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독룡-52화 (52/61)

제2장

굵은 수염이 옆으로 솟아 흡사 장비 익덕을 보는 듯한 사내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여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사내가 거친 심사를 숨기지 않고 걷는 곳은 세상에 가장 깊은 곳, 구중심처 바로 황제가 살고 있는 황궁이었다.

본디 황궁이란 허락된 자들을 제외하고는 검을 들지 못하는 곳이었는데 그의 복장은 수호위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관복이 아닌 옷을 입고도 사내의 옆구리에는 검이 걸려 있었는데 그 검을 보자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의 검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얽히고설키어 있었고 오색칠채의 보석이 박혀 현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황궁 어느 곳에서든 검을 풀지 않고 다닐 자격이 있는 자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구룡의 오색칠채 보석이 박힌 검이라면 너무나 뚜렷한 특징.

적염수호장, 조가양!

그는 황궁 안에서도 황제가 아니면서도 폐하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 황권을 양보한 후손에 대한 존경을 담아 황제가 허락한 칭호였다.

지금으로부터 이(二) 대 전, 스스로 자격이 부족하다 하여 황제의 자리를 스스로 차남에게 넘긴 뒤, 오직 황권을 수호하는 일에만 신경을 썼던 인물이 있었다.

수신태제 조진안이었는데 지금 황궁을 거칠게 휘젓는 인물은 그의 손자로서 그 충심만큼은 조진안의 환생이라는 말을 듣는 인물이었다.

우당탕!

조가양은 씩씩대는 얼굴로 장지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멀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호오! 조 태제가 아니시오? 어쩐 일로 이렇게 미천한 자가 사는 곳에 오셨습니까? 내게 볼일이 있습니까?”

수호장을 그의 조부 조진안에 빗대어 태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극존칭이나 말과는 다르게 환관은 태연하게 안주를 입에 넣었다.

환관이 또다시 잔을 들어 올리니 그 옆에 있던 궁녀가 술잔을 채웠다.

“마교가 승리했다는 소리는 들어 보았나?”

적염수호장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듣기야 했소만……?”

환관은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권태롭게 입을 열었다.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 일에 많은 자들이 연루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내 경고에 네놈은 분명히 중하게 다루겠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카아! 좋구나!”

환관은 술을 털어 넣고는 자신의 술잔을 들이밀었다.

챙!

적염수호장의 손이 거칠게 술잔을 밀어내자 술잔은 땅에 떨어져 깨져버리고 말았다.

궁녀는 몸 둘 바를 모르고 몸을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적염수호장이 과도하게 손을 쓴 탓에 술잔이 떨어져 나간 환관의 손에서 붉은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환관의 지위는 황궁에서도 능히 세 손가락에 드는 권력자 이었던 것이었다.

“호호! 곤란하군요. 곤란해! 아무리 조 태제라고 해도 그 성질머리 고치지 않으면 안 될게요.”

환관이 턱짓을 하자 궁녀는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네 이놈! 내 말을 듣고도 딴 짓거리를 하다니? 네놈이 정녕 죽고 싶단 말이냐?”

적염수호장은 무서운 눈을 부라리며 환관을 노려보았지만 환관은 하나도 겁을 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호호호호! 진정하시지요. 태제야말로 황권을 모욕하거나 모반이 아니면 신경도 쓰지 않던 분 아니십니까? 게다가 더 이상 험한 꼴을 보이면 오늘 일을 비밀로 하기 위해 궁녀를 죽이든지 누구를 죽이든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을 원한단 말입니까?”

환관의 눈에 한광이 한차례 스쳐 지났다.

그 한광에는 단순한 분노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한(恨)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었다.

그 눈빛에 적염수호장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허허험! 그래 내가 좀 심했다. 하지만! 전날 분명 마교의 발호를 중히 여기겠다고 약조하지 않았더냐? 이미 관과 상계에 이상한 기류가 있다는 것도 이야기했고 말이다. 게다가 마교와 관련된 일이라면 적어도 5만의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관례거늘, 고작 5천의 병사를 보내어 패배하다니 네가 황권을 우롱하겠다는 맘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쪼로로로록!

