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칠무회(七武會)
“괴, 괴물 놈들!”
장건은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설마 폭열시까지 견뎌 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분명 폭열시는 진철과 북궁아를 삼켜 버렸다. 그건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아니, 상처는커녕 그슬린 자국도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진철이란 사내는 멀뚱히 서 있던 다른 사내와 괴물 같은 여인을 이끌고 자신들을 지나쳐 건물로 향했다.
그들을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폭열시마저 어쩌지 못한 그들인데,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자, 누가 덤벼 볼 테냐?”
그때 들린 낯선 이의 목소리에 장건은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가만히만 있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목을 꺾으며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네놈들 하는 짓거리가 아주 가관이더군.”
기태천은 천천히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검이 달빛에 반사되어 시푸른 빛을 뿜어내었다.
기태천은 그런 자신의 검을 슬쩍 쓰다듬었다. 그러자 주인의 마음을 읽었는지 검명을 토해 내었다. 검명을 들은 기태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폭열시는 어디서 구한 거지? 분명 폭열시는 진천뢰와 함께 무림의 금기 중 하나일 텐데? 그걸 네놈들이 만들었거나 누가 팔았을 리는 만무하고. 누가 준 거냐?”
그의 목소리가 주변으로 퍼졌다.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그였지만, 내심 무척이나 놀란 상태였다. 바로 진철의 무위 때문이다. 그의 무위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호신강기까지 시전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반경 삼 장 안의 모든 것을 태워 버려 재만 남긴다는 폭열시의 열기도 진철의 호신강기는 뚫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 주위에 쓰러져 있던 애꿎은 무인들만이 목숨을 잃었다.
기태천은 그을린 시체들을 바라보다 장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니, 알겠군. 사마련인가? 사마련 놈들이 폭열시를 확보한 것인가?”
“……!”
“오호, 그 모습을 보아 하니 사실인가 보군.”
기태천은 눈을 부릅뜨며 자신을 바라보는 장건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건은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절대 알려져선 안 되는 사실이었다.
“헛! 당주님!”
그때 사마곡으로 어떤 한 무인이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뒤로 수많은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밖으로 나가 있던 사마곡의 무인들이었다.
“개떼처럼 몰려왔구나.”
기태천이 그들을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뭐라고!”
그에 발끈한 그들은 기태천을 바라보다 수많은 무인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두 자신들과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이었다.
“네, 네놈이 한 짓이냐!”
“아닌데?”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무인들은 기태천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죽여 버려!”
“차압!”
두 명의 사내가 기태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기태천은 그 자리를 고수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두 사내가 휘두른 검이 기태천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장건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생각 외로 어이없이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태천을 공격했던 두 사내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럴 수가.”
“움… 직이도 않았…….”
푸확!
두 사내의 몸이 갈라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기태천은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장내를 둘러보았다.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꿀꺽!
장건은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움직이지도 않았기에 그나마 쉽게 해치울 줄 알았는데, 아까 그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괴물이었다.
‘정말 칠무회는 저런 놈들밖에 없단 말인가!’
그런 장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내를 둘러보던 기태천은 고개를 돌리며 다시금 목을 풀었다. 그러자 우두둑 하는 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자, 그래서 누가 또 덤빌 테냐? 미리 말해 두지만 내 검은 아까 그 애들처럼 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기태천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사마곡 무인들은 섬뜩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꽝!
그 순간 큰 굉음과 함께 사마곡 정문에 남아 있던 문지방이 터져 나갔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쏠렸다. 기태천 역시 그곳을 바라보았다.
“사마곡주는 들어라!”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리며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 무복으로 치장한 그들은 일사 정렬한 모습으로 정문을 막았다.
기태천이 그들을 바라보곤 얼굴을 구겼다.
“저것들은 또 뭐야?”
그들이 풍기는 기도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저들을 모두 상대해야 한다면 자신이라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저놈들은 대체… 응?”
의문을 품던 기태천이 눈을 빛냈다. 흰 무복의 사내들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아는 얼굴이었다.
그 사내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어지럽혀진 장내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는 곧 입가를 말아 올렸다.
“그동안 본 회는 약한 이들에게 최소한의 배려를 베푼다는 무사의 도리에 따라, 이 지역에 관심을 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들은 본 회의 이런 아량을 무시하고 다른 문파와 작당하여 정파를 습격하였으니. 나, 칠무회의 사성 한도군은 그 죄를 벌할 것이다. 그 죄는…….”
말을 잠시 끊은 한도군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장내에 뿌렸다. 그런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곧 멸문에 해당한다.”
***
홍군과 하균은 갑작스레 등장한 진철의 모습에 적잖게 놀라며 각자의 애병에 손을 대었다. 그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문을 거칠게 열지 않고 몰래 들어왔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내가 가련다.
하균이 홍군을 바라보며 전음을 보내자 홍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팟!
순간 하균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슈아악!
그때 바람 소리와 함께 진철의 옆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섬광처럼 쏘아졌다. 그 섬광은 진철과 함께 그가 있던 문지방을 가르며 지나갔다.
“음?”
하균은 손아귀에 진철을 벤 것 같은 감촉이 없자 의아해했다. 분명 베었건만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 한 공격은 허초였다. 홍군의 공격을 위한.
“이야, 꽤 날카롭군요.”
“흡!”
“헛!”
하균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홍군 역시 적잖이 놀란 듯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때 하균이 벤 진철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이형환위(移形換位)!”
홍군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상승 무리의 경신술을 목격한 것이다.
과연 저 나이에 이형환위를 펼칠 수 있는 자가 이 무림에 몇이나 있을까?
적지 않게 놀란 홍군은 도병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자신은 완벽한 이형환위를 펼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하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경신술과 무술은 다르다.
“네놈은 누구냐?”
하균이 그를 경계하며 입을 열자 진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냥 저냥 지나가는 사람인데, 혹시 여기에 사마곡주가…….”
말을 하던 진철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곽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살짝 구겼다.
“혹시 저 사람이 사마곡주입니까? 아니, 어르신들께서 죽인 겁니까?”
“내가 먼저 물었다. 넌 누구냐?”
“말했다시피…….”
“그걸 믿으란 말은 아니겠지?”
“그래도 믿으셔야죠. 믿으시면 복이 옵니다.”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마치 자연의 기운을 느끼듯 양손을 벌렸다.
“헛소리!”
그때 하균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십여 번을 가른 그의 검에서 질풍이 터져 나와 진철의 온몸을 덮쳤다. 진철은 뒤로 몸을 날리며 손바닥으로 허공을 강하게 때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파공성이 터지며 집무실에 있던 물건들이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진철이 하균의 공격을 파쇄하며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홍군의 신형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그런 홍군의 도가 진철의 허리를 가르려 했다.
탓!
진철은 몸을 띄워 공중제비를 돌며 그의 도를 피해 냈다. 그 순간 하균이 눈을 빛냈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납검을 하고 진철에게 다가가는 그의 온몸에서 거대한 기도가 피어올랐다.
“끝이다!”
쿵!
강하게 진각을 밟아 힘껏 허리를 비튼 하균은 몸을 낮추며 검병을 강하게 쥐었다. 그리고 비튼 그의 허리를 다시 반대로 돌리자 가슴이 활짝 펴졌다. 강한 기도가 일순간 터져 나오며 그의 주위로 기가 휘몰아쳤다. 그와 함께 납검했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검이 뽑혀 나왔다.
하나의 빛. 붉은 하나의 빛이 허공으로 스며들어 갔다.
“흡!”
바닥에 착지한 진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런 그의 눈에 찰나의 속도로 다가오는 붉은 선이 비쳤다.
꽈앙!
붉은 빛이 진철과 충돌한 순간, 강력한 돌풍과 함께 그나마 남아 있던 물건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집무실의 문지방이 터져 나갔다. 건물이 무너질 듯한 강력한 일격이었다.
