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독룡-46화 (46/61)

제5장

진건곤은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몇몇의 인물들이 자신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싶은 진건곤으로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려는데 걸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봐, 신입!”

여전히 모른 척 빠져나가려는데 개중에 하나가 앞으로 나와 진건곤의 앞을 턱하니 막았다.

“크흐흐흐! 모른 척하고 빠져나가려 하나? 형님! 이거 은근히 의뭉스러운 놈인걸요?”

사내는 진건곤에게 지급된 복장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사내가 형님이라고 불렀던 자는 소호장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명색이 상관이라는 이야기였다.

진건곤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자신을 안내했던 상 소호장을 찾았지만 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흔적도 없었다.

“허허허! 이놈은 참……! 신입, 어딜 보는 거냐? 관 소호장님이 친히 납시셨는데 인사부터 올려라! 그리고 난 막 조장이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셔라.”

스스로 막 조장이라고 밝혔던 자가 손에 든 육모방망이를 살짝살짝 흔들며 겁을 주었다.

진건곤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직급이 있는 것 같아 그에 따르기로 하였다.

관 소호장이라고 불리는 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 뵙소. 오늘 도착한 조장 고모(高某)올시다.”

“고 아무개? 허허! 웃기는군. 어디 찻집에서 학사들이 만났다더냐? 각설하고 관등성명이나 정확히 훑어!”

형님이라고 불렸던 소호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거칠긴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진건곤은 다시 입을 열었다.

“섬서 출신 고국양. 충의군의 조장으로 발령받아 부임했습니다.”

진건곤이 말을 하는 사이 조장으로 보이는 다른 사내가 진건곤의 몸을 더듬었다.

그런 수작을 모를 리가 없는 진건곤은 슬쩍 걸음을 내디뎌 막 조장의 손이 허공을 짚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막 조장의 손이 노골적으로 진건곤의 봇짐을 만지는 것이 아닌가? 워낙에 노골적인 수작인지라 티를 내지 않고 피할 수 가 없었다.

진건곤도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진건곤의 봇짐을 잡았던 막 조장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그리고는 손으로 관소호장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인즉, 대박!

막 조장은 손끝으로 잡히는 느낌으로 보아 금원보나 은원보가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간만에 만난 봉이었다.

대개 귀한 집의 자식들이 처음 전장으로 나오는 때에는 돈을 싸 짊어지고 오기 마련이었고 그런 놈들을 등쳐먹는 것이 전장의 작은 기쁨이었던 것이다.

“크하하하하! 고형제! 오늘 우리가 좋은 인연으로 만났으니 어찌 안 즐겁겠는가? 전장이 전장인지라 인심이 야박하지. 짐 안에 들어 있는 돈도 없어지기가 일수라네. 어떤가? 꼭 지켜야 할 귀중품이 있다면 이 든든한 고참에게 맡겨 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응?”

진건곤의 얼굴에 또다시 실소가 어렸다.

어린 시절 이런 자들은 많이 겪어 보았으니 무슨 생각인지 다 알고 있는 탓이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진건곤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자 그들도 함께 따라 웃었다.

갑자기 나타난 재신의 웃음을 따르지 않으면 무엇을 따르겠는가?

“어딜 가나, 꼭 네놈들 같은 놈들이 있지. 걱정하지 마라! 내 짐 정도는 내가 지킬 수 있으니까.”

진건곤이 직급도 무시하며 반말로 세게 나오자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말았다.

“어이! 웬만하면 말을 듣는 것이 좋을 텐데?”

막 조장이었다. 진건곤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안 그러면 전장에서 혼자만 따돌림 받을 수가 있거든. 위험한 상황에 혼자만 따돌림 당하면 살아남기가 힘들지.”

“오! 그러셔? 하하하! 걱정 말라고.”

진건곤이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 자리에 남은 관소호장과 막조장의 눈은 여전히 탐욕으로 젖어 있었다.

“흐흐흐! 묵직하던걸요. 은원보나 금원보가 틀림없습니다. 재신입니다. 재신. 크흐흐흐!”

“하하핫! 제법 강단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햇병아리에 불과하지. 탱탱한 햇병아리를 요리하는 맛도 재미나지. 제법 버티는 꼴을 보고 싶군. 크흐흐흐흐!”

진건곤의 뒷모습에 진득한 욕망의 그림자를 느끼는 자들이었다.

자리를 옮긴 진건곤은 자신의 곁으로 다가서는 자들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저 녀석들이 이곳의 터줏대감이었던 건가?’

진건곤은 멀리서 관소호장과 막조장이라는 자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자신의 곁으로 사람들이 오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알력이리라.

‘또다시 수작을 걸어오면 본때를 보여주지.’

진건곤은 그 자리에 편하게 앉아 시간을 때웠다.

나른하게 햇볕을 즐기는데 문득 자신을 향해 인파가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진건곤의 시선이 그쪽을 향하자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있는 자가 보였다. 그자는 진건곤을 향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이고! 형님도 참으로 무심하시구나. 조카를 보내면서 알리지도 않는단 말인가?”

