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독룡-60화 (60/61)

제8장

병사들의 전장과는 달리 무인들의 전장에는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검선과 절검이 진건곤과 함께 대공녀와 싸웠지만 승산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진건곤은 무공으로는 대공녀와 막상막하의 실력을 보였지만 대공녀의 신법이 너무나 뛰어나 잡을 수 없었다.

언제라도 대공녀는 스스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면 신법을 사용하여 다른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다만, 전과 달라진 점은 검선, 절검, 소군을 상대할 때처럼 여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진건곤의 검은 검선 등의 것과는 다르게 대공녀가 나타날 곳을 미리 정확하게 집어내듯이 검이 날아왔기 때문에 대공녀로서도 수없이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야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이 신법을 사용하는 동안 진건곤과 검선, 절검의 고수들은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공녀의 신법은 생각보다 멀리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진건곤과 같이 뛰어난 고수가 있어 그녀의 기척을 계속해서 감지하며 쫓아간다면 언제라도 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쫓으며 싸운다면 대공녀라도 곤란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다만 현재로써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진건곤이 유일했기에 그녀를 잡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무인들끼리의 싸움에서 또 한 명의 영웅이 탄생하였다. 바로 청송이었다.

청송의 활약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무림대회에서 무당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으로 그 잠재능력을 보였다면 전투에 참가하며 그가 보여준 것은 잠재능력이 발현된 모습이었다.

능쟁십고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실력을 보여 누구나 그 또래에는 청송과 비교할 만한 자가 없었다는 데 공감을 보였다.

물론 진건곤이 있었으나 진건곤은 언젠가부터 논외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아마도 고천사라는 이름을 얻은 후부터는 세속적인 의미를 떠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두라 할 수 있는 능쟁십고의 무인들을 둘이나 베어내어 스스로 차기의 천하제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활약은 화산에 줄을 대어 놓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사람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그가 활약하며 명성을 얻어갈수록 진건곤에 대한 의심은 높아만 가고 있었다.

세속의 무림인들의 순위를 정하는 수준에서 벗어날 정도로 신기에 가까운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미 20여 일이 지나도 여전히 똑같은 싸움만을 하고 있으니 슬슬 진건곤에 대해 퍼져 있는 소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진건곤은 마녀와 같은 사문의 관계가 있는 인물, 서로가 서로를 죽일 생각이 없을 것이다.

진건곤이 시간을 끌다가 마교의 무인과 군사들이 승기를 잡으면 싸움을 그만두고 검을 거꾸로 잡을 것이다.

밤이 깊어 싸움을 멈춘 진건곤은 소군을 보기 위해 잠시간 적염수호장의 군영에 들렀다.

진건곤이 없는 무림맹의 막사에는 그에 관한 말들이 오고 갔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엇을 말이오?”

“전진자 말이외다. 나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마녀의 무공이 너무나 뛰어나지 않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오.”

“하지만 이십여 일이나 평수를 이루고 싸운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소이까? 약속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있을 수 없는 일 같소이다.”

무당의 장문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검선과 절검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그곳에서 예리한 기운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절검은 차마 무슨 말을 하지 못하고 참고 있었으나 검선은 달랐다.

“장문.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전진자가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린가? 그가 아니었으면 이미 끝난 싸움이 되었을 것이야. 괜한 소리는 하지 말게.”

검선이 나서서 무당의 장문을 나무랐다.

무당의 장문은 문파의 어른이자 최고고수인 검선의 말에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그것이 대세인 듯, 다른 장문들은 감히 말을 내세우지 않을 뿐,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검선과 절검이 진건곤과 함께 싸우는 동안 무장이 이미 들쑤셔 놓은 탓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아마도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었다.

그 일례로 진건곤과 대공녀가 사용하는 무공이 비슷하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내공은 싸움이 거듭되어도 약해지지 않았다.

무인들이 알고 있는 내공과는 무언가 다른 것이라는데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시작된 말에 둘은 같은 사문이라는 또 다른 소문이 돌았다.

상황에 너무나 딱 들어맞는 두 사람의 무공이었다.

“원시천존!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보오!”

