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독룡-43화 (43/61)

제2장

“어서 오시지요. 많이 기다렸습니다.”

운현과 함께 화산으로 돌아온 진건곤은 인사를 받으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으로 무언가 감추는 것이 있다는 느낌이었을 뿐이었다.

진건곤은 자신의 느낌을 믿었다. 산문을 통과해 들어가며 일행에게 입을 열었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운현은 특유의 무뚝뚝함을 지키고 있었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여 알겠다는 표시를 했고 소군도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문을 지나 너른 공간으로 나서자 화산의 장문과 무장, 무영 등이 모두 나와 있었다. 그리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진건곤의 일행이 앞으로 나아가자 그들의 일부가 말없이 자리를 움직여 진건곤의 일행을 감싸는 듯하였다.

[포영수합이라는 진법이구나. 방어진으로도 쓰고 포획용으로도 쓴다. 연유를 모르겠구나.]

운현의 전음이 진건곤과 소군의 귓가로 울렸다.

“백자를 보내기를 잘했지요?”

소군의 말에 진건곤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오. 누님. 사문에 올 때마다 이런 꼴이구려!”

그들의 말을 들은 무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흥! 사문이라는 소리 일랑 말거라. 마교의 주구들이 화산을 그리 칭하는 것은 화산에 대한 모독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마교의 주구라니?”

운현이 알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자 무장은 더욱 기가 막힌다는 듯이 굴었다.

“흥! 환천삼보를 찾으러 가서 한 일이 세상에 퍼진 지 오래거늘. 너는 이미 화산의 악도로 선포된 지 오래다. 죄인은 스스로 마혈을 찍고 죗값을 받아라!”

무장이 소리를 높였고 운현도 역시 그 일에 대해서는 당당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네 이놈! 환천삼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환천삼보를 찾으러 간 정파의 명숙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사라졌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보았거늘 죗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오해입니다. 저는 고루마군의 술수에 걸려들었던 것뿐입니다. 이들이 저의 무고를 증명해 줄 것입니다.”

운현이 진건곤과 소군을 보자 둘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였다.

“흥! 지금으로서는 네놈의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 스스로 마혈을 짚고 포박을 받아라! 네놈의 말이 사실인지 여부는 마교를 잠재우고 나서야 결정하겠노라. 마교의 척결이 더욱 중요하니 말이다.”

‘마교와의 싸움이 끝나고 나서 결정하겠다.’라는 말은 무장이 미리 준비한 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에 선후를 두는 것 같지만 마교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정식으로 개파를 선언한 후이니 마교와의 싸움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약 없는 약속에 불과했다.

“사형! 운현의 신변은 제가 보장할 테니 그냥 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진건곤, 아니 화산의 무곤이 나섰다. 그러나 오히려 무장의 눈빛이 더욱 싸늘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던가?

“흥! 네놈도 스스로 혈을 짚고 포박을 받아라. 운현이 죄를 지었건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이제야 돌아오다니 네놈도 역시 수상하다 운현과 함께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흥! 화산의 대장로께서는 본녀를 너무 업신여기시는 것이 아닙니까? 본녀의 서방님을 그리 대우할 수는 없습니다.”

무장의 언행을 보다 못한 소군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장의 언행은 거침이 없었다.

“본문의 일이요. 외인은 참여할 수가 없소이다.”

“본녀가 그들의 행적을 증언할 것이에요. 증언을 듣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에 내외가 있을 수는 없지요.”

“하지만 검후께서는 이미 무곤과 인연이 있으니 공정한 증언이라고 생각할 수 없소이다. 마교의 일이 마무리가 된 후에 공정하게 조사를 할 테니 그동안만 참회동에 있으면 될 일이외다. 검후는 더 이상 화산의 일에 나서지 말아주시오.”

“광오하군요. 화산은 운현사부와 서방님 같은 고수를 빼고 마교와 싸울 수 있다는 건가요?”

“화산에도 고수는 충분히 있소이다. 죄가 있고 없음을 명확히 하지 않은 자를 전장에 세울 만큼 곤궁하지는 않소이다.”

