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사내는 촌장과 함께 길을 떠나면서 진귀한 일을 많이 겪었다.
당나귀가 끄는 수레는 느린 듯하면서도 빠르게 나아가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었다.
열흘 걸린다던 성도에 도착하는데 걸린 시일이 겨우 2일이었다.
사내가 깜짝 놀라 그 사실을 촌장에게 말했지만 촌장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사내는 그의 태도를 보고 이틀 만에 도착한 것이 촌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감히 물어보지 못하였다.
촌장이 이미 놀라울 정도로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어딘지 모르게 경외하고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도에 도착하여 객점에 여장을 풀자 어디선지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관의 고위 관리도 있었고 유명하다는 기녀도 있었고 부유한 상인도 있었다. 그들이 끌고 온 수행원들만 해도 수십인지라 객점은 전세를 낸 듯하였다.
그들은 객점에 들어서자마자 땅바닥을 기듯이 조아리며 촌장을 보기를 청했는데 그 대함이 마치 황제를 대하는 듯하여 사내로 하여금 당황스러움을 면치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촌장은 당연한 듯이 그들을 대했다.
사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촌장에게서 느껴지던 기이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의자 가져와!”
손님으로 온 자가 사내를 시비 부리듯이 했지만 사내는 그들에게도 인상 하나 찌푸리지 못하고 얼른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에게도 무언가 기이한 기운이 느껴져 감히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고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사내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우를 많이 겪었다.
그들이 아파 누워 있는 자신의 아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이 웬 조화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왠지 그들이 입맛을 다시는 것만 같았다.
기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들이 촌장에게 건넨 말을 들었다면 사내는 기함을 내질렀을 것이었다.
[철쇄지주님을… 아니 만한지주님을 뵙습니다.]
[소녀가 만한지주님을 뵙습니다.]
[만한지주님을 뵙습니다.]
인면지주가 천 년을 넘기면 그 거미줄이 철과 같이 튼튼하고 쇠사슬의 모양을 갖춘다 하여 철쇄지주라고 부른다.
철쇄지주가 되면 요괴들 중에서도 보기 드문 영력을 갖추게 되고 가히 요괴들의 왕의 자리를 노릴 만하였다.
하지만 수월촌의 촌장은 철쇄지주라는 이름을 넘어선 지 오래. 이미 2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요괴 중의 요괴였다.
2천 년이 넘게 되면 그 쇠사슬의 색이 하얗게 변하고 그 단단하기와 질기기가 만년한철에 가까워진다. 자연히 그 이름도 만한지주라고 불린다.
그 위로는 승천지주라 하여 여의주를 얻은 용과 같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경지인데 용이야 원래 격이 신격(神格)이니 당연하다 하겠지만 인면지주는 요괴인지라 천 년을 가지고는 하늘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수천 년에 버금가는 세월을 지나면 스스로 신격을 얻어 승천할 수 있었으니 요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경지라 할 수 있었다.
요괴들마다 그 종류에 따라 다르나 인면지주의 경우에는 3천 년의 수련을 통해 하늘로 오를 수 있었는데 바로 그 경지가 승천지주였다.
다만 승천지주가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는 피가 강물이 되어 흐르고 원한과 분노가 가득하며 고통 받는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 차야만 했다.
달기야말로 삼천 년 묶은 여우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달기가 사람을 죽이고 그 주검을 욕보이며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이유가 바로 승천하기 위함이라고 했었다.
[만한지주라……! 이제 그런 이름도 잊어버린 지 오래됐지.]
[오오오오! 그럼 승천지주란 말씀입니까? 경하 드립니다.]
[이제 그리 불러도 되겠지.]
[대단하십니다. 진정으로 경하 드립니다.]
요괴들은 진심으로 경하한다는 표정을 지었고 촌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극존의 대화가 오고가고 나자 촌장이 그들을 부드럽게 대하자 그들은 눈치를 덜 살피게 되었는데 그들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침상에 누운 환자를 향했다.
묘하게도 그들의 눈초리는 산해진미의 음식을 보는 듯한 눈치였다.
[보기 드문 아이로군요. 순수한 영력을 지닌 아이입니다. 그야말로 진귀한 맛이겠지요? 저만한 제물을 드신다면 승천지주에 꼭 오르실 것입니다.]
[호호호, 어르신께서 오지로 들어가 진미를 가꾸신다고 들었습니다. 왕의 자리를 버리고 저희들의 섬김을 버리시기에 그 마음을 추측할 길이 없었습니다. 허나 오늘 보니… 과연 그러실 만하겠습니다.]