생판 처음 보는 인물이 말에서 내려 진건곤의 등을 반갑게 때렸다. 그의 곁에는 진건곤이 옥패를 보여주었던 소호장이 함께해 있었다.

진건곤은 어찌되는 판인가 싶어 상 소호장에게 눈길을 던졌는데 상 소호장의 한쪽 눈이 심하게 눈을 깜박였다.

신호라고 하는 건가 싶어 하는데 새로 등장한 사내가 일을 정리하였다.

“무심한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하나뿐인 조카를 조장으로 보내다니 무심한 양반이구나. 잘 해주고 싶지만 허나 나 또한 형님의 뜻을 거스르기는 어렵다. 조장으로 잘 지내거라.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고 알겠느냐?”

사내가 조카라는 말을 하자 주위의 인물들이 모두가 짐짓 놀란 양, 진건곤을 보았다.

“백부님의 얼굴을 뵌 지 너무 오래 되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조카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다. 어찌 그게 네 탓이겠냐? 아무튼 간만에 얼굴을 보았으니. 술 한 잔 해야겠구나.”

사내는 진중에서도 술을 마실 만큼 지위가 높았었나 보았다.

“후일, 근무 중에 술이라니요? 아버님이 이 일을 아시며 크게 경을 칠 것입니다. 그럼, 나중에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백부님.”

“허허! 아쉽지만 그럴까나? 하여간 조만간에 찾아오너라!”

사내가 간 후에 진건곤은 상 소호장에게 낮게 속삭였다.

“어찌된 일인가?”

“아무래도 제 힘만으로는 조장님을 편히 모실 수도 없고… 평시도 아니고 전쟁에 들어 있는 군 병력을 관리 하는 게 제 힘으로는 되는 일이 아닌지라……!”

상 소호장은 말꼬리를 말았는데 그 말뜻은 이미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았다.

진건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긴, 네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 하지만 그 자에게 내 존재가 기밀이라는 것은 전했느냐?”

“그러믄입쇼. 더 이상 전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암요.”

“흥! 믿을 수 있겠느냐? 가서 전해라! 더 이상 알려지게 된다면 일을 방해한 죄로 벌을 줄 터이니 너와 그자 둘만 알고 있어야 한다. 어서 가서 전해!”

“알겠습니다.”

진건곤이 정색을 하고 말을 하자 소호장은 잽싸게 발을 놀렸다.

‘어쩌면 더 편해졌을지도 모르겠군. 군율에 크게 얽매이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놈들을 요리해도 일이 생기지는 않겠군.’

상 소호장의 처사가 그리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는 진건곤이었다. 그런 진건곤을 보면서 멀리서 인상을 구기는 자들이 있었다.

“빌어먹을! 재신이었는데……! 저 자식만 잘 구슬리면 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인데. 아으……!”

막 조장이 아쉬운 듯이 말을 꺼냈지만 관 소호장은 아직도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 마라. 아무리 대호장의 조카라고 해도 슬슬 겁만 주면 어쩌지 못할 거다. 다른 방법을 찾자.”

펄럭……!

천막의 입구가 바람결에 흔들렸는지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검은 인영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보초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오히려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제대로 패주라는 듯이 주먹으로 무언가 때리는 시늉을 보였다.

“저 녀석, 우리 패거리에 넣어 줄까요?”

“됐어. 나중에 생각해 보지. 지금은 이놈이나 족치자고.”

검은 인영들은 잠들어 있는 진건곤의 머리맡에 서 있었다.

‘이놈들. 무슨 짓을 하려고?’

진건곤은 밤손님들의 출현을 알았지만 모른 척하고 있었다. 하는 냥을 보아 그에 걸맞게 혼을 내줄 작정이었다.

“가져와!”

졸개는 진건곤의 짐을 놓는 곳에 가서는 벗어놓은 신발을 훔쳐가는 것이었다.

“크크크, 내일 훈련이 있을 것이다. 내일 보자고!”

두 인영은 소리 낮춰 웃어가며 천막을 나섰다.

잠시 후, 눈을 뜬 진건곤이었다.

“골탕을 먹이시겠다?”

천막의 문이 열리고는 상 소호장이 들어왔다. 진건곤이 일어나 있었는데도 상 소호장은 놀라지 않았다.

“저것들에게만 따로 말씀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상 소호장의 손에는 그들이 들고나간 신발과 똑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놔두게. 도에 넘치는 짓을 하면 내가 크게 혼내지.”

상 소호장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천막에서 물러났다.

“저… 그래도 저놈들 사람을 크게 상하게 한 적은 없습니다. 신입이라도 들어오면 기를 죽여 놓아서 문제지. 뼈를 부러트린 적도 없고… 아…아마도 돈을 맡기셨어도 잔돈푼이나 건드렸으면 모를까 큰돈이라면…….”