“서방님이 없어도 된다니. 참으로 광오하군요. 본녀는 화산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정말 대.단.한 화산이로군요. 단언컨대 화산은 서방님의 진실한 무위를 모르고 있어요. 그리고 적들의 무위도 전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시와 고루마군, 수라비도. 대무 등의 이야기라면 충분히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소군이었다.

하지만 이미 무장은 운현과 진건곤을 가두기로 작정을 한 상태이니 그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화산에는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운현은 스스로 장파의 무인들에게 한 짓이 있으니 조사를 받으려 했으나 진건곤을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건곤이 마저 이대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 내 악연은 이대로 끝을 내야 한다. 또 다른 고리를 만들 수는 없어. 운회와 운기와 같은 희생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

운현은 운회와 운기를 떠올렸다.

무장의 뜻에 반기를 들고 자신을 따르던 사제들이었는데 그들은 운현과 함께 무리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결국에는 죽어갔던 것을 떠올렸다.

그 일을 겪고 난 뒤, 이미 화산을 떠나고자 마음을 먹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흥! 또다시 나를 핑계로 무곤 사숙을 핍박할 생각이오? 운기와 운회가 당신의 계략 속에 죽었소이다. 내 이미 그때 화산을 떠났었거늘… 다시 돌아오지 않아야 했는데… 십 년이 지났건만 더러운 짓거리는 그대로구려.”

운현이 더 이상 무장을 사문의 어른으로 여기지 않고 반공대로 그를 대했다. 그런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운현! 역도가 되려는 거냐?”

“저런! 저런! 원시천존! 원시천존!”

하지만 이미 운현은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작정했는지 공력을 실어 음성을 올렸다.

“십오 년 전, 운회와 운기를 데리고 회양의 적사삼목을 처단하라는 명을 받고 떠났소. 그곳에는 적사삼목만 있는 것이 아니었소. 적사삼목은 물론 탈혼수도 역시 같이 있었소. 그 당시 나의 무위는 절정이라고는 하였으나 탈혼수를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봐야 하오.”

“무슨 소리냐? 여봐라! 역도의 소리를 들어줄 이유가 없다. 일대제자와 장로들은 역도를 포획하거라!”

무장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스릉! 스릉!

일대제자와 장로들이 검을 뽑아 들자 검명이 울리고 검광이 번쩍였다.

하지만 아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장의 심복인 무진조차도 검을 빼 들었지만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을 뿐이었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웅!

백색의 광휘를 뿜어내는 검 한 자루가 요란한 검명을 울리며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렁이는 듯한 백색의 검광! 스스로 검명을 토해내며 허공에 우뚝 서 있는 모습! 누가 보아도 살아 있는 검이었다.

“이… 기… 어검……?”

“이기어검!”

누군가가 신음처럼 흘려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진건곤이 펼쳐낸 이기어검이 광휘를 발하며 화산의 모든 무력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기어검이야말로 천하제일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기어검을 펼쳐내면 검선의 이름을 얻는다.

무당이 남존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이기어검을 펼쳐낼 수 있는 고수가 출현하는 탓이었다. 많지도 않았다. 몇 대에 걸쳐 하나면 족했다.

화산이 무당과 어깨를 견줄 수 있었던 때는 무당에 이기어검을 펼치는 자가 없었을 때뿐이었다. 그것이 화산이 무당과 어깨를 견주고도 무당에 못하다고 평가받는 이유였다.

진건곤의 손에서 펼쳐진 이기어검은 진건곤이 화산 역대 최강이라는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었다.

소군이 했던 말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진건곤의 무력을 제외하고 마교와의 싸움에 나설 것이냐?’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꾸울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만큼 정적이 흐르고 그 위로 운현의 말소리가 흘렀다.

“그곳에 도착하여 알아본 즉, 탈혼수가 적사삼목을 수하로 삼고 데리고 다닌 지가 이미 반년, 탐조각에 알려져 화산의 본산에 정보가 알려진 사실이더구려. 그런데도 화산에서 보내진 것은 고작 나와 운회, 운기가 전부였소. 운회와 운기는 전부터 내게 할당된 임무가 너무 어렵다고 해서 나를 돕겠다고 나선 제자들이었으니 그들이 껄끄러웠는지도 몰랐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손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사지(死地)로 보냈소?”