촌장을 찾아 왔던 자들은 모두가 인간세계에 섞여 살며 성도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요괴들이었다.
촌장과 함께 온 환자가 바로 촌장이 최근에 진기를 빨아 먹고 있는 먹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던진 말이었다.
본디 촌장의 정체는 이천오백 년 묶은 인면지주였다. 한창때에는 흉포하기 짝이 없어 당시에는 당할 요괴가 없었다. 자연히 요괴의 왕으로 이름을 떨쳤다.
천 년이 지나 처음 철쇄지주가 되자 세상이 다 자신의 것만 같아 새끼를 낳았다. 그 새끼지주는 천 년이 지나 철쇄지주가 되자 어미가 있음에도 스스로 왕임을 선포하였다.
촌장은 자신의 새끼지주가 세상을 호령하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물러나 만한지주가 되기 위한 수련에 힘썼다.
2천 년이 지나고 만한지주가 된 어느 날, 인간 세계를 떠돌다가 우연히 선계에서 내려온 강림자를 만났다.
강림자가 인간계로 내려오면 제 힘을 다 못쓴다고 해도 틀림없는 선계의 인물, 승천지주에 이르지 못한 촌장으로서는 당할 방법이 없었다.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려는데 그 강림자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강림자는 만한지주를 죽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책 한 권을 던져 주었다.
그 책에는 지기가 강한 땅을 고르는 법과 영력을 타고난 자들을 고르는 법이 적혀 있었다. 승천지주와 같은 요괴가 자라는 것을 막기 위한 신의 섭리를 피하는 법까지도 적혀 있었다.
수월촌은 그 강림자가 준 방법대로 진법을 설치하여 5백여 년 동안 어떤 주술사나 선인의 방문도 받지 않고 조용히 지낼 수가 있었다.
승천지주가 되려고 하면 세상에 피가 흐르고 고통과 아픔이 가득해야 하기에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늘이 그를 제거할 사람을 내어 방해를 붙이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강림자의 결계가 촌장을 보호해 주었던 것이었다.
또한, 승천지주가 되기 위해서는 요괴의 요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묘하게도 태어날 때부터 신격(神格)이 아주 조금씩 존재하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영력이라 불렀는데 요괴는 스스로의 힘으로 영력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승천지주가 되는데 필요한 영력은 인간의 영력을 흡수하여 그것을 길러야만 가능했다.
승천지주가 되기 위한 분량은 평범한 인간으로 치면 수천 명의 인간이 지닌 분량이요. 특별한 자들로 치면 수십 명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예로부터 대요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선승이나 선인들과 싸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그들의 영력을 흡수하는 것이 시간을 줄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림자가 준 서책대로라면 선승이나 선인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고도 승천지주에 빠르게 이를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강림자는 촌장에게 승천하기 전까지 자신의 말에 복종할 것을 대가로 세상에 피가 흐르고 고통과 분노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런 일을 하다가 꼬리를 밟혀 선계의 심판을 받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그 일을 다른 자가 해주겠다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여 수월촌을 만들고 그곳에서 타고난 영력이 강한 자들을 모아 기르고 재배하며 오백 년을 수련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수월촌은 촌장이 흡수할 영력을 만드는 인간농장에 비유할 만한 것이었다.
촌장이 자신이 낳은 새끼지주가 모산파의 삼영신군과 싸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나서지 못한 것은 바로 승천지주를 향한 수련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승천지주의 경지에 다다라 승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세상은 피가 흐르고 고통이 흐른다는 전쟁이 시작될 때였다. 강림자가 약속을 이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강림자와의 거래를 끝내고 승천하려고 하고 있었으나 강림자가 오지 않아 심심한 차에 유람을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면 그 존재를 알아채고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환자라고 불리는 자가 촌장이 요즘 영력을 흡수하기 시작한 먹잇감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나를 부른 이유가 뭐냐?]
촌장이 질문을 던지자 세 요괴들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바로 촌장의 새끼인 철쇄지주가 왕으로 군림하던 사이 삼영신군과 싸울 때 도움을 주지 않았고 철쇄지주가 죽고 난 후에도 복수를 하지 않았던 터라 켕기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인(仙人)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승천지주님!]
[그래… 그러고 있더구나.]
촌장의 답에는 여유가 묻어 있었다.
촌장의 답에 세 요괴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선인이 되기 전에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하러?]
촌장의 답에 세 요괴들은 실망하는 눈초리가 되었다.
[원컨대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승천지주님!]
