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9화 (9/125)

# 9

“너!”

산발이 된 네 여인이 눈이 도끼로 변했다.

“이야야야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총관 오교가 의아한 시선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말과는 달리 심온의 꼬락서니는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몸이 상한 건 아니었지만 옷이 무수한 칼날에 스친 듯 너덜거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흐흐, 성질 사나운 여인네들을 만나신 게로군요. 물론 얼굴은 예뻤을 것이구요.”

오교는 마치 곁에서 본 사람처럼 말했다. 오교가 알고 있는 문주는 여인이 아닌 그 누구라도 칼이 스치도록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

“다 그놈의 고양이 때문이야.”

“흑묘가 어쨌는데요? 흠, 혹시 흑묘 밥은 잘 챙겨주셨나요?”

“쩝, 알아서 쥐나 잡아먹으라고 내버려 뒀지.”

“아이고,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합니까요. 흑묘는 쥐 안 먹는다니까요.”

“무슨 소리야? 고양이는 쥐를 먹어야 건강한 법이야. 그게 순리지.”

“흑묘는 주로 양념 하지 않는 삶은 생선이나 육류를 주셔야 됩니다. 문주님께서 챙겨주질 않으니까 그 녀석이 삐친 것 아닙니까.”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문도가 감히 문주한테 삐치다니? 이건 명백히 하극상이야!”

심온이 목젖이 보일 정도로 흑묘를 성토하자 오교는 입을 쩝쩝 다시면서 이야기의 방향을 틀었다.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제가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나저나 담 소저 말입니다.”

“응, 그래. 어떻게 됐어?”

지금 두 사람은 후은장원에서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심온이 장원에 들기 전에 담유설에 관해 묻고자 오교를 슬쩍 불러낸 것이다. 지난날 오교에게 그녀의 본모습을 알아내라고 한 것에 대한 결과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게 말입니다.”

“뭐가 잘못됐어?”

“도통 약이 듣질 않아서…….”

“으잉? 매사괴의(每事怪醫)가 출타 중이었나?”

매사 하는 짓이 괴이하기 짝이 없다 하여 매사괴의라는 별호를 지닌 조약(曹躍)은 후흑문 최고의 의원이자 강호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한 이였다.

“그가 직접 나섰습죠. 그런데도 만약(萬藥)이 불통(不通)이었습니다.”

“아니,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어?”

“그 때문에 매사괴의는 실의에 빠져 매일매일 술만 퍼마시고 있습죠.”

“허허, 사람 하나 완전히 병신 만들어놨구먼.”

심온으로선 변왕이 역용의 귀재인 것은 알았지만 설마 하니 매사괴의를 좌절하게 할 정도로 독이나 유사독(類似毒)에도 조예가 깊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터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녀가 조금 변했습니다.”

“변해?”

거기서 더 변했다?

심온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하하하하, 이 얼마나 보기가 좋소이까?”

담유설을 바라보는 심온의 얼굴이 환한 복사꽃처럼 피어났다.

지금 맞은편에 앉은 담유설은 가히 경국지색의 미를 마음껏 뿜어낼 뿐 아니라 지적인 미소와 함께 약간의 수줍음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약간의 오해와 장난이 있었지만 이젠 다 털어내도록 합시다.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이미 대화는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심온은 당시 담 소저가 변왕의 딸로서 온 것과 필시 보이는 것처럼 추녀가 아닐 것임을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변왕으로부터 성질이 가끔 사나워진다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고자 과장된 말과 행동을 보였다고 순순히 고백했고, 담유설 또한 추한 모습을 보이고 난폭한 행동을 했을 때 후흑문에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랬다고 말하며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서로 간에 각기 다른 의도가 충돌한 것이었을 뿐이고, 또한 이미 사부와 변왕 사이에 약조한 바가 있었기에 심온은 지난 일일랑 모두 잊고 새롭게 출발해 보자고 말한 것이었다.

“장주께서 너그럽게 보아주시니 어떤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가 웬 말이오. 사람의 마음엔 여러 가지 생각과 의식이 있기 마련인데 그저 예의범절만 내세우고 산다면 그보다 답답한 삶은 없을 게요. 더군다나 실수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찌 마음 편히 다가갈 수 있겠소이까. 가끔 허술한 모습이 있어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흉금을 털어놓고 서로를 이해하게 된 까닭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내원 안은 정겹고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각기 차를 한 모금씩 머금은 후 심온이 말했다.

“그래, 소저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소이까?”

“제가 어찌 스스로 일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

“괜찮소. 뭐, 대충 변왕이신 아버님과 무슨 말이 오갔을 것 아니오. 변왕께서 따로 말을 주진 않으셨소이까?”

“그에 대해 언급하긴 하셨지만… 말씀드리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 염려 말고 말해 보시오.”

