 정파의 무공을 익히고 싶겠지?”

“물론입니다.”

“음, 그럼 마교로 가는 것이 좋겠군.”

강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어수룩한 그였지만 마교가 어떤 곳인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뭔가 짐작하기 힘든 깊은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정중히 물었다.

“저는 귀가 둔하고 배움이 부족합니다. 자세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무릇 사파의 무공을 익히려는 이는 정파로 가야 하고, 정파의 무공을 익히길 원하는 자는 마교로 가는 것이 옳다.”

연거푸 선문답 같은 말에 강두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하하하, 근심하지 말라. 내 자세히 들려주마. 정파의 무공 중 특출한 것들은 사실 모두 마교 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과연 마교에서 정파의 무공이 보관된 곳은 어디일까?”

“마교가 비전 무공을 약탈하여 보관해 둔 장소가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곳은 바로 마교의 지하 뇌옥이다. 그곳에는 정파의 고수들이 갇혀 있다. 고독과 원한에 사로잡힌 그들이 오직 마교의 무공을 깨뜨릴 수 있는 비법을 창안하는 것으로 지독한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그제야 강두는 왜 힘들다고 했는지, 마교에서 정파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고 한 것인지 확연히 깨달았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말로 할 수 없는 감동에 몸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버리는 자는 얻고 보존코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다. 가거라. 그리고 절세무공을 익혀 세상을 구하여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후흑문이었다.

강두는 감사한 마음에 크게 희사(喜捨)한 후 곧바로 마교로 향했다.

먼 길이었고 찾아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가는 길에 마교로 찾아간다고 하자 오해를 사 죽이려 한 사람도 있었고,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을 마교도로 착각하고 잘해주는 사파인도 있었다.

거의 반년의 세월을 지나 마교에 도착하게 된 강두는 마교의 문전에서 마교를 저주하고 교주를 능멸하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어쩌면 감옥에 갇히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꿈을 가진 그로서는 꿈을 포기하는 건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기에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생명을 버리는 각오라면 얻고 생명을 보존코자 하면 잃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대번에 잡혀서는 어떤 목적으로 온 것이냐는 질문과 함께 온갖 고문을 당했지만 다행히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 이런 놈은 단번에 죽이는 것보다 오랜 시간 고통당하며 살도록 해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진 탓이었다.

꿈에 그리던 뇌옥. 그곳으로 끌려가면서 강두는 감사함에 흐느꼈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었지만 끌고 가는 간수들은 질질 짠다고 또 흠씬 두들겨 팼다. 그래도 강두는 기뻤다.

큰 것을 얻기 위해선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법.

강두에게 이 정도의 고통은 고통도 아니었다.

강두는 지하 뇌옥의 철문이 열리고 헌신짝처럼 던져졌다.

처음엔 낯선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나 점점 어둠이 익숙해지면서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자, 이제 사부님을 찾자.’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사면의 벽을 훑어보는데 한쪽 벽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미간에 힘을 주고 살피던 강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발의 노인이 사지를 쭉 뻗은 채로 쇠사슬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노인의 머리카락은 거의 무릎에 이를 정도였기에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매달려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강두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목이 메고 가슴은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소용돌이쳤다.

‘나의 사부님,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이 제자가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계셨을 나의 사부님이시다.’

강두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올렸다.

“사부님, 제자 강두,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강두의 목소리는 격정에 차 심한 떨림을 보였다.

“누가… 들어온… 건가?”

힘겨운 목소리였다.

“저는 사부님으로부터 무공을 전수받아 사부님의 원한을 풀어드리고 강호의 안녕과 평안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고의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부디 이 제자를 어여삐 보아주사 절세의 무공을 전수해 주십시오. 비록 아둔하지만 힘껏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강두가 피 끓는 어조로 말하곤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공기의 흐름마저 정지된 것 같은 침묵이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노인의 입이 열렸다.

“이 먼 곳까지 무공을 배우기 위해 고의로 들어왔다는 말이냐?”

방금 전과는 달리 노인의 목소리에도 격정이 담겨 있었다.