관리의 복장을 한 요괴가 머리를 조아리며 부탁을 올리자 다른 요괴들도 똑같이 머리를 조아렸다.
[승천지주님이 저희들을 외면하시면 저희들은 죽습니다. 또한 무선 장삼봉이 그러했듯이 세상의 요괴들의 씨를 말릴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요괴들을 불쌍히 살펴 주시옵서소.]
[저희 셋이 영혼의 복속이 되어 승천지주님의 승천을 돕겠습니다.]
요괴들이 영혼의 복속을 청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수족이 됨을 의미했다.
주인에 대한 불경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완전한 수족. 막대기처럼 주인의 뜻을 절대 거스를 수 없는 도구가 되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승천지주가 선계로 가버리고 나면 그 복속의 관계는 자연히 풀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선계에 들 때는 세상의 삿된 것은 모두 두고 가야 하기 때문에 복속의 관계마저도 끊어지고 말 것이었다.
3천 년의 수련으로 승천지주가 된 촌장이 선계로 등선하는 것을 마다할 리가 없기에 할 수 있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촌장이 승천지주에 이르고도 아직 등선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승천지주인 촌장은 강림자와의 약속을 이루기 전에는 등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강림자는 선계에 속한 자, 약속을 어기고 선계에 든다고 하면 좋을 일이 없었다.
‘강림자를 기다리는 동안에 수족을 두어서 나쁠 것은 없겠지. 게다가 심심한 일이기도 하니 한 번 나서볼까?’
[좋다. 나서 보도록 하지. 너희들은 나의 복속이 되거라.]
퍼버벅!
삼인은 촌장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주문을 외우더니 자신의 가슴에 손을 꼽아 넣었다. 그리고는 벌떡벌떡 뛰는 심장을 꺼내어 바쳤다.
촌장을 수행하던 사내와 환자는 그 장면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눈이 찢어질 정도로 벌려지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촌장의 시선이 그곳에 닿았다.
“흘흘흘… 너희들 때문에 먹이들이 놀라지 않느냐?”
촌장은 가볍게 세 요괴를 질책했지만 그들은 심장을 뽑아 들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이지(理智)를 잃은 듯이 움직임도 전혀 없었다.
“너희들은 이 일을 본 적이 없다.”
촌장의 음성이 울리자 사내와 환자는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촌장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들의 심장을 한손에 받아 쥐었다. 그들의 심장을 받아 쥐더니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스스스스!
요괴들의 심장은 그대로 스며들 듯이 가슴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들은 이미 촌장의 심장의 일부가 되어 뛰고 있었다.
복속의 관계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복속이 죽거나 소멸될 때마다 주인도 역시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적어도 복속을 쉽사리 죽도록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러들 가서 전처럼 행동하거라. 중간자들에 대한 보고는 게을리하지 말고.”
중간자란 선인이 되지 못한 자들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진건곤과 천지신교의 대공녀가 바로 그들이었다.
“주인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목숨으로 받들겠습니다.”
“소녀 명을 받듭니다.”
촌장의 명령이 있자 그들은 다시금 심장을 꺼내 바치기 전의 이지(理智)를 회복했다.
그들의 이지를 회복하는 것조차도 촌장의 의지에 달려 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복속에 불과했다.
촌장의 명을 쫓아 그들은 스스로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사내와 그의 아들은 깨어나고도 전날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전날의 일은 씻은 듯이 잊어버리고는 또다시 촌장을 모시고 아미산을 향해 떠났다.
“헐헐헐… 신은 불공평하신 게지. 인간들은 스스로 영력을 기를 수 있는데 왜 요괴들은 그렇지 못한 게야.”
아미산이 눈에 겨우 보일까 싶게 작은 산으로 보였는데도 촌장은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 멀리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영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촌장의 일행은 겨우 사흘 만에 아미산까지 도착하였는데 사내의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사내의 얼굴이 병색으로 완연했다.
아들의 영력은 모조리 다 빨려 죽음을 당했고 슬퍼할 시간도 없이 촌장의 현혹술에 걸려 먹잇감으로 변해 스스로 촌장을 따라다니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촌장이 왼손을 들어 사내에게 향했다.
퍼버버버벅!
촌장의 손에서는 수없이 많은 하얀색의 얇은 선들이 뻗어나가 사내의 몸에 박혔다.
이윽고 사내 몸에서부터 하얀색 실들이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마치 사내의 몸속에 있던 피들이 모두 그 실을 타고 빨려나가는 듯한 순간이었다.
쪼르르륵!
물이 빨려 올라가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은 퍼석퍼석한 목내이같이 말라비틀어져 갔다.
