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경공을 펼쳐 나르며 진건곤은 감사를 표했다.
“감사드립니다. 백 노사. 목숨을 건졌습니다.”
“허어! 해동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천기가 사나워 그 원흉이 궁금해 왔었다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승천지주라니……!”
“만한지주가 아닙니까? 스스로 그리 말하였습니다.”
진건곤이 놀라 물었다.
“허허! 음흉한 놈이 자신의 정체까지 숨기던가? 필시 고약한 놈이 틀림없겠구나. 잡았어야 했거늘……!”
백노신은 혀를 차며 아까워했다.
“그놈의 정체는 틀림없이 승천지주라네. 승천지주가 되면 쇠사슬의 모양이 필요가 없어지지. 명주실 실오라기 같은 줄에 자신의 힘을 다 담을 수 있게 되네. 승천지주가 부리는 실을 승천사라고 부르네. 기본적으로 천잠사보다 십여 배 더 질기고 튼튼하다고 알려져 있지. 하지만 승천지주는 그 실에 자신의 힘을 실어 내기에 강기보다 더 질기다고 알려져 있네.”
진건곤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검강을 기본으로 삼는 이기어검에도 잘리지 않고 오히려 이기어검을 잡아끌어 당기지 않았던가?
고개를 끄덕이며 승천지주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백노신의 눈길이 훑었다.
“그런데 말일세. 자네는 왜 그 모양인가? 아직도 선인의 반열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가?”
“노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교해 주십시오.”
진건곤의 말에 백노신이 고쳐 입을 열었다.
“자네의 영력 말이네. 능히 나와 비등한 경지에 이르러야 하거늘. 많이 부족하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영력을 크게 손해 본 적이 있는가 말이네.”
진건곤은 한참을 생각하다 말고 소군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영력을 나눈 것을 말하였다.
진건곤의 말에 백노신은 손을 마주치며 크게 아쉬워했다
“허허! 이런! 쯧쯧쯧! 중원의 운은 왜 이리 고달픈 것인가? 쯧쯧쯧! 연이어 2대가 반쪽이어서는 민생들만 고달픈 것을……!”
“무엇이 잘못 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허허! 크게 잘못 되었네. 아주 크게 말일세. 자네가 그래서는 안 된단 말일세.”
백노신의 말에 의하면 중원과 해동에는 대대로 선인이 있어 그곳을 관리하고 있었다고 했다.
중원은 그 땅덩어리가 크고 넓어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니 요괴와 귀신들이 가장 많이 꼬이는 곳이라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기 쉽다고 했다.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니 그곳이 흔들린다면 세상이 어지러운 법.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선계가 선인을 보내어 감시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해동은 다른 이유에서 선인들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고 했다.
해동은 그 땅에 기운이 유난히 도드라져 자연히 선인이 태어난다고 했다.
자신의 기운을 다시 닦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해동에 다시 태어나 선인이 되는 것을 빌 정도였으니 그곳에 서린 영기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백노신은 자신도 역시 깨달음을 얻어 선인이 되었으나 지닌바 기운이 정순하지 못해 다시 해동으로 내려와 수련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백이현과 자네는 중원에 요괴와 귀신을 관리하라고 보낸 선계의 선인이라네. 때가 되면 깨우침을 얻어 선인의 경지를 열고 그 힘으로 세상을 정화하는 일을 하게 되어 있네.”
백노신이 하늘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랬다가 안타까움이 잔뜩 묻은 눈으로 진건곤을 보았다.
“허나 어찌된 일인지 백이현이 깨우침을 얻기 전에 크게 낭패함을 당했네. 바로 활선당의 비보가 바로 그 일이네. 본디 활선당의 일은 더 늦게 일어나기로 되어 있었다네. 백이현이 선인이 되고 난 후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되어 있었단 말일세. 그랬다면 백이현은 그런 일을 능히 감당할 만큼 정신적으로 크게 된 후의 일이니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을 것이네. 오히려 정을 끊는 무정함을 배울 수도 있었을 테지. 한데 이상하게도 선계의 계산보다 10년은 더 빠르게 활선당의 일이 터진 것일세. 그 결과로 그녀는 반쪽만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네. 미움과 증오를 가지고 있는 반선인이 된 것이지.”
백노신의 눈이 다시금 진건곤을 향했다.
“허나 자네마저 이리되다니. 이해할 수가 없네. 선계의 계산이 그리 허술할 리가 없단 말이네. 소군에게 내가 무공을 전한 것도 바로 선계의 결정이었네. 소군에게 천하제일의 무공을 전해 자네를 보호할 수 있게 한 일이었지. 자네는 소군의 자비에 감화를 받아 스스로를 변화하며 측은지심을 완전히 깨닫게 되어 있었지. 그런데 자네에게 그런 위험이 닥치고 스스로 영력을 나누어 소군의 생명을 살렸다니… 어찌 선계의 예측이 틀렸는지 참으로 놀라울 뿐이네. 자네도 역시 영력이 부족하여 반선인에 불과하게 되어버렸네. 악선도 아닌 승천지주 따위에게 곤란함을 당하게 되었단 말이네.”
진건곤은 묵묵하게 있다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이런 일을 획책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진건곤의 음성에는 선인이 되지 못했다는 아쉬움 따윈 묻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하게 그 원인을 물어보고 있었다.
“글쎄. 아직은 선계에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네. 그런데 오늘 일을 보니 그런 생각을 해보아야겠다고 생각이 드는군. 승천지주가 내 안목을 벗어나는 일 따윈 애초에 있을 수가 없으니까. 일단 자네의 주위를 지켜보도록 하지.”
백노신은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홀로 남은 진건곤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에 휘말리고 말았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진건곤은 무척 반가운 손님을 만났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밤이 되어 아미파를 찾은 청송이었기에 진건곤이 직접 나서서 청송을 챙겼다.
“하하하! 이제는 또 형님인 겐가? 참으로 일이 꼬이고 꼬이는구나. 더 이상은 욕심낼 수 없겠네. 그냥 이렇게 형제로 지내자꾸나.”
진건곤이 청송을 만나자 대뜸 형님이라고 하였다.