적염수호장은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어도 환관은 침착하기만 했다. 환관의 자작소리만 낭랑하게 울렸다.

쪼로로로록!

두 잔째를 마시고 나더니 그제야 적염수호장을 보았다.

그 태연한 태도에 적염수호장은 또다시 입가를 실룩이며 분노함을 드러내야만 했다.

“모르는 소리! 군사만 5천을 보냈다면 가벼이 보았다고 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조 태제님! 누가 그들과 함께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는지요?”

“네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게냐?”

술 두 잔을 마시는 것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던 적염수호장이니 목소리에 날이 선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군사 5천 명만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파일방을 묶어 주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는 겁니까? 그들이라면 능히 5만의 군사에 필적할 것입니다.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는 게지요.”

“흥! 웃기는 수작! 구파일방의 능력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조정에서는 그들의 이름조차도 모르는 이들이 허다하지. 그들의 눈과 귀에는 겨우 군사 7천 명이 나서서 패한 반란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다. 애초에 5만의 군사를 부렸다면 지금쯤 10만 명 이상의 거병을 부리겠다고 난리가 났을 터,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겨우 7천 명의 지방 군사가 패퇴한 싸움으로밖에 기억하지 않는단 말이다.”

“허허허! 문무백관이라면 우물 안 개구리이니 몰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무공을 아는 조 태제조차도 구파일방을 인정하지 않겠단 말이오?”

“구파일방의 능력이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네놈이 그 일을 작은 일로 보고 대처했기에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큰일이 벌어진 것을 작게 보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이었다. 이미 문무백관은 일의 본질을 그르게 보고 있었다.

“그런 궤변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구파일방의 2천 명이라면 능히 10만의 병사라도 당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 엄청난 대군을 파견했는데도 이런 대접이라니……! 무지렁이들은 몰라도 조 태제까지……! 섭섭합니다.”

환관은 또다시 술잔에 스스로 잔을 채워 술을 넘겼다.

“조 태제! 아실 만한 분이 알아주지 않으니 소인은 참으로 답답하군요. 답답해요!”

환관은 자신의 충심이 오해 받아 괴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조 태제의 입장에선 일을 그르쳐 놓은 장본인이 그런 표정을 지으니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네놈! 가증스러운 짓은 걷어치워라. 내가 네놈의 수작에 넘어갈 성싶더냐?”

“호호! 과연 조 태제요.”

정치적으로 때로는 한 몸이 되어 뒹군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맞닥트린 적이 없는 둘 사이였다.

오늘 마교의 일로 처음으로 맞서게 되자 여성과 남성을 넘나드는 환관의 웃음과 말투가 전부터 거슬렸다.

그런 적염수호장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관은 벌떡 일어나 이제껏과는 전혀 다른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소인은 제 일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오. 그것을 어찌 평가하든지 그건 조 태제의 맘이지요. 그만 물러가 주시오.”

환관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어디서 나왔는지 사병들이 잔뜩 나와 맨몸으로 조 태제와 환관 사이에 벽을 이루어 버렸다.

스스슷! 스슷!

적염수호장의 주위에도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자들이 솟구쳐 나왔다.

평소 적염수호장을 암행으로 따라다니며 수호를 하는 자들이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명령을 수행하는 수행원의 역할도 함께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아닐세. 모두 위치로 들어가게.”

적염수호장은 그들을 사라지게 하고는 다시 돌아섰다.

“비켜라 이놈들! 어디서 감히……!”

적염수호장은 노해서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손님 가신단다. 잘 배웅해 드려라!”

환관의 목소리가 울리자 그들은 몸을 움직여 나아갈 길을 만들었다.

그 꼴에 적염소호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발칙한 놈들!”

차앙!

검을 뽑아 들었는데도 그들은 움츠러드는 법이 없었다. 무기도 들지 않고 갑옷도 없는 몸으로 담담하게 벽처럼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적염수호장은 검을 휘두르지 못하였다.