쿠쿵!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진철이 있던 자리에 잔해가 쌓였다.
“컥!”
그 장면을 바라보던 하균이 갑작스레 피를 뿜으며 허리를 숙였다.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린 상태에서 펼쳐야 할 것을, 급히 끌어 올린 내공으로 무리하게 펼쳐 기혈이 뒤틀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상태는 관여치 않고 손아귀에 느껴지는 감촉에 눈을 빛냈다. 홍아일섬(紅牙一閃)이 진철을 강타한 것을 확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괜찮나?”
“음…….”
홍군의 물음에 하균은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홍군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도를 도집에 꽂았다. 그 역시 하균의 실력을 알고 있기에 전력을 다한 그의 공격에 진철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야야, 이번 건 꽤 짜릿하군요.”
“……!”
잔해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하균과 홍군의 눈이 부릅떠졌다. 죽기는커녕 어떤 타격도 입지 않은 듯 생생한 목소리였다.
홍군은 도집에 집어넣은 도를 다시 꺼내 들어 잔해를 향해 겨누었다.
꽝!
그때 산처럼 쌓인 잔해가 터지며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후우…….”
그 중앙에서 진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철은 천으로 봉인된 자하신검을 앞으로 내밀며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 홍군과 하균은 공기 자체가 달라진 느낌에 흠칫 놀라며 몸을 살짝 떨었다.
진철은 고요한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는 단지 궁금한 게 있어서 묻고 싶은 것뿐인데, 너무하지 않습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진철의 말에 대답하던 홍군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진철과 하균 사이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그의 도가 강하게 빛을 내뿜었다.
“저승에 가서 알아보거라!”
홍군은 강하게 도를 떨치듯 휘둘렀다. 그러자 강력한 도기가 뻗어 나와 진철을 향해 쏘아졌다.
쾅!
홍군은 도기를 뿌리자마자 곧바로 몸을 돌려 하균의 어깨를 부축한 후,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상대였기에 이 자리를 벗어나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 우선이라 여겼다.
하지만 홍군은 곧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진철이 그들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것이다.
“어… 떻게?”
“사람을 죽이고도 그렇게 쉽게 몸을 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모르시겠지만, 저 도사입니다. 그리고 물어볼 것도 있다고 했잖습니까?”
“크윽!”
이를 악문 홍군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 하균을 내려놓았다. 하균은 그의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홍군을 바라보았다. 홍군은 하균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진철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여긴 내가 맡겠다.”
“하지만 자네가 혼자 상대할 자가 아니야.”
“가능할 수도 있어. 자넨 어서 몸을 추스르고 여길 떠나게. 보고가 우선이야.”
“…….”
하균은 홍군의 등을 응시했다. 그러다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그에게 방해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어서 안 가고 뭘 하는가!”
“그럼, 무운을 빌겠네.”
“어서 가래도!”
고개를 끄덕인 하균은 뒤로 몸을 날렸다. 그때 진철의 신형이 흔들렸다. 하균을 가로막기 위함이다. 하지만 홍군의 신형 역시 흔들리며 진철의 앞으로 다가가서는 도를 그어 올렸다.
진철은 물러나며 그의 도를 피해 냈다.
홍군은 거리를 벌린 진철을 바라보며 도병에 힘을 주었다.
“나를 죽이고 지나가야 할 것이야.”
“죽이다니, 살벌한 말씀 하지 마세요.”
“흥! 네놈의 경신술은 제법이다만 과연 무술도 경신술처럼 대단한지 한번 보자꾸나!”
홍군의 눈에 기광이 스치기 시작하자 그의 몸이 바람을 넣은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런 그의 몸이 순식간에 진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흡!”
진철이 짧게 숨을 들이켜며 갑작스레 몸을 숙였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한 가닥의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갑작스런 홍군의 기습을 피해 낸 진철은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뒤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꽝!
“쥐새끼 같은 놈! 눈치 또한 빠르구나!”
단 일격에 바닥을 갈라놓은 홍군은 이를 갈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바닥이 밀려나며 또 한 번 그의 모습이 감춰졌다. 그런 그의 신형이 진철의 옆에서 나타났다.
홍군은 진철의 옆을 점하자마자 도를 휘둘렀다.
스궝!
휙!
엄청난 파공음이 진철의 귓가를 울렸다. 놀랄 만큼 강력한 위력이었다. 급히 몸을 틀어 그의 도를 피한 진철은 왼발을 축으로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홍군의 턱을 노리고 치솟아 올라가는 검은 아무리 검집에 들어 있는 상태라지만 맞으면 치명타였다. 하지만 홍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슬쩍 상체를 비튼 것만으로도 진철의 검을 피해 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도가 진철의 허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탓!
진철이 공중으로 몸을 띄우며 그의 도를 피해 냈다. 그때 홍군의 도가 갑작스레 방향을 틀어 그의 상체를 베어 갔다.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거기서 초식이 변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카가각! 쿵!
“큭!”
가까스로 검을 들어 그의 도를 막았지만 그 위력에 미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간 진철은 벽에 등을 부딪쳤다.
“아무리 빠른 쥐새끼라도 호랑이는 이기지 못하는 법! 계속 피해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어서 너의 실력을 보여 보거라. 핫!”
짧은 기합을 터트린 홍군은 진철이 미처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바닥을 차 나가며 그에게 쇄도했다. 진철은 등에서 느껴지는 충격에도 엄살을 부리지 못하고 코앞에서 도를 휘둘러 오는 홍군을 응시했다. 홍군의 도가 순간 세 개로 변하며 공간을 갈랐다.
“살(殺)!”
콰과광!
세 개의 도가 진철을 강타했다. 홍군은 곧바로 도를 거두며 뒤로 몸을 뺐다. 그가 휘두른 도의 막강한 위력에 진철의 뒤에 있는 벽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후우.”
무너진 벽을 향해 도를 겨누며 숨을 몰아쉬는 홍군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순간적으로 도강을 펼쳤기 때문이다.
도강을 연달아 뿌려, 막강한 위력을 지녔지만 급작스러운 내공 소모로 인해 사용하기를 꺼려했던 기술이었다. 그렇기에 무너진 벽을 바라보는 홍군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거기에 기묘한 느낌이 그의 기감을 자극했다.
퍼엉!
갑자기 무너진 벽의 잔해가 터져 나가며 진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예상치 못한 파괴력에 충격을 받았는지 안색이 약간 파리했다.
목을 한 바퀴 돌린 진철은 손의 관절을 풀며 입을 열었다.
“후우, 늙으신 분이 힘도 좋습니다.”
“설마 이것마저 견뎌 낼 줄이야.”
“오늘 무슨 날인지 계속 파묻히는군요. 좋습니다, 그럼 저도 맞상대해 드리겠습니다. 후우…….”
숨을 가늘게 내쉰 진철은 홍군을 바라보며 한순간 눈을 빛냈다.
팟!
홍군의 눈이 부릅떠졌다. 진철의 신형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는 옆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급히 몸을 틀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큭!”
갑작스러운 진철의 공격에 놀란 홍군은 그를 향해 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진철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간단히 도를 흘려버리곤 홍군의 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고는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었다.
퍼퍼퍽!
“커억!”
섬전처럼 뻗어진 진철의 주먹을 의외로 간단하게 허용한 홍군의 몸이 들썩이며 뒤로 튕겨졌다.
진철은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런 그의 검이 순간 여섯 개로 나뉘며 홍군의 전신을 갈라 갔다.
홍군은 이를 악물며 급히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의 도가 빛을 내뿜었다. 홍군은 강기가 맺힌 도를 진철을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방어를 무시하고 공격을 선택한 것이다.
“칫!”