“알았네. 나도 적당한 선에서 처리하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상 소호장은 그래도 동료라고 크게 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나 보았다.

다음 날 아침 관 소호장과 막 조장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건곤이 멀쩡하게 신발을 신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보급품이 넘치나 봅니다.”

“상 소호장 짓이겠지. 대호장님의 조카라니 뒷배를 봐주나 보군.”

“캬악! 퉤! 더러운 놈들. 인맥이 전분가? 신입 데리고 장난도 못 치나? 에이 더러운 세상! 완전히 썩었다니까.”

아전인수라고 막 조장이라는 놈은 상황에 맞지도 않는 말을 늘어놓으며 기분나빠하고 있었다.

자신이 한 짓은 생각도 못하고 한참을 씩씩대는 꼴이 판단력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저놈. 족치려면 상소호장부터 묶어놔야 할까요?”

“아니다. 상 소호장이랑 저 애송이를 떼어 놓아야겠다. 흐흐흐.”

하루는 고달픈 일과였다. 물론 진건곤이 아니라 사병들에게 말이다.

훈련을 하겠다고 하루 종일 움직여 많이 걸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것을 알고 신발을 훔쳤던 것일 것이다.

해가 저편으로 넘어가 그림자가 길어질 시간이었다.

하루 일과가 끝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모두들 마음이 늘어질 시간이었다.

군영에 돌아오니 몇몇의 사병들이 천막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눈곱이 끼어 이제 막 일어난 듯해 보였다. 하루 종일 늘어지게 쉬고 체력을 비축한 그들은 정찰을 나가기 위해서 훈련에서 빠진 자들이었다.

사병들은 고된 훈련이 끝나고 돌아오는 시간 정찰대는 임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관 소호장과 막 조장은 숙련된 솜씨로 짐을 꾸렸다. 짐이래봐야 물과 건량. 작은 천 쪼가리가 고작이었지만 숙련된 솜씨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관 소호장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진건곤에게 다가왔다.

“어라? 이상하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고 조장 나와!”

관 소호장의 호명이 있자 진건곤은 웃음을 참으며 슬그머니 일어섰다.

하지만 진건곤은 앞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무슨 일입니까?”

상 소호장이 나서서 물어보았다. 뻔한 수작이었지만 일단은 상 소호장이 고참이니 대접은 해야 했다.

“저놈 오늘 정찰이다.”

‘아뿔사! 이놈이 먹물하고 친하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정찰대 임무를 짜는 먹물이 관 소호장과 친하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자신의 불찰이었다. 아니 거기까지 동원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어제 온 신입에게 무슨 정찰을…….”

“낸들 아나? 명령이 그런걸.”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뭔가 착오가 있는 겁니다.”

“기다리긴 뭘 기다리나? 네까짓 놈이 명령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명령대로 지금 정찰을 간다. 고 조장은 따라나서라!”

관 소호장이 정찰대와 함께 앞으로 나가자 진건곤은 그냥 따라나섰다. 걱정스러워 하는 상 소호장에게 전음을 날렸다.

[걱정 말게. 이놈들 되레 혼나고 말테니까.]

전음에 상 소호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전음이라면 제법 무술에 능한 사람들이 쓴다는 것 정도는 상 소호장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렇지! 황족이 혼자 다닐 때는 그만한 능력도 있는 거겠지.’

“허어! 그럼 어쩔 수 없지. 잘 다녀오게. 정찰은 위험한 임무니 조심하고.”

하지만 그들이 떠나고 군영을 벗어나 먼지만 보일 때쯤이 되자 상 소호장은 혀를 차고 말았다.

‘아차! 황족님은 물조차도 가지고 가지 못했구나.’

남겨진 상 소호장이 당황하고 있었다.

정찰대의 임무는 고달팠다.

보통은 이틀을 주기로 교대를 하는데 세 시진가량을 쉴 틈 없이 앞으로 나아가 자리를 잡아야 했다.

마인들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으려면 그나마 밤에 움직여야만 했다. 자리를 잡으면 꼼짝도 하지 않고 지켜보다가 그들이 움직이면 봉화를 올리고 돌아오는 것이 임무였다.

적들의 근처까지 다가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목숨을 건 임우였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변변하게 식사나 기본적인 용변을 맘대로 할 수도 없었다.

미리 준비를 하고 나가는 임무였는데 진건곤처럼 급하게 끌려 나가느라고 준비를 하지 못한다면 더욱 힘든 일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하하하! 어떠냐? 상 소호장도 없으니 오금이 저리지?”

아직은 군영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선지 막 조장이 여유 있게 말을 걸어왔다.

진건곤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지그시 쳐다보는 것으로 대신해 주었다. 물론 이미 의기상인의 경지에 오른 진건곤의 눈길이니 평범할 리가 없었다.

“이 자식이……!”

막 조장은 신입이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았는데 진건곤은 여전히 지그시 보는 것뿐이었다.