황궁에서 피를 보아도 면책권이 있는 적염수호장이었지만 환관은 싸우게 된다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자였다.

검을 쥐었던 손에 힘을 빼는 대신 눈에 힘을 주어 환관을 보고는 다시 소리쳤다.

“네 이놈 황족을 능멸하다니 그러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단 말인가?”

“조 태제. 무슨 소리입니까. 이곳은 제 숙소입니다. 손님이 나가셔야 하는 길을 모르니 아이들이 몸으로 모시는 것뿐인 것을!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얘들아, 잘 모셔라!”

조 태제는 검을 사용하지는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그냥 밀려날 뿐이었다.

그나마 이제껏 특별한 싸움 없이 지내온 환관이었다.

가끔씩 하나가 되어 정적을 제거해 온 자였기에 조 태제는 환관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환관의 성격으로 보아 이 정도에서 물러선다면 없던 일처럼 지낼 것이오. 사병을 죽인다면 원수처럼 사사건건 방해를 해올 것이 틀림없었다.

“이번에는 대군을 모을 것이야. 내게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황권을 해치는 자라고 여겨 적으로 간주할 생각이네. 알겠나? 잘 생각해서 행동하도록!”

한때의 감정을 못 이겨 정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조 태제는 그대로 못이기는 척하고는 큰소리로 고함을 치고는 밀려나갔다.

조 태제가 인지벽(人之壁)에 쌓여 밀려나자 환관은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 조 태제! 이제껏은 그럭저럭 싸우지 않고 지내왔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가 없단 말이다. 네놈이 제법 식견이 있어 이 일에 얽힌 수작을 알아보았다만 아직은 내 손안에 제천대성일 뿐. 이번에 거병을 일으키는 것은 네가 아니어도 내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었다. 네 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하하하하하! 능력도 없이 권력에만 눈이 먼 문무백관들이 황제의 눈을 가리고 있으니 이제 곧 세상이 바뀔 것이다. 왕도 없고 신하도 없고 주인도 노비도 없는 세상. 나 같은 환관이 태어나지 않는 세상이 곧 올 것이라는 말이다. 크하하하하하!”

환관의 광소는 누가 들을까 무서운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정작 소리는 퍼져나가지 않고 그 주변만을 맴돌다 사라졌다.

환관도 역시 스스로 기파를 일으켜 소리를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무공의 고수였던 것이었다.

“이후로 누구도 스스로 남성을 자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 것이야.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을 만들어 평생 밑 닦기로 쓰는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야. 아니, 앞으로는 하고 싶어도 못 할 것이다. 크하하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뇌들이 다시 모였다.

새롭게 무림맹을 구성하여 천지신교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모임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바로 그들의 머리라 할 수 있는 맹주를 뽑는 일에 잡음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무슨 소립니까? 이미 전 장문인이 무림맹주를 맡으셨거늘 또다시 무당이 맹주 직을 이어간다니요?”

모용세가였다.

모용세가는 무당과 그다지 친밀하지가 못하였다.

아니 친밀하고 싶었지만 무당을 감싸고 있는 세력을 뚫고 들어가 친분을 쌓은 일이 없었다.

화산이 앞으로의 반백 년을 책임질 인재가 나서자 일찍이 화산으로 줄을 선 지 오래였으니, 스스로 나서서 화산의 편을 들고 있었다.

“물론 전(前) 장문인께서 맹주 직을 수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 양보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하겠습니다.”

“허허! 원시천존! 무당은 이미 한 번 그 소임을 다하지 못했거늘 아직도 그 자리에 집착하신단 말입니까?”

이번에는 청성이 나섰다.

이 또한 모용세가와 같은 이유로 화산을 밀고 있는 곳이었다.

무림맹은 소림과 무당이 번갈아가다시피 하면서 맡아 왔던 게 사실이었다.

그 밑바탕에는 강호제일이라는 무력이 있었다.

