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12화 (12/125)

# 12

꽈르륵, 꼬륵, 꼬륵, 꼬…….

결국 극한까지 호흡을 참아내던 노제강은 더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쿠에엑! 컥컥!”

물을 거칠게 토해내면서 방주 노제강은 정신을 차렸다.

뭔가 입술이 끈적거리는 느낌에 누운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머리맡에 다소곳이 앉은 홍보단주 정포의 모습이 보였다. 정포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쓰다듬으면서 어쩐지 수줍어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서, 설마……?’

노제강은 자신이 물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숨이 멎었다는 것과 방금 전 물을 토해냈다는 것, 그리고 끈적거리는 입술 등을 통해 명확히 사태를 파악했다.

그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떨군 채 한없이 눈물을 쏟았다.

‘정녕 입술을 빼앗겨 버린 건가? 아, 살아보겠다고 비굴하게 뛰어내린 것도 모자라 저 수염이 꺼칠한 놈이 입술을 대고 숨을 불어넣었단 말인가? 진정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

그때 싸늘한 음성이 두 사람의 고막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여유 부릴 시간이 없을 텐데? 잠잘 시간을 확보하려면 좀 더 빨리 움직이는 게 좋지 않을까?”

십이령 중 번통(蕃通)의 말에 정포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듯 벌떡 일어나 산 위쪽을 향해 맹렬히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는 노제강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노제강은 파다닥 소리가 날 정도로 일어나서는 정포가 그랬던 것처럼 미친놈마냥 산 위를 향해 치달렸다.

필사방 무리의 ‘절벽 생(生)으로 뛰어내리기’는 약 스무 번 정도가 지나자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뛰어내리는 것 자체가 공포였으나 점점 갈수록 물속에서 나와 다시 산 정상까지 달려오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급기야 서른 번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뛰어내리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그때만큼은 아무 고통도 없이 허공에 몸을 맡기면 되었기 때문이다.

해시(亥時:밤 10시경)가 되어 결국 대부분의 필사방인은 오십 번을 채우고 그토록 그리던 취침 시간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중 일부, 즉 중간에 고통을 벗어나고자 탈출을 기도하다 걸린 이들은 스무 번의 추가 추락을 명받았다.

그들의 면면은 방주 노제강과 수호단주 장송수, 수정단주 묵해영, 섭외단주 금율이었는데, 이들은 탈출 과정에서 잡혔을 때 이미 분근착골수(分筋錯骨手)를 당하여 뼈마디가 완전 분해되었다가 조립되는 고통을 겪은 뒤였기에 다시 스무 번의 추락을 시행하게 되자 거의 미치고 환장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어떤 반항이나 탈출 기도는 다시금 뼈 분리 작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밤새 흐느적거리며 끝없이 추락해 갔다.

“으아아아악!!”

풍덩!

‘절벽 생(生)으로 뛰어내리기’에 대한 소식은 가까운 마을에 알려지면서 가진 건 시간밖에 없는 노인네들이 강 건너에서 이른 아침부터 구경을 나왔다.

처음 그들의 대화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강호인들이겠지?”

“대단하군. 저런 수련을 거쳐야만 되다니 말일세.”

“저건 담력 훈련일까, 아니면 자맥질 훈련일까?”

“둘 다겠지.”

“여보게, 대체 무슨 훈련을 하는 겐가?”

노인장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십이령 중 번통에게 묻자 번통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흑막(黑膜)을 더욱 두텁게 하는 일이지요.”

노인장들은 그 말뜻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알아들은 척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노인장들은 구경하는 것 자체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엿새째가 지나면서부터는 응원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뭐야, 좀 더 멋지게 뛰어내릴 순 없는 거야? 양팔과 양다리를 활짝 벌리고 뛰어내리는 건 진부하다니까.”

“다음번엔 허공에서 세 바퀴를 돌아보라구. 그래야 수련생 중에서 좋은 점수를 따지.”

“그렇게 힘이 없어서 험한 강호에서 살아남겠어?”

“자, 여기 물 좀 마시고 하게나.”

“여기 떡도 있어.”

필사방인들은 노인네들의 열렬한 호응에 그저 가슴이 무너져 내릴 뿐이었다.

***

7. 마교(魔敎) 지하 뇌옥의 비밀

필사방 무리들이 절벽에서 부지런히 뛰어내리고 있는 무렵, 그때까지 별다른 일 없이 한가한 날들을 보내던 심온에게 총관 오교가 얼굴 가득 의아함을 띠고 다가왔다.

“뭐야? 왜 그래?”

심온이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대고 두 발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까딱거리면서 물었다.

“최근에 온 의뢰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말입니다.”

쩌억.

“자, 먹어.”

심온이 손에 쥐고 있던 사과를 두 쪽으로 갈라서 절반을 오교에게 던졌다. 오교는 가볍게 받고는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심온 옆으로 끌어다 놓고 앉았다.

“직접 보시죠.”

사각~

심온이 사과를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서신을 받아 들고 읽어 나갔다.

