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독룡-49화 (49/61)

제8장

실눈같이 얇았던 그믐달마저 구름에 가려 모습을 감추었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사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밤이었다.

번을 서고 있는 상 소호장이었지만 눈을 뜨고 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날에는 번을 서지 않아야 하는데…….’

이런 날에 번을 서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댕강 잘려나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상 소호장이었던 지라 긴장을 풀지 않았다.

턱!

묵직한 느낌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잡았다.

‘우라질……!’

상 소호장은 자신의 목이 그대로 부러지는 상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반응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 목소리에 상 소호장의 눈이 보름달 만하게 커졌다.

“장 천사! 아니 고 천사님!”

전진자의 이름이 사병들 사이에서는 도교의 전설인 장 천사의 이름에 견주어 부르는 모양이었다.

“하하하! 그리 부르고 있었나?”

“그러면 입쇼. 천사님께서 사병들 사이에서 뛰쳐나가는 순간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 같았습니다.”

“그만 하세. 그리 불릴 만한 인물은 못 되니까 말이야.”

진건곤의 목소리가 제법 진지해지자 상 소호장은 금세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다른 볼일이 있겠나? 적당히 숨어 있으려고 왔네.”

“안 됩니다.”

“안 되다니?”

“그런 모습을 보이셔 놓고 숨기를 바라다니 아무런 천한 것들이라고 해도 눈까지 멀지는 않았지요. 무립니다. 이제는 절대 사병들 틈에 숨지 못하실 겁니다.”

“이래도 말인가?”

스릉!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호장은 식겁해서 뒤로 물러섰으나 곧 검이 뽑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백광이 일렁이고 다시 사라졌지만 진건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는 충분했다.

“에……?”

상 소호장은 진건곤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그 모습 진정 고 천사님이 맞습니까?”

“다시 보게!”

빛이 번쩍이고 나자 상소호장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가 전날 허공으로 날아 오른 진건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 어찌 그런 일이?”

“축골공(縮骨功)이라네 무림에서는 그리 대단할 것이 없는 공불세.”

“그 정도라면 충분하지요. 충분하고말고요. 암요.”

그다음 날 상 소호장은 또 다른 부하를 배정받았다. 이번에 들어온 부하는 신체상의 특징이 확실하였다.

애꾸에 꼽추. 한 번만 보아도 그 몰골이 눈에 박히듯이 강렬한 모습이었다.

상 소호장이 신입을 끼고 다니다시피 하자 상 소호장의 취향이 아주 독특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물론 상 소호장도 그 소문을 들었지만 그냥 참아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무인들은 보름을 움직여 십만대산의 앞에 다가섰다.

그들만 십만대산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맹주는 자신들이 속전속결을 보겠다고 했지만 좌오장군과 부장은 자신들도 싸움에 참여해야 한다고 부득불 우겨대었다.

하지만 무인들이 먼저 싸움을 시작하면 그 뒤를 정리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기다려 준다는 말을 하지 않고 무인들이 앞으로 나아간 터라 좌오장군은 사병들을 이끌고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잡아야만 했다.

“하하하! 그들이 먼저 싸움을 시작하겠다고 하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이대로 싸움이 끝날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주 잘 되었어. 이 싸움은 반드시 신교의 대승으로 끝나야만 하는 싸움일세. 갑작스럽게 전진자가 나타나 이십칠파결을 펼칠 기회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그 위력을 보여줄 것이야. 언제든지 이십칠파결을 펼칠 수 있도록 준비시키게.”

제갈가주가 두려워하던 이십칠파결을 언급한 것은 다름 아닌 좌오장군이었다.

무림맹이 조심해야 할 적은 십만대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등 뒤를 노리는 좌오장군도 있었던 것이었다.

무림맹은 십만대산의 가까이로 다가가자 자신들의 계산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십만대산에는 멀리서 보아도 많은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정광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입을 뗀 것은 바로 무림맹의 최고수인 검선이었다.

“원시천존! 어찌하여 이런 일이……!”