“흥! 결국 네놈을 살아 돌아오지 않았더냐? 그리고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을 판단하는 것도 네놈의 몫이 아니더냐?”

둘 사이의 언쟁이 오고가자 화산의 문도들은 전부다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당시의 무공으로 보아 죽음의 올가미라고 생각될 만한 임무를 시켰을 줄이야.

“그곳에서 친구들을 만났소. 단리세가의 단천! 월영문의 월풍! 남궁세가의 남궁기! 구양세가의 구양혜린! 이 이름들을 들으면 생각나는 것이 없소?”

운현이 잠시간의 틈을 주자 일부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무장은 얼굴이 붉어졌다.

“모두가 세가의 서자들이었소. 그것도 후기지수로 손꼽히는 자들이었소. 후계자들의 위치를 흔들 수 있을 만큼 뛰어난 후기지수들이 모두가 그곳에서 얼쩡거리고 있었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소.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죽기로 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소. 적사삼목을 잡으러 온 것이 탈혼수에게 죽으러 온 것이라는 것을 말이오. 그래서 우리는 하나가 되었소. 절정의 초입에 든 우리들로는 탈혼수 같은 고수 중의 고수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은 뻔히 아는 데도 하고 싶어지더구려. 가슴에 불길이 타올라 걷잡을 수가 없더란 말이요. 그래서 다 같이 싸웠소.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소. 방심했던 탈혼수에게 다섯 명의 목숨을 바치고 탈혼수의 다리를 찌를 수 있었소. 그렇게 하고도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자는 오직 하나 나밖에 없었소. 부상을 입고도 고수는 고수더구려. 남궁기가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눈을 가려준 사이 겨우 탈혼수를 벨 수 있었소. 난 그들의 원한을 짊어지고 그곳을 나왔소. 탈혼수가 가지고 있던 가일구층황금공, 광룡진천류. 그 두 가지를 얻었소. 그리고 그곳에서 잃은 것은 운회와 운기의 목숨. 그리고 화산에 대한 믿음이었소이다.”

운현의 눈에 처연한 기색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 눈길이 다시금 무장을 향했다.

“운회와 운기를 죽여야 할 정도로 나를 죽이고 싶었소?”

운현의 음성에는 지나치게 차가운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아마도 과거를 회상하며 화산에 대한 감정을 모두 버렸을 것이었다.

“흥! 나를 탓하지 마라. 그 임무의 책임자는 네가 아니었더냐? 물러섬도 역시 네가 결정해야 할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정상이 아니었소.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임무를 여러 번 반복한 탓에 죽어버릴까 싶었단 말이오. 그게 다 당신의 덕분이었다오.”

무장의 말에 또다시 웅성거림이 일었다.

“흥! 네 스스로 의지가 약해 벌어진 일이다. 여하튼간에 마교와의 싸움이 끝난 뒤에 너에 대해 조사를 할 것이다. 스스로 마혈을 짚어 포획을 받아라!”

“싫소이다. 나를 핑계 삼아 이제는 누구를 잡을 생각이요? 나는 이제 화산을 나갈 것이요. 그간 화산에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하니 화산의 심판 따위는 거부하고 말 것이오. 청명과 함께 화산을 떠나겠소. 화산의 무공은 그대로 봉인할 것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책임을 물어도 좋소이다.”

운현은 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그런 그를 막아서는 자가 있었다.

바로 운령. 화산의 장문인이었다.

“그것은 안 될 말. 포획을 받으시오, 사형.”

장문의 말에 운현이 짧은 말을 던져 놓고는 한동안 눈을 감더니 다시 눈을 떴다.

“너마저 나를 핍박하려 드느냐? 너는 변한 줄 알고 있었거늘.”

“사정이 있소이다. 사형을 가만히 둘 수 없는 사정말이오.”

장문의 사정이 있다는 말에 하마터면 ‘무엇이냐?’고 물을 뻔했다.