강호 최고의 고수가 있는 문파가 곧 무림맹의 맹주가 되었고 맹주의 부탁을 받은 강호제일의 고수가 앞장서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그 토대가 되었다.

명색이 천하제일이요, 강호제일의 고수가 타파의 명령을 받고 일을 할 수는 없다는 취지에서 나온 전통이었다.

“강호제일의 고수가 바로 저희 무당의 큰 어르신인 분이십니다.”

무당의 새 장문인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는지 노골적으로 검선을 언급하였다.

“허허! 허허! 고천사가 아니던가요?”

청성이 기가 막힌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또다시 나섰다.

“검선 사숙께서 지치셨을 뿐이오. 삼 일 동안을 최전선에서 마교의 고수들을 막아 오시지 않으셨소? 상황이 그렇지만 않았다면 능히 마녀를 감당하실 수 있었을 것이오.”

“마녀의 무위는 참으로 대단했소. 평소의 검선이시라도 곤란하셨을 것이라는 것이 무당을 제외한 구파일방의 중론(衆論)이요.”

청성은 대놓고 검선의 권위를 무시하고 나섰다.

“이……! 무슨 소리! 감히 본파의 검선님을 능멸하겠단 말이요?”

무당의 신임 장문은 노하였지만 아무도 그의 눈치를 살피지는 않았다.

‘감히 무당의 자존심을 모독하다니……!’

검선은 무당의 마지막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신진의 젊은 고수인 진건곤과 청송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을 검선이었기에 무당에서 그를 대하는 태도는 극히 지극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 것을 다른 문파들이 합심하여 꺾어대고 있었으니 무당은 더욱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무당의 장문은 몇 번이고 도호를 되뇌며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을 굳히고서는 돌연 입을 열었다.

“좋소! 무당이 물러나겠소. 그리고 앞으로 무당은 이 일에 더 이상 나서지 않을 것이오.”

무당의 새 장문인은 맹주 직을 포기함과 동시에 검선을 비롯한 모든 고수들을 이끌고 맹을 떠나겠다고 일어섰다.

“아미타불! 어찌 그런 일이! 장문……!”

소림만이 앞장서서 무당을 잡을 뿐,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모두들 천장을 보거나 땅을 보며 본체만체하고 있었다.

‘세상인심이 이리 사나울 줄이야……!’

무당의 신임 장문은 더욱 기가 막혀 속으로 탄식을 하였다.

그가 잠시 멈춘 것이라고 여긴 소림의 신임방장은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돌연 무당의 장문이 문을 박차고 나섰다.

탕!

문이 닫히며 제법 큰 소리를 내었는데 소림을 제외한 다른 문파의 수장들은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눈치가 전혀 없었다.

“하하하! 새로운 맹주가 탄생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축하하오!”

“축하합니다. 장문! 아니, 이젠 맹주라고 불러드려야겠구려. 하하하하!”

화산의 장문, 운령을 향한 축하인사가 장내에 오고가는 동안 소림의 신임대사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고천사는 자신의 입으로 강호와는 선을 긋겠다고 하지 않았었소?”

“그렇다고 어디에 끈을 대겠소?”

“고천사는 절검 노사의 제자가 아니겠소? 아무래도 화산에 제일 가까울 것이오.”

청성과 모용세가주가 한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운령은 이에 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름 믿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절검 사조님이라면 전진자라고 해도 마다하지 못할 것이야.’

“아미타불!”

아미파의 염불소리가 울렸다.

그 불호에 운령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운령에게는 그 불호가 마치 ‘전진자는 우리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말처럼 들렸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와 함께 아미산을 향하는 관도에는 끝없는 먼지가 일었다.

“이런! 이런! 도무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가 사부? 나를 먼저 만나겠다고 해 놓고는 어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되느냔 말이지?”

광우 고국양이었다. 진건곤이 고천사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수소문 한 결과, 아미를 향해 진건곤을 찾아 움직인 것이었다.

아미산에 들어서자 아미파로 가는 좁은 산길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도저히 말을 타고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감찰사님의 행차시다. 이놈들 물렀거라!”