“부족하지만 목을 축였으니… 이제 한 번 가 볼까?”
슝!
촌장의 몸은 그대로 새가 비행을 하듯이 날아올라 하늘을 갈랐다.
무척이나 빠른 몸짓에 몸은 보이지 않고 그가 지난간 곳에 회오리가 일어나 그가 간 곳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덜컹!
진건곤이 환자들을 보다 말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허어! 기운은 영력이 틀림없는데 요사하기 짝이 없구나. 필시 좋은 기운은 아닐 것이야.”
진건곤의 몸에서 구체가 솟아나더니 그 모습 그대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무릎 하나 굽히지 않고 움직이니 말 그대로 신선의 몸짓 같았다.
“원시천존!”
“동방삭!”
“장천사!”
“고천사!”
환자들은 저마다 자신이 아는 신선들을 불러댔다. 그중에는 가장 최근에 소문이 난 고천사도 있었다.
환자들은 진건곤의 정체는 몰랐어도 그들에게는 신선처럼 보였나 보았다.
훙!
진건곤이 널찍한 바위 위에 멈춰 서자 먼지가 일어나 앞으로 쏘아져 갔다.
쑹!
그 삼십여 장 앞에 똑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그곳에 나타난 인물은 바로 수월촌의 촌장이었다.
그 속도로 보아 진건곤은 감히 그를 무시하지 못하고 놀란 표정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요사한 기운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것.
“요사하구려. 선인의 도를 걸은 듯한데 사이로운 기운은 어디서 난 것이오?”
진건곤이 먼저 노인을 향해 물었다.
“흘흘흘… 내 몸에서 요사한 기운이 서려 있단 말이구나.”
“그렇소. 그 기운을 보아하니 선한 인물은 아닌 듯하구려. 아미산을 향하는 이유를 말해 보시오.”
“흘흘흘… 내가 아미산을 향한다고 누가 그러더냐?”
“아미산이 아니란 말이오?”
“아니지. 나의 목적지는 바로 이곳. 아니 바로 너이니라.”
촌장이 진건곤을 찾아왔다는 말에 촌장을 새롭게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전혀 본 적도 없는 인물이 아닌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것이오?”
“내 권속들의 원한(怨恨)이다.”
촌장이 손을 들어 진건곤을 향하자 그의 손에서 하얀색 섬광이 뻗어나갔다.
“흥!”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으나 대비라도 하고 있었듯이 진건곤의 몸이 사라지듯이 꺼지며 그의 손에서 나온 섬광을 피했다.
갑자기 허공에서 날아간 백색광!
바로 진건곤이 쏘아낸 이기어검이었다.
촌장은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손을 앞으로 뻗어내었다. 허공에서 하얀색의 빛이 터져나가며 확산되어가고 일렁이는 백색광과 부딪혔다.
꽈드등!
굉음이 울렸다. 커다란 바위가 들썩이며 작은 돌덩어리 들을 토해내고 삼십여 장도 넘게 떨어진 곳의 나무들이 춤을 추듯이 비틀어지며 몸을 꼬았다.
진건곤의 이기어검을 막아낸 것은 다름 아닌 하얀색의 쇠사슬이었다. 허공에 쇠사슬로 만들어진 쇠사슬이 펼쳐지며 이기어검을 막아낸 것이었다.
“흘흘흘… 내 줄은 백년한철보다 더 단단하고 질기지.”
“설… 마……! 만한지주란 말인가?”
“그렇지. 나는 대요괴 만한지주란 말이다. 네놈이 설치고 다닌단 소리를 들었다. 입맛이 동하는지라 너를 먹기 위해 왔지.”
촌장은 스스로 만한지주라 칭하였다. 그것이 그가 가진 세월의 힘이었다.
일견, 진건곤이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아본 촌장은 만한지주의 힘만을 보이며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기회를 틈타 본연의 힘을 발휘하여 진건곤을 제거할 요량이었다. 승천지주의 힘을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쏟아 부을 작정이었다.
“흐흐흐흐! 만한지주의 힘을 보여주마!”
스스로 만한지주라고 칭하는 음흉함과 함께 공격이 시작되었다.
차라라라락!
촌장의 몸에서 하얀 쇠사슬이 여덟 가닥이 뿜어져 나와 진건곤을 덮쳐 갔다.
그 기세가 사뭇 다른 요괴들과는 다른지라 진건곤은 시작부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에는 순백으로 일렁이는 영력이 그 힘을 뽐내고 있었다.
‘흐흐흐!’