다른 사람들은 영문을 몰랐으나 시간이 지나 십만대산에 가까워지자 은거를 깨고 나온 고수들은 모두가 그 탄식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아미타불! 왜 저들에게서 웅혼 정대한 정파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까요?”

“마교의 본산, 십만대산에 왔거늘 어찌 저런 인물들만 가득하단 말인가?”

검후와 절검의 말이었다. 다른 고수들도 고개를 끄덕여 인정을 하고 말았다.

“과거 활선당의 무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의술로 선업을 쌓아 많은 의인들의 지지를 받았지요. 황제의 노여움을 사 마교로 낙인 찍혀 멸절되었으나 그전까지만 해도 선업과 그 무공의 웅혼 정대함으로 인정받았었습니다.”

“아미타불! 활선당의 후예들이 다시 일어선 것이란 말이구려. 과거 그들이 악업이 없어 징치하는 것을 꺼렸지만 소림도 역시 황제의 편에 서지 않을 수가 없었소. 평생 그 일을 두고 후회했거늘 오늘 이런 일을 또 겪어야 하다니……! 아미타불!”

“하지만 대사! 저들은 이미 역천의 술법을 펼친 자들이오. 손속에 인정을 두어서는 아니 되오.”

“알고 있소이다. 역천의 술법은 인정할 수 없는 악행이지요. 다만 저들의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알았으니 그 사정이 한탄스러울 뿐이외다.”

“아니 되오! 저간의 사정이 없는 자들이 어디 있겠소? 활선당이 의술로 선업을 쌓았던 것은 황제를 능멸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오. 그들의 본심이 아니었을 것이오. 본심이 선한 자들이었다면 역천의 술법 따윈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오.”

해남의 파검이 역천의 술법을 말하자 모두들 분노를 떠올렸다. 과거의 선업도 오늘날의 역천의 술법에는 잊히고 말았다.

“이미 퍼져 버린 환천삼보요. 앞날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없애야 할 집단이요.”

“힘들겠소이다. 저들은 이미 강시를 다 소진했소. 앞으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오. 저 성곽 안에 또 무엇이 있을지 걱정이외다.”

기실 정파의 무인들은 성곽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안에 만들어져 있을 함정과 기관 등이었다.

삐이이이걱!

정파의 고수들이 십만대산을 보며 전의를 다지고 있는 동안 성채의 문이 열리며 마교의 고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파의 무인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상 밖에 성곽의 밖으로 나온 것도 그러려니와 그 수효가 만만치 않았다.

어림잡아 봐도 무려 삼천의 무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야겠습니다. 다시금 수를 모아야겠습니다.”

제갈세가주는 이미 판단이 끝난 듯, 단호한 목소리로 돌아갈 것을 말하였다.

“스스로 정파라고 칭하는 자들은 들어라!”

여인의 목소리였다. 작은 목소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삼백여 장의 거리를 건너 선명하게 들렸다.

은거를 깨고 나온 고수들도 안색이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천지신교. 오늘을 제물로 삼아 세상에 광영의 빛을 뿌릴 자들이다. 거짓된 권력에 빌붙어 사는 그대들이야 말로 위선자들이다. 오늘 그대들을 멸절하리라!”

여인의 짧은 말 한마디가 울리고 나자 마교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마교의 무리들 중에서는 이미 싸워본 바가 있는 태극이현과 독마군, 그리고 또 다른 자들이 다섯을 앞세워 쇄도하며 나왔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무인들의 움직임이었지만 수천의 인원이 절도 있게 땅을 구르니 땅이 울리고 그 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무서울 정도로 일치된 동작을 보여 정파의 무인들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이럴 수가! 숫제 무인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이구려. 이 인원에 저렇게 손발이 맞는 자들이라면 절대로 당해낼 수 없소이다. 후퇴해야 합니다.”

제갈세가주는 더욱더 심각한 표정이 되어 퇴각을 주장했고 주변의 장문들도 하나같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검선 등의 고수들처럼 상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초고수들은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몸에서 피어나는 기세는 웅혼 정대한 기운을 담고 있어 마치 구파일방의 무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태극이현이 그랬듯이 도가의 깨달음을 기반으로 하는 무공이 느껴지는가 하면, 서장의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는 자는 불가의 무공을, 빙궁의 순음지기를 느낄 수 있는 자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만만한 자들이 없구려.”