화산의 배분 따위는 기억하지 않는다는 투였기에 청송은 더 이상 화산의 기억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듣자 하니 신의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그저 기운을 돋구어주는 정도에 불과하지요. 순전히 치료비가 공짜라서 그리 불러주는 겝니다.”
진건곤은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하하하하! 어쨌거나 네가 좋은 일을 하는구나. 참 좋은 일이야. 그리고 말이다. 나도 진맥을 해주면 어떻겠느냐? 실은 말이다…….”
청송의 말은 이랬다. 몇 년에 한 번씩 정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었는데 깨어나 보면 그 장소가 기억 속에 있는 마지막 장소와 달랐다는 말이었다.
깨어날 때마다 내공과 무공이 전에 비해 눈에 띄게 강해지고 선명하게 잡혀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을 했다.
또한 바뀌는 장소가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어떤 일인지 눈을 깨어보니 아미산의 중턱에 있었다는 말이었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장장 오천 리나 떨어진 곳에 나타나 있으니 이런 일은 처음인지라 심각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몰아지경에 취해 스스로를 잃고 헤맨단 말씀이지요?”
“그러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무공이 더 강해져 있고 말입니다.”
“그도 역시 그러네.”
“허면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저 역시도 겪었던 일이니까요. 제 경우에는 몰아지경에 빠져들면서 벌어졌던 일입니다. 형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히려 축하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닐세. 아니야. 무공을 수련하던 도중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도 이렇게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야. 어느 때 불현듯이 정신을 잃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번에는 생각도 못할 만큼 멀리 온 것도 있고 말이네.”
“흐흠! 어디 한 번 보지요.”
진건곤의 손이 청송의 맥문을 쥐고는 영력을 흘러 넣었다. 시간을 두고 구석구석을 살피는데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소제 능력이 부족하여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신의께서 모른다면 뭐 큰 병은 아니겠지. 그렇지 않나? 하하하하!”
“형님! 신의란 말은 삼가 주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무림에선 그러지 않았는데 사람들에게는 공짜로 고쳐주는 의원이란 말과 같은 말이라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의라는 것이 아니겠나? 설마 내게 치료비를 받으려고?”
“하하하하! 그냥 신의라고 부르시면 되겠습니다.”
청송의 농에 분위기는 좀더 편해졌다.
“나중에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그나저나 청명의 단전의 이야기는 들었네. 어떤가? 회복이 가능하겠는가?”
진건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을 뿐이었다.
청송이 소매에서 환단을 꺼내었다.
“실은 낮에 눈을 떴으나 고민을 좀 하다가 늦었다네. 내 눈 뜬 곳이 아미산 자락이라고 해도 선뜻 자네와 청명을 볼 낯이 없네. 다른 때라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떠났을 것이네. 그럼에도 염치없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네. 매령단일세.”
매령단. 화산의 장문에게만 이어진다는 단환이었다.
소림과 무당의 단환이 세상에 그 이름이 높으나 그것은 그들의 단환을 사용하는 것을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인 탓.
화산과 같이 오래된 문파에 뛰어난 영단이 없을 리가 없었다.
“평생 세 알을 쓸 수 있다고 했네. 이미 두 알은 무공 수련을 위해 사용했네. 하나뿐이지만 청명을 위해 사용해 주게. 그럼 이제 가보겠네.”
“형님! 조금 더…….”
“하하하! 나를 염치없게 만들지 말게. 내 자네와 청명을 생각해서라도 화산을 더 도량이 큰 그릇으로 바꿀 것이네. 그날이 오면 내 다시 자네와 청명을 찾을 것이야. 그때 나를 마다하지 말고 맞아주게. 오늘은 그만 떠나고 싶으이.”
청송은 경공을 사용하여 그 자리를 벗어나니 그 마음이 진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진건곤은 그의 진퇴를 전혀 막지 못하였다.
화산의 도량을 더 크게 만들어 오겠다는 말에는 또다시 자신과 청명을 화산의 품에 담아보겠다는 뜻이었으리라.
말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이리라.
청송은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져 그의 무공이 전에 비해 크게 상승했음을 알 수가 있었다.
“형님! 이제는 제가 화산과 연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진건곤의 음성은 상대도 없는 곳에 공허하게 흘렀다.
공력을 담아 청송이 들을 수 있게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담아 흘려낸 것뿐이었다.
그때 마침 진건곤의 어깨에 올려 있는 손이 있었다. 진건곤은 그 손이 누구의 것임을 알고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상공.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저렇게 멋진 형님이 있지 않습니까?”
“하아! 아니오. 형님이 있다고 해도 나는 이제 무림에서 떠나고 싶소. 앞으로 내게 무림의 일은 의미가 없을 듯하오.”
“상공…….”
소군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진건곤의 손을 꼭 잡았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형님의 무공이 많이 늘지 않았소? 저 정도면 능히 능쟁십고에 들 것 같단 말이오.”
“아……!”
소군은 청송이 사라지며 보인 경공을 생각해 보았다. 정말 대단한 수준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진건곤에게 매령단을 전한 청송은 화산으로 움직였다.
길을 가던 중간에 개방의 연락망이 보내온 연락을 받았다. 참으로 대단한 개방의 정보능력에 놀라고 말았다.
무적자 청송 무림맹으로 급 요망.
청송은 서둘러 임시 무림맹이 차려진 곳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사천에 임시 무림맹이 차려진지라 아미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빠르게 도착하였다.
“현 무림에서 모산파와 가장 인연이 깊은 이는 바로 전진자더구나. 특히 모산파의 후기지수인 백자는 이미 전진자에게서 사사한 모양이야. 아마도 너라면 그 아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전에 전진자와 함께 본 적은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한때 네가 전진자와 친교가 깊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아이가 모산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고 하더구나. 그 아이를 통해 이야기를 전하면 조금은 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꼭 백자를 통해 이야기를 하도록 해라!”
맹주는 거기까지 말을 하고는 일어나 방을 나서려다 문득 뒤돌아섰다.
“아, 참! 제갈 세가주에게는 네가 자원한 것으로 이야기 해놓았다. 그리 알아라.”