갑작스러운 절검의 말에 검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검선도 화산의 일들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안 그래도 아마도 그런 소문도 역시 화산에서 나온 것인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대는 내 평생의 숙적이었소. 그대가 없다면 내게 지음이 없는 격이니 아니 되오. 더 이상 전진자가 이런 소리를 듣게 할 필요가 없겠소. 내일은 무리를 해서라도 싸움을 끝내도록 합시다.”

“원시천존!”

절검은 그저 자신을 자책하듯이 도호를 외우고 또 외울 뿐이었다.

다음 날, 검선과 절검은 전날의 다짐을 지키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맹렬하게 나서서 싸움을 이끌었다.

하지만 대공녀는 그들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검선과 절검은 자신들이 진건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또다시 전투가 시작되고 피가 튀고 살육이 흘렀다.

모산파가 나서서 술법을 쓰면 황제의 군사들이 진격을 했다.

피해를 본 천지신교의 군사들은 뒤로 물러서 전열을 가다듬고 또다시 앞으로 나왔다.

천지신교에서는 이십칠파결을 사용하여 모산파를 가두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앞으로 전진하며 황제의 군사들을 밀어내고 앞으로 전진하는 천지신교의 병사들이었다.

“큰일이오.”

이십칠파결에 갇힌 모산파의 술법 자들은 투명한 벽을 통해 바깥의 상황을 볼 수 있었는데 천지신교의 군사들이 확과 화살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흥! 그래봐야 자신들이 손해라는 것을 모르겠지. 우리가 손을 쓰지 않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게야.”

모산파의 도인들은 이십칠파결이 풀릴 것에 대비하여 부적을 꺼내어 들었다.

어느 순간 주위에 가득한 병사들이 활에 시위를 걸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이십칠파결의 진법이 풀리고 일시에 수많은 화살이 그들을 향해 쏘아졌다.

그야말로 화살비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많은 화살은 모산파의 도인들을 맞추지 못하고 옆으로 비껴 날아가고 말았다.

“빌어먹을! 진법이구나.”

모산파의 도인들은 이십칠파결이 해체되기 전에 이미 스스로 진법을 펼쳐 두었기 때문이었다.

차미기회진이라는 진법으로 힘의 경로를 틀어 한곳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진법이었다.

물론 그 한곳에 모산파의 도인들이 모여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화살비가 멈출 무렵!

부적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허공에 날려진 부적들은 누가 불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불타올랐다.

그렇게 시작된 불은 갑자기 커지며 주위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겁내지 마라! 뒤로 물러서면 그만…….”

천지신교의 병사들을 지휘하던 자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불길은 그전에 술법을 부렸을 때보다 더 넓게 순식간에 처져 타죽지 않으려면 전력으로 도망쳐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악!”

“으악! 살려줘! 살려줘!”

천지신교의 병사들이 아비규환에 빠져 비명을 부를 때 모산파의 도인들은 또다시 날아올라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으드득! 이리 내놓아!”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나고 천지신교의 군사들 사이에 숨어 있던 흑자가 나섰다.

다른 병사들이 지니고 있던 활을 빼앗은 흑자는 자신의 전 내공을 담아 활을 당겼다.

이미 멀어진 모산파의 인물들에게 활을 쏘려면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빠악! 빠악! 빡!

여기저기서 활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과 같이 공력을 집중시켜 활을 당긴 흑자들이 보였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이 사용하는 활인지라 그 힘을 당하지 못하고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

“빌어먹을!”

“제기랄!”

여기저기서 분통이 터지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또다시 진건곤이 군영을 방문하였다.

진건곤이 군영을 방문한 것은 오롯이 소군을 보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진건곤은 군사들의 싸움터에서 피어오르는 살기와 증오. 분노와 광기를 보았던 것이었다.

전날 승천지주에 대해 백노신에게 들은 일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피가 흐르고 살기와 증오, 분노가 가득 찬 세상이 되면 승천지주가 악선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소군에게 묻기 위해 온 것이었다.

천지신교와 황제의 군사들은 모산파의 출현으로 갑자기 뜨거운 싸움으로 번져 서로를 증오하는 듯이 싸우기 시작했다.