막 조장은 진건곤의 그런 눈길에 왠지 두려움이 느껴졌다. 가만히 보고 있는데 무언가 항거할 수 없는 굉장한 힘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에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그것을 참지 못하고 허리춤에서 소도를 꺼내어 진건곤의 목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눈깔아!”

하지만 진건곤은 여전히 막 조장을 지그시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미 진건곤은 막 조장에게는 살기가 없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겁이 많은 자들이 왜 남들 위에 서려고 할까?’

막 조장은 꺼낸 도를 가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들고만 있었다.

웅성웅성!

정찰대원들이 그런 막 조장의 행위를 보고는 수군대기 시작했다.

“바보 자식! 장난을 그렇게 치나? 분위기만 썰렁하게?”

관 소호장이 나서서 막 조장의 소도를 빼앗아 그의 허리춤에 다시 찔러 주었다.

“너 그렇게 뻗대다가는 죽는 수가 있다.”

관 소호장은 사태를 마무리 하는 척하며 진건곤에게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다시 한 번 말하겠지만 정찰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다. 앞으로는 모든 것을 허락을 맡아야 한다. 금방 전 같은 장난은 물론이고 심지어 숨을 크게 쉬는 것도 말이다. 알았나?”

정찰대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항이었는데 진건곤에게 들으라고 주의사항을 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의사항을 모두 읊어준 관 소호장의 눈초리는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관 소호장은 성질이 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한 시진도 못 되어 무언가 허락을 받기 위해 말을 걸 것이라고 생각했던 진건곤이 무려 세 시진이 지나도록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걷고 있는 것이었다.

‘독한 새끼! 하지만 아무리 독해도 먹을 것도 없이 이틀을 버티기란 어려울 것이다.’

멀리 마교의 본영을 지켜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눈으로 보기에 작은 점에 불과해 보이는 곳이었으니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에서 마교가 점으로 보인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왜냐?”

관 호소장은 말을 끈 호고는 고개를 돌려 진건곤에게 다가갔다. 진건곤의 얼굴에 바짝 다가가 으르렁대듯이 말을 이었다.

“마교에서도 정찰을 나오기 때문이다. 마교의 정찰대는 무공의 고수들과 강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교 고수들은 그 이목이 날카로워 백장 밖에서도 우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해서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움직이지 않고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만이 살길이다. 알았나?”

“네.”

진건곤의 아주 짧은 대답이 또다시 관 소호장의 비위를 긁었다.

“만약 네놈의 실수로 들통이 난다면 네놈을 먹이로 던져 주고 도망갈 것이다. 알겠느냐?”

“알았소.”

“알았소?”

진건곤의 답에 부아가 끓었지만 더 이상 해코지를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말대로 언제든지 마교의 정찰대가 나타날 수도 있는 곳이었다.

“자리를 정해주마.”

관 소호장은 각각의 정찰대에게 자리를 정해주었는데 다른 자들에게는 먼 곳을 볼 수 있게 해 주어놓고는 진건곤에게는 시야가 전혀 없이 뒤로 돌아 앉아 바위를 바라보게 하였다.

면벽을 수도하는 수도승이 아니라면 답답해서라도 견디기 어려운 방법이었다. 진건곤을 골탕 먹이려는 수작이 틀림없었다.

“큭큭큭! 큭큭!”

같이 나온 정찰대원들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 자식. 제대로 해! 안 그럼, 먹이로 던져 줄 테니까!”

사병들 사이에는 강시가 사람을 산 채로 뜯어먹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으니 먹이로 준다는 말이 괜한 소리는 아니었다.

관 소호장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잔뜩 피어올랐다.

‘크하하하하! 바위만 보고 있자면 좀이 쑤셔서라도 입을 열겠지. 그때가 바로 네놈의 몰락이다. 크하하하하!’

정찰대는 관 소호장이 잡아준 자리에 눕거나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길어지자 자신의 짐을 꺼내 용변과 식사를 각자 해결했는데 진건곤은 그런 움직임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움직이지도 않은 채로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진건곤이 금방 입을 열 것이라는 관 소호장의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달라져야만 했다.

아침 해가 뜰 무렵까지 무려 네 시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버티는 진건곤을 보자 오히려 무섭다는 생각마저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관 소호장도 그런 쪽으로는 한 끈기 하는 인물이었다.

“일어서라! 염탐이다.”

대낮에는 아무도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꼼짝도 못하고 있었는데 저녁에 해가 석양에 걸리자 관 소호장은 진건곤을 불렀다.

관 소호장은 진건곤을 데리고 직접 적진으로 들어가 정찰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염탐은 적진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 그 속사정을 탐지하는 것이기에 보통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보통은 위에서 특별히 지시가 내려오기 전에는 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진건곤의 기를 꺾기 위해서 하려고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러지!”

진건곤은 또다시 짤막한 대답을 하고 일어섰는데 관 소호장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져 있었다.

진건곤은 그런 얼굴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진건곤은 이미 몰아일여를 펼쳐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하는 짓이었는데 관 소호장은 심장이 벌렁거릴 지경이었다.