“그러게 말이네.”

“세상엔 참으로 강자가 많네요. 역시나 기인이사가 참으로 많은 세상인가 봐요. 아미타불!”

검후의 전설을 완성시킨 소군조차도 강자라고 인정할 만한 자들이 어디서 나오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돌아가야 합니다. 이대로 싸우는 것은 너무나 불리합니다.”

“알겠네. 돌아감세. 하지만 돌아갈 기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부탁함세.”

맹주는 제갈가주에게 지휘를 넘겼다. 이 상황을 가장 잘 타개해 나갈 자는 그밖에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능쟁십고께서는 앞으로 나서서 저들을 저지해 주십시오. 각파의 장문인들은 뒤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능쟁십고란 능히 천하를 다툴 만하다는 고수 십인을 기리는 이름이었다. 제갈세가주는 그들을 부를 만한 칭호를 급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알아들을 사람은 모두가 다 알아들었다.

검선과 절검, 파검, 검후, 멸독, 창천검 등의 고수들이 앞으로 나서자 앞에서 달려 나오던 자들도 병기를 꺼내어 들었다.

최초의 접전이 바로 최고수의 다툼으로 이어지는 싸움이었다.

붉은 강기를 두른 주먹이 벽을 이루고 허공에서 순백의 검이 나타나 눈발과 같은 검기를 뿌렸다. 태극의 그림자가 허공을 가리고 아무런 기예도 없이 그저 순수한 투지를 발하며 몸으로 부딪혀가는 자들이 있었다.

검선의 검이 청광을 뿌리며 홀로 날아가고 검후의 검에서 백색의 섬광이 쏘아져 나갔다. 멸독의 손에서는 노란색 분말과 함께 작은 암기들이 쏘아져 나갔고 파검의 손에서는 거친 파도와 같이 힘 있는 검기들이 쏟아져 나갔다.

그저 보기만 해도 신천지를 열어나갈 계기가 될 만한 무공들이 연달아 펼쳐졌지만 정파의 무인들은 그것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제갈세가주의 지휘가 연달아 나오며 뒤로, 뒤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꽈드드드드등! 꽈드드드등! 꽈드드드등!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오고 땅거죽이 뒤집어지며 속살을 드러냈다.

물경 십여 장에 걸쳐 벽처럼 일어선 땅거죽이 장성을 만들며 마교의 전진을 막아 세웠다.

“흥!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정파의 무인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말 그대로 도망치기 위한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꽈드드드등! 꽈드드등! 꽈등!

능쟁십고의 싸움은 상대를 제압하기보다는 땅거죽을 뒤집고 충격파를 흩트려 마교의 본세의 진행을 막는 쪽으로 진행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마교에도 제갈세가주 만한 인물이 없을 리가 없었다.

“전장을 피해 위회한다. 일이(一二)기단 우(右)! 삼사(三四)기단 좌(左)!”

그 명령에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방향을 바꾸며 피해나가는 마인들의 물결이 있었다.

“능쟁십고는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제갈세가주의 말에 능쟁십고는 각기 절초를 쏘아내며 틈을 만들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파검은 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상대에게 잡혀 있었으나 그곳으로 검선의 이기어검과 소군의 천수불영검이 쏘아지자 몸을 빼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교의 인원들도 역시 수가 많았던지라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특히나 호전적인 인물로 가장 깊게 들어가 싸우던 파검에게 많은 공격이 집중적으로 가해졌다.

파검이 눈을 부릅뜨고 강기를 만들어내 공세에 맞섰다. 비슷한 수위의 공격을 모두 다 막아낼 수는 없는 것. 등 뒤쪽에서 나온 검에 난자당할 위기였다.

갑자기 파검의 등 뒤로 빛의 그물이 펼쳐졌다. 절검이 만들어낸 무량망회였다. 절검이 만들어낸 강기의 그물이 버텨주며 그를 구해내었다.