비뚤거리는 서체가 꼭 지렁이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나는 약 사십여 년 전, 후흑문에 나의 고민을 해결해 줄 것을 의뢰했다. 그러나 후흑문은 그 의뢰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바이다. 나를 만나려거든 개봉의 환원객잔으로…(후략)…….

강두(姜逗).

서신의 뒷 내용은 언제쯤 오라는 말과 그냥 무시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정말 희한하네. 사십 년 전이라……. 음, 후흑사적(厚黑事跡)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지?”

후흑사적이란 의뢰의 내용과 결과를 빠짐없이 기록해 놓은 후흑문의 공적서(功績書)였다. 얼마 전 심온이 기연 행불자들을 찾은 내용 또한 고스란히 기록되어진 터였다.

“그게 말입니다,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왜?”

“기록 내용이 너무 간단했습니다.”

“혹시 사부님이 직접 기록하신 거야?”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내용이 이렇습니다.”

0월 0시에 강두를 만났다.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소원을 들어줬다.

강두가 기뻐했다.

나도 기뻤다.

오교가 감정을 배제하고 적힌 내용을 읊자 심온의 표정이 퀭해지고 말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강요를 못 이겨 억지로 일기를 쓴 것 같은 내용과 다를 바 없었다. 거기에 날씨 맑음이라는 말만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 그게 다야?”

“떠나신 어른에 대해선 장주님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음냐.”

심온은 사부가 저런 식으로 따로 기록해 놓은 것들은 뭔가 해괴한 일이 벌어졌음을 의미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 년 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소림의 공명 대사가 은밀히 후흑문주를 찾는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도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후흑사적을 살펴본 결과 공명과 관련된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땡추는 공명이라고 했다.

개고기를 먹고 있었다.

다리 한 짝 달라고 했더니 슬며시 등을 돌렸다.

화가 났다.

패버렸다.

고기는 내 차지가 되었다.

고기는 꿀맛, 아니, 고기 맛이었다.

후흑사적 한쪽 귀퉁이에 아주 조그마한 글씨로 낙서하듯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현 소림 방장의 사형인 공명 대사가 어떻게 당시 자기를 팬 자가 후흑문주일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 일로 후흑문은 공명을 모른 척 씹을 것인지, 아니면 어떤 보상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결론은 정면 승부로 마감하자였기에 은밀히 재화당을 파견해 잘 익은 열 개의 개 다리를 선물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공명으로서도 사실상 얻어맞은 것이 소문 나는 것도 바라지 않았고, 뭔가 후흑문을 상대로 복수를 하기보단 단지 사과를 받으면 족하다고 여겼던 터라 기쁜 마음으로 개 다리를 받고 끝냈다.

그런데 이제 강두라는 노인네가 사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보상을 요구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만나봐야겠군.”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보상 문제가 구체적으로 나올 수도 있으니 함께 가시죠.”

“재화당주하고?”

“네.”

“음, 괜찮을까?”

“돈 냄새에 관해선 재화당주를 따를 자가 없잖습니까. 만약 허튼수작을 부려 돈을 빼내려 한다면 재화당주가 기민하게 포착해 낼 것입니다.”

“음, 좋아. 그렇게 하지.”

재화당주(財貨堂主) 엄장(儼壯)은 후흑문의 모든 돈의 출납을 담당하는 이였다. 그는 빠른 계산 능력을 지녔고, 일 처리는 빈틈이 없었으며 동전 한 닢조차도 금덩어리 대하듯 할 정도로 절약 정신이 투철했다.

또한 사람이 재물에 따라 마음이 요동하는 것을 잘 아는 터라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그는 후흑문 내에서도 가히 막강한 실력자였다. 그는 비록 서열상으로는 열네 번째였으나 모든 지출이 그에게서 이루어지는만큼 그의 존재감은 서열 그 이상이었기에 후흑문 사람들은 어떻게든 엄장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편이었다.

물론 제멋대로인 문주 심온과 총관 오교, 그리고 그보다 높은 서열에 선 이들은 엄장으로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인간들이었지만 그 외의 인간들에겐 철저히 주판알을 튕기며 지출 내역을 따지고 들었다.

그의 인상은 흔히 계산에 능하고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외형적인 특징들, 즉 왜소한 체구에 날카롭고 길게 찢어진 눈, 코 옆의 작은 점, 약간 굽은 어깨와 왼손엔 주판을 들고는 사방을 예리하게 살피는 모양새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야말로 뜬금없는 외모를 지녔다.

정녕 그를 외모만으로 따진다면 돈의 개념이 아주 희박할 것 같은 인간형이랄 수 있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건 무엇보다 보통 사람 두 배 정도는 족히 될 법한 건장한 체구였다.

거기에 더해 송충이 세 마리를 포개놓은 듯한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 사십구 세라고는 믿기 힘든 탱탱한 구릿빛 피부, 황소라도 때려잡을 만큼 큼지막한 주먹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심온이 총관 오교와의 대화 중에 엄장과 함께 가기를 잠시 망설였던 것 또한 엄장의 그런 지나칠 정도의 장대함 때문으로 사람들이 흘낏거릴 것이 귀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후은장원을 나서 개봉으로 향한 지 사흘째가 되는 날 점심 무렵, 엄장과 함께 나란히 말을 몰아가던 심온이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 벌써 또 배고파지네. 개방 방주가 내 뱃속에 들어왔나, 왜 이렇게 허기가 빨리 지는 거야?”