“신참. 죽고 싶나?”

얼른 따라붙으며 진건곤의 신형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려고 했다.

하지만 진건곤의 몸은 요지부동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다. 호들갑 떨지 마!”

진건곤은 태연히 한마디를 남기고는 앞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스릉!

도가 뽑혔다.

“신참! 너 정말 죽고 싶냐? 거기 안 서?”

관소호장은 소리도 높이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진건곤에게 윽박을 질렀지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건곤은 뒷짐을 진 채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너 죽어!”

관 소호장이 앞으로 나아갈 때쯤. 다른 대원들이 관 소호장의 손발을 잡았다.

“소호장님! 피 냄새가 나면 같이 죽어요.”

“제발……! 전 처자식이 있습니다. 돌아가야 해요.”

강시들은 피 냄새를 잘 맡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피를 뿌려 강시들의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은 대원들이 필사적으로 관 소호장을 말리고 든 것이었다.

대원들의 만류에 조금은 진정이 된 관 소호장이었지만 그의 이마에서 하얀 김이 올라오는 듯하였다.

“야! 꼴통! 내가 앞장선다. 따라와!”

겁을 주러 끌고 왔던 진건곤이 대담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기가 죽고 싶지 않아 그러는 것으로 착각한 관 소호장은 신참의 기를 꺾을 요량으로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에이 젠장! 이판사판 합이 육판, 나는 개판이다. 니미럴!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

“네가 뭘 모르나 본데 나 그렇게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소싯적에 죽인 놈들이……!”

그때부터 관 소호장의 왕년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평소에는 관 소호장은 나름대로 일정한 선을 가지고 염탐을 하였는데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진건곤을 만나 흥분한 터에 왕년의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그 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시간도 지나 해가 지고 나서 어두워지니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간이 더 커져 버렸다.

진건곤과 관 소호장은 아무 거리낌 없이 밤길을 걷는 듯하였고 그 뒤를 따라가는 대원들만 공포가 서린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알아들었냐? 응?”

하지만 긴 시간 동안 자신의 과거를 읊어도 진건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 옆을 걸을 뿐이었다.

“이런 또라이 같은 놈아!”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관 소호장은 점점 더 흥분해서 이야기 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문득 진건곤의 표정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펼쳐둔 몰아일여의 경계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관 소호장에게는 그것을 알리지 않았다.

진건곤도 역시 조금은 관 소호장을 골탕 먹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부러진 도끼 자루를 들고 소리쳤지. 죽을 놈 다 나와! 크하하하하! 다들 쫄아 가지고 못 나오더군. 아무도 못 나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어둠 속에서 관 소호장의 목소리를 뚫고 소리가 울렸다.

차박! 차박! 차박!

무언가가 땅을 차고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이… 이런!”

그때야 관 소호장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뜀박질을 시작했다. 대원들도 모두가 함께 달려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관 소호장은 뜨끔했던 느낌과 함께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눈동자만은 움직일 수 있었는데 주위를 살피니 대원들은 모두가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쿵! 쿵! 쿵!

좀더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울리고 사방에서 소리가 울렸다.

쿵! 쿵! 쿵!

공포가 가득 차 관 소호장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흥! 그 대단하신 분이 쫄았나 보군. 심장소리가 북소리처럼 들려.”

대원들 중에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진건곤뿐이었다. 진건곤이 대원들의 마혈을 찍은 것이니 그럴 수밖에.

‘흥! 강시들은 숨을 쉬는 것에 달려든다는 것도 모르는 건가?’

“사…살려줘!”

진건곤은 태연하게 움직이며 다른 대원들을 모두 한곳에 모았다.

“살려주세요. 제발!”

관 소호장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울 것만 같아지자 진건곤의 얼굴에 작은 웃음이 스쳤다.

“안 돼! 강시들의 먹이가 부족하다. 이놈들이라면 정신이 없는 채로 먹이로 던져주지. 하지만 넌 특별히 산 채로 뜯어먹게 해주지.”

때마침 진건곤의 뒤로 강시들이 껑충껑충 뛰어 오는 모습이 비쳤다. 모두 세 마리의 강시가 움직이고 있었다.

강시를 본 순간 관 소호장의 정신은 공포에 져 무너져 버렸다.

주르륵! 오줌을 흘려버린 것이었다.

“한 가지 기회를 주지! 조정하는 술법자가 없는 강시들은 숨을 쉬는 것만 노린다. 그놈들은 명령을 받지 않으면 숨 쉬는 것만 공격할 수 있을 뿐이지. 네가 숨을 멈추면 강시들은 네놈을 찾지 못하지. 하지만 언제까지 숨을 멈추고 있을 수 있을까?”

관 소호장은 정신이 무너지는 공포 속에서도 살길을 찾았을까? 급하게 숨을 멈추었다.

강시들의 습성을 알고 있는 진건곤은 관 소호장을 제외한 다른 대원들을 모두 한곳에 모았다.