촌장은 그 영력을 보자 흐뭇해졌다.
진건곤을 잡고 나면 고스란히 자신의 것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에 날아가는 쇠사슬에 더 힘을 쏟아 부었다.
팔방으로부터 쏟아져 들어가는 쇠사슬과 진건곤이 휘두르는 검이 부딪혔다.
텅! 터더덩! 텅! 텅!
진건곤의 일렁이는 검에도 백색의 쇠사슬은 끊어지지 않고 굉음을 만들어 내었다.
뿌드드득! 뿌드득!
검과 쇠사슬이 부딪힐 때마다 그 둘 사이에는 동심원처럼 경력이 일어나 퍼져 나갔다.
주위의 아름드리나무들이 그 여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러져 나가고 있었다.
튕겨진 쇠사슬은 생명이 깃든 것처럼 스스로 방향을 틀어 진건곤을 노리고 쏘아져 들어갔다.
마치 독사가 먹이를 노리듯이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진건곤을 노리고 들어갔는데 여덟 개의 뱀이 하나의 먹이를 노리고 춤추는 형국이었다.
진건곤의 검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그 여덟 개의 독사 머리를 쳐가고 있었는데 위태롭기 짝이 없어 보였다.
터더더덩!
굉음이 터지고 다시금 쇠사슬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왔는데 그 모양이 교묘했다.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사방에 그물을 짜가며 사위를 덮어 가고 있었다.
촌장의 쇠사슬은 진건곤의 검을 맞고도 다른 꿍꿍이를 벌일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진건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지럽게 검을 쳐내며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으나 쇠사슬이 사위를 포위하는 것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크헐헐헐헐! 네 영력까지 얻게 된다면 나는 고금제일의 대요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크헐헐헐헐!”
이미 승리한 것처럼 구는 촌장이었다.
“흥! 매화분분!”
진건곤은 차가운 웃음을 남기더니 검을 흔들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검의 향기가 사방에 진동했다. 그와 함께 사방으로 매화모양의 강기가 퍼져 나갔다.
가히 꽃바람이 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꽝! 꽈앙! 꽈왕!
사위에서 벼락이 치는 소리가 울리고 이제껏 짜여 있던 쇠사슬의 그물에 여기저기 구멍이 뚫렸다.
“빌어먹을!”
촌장은 다급하게 외치며 8마리의 뱀을 부려 자신을 향해 들어오는 매화모양의 강기를 막아갔다.
꽈앙! 꽈앙! 꽈앙!
아까와는 다르게 촌장이 다급하게 움직이며 몸을 피했다.
진건곤이 무공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가 사용하기 시작하자 전세가 바뀐 것이었다.
“흥! 요괴 따위가 어디서 감히……!”
“크허허허허! 크허허허허! 과연 아이들이 나를 닦달할 만하였군. 제대로 상대해 주지.”
촌장의 웃음이 진건곤의 말을 끊었다.
“가아아아아! 가아아!”
- 이제 다시 시작해 보자꾸나. -
촌장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고 그곳에는 인면지주가 있었다.
또다시 진건곤의 검이 흔들리고 매화분분의 초식이 펼쳐졌다. 매화모양의 검강이 인면지주를 향해 쏘아졌다.
“가아아아아!”
인면지주의 입이 벌어지자 그곳에서는 진녹색의 액체가 사방으로 쏟아져 나왔다.
퍼버버벅!
치이이이익! 치익!
사방으로 퍼진 것 같은 액체는 놀랍게도 정확하게 매화모양의 강기에 부딪히고 무서운 속도로 타들어 갔다.
액체의 무서움은 실로 무시무시하여 그 짧은 순간에 강기를 모두 삭혀 없어지게 할 정도였다.
오히려 강기가 다 사라지고도 남은 액체가 땅에 떨어져 땅바닥까지 시커멓게 먹어들어 갈 지경이었다.
진건곤은 다시금 매화분분의 초식을 쏘아내었으나 인면지주가 된 요괴의 독액을 뚫지 못하였다.
진건곤은 뒤로 물러서고는 검결지를 지었다.
검결지가 인면지주를 향하자 검은 무서운 속도로 인면지주에게 쏘아졌다.
인면지주는 백색광으로 일렁이는 이기어검을 보고는 액체를 쏘아내었다.
퍼억!
하지만 이기어검은 녹아내리지 않고 그대로 액체를 뚫고 들어가 인면지주의 머리를 뚫으려 했다.
그 순간, 인면지주가 놀랍게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찌이이익!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하늘로 튀어 오른 액체가 있었다.