진철은 감히 그의 도를 맞상대하지 못하고 초식을 거두며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때 홍군의 몸이 틀어지며 그와 함께 진철을 갈라 버릴 것 같던 그의 도가 방향을 틀어 되돌아갔다.
진철이 눈을 찌푸렸다. 홍군의 공격이 허초였던 탓이다.
홍군은 그 자리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러고는 강하게 바닥을 차 진철을 향해 쏘아졌다.
원심력으로 더욱 강해진 기운이 그의 도에 주입되며 검은 색의 도강으로 휘몰아쳤다.
“이것도 받아 보거라!”
홍군이 외치며 도약하자 몸을 빼던 진철이 이를 악물었다.
‘피하긴 늦었다!’
거대한 기세를 뿜으며 순식간에 다가오는 홍군의 모습에 진철은 다리에 힘을 주어 자신의 몸을 지탱했다. 그러고는 내공을 끌어 올리자 자하신검이 자색의 강기로 물들었다.
“월파단흑도(月破斷黑刀)!”
검은 도강이 진철을 향해 내리쳐졌다.
진철은 자색의 강기가 덧씌워진 자하신검을 양손으로 잡으며 검은 도강을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꽈앙!
***
팍!
“히익!”
사마곡의 총관은 머리 옆에 박히는 검에 화들짝 놀라며 턱을 당겼다. 앞의 위인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는 발버둥이었다.
한정은 그런 총관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선영 아씨는 어디에 계신 것이냐?”
“모, 모릅니다요. 분명한 건 곡 내에 없다는 겁니다!”
“그럼 대체 어디로 모시고 갔냐는 말이다!”
서걱!
한정이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총관의 틀어 올린 머리가 반듯하게 잘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한정은 총관의 목 앞에 검을 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은 네 목이 될 것이다. 어디에 계시느냐?”
“저, 정말로 모릅니다요!”
“그래?”
총관의 외침에 한정의 팔이 휘둘러졌다. 반짝이는 칼날이 총관의 목을 노리고 베어졌다.
“으아악!”
툭.
총관은 차가운 물건이 목에 닿자 괴성을 지르며 눈을 까뒤집었다. 기절을 한 것이다.
단지 검을 목에 대기만 했는데 그가 기절하자 한정은 혀를 차며 뒤로 돌았다. 조금 더 강하게 겁을 주면 실토할 거라 여겼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정말로 모르는 듯했다.
한정의 앞에는 수많은 서류가 놓여 있었다. 조금 전 사마곡의 총관이 정리하던 서류들이었다.
한정은 그 앞으로 다가가 서류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뒤적거렸다. 혹시라도 안선영의 행적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있을까 해서였다.
그렇게 반각 정도를 뒤적거리던 한정은 마침 원하던 것을 찾았는지 눈을 크게 뜨며 그 서류를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찾았다!”
한정은 서류 뭉치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드디어 안선영이 있는 장소를 알아낸 것이다.
“산서성… 삭주(朔州)!”
꽝!
그때 갑자기 굉음이 터지며 한정이 서 있던 자리가 들썩였다.
한정은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곧 잠잠해지자 그는 눈살을 구기고 뒤쪽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곳에서 찾을 것은 다 찾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동이라니… 그곳에는… 응?”
문으로 향하며 문서를 바라보던 한정은 기이한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시야에 비틀어져 가는 기둥이 들어왔다. 그 기둥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옆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자신 역시 기울어지는 듯하자 한정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하하… 설마…….”
끼이익!
그때 거친 소리와 함께 서류가 놓여 있던 책상이 방구석으로 천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한정은 그 광경에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거, 거짓말!”
쿠르릉!
한정이 바닥을 박차 오름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있던 자리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밀실에 네 명의 중년인이 원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그들 개개인의 몸에서는 절대 접근하지 못할 절대자의 기도가 흘러나왔다.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던 적발의 중년인이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좀 늦는군.”
“언제 그놈이 제 시간에 맞춰 온 적이 있던가?”
적발의 중년인의 말에 그 옆에 앉아 있는 푸른 장발의 사내가 대꾸했다. 적발의 사내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그놈이 싫어. 시간을 지킬 줄을 몰라. 난 시간 약속 안 지키는 놈이 제일 싫어.”
“나도 너 싫거든?”
그때 흑발의 중년인이 밀실의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섰다. 천마대제인 혁린우였다.
“그래, 무슨 일이야? 최대한 빨리 끝내자고. 이왕 나온 김에 실컷 놀다 갈 생각이니까.”
“허…….”
혁린우가 빈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며 말하자, 기가 차다는 듯 적발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넌 만날 놀 생각만 하냐?”
“왜?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몇 년 만에 하는 외출인지 모르겠어. 마누라에게서 벗어나 혼자가 된 기분을 자네가 아나? 아, 자넨 아직 독수공방이지? 훗.”
혁린우가 적발의 사내를 바라보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턱은 살짝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며 바라보는 모습이 승리자의 그것이었다. 적발의 사내는 그런 혁린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아직도 총각이었다.
“그 나이에 총각이라니. 자네 실은 중 아닌가?”
“으득!”
적발의 사내가 이를 악물자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때 흰색 머리의 중년인이 손을 저었다. 그러자 적발의 사내의 기도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네놈들은 위아래도 없냐?”
“어이쿠, 복마검천(伏魔劍天) 우송 어르신 아니오?”
“쯧,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어, 버릇이. 에잉!”
그제야 혁린우가 우송에게 시선을 주자 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왜 그러실까? 우송 어르신네 제자 놈도 버릇없잖소?”
“그놈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그냥 뭐 그렇다는 거요.”
“쯧.”
우송이 또다시 고개를 젓자 혁린우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푸른 장발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혁린우가 자신을 바라보자 북궁걸은 얼굴을 구겼다. 왠지 자신에게도 시비를 걸 것 같았다.
“그래, 북궁걸. 자네 딸내미는 또 도망갔다며?”
“…….”
“쯔쯔, 그래 가지고 어디 시집이나 보내겠나?”
“자네가 무슨 상관인가!”
“그냥 걱정돼서 그렇다네, 걱정돼서.”
혁린우의 말에 북궁걸의 푸른 턱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게 숨긴다고 숨겼건만 결국 혁린우의 귀로 들어가고 만 것이었다.
“난 정말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어떻게 해서 자네 딸이 북해의 신녀가 된 건지.”
“우리 딸이 어때서 그런가! 예쁘고 몸매 좋고 예의 바르고! 그 정도면 됐지! 뭘 더 바라!”
“성격이 특이하잖나, 성격이.”
탕!
“그만들 하시오. 이러다 시간 다 보내겠소이다. 어차피 모두 얼굴 마주하고 있기 힘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니, 짧게 하고 끝내겠소.”
“쯧.”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붉은 장포를 걸친 사내, 천무제(天武帝) 담덕이 입을 열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각 세력의 수장인 그들은 본래라면 원수지간이었다. 혈무대전만 아니었다면.
“이번 마혈도 건은 곤륜파에서 처리했다는 정보가 있소.”
“살성 놈들은 전 무림의 적이니까. 누가 처리했든 뭐, 상관있나?”
“훗, 그렇구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서.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지금 무림은 폭풍전야의 상태라오. 본 회의 정보에 의하면 남림과 혈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오.”
“남림? 혈궁? 그놈들은 또 왜? 마궁 놈들로도 정신없는데 그것들은 또 왜 설친데?”
우송이 얼굴을 구기며 묻자 담덕이 한숨을 내뱉었다.
“같은 마궁 연합이잖소. 거기에 사마련의 행보 역시 심상치가 않소.”
“음…….”