청송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맹주가 시킨 일은 바로 모산파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모산파의 재주는 대규모 전쟁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였다.
호풍환우를 이용한 화공과 수공, 풍향의 전환 등은 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투에 큰 효과를 발휘한다.
모산파의 존재는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하지만 이미 모산파는 그 기세가 급격히 기울어 그 세를 유지하기 위해 참전하지 못한다고 통보해 왔던 터였다.
그런데도 백자를 찾아가라고 한다. 이를테면 모산파를 끌어들이기 위해 전진자와의 인연을 팔라는 이야기였다.
진건곤을 버리고 나서 그의 연을 이용하라는 명을 들으니 그만 얼굴이 굳어져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대승적인 차원에서는 모산파의 참전이 필요한 일이니 청송 스스로도 반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다녀오도록 하지요.”
청송은 개방에게서 받은 지도가 있었으나 지도를 보지 않았다.
모산에 왔으니 모산파를 찾는 것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모산파라면 진을 펼쳐두어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길을 잘못 찾으면 그들이 데리러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모산파를 찾았으나 모산파라는 표식은 보이지 않았다.
찾고 있는 모산파는 없고 작은 소로에 옥주궁파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문득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너무나 당연한 듯이 옮기는 발걸음.
“가만, 내가 이곳에 와본 적이 있던가?”
스스로 놀라서 물어볼 정도로 당연하게 방향을 잡았다. 게다가 옥주궁파라는 것을 알고도 뒤돌아갈 마음도 들지 않았다.
“가보는 거지!”
작은 소로를 한참 따라가니 그곳에 백자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자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잔뜩 배어 있었다.
“간만이구나. 백자야.”
청송이 백자라고 부르자 백자는 경계를 풀었다.
“오늘은 그가 아니군요.”
“무슨 말이더냐?”
청송은 느닷없는 백자의 말에 놀라 물었지만 백자는 다른 소리를 하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니다. 나는 지금 너를 보러 왔구나.”
청송은 자신이 장문을 만나 이야기한다고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백자에게 말을 꺼내려 했다.
“저를 말입니까?”
“그래, 네가 모산파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구나. 네게 도움을 청해야 할 일이 있다. 들어주겠느냐?”
“일단 말씀하십시오. 들어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청송은 자신이 왜 그곳에 왔는지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 백자의 안색이 굳어가는 것을 보며 반응이 신통치 않음을 느꼈다.
결국에는 진건곤의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아마도 네 사부인 건곤이도 역시 그 싸움에 나설 것 같구나.”
“사부님이 말입니까?”
“그래! 그렇게 들었다. 게다가 네 사모인 검후님도 말이다. 모산파의 힘이 있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흐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일단은 제 처소라도 가서 기다려 보시기 바랍니다.”
백자는 청송에게 안내도 하지 않고는 자신의 처소에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홀로 혼자서 숲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청송은 반대편 숲으로 난 소로를 따라 걷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곳의 지리가 익숙하구나. 백자의 처소를 어찌 알아 걷고 있단 말인가?’
자신이 백자의 처소를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멈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길을 따라 가니 숲이 끝나는 곳에 공터가 나오고 작은 동굴들이 여러 개 있었다.
청송은 능숙하게 개중에 하나를 골라 들어가 앉았다.
‘허! 이런 곳이 익숙한 느낌이 들다니 나도 참 모를 일이구나.’
가만히 앉아 있자니 여러 사람들이 동굴 입구에 모여 자신을 훔쳐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정도가 좀 심했다.
털썩!
동굴 안을 훔쳐보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진 여인이 있었다. 넘어졌는데도 몸을 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고 청송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당신께서는 제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청송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려고 하였는데 그녀의 얼굴을 볼수록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
“치워요! 누가 사형을… 아니 배신자에게 볼일이 있단 말입니까?”
‘배신자라니?’
청송은 그저 아리송할 뿐이었다.
“흥! 이제는 기억에도 없는 일인가요? 정말 철저하게 넘어가 버렸군요. 나 승지도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런! 내가 아는 사람이란 말인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익숙한 곳, 본 듯한 얼굴이 아닌가?’
청송의 표정이 복잡하게 꼬여갔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군지 알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흥! 당신의 빈자리 때문에 저 어린 것이 힘에 겨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있거늘 당신은 진정 옥주궁파를 까맣게 있었단 말인가요?”
“승지야! 그만 해라! 그의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다. 부족한 내가 만든 일이 아니더냐?”
어느새 동굴의 밖에는 모산파의 장문이랄 수 있는 도력이 가장 높은 도인이 나섰다.
휘이익!
동굴에 갑작스레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입구를 제외하고는 다 막혀 버린 동굴이었거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람이 불자 승지라는 여인도 장문도 역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크하하하하! 오랜만이군. 가천도인!”
청송이 갑작스레 그를 아는 척했다.
청송의 얼굴에는 평소의 공명정대함이 사라지고 노련한 기색이 대신했다.
하지만 그의 급작스러운 변화에도 놀라지 않는 가천도인이었다.
“오랜만?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요? 당신이 우리 일문에 어떤 일을 했는지 잊었단 말이요? 일기장군? 이곳을 왜 또 찾은 것이오?”
“하하하하! 내가 찾은 것이 아니지. 청송이라는 자가 이곳을 찾은 것이야. 나는 그저 이 몸에 강림한 것뿐이고.”
“흥! 그 말을 믿을 것 같소? 당신은 이유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소?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 아니요?”
“하하하하! 나를 너무 잘 아는군. 하지만 너무 그렇게 구박하지 마시게나. 전날 헤어지며 한 말은 기억이 나지 않는가?”
“흥! 그대의 말을 믿을 수가 있겠소? 명색이 선인이라는 자가 강림한 영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기억을 지워버리지 않았소? 그런 아이를 화산의 주변에 얼쩡거리게 하여 화산의 제자를 만들어 버렸소. 우리가 그의 존재를 알아냈을 때는 이미 화산의 제자가 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었지. 그에게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되돌려 달라는 말도 하지 못했소.”
놀라운 이야기였다.