역시나 색깔은 진녹색이었지만 땅바닥에 떨어지고도 끓어오르지 않고는 그대로 스며들고 말았다. 독액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 멀리로 물러난 인면지주의 머리를 보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인면지주의 오른쪽 앞다리가 잘려져 나가 있었다. 진녹색의 액체는 바로 인면지주의 혈액이었던 것이었다.
“가아아아아! 가아아아!”
- 네놈! 편하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
인면지주의 울음이 철판이 찢어지는 듯한 고음으로 변했다.
“가아아아아! 가아아아!”
신음을 토해지고 인면지주의 입에서 그물이 쏘아져 나왔다. 쇠사슬과는 다르게 이미 그물이 만들어져 쏘아지는 것이었다.
진건곤의 이기어검이 재빨리 날아가 그것과 부딪혔으나 그것은 소멸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기어검에 눌어붙어 그 움직임이 둔해지고 말았다.
“가아아아아! 가아아아!”
“가아아아아! 가아아아!”
연속으로 그물을 토해내자 이기어검에 얹히고 얹혀 이기어검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하지만 진건곤은 그 검을 버릴 수가 없었다.
바로 소군과의 혼인 패물로 장인께 받은 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진건곤의 두 손이 각각 검결지를 짓고 빠르게 움직이자 이기어검이 그 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웅!
순식간에 빠르게 회전하더니 검명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고속으로 회전을 하자 그간 인면지주가 쏘아 내었던 그물이 한 덩어리로 뭉쳐져 같이 돌기 시작하였다.
“가아아아아! 가아아아!”
- 네 맘대로 될 것 같으냐? -
인면지주가 버럭 앞으로 나오더니 입을 들어 검을 물어버렸다.
아니! 입으로 물은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인면지주의 입에서 나온 아주 가느다란 선들이 회전하는 이기어검을 잡아갔다.
가느다란 선과 이기어검이 서로가 힘겨루기를 하는데 중간에 끼인 그물들은 모두가 잘려져 나갔다.
이기어검이 움직이는 대로! 하얀색의 실선과 부딪히는 대로 갈기갈기 잘려나갔다.
“가아아아아! 가아아아!”
- 검이 없이 나와 어찌 싸울 것인지 궁금하구나. -
인면지주는 성큼성큼 이기어검을 가지고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진건곤은 검결지를 휘저어 이기어검을 조정하려고 하였으나 인면지주가 뽑아낸 얇은 실선은 이기어검을 더욱더 단단하게 조여 갈 뿐, 놓아주지 않았다.
두 개의 검결지를 합쳐 기를 쓰며 이기어검을 조정하여 보았다.
하지만 인면지주에게 잡힌 검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인면지주가 천천히 앞으로, 앞으로 다가오며 작게 웃음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가아아아아! 가아아아!”
인면지주가 다가올수록 진건곤의 두 손에 혈맥이 도드라지게 솟아나고 이마에 땀이 솟아났다.
진건곤으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나 인면지주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르르륵!
허공에 또 하나의 백광이 피어났다.
그 모양으로 보건대 검이 분명하거늘 그 백광은 해와 같이 밝아 눈을 감아야 할 지경이었다.
“가아아아아! 가아아아!”
- 함정이었구나! -
인면지주는 잡고 있던 검을 그대로 던져 버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놈! 멈춰라!”
진건곤은 검을 주워들고 인면지주를 쫓았다.
진건곤은 그 찬란한 백광이 바로 백노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노신이 도움을 주고 있는 지금이라면 인면지주를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노신도 역시 똑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쫓으세. 저 요괴를 놓치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겠는가? 기필코 오늘 처리하여야 함세.]
달리고 있는 진건곤에게 백노신의 전음이 들려왔다.
후웅! 출렁!
진건곤과 백노신이 경공을 펼치자 그곳에는 마치 공기의 벽이 뚫리기라도 하듯이 흔들렸다.
두 개의 백색의 선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길게 이어졌다. 하늘을 날며 인면지주를 쫓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인면지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런!”
진건곤이 경호성을 지르며 인면지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으로 내려섰다.
백노신은 여전히 하늘 위에서 서 있었으나 이미 두 눈은 감고 있었다. 아마도 진건곤이 펼치는 몰아일여와 비슷한 방법을 쓰고 있었는지 몰랐다.
진건곤은 땅에 내려서 인면지주의 흔적을 찾았지만 그곳에도 인면지주의 흔적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인면지주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인근을 찾아보겠습니다. 노야.”