“쿨럭!”

여러 가지 공격을 홀로 받아내었던 절검의 입에서 기침과 함께 선혈이 토해져 나왔다.

“능쟁십고께서는 장문들과 함께 벽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어느새 능쟁십고의 뒤로 나와 선 장문들이 틈틈이 끼워들어 그들의 부담을 줄여주고 있었다.

면면이 각각 문파의 최고 절기에 해당하는 무공들이 쏟아져 나왔다. 엄청난 위력의 무공들이 펼쳐지며 벽을 만들어 세웠다.

그러나 마교에도 그만한 고수들이 쏟아져 나와 똑같은 벽을 만들며 정파의 고수들을 그 자리에 묶어 버렸다.

“아아! 어찌 저리 고수가 많단 말인가?”

소군은 장문인이 가세한 정파의 무공을 감당하는 것을 보고 놀라 부지불식간에 흘린 말이었다.

가히 삼십여 명의 초절정의 고수들이 나섰는데도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마교의 무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이들의 전력이 이토록 뛰어난 것이었다니. 정파의 수만 믿고 총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 이토록 후회가 될 줄이야.’

바로 귀제갈의 수법에 걸려든 정파였다. 강시나 공적으로 몰려 세상을 배회했던 인물들로 만든 1천여의 선발대였다.

그곳에 고루마군이나 만독군, 태극이현 같은 자들을 섞어 넣어 거의 대부분의 전력이 나온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들만 꺾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며 정파가 방심하기를 바랐다.

실제로 1천여 선발대는 그 강함과 악랄함을 보이며 역천의 술법 등을 보이며 강렬한 인상을 심겨 주었다.

그들이야말로 마교의 정예인 것처럼 충분한 무위와 위력을 보였기에 재정비를 하지 않고 십만대산을 찾는 우를 범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교는 그렇게 간단한 인선으로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다.

생로병사는 어는 사람에게나 함께하는 것. 마교의 전신인 활선당은 의술을 기반으로 세상에 많은 기인들과 선연을 맺었다.

마교는 그들이 얻었던 인연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그들에게 의술을 베풀고 넌지시 천지신교의 교리를 펼쳤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평등하게 본다는 그들의 교리는 옳은 것인지라 별다른 장애가 없이 받아들여졌다.

기실 그 평등의 범위에 황제를 집어넣지만 않는다면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의를 가지고 하나의 종교가 되어 오늘과 같이 많은 기인이사들이 마교의 품에 든 것이었다.

정파 무인들의 퇴각은 참으로 고달픈 것이었다.

맞서 싸우는 것보다 후퇴하며 싸우는 것이 더욱 힘든 것. 능쟁십고가 있고 각파의 장문들이 나서서 마교와 싸우며 길을 열었지만 역시나 희생은 없을 수가 없었다.

간간이 정파의 무인들이 마교의 선봉에 휘말리면 적지 않은 수가 죽어나갔다.

이미 삼 일째 후퇴를 하고 있는 정파였으나 마교의 무리들은 노련한 사냥꾼처럼 그들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반반으로 병력을 갈라 번갈아 쉬어가며 노련하게 몰아가며 추적을 계속하고 있었다.

정파의 무인들은 변변찮게 운기조차 하지 못하고 쫓기느라 눈에 정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검선과 소군의 놀라운 무공이 아니었다면. 아니 엄밀하게 말해서 검선의 무공은 점점 지쳐가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소군의 검은 처음과 같은 예리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소군이 처음과 같은 무공을 그대로 유지하면 마교 고수 셋을 감당하며 이 진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진작 무너졌을 진형이었다.

“저 여인. 참으로 대단하군요. 무공도 정교하고 놀랍지만 내력은 참으로 대단하군요. 이미 사흘째 똑같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으니 이제는 극사님들이 오히려 밀릴 지경이에요.”

“검후지요. 아미의 검후 전설은 대단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대의 검후는 알려진 것보다 더 대단합니다. 첫날은 검선이 어제는 둘이서. 오늘은 저 여인이 모든 것을 감당하는 군요. 하지만 대공녀님이 나선다면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귀제갈의 말에 대공녀는 대답을 하진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었다.