엄장이 슬쩍 심온을 째려봤다.

“소면(素麵:양념을 하지 않은 국수)으로 하시죠.”

“싫어. 난 오리탕 먹을 거야. 엄장 너, 또 소면 먹을 생각이냐? 너 벌써 사흘째 소면만 먹는데, 그러다 영양실조 걸린다? 얌마, 게다가 변비까지 올 수 있어.”

심온이 거의 혀를 차듯 이같이 말한 건 엄장이 돈을 아낀답시고 여기까지 오는 내내 가장 싼 소면만 시켜 먹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의 외출이니 좀 푸짐하게 먹으라고 해도 엄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전 소면 먹겠습니다.”

굳건히 하는 말에 심온이 눈썹을 갈매기로 만들면서는 말을 곁에 바싹 붙이고 손바닥으로 엄장의 머리를 연달아 쌔려 갈겼다.

타타타타타!

“제발 좀 말 좀 들어라. 그렇게 아깝냐? 내가 사줄게. 엉? 내가 사준다니까!”

엄장은 목을 잔뜩 움츠리고는 덩치에 안 맞게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전 소면이 좋다니까요.”

“에구, 황소고집을 누가 꺾겠냐. 그래, 니 잘났다.”

심온은 잘났다라고 말하는 순간 엄장의 머리를 한 대 강하게 후려갈기고는 ‘이랴’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내달렸다.

엄장은 저만치 달려가는 심온을 보며 입 모양만으로 ‘이런 씨발’을 외치고는 골목 어귀에 불량스러운 자세로 침을 틱틱 뱉어내고 있는 청년에게로 말을 몰아 그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너!”

순간 삐딱한 자세와 함께 ‘이건 또 뭐야?’라는 시선으로 올려다보던 불량배의 몸이 곧은 막대기처럼 빳빳해졌다.

말에 앉은 엄장의 거대한 체구가 햇빛의 역광을 받아 더욱 거대하게 보이는 까닭에 유비의 아우 관우가 현신한 것만 같은 위압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청년은 곧바로 덜덜 떨기 시작했다.

“자, 잘못했습니다요. 전 그, 그저 도끼파의 행동대장일 뿐인걸요. 차, 착하게 살게요.”

그러면서 청년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보자마자 울면 어쩌잔 말이냐. 괜히 미안해지잖아. 그래도 어른이 지금 기분이 안 좋으니까 몇 대만 맞아라. 알겠지?”

그로부터 닷새 후 신시(申時:오후 네 시경), 심온과 엄장은 개봉에 도착했다. 약속 장소인 환원객잔 앞에 이르러 두 사람은 밖에서 안내하던 점원에게 말고삐를 건넸다. 점원은 고삐를 받아 쥐면서 약간 염려스런 표정으로 엄장을 바라봤다.

“혹시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용무가…….”

“아, 네. 저쪽입니다.”

점원이 손으로 한곳을 가리키자 엄장이 심온에게 공손히, 하지만 힘겹게 말했다.

“저,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심온이 혀를 끌끌 찼다.

“쯔쯧, 그러게 기름기있는 음식을 먹으라니까. 이번엔 꼭 해결하고와! 또 계속 담아가지고 오면 확 그땐 진짜 결단날 줄 알아라!”

엄장은 심온이 예언(?)했던 대로 변비에 걸려 전혀 배설다운 배설을 하지 못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고수라면 능히 생리적 작용에 대한 조절이 가능한 법이었지만, 그럼에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건 그야말로 극강의 변비 증세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엄장이 후닥닥 뛰어가자 심온은 땅에 침을 퉤악 하고 뱉으며 객잔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뭘 드시겠습니까?”

“주문은 좀 있다 하기로 하고, 음,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노인장이 있는데 찾아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어찌 되시는지요?”

“강 노인. 이름은 두.”

“아, 강 노인 말씀이시군요? 요 며칠 객잔에 묵고 계십니다. 그렇잖아도 찾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하셨답니다. 음, 그런데 아까 나가셨답니다. 찾으러 다니시다 또 길이 어긋날지도 모르니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죠.”

“그렇게 하지. 그럼 간단히 두 사람이 마실 술과 안주를 부탁하네.”

점소이가 물러나자 심온은 느긋하게 객잔을 둘러보았다. 아래층에 아홉, 이층에는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약 열 네댓 명 정도가 자리한 것 같았다.

한순간 청력을 끌어올려 뭇 사람들의 대화를 일제히 검색하던 심온의 귓가로 흥미로운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심온은 다른 소리는 차단하고 그 대화에 집중했다.

“자꾸 왜 그래요?”

“내가 뭘 어쨌다고?”

“날 하찮게 여기지 말아요.”

“하찮게 여긴 적 없어. 중하게 여기니 안아보고 싶다는 거지.”

“당신에겐 내 몸만 중요한가 보죠? 왜 그렇게 서두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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