진건곤이 인근의 숲을 뒤지는 동안 백노신도 역시 눈을 뜨고는 땅으로 내려와 인근의 숲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어찌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겨우 두 개의 선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그토록 빠르게 움직이며 인근의 지역을 뒤졌는데 인면지주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허허! 이럴 수가! 이런 실수를 해본 적이 없는데……!”
백노신이 안타까운 듯이 입을 열자, 진건곤도 잠시 멈춰서며 입을 열었다.
“큰일입니다. 저놈이야말로 요괴들의 왕. 대요괴가 틀림없는 듯하였습니다.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아무리 대요괴라고 해도 백 노야와 제가 보고 있는 곳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이곳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진건곤은 또다시 움직이며 바위까지 뒤집어가며 인면지주를 찾았다.
하지만 백노신은 고개를 흔들며 가만히 있었다.
한참 동안 찾기를 계속하던 진건곤을 보며 백노신이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랬다. 진건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몰아일여를 펼쳐도 잡히지 않는 인면지주를 눈으로 보고 찾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큰일입니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인지 말입니다.”
요 근래 환자들의 진기를 빨아먹고 사는 요괴를 퇴치하고 다니던 진건곤으로서는 요괴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깨닫고 있었다.
대요괴라고 할 수 있는 요괴를 눈앞에서 놓치고 나니 그 마음이 안타까웠다.
“걱정 말게! 그 요괴는 어차피 자네와 다시 만나게 되어 있으니 말일세. 요괴의 두목이라면 자네와는 분명히 만나게 되어 있네.”
“노야!”
백노신의 말에 진건곤은 놀라 물었다.
“틀림없네. 일단 돌아가서 이야기를 하지 않겠나? 계속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꺼려지는군.”
백노신의 말에 진건곤도 역시 꺼려지는 바가 느껴졌다. 백노신과 진건곤의 면전에서 사라질 수 있는 요괴는 없었다. 아마도 근처에는 요괴가 펼쳐 놓은 수작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늘에 뜬 백광을 보는 순간 인면지주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선인의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본능적으로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가아아아아! 가아아아!”
- 함정이었구나. -
인면지주는 자신이 승기를 잡고 있었지만 선인이 나타난 마당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하얀 실색의 선으로 잡아 두고 있던 검을 그대로 던져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도망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평생토록 이렇게 빨리 달려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곳이다.]
“가아아아아!”
- 누구냐? -
[강림자다! 거래를 위해 네가 죽는 것을 볼 수 없어 왔지. 실선을 뽑아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좌삼방! 북진곤!]
“가아아아아! 가아아아!”
인면지주는 정신없이 달리는 통에도 강림자가 시키는 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됐다. 멈춰라!]
강림자의 목소리가 울리자 사위가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달리고 있었던 곳은 바로 숲의 한가운데였는데 모든 것이 사라지고 새하얀 공간만이 남았다.
그리고 인면지주의 정면에는 한 인물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뒤통수만을 보이고 있었다.
“가아아아아! 가아아아!”
- 얼굴을 보여라! -
스스로 강림자라고 칭했던 자가 뒤돌아섰다.
놀랍게도 바로 그 얼굴은 화산의 차기 장문감으로 지목되어 있는 청송이었다.
“가아아아아! 가아아아!”
- 누구냐? 넌 강림자가 아니다. -
“하하하하! 2천5백 년을 넘게 살고도 껍데기만 보느냐? 쯧쯧쯧! 쯧쯧!”
“가아아아아! 가아아아!”
- 설마? -
“후후후! 이제야 눈치 챘느냐? 너의 울음은 매스꺼우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여라.”
인면지주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곳에 촌장의 모습이 생겨났다.
“어서 피해야 한다. 네가 강림자라고 해도 이곳에선 선인보다 못하다. 그라면 이런 진법 정도는 충분히 알아볼 것이야.”
“걱정 마라! 이 진법은 선인들이 사용하는 진법이니까. 네가 승천지주가 되려는 5백 년 동안 아무도 너를 찾지 못한 것이 우연인 줄 아느냐?”
“그런가……?”
촌장은 이제야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수월촌에서 지낼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실은 그 긴 세월 동안 스스로 자문하며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었기에 더욱 빠르게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고맙다. 이미 세상에는 마교가 일어나 피를 볼 준비를 하는 것 같더군. 그것이 바로 당신의 솜씨인가?”
“그렇지. 너와의 거래를 이행하고 있는 것이지. 어떤가? 마음에 드나?”