우송이 신음을 흘렸다. 과거 사파의 사천(四天) 중에 하나였던 사마련은 봉문을 풂과 동시에 같은 사천이었던 도혈파를 흡수하면서 더욱 거대해진 상태였다. 그런 사마련이었기에 작은 행보라도 항상 주시해야 했다.
“사마련이 아무래도 혈궁과 함께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소.”
“어떤 일이라니?”
혁린우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묻자 담덕이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혈마신(血魔神)이라고 알고 있소?”
“혈마신?”
담덕의 말에 모두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담덕은 그들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우연히 듣게 된 것인데, 그 내용이 꽤나 흥미롭더이다.”
“그게 대체 뭔가?”
혁린우 역시 혈마신이란 이름이 범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진지한 눈으로 담덕을 주시했다.
“불멸의 존재. 죽여도 죽지 않는 존재.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재앙인 존재. 그것이 혈마신이오.”
“음… 그야말로 전설 속의 존재로군.”
북궁걸이 중얼거리자 혁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전설은 신교에도 있었다. 바로 천마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전설이라……. 그렇소. 하지만 혈궁에서 그 전설을 실현시키려고 한다고 하오.”
“실현?”
“천하의 무골을 지녔음에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 혈마신의 그릇을 찾았다는 정보요.”
“그렇다면?”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말이라지만 흘려들을 수는 없소이다. 뭐니 뭐니 해도 혈궁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이니까 말이오.”
“그럼 어서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송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자 담덕이 미소를 지었다.
“이미 손을 써 뒀소. 곧 소식이 올 것이오. 사마련은 혈궁에 협조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을 준비하는 것 같으니, 여차하면 여러분들의 지원이 꼭 필요하게 될 것 같소.”
담덕의 말에 혁린우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그렇다면 이 불안한 동맹은 당분간 계속되겠군.”
혁린우의 말에 다른 넷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
한도군은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렸다.
“풀 하나 남기지 말고 모두 쓸어버려.”
“존명!”
한도군의 명에 흰 무복의 사내들이 사마곡 무인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사마곡 무인들은 갑작스러운 그들의 등장과 감당치 못할 기세에 우왕좌왕하며 그들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이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아니었다.
“컥!”
“크악!”
흰 무복의 사내들이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사마곡 무인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단 한 초식에 한 명씩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무, 물러서지 마라! 어서 검진을 짜란 말이다!”
장건은 다급하게 외치며 병력을 지휘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는 자는 극소수. 질풍처럼 몰아치는 흰 무복의 사내들로 인해 기세를 빼앗긴 사마곡 무인들은 정신없이 후퇴하기에 바빴다.
‘대, 대체 저것들은 뭐란 말인가! 서, 설마 저들이 칠무회?’
한도군이란 사내가 한 말을 떠올린 장건은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는 기태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저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까 그자들은?
‘역시 칠무회의 사성이로군.’
기태천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보기 싫은 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신이 비록 살검의 길을 걷겠다고 공표한 무인이라지만 사성이라는 자는 궤를 달리했다. 자신은 공격해 오는 자에게만 살검을 펼친다면, 사성은 무력한 일반인에게까지도 사파에 관여되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살검을 펼치는 자였다.
기태천은 장내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지나쳐 수많은 무인이 뒤로 물러났다. 기세는 이미 완벽하게 칠무회 쪽으로 넘어간 상태. 거기다 사마곡의 무인들은 진철, 북궁아의 무위와 칠무회의 등장으로 공황에 빠지는 바람에, 사마곡의 멸문은 이미 막을 수 없는 상태였다.
“음?”
기태천은 뒤에서 다가오는 예기에 슬쩍 몸을 틀었다. 그러자 그의 몸을 한 무인이 스치고 지나갔다.
흰 무복의 사내. 칠무회의 무인이었다.
그는 기태천이 자신의 공격을 간단히 피해 내자 눈을 빛내며 다시 몸을 날렸다.
“자, 잠깐!”
흰 무복의 사내가 자신에게 살심을 드러내며 살검을 펼치자 기태천은 다급히 외쳤다. 그러다 이내 등 뒤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예기에 인상을 썼다. 그냥 피하자니 앞뒤에서 자신을 노리고 다가오는 예기가 상당히 거슬렸다.
자신이 누군가? 무림 명숙 중의 명숙인 검왕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겁도 없이 자신에게 살검을 펼치고 있었다.
“감히 이놈들이!”
그 순간 섬광 같은 속도로 기태천의 검이 휘둘러졌다.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린 그의 검에서 검기가 뻗어 나가며 앞에서 다가오는 무인을 향해 날아갔다.
기태천은 곧바로 몸을 돌리며 머리 위로 올라가 있는 검을 가볍게 그어 내렸다.
“음?”
“헛!”
기태천을 향해 쇄도하던 흰 무복의 사내들은 순식간에 날아오는 검기에 적지 않게 놀라며 다급히 검을 휘둘렀다.
퍼펑!
“큭!”
“컥!”
두 사내는 다가가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뒤로 튕겨져 나갔다.
기태천이 뿌린 검기를 그들이 완벽히 막아 내기엔 너무나 강한 기운이었다.
‘가볍게 휘두른 검에서 이 정도로 강렬한 검기라니!’
바닥을 구른 흰 무복의 사내는 순간 목구멍으로 무언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다급히 내공을 끌어 올려 맞섰건만 완벽히 방어해 내지 못해 오히려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고수다! 검진을 짜 상대하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사내가 외치자 기태천의 주위로 다섯의 무인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기태천의 주위를 빙빙 돌며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경계하며 그의 빈틈을 찾았다.
“허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기태천은 그들의 모습에 얼굴을 구기더니 목을 한 번 꺾었다. 그러자 그의 목에서 거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기태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검을 겨눈단 말이냐? 난 네놈들의 적이 아니……!”
기태천의 말이 신호가 되었을까? 다섯의 무인이 한꺼번에 기태천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각각 기태천의 사각을 노리며 검을 찔러 들어갔다. 그 순간 기태천의 눈이 빛을 내뿜었다.
카가각!
한 가닥의 빛. 한 가닥의 빛이 기태천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달려들던 흰 무복의 사내들은 간신히 검으로 쏘아져 오는 섬광을 막았지만 그 위력을 미처 감당해 내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엄청난 빠르기에 위력 또한 뒤지지 않는 쾌검술이었다.
“음?”
그 모습을 목격한 한도군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라도 부하들의 합격을 단 일격에 저렇게 간단하게 막아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도군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었다. 어디선가 본 사람 처럼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지?”
한도군은 그가 누군지 잘 떠오르지 않는지 이마를 찡그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때 또 다른 흰 무복의 사내들이 기태천을 노리고 쏘아 들어갔다.
그 순간 한도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드디어 생각난 것이다. 그가 누군지.
“자, 잠깐! 기다려!”
다급하게 외친 한도군은 바닥을 차며 앞으로 뻗어 나갔다. 하지만 흰 무복의 사내들은 이미 기태천을 베고 지나간 상태였다.
“이런!”
한도군이 눈이 커지며 더욱 빠르게 기태천을 향해 뛰어갔다. 그 순간 칼에 난도질당한 줄 알았던 기태천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이형환위!”
“흥! 같잖은 것들!”
공중에서 기태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어느새 허공으로 몸을 띄우며 검들을 피한 후 강하게 검을 쥐고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렇게 피를 보고 싶다면 보여 주도록 하마! 네놈들의 피를!”
밤하늘에 기태천의 검이 찬란하게 빛을 내뿜었다. 마치 혜성처럼 빛을 내뿜은 그의 검이 빠르게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척까지 다가간 한도군이 급히 몸을 띄우며 검을 빼 들었다. 그런 그를 보았는지 기태천이 콧방귀를 뀌고는 검을 휘둘렀다.
“흥!”
“합!”
카가각!
불꽃이 튀기며 한도군의 신형이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쿵!