청송이 본디 모산의 제자였다니?
강림자가 기억을 지우고 화산의 제자가 되도록 이끌었다니?
일기장군이라는 자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모든 것에 감춰진 이유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모산파는 근 이백 년 내에 가장 뛰어났던 제자를 화산에 빼앗기고 말았소. 그 아이의 사부였던 삼영신군은 제자를 찾아 길을 나섰다가 철쇄지주를 만나 저주를 받았고 남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백자를 길렀지. 모산파의 가장 뛰어난 자는 철쇄지주의 저주에 빠져 죽었단 말이오. 이 또한 일기장군 그대의 수작이 아닌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고!”
“하하하하! 그만! 그만 하시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읊어서 무엇 하겠소? 전날 내가 했던 말을 다시 하자면 나중에 나를 만나면 필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흥!”
가천도인은 콧방귀를 뀌며 일기장군의 말을 흘려들었다.
하지만 일기장군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하하! 영력자가 무려 5백 명이요, 개중에 스무 살의 아래가 이백오십 명에 달하고 10세 이하의 아이들이 무려 30명이나 되지. 그 모두가 평범하지 않은 영력을 지니고 있지. 아마도 그들이면 지금 당장에라도 모산파의 전성기를 되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텐데?”
“어… 어떻게……?
“하하하하! 하하하하! 나만의 방법이 있지. 이미 오백 년 전부터 만들어 온 것이라면 믿겠소?”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오백 년 전에 수월촌을 만든 것이라면 참으로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지. 구파일방이 옥주궁파를 위해 헌신할 것이오. 싸움이 끝나고 나며 열 명! 아니 스무 명의 인재를 찾아주게 하지. 어차피 모산이 찾는 인재들은 그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놈일 뿐이니까. 하하하하!”
일기장군이라고 불렸던 자는 확신에 가득한 표정으로 광소를 흘렸다.
모산의 수장 가천도인은 또다시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저자가 또 나를 홀리는구나. 원시천존!’
일기장군이 하는 말은 모산의 아픈 약점을 구석구석 찌르는 말이었다.
최근에 들어 스무 해가 넘도록 제자를 들이지 못한 모산으로서는 그의 말이 절실하기 짝이 없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가천도인의 마음을 읽은 모산의 장로들도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똑같이 번민에 빠져들었다.
진건곤은 날마다 환자들을 돌보며 청명의 단전을 치료하기 위한 연구를 하며 지냈다.
어느새 석 달의 시간이 지났으나 진건곤의 노력도 소군의 노력도 그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세상에는 커다란 전쟁이 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인심은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황제의 군사들이 운남성을 향해 모여들자 그 정도는 점점 심해졌는데 커다란 전쟁을 앞두고 먹을 것과 의복, 무기들이 매점매석으로 품귀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세상은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소문대로 수없이 많은 군인들이 관도를 지났다.
장장 10여 일 동안 자기의 집 앞뜰을 지나는 군사를 보았다는 사람이 나타날 지경이었다.
황제의 군대는 그 수효가 10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그 수장으로 적염수호장이 직접 나섰다.
황권을 수호하는 인물 중에 최고 고위직으로 알려진 그가 나섰으니 황제도 역시 그 사건을 중히 여기고 있다는 증표였다.
이번에는 전과는 달리 십만대산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천지신교의 마인들이 경공을 펼친다고 해도 족히 삼 일은 걸릴 거리였다.
보이는 봉우리마다 경계병을 이중, 삼중으로 준비시키는 모습을 보이니 천지신교를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십만의 병력이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장관이었다. 인의 장막이 사방으로 끊임없이 펼쳐져 있어 그 끝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첨의군 1만 우군과 좌군이 각기 2만, 중군이 5만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대군의 수뇌부는 10만 군사의 정중앙에 있었다.
그야말로 사위가 인의 장막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길을 열어 주기 전에는 아무도 그곳에 찾아올 수 없어 보였다.
커다란 장막이 쳐져 있고 그 안에는 중군의 장수들과 참모들이 모여 있었다. 이른바 회의라는 것이었다.
“무림맹은 아직도인가, 장 내관?”
적염수호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좌중을 가르자, 모두의 눈길이 호화로운 관복을 입고 있는 내시를 향했다.
“인사드리시게!”
장 내관이라고 불린 자의 옆에 앉았던 사내가 일어서 도호를 읊었다.
“원시천존! 황상의 신민이 조 태제를 뵙습니다. 본 맹주 이하 무림맹은 이미 5천의 무인을 꾸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오! 과연 그대들은 황상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군.”
5천의 무인이라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5할 이상의 전력을 의미했다.
게다가 면면이 고수 아닌 자들이 없으니 전력상으로만 치자면 거의 7할에 육박하는 진용. 가히 무림맹이 전력을 다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언이 아니었다.
무림맹으로서도 이번 전쟁에 모든 것을 내건 일이었다.
“하하하! 과연 그대들, 무림인들은 보이지는 않아도 항상 황상에 대한 충심으로 뭉쳐 있구려. 무릇 무림을 아는 사람은 그리 생각할 터인데… 쯧쯧쯧! 아무것도 모르는 문관들은 그대들이 국법을 가벼이 여긴다고 매우 언짢아하고 있소이다. 하지만 그대들의 진심을 안다면 결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오.”
적염수호장은 언뜻 관과 무림의 자치적인 성격을 언급하였다.
자연스레 이 일에 참여한 대가로 자치적인 성격을 계속해서 인정해 주겠다는 뜻.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이 전쟁에서 꼬리를 말거나 몸을 사려서는 그전과 같은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엄포이기도 했다.
“폐하의 드넓은 마음에 기대고 있습니다. 항상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황상께서 어지신 분이니 천하의 흥복입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맹주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해진 표정을 지닌 적염수호장이었다.
“하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문관들의 말이란 항상 시끄러웠으니 그다지 걱정하지는 안아도 되지 않겠소? 마교의 토벌이 끝나면 그들의 걱정도 또한 사그라지게 될 것이오.”