“그렇습니다. 이 제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으하하하하하!!”

통쾌한 웃음과 함께 노인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 미친 새끼야!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그러니까 네놈은 이곳에서 무공을 전수받겠다 이거냐? 얼빠진 놈 같으니! 내가 누군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

“그래, 알 리가 없겠지. 이 미친놈아, 내가 바로 오십 년 전에 무공을 배우겠다고 고의로 들어왔다가 뒤지게 맞고 지금 이렇게 평생을 매달려 지내게 된 사람이다. 이 미친놈아, 정신 차려! 너는 인생 종 친 거야!”

노인의 목소리는 거의 벼락처럼 강두의 몸을 강타했다.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네? 그, 그게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잘 들어라, 이 미친놈아! 너도 나처럼 속은 거야! 정파의 최고 무공을 익히려면 마교에 들어와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 미친 새끼, 세상천지에 나 같은 인간이 또 있을 줄은 몰랐군.”

절망이 비수가 되어 강두의 심장을 후벼 팠다.

“으아아아아악!!”

강두는 미친 듯이 절규하며 사방을 떼굴떼굴 굴렀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나 돌아갈래!!??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 강두는 절망의 늪에 빠져 연일 신음했다. 그동안 자신이 범한 숱한 악행에 대한 응보인 것만 같아 뇌옥의 모퉁이에 기댄 채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와중에도 강두의 선배라 할 수 있는 노인은 연신 조롱하는 말을 아끼지 않고 퍼부어댔다.

그렇게 칠 일이 지났다. 이젠 눈물도 다 말랐고 울 힘조차 없게 된 강두는 얼이 나간 표정으로 그저 멍하니 뇌옥의 철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이틀이 지나 이젠 노인의 조롱도 멈추게 되었을 때, 강두는 얼빠진 선배 노인을 보면 마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벽을 바라보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작은 돌멩이로 낙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 신세 한탄을 적어 나가던 강두의 눈이 한순간 빛을 뿜었다.

신(神) 자가 희미하게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라 소맷자락으로 벽을 문질러 본 강두는 그만 혼이 나갈 것만 같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절세신공(絶世神功).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틀림없었다. 흥분에 휩싸여 연거푸 벽의 먼지를 털어내던 강두는 끝내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흐흑, 찾았다! 드디어 찾고야 말았어!”

강두의 외침에 잠시 졸고 있던 노인이 짜증스런 목소리를 냈다.

“광자(狂者)야, 뭐가 있다고 소란을 떠느냐! 잠 좀 자자.”

노인은 이틀 전부터 강두를 광자, 즉 미친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강두의 귀에는 노인의 잔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으하하하! 드디어 발견했다! 드디어 내가 찾아낸 것이다!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구나! 으하하하하!!”

너무도 기뻐하는 모습에 노인은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는 깜짝 놀라 물었다.

“무, 무슨 일이냐? 정녕 그곳에 무공이 적혀 있더란 말이냐?”

“흐흐흐, 노인장은 운이 없는 모양이구려. 절세신공은 내 차지요. 이제 이곳을 벗어나는 일은 시간문제일 뿐이오.”

“잘된 일이다, 잘된 일이야. 부디 네가 나갈 때 나도 꺼내다오.”

“하는 것 봐서 내 그리하리다.”

“암, 내가 워낙 착실하잖아.”

강두는 노인의 말을 무시하고는 이제 확연히 드러난 글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절세신공의 이름과 그 아래 세세한 구결과 해석, 그리고 동작이 적혀 있었다.

―태권도(跆拳道).

큰 글자 아래 태극 1장이라는 글이었다.

―태극(太極) 1장.

태극 1장은 팔괘의 건(乾)을 의미하며, 건은 하늘과 양(陽)을 뜻하는 것으로 건이 만물의 근원이 되는 시초를 나타낸 것과 같이 태권도에 있어서도 맨 처음의 품새다.

그 아래로는 고려, 금강, 태백, 평원, 십진, 지태, 천권, 한수, 일여까지의 세밀한 구결과 사람의 형상을 그려놓아 익히는 데 문제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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