“어서 물렀거라!”

고국양의 좌우 시위는 소리를 질러 길을 열려고 했으나 고국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만 해라! 그만 해!”

시위들로서는 당연한 일을 하고 있었지만 고국양이 주위를 살펴보니 거의 둘에 하나는 얼굴에 병색이 완연한 병자들이었다.

좁은 산길을 달려가자고 그들에게 길을 물러서라 할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들의 틈에 껴서 천천히 올라간다.”

그렇게 말에서 내려 천천히 길을 올랐다. 길을 오르는 동안 광우는 멀쩡해 보이는 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대의 아비인가?”

“네, 나리. 그렇습니다.”

사내는 죄라도 저지른 듯이 머리를 조아리며 굽실거렸다.

“보아하니 병색이 완연한데 어쩐 일로 산을 타는가?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그런 것 같은데…….”

“아미사에 신… 신의가 있다고 합니다. 돈도 받지 않고 약도 쓰지 않고 사람들을 고쳐주는데 그 솜씨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에 오르는 길입지요.”

광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도 안 받고 약도 쓰지 않는다면 완전히 공짜다. 신의라는 소문은 공짜로 치료를 받은 자들의 후의가 곁들여져 부풀어진 소문일 터.

꼬리를 무는 행렬이 이해가 갔다.

“그래. 그대 아비의 쾌차를 빌겠네.”

“아유, 감사합니다요.”

사내는 광우의 말에 당장에라도 쾌차가 되는 양, 기뻐했다.

그렇게 그들의 틈에 껴 세 시진을 오르고 아미사가 아닌 아미파의 입구로 들어서자 아미의 대장로가 직접 나서서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아미타불! 추영반 님을 뵙습니다.”

“아미타불! 간만에 뵙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미 전갈을 넣어 두었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

대장로는 듣지 않아도 뻔히 알고 있었다.

추영반이 아미에 올만한 이유라면 묻지 않아도 뻔한 일. 진건곤이 아미에 머물고 있으니 진건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건곤은 오지 않고 시동만이 왔다갔다.

“아미타불. 고천사께서 바쁘시다고 가능하다면 직접 오시라고 하시는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대장로의 안내를 직접 받아 가보니 아미파가 아닌 아미사 쪽으로 길을 잡았다.

아미파가 무공을 익히는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아미사는 불법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스님들이 주거하고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일반인들에게는 아미사가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서 진건곤은 치료를 하는 장소를 아미사로 잡았던 것이다.

아미사의 대웅전의 앞에는 너른 공간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꽉 차게 모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개중에도 역시 병색이 완연한 자들이 섞여 있었다.

“흐흠. 아미에 용한 의원이라도 오셨나 봅니다.”

“아미타불. 그렇지요. 아주 신통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솜씨가 소문이 나서 이제는 아주 멀리서도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고천사님이십니다.”

“아……! 사부에게 그런 재주도 있었던가요?”

광우가 듣기에는 금시초문인 바, 놀라고 말았다.

“신묘하기 짝이 없는 대단한 의원이십니다. 참으로 신기한 의술을 펼치시더군요.”

“아미타불!”

작은 방에 들었는데 그 앞에는 병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어 입구에 들어서기도 힘들었다.

혹시 제 순번이라도 빼앗길까 하여 도통 엉덩이를 들지 않는 환자들이었다.

대장로가 불호를 외우고 나서야 사람들이 움직여 입구를 열어 주었다.

[간만에 뵙습니다. 형님.]

[이런. 지금 무엇을 하는 겐가?]

방에 들어서자 진건곤이 하는 양을 볼 수 있었는데 진건곤은 환자들의 등에 손을 얹고 있어 내공으로 그들을 치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하하! 보시다시피 형님이 시킨 일은 뒷전이요,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약속을 해 놓고 지키지 못한 일이 있는 진건곤인지라 먼저 그 소리를 꺼내었지만 그렇다고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어깨와 등이 곱을 만큼 아팠던 부위는 가라앉을 것이오. 하지만 계속해서 그렇게 몸을 혹사시킨다면 또다시 아플 것입니다. 조금은 쉬어야 합니다.”