진건곤의 몸에서 생겨나 구체가 점점 커지더니 그들과 진건곤의 신형을 모두 담았다.

하지만 밤이 깊었던지라 관 소호장의 눈에는 그 구체가 보이지 않았다.

쿵! 쿵! 쿵!

심장소리와는 다른 무언가가 울리고 있었다.

마교는 변방을 지키는 것으로 강시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무릎도 구부리지 않고 뛰어다니는 강시들의 움직임소리는 관 소호장의 심장소리보다 더 크게 울렸다.

방금까지도 진건곤과 다른 대원들을 향해 움직이던 강시였는데 구체가 그들을 감싸자마자 강시들은 목표를 잃은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인간에게 숨을 참는 것은 한계가 있는 법.

“파아아!”

관 소호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숨을 터트리고 말았다.

한순간 주위를 배회하던 강시들이 관 소호장을 향해 모여들었다.

“빌어먹을! 이게 다 네놈 때문이야. 지옥에 가서도 네놈을 저주할 거다.”

얼굴이 하얗게 변해버린 관 소호장은 이지를 상실했는지 진건곤에게 고래고래 악을 썼다.

강시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목숨을 포기하고 나니 남는 것은 진건곤에 대한 분노뿐이었던 것이다.

“고작 강시 때문에 삶을 포기한단 말인가? 숨을 참는 것이 어떨까?”

갑작스레 울려나온 소리. 강시들은 또 다른 목표물을 찾아 주위를 살폈다.

관소호장은 어이없는 눈초리로 진건곤을 바라보았다.

“이 꼴통 새끼. 너 정말 죽어 볼래?”

“너 먼저!”

또다시 진건곤은 구체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 꼴통 새끼!”

관 소호장의 입에서 뜨겁게 새어 나온 숨결에 강시 세 마리가 사납게 달려들었다.

관 소호장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는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번뜩!

백광이 유성처럼 밤하늘을 갈랐다.

퍼버벅!

스스슷!

백광이 번뜩이자 순식간에 세 구의 강시는 흙먼지가 되어 땅 위로 흩어져 버렸다. 너무나 신비한 장면이었다.

자신의 몸에 전해지는 충격이 없자. 관 소호장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주위에는 강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아무것도 없는 어둠만이 있었다. 오직 진건곤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관소호장은 진건곤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에게 환각을 보게 할 능력이 있거나 순식간에 세 마리의 강시를 흔적도 없게 만들 능력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고… 고 조장! 나… 나 좀 살려줘. 요…용서해 줘!”

“하하하! 무슨 소릴. 장난 한 번 쳐본 걸 가지고… 재미없었소?”

진건곤이 웃으며 말했다.

관 소호장은 또다시 뜨끔한 느낌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진건곤의 몸에서 나온 구체가 순간적으로 부풀어 오르며 관 소호장을 감쌌다.

쿵! 쿵! 쿵!

여러 구의 강시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파라라락!

“이노옴!”

“이런 하루 강아지 같은 놈들이.”

마교의 고수들은 그들의 복장을 보아 일반 사병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는 얕잡아 보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

후웅!

진건곤이 만들어낸 구체는 바람이 우는 소리만을 남긴 채,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인들은 어둠으로 날아간 구체를 순식간에 놓치고 말았다. 밤이라서가 아니었다. 낮이라 한들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속도였다.

“저… 저게… 무어… 지?”

마인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동료에게 물었으나 동료라고 해서 딱히 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직은 그들에게 내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으니까.”

진건곤은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스스로에게 말을 하듯이 혼잣말을 하였다.

진건곤은 애초에 자리 잡았던 곳으로 돌아와 구체를 풀어내었다. 대원들은 구체에서 떨어져 내리며 모두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진건곤의 손이 다시금 흔들리자 그들은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스르르 풀려 나갔다. 마혈을 풀어주고 수혈을 짚었던 것이었다.

모두가 잠이 들고 말았다.

“아함……!”

아침 해가 떠오르자 태양을 정면에서 보고 누워 있던 정찰대원 중에 하나가 눈을 떴다.

“이런……! 소호장님. 소호장님.”

얼른 관 소호장을 깨웠다. 깨우는 건 관 소호장이었지만 그 소리에 모두가 벌떡 눈을 뜨고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정찰 중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모두가 잠들었던 게냐?”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관 소호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저… 강시가…….”

“나도 강시가…….”

“나돈데?”

저마다 꿈속에서 강시를 보았다는 말을 꺼내었다.

부르르르!

강시라는 말에 관 소호장은 자신의 몸이 진저리치는 것을 느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현듯이 처절한 공포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 저… 소호장님. 머… 머리가……!”

막 조장이 입을 열다 말고 갑자기 놀라는 눈초리가 되었다. 대원들의 눈이 모두가 관 소호장을 향했다.

관 소호장의 머리가 새하얗게 백발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공포가 극에 달하면 어느 한순간 백발이 되는 수가 있다고 했는데 관 소호장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모두가 꿈으로만 알고 있던 그 일이 관 소호장에게만 현실이었는지 몰랐다.