바닥에 착지한 한도군의 발이 깊은 발자국을 새겼다. 그런 그의 신형이 잘게 떨렸다. 기태천의 힘을 이기지 못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난 것이다. 그에 반해 가뿐하게 바닥으로 내려온 기태천은 마치 산책이라도 즐기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이로군.”
“그렇군요. 기 대협, 오랜만에 뵈오.”
“음… 그런데 이건 칠무회의 뜻인가?”
기태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꽤 많은 칠무회 무인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도군은 그의 말에 급히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감히 누가 천하의 검왕께 검을 들이밀겠소?”
“그래? 그럼 이것들은 대체 뭐지?”
기태천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내들을 가리켰다. 죽은 이는 한 명도 없지만 하나같이 꽤 내상을 입은 듯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도군은 그들을 잠시 응시하다 미소를 지었다.
“잠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오. 설마 검왕께서 사마곡에 계시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소.”
“오해라…….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칠무회가 여긴 어쩐 일이지?”
기태천의 물음에 한도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검왕이시지만 그것까진 알려 드리기란 어렵지 않겠소?”
“흐음, 혹시 뭔가 찾는 물건이 있다든지…….”
“……!”
기태천의 말에 일순간 한도군의 눈에 기광이 서렸다 사라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소.”
“그런가? 뭐, 모르면 됐다네.”
“그렇소?”
‘빌어먹을 놈 같으니…….’
한도군은 속으로 기태천을 욕하며 그를 응시했다.
기태천을 본 것은 딱 한 번뿐이지만 첫 만남부터 좋지 않았다. 뭔가 자신하고는 어긋나는 느낌의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렇기에 그냥 얼굴만 봐도 얄미웠다. 무공만 된다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건 기태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한도군이 사파였다면 기태천은 망설이지 않고 살수를 펼쳤을 것이다.
“너희는 가서 사마곡 놈들을 처리해라.”
“존명!”
기태천을 둘러싸고 있던 흰 무복의 사내들은 한도군을 향해 읍을 하고는 뒤로 몸을 날려 다시 사마곡 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태천은 그들을 바라보다 눈살을 구겼다. 약한 이들을 학살하는 모습이 썩 보기에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무사의 도리보다 더 골이 깊은 것이 바로 정사 간의 관계였다.
‘언제쯤이면 정사 간의 골이 사라질꼬.’
기태천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각자의 기준으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배척하기만 할 뿐,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예의의 가장 기본은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임에도 사람들은 그런 기본조차 지키지 않는 것이다.
‘다 부질없는 짓이거늘… 응?’
기태천의 시선이 건물을 향했다. 어떤 강렬한 기운을 느낀 탓이다. 한도군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기태천을 따라 건물로 시선을 주었다.
꽝!
그 순간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건물의 앞부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기의 폭발이군. 분명 진철이 들어갔을 텐데, 누구와 상대하기에 저런 격돌이 일어나는 거지? 사마곡에 그만한 인물이 있던가?’
기태천은 무너지는 건물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진철을 상대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사마곡의 위명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퍼퍼펑!
또다시 굉음이 터져 나오며 무너져 내리던 건물에서 두 개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마치 서로에게 엉키듯 떨어진 그들은 무너지는 잔해를 피해 건물에서 멀리 떨어져 내렸다.
진철과 홍군이었다.
“쿨럭!”
홍군은 진철이 놓아주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으며 시커먼 피를 토해 내었다. 그리고 진철 역시 상태가 좋지 않은 듯 얼굴색이 새파랬다.
‘너무 방심했던가?’
진철은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기운을 느끼며 숨을 안정시켰다. 그런 그의 몸속에서 기이한 기운이 꿈틀거렸다. 그 기운은 진철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듯 점점 거친 움직임을 보였다.
진철은 그 기운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급하게 내공을 몰아넣었다. 그러자 꿈틀거리던 기운이 진철의 강한 압박에 곧 잠잠해졌다.
“후우.”
숨을 깊게 몰아쉰 진철은 고개를 들어 홍군을 바라보았다. 그는 꽤 심한 내상을 입었는지 연신 피를 게워 내고 있었다. 진철은 홍군에게 다가갔다.
그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홍군을 고개를 들어 진철을 노려보았다.
“왜 나를 살려 준 것이냐?”
“그럼 죽게 내버려 두겠습니까?”
“무사에게 패배란 곧 죽음이다! 상대방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무사에게 얼마나 치욕인지 알고 하는 말인 게냐!”
피를 토하며 외치는 홍군을 바라보는 진철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의 말 때문이었다.
“전 그런 거 모릅니다.”
“뭐?”
“제가 아는 건 단 한 가지! 사람의 목숨을 대신할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명예? 하! 개나 가져가라 하십쇼.”
“이, 이!”
홍군이 진철에게 뭐라 외치려 하자 그보다 먼저 진철이 그에게 바짝 다가가며 소리쳤다.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목숨은 없습니다! 어르신도 그걸 아시기에 당신을 희생하여 동료를 보낸 것 아닙니까!”
“……!”
홍군의 고개가 천천히 숙여졌다. 그런 그의 뇌리로 사마련에 들어가 수십 년을 함께한 하균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에게 하균은 친구이자 형제였다.
진철은 그를 잠시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말씀해 주시지요. 안선영 소저는 어디에 계십니까?”
“안… 선영?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안선영이란 계집은 무림오미 중 자화가 아니냐? 그 계집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이냐?”
“사마곡에서 납치해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녀의 행방을 모르십니까?”
“사마곡에서 납치한 여성은 한둘이 아닐 게다. 그런데 그런 계집을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홍군의 말에 진철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무공 수위로 보아 분명 그는 사마곡의 높은 위치에 속한 인물이라 여겼던 것이다.
홍군은 그런 진철의 표정을 바라보다 뭔가 깨달았다는 듯 황당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설마 그런 계집 때문에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단 말이냐!”
“아, 물론이지요. 부탁을 받아서 말입니다. 하하, 그런데 정말로 모르십니까?”
“말했다시피 난 모르는 일이다. 더군다나 난 사마곡의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이런.”
홍군의 말에 진철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괜히 싸운 게 아닌가.
“얼굴도 모르는 계집으로 인해 내가 이런 수모를 겪다니.”
홍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진철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물어볼 게 있다고…….”
“어이, 볼일은 끝난 거냐?”
“아, 형님.”
그때 기태천이 진철에게 다가왔다.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어디론가 옮겨 간 듯싶습니다. 건물 안을 모두 뒤져 봤는데 여인은 그림자도 안 보이더군요.”
“시녀조차 말이냐?”
“아뇨. 하지만 인질로 보이는 여인은 없었습니다.”
“흠…….”
기태천은 눈살을 구겼다. 이제야 찾았다 생각했건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태천의 시야에 홍군이 들어왔다.
“음? 혹시 홍 호법이 아니시오?”
“다, 당신은 검왕!”
홍군은 경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기태천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아니, 누가 검왕이 이런 곳에 있으리라 생각한단 말인가?
기태천이 그를 보곤 알겠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호오, 설마하니 사마련도 이번 일에 가담한 것이오?”
“……!”
“그 반응을 보니 사실인가 보구려.”
“무, 무슨 말이오! 이곳엔 사마곡주가 자신의 생일이라고 초대장을 보내어 사마련의 대표로 온 것뿐이오!”
“아항.”
기태천은 비릿한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빤히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홍군은 그의 눈을 마주 응시했는데 그가 아무 말이 없자 얼굴을 구기며 눈을 돌렸다.
“왜 눈을 돌리시는 거요?”
“…….”
“아, 혹시 본인이 쳐다보는 게 부끄러워 그러시오? 몰랐소이다. 홍 호법이 남색을…….”