초기에 황제군의 일방적인 우세와 천지신교의 군사들이 수련이라도 받는 듯한 분위기와는 달리 이제는 생명을 걸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산파가 없었어도 시간이 지났다면 자연히 그리됐을 일이나 그 미움을 모산파가 뒤집어쓰고 있었다.

바로 전까지 서서 같이 싸우던 전우가 죽어 땅바닥에 쓰러지는 장면을 본 병사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적을 죽이려 덤벼들었다.

서로 서로가 살기 위해 상대를 증오하고 피를 보아야 하는 광기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런 것이 멀리서도 저절로 느껴질 정도로 진해져 있었기 때문에 신경이 쓰여 왔던 것이다.

“갑자기 싸움의 기운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증오와 광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적염수호장과 광우에게 인사를 마친 진건곤은 소군에게 물음을 던졌다.

“전선의 교착이 깨어졌어요. 모산파가 오고 난 후부터는 교착이 아니라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희생자도 아주 많아졌습니다. 지독한 난전입니다, 상공.”

“무섭습니다. 이게 바로 전쟁이란 말입니까? 피가 흐르고 증오와 광기가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역천의 술법에 걸린 것 같습니다.”

“상공. 저들이 이렇게 된 상황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바로 전쟁이라는 것이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쉬운 일 일리가 없지 않습니까?”

소군이 진건곤의 손을 잡았다.

“오직 상공만이 이 싸움을 쉽게 종식시킬 수 있습니다. 무인들의 싸움이 일단락 난다면 이 싸움은 그 승패의 방향을 따르게 될 것이니까요. 힘을 내주세요.”

진건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제 누가 이기든 끝을 보도록 하지요.”

“상공! 저도 같이 싸우고 싶습니다.”

소군은 진작부터 진건곤과 같이 싸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전날의 경험 때문이었다.

소군이 천지신교와의 싸움에서 무림인들의 도주를 지켜내다시피 했던 그때, 이십칠파결이 사라지자 그녀에게 갑작스레 힘이 생겨났던 것을 기억이 났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진건곤의 옆에서면 힘이 나듯이 진건곤도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있었다.

“하하하! 누님. 누님이 싸움에 나선다면 적염수호장은 누가 지킨단 말입니까?”

“제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이미 상공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본문의 장로님 두 분만 오시어도 이곳은 해결이 될 일입니다. 제가 나서서 조금이라도 싸움이 일찍 끝난다면 그 또한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폐하께 말씀을 드려보아야겠습니다.”

대공녀와 같은 고수 앞에 소군을 내세우는 것은 걱정이 되는 일이었지만 소군이 제법 진지하게 말을 꺼내었기에 진건곤은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폐하의 허락을 얻어보시구료.”

“그럼, 지금 당장 가서 여쭈어 보아요.”

진건곤과 소군은 군영을 벗어나 바로 옆의 작은 천막에 있었는데 소군이 당장 일어나며 진건곤을 재촉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진건곤이 군막의 밖에 서서 용무를 밝혔다.

“들라 해라!”

다른 목소리가 울리자 천막이 걷어졌다.

진건곤이 군영에 들어서자 적염수호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건곤을 반겼다.

“어서 오시오. 고천사! 이쪽으로 오시구려.”

적염수호장은 진건곤과 소군을 자신의 지척으로 데려와 앉혔다. 그 대하는 태도가 전과는 사뭇 달랐다.

광우의 건의로 적염수호장은 무림의 싸움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진건곤의 싸움을 보았던 것이었다.

진건곤이 싸우는 모습은 참으로 대단했다.

검을 손을 쥐지 않고 마음대로 허공으로 날리는 모습은 이야기로만 듣던 선인들의 경지가 아니던가?

검선도 역시 그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의 솜씨는 진건곤에 비하면 부족하였다.

검선은 필요하면 허공을 뛰어 올랐으나 진건곤은 숫제 허공에 떠올라 싸움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싸움을 보고난 후였으니 진건곤을 대하는 바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광우가 노리는 바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허허허!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오신 게요? 고천사의 부탁이라면 내 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모르겠소.”

“폐하께서 해주실 수 있는 일입니다.”

소군의 목소리였다.

“아아! 그렇소이까? 이 몸이 도움이 된다니 영광이구료.”