“흐흐흐. 택도 없는 소리. 내가 쉬면 당장 굶어 죽을 판에 어찌 쉬겠누? 암튼 고맙네.”

얼굴에는 온통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이었는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희죽 웃었다.

듬성듬성 빠져 있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빠진 이에서 사람 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다.

[사부. 어찌된 일인가? 고천사라는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네. 왜 그간 연락이 되지 않았고?]

광우는 진건곤과 같이 전음을 보내 구색을 맞추었다.

[그간 좀 급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진건곤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도 전음으로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을수록 심각했던 상황들이 이어졌던 것이 아니던가? 광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청명의 단전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저 역시 사람의 몸을 잘 알아 두어야겠기에 치료를 시작했지요.]

[듣자하니 신의라고 소문이 났더구먼. 그런데도 힘든 건가?]

[네. 힘든 정도가 아니라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보아도 잘려진 단전을 이어붙일 단초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근육을 달래어 편안하게 해주는 것뿐입니다. 진짜 의술은 아니지요.]

[허허! 고천사라고 불리는 사부에게도 어려운 일이 다 있었군그래. 그건 그렇고 말이야. 그래 어떤가? 나를 위해서 시간을 내줄 수 있겠는가? 난 아직도 자네가 필요하다네.]

[무슨 일입니까?]

[적염수호장께서 직접 병사를 이끌고 신교와의 싸움에 나설 것 같으이. 그렇게 된다면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야. 그분이야말로 황권을 수호하는 충직하고 능력이 있는 분, 아마도 그분을 해하려는 수작도 일어날 것이라고 보네. 자네가 그분을 지켜 주시게.]

진건곤이 고개를 들어 광우를 보았다.

[지켜드리기만 하면 되겠지요?]

[흐흐흠……! 지켜 드릴 뿐만 아니라 도와드렸으면 좋겠네. 그리고 말이네. 사부를 믿지만 전력이 있으니 말을 안 할 수도 없겠네. 반드시! 반드시! 시일에 맞추어 도착하여야 하네. 무슨 일이 있어도 늦어서는 안 되네. 내 목숨을 이곳에 걸고 있다네.]

광우답지 않게 사정에 가까운 부탁이 아닌가?

[꼭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와 날은 인편으로 보내도록 하지. 그리고 말이야…….]

[무엇입니까?]

[사부가 나타날 때는 최대한 떠들썩하게 나타났으면 좋겠네.]

[어찌……?]

[문관은 물론이고 무관마저도 관에 속한 사람들은 관이야말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네. 사부가 어떤 무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림인이라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야. 사부가 최대한 떠들썩하게 나타나면서 그들에게 사부의 무공을 각인시켜 주었으면 싶네. 내 특별히 부탁함세. 그들의 콧대를 꺾어주지 않으면 심히 피곤할 것이야.]

[그것뿐입니까?]

[하하하하! 그것뿐이라니? 분명히 말하건대. 그냥 조용히 들어갔다 나온다면 무장들의 견제에 시달리느라 머리가 아플 것이야. 실력행사를 해주게. 그래야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네. 게다가 사부를 추천한 내 체면도 살고 말이네.]

광우는 그 부탁만을 남기고 그대로 내려가 버렸다.

진건곤의 치료를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그를 방해하는 것조차 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따스하고 편안한 내력이 중단전에 스며들었다.

역시 불가의 내력은 웅혼하고 정대했다. 그리고 자비를 갖춰 편안했다.

검을 들어 앞을 겨누니 중단의 내력이 경락을 타고 손에 맺혔다.

검이 미세하게 흔들거리더니 검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맺혔다.

휘릭!

검은 순간적으로 위로 솟아 떨어지며 꽃잎을 그려내었다. 만개한 꽃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진하게 남은 향기가 있었다.