관 소호장의 눈이 진건곤을 향했다.

진건곤의 지긋한 눈초리가 관 소호장에게 확인이라도 해주듯이 힘 있게 번뜩였다.

‘하하하! 무슨 소릴. 장난 한 번 쳐본 걸 가지고… 재미없었소?’

관 소호장의 머릿속에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이 떠올랐다. 관 소호장은 자신도 모르게 진건곤의 눈초리를 피했다.

그 후로 관 소호장은 진건곤을 볼 때마다 멀리서 돌아갔다. 진건곤의 앞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니 오히려 막 조장과 상 소호장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다.

상 소호장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자 진건곤은 한마디를 하였다.

“장난 한 번 쳐보았는데 저 친구는 재미가 없었나 보더군.”

또다시 봉화가 피어올랐다. 내용을 본 부장의 보고를 들은 좌오장군이 맹주를 찾았다.

“또 마교가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소이다. 이젠 갚아줄 때가 됐지요?”

좌오장군도 그간 소문으로만 듣던 고수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고대하던 승전보를 울릴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꽉 차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이제는 사뭇 다른 양상이 펼쳐질 것입니다. 인사 나누시지요. 이분이…….”

맹주는 좌오장군에게 새로 온 고수들을 소개하였지만 그 인사는 끝까지 가지 못하였다.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북소리를 울려라!”

부장이 소리를 치자 북소리가 울렸다.

둥둥둥둥둥! 둥둥둥둥둥!

무림인들을 지휘하는 것은 무림맹주와 총군사인 제갈세가주의 권한이었는데 부장이 월권을 행한 것이었다.

제갈세가주는 못마땅한 얼굴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여 허락의 뜻을 보냈다. 총군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천의 수호대가 앞으로 나아갔다.

“원시천존!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들도 노사님들이 오신 것을 모르지 않을 터, 노사님들의 존재를 알고도 저들이 이렇게 빨리 싸우자고 나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허허! 역시 군사시오. 조심하리다.”

“걱정 말게. 안 그래도 무슨 꿍꿍인지 궁금해했으니 조심하도록 하지.”

제갈세가주의 말에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고수들, 역시나 노회한 고수들의 생각은 노련하기 짝이 없었다.

맹주가 읍을 하며 공손히 말하자 은거고수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각기 자파의 고수들이 있는 곳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그 짧은 순간에 펼쳐진 경공은 일반 사병들로서는 상상도 해보지 못하던 대단한 것이었다.

“와와와와와! 최고다!”

그들의 뛰어난 경공을 보자 사병들이 감탄하며 지른 함성이었다.

“사조님을 뵙습니다.”

절검은 그저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을 뿐이었는데 사문의 제자들은 격양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사제의 복수를 할 수 있겠습니다. 부디 사제의 원혼을 달래 주십시오.”

화산을 대표하는 고수로 전장에 나왔던 운진과 운장, 운행 등은 자신들의 사제인 운소를 잃고도 복수를 하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함을 통감하고 있었다.

마침 절검과 무영, 무진, 무상 등의 문파 내 최고 고수들이 오자 그들은 사제의 원혼을 풀어줄 마음으로 가득 차올랐다.

“어째 운소가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너희들이 고생이 심했겠구나. 이제는 명복을 빌어주자꾸나.”

운진, 운장, 운행 등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다른 파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아 대부분의 정파에서는 이제야 동료의 원한을 달래주겠다며 결연한 각오를 피워내고 있어 보기만 해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달려온 마교의 무리들은 그런 기세에는 아랑곳이 없었다.

“크하하하하! 체면도 없는 버러지들! 이번에도 싸우는 척만 하고 도망갈 것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도망갈 것인가? 나와라 땡중!”

멀리서 다가오는 신교의 무리들 중에 철산곤마가 앞장서서 소리를 지르며 정파의 무인들을 자극하였다.

“아미타불! 네 이놈! 네놈이 무서워 물러선 것이 아니다. 오늘은 끝을 보아주마.”

굉각의 음성에 노기가 흘렀다.

굉각은 그동안 이천수호대의 수장으로 진퇴를 결정하였으나 오늘을 달랐다.

이제 수호대의 진퇴를 결정할 자는 본산에서 나온 장로에게 넘어갔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싸움에 임할 수 있었다.

“크하하하하! 고루한 땡중이 이제야 마음을 먹었나 보구나!”

철산곤마의 곤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뿌옇게 흐려졌다. 마교의 무리들 중에 철산곤마 홀로 앞으로 쭉쭉 뻗어 나왔는데 굉각도 홀로 앞으로 나섰다.

그도 역시 공력을 끌어올려 선장에 아지랑이를 피우며 앞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철산곤마의 곤은 짧게 끊어 치듯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여러 개의 곤영을 만들어내어 벽을 둘러치듯 하였고 굉각의 선장은 허공을 크게 휘돌리더니 나아가던 기세를 담아 창을 찔러가듯이 곧장 찔러 갔다.