적염수호장은 진건곤의 무위를 본 후 완전히 매료되어버렸던 터라 지극히 공경하는 태도가 되어 있었다.

“싸움이 길어져 희생이 커지고 있습니다. 치열한 싸움으로 승기를 잡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무인들의 싸움이 결착이 나는 대로 그 싸움의 행방이 정해질 듯하온데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발칙한……!”

“이놈 어디라고 함부로……!”

적염수호장의 좌우에 줄 지어 서 있던 장수들은 무림인의 싸움에 따라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말에 발끈하여 고함을 지르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적염수호장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들어 보임으로서 그들을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고천사의 말이 맞다. 그대들은 안목을 넓혀야 할 것이야. 위대한 황제의 품에 안겨서 너무 안락하게만 살아온 모양이야. 그대들! 무인들과 싸워본 적은 있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무인과 싸워보고 싶은 자는 있나?”

이번에도 역시 나서지 못했다.

전날 진건곤이 보여준 신위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상께서 무림과 선을 그은 것은 그대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틀림없다. 이들과 우리는 사는 세상이 다르다. 고천사에게 무례하게 굴지 마라! 그대들은 고관대작이라는 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를 게 없다. 현실을 직시해!”

적염수호장은 장수들에게 일갈을 하고는 다시 진건곤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그 싸움을 나도 보았소. 마녀의 무공이 신기에 가깝더구려. 물론 고천사의 신기도 보았소이다. 참으로 대단하였소. 내 비록 어려서부터 무공을 닦아 무림인들의 무공을 어느 정도 예측을 해본 적이 있으나 고천사와 마녀의 무위는 전혀 상상 밖의 일이었소. 무척이나 놀랐소이다.”

적염수호장은 진심으로 진건곤의 무공에 감복하였는지 전과 다르게 진건곤에게 반 공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폐하……!”

광우가 나서서 적염수호장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적염수호장이 겸연쩍은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허허험! 내 고천사의 무공에 반해 딴소리만 하고 있었구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소?”

“저의 내자를 데려가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 사람은 무림에 있어 커다란 기둥입니다. 싸움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끝내기 위해서 그녀가 필요합니다.”

“폐하의 안전을 위해 본문의 장로 두 분이 이곳에 오실 것입니다.”

소군이 덧붙였다.

적염수호장의 눈이 소군을 향했다 다시 진건곤을 향했다.

“허허! 다른 사람까지 준비를 하셨단 말씀입니까? 아마도 그렇게 작정을 하시고 오신 것 같소, 아니 그렇소?”

“그렇습니다.”

진건곤은 솔직하게 말을 하였다.

“좋소! 하지만 조건이 있소. 내 호위를 내어주는 것이니 내 목숨을 내어주는 것과 같소. 안 그렇소?”

적염수호장은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바로 조건을 내세우기 위한 억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진건곤은 그다지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적염수호장이 고집을 피우고 내세운다면 거절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싸움이 끝나고 나면 내외분께서 나를 찾아주시오. 그리고 황궁에 손님으로 한 달을 머물러 주시오.”

적염수호장은 한 달의 기간 동안 진건곤과 소군의 환심을 사고 싶었다.

그들을 품에 두고 있기에는 너무나 크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만 그들에게 황실의 수호자가 되겠다는 약속만 받아낸다면 황실의 안녕은 굳건해질 것만 같았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폐하!”

“허허허허! 명이라니 당치도 않소. 그저 부탁이라고 해 둡시다. 허허허허!”

적염수호장의 태도가 지극히 공손하니 주위 장수들의 얼굴에 씁쓸함이 걸릴 정도였다.

어두운 시간 청송이 천막의 밖으로 나왔다.

최근에 들어 놀라운 무공을 선보인 터라 청송의 입지는 놀라울 만큼 높아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젊은 무인들이 삼삼오오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본디 무림은 강자를 숭상한다. 거기에 더해 청송은 다른 능쟁십고에 비해 나이가 어렸고 정이 많고 친절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청송에게 말을 걸어본 사람들은 그가 소문과 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날이 갈수록 청송의 인기가 높아져 당장에라도 개인의 문파를 개파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그중에 유독 밤늦게까지 청송을 따라다니며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자가 있었는데 그자가 바로 전날의 수월촌의 촌장, 승천지주였다.