말 그대로 검으로 검향을 남기는 경지에 이른 청명이었다.

“검향의 경지라. 아주 좋군요.”

소군이 청명의 등에서 손을 떼어내며 말을 이었다.

“어떤가요? 명문혈에 기운이 남아 있나요?”

“…죄송합니다. 형수님.”

청명의 답에는 힘이 없었다.

소군이 자신에게 전해주려는 것은 바로 중단전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소군도 역시 하단전을 사용하였으나 경지가 높아지면서 어렴풋이 알게 된 중단. 스스로도 하단전을 배제하고 중단전만으로 내력을 이끌어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지라 청명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싶어도 명확하게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

청명은 지리멸렬 진척이 없이 헤매고만 있었다.

중단전만으로 내력을 모으고 쓸 수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청명의 탓만은 아닐 것이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길이 있을 것이에요. 계속해 보지요.”

소군의 손이 또다시 청명의 등 뒤로 얹어졌다. 바로 명문혈에 내력을 주입하기 위해서였다.

“언니. 고마워요.”

진려경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며 울려 퍼졌다.

청명이 무공을 회복하기만을 바라며 항상 곁에서 응원하는 진려경이었다.

소군은 뒤를 돌아보고는 따스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걱정 마. 동생. 이 방법이 실패할지라도 상공께서 분명히 좋은 방법을 만들어낼 거야. 상공이라면 틀림없이 믿을 만하잖아?”

“……!”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숙이는 진려경이었다.

하지만 급하게 내린 고개 사이로 작은 물방울이 떨어진 것을 모를 소군이 아니었다.

“힘내, 동생. 난 상공을 믿어!”

“저도 형님을 믿습니다. 중단전으로 축기를 할 수 있다면 형님의 수고로움을 덜어 줄 수 있는 거죠. 못 한다고 해도 분명히 형님이 방법을 찾아 줄 겁니다. 아마 강제로 의선을 강림시킬지도 모르죠. 하하하하!”

짐짓 과장되게 웃는 청명이었다.

“멍청이! 힘들면 힘들다고 해. 그렇게 웃고 있으면 누가 네 마음 모를 줄 알아? 밤마다 잠도 안 자고 이곳에 와서 수련만 하잖아. 그렇게 조바심내고 있으면서 왜 웃는 거야? 웃기만 한다고 누가 모를 줄 아냐고!”

청명이 씩씩한 목소리가 오히려 진려경을 울리고 말았다. 무인에게 단전이 깨어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형과 같은 일. 그것도 청명처럼 전도가 유망한 젊은 무인이라면 말 그대로 미래가 사라져 목숨이라도 잃은 것처럼 느껴질 것이었다.

“……!”

청명은 당장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는 입을 열었다.

“자자! 잔소리 하지 말고 나만 믿어. 형님을 닦달하든지, 형수님을 닦달하든지 분명히 부활해 보일 테니까 말이야. 알았지?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형수님!”

또다시 소군을 재촉하는 청명이었는데 소군은 코끝이 어느새 빨갛게 변해 있었다.

“네, 시작하겠습니다.”

또다시 청명의 등 뒤로 손을 가져다 대는 소군이었다.

사내가 마을 어귀를 나설 때였다.

한 달이나 족히 걸리는 길이었지만 아미산에 신의가 왔다는 소문에 아들을 둘러업고 길을 떠나는 길이었다.

수월촌은 화전민들이 바닷가에 만들어 놓은 동네였다.

워낙에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탓에 근 오백 년이 넘게 수월촌이 번성했지만 관에서는 그런 곳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사시사철 너무 차갑거나 덥지가 않고 관리도 세금도 없는 곳이어서 그야말로 천국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런 덕에 한 번이라도 수월촌을 찾아든 사람들은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고향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일인지 수월촌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구석이 있었다.

수월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일지라도 다른 마을에 물건을 구하러 나왔다가는 수월촌에 다시 들어오려 해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기가 일쑤였다.

그때마다 촌장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수월촌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그 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수월촌으로 들어서는 길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촌장 하나뿐이라는 말도 있을 지경이었다.