“이제 곧 저들의 퇴로를 막을 수 있는 시간이 올 것입니다. 그때 대공녀께서 나서서 저들을 없애 주십시오.”

귀제갈이 가리킨 손끝에는 능쟁십고와 장문들이 분투하고 있는 장소였다.

“저들이 지칠 때를 기다렸습니다. 대공녀께서 홀로 저들을 감당하신다면 대공녀의 이름을 무신(武神)이라고 칭하고 세상에 알릴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대공녀가 일어서 앞으로 나섰다.

“한 치의 온정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단호해지셔야 합니다. 그것만이 더 작은 희생을 치르는 방법임을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귀제갈은 대공녀가 그들이 지친 틈을 타 한꺼번에 제압하기를 바랐다.

만약 그게 성공한다면 대공녀의 무위는 넘볼 수 없는 신의 무예로 평가받으리라.

대공녀를 앞세워 황제와 싸우는 일이 더욱 쉽게 마무리 지어질 수 있도록 능쟁십고와 장문인들이 지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이제 아군이 올 것이요.”

제갈가주의 목소리가 피를 토했다.

삼 일 동안 정파의 무인들은 이미 삼백여 명이나 당한 상황이었다. 이제는 처음에 모였던 것에 비하면 반도 되지 않는 인원이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정예 중에 정예들이 모인 집단이었는데 수에서 싸움이 되지 않았다. 참으로 암담한 싸움이었다.

제갈가주가 아군이라고 목 놓아 불러대는 아군이라는 것은 오천의 황제의 사병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실질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을 병력.

제갈가주에게 그들을 사용할 비책이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특별한 방법이 없다면 아마도 그들을 방패삼아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조금만 더……!”

여전히 제갈가주의 메마른 목소리는 아군을 불렀다.

그렇게 몇 번을 독려하며 병력을 이리저리 움직이도록 지휘를 하고 나니 멀리 사병들이 보였다.

“되었소. 아군이 보이오. 모두 그들이 있는 곳으로 전속으로 달려 주시오.”

제갈가주는 최후의 명령을 내리고는 쾌속하게 경공을 펼쳐 군영을 항해 치달았다. 그곳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서 흙먼지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오고 있습니다. 장군.”

“흐흐흐! 이제야 우리가 나설 시간이 오는구나. 고대했던 시간이로군.”

좌오장군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오늘을 위해 그동안 정체를 감춰왔던 것이니 그 감회가 새로웠다.

“부장은 직접 지휘하여 이십칠파결을 펼쳐라!”

“존명!”

부장은 복창을 하고는 서른두 명의 인원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십칠파결을 펼치는 데는 이십칠 명의 인원이 있으면 되었지만 나머지 다섯은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한 것이었다.

이십칠 명의 인원들은 모두가 삼각형으로 된 깃발을 들고 있었다. 대접 모양으로 넓게 늘어서더니 저마다 하나씩의 깃발을 땅에 박았다.

붉고 파랗고 녹색의 깃발이 긴 행렬처럼 줄지어 서졌다.

“대법을 시작하라!”

깃발의 앞에 선 자들이 모두가 손을 들어 수결을 맺고 진언을 외웠다.

진언을 외우자 그들의 몸에서 광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란 빛깔이 도는 광채가 일어나 그들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던 제갈가주는 그들의 하는 양을 그냥 내버려 두고는 군영으로 치달았다.

좌오장군에게 상황을 전하고 협조를 구해 군을 부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푸른 광채를 무시하고는 하늘로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파지지지직!

투웅!

제갈가주의 몸이 나아갈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푸른빛이 생겨나며 제갈가주를 막아 세웠다. 뒤로 튕겨져 나온 제각가주는 짜증을 흘리며 소리쳤다.

“급하다. 비켜라!”

또다시 몸을 날렸는데 푸르른 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하자 제갈가주는 검을 뽑았다.

교연백이십세류!

제갈세가의 가문검식이 그의 검에서 펼쳐졌다. 천하에 정교하기로 이름난 교검으로서 그 예리함이 강호의 일절인 검식이었다.