“그딴 취미나 취향은 가지고 있지도 않다!”
홍군이 다시 눈을 부릅뜨며 외치자 기태천은 실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홍군은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빈정거림에 심마가 뻗쳤는지 내상이 돋은 것이다.
“훗, 사도의 찌꺼기.”
“뭐?”
홍군은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바로 앞에는 어느새 왔는지 한도군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벌레를 바라보는 눈으로.
“역시 사마곡에는 사마련이 개입하고 있었군.”
“그게 무슨 말이냐?”
“무슨 말이라…….”
한도군은 실소를 지으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어느새 주변은 흰 무복의 사내들로 인해 정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마곡의 무인은 열 명도 남지 않은 것이다.
퍼걱!
갑작스레 한도군이 발로 홍군의 얼굴을 강하게 차 버렸다. 홍군은 그의 기습에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큭, 이게 무슨!”
퍽!
뭉개진 코에서 피가 흘러나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려던 홍군은, 한도군이 다시 발로 얼굴을 내려 밟자 땅바닥에 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감히 어디서 사도의 찌꺼기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가?”
차가우면서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조금 전 기태천을 대할 때와는 전혀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한도군은 허리를 숙여 홍군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너희 사파 놈들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족속들이다. 땅속을 기어 다니는 지렁이만도 못하고, 나뭇잎을 먹고 사는 송충이보다도 못한,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존재가 바로 네놈들이란 말이다.”
“감히 네까짓 놈이!”
꾹!
“크으윽!”
한도군이 발에 더욱 힘을 주자 홍군은 얼굴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입을 열지 못하고 신음을 터트렸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자신보다 배는 더 어린 자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생각에 울화가 터져 내상이 더욱 심하게 돋은 것이다. 만약 이 상태에서 조금만이라도 내공이 실린 공격을 받는다면 평생 칼을 들지 못할 수도 있었다.
“벌레가 어디서 입을 여는 거지? 벌레면 꿈틀거려야 하지 않나? 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더니 지금 지렁이 흉내를 내는 건가? 크크큭.”
“이 정파의 사냥개가!”
홍군이 다시 고개에 힘을 주며 외쳤다.
한도군이 그 말에 실소를 짓고는 홍군의 얼굴에서 발을 떼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차 버렸다.
빠각!
그의 신형이 일 장 가까이 나가떨어졌다. 그러고는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흥! 네놈은 명분을 얻는 데 중요한 증인이 될 터이니 죽이진 않을 것이다. 크크큭.”
뭔가 기분이 상당히 좋은 것처럼 대소를 터트리던 한도군은 기태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설마 검왕께선 사마곡에 사마련이 개입된 것을 아시고 온 것이오?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해결되었소.”
“…….”
기태천은 한도군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행동 때문이다.
사파인이라면 아무리 자신보다 연배가 높고 존경을 받는 이라 하더라도 쓰레기로 취급하는 자. 자신의 기준에 어긋나는 자는 모두 배척하는 자. 그게 바로 한도군이었다. 자신에게조차 하오체를 사용하지 않는가?
“그런데 저자는 아는 자요? 패도군 홍군을 이렇게 만들다니, 제법 무공이 높은 자인가 보오?”
한도군이 진철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자 기태천은 대꾸도 하지 않고 진철에게 다가갔다.
“볼일이 끝났으면 가… 음?”
진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하던 기태천은 진철의 이상한 모습에 의문을 품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진철은 이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온 듯 시체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기태천이 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다시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문을 열었다.
“후우, 어쩔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정파와 사파의 관계니까.”
진철은 그런 기태천의 말에도 천천히, 그리고 일일이 시체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기태천은 그 모습에 흠칫 놀랐다. 진철의 눈가가 반짝인 것을 본 것이다. 하지만 그 반짝거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파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이 죽어야 했습니까?”
“그것이 무림이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런 힘이 없는 자들까지 죽어야 했습니까? 단지 먹고살기 위해 몸을 담은 이들도?”
진철이 어딘가를 응시하자 그의 시선을 따라간 기태천의 눈에 어린아이가 밥그릇을 품에 안고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아이의 어미로 보이는 여인이 아이를 감싸고 있었다.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것이 아마도 자신의 아이와 함께 죽임을 당한 것 같았다.
기태천은 그 시체들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무림이다.”
“그런 무림 따위 제 안에는 없습니다.”
“뭐?”
기태천이 무슨 소리냐는 듯 진철을 쳐다보았다.
그때 한 사내가 진철이 있는 곳으로 황급히 뛰어왔다. 무복이 아닌 천으로 기워 입은 옷으로 보아 아무런 힘이 없는 천민 같았다.
그런 그의 뒤로 또 다른 사내가 따라붙었다. 칠무회의 무사였다. 그는 간단하게 천민을 붙잡고는 곧바로 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가슴에 검을 박기 위함이었다.
슈앙!
“음?”
그 순간 갑작스레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예기를 느낀 무사는 눈을 부릅떴다. 자색의 검기가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펑!
“컥!”
자색의 검기를 향해 검의 방향을 바꾼 사내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엄청난 힘에 검을 놓치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러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잡혀 있던 사내 역시 충돌의 기운에 정신을 잃은 듯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진철은 천천히 그 양민에게 다가가며 내공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양민의 복부에 내공을 밀어 넣었다. 위력을 조절해 큰 충격은 없을 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운을 흘려 넣어 준 것이다.
“진철아! 무슨 짓이냐!”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아무 힘도 없는 양민이 죽임을 당하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
진철의 말에 기태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힘없는 양민을 돌봐야 하는 것이야말로 도사들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남을 돕고 덕을 쌓아 무릉도원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도사들의 염원이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진철이 한 행동은 성급했다.
척!
그때 한도군이 검을 뽑아 들며 진철을 향해 겨눴다.
“지금 뭘 하는 거요? 설마 그런 사파 놈을 감싸려 드는 거요? 패도군을 저렇게 만든 것으로 보아 소협의 무공이 절대로 낮지 않음은 알고 있소. 하지만 우리를 감당해 내긴 어려울 텐데?”
어느덧 진철의 주위로 수십의 사내가 몰려들었다. 그들은 검을 겨누며 천천히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당장이라도 한도군의 명령이 떨어지면 공격할 태세였다.
“훗.”
진철은 그들의 움직임에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도군은 그런 진철의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 여유는 대체 뭐지? 설마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다고 여기… 헉! 그것은!”
말을 하던 한도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진철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본 것이다.
“자색의 바탕에 매화 무늬. 그리고 손잡이 끝에 붙은 매화 모양의 조각. 설마 자하신검!”
한도군의 외침에 진철은 슬쩍 자하신검을 보았다. 자하신검은 그런 주인의 시선을 느꼈는지 부르르 떨며 검명을 토해 냈다.
“정말로 자하신검이냐?”
“그걸 알려 줄 필요는 없다고 여기는데.”
“이익! 네놈의 신병을 구속하겠다!”
“누구 마음대로?”
진철이 실소를 머금으며 대꾸하자 한도군의 눈에 기광이 서렸다. 현 무림에서 칠무회의 말은 곧 무림의 법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감히…….”
진철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자 한도군은 이를 갈았다.
자신이 누구던가? 칠무회의 일곱 명의 수장 중 하나가 아닌가. 그런 자신에게 지금까지 저렇게 오만 방자한 태도를 보인 이가 누가 있단 말인가? 절대십오인을 제외한다면 자신에게 저런 태도를 보인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갓 약관을 넘어 보이는 놈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있었다.
“흥! 과연 네놈의 그 태도가 얼마나 가는지 지켜보마! 쳐라!”
“이런!”
한도군이 외치자 기태천이 검을 빼 들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칠무회와 진철의 격돌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푸른 섬광이 진철과 칠무회의 사이에 내리꽂혔다.