“심려 놓으시지요. 무림맹은 황제의 신민으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적염수호장과 맹주는 서로가 서로에게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서로가 흡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정치적인 협상이었던 것이다.
“첨장은 들어라! 이번 전투는 어디까지나…….”
적염수호장은 다시 장수들과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적염수호장은 그야말로 상과 벌을 명확하게 구분지어 말을 하니 그만의 위압감을 품어져 나와 장수들을 요리하고 있었다.
‘적염수호장. 익덕의 재래하더니 소문은 옳지 않다. 겉모습만으로 보면 익덕이오. 하는 양을 보면 제갈량만은 못해도 관운장에 못지않아. 앞으로 화산이 강호를 평정하기 위해서 이런 인물에게 연을 이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적염수호장이 장수들을 모두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맹주의 평가였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적염수호장은 이채를 띠고 맹주를 돌아보았다.
“그래, 무엇인가?”
“개방의 소식에 의하면 적들의 진중에는 과거 살수였던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적들은 간교한 계교를 쓰는 것도 저어하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폐하처럼 능력 있는 수장을 노리는 것은 중요한 병법. 폐하의 주위를 특별히 경계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폐하의 수신위를 천거하고 싶습니다.”
적염수호장의 얼굴에는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가 서렸다.
“하하하하! 하하하! 자네 그 의미를 알고 하는 말인가?”
황실에 그 손을 뻗치겠다는 것은 얻는 것도 크지만 잃는 것도 큰일이었다.
수신위가 보호하는 요인이 행여 살수에게 당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 하는데, 상대가 적염수호장처럼 직계에 가까운 황족이라면 그 뒷감당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저 같은 야인이 그 의미를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그저 폐하의 존위가 중요한지라 아둔한 마음에 이야기를 꺼낸 것뿐입니다. 주제넘은 이야기였다면 죄송합니다. 폐하.”
“하하하하하하! 하하하!”
적염수호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도 맹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역시나 적염수호장은 암투와 귀계가 왕왕 오고가는 황실의 인물. 도가의 수행과 무공으로 다져진 맹주에게도 만만치 않은 눈길을 뿜어내고 있었다.
“내 화산이 근자에 들어 유망한 후기지수를 보유했다고 들었소.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지 않겠소?”
“원시천존!”
맹주는 그 눈길이 자신을 벌거벗기는 듯하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고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을 뿐이었다.
“하하하! 살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것이요. 국양! 네 사부라는 자는 언제 온다더냐?”
등 뒤에 서 있던 사내가 앞으로 한 발 나오며 고개를 급하게 숙였다.
적염수호장이 부른 자는 바로 광우 고국양이었다.
“내일까지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적염수호장은 고개를 돌려 맹주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황궁을 벗어나는 일은 극히 예외적이기에 새로이 국양의 사부에게 내 안위를 맡기지 않았겠소?”
“지당하신 처사이옵니다. 하오나 폐하의 안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니 무림맹에서도 수호위를 보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국양! 나는 신의가 없는 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체된다면 맹주의 호의를 받아들이겠다.”
“하하하! 사부는 신의가 없지 않습니다. 폐하와 군사들이 하루를 앞섰으니 미리와 기다리지 않은 것뿐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오실 것입니다. 사부야말로 천하제일의 무인입니다. 사부가 폐하를 지킨다면 천지신교가 아무리 간악한 수단을 써온다고 해도 폐하의 안전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맹주가 천거하고 싶은 인물이 누구인지 모르나 저희 사부님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화산과 진건곤의 관계를 알고 있는 광우였기에 맹주에게 곱게 대할 수 없는 광우의 도발이었다.
“그대의 발언은 참으로 무례하오. 나는 화산의 자랑이며 능쟁십고의 일인인 절검 운영 진인을 천거하려고 했소이다. 그대의 사부가 뉘관데 화산의 제일인을 내려다볼 수 있겠소?”
맹주의 눈에는 자부심이 서렸다.
절검은 이미 검선, 검후 등과 함께 능쟁십고 중에서도 3강으로 통하는 고수. 그를 능가할 고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맹주의 말에 광우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하하하하! 그대는 하늘밖에 또 하늘이 있음을 알아야 하오. 사부가 오시면 그대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오. 하하하하하!”
광우는 나중을 생각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원시천존! 저자 나를 격동시키고 있어. 하지만 사숙을 능가할 자가 능쟁십고를 제외하고는 어디 있겠는가? 저자의 사부가 온다면 필시 사숙과 비무를 치르게 하여 상하를 가르게 해야겠구나.’
맹주는 광우의 사부라는 작자가 오면 망신을 주어 쫓아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귀하의 사부가 오신다면 정식으로 비무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흥! 이를 말이겠소? 그쪽이 천거한 수호위께서 피하지만 않는다면 사부의 실력을 보여주실 거요. 하하하하!”
광우는 또다시 광소를 터트리며 맹주를 비웃었다.
‘시정잡배도 아니고 절검 사숙을 일개 수호위 취급을 하다니…….’
맹주는 얼굴에 불쾌감을 품고는 무림맹의 진영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음에 꼭 봅시다. 맹주.”
군영을 나가는 맹주에게 광우가 던진 말이었다.
맹주가 군영에서 사라지자 적염수호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국양. 역시나 당당하구나. 그래서 내 너를 좋아하지. 허나, 내 너를 믿고 조호우룡을 제외하고는 수신위를 따로 챙기지 않았으니 그 방면에 문제가 생긴다면 네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야. 알겠느냐?”
이번 일은 고국양에 대한 신임의 성격이 강했다.
고국양이 무공이 제법 강하고 황족에 해당하는지라. 적염수호장이 찾던 인재라는 생각으로 시험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존명!”
고국양은 허리를 깊게 숙여 그 뜻을 받았다.
바로 그때, 천막의 밖에서 고함이 일었다.
“폐하를 모셔라!”
“폐하! 폐하를 피신시켜야 한다.”
다급한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모두들 놀라서 장막의 밖으로 뛰쳐나가는 사이, 광우의 얼굴에 짐짓 이채가 스쳤다. 어쩌면 웃음으로까지 보이는 얼굴이었다.