한때는 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커다란 촌락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요즘에는 오백여 명의 수효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사람이 좀 많아졌다 싶으면 알 수 없는 괴질이 돌아 하나씩 병을 얻게 되고 그 병에 걸리면 반년이 가기 전에 죽고 마는 것이었다.

신기한 것은 마을 사람의 수가 오백에 가까워지면 괴질이라는 것이 신기하게도 사라지고 더 이상 퍼지는 일이 없었다.

최근에 들어 사람의 수가 늘어나자 또다시 말로만 전해 듣던 괴질이 시작되었다.

사내의 집안에도 괴질이 찾아온 것이었다. 바로 22살의 아들이 아파 누운 것이었다.

사내는 괴질에 한창의 나이에 앓고 누워서 지내야 하는 아픈 아들을 그냥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때마침 신의라는 소문이 돌았으니 이때다 싶어 움직이는 것이었다.

수월촌에서 2리나 걸었을까? 수월촌을 벗어나 처음으로 작은 소로를 만나는 곳이었다.

“헐… 헐. 가는 건가? 그럼, 나도 같이 가세.”

사내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수월촌의 촌장의 목소리였다. 촌장은 이미 나이가 백 세가 훌쩍 넘었다.

스스로 나이를 말하지는 않지만 사내의 할아버지마저 그를 할아버지라 칭하고 있었으니 실제로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추측할 길이 없었다.

수월촌의 사람이라면 촌장을 경배하고 경외하는 것은 당연했다.

수월촌에 꼭 필요한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며 요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오래 산 점. 게다가 몸도 더 이상 늙지 않는 사람이니 경배와 경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꼭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아도 어딘지 모르게 무서운 느낌이 드는 촌장이었다.

“아이고, 촌장님. 너무나 먼 길인데요. 저야 아들 때문이라고 하지만 촌장님께선 어인 일로……? 너무 먼 곳인데 가실 수 있을까요? 제게 말씀하시면 일단 전해 보겠습니다만…….”

“아닐세. 나도 같이 가야 하네. 어린놈들이 꿈속에 나오거든. 하도 귀찮게 구는 바람에 말이야. 잠을 잘 수가 없네. 자, 가세나.”

“네?”

꿈속에서 귀찮게 군다? 사내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촌장은 굽은 허리에 손을 얹고는 당나귀가 이끄는 수레에 몸을 실었다.

“아, 뭐 하는가? 여기 장일이도 눕히고 자네가 이놈을 끌어야지.”

보잘것없는 당나귀 수레지만 그것은 마을에서는 촌장만이 가지고 있는 값이 나가는 물건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빌리고 싶었지만 마을에 꼭 필요한 물건이니 말도 못 꺼냈었다.

그곳에 아들을 눕힌다면 여행길이 한결 수월하리라.

촌장이 같이 떠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예, 어르신.”

사내는 아이를 눕히고 당나귀를 끌기 시작하였다.

“서두르자고. 어찌나 성화가 심한지 말이야. 다 내팽개치고 조용하게 지내고 있는 나를 부를 줄이야. 헐헐헐. 아들이 죽었을 때도 나서지 않은 나를 부르다니, 고놈들 아주 무서워 죽겠나 보단 말일세.”

사내는 촌장의 말에 갸우뚱했지만 어차피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들이니 뭐니 이런 말들은 들어 본 적도 없는 말이니 얼마나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수월촌 이야기는 세상에 퍼진 적이 없을 텐데… 그놈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 지금은 나를 두려워하고 참고 있지만 까딱하면 나를 찾아낼 기세야. 어찌나 나를 귀찮게 하는지. 쯧쯧쯧!”

사내는 촌장의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따로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만 조아릴 뿐이었다.

촌장의 몸에서 스멀스멀 퍼져나오는 기운이 무서운 탓이었다.

수월촌을 벗어난 촌장은 자신이 알고 따라오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이나 체형은 같으나 그 느낌만큼은 생판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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