잠시 망설이던 담유설이 손을 살며시 입에 가져다 댄 후 말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역용술을 전수하는 조건으로 후흑문에 들게 된 것이니 부문주나 장로의 지위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주의 자리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그건 정도가 지나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심온은 변왕이 거의 안하무인격으로 부문주나 장로를 언급했다는 말에 잠깐 기분이 상했지만 눈이 부실 정도의 미모와 그에 곁들여 다소곳이 말하는 담유설의 얼굴을 보자니 상한 마음도 눈 녹듯 녹아 고개를 끄덕였다.

“당주라……. 뭐, 당을 하나 만드는 건 특별히 어려울 게 없소이다. 음, 내친김에 지금 이야기를 마무리 짓도록 합시다. 자, 보자. 어떤 성격의 당이 좋을까…….”

턱을 어루만지며 심온이 골똘히 생각하고 있으려니 담유설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저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강호의 경험도 일천하니 많은 경험을 쌓아보고 싶습니다.”

“음,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모양이구려. 좀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그러니까 어떤 일에도 투입될 수 있는 당주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하하, 미모와 달리 참 호기심이 많구려. 좋소이다.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활동하는 것이라면 자유당이라고 칭해야 하나? 아니지, 그건 너무 단순한 이름 같은데. 뭐, 다른 좋은 말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럼 방종당(放縱堂)이라 함은 어떨는지요?”

“방종당! 오, 썩 괜찮은 이름이오. 자유에 날개를 단 듯 시원스럽고 유쾌한 명칭이구려. 방종당주로 합시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톱니바퀴처럼 딱딱 들어맞아 진행 속도가 거침이 없었다.

이쯤에서 심온은 가장 핵심적인 것, 즉 문주로서의 권리를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자,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새겨들으시오.”

“귀를 씻고 경청하겠습니다.”

“원래 후흑문의 문주는 문도들에게 공대를 하지 않소이다. 그건 이제껏 진행되어 온 전통이라오. 문주가 당주에게 존대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소저라고 해도 예외가 될 순 없소이다. 이제 담 소저는 당주라는 직책을 받고 후흑문의 확고한 일원이 되었으니 나는 앞으로 그대에게 공대를 하지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오.”

“네, 방종당주 담유설, 문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녀가 충성스런 수하의 모습으로 답했다.

“그래, 좋소. 아니, 좋다. 앞으로 자랑스러운 후흑문의 당주가 되길 바란다. 자, 그럼 오늘을 축하하는 의미로 함께 술이나 하도록 하자.”

그 말에 담유설의 얼굴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이제 막 당주가 된 입장이니 술보다는 잠시 장원을 둘러보며 마음을 가다듬었으면 합니다.”

“허허, 그래. 네 마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여라. 그만 나가보도록.”

담유설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녀가 막 문을 열고 나서려 할 때였다.

순간 그녀가 멈춰 섰다.

“야, 문주!”

심온은 느닷없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 그만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힉!”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본 게 진짜 내 얼굴이었다고 생각해? 바보 같은 녀석! 흐흐.”

싸늘한 말과 함께 그녀가 돌아섰을 때, 그녀의 얼굴은 처음 심온이 그녀를 봤을 때의 추한 용모로 돌아가 있었다.

“히끅!”

“크크, 자식, 엄청 단순한 놈일세. 너, 아까 한 말 무르기 없기다? 알겠지? 난 이제 방종당주야. 그러니까 내 멋대로 해도 되는 거다. 설마 방종이란 말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아, 그리고 너, 나한테 반말하지 마라, 내가 더 나이 많으니까. 알겠어? 아,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해야겠다.”

“히끅! 히끅!”

그녀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완전히 문을 나섰을 때 이미 심온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딸꾹질을 멈추지 못했다.

“히끅! 히끅!”

기묘한 일이었다. 심온 정도의 성취라면 생리적 작용 정도는 충분히 조절할 수 있을 법도 하련만 딸꾹질은 새벽까지 멈추지 않다가 해가 솟아날 정도가 되어서야 그쳤다. 덕분에 심온은 밤을 꼬박 새다시피 하고서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르셨습니까?”

대충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자니 들라 일러두었던 오교가 들어왔다.

“어서 와.”

오교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 심온이 힘없이 물었다.

“방종당주인지 방탕당주인지 하는 작자는 뭐 하고 있어?”

“뭐, 지금이야 퍼질러 자고 있겠죠. 어제 밤새도록 술을 마셔댔으니까요.”

“허허, 미치겠네. 그래, 혼자 마셨어?”

“아닙니다. 매사괴의와 함께 마셨더랬습니다.”

“매사괴의? 이상하군. 괴의는 그녀에 대한 감정이 별로일 텐데?”

“그녀의 논리를 따르자면 뭐, 위로해 준다는 명목이었습죠. 그러나 결과는 매사괴의의 주화입마입니다. 그녀가 이번엔 노파의 모습으로 변해서는 말끝마다 자기도 당주니 말을 트고 지내자며, 그따위 의술 가지고 어디서 행세하겠느냐고 씨부렁거려서 매사괴의는 완전히 미쳐 가고 있습니다.”