콰과광!
“크읏! 이건!”
한도군은 강렬한 냉기에 몸을 날리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때 진철의 앞에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대도를 바닥에 꽂고 있는 한 여인. 북궁아였다. 그리고 그 뒤로 한정의 모습이 드러났다. 먼지투성인 것으로 보아 무너지는 건물에서 간신히 탈출한 것 같았다. 한정은 지금의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북궁아는 내공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내 이름은 북궁아. 그를 상대하려면 그 전에 나부터 상대해야 할 거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칠무회의 무인들은 주춤거리며 접근하지 못했다. 방금 전 그녀가 쏘아 댄 도기의 위력이 절대 자신들보다 아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실력을 훨씬 상회했다.
“북궁… 설마?”
한도군은 북궁아의 말에 또다시 놀라며 그녀를 주시했다.
“이 무림에서 북궁의 성을 쓰는 곳은 단 한 곳. 설마 네년이 북해빙궁의 혈족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슈앙!
“헛!”
한도군은 헛바람을 들이켜며 재빨리 날아오는 푸른 섬광을 피해 몸을 날렸다. 그러자 그가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섬광이 떨어지며 냉기가 흘렀다. 한도군의 말에 북궁아가 도기를 날린 것이다.
“년? 감히 네까짓 게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거지?”
실소를 머금으며 차갑게 말을 내뱉은 북궁아는 마치 벌레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한도군을 보았다.
한도군은 그녀의 눈빛에 치욕스러운지 이를 강하게 깨물었다.
그녀가 날린 도기로 보아 그녀의 실력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여기서 격돌하게 된다면 아마도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 무림에서 북궁 성을 쓰면서 이런 음기가 실린 공격을 펼칠 수 있는 단체는 단 한 곳. 바로 북해빙궁이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잘못된다면 북해빙궁의 개입은 절대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혈족에 대해 집착이 강한 북해빙궁을 적으로 삼게 된다면 최악의 경우 칠무회의 생존을 걸어야 할 수도 있었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한도군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크흠! 부, 북궁 소저! 뭔가 오해하신 듯하오. 우리는 북해빙궁을 적으로 삼을 의향이 전혀 없소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소저 뒤에 있는 자라오. 그자를 넘기시오. 그러면 우리도 곱게 물러나리다.”
“흥, 말했다시피 날 넘어야 그에게 손을 댈 수 있을 거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입을 여는 그녀의 말에 한도군은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자신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토록 찾고 헤매던 자하신검이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생각 같아서는 북궁아도, 그리고 진철이란 사내도 모두 죽이고 자하신검을 빼앗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배경이 걸렸다. 더군다나 여기에 있는 기태천 역시 죽여 입을 막아야 하는데, 누가 감히 검왕을 대상으로 살인멸구를 하려 할까? 그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소저…….”
“그만.”
한도군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기태천이 앞으로 나섰다. 기태천은 북궁아의 앞으로 가더니 한도군을 바라보며 검을 뽑아 들었다. 한도군은 그런 기태천의 행동에 인상을 썼다.
“설마 기 대협, 관여하실 생각이오?”
“물론. 말 안 했던가? 여기 있는 진철은 내 지인이야.”
“하지만 자하신검이 이 무림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닌 물건인지는 기 대협이 더 잘 아실 것 아니오!”
“그렇기에 더더욱 개입을 한다는 거지. 여기 있는 진철은, 아니 진 장문인은.”
말을 끊은 기태천은 고요한 눈으로 한도군을 바라보며 분명하게 내뱉었다.
“화산파의 유일한 후예, 화산 장문인이다.”
“뭣!”
한도군의 얼굴에 놀람이 피어났다. 그 놀라움이 순식간에 퍼지더니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무슨 말…….”
한도군이 말을 더듬으며 진철을 바라보았다. 정파의 수호자라고 여기는 그가 화산파를 모를 리 없다. 그렇기에 기태천의 말은 충격이었다.
“그게 무슨 농담이오!”
“믿으라니까 그러네? 그렇지 않은가, 진 장문인?”
기태천이 진철을 바라보자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웅성웅성.
또다시 칠무대원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빠르게 퍼졌다.
믿을 수는 없지만 정말로 그의 정체가 화산파의 장문인이라면 자신들은 지금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화산파의 유일한 후예라면 혼자 있다는 뜻 아니오? 그러니 자하신검을 지니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되오!”
“그래서? 칠무회에서 보관하시겠다? 자하신검은 대대로 화산 장문인의 신물인데도?”
기태천의 말에 한도군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소! 당금 현 무림에서 자하신검을 지닐 자는 천무제 담덕 님을 제외하고 누가 있겠소?”
“하지만 자하신검은 이미 주인이 있는 상태인데?”
기태천이 슬쩍 진철을 의식하며 말하자 한도군은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자가 나이에 비해 뛰어난 무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소. 거기에 화산파의 장문인이라는 것 역시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누가 감히 나의 주군을 넘어설 수 있겠소?”
“호오, 대단한 자신감이군.”
“물론! 주군은 천하제일의 고수라오. 그리고 혹시나 자하신검을 홀로 들고 다니다가 사파 놈들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러는 거요?”
“그건 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닌가?”
거기까지 말한 기태천은 내공을 끌어 올려 강하게 검을 내려쳤다. 날카로운 섬광이 뻗어 오자 한도군은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콰확!
한도군이 있던 자리가 움푹 파이며 하나의 선을 그렸다.
한도군은 그 검상을 바라보다 얼굴을 구기며 기태천을 바라보았다.
“정말 해보자는 거요? 아무리 검왕이시라지만 우리를 모두 상대하기엔 벅차실 텐데?”
“그거야 해봐야 아는 거고. 그리고 나에겐 명분이 있지. 먼저 공격하고 칼을 들이댄 것은 너희가 아니냐?”
“그, 그건.”
“물론 나도 딱히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본 파의 입장도 있으니까. 그러니 여기서 서로 한발씩 물러서는 것은 어떨까?”
기태천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한도군은 이를 갈았다. 결국 이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 않소!”
“알긴 내가 뭘 알아? 그럼 정말로 한번 해보자는 건가?”
기태천이 내공을 끌어 올리자 그의 주위로 기파가 퍼져 나갔다. 그 기도를 정면으로 맞선 한도군은 자신도 모르게 물러서며 식은땀을 흘렸다. 과연 절대 고수라 불릴 만한 기도였다.
마른침을 삼킨 한도군은 긴장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하지만 저자를 이대로 보낼 순 없소. 기 대협께서도 도와주시면 안 되겠소? 자하신검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냥 넘길 만한 물건이 아니잖소?”
“음…….”
기태천은 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돼.”
“이익!”
“호오, 한 대 치겠다?”
“…….”
한도군이 눈을 부릅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기태천은 그의 눈빛에 콧방귀를 뀌더니 진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넌 먼저 가 보거라. 난 나중에 뒤따라가마.”
“하지만…….”
“빨리 가래도. 안 그러면 여기서 싸울 생각인 게냐?”
“…….”
진철은 아무 말 않고 고개를 숙였다. 사실 자신도 꽤 화가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죽이진 않겠지만 그들에게도 약자의 고통을 안겨 주고 싶었다. 더군다나 기태천을 홀로 두고 가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서 가라니까? 설마 네 선조들이 지금까지 쌓아 온 것을 모두 저버릴 셈이냐?”
“……!”
“가거라.”
기태천이 다시 입을 열자 진철은 그를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기태천을 지나쳐 사마곡의 정문으로 향했다. 북궁아는 그런 진철을 호위하듯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딜! 흡!”
슈각!
진철이 장내를 벗어나려 하자 한도군이 몸을 날려 그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그의 앞으로 한 줄기의 섬광이 지나갔다. 그 탓에 한도군은 미처 진철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뒤로 몸을 빼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명분은 나에게 있다고.”