하지만 외모만큼은 전날과 천지 차이로 벌어져 있었다.

젊은 외모에 곱상한 얼굴을 지닌 젊은 아이로 청송을 쫓아다닐 만한 시기의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크하하하하! 피가 흐르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소. 살기와 광기가 흐르고 분노와 증오, 슬픔과 원한이 가득 찼소. 최고요. 달기라고 해도 이런 호사를 부리지는 못했을 것이요. 고맙소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승천할 수 있을 것 같소.]

전음에는 흥분이 가득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은 틀림없지. 그럼 내일 거사를 진행할 텐가?]

[그렇소. 아쉽기는 하지만 내일 마녀와 고천사를 없애겠소. 승천하기에 앞서 내 존재를 인간들에게 확실히 알리고 가야 하지 않겠소? 크하하하하하!]

승천지주는 거듭되는 대공녀와 진건곤의 싸움을 보면서 이미 계획을 다 잡아 놓은 상태였다.

당장에라도 시작만 하면 거래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 더욱더 진한 증오와 슬픔을 주도록 하지. 달기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던 악선의 등장이니 그에 어울리는 무대를 만들어 주도록 할 것이야. 반드시 성공하도록!]

승천지주는 요괴다. 공포와 증오, 슬픔과 분노, 광기와 살기는 승천지주에게 힘을 주는 것.

일기장군은 대공녀와 진건곤을 동시에 없애기 위해 그에게 힘을 줄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과연 무엇이 사람들을 분노하고 증오하며 광기와 살기를 가지게 할 것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구나. 하지만 내일이면 알게 될 터! 참아보지!’

젊은 얼굴로 바뀐 승천지주의 얼굴에는 호기심만 가득하였다.

밤이 깊은 시각, 세상이 잠이 들었을 때, 군영의 바깥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어딘가 불편했던지 그림자의 두 손은 아래로 축 처져 있어 누가 보아도 탈진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림자가 천천히 하지만 눈에 띄게 움직이는 것이 틀림없는데 아무도 그것을 잡거나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이유는 검은 그림자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술법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영에 가까이 다가올수록 상황은 달라졌다.

아무리 수준이 높은 술법이 펼쳐져 있다고 해도 날고 기는 무인들이 있는 곳은 용담호혈과 같았다.

펄럭!

가끔씩 천막의 입구를 열어보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천막으로 되돌아 들어갔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점점 달라졌다.

펄럭! 펄럭!

장문인들이 있는 곳에 오자 거의 동시에 다섯 군데의 천막의 입구가 열리고 사람들이 튀어 나왔다.

나머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문과 가주들은 어쩌면 더 이상 나와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인지도 몰랐다.

천막을 열어젖힌 자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고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두세 호흡이 지나기 전에 놀랍게도 그림자가 움직이는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었다.

‘후우! 밤이면 대라신선도 찾지 못한다는 암라은형둔술을 걸어 두었는데도 이 정도란 말인가? 과연 무림의 어른들이 모인 곳. 이러다가는 사부님께 가기도 전에 잡힐지도 모르겠는걸.’

그림자는 전쟁이 벌어지는 전장에서 야밤을 틈타 몰래 사부를 찾아왔단 말인가?

점점 기이해지는 일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재주는 오늘 이후로 더 이상 펼칠 수가 없을 것이야.”

스릉!

남궁세가의 가주가 검을 뽑았다.

그가 검을 들어 가리킨 곳은 정확하게 암라은형둔술에 모습을 감추고 움직이는 그림자의 위치였다.

‘제길! 들키면 안 된단 말이야.’

그림자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사부님 도와주세요! 꼭 전할 말이 있습니다. 제발! 어서요!’

어린 아이의 바람은 소리 없이 마음속을 맴돌았을 뿐이었다.

후웅!

바람이 크게 일렁이는 소리가 나더니 그곳에는 애초에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진건곤이 서 있었다.

물론 진건곤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둥그런 구체를 뽑은 채 말이었다.