“오라버니. 그이의 치료도 좋지만 이제는 가보셔야죠. 광우님의 목이 걸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서둘러 움직이셔야 하지 않겠어요?”
진려경이 걱정이 된다는 눈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청명을 돌보는 것도 좋지만 광우의 일에 늦어서는 큰일이 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요. 형님. 이제는 가보셔야죠.”
청명조차도 자신의 치료보다는 광우에게 가보라는 말을 꺼냈다.
적염수호장이 군대를 이끌고 운남으로 출발했다는 이야기가 세상에 떠돌았고 얼추 운남에 도착할 시간이 되었기에 하는 이야기였다.
“글쎄. 운남이면 지척이지. 아직은 시간에 대어 갈 수가 있으니까. 조금 더 살펴보자. 내 알아서 할 터다.”
“네…….”
“네…….”
원래부터 조금은 어른스러웠던 오라비였으나 언젠가부터 자신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가버린 오라비였다.
능쟁십고와 같이 세상을 울리는 이름과 나란히 한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뒤로하고 있다는 소문마저 떠돌고 있는 진건곤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변해 버린 분위기에 청명은 물론이고 진려경조차도 진건곤을 경원하게 되었다.
그런 진려경이었으니 더 이상 말을 꺼내는 것은 그만두었으나 걱정만은 덜 수가 없었다.
전진자는 환자들을 돌보고 청명의 단전을 살피는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더니 군대가 운남에 도착한다는 날의 닷새전이 되어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진건곤이 사라진 것을 알고는 진려경이 입을 열었다.
“개방의 거지라도 열흘은 족히 걸리고도 남을 거리인걸. 이제 떠나다니…….”
“걱정이요. 형님이 하시는 일이니 못 믿을 것은 없지만 걱정이 드는구려.”
“그러게 말이에요. 그 시간에 그곳까지 가려면 또 얼마나 힘이 들까요. 아무리 오라버니라고 해도 쉬지도 못하고 달려야 시간에 대어 갈 수 있을까 싶어요.”
“형님 내외분이 나를 돌보느라고 참으로 고생이 많으신 게지.”
청명은 손을 진려경의 어깨를 두르고는 힘을 주어 보듬었다.
그들의 걱정과는 다르게 진건곤은 그리 어려운 길을 가지는 않았다.
진건곤은 진기를 만든 구체 속에 발목이나 무릎조차도 굽히지도 않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빠르기는 상상 밖으로 어마어마해서 그가 지나간 곳에는 마른먼지가 일어나 벽을 세우고 스쳐 지나간 곳에 풀밭이 갈라지고 굵직한 나뭇가지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저저… 저 저깃!”
초병을 서던 병사 하나가 멀리 지평선을 가리켰다.
지평선의 위에 작은 점이 하나가 보였다.
그 뒤로 흙먼지가 일어나 긴 꼬리를 만들며 그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점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가 되었는데 그것이 더한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인형은 무릎도 굽히지 않고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사… 사람?”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초병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눈을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다시 그 위치를 찾아야 할 만큼 빠르게 전진해 오는 것이 바로 새가 아니라 둥근 구체 속에 담긴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을 서너 번 부비는 사이 어느새 자신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고 있었다.
초병은 그제야 무언가를 깨닫고 소리를 질렀다.
“서랏! 거기 서!”
가까이 오고서야 그 모양을 알아볼 수 있었던 아지랑이 같은 구체에 들어서 있는 사내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내가 지나간 뒤로 바람이 일어 흙먼지가 솟구치고 옷들이 나부꼈다.
그 바람에 몸마저 가볍게 되어 바람에 휘말려 오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변의 아무것이라도 부여잡고 싶어질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서랏!”
“저자를 막아!”
초병은 한껏 소리를 질렀지만 허사였다.
이미 구체는 허공을 가르며 군영을 가로질러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리 새처럼 빠른 경공이라도 10만의 군세는 한순간에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군영에도 빠른 경공에 대처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청랑대! 저자를 막아라! 태상친위군은 발검을 준비하라! 수신위는 상황에 대비하라!”
청랑대는 2백여 명으로 만들어진 중군의 첨병이자 중추와도 같은 자들이었다.
무공을 익혔던 자들, 사병 중에 그 능력이 탁월한 자들만 따로 추려 무공을 가르친 군대로 그 막강함은 일반 군사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진건곤의 경공은 그 인물의 생각조차 초월했었다. 멀리서 달려드는 인형을 보고 내린 명령이었는데 명령이 끝날 때는 이미 전진자는 그들의 무리 중앙에 들어와 있었다.
“쳐랏!”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건곤의 몸을 감싸고 있던 구체는 허공에서 떨어져 내려 땅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병기 속으로 몸을 찔러 넣는 형국이었다.
2백여 개의 병기가 날카로운 예기를 발하며 구체를 찔러 들어갔다.
까가가가가강! 까가가가가가강!
연달아 터져 나오는 소리가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진건곤의 구체를 뚫고 들어가는 것은 없었다.
모든 병기가 구체의 외벽을 따고 미끄러질 뿐이었다.
저마다 병기에 혼신의 힘을 담아 구체를 찌르고 베고 때리며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지만 그 속의 진건곤은 그저 평온한 모습으로 천천히 걸어갈 뿐이었다.
그들을 지휘했던 장군조차도 기사(奇事)에 당황하고 있었지만 곧 진건곤의 발걸음이 적염수호장이 있는 중군의 군영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폐하께로 간다. 막앗!”
“무조건 막앗! 도검이 안 되면 몸으로라도 막아라!”
지휘관의 명령에 사병들이 물결처럼 일어나 인의 벽을 쌓았다. 마치 바다에 빠진 것처럼 인의 물결이 출렁거리며 진건곤의 구체를 둘러쌌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없었다.
진건곤의 구체는 그들과 부딪히더니 그대로 그들의 머리위로 올라가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수백의 인력으로 구체를 막아도 구체가 허공으로 날아 올라버린 그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이런!”
“아뿔싸!”
지휘관들은 그 장면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저런 식으로 인의 장막을 뚫고 지나간다면 수천, 수만이 막아도 안 될 것이라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투창! 병사들은 지역을 벗어나라!”