그 기세가 천신들의 것처럼 무섭고 당당하여 삼십여 장 뒤에서도 그들의 기세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꽝! 꽈드드드등!

곤과 선장이 부딪힌 곳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리고 힘을 주체하지 못한 경력이 터져 나왔다.

흙먼지는 용권풍에 휘말린 듯이 삽시간에 꼬리를 말아 올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와와와와와!”

철산곤마는 굉각의 선장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주르륵 물러나 신형을 바로 잡았다.

그 장명을 본 정파의 무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대로 앞으로 달려 나가 각기 상대를 마주해 도검을 쳐 나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삼천여의 무인들이 얽히고 도검의 빛이 번쩍였다. 대지는 그들의 격돌을 견디지 못하고 흙먼지가 피어 올려 고통을 표하는 듯했다.

“과연 오늘은 다르구나. 하지만 나라고 해서 숨겨놓은 것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겠느냐?”

천산곤마는 이제껏 사용하던 곤을 두 손에서 그대로 떨어트렸다. 대신 등 뒤에 차고 나온 도를 뽑아 들었다.

그의 몸에서는 붉은 기운이 어리더니 광폭한 기운이 제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의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 힘은 살기가 되어 주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제 바로 내 본신지공이지. 크하하… 흐흐흐… 흐으으… 크르르르……!”

광룡진천류 다른 말로 광룡살검. 광룡마도! 보다 더 진실한 이름은 염정간옥의 검이 나온 것이었다.

철산곤마가 광룡진천류를 풀어낸 것이 신호였을까? 대부분의 마인들이 저마다 사용하던 병기를 버리고 등 뒤에서 도를 꺼내어 들었다.

강시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자들이 모두가 광룡진천류를 든 자로 변했다.

삽시간에 전쟁터는 살기가 넘실대는 지옥의 한 곳이 되어 버렸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지독한 살기가 장내를 지배해 버렸다.

“크르르르……! 크르르르……!”

굉각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마교의 인물들은 모두가 이성을 잃고 살욕에 휘둘려 질펀한 살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크르르르!”

경고와 같은 소리가 들려오고 철산곤마의 손에서 도가 움직였다.

후웅! 후우우웅!

굉각은 경각심을 가지고 철산곤마의 도를 피했다. 그의 도가 훑고 간 자리에는 지독한 기운이 흘렀다.

그것이 무언인지 알 수 있었던 굉각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바로 주인의 이성까지 먹어 치워버린 탐욕스러운 광룡진천류가 가지고 있던 살욕이요, 살기였다.

철산곤마는 마인이라고는 했으나 광기에 빠지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이지마저 흩어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미타불! 번뇌에서 벗어나게 해주겠소.”

쩔그렁!

굉각은 피하기 위한 자세를 풀어버리고 선장을 앞으로 내세우며 철산곤마의 도에 맞섰다. 그가 이지를 상실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하는 굉각이었다.

“크르르르……!”

붉은 기운이 도를 감싸고 휘둘러지자 마치 붉은 천이 허공에 펼쳐지듯이 궤적을 그렸다.

선장에는 우윳빛의 짙은 안개가 모여들며 붉은 천을 꿰뚫는 듯하였다.

까드드드드등!

“으으윽……!”

굉음! 그리고 터져 나오는 신음과 선혈이 있었다.

쿵쿵쿵!

이번에는 굉각이 뒤로 물러서며 신형을 고추 세웠으나 이미 그의 입에는 선혈이 토해졌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크르르르……!”

철산곤마의 살욕으로 번득거리는 눈에 한줄기 득의의 기쁨이 스쳤다.

붉은 기운이 넘실대는 운무를 만들어 내며 굉각의 목을 베어내는 듯했다.

번쩍!

굉각과 철산검마 사이에 청색의 검광이 번쩍이듯 스치고 날아갔고…….

툭!

방금까지만 해도 승리의 기쁨으로 으르렁거리던 철산곤마의 목이 굴러 떨어져 내렸다.

굉각이 급히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검선이 있었다. 검선의 이기어검이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이었다.

“크아아악!”

“으……!”

갑자기 강해져 버린 마교의 무공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자들이 많았다.

검선은 이미 수많은 무인들의 방수가 되어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 주느라 굉각에게 눈길을 줄 수가 없었다.

이천수호대와 마교의 일천의 강시와 마인들로 인해 장내는 피아를 가릴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된 지 오래였다.

“아미타불!”

굉각은 뒤로 돌아 서며 불호를 외우고는 또 다른 상대를 찾아 앞으로 나아갔다.

정파의 무인들은 광룡진천류로 갑자기 무공이 상승해버린 마인들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많은 수가 죽어버렸다.

많은 은거고수들이 나서서 정파의 무인들을 보호하고 있었건만 한계가 있었다.

무려 삼천의 무인들이 뒤섞여 버린 아수라장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파의 고수들을 돌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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