파지지지직!

투웅!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제갈세가주는 전과 같이 빛을 뚫지 못하고 뒤로 튕겨져 나와야만 했다.

“무… 무엇이냐? 비켜! 비키란 말이다.”

군영을 향해 달려가던 제갈가주는 그들이 펼쳐놓은 장막을 뚫지 못하자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십칠파결의 장벽 뒤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이십칠파결은 그야말로 소리마저 차단한 희대의 진식이었던 것이다.

그때 제갈세가주의 눈에 오히려 좌오장군의 부장이라는 자가 싸늘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표정이 들어왔다.

제갈세가주는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간 지내온 일련의 사건들이 머리를 스쳤다.

무림맹의 행사를 들어주는 척하며 교묘하게 신경을 거슬리던 그들이었다. 큰 피해를 입었는데도 무림맹이 퇴각하지 못하였던 것도 황군이라는 그들의 눈치를 보았던 것이 아니던가? 역천의 술에 무림맹이 누더기처럼 피해를 입고도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들이었다.

부장의 싸늘한 웃음 위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버렸다.

문득 눈을 돌려 진을 보았다.

진을 이루는 자들의 수를 세어 보니 모두 스물일곱 명이었다.

“이십칠파결! 환천삼보의 진법이구나.”

익히 알고 있는 진법. 그러나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진법이기도 했다.

환천삼보에서 이십칠파결을 얻은 뒤, 온갖 방법으로 시도해 보았으나 이루지 못했던 진법이었다.

강호제일 지자들이 살고 있다는 제갈세가가 재현하지 못한 진법이었다. 그런데 마교의 무리들은 그것을 펼치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 기가 막혔다.

그런 제갈가주의 속마음이 어쨌거나 간에 뒤로 몰려드는 정파의 무인들과 그 뒤를 쫓는 마교의 무인들이 쇄도해 들어오고 있었다.

‘위험해! 전멸될 수 있다.’

이렇게 진이 빠질 정도로 지쳐 있는 상황에서 그 수가 세 배가 넘는 마교와 싸운다면 멸절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지도 몰랐다.

“무림맹의 무인들은 장벽을 뚫으시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인들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경공을 펼쳐 달리던 무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에 튕겨 나오자 그곳에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뚫지 못하면 큰일이오. 이 자리에서 전멸할 것이요.”

그제야 퇴로가 끊어진 것을 알아버린 무인들이 저마다 최선을 다해 이십칠파결의 진법을 향해 병장기를 쳐내었다.

엄청난 경력이 쏟아졌지만 이십칠파결의 진법은 흠 하나 나지 않고 견고함을 자랑했다.

정파의 무인들은 그대로 이십칠파결을 뚫지 못하고 독 안에 든 쥐처럼 마교의 무인들과 정면으로 부닥쳐야만 했다.

“하하하하! 네놈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다. 활선당의 원한을 오늘에야 풀게 되었구나.”

그 장면을 보던 좌오장군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좌오장군은 활선당의 후예로서 활선당이 관과 무림에 심어둔 간세 중의 하나였다.

활선당의 간세가 워낙에 은밀했던 바, 그들의 정체는 들킨 적이 없었는데 어느새 이십 년이 지나 좌오장군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간세들의 능력으로 황제의 첨군으로 나올 수가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저들. 영력자들이 아닌가?’

축골공을 이용해 꼽추로 변해 숨어 있던 진건곤은 좌오장군의 부장이 수하들을 이끌고 나와 진법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진건곤은 그들을 보며 이상한 점을 느꼈다.

진법을 펼치러 나왔던 자들은 모두가 영력을 사용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순간 진건곤은 백자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모산파는 영력을 지닌 아이들을 제자로 들입니다. 그들이 타고난 영력을 사용하는 것을 가르치고 그들의 영력이 악용되거나 자신을 해치지 않도록 돌봐주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영력을 이용한 것 중에는 진법도 있지요. 모산파의 진법은 영력을 가진 자들의 힘을 이용해 펼치는 것이어서 상황, 상황에 따라 그 진의 운용이 자유롭습니다. 무림인들이나 제갈세가의 진법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산파가 대규모 전쟁 같은 곳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백자에게 들었던 진법인가?”