“투석을 준비시켜라!”
“거치적거리면 죽는다. 빨리 벗어나!”
“폐하! 폐하를 모셔!”
구체 속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그자의 의도를 알 때까지 그래도 방치할 수는 없었기에 지휘관들은 최선을 다해 진건곤의 구체를 상대하려 했다.
구체는 수백, 수천, 수만의 사병들이 움직이며 막아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머리 위를 천천히 이동하여 군영의 장막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마치 그들에게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는 듯했다.
“폐하를 모셔라!”
“폐하! 폐하를 피신시켜야 한다.”
“청랑대는 나서서 폐하를 모시고 길을 열어라!”
다급한 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군영의 천막 뒤로 일단의 무리들이 움직였다.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것들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으나 그들은 미끼에 불과한 자들, 그 옆으로 빠져나가는 무리들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진건곤은 구체 속에 들어선 채로 군영의 앞에 멈춰서 우뚝 멈춰 섰다.
“발사!”
쐐애애액! 쐐애액! 쐐애액!
어디선가 발사명령이 들려오고 어두운 그림자가 구체 위로 드리웠다.
꽝! 꽝! 꽝!
집채만 한 바위가 연속으로 날아들어 진건곤의 구체를 두들겼다.
바위가 구체에 맞을 때마다 굉음처럼 커다란 소리가 울렸고 빗나간 바위가 땅 위에 구르자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반장 깊이로 길게 파이고 흙더미가 튀어 올랐다.
꽝! 꽝! 꽝!
연속으로 날아든 바위가 구체를 두드리고 부서지기를 반복하자 구체는 바위의 잔해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만!”
우렁찬 고함이 울리자 연달아 하늘을 가리던 바윗돌이 쏟아지기가 멈추었다.
퍼억! 투다당! 와지끈! 뿌드득!
마지막으로 쏘아진 집채만 한 바위 하나가 군영 쪽으로 떨어져 버리자 제법 규모가 컸던 천막의 한쪽으로 말려가 버리고 천막을 지탱하던 말뚝과 기둥이 뿌리째로 뽑혀 날아가고 깊숙한 웅덩이가 파였다.
방금까지 그곳에 있었던 문관들은 얼굴이 파래져 버렸고 무관들도 역시 침을 꿀떡 삼켜야만 했다.
“폐하! 적도는 이제 죽었을 것입니다.”
바윗돌의 위력을 보았으니 수십여 개의 바윗돌을 맞은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할 수도 없었다.
“에이잉! 이놈들. 죽여서 쓰겠느냐? 배후를 캐야지 배후를……!”
방금까지도 얼굴이 파래져 질려 있던 문관 하나가 아는 체하며 앞으로 나섰다.
뿌드득!
이곳저곳 여러 곳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렸다.
오직 한 명의 침입자를 제압하기 위해 수천, 수만의 군대가 갈팡질팡 헤맸는데 그런 자를 사로잡으라는 문관의 말에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염소수염 자식. 밤길 조심하길 바란다.’
비수 같은 살기가 염소수염을 향했지만 염소수염을 한 문관은 그런 살기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애초부터 그런 것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더욱이 앞으로 나서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바윗돌 위에 떠억 하니 올라서더니 발로 바위를 찍어 눌러 보았다.
그르릉!
바윗돌들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먼지가 조금 일었다.
“어라라! 이거 보게!”
자신의 발이 만들어낸 광경에 신이 났는지 또다시 발길질을 하며 바윗돌을 찍어 눌렀다.
그르릉! 그르릉!
바윗돌이 흔들리며 소리를 내고 먼지가 날았다.
주변의 무장들과 사병들마저 그의 발길질이 만들어낸 결과에 놀라고 있었다.
“위험하오! 그만 내려오시오! 돌이 무너지면 사병들이 위험하오.”
우왕좌왕 침입자를 깔아 죽인 장면을 보기 위해 앞으로 나온 사병들이 몰려 있는 터라, 바윗돌이 무너진다면 정말 위험한 순간이 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켈켈켈! 겁쟁이들. 평소 목숨을 초개와 같이 한다고 하더니 겁이 많구나. 이런 바윗돌이 발길질 몇 번으로 무너지겠느냐?”
염소수염의 문관은 힘을 제법 주어 바윗돌을 찍어 눌렀다.
드드드드! 드드드! 드드!
바위가 서로 갈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번에는 눈에 띄게 크게 흔들렸다. 급기야는 바위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문관이 바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에고고고!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떨어지며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움직이지도 못하고 꿈틀꿈틀 몸을 굴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를 구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쌓여 있는 바윗돌들이 눈에 띄게 흔들리더니 결국은 흙먼지를 뿌옇게 흐려대며 무너져 내렸다.
콰르릉! 쿵!
“히이익! 사람 살려! 거기 게 누구……!”
콰르릉! 쿵! 쿵!
“히이익……!”
“걱정 마시오. 죽지는 않을 테니!”
집채만 한 바윗돌이 굴러 떨어지는 순간,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너무나 선명해 그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었는데 정작 누가 꺼낸 소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무시무시한 크기를 지닌 바윗돌이 염소수염을 찍어 누를 듯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에 깔렸다가는 그야말로 곤죽이 되어 버릴 지경이었다.
텅!
어디선가 날아온 바윗돌이 떨어져 내리던 바위를 살짝 건드렸다.
염소수염을 곤죽으로 만들 것만 같았던 바위는 예상 밖으로 아주 조금 움직여 방향을 살짝 틀어 떨어졌는데 염소수염의 몸 하나 스치지 않았다.
하지만 염소수염은 오줌을 지리고 말 수밖에 없었다.
바윗돌들이 너무나 절묘하게 떨어져 내려 머리카락 하나라도 못 끼워 넣을 만큼 두 바위 사이에 염소수염이 끼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염소수염은 바윗돌 세 개의 틈에 끼여 꼼짝달싹도 못할 지경이었다.
바윗돌들이 떨어져 내릴 때마다 자신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렸을 공포를 적어도 세 번은 겪었을 터였다.