“헐헐헐헐! 전쟁이라. 참으로 배포가 컸어. 선계의 추적을 어찌 따돌리는지 너무나 궁금하군. 어찌됐건 나는 거래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
“크하하하하하! 거래라! 크하하하하!”
한참을 웃던 청송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너 역시도 이미 거래를 시작한 듯하군. 내 거래는 네가 전진자와 마녀를 처단해 주길 바라는 것이니까.”
“저 녀석이 바로 전진자인가?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라. 그 녀석은 이미 나의 먹잇감으로 찍어두었으니까. 또 다른 마녀는 누군가?”
“마녀는 바로 마교의 대공녀를 말한다. 그 여자도 역시 영력으로 가득한 자. 선인이 되려는 자다. 마녀를 없애고 영력을 흡수한다면 네게 큰 도움이 되겠지.”
“알았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는가?”
“무엇이냐?”
“넌 왜 그런 자들을 나에게 죽이라 하는가? 넌 인간의 편이 아닌가?”
“흥! 인간의 편이지. 네놈과 거래를 한다고 해서 인간이 아니진 않다. 주제넘은 질문은 하지 말도록! 화가 나면 아까 보았던 해동 선인에게 너를 넘겨줄지도 모르니까.”
허공에 피어난 선명한 백광. 너무나 밝아서 쳐다볼 수도 없었던 백광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미 선인이 된 지 오래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능력. 승천을 통해 악선이 된다고 해도 그 후로도 많은 노력이 있어야 겨우 감당할 수 있는 경지였다.
지금도 그 백광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알았다. 알았어. 시키는 대로만 하도록 하지. 하지만 다른 질문을 하도록 하지. 넌 분명히 오백 년 전의 강림자가 아니다. 넌 누군가?”
“쯧쯧쯧! 무식한지고 아직도 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더냐? 강림은 영매를 통해 내려오는 것. 그릇이 깨지면 바꾸는 것은 당연한 것. 인간이라는 그릇은 백 년을 넘지 못하는 게 보통이다. 이미 그릇을 바꾼 지 여섯 번이 넘었거늘. 그때마다 네게 보고하여야 한단 말이냐?”
촌장은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거래는 반드시 지켜질 것이다.”
“그것으로는 부족하지. 너는 나를 따라다녀야 할 것이다.”
“무엇이?”
“이 몸의 주인은 나이에 비해 제법 강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수준에는 턱없이 부족하지. 게다가 전쟁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이 몸을 따라다니며 보호해라!”
“싫다면?”
“넌 거절할 수 없다. 거절하는 순간 동방의 선인에게 수월촌의 위치를 가르쳐 줄 테니까 말이다. 피라미라면 관심을 두지 않겠지만 네놈이라면 언제라도 달려올 것이다. 하하하하!”
강림자의 협박에 촌장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비겁한 놈!”
“아니다. 이것은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 바로 이 몸으로 너에게 줄 피의 강과 시체의 산을 쌓을 것이니까 말이다. 하하하하!”
강림자는 그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의 몸에서는 황금의 빛이 은은하게 솟아 나왔다.
아주 은은한 황금빛은 그대로 커지는가 싶더니 속이 텅 빈 커다란 조각상의 모습이 되어 허공에 멈추어 버렸다.
또다시 강림자의 몸에서 황금빛이 솟아 나왔다.
아까보다 더 조금은 진해진 황금빛이 비추더니 또다시 속이 빈 조각상의 모습으로 허공에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그 크기는 전에 것보다는 조금 작았다.
또다시 황금빛이 솟구치고 전에 비해 더욱 선명해진 빛을 뿜어냈다.
계속해서 전과 같은 일이 반복되었는데 그 횟수가 무려 여덟 번이었다. 아주 진한 황금의 빛이었다.
온몸에서 솟아나는 황금빛을 가진 신공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가일구층황금공이었다.
세상에서 가일구층황금공을 가장 깊게 익힌 자는 바로 군자검 운현이었다.
그의 경지가 겨우 6층공에 불과했는데 지금의 빛은 군자검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바로 강림자가 8번째로 만들어낸 조각상이었다.
청송의 무공이 또래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던 이유는 바로 강림자가 청송의 몸을 빌려 가일구층황금공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개의 층층으로 만들어진 황금의 빛은 서서히 응축되더니 하나의 조각상으로 합쳐졌다.
모든 것이 합쳐지자 그 조각상에서 나오는 빛은 반짝반짝 닦아 놓은 황금의 조각상에 여름날의 뙤약볕을 씌운 것과 같았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황금상은 점점 작아지더니 강림자의 몸속으로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