“전진자! 나를 방해하지 말게. 감히 이곳까지 침입한 간 큰 자가 누구인지 확인해 보아야겠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전진자는 얼른 포권을 하고는 성큼성큼 걸어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 버렸다.

“허! 저런, 저런!”

전진자가 돌아가 버리자 네 무인들은 고개를 흔들며 다시 천막으로 돌아가 버렸다.

남궁세가주는 그 눈을 진건곤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하다니……!”

“아마도 그에게 사정이 있겠지요.”

어느새 남궁 세가주에게 다가온 제갈 세가주가 입을 열었다.

“흥! 무림을 떠난 자가 무슨 일을 벌일지 나는 모르겠소이다. 이런 야심한 밤에 사람을 끌어들이다니… 쯧쯧쯧!”

“허면 남궁가주께서 따져 보시겠소?”

“흥! 어찌 내가 증거도 없이 그에게 따지겠소?”

“오호, 증거가 없단 말입니까?”

“제갈 가주! 놀이는 거기까지요. 더 이상 농을 한다면 난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오.”

남궁 세가주가 냉막한 표정으로 선을 그었다.

“하하하! 전진자에게 생각이 있지 않겠소? 그를 믿어 봅시다.”

제갈 세가주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전진자의 천막으로 향했다.

“전진자! 다른 분들이 어찌된 일인지 알고 싶어 하오. 날이 밝는 대로 사실을 밝혀 주시게!”

전진자의 천막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제갈 세가주는 그 말을 남기고는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궁 세가주는 제갈 세가주의 천막과 전진자의 천막을 두리번거리며 노려보더니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 버렸다.

진건곤에게 따지고자 하여도 정확한 증거를 들이밀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진자가 나타나는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천막에 들어간 지금도 아무런 이질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진건곤은 장문인들의 기척까지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백자가의 의복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고 얼굴은 씻은 적이 없는 것처럼 더러웠다.

“그래, 무슨 일이 그리 급했더냐?”

소군이 얼른 수건을 들어 얼굴을 닦아주며 물었다.

“일기장군. 그가… 그가 모산을 방문했습니다.”

“일기장군……?”

진건곤은 기억이 나지 않는 듯하였다.

“일기장군을 조심하라던 경고를 잊으셨습니까?”

“그래. 일기장군이 나타난 것이 그리 급한 일이냐?”

백자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들겼다.

“사부! 바로 그가 제 큰 사부님인 삼영신군의 원수이옵니다. 철쇄지주로 하여금 큰 사부와 싸우고 저주하게 한 자가 바로 일기장군입니다.”

그제야 진건곤의 얼굴에 이채가 돌았다.

“마물들과 거래를 한단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그자가 이제는 다시 돌아와서 또다시 사부를 해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죄… 송하게도…….”

“말하렴. 네가 말만 해도 상공에게 위험은 없을 것이야. 상공이 감당하지 못할 자는 없다. 이것도 좀 먹고.”

소군은 어느새 백자의 얼굴을 말끔하게 닦아놓고는 물과 먹을 것을 들이밀었다.

백자는 반가운 듯이 물 사발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고는 다시금 진건곤을 보았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말하여라!”

“옥주궁파가 그의 수작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사부! 지금 옥주궁파가 하는 것은 진실한 싸움이 아닙니다. 본문의 실력이 제대로 발휘되었다면 이미 끝났을 싸움을 일기장군의 수작으로 싸움을 질질 끄는 것입니다. 일기장군 그자가 본문이 거부하지 못할 조건을 들고 나왔습니다. 본문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부!”

백자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땅만을 바라보며 죄를 빌었다. 옥주궁파의 죄가 바로 자신의 죄인 양 고개를 들지 못하고 흐느끼고 있었다.

싸움이 길어지면 희생자도 많아진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 누구에게도 비극이 될 만한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전쟁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

“일기장군. 그가 누구더냐?”

그제야 백자가 고개를 들었다.

“일단 제 말을 들으십시오. 사부님은 제게 세 개의 영이 있어 삼영진군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알지!”

“허면 때로는 강림자가 원하지 않아도 영이 임의대로 강림할 수 있다는 것도 아십니까?”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다. 가끔 실성한 자들로 불리는 자들 중에 그런 자가 있지! 하지만 네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지 않느냐? 바로 청송 형님이 일기장군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지?”