심온은 미쳐 가고 있다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자신도 이미 경험한 터라 자존심이 강하고 제멋대로인 매사괴의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가 피부로 느껴졌다.

“아이고, 골이야. 그녀는 그렇다 치고 일단 시급히 알아봐야 할 일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이번 일을 처리하면서 다짐한 건데 말이야. 기연에 관한 책을 만드는 놈들을 잡아야겠어. 만약 그놈들을 내버려 둔다면 우린 아마 계속 행불자를 찾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말 테니까. 동원할 수 있는 정보망을 최대한 끌어다 놈들의 근거지를 찾아내. 필요하다면 개방에 도움을 요청해도 좋아.”

“음…….”

오교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뭔가 생각해 내려는 듯 눈을 감았다.

심온은 오교가 저런 상태일 땐 기억의 편린을 뒤적거리고 있고, 약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반드시 유익한 정보를 떠올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감은 눈을 움찔거리던 오교가 한순간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언뜻 현기가 떠올랐다.

“아, 잘 잤다.”

“확 이걸 그냥!”

심온이 벌떡 일어서서는 당장에라도 탁자를 엎어버릴 듯한 동작을 취하자 오교가 배시시 웃었다.

“농담 좀 한 것 가지고 왜 그러세요? 너무 예민해지신 것 아닙니까?”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도리어 재밌게 맞장구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 꿈은 꾸고?”

“하하하하!”

오교가 크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단서가 될 만한 것이 떠올랐습니다.”

“좋았어.”

“지금으로부터 약 일 년 반 정도 전입니다. 그때 의뢰 문건 중 특이한 것이 있었습죠. 글쟁이 한 명을 찾는다는 것이었는데 너무 사사로운 것이라 소각 대기실에 보관해 놓았었답니다.”

소각 대기실이란 의뢰 들어온 것들 중 크게 중요치 않은 것들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그곳에 약 이 년간 보관해 놓은 후 기한이 차게 되면 소각실로 옮겨지는 것이었다.

“글쟁이 누구?”

“문주님께서도 아실 겁니다, 금헌영(金憲永)이라고. 만악문(萬惡門)의 후계자(後繼者)와 무한소소자(無限笑笑者)라는 글을 쓴 사람이죠.”

심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만악문의 후계자! 그래, 나도 그거 봤지. 만 가지 악을 행하면 염라대왕이 될 수 있다고 해서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른 놈의 이야기였잖아. 그리고 무한소소자는 하루에 한 번 다른 사람을 웃게 하지 않으면 결코 생명을 이어갈 수 없는 놈의 이야기였지. 캬아~ 그것들 정말 재밌었는데.”

“그런데 기이한 건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글쟁이를 찾는다는 의뢰가 들어왔지 뭡니까? 포로공주(捕虜公主)라는 글을 쓴 채후석(采厚石)이란 사람을 말이죠. 확인해 보니 금헌영을 찾는다고 했던 바로 그곳에서 또다시 보낸 것이었습니다.”

심온의 머리로 불이 반짝 하고 들어왔다.

“음, 그러니까 그놈들이 글쟁이들을 잡아다 기연에 관한 내용을 쓰도록 한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좋았어! 그럼 먼저 그곳을 덮치도록 하지. 당장 형벌당주를 불러와.”

“네.”

***

6. 필사방(筆寫邦)

“오늘은 새로운 기획안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다. 현재까지 우리 필사방의 기연 서적들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란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일. 우리가 미래를 대비하지 않고 그저 기연 서적 하나에만 의지하고 있다가 혹여 기연의 허상이라도 퍼지는 날엔 곤란한 경우에 처하고 말 것이다.”

이곳은 지금까지 천여 종이 넘는 기연 서적을 제작, 배포한 필사방의 회의실이다.

긴 탁자의 중앙 상석에 자리한 방주 노제강(櫓制强)이 그 양옆으로 질서 정연하게 앉은 지도부 인사들을 향해 엄숙한 낯빛으로 말했다.

노제강은 향년 육십이 세로 그의 얼굴엔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짙은 주름으로 새겨져 있었다.

노인들의 주름엔 각자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자함과 덕망있는 삶에는 그러한 협곡과 흐름이 얼굴에 새겨지고, 오랫동안 근심 속에 살아온 이는 힘겨움이란 주름이 자리하게 된다.

반면 노제강의 얼굴엔 조금 특이하게 욕심이라는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입이 꿈틀거릴 때마다 욕심의 주름은 접혔다 펴졌다 했는데, 그것은 머리털이라곤 한 가닥도 없는 그의 반짝이는 대머리와 심각한 대조를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불쾌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말이 계속됐다.

“한 달 뒤 필사방은 십 주년을 맞이한다. 그동안 필사방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이더냐? 그건 오로지 지금의 위치에 자만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발상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고인 물은 언젠가 썩기 마련이라 우리는 늘 새로운 형태의 기연 서적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젠 한 발짝 더 나아가 기연 서적을 능가하는 새로운 줄기를 찾아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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