“기 대협!”
한도군이 외침에도 기태천은 실소를 지으며 진철을 바라보았다.
진철은 그런 기태천의 모습에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곧 장내를 벗어났다. 그 뒤를 북궁아와 한정이 따랐다.
한도군은 진철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눈을 치켜뜨며 기태천을 향해 말했다.
“이 일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잊지 말든가.”
“큭!”
기태천의 빈정거림에 울화가 치미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 한도군에게 한 사내가 급히 다가섰다.
“패도군이 달아났습니다!”
“뭐얏!”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달아난 듯싶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심하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큭!”
보고를 하던 사내가 뒤로 나자빠졌다. 한도군이 그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바닥을 구르던 사내는 재빨리 일어나 한도군에게 다가갔다. 한도군은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정신 똑바로 못 차리나!”
“큭, 죄송합니다.”
“추궁은 나중에 하겠다. 어서 찾아!”
“존명!”
한도군의 말에 칠무회의 무사들이 사방팔방 흩어졌다.
한도군은 기태천을 한 번 노려보고는 곧바로 부하들의 뒤를 따라 그 자리를 떴다.
어차피 기태천이 버티고 있는 한 자하신검을 확보하긴 어려운 일. 최소한 패도군의 신병이라도 구속하여 사마련이 사마곡에 개입하여 정파를 쳤다는 명분이라도 확보해야 했다.
기태천은 그런 한도군을 바라보며 실소를 짓고는 뒤로 돌았다. 그곳엔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쌓여 있었다.
기태천은 잔해로 다가갔다. 마치 어떤 흔적을 찾기 위한 것처럼.
***
“헉헉!”
홍군은 가쁜 숨을 내뱉으며 숲 속을 가로질렀다. 성치 않은 몸이지만 주저앉을 순 없었다. 이미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고도 남을 만큼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이제 이 숲만 지나면 산 초입이 나온다. 그렇다면 혹시 모를 추격대의 발걸음을 늦출 수 있을 것이다.
“이 치욕은 꼭 갚아 주마!”
홍군은 이를 갈며 한도군을 떠올렸다. 몸만 정상이었다면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그렇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건 절대 잊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음?”
홍군이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애병에 손을 대었다. 근처에서 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누구냐!”
주변을 훑어보며 홍군은 당장이라도 출수할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내상이 심해 내공을 끌어 올리지는 못했지만 내공이 실리지 않더라도 웬만한 자는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네.”
“하균!”
수풀에서 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사이검 하균이었다. 그는 홍군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다행이로군. 고맙네. 살아 있어서. 평생 짐을 지고 살아갈 뻔했다네.”
“자네가 여긴 어찌……. 어서 가서 보고하라 하지 않았는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홍군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감돌았다. 그가 있다면 추격대가 쫓아와도 충분히 물리치고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기다려 준 그가 고마웠다.
“자네가 걱정이 돼서 먼저 갈 수가 없었다네. 뒤틀린 기혈은 이미 다스렸으니 이젠 나에게 맡기게나.”
“후우.”
“자네의 상태를 보니 꽤나 호되게 당한 모양이야.”
하균은 홍군을 부축하며 말했다. 그러자 순간 홍군의 눈에 불똥이 피었다.
“내 꼭 그놈을 죽이고 말 것이야. 꼭!”
또다시 한도군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이를 가는 홍군을 바라보던 하균은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네.”
“문제라니?”
기이한 느낌에 하균을 바라본 홍군은 의문을 품었다. 하균은 그를 부축해 숲을 걸으며 말을 이었다.
“정파를 공격하려면 명분이 부족하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사파는 꽤나 이리저리 흩어져 있네. 그런 상황에서 사파의 힘을 한곳에 집중하려면 명분이 필요하지. 예를 들어 어떤 사파의 유명한 고수가 정파들에게 온갖 수치를 당하며 살해를 당했다거나, 혹은 정파들이 연합하여 사파 문파를 치든가.”
“그래서 우리가 몰래 사마곡의 일에 개입한 것이 아닌가? 그들이 사마곡을 치도록.”
“그렇지. 우리가 개입한 사실이 알려지면 오히려 정파가 명분을 얻게 되니까.”
홍군은 한도군에게 당한 상처가 쑤시는지 얼굴을 구기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실패하고 말았어. 어처구니없이……. 설마 검왕이 나타날 줄이야.”
“검왕?”
홍군의 말에 하균의 눈이 커졌다. 홍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칠무회와 함께 왔더군. 칠무회만 왔더라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텐데, 검왕까지 왔으니.”
“검왕이라니…….”
하균의 아미가 좁혀졌다.
검왕이 사마곡에 관심을 가졌다는 말은 곤륜파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곧 정파들의 시선이 모였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설마 들켜 버린 건가? 우리의 목적이?”
“그건 아닌 듯하네.”
“그런가. 그럼 다행이군.”
하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홍군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음… 그나저나 사마곡에서의 실패를 지존께 어찌 알려야 할지.”
“실패라… 아직 실패한 것은 아니라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홍군은 하균의 말에 의아해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균은 그의 시선을 마주하다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나? 사파의 고수가 정파들에게 온갖 수치를 당하며 살해당해도 명분이 된다고.”
“그렇…….”
하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홍군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말을 하다 멈췄다. 하균은 그런 홍군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뭐?”
푹!
홍군은 배 속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느낌에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의 배 속에 틀어박힌 한 자루의 단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쿨럭!”
홍군은 배 속에서 치솟아 올라오는 피를 토해 내며 하균에게서 떨어졌다. 하균은 그런 홍군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홍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떨며 자신의 애병을 움켜쥐었다.
“자, 자네가 어찌!”
“어쩔 수 없다네. 지존의 명이니까.”
“……!”
홍군이 눈을 부릅뜨자 하균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지존께서 말씀하셨지. 사마곡의 일이 실패할 경우, 자네를 제물로 삼으라고.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네. 하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겠지.”
“크윽! 하균!”
홍군은 몸 안에 남아 있는 한 줌의 진기까지 모두 짜내어 도를 빼 들고 하균에게 달려들었다. 하균은 그 모습을 쳐다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으아!”
기합을 터트린 홍군의 도가 하균의 몸에 닿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자 손목이 비틀리며 그의 도는 하균의 귓불을 베고 멈춰 섰다.
배신을 당했다지만 차마 오랜 친우인 그를 벨 수 없었다.
팟!
그때 한 줄기의 섬광이 홍군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홍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균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뽑았는지 검에 묻은 피를 바닥에 뿌리며 납검하던 하균이 입을 열었다.
“자네의 복수는 내가 해 주도록 하지.”
“크륵! 하…….”
털썩!
하균을 향해 손을 뻗던 홍군의 몸이 모래성 무너지듯 힘없이 쓰러졌다.
하균은 그런 홍군을 잠시 내려다보고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애병을 움켜쥐었다. 그가 살해당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시체는 필요 없었다. 증거는 그의 애병이면 충분했다.
하균이 도를 바닥에 꽂고는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 홍군의 시체 곳곳에 뿌렸다. 그러자 그의 시체가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점점 녹아들어 갔다. 곧 그의 시체는 뼈조차 남기지 않고 증발하듯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균은 자신이 들고 있는 병을 바라보았다.
“과연 홍 장로의 작품이군. 놀라워. 그건 그렇고.”
하균은 홍군의 시체가 있던 자리로 시선을 돌리고는 눈을 감았다.
“잘 가게나. 내 저승에 가서 용서를 빌겠네. 미안하이.”
읍을 하며 고개를 숙인 하균은 곧 홍군의 도를 들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칠무회의 추격대가 오기 전에 자리를 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