“머리 위에 올라 까불었던 값이요.”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그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으나 어디에서 누가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소리의 주인을 찾던 장수들 사이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서…설마! 돌무덤 속에서? 그자가?”
그랬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바윗돌이 쌓여 있던 곳에서 시작된 소리였다.
머리 위에서 까불었던 염소수염을 벌한 것이라면 그 수밖에 없었다.
흙먼지가 자욱하고 바윗돌들이 연달아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위로 둥근 구체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속에 진건곤은 바윗돌 틈에서도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고 말끔한 행색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적염수호장님을 지키기 위해 왔소이다.”
진건곤의 말이 울리자 마침 흙먼지가 전부 내려앉아 진건곤의 모습이 사방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진건곤을 감싸고 있는 수십여 무장들도 수만의 사병들도 안심하지 못하고 극도로 긴장하여 병기에 손을 얹고 있을 뿐이었다.
십만의 군세 속에 홀로 선 진건곤은 태연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십만의 군사들은 긴장감을 전혀 떨치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기묘한 장면이었다.
순간적으로 침묵이 이어졌는데 광우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
“하하하! 역시 사부구려. 어서 오세요. 사부!”
그 모습을 본 광우가 얼른 앞으로 나서며 진건곤을 반겼다.
진건곤도 더 이상 구체를 유지하지 않고는 허공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그제야 무장들과 사병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조금은 가신 듯한 얼굴이었다.
“자, 이제 폐하께 인사를 드립시다.”
“못 가오! 저자는 너무나 위험하오.”
무장들이 앞으로 나서서 광우를 막았다.
광우가 직접 나서서 진건곤을 이끌었지만 무장들은 아무도 길을 열지 못했다.
진건곤이 보여준 무위가 너무나 무서운 것이었기에 적염수호장이 있는 곳으로 길을 터줄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한순간에 우두머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만의 군사라도 진건곤이 한 명을 죽이고 사라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떠올려 버린 것이었다.
“길을 열어라!”
적염수호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폐하! 위험하옵니다.”
“하오나 폐하! 너무나 위험합니다.”
“감히 네놈들이 나의 말을 어긴단 말이더냐? 어서 길을 열어라!”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노여움이 서리자 무장들은 하는 수 없이 길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적염수호장이 강권하니 모두가 길을 막는 것을 포기하였지만 병기 위에 손을 얹어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반응할 수 있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래봤자 진건곤의 능력이라면 그들이 막을 수 없는 것이 뻔했지만 말이었다.
“국양에게서 이야기는 익히 듣고 있었네. 대단한 능력. 잘 봤다. 나는 고국양을 믿는다. 그러니 자네 또한 믿겠다. 자네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적염수호장의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광우는 얼른 고개를 숙여 그의 명을 받드는 뜻을 표했으나 진건곤은 달랐다.
그저 묵묵하게 적염수호장의 뒤에 가 서 있을 뿐이었다.
진건곤으로서는 기실 지금의 황제가 딱히 맘에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천지신교의 신을 제외한 만민평등의 교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천지신교의 승리를 원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뒤바꾸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승리는 일반 백성들이 전쟁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권리와 의무, 승리를 거머쥐는 것을 원했는데 그것이 바로 진건곤이 꺼리는 바였다.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야만 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 문제였다. 차라리 천지신교가 무인들과 싸움을 하고 황제를 암살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뒤집고자 했다면 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요괴와의 싸움을 겪고 백노신과의 대화를 통해서 얻은 것은 자신의 힘은 사람들의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곳에 온 것조차도 백이현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진건곤이 나서서 싸우는 것은 오직 전란이 확대되어 전란의 영향력에 말리는 자들이 너무 많아지는 것을 우려한 탓이었다.
아무쪼록 이번 전쟁에서 백이현의 영향력을 없애는 것이 목표였을 뿐이었다.
“저런……!”
“이……!”
그 모양을 본 무장들과 적염수호장의 충신들이 여럿이 노기를 떠올렸지만 더 이상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우우웅!
진건곤의 몸에서 기음이 토해지고는 또다시 둥근 구체가 솟아올라 적염수호장을 그 안으로 집어넣었기 때문이었다.
둥근 구체를 보자 조금 전까지 진건곤이 보였던 신위가 떠올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아울러 집채만 한 바위도 뚫지 못한 구체가 감싸고 있는 적염수호장이라면 그야말로 최고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백성들의 아픔을 알아주는 분이라면 충절을 다하겠습니다.”
적염수호장이 구체의 안으로 들어오자 진건곤이 입을 열었다. 적염수호장의 고개가 진건곤을 향했다.
“물론 지금의 대화는 저 밖의 자들은 아무도 듣지 못하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그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지금의 말은 그대 같은 야인이 할 수 있는 소리는 아니다.”
적염수호장의 목소리에는 권위가 가득했지만 그런 것에 흔들릴 진건곤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적염수호장에게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허허허! 세상이 혼탁해지니 내가 이런 대접을 다 받아 보는군. 그럼 내 그대에게 묻겠다. 내 조부께서는 황권을 이어받는 것을 거부하시고 전 전대의 황상이신 동생에게 그 권한을 넘기셨다. 그분이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조부의 뜻을 이어받고 있는 자다. 그 답은 스스로 구하기를 바라겠네.”
적염수호장은 그 말을 남기고는 자신의 볼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서둘러 판단할 이유는 없겠지. 천천히 두고 봅시다.’
진건곤은 판단을 유보하기로 하였다.
[형님. 폐하의 곁에 수호위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내 알기로는 적지 않은 수가 있다고 들었네만. 왜 그런가?]
[좀 많은 듯해서 그렇습니다. 가까이는 열이요. 군영의 바깥에는 적어도 스물이 넘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몸을 숨기고 있는 자들이 총합이 서른인데 맞는지 확인해 보아야겠습니다.]
[흠. 생각보다 더 많은 숫자구나. 내 따로 알아봐 주지.]
광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건곤이 하는 이야기라면 허투루 한 말이 아닐 것이었다. 광우는 최악의 사건이 자신의 마당에서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는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