가만히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진건곤은 문득 그들의 수효가 모두 이십칠 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십칠파결?”

진건곤이 그 진법이 이십칠파결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득달같이 나타난 제갈세가주가 이십칠파결의 진법에 부딪혔다.

파지지직!

맥없이 허공에서 튕겨나가는 제갈세가주.

허공을 날며 검을 쳐내더니 연이어 몇 번을 더 시도하고는 분에 받힌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전해지지 않았다. 아울러 뒤를 따라온 무인들이 모두가 이십칠파결의 진법을 향해 공세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후우. 내가 나서야 할 차례인가?’

진건곤은 소림방장의 화두를 들으며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불가에서 강조하는 자비였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의 자비에서 진건곤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진건곤은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세상을 돌보면 그것이 바로 측은지심의 발현이요. 자비라고 생각했다.

화산에 대해 반감이 있었던 지라 은연중에 무림인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들은 이미 사람들에 비하면 강자였고 그들의 싸움이 무공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딴 세상의 일이었다.

무슨 싸움을 하든지 누가 이기든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사병들이 값싸게 비명에 가는 길이 없도록 지켜주기 위해 사병들의 틈에 스며든 것이었는데, 이십칠파결의 진법이 펼쳐진 장면을 눈으로 목도하게 된 것이었다.

이십칠파결의 진법에 갇힌 무림인들의 속에는 검후와 아미, 절검이 함께 있었다.

화산은 모른 척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것 또한 마음이 가는대로 하면 되는 것이겠지.’

꼽추로 변한 진건곤의 검은 등짐에 담겨 있었는데 검은 살아 있기라도 한 듯이 스스로 등짐 속에서 벗어나 이십칠파결의 진법을 향해 날아갔다.

“고천사의 검이다.”

누군가가 하늘을 가르는 백광을 보며 소리쳤다.

어느새 이기어검은 일렁이는 백광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병들에게는 전진자라는 이름보다 고천사라는 이름이 더 흔하게 불렸다. 고천사라는 이름에는 사병들의 틈에서 날아갔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는 이름이었다.

파지지지직!

꽈드드드드등! 꽈드드드드등!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일렁이는 백광이 날아들었는데 순간적으로 푸른 청광이 일어나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벽력이 치는 소리가 울렸지만 진건곤의 백광도 역시 그 벽을 뚫지는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이런!”

이십칠파결의 견고함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진건곤은 남몰래 해결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검결지를 쥐며 영력을 더욱더 불어 넣었다.

하지만 사병들은 고천사의 검이 출현했다는 말에 모두가 허공을 바라볼 뿐 꼽추가 흔드는 손을 바라보는 자는 없었다.

검결지가 흔들리고 이기어검은 아까보다 더 빠르게 백광이 허공을 날아갔다.

파지지지직!

꽈드드드등! 꽈드드드등!

또다시 벽력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이십칠파결은 철벽같은 견고함을 자랑하며 진건곤의 이기어검마저 튕겨내고 있었다.

일십칠개의 진주만 있으면 하늘이라도 가둘 수 있다는 이야기를 가진 절진이었다. 이십칠파결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십칠파결의 위력은 철벽같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군.”

진건곤은 이미 이십칠파결의 약점을 간파하였다. 진건곤이 아니라면 쉽게 간파할 수 없는 약점이었다.

이기어검을 펼치며 자연스럽게 몰아일여를 펼쳤는데 그중에 이십칠파결을 지탱하던 진주들도 들어 있었다.

이기어검이 이십칠파결과 부딪힐 때마다 흔들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진주의 마음을 읽었던 것이다.

진건곤의 검결지가 쉼 없이 흔들리자 허공에 일렁이는 백광은 제자리에서 무서운 속도로 회전을 하며 힘을 모았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시간이 갈수록 좀더 묵직한 검명을 흘려내는 진건곤의 이기어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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