진건곤의 말에 백자가 놀란 얼굴이 고개를 벌떡 들어 올렸다.

“화산의 대제자이자 상공의 형님이신 청송을 말하는 겝니까, 상공?”

소군도 역시 놀라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형님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껏 전혀 몰랐지만 백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확연해집니다. 더구나 이곳에 모산파를 데려온 것도 형님이 아니었습니까, 누님!”

“확실합니다. 사모님! 일기장군은 바로 청송. 화산의 대제자입니다. 일기장군은 그 영이 매우 강해 스스로 강림자의 정신을 누르고 나서 일을 꾸민다고 들었습니다.”

“허허! 형님이 가끔 정신을 잃는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있다. 허허허! 그럴 때마다 무공이 늘어 그저 몰아지경의 기연인 줄 알았거늘. 그게 다 일기장군의 수작이란 말이던가!”

진건곤은 혀를 차다가 말고 백자를 보며 다시 물었다.

“어찌 전날에 그 말을 하지 않았느냐?”

진건곤의 말에 백자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 건… 그때까지만 해도 그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본디 일기장군을 따른다는 것도 아시지 않습니까?”

진건곤이 과거를 떠올려 보니 확실히 그랬다.

바로 일기장군의 꼬임에 빠져 자신에게 사부를 구해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백자의 몸에서 여자의 영이 나와 구슬피 우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금은 어찌 말을 하는 것이냐?”

“그가 사부님을 해할 것 같은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일이 끝나면 세상에 가득한 요괴를 퇴치할 자가 옥주궁파뿐이니 스스로 모산파의 이름을 높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라면 사부님이 영력을 지닌 것을 알고 있을 터, 오직 옥주궁파만 가능하다는 말은 바로 사부님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형님은 내가 영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허나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 짐짓 큰소리를 쳐본 것인지 모르지 않느냐?”

“일기장군이 원하기를 옥주궁파는 싸움의 판세를 정하지 말고 그저 싸움이 더 치열해지게만 해달라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는 짚이는 구석이 있어 사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백자의 말은 이랬다.

전일 하늘의 기운이 크게 일그러진 날이 있었는데 바로 대요괴의 출현을 알리는 기운이었다고 했다.

아무리 대요괴라고 해도 스스로 승천하지 못하고 그 힘을 북돋아줄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바로 그 도움이라는 것이 백성들의 원성과 분노, 저주와 광기, 슬픔과 괴로움 등이라는 것이었다.

대대로 대요괴가 나타날 때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아픔이 가시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역시 전쟁에 맞추어 대요괴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대요괴는 이 전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옥주궁파의 생각이라고 했다.

“사부님이 그 대요괴가 승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테니 분명히 사부님과 그 대요괴는 싸워야 합니다. 일기장군 그자는 무슨 연유에선지 대요괴의 편에서 세상을 혼란하게 하는 자. 그의 계획에 사부가 들어 있음은 확실합니다. 사부!”

“그래, 고맙다. 이제는 안심하고 잠들거라. 사부가 스스로 피하기로 마음먹으면 세상에 나를 어찌할 자는 없을 것이다.”

진건곤의 손이 흔들리는 듯싶더니 백자는 그대로 쓰러져 코를 골았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에요. 상공.”

“아무튼 고마운 아이가 아니겠습니까? 차마 제 입으로 도망쳐 나왔다는 말을 하지 못하나 봅니다. 돌아가는 판세를 보아하니 도망쳐 나왔을 공산이 크겠습니다. 잘 살펴 주세요, 누님!”

진건곤은 품에 안은 백자를 자신의 침상에 누이고는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이리로 오세요. 상공.”

소군이 손을 내밀어 진건곤을 자신의 침상으로 잡아끌었다.

“아이가 있지 않습니까?”

진건곤이 말하자 소군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리고는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같은 침상에 누워 잠만 자라는 법이 없단 말입니까? 조용히 잠만 자자는 말입니다. 상공.”

진건곤이 가볍게 웃으며 침사에 올랐다.

“잠만 잡시다. 믿어도 되지요?”

“…누가 할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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