“아니다. 이미 마음이 정해졌다. 이대로 화산을 벗어나 살아갈 것이다.”

“그것은 아니 될 말이요.”

[마교가 발호하였소. 청명의 생모인 백이현이 마교에 관련된 것 같소이다. 그것이 사형과 청명을 그냥 놔둘 수 없는 이유요.]

백이현!

운현의 부인이자 청명의 친모가 되는 여인의 이름이었다. 활선당의 소가주로 활선당이 마교로 지적을 당하고 멸절당하던 때같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살아 있었단 말이던가?

그 이름이 나오자 운현은 잠시간 몸을 떨었다.

[그녀가 살아 있단 말이더냐?]

운현은 사안의 중함을 알아채고는 전음으로 답을 하였다. 백이현이 마교와 진정 관련이 있다면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화산에게도 운현과 청명에게도……!

[그렇소. 지금 그녀는 마교의 개파에 맞추어 자취를 감추었오. 아마도 마교의 핵심인물이 아닐까 싶소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형과 청명이 더 이상 활개를 치게 할 순 없소이다. 사형이 한 짓은 사형에 대한 의심이 더욱 짙게 되었소이다. 화산은 사형을 그냥 놓아줄 수 없는 일이요.]

[그녀가……?]

백이현이 마교의 주요인사라면 운현의 혐의가 더욱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청명도 역시……!

또다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침묵에 들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사방을 돌려보았는데 무장의 얼굴이 운현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네놈이 별수가 있겠느냐?’라는 표정이었다.

순간 운현의 고개는 가로저어졌다. 무장의 표정이 그를 돌려세운 것이었다.

“떠난다. 나의 무고함은 나 스스로 밝힐 것이다.”

“네 이놈. 가긴 어딜 간단 말이더냐? 네놈이 갈 곳은 참회동이니라!”

운현의 말에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무장이었다.

“청명도 그곳에 있소?”

“그렇다!”

“지은 죄도 없거늘 왜 그곳에 있단 말이요?”

운현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은 참회동을 향하고 있었으니 그 의도는 뻔했다. 청명을 데리러 가는 것.

화산은 과연 고수들이 많았다. 운현이 걸음을 옮기자 포영수합의 진법은 기민하게 그에 맞는 대응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삼엄한 기세가 피어올라 운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운현은 그 압박에 굴하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무엇들 하느냐? 당장 역도를 제압하여라!”

무장의 목소리가 드높았으나 명령권은 장문에게 있는 법. 장문이 손을 들어 제지하니 검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사형! 화산과 맞설 수는 없소이다. 자중하기 바라오.”

“운현아! 너 혼자 화산과 맞설 수는 없지 않느냐?”

무영과 장문은 운현에게 자중을 부탁하였다.

하지만 운현이 계속해서 나아가자 장문도 역시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사형 조심하시오. 포영수합의 진은 운현 사형을 제압하시오.”

장문인의 명이 떨어지자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무진이었다.

‘전날의 수모를 씻어주마.’

무진의 검이 예리하게 운현의 좌수를 훑었다.

카앙!

운현의 검에서 검광이 번뜩이자 무진의 검이 홀로 튀어 오르는 듯했다.

‘크윽! 더 강해졌구나.’

무진은 오늘도 역시 수모를 갚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그 야산의 한 자락이 아니었다. 바로 화산이었다.

‘넌 질 수밖에 없다. 여긴 화산이니까.’

오른쪽에서 또 다른 검이 나와 운현의 손을 어지럽혔다.

카가가가강!

순식간에 여러 개의 소성이 울리고 불똥이 피어올랐다. 상황과는 전혀 다르게 매화 향마저 피어올라 제법 운치 있는 느낌이 들었다.

과연 운현은 강자였다.

그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그와 검을 섞은 자들의 검이 튕겨지듯이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법이 운용되는 속도가 운현의 실력에 맞추어 올라가자 운현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물러서시오.”

운현의 몸에서 황금빛의 기운이 넘실댔다.

카앙! 캉! 카앙!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달라졌다. 좀더 높고 앙칼진 소리가 울리자 진법의 모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놈! 그것이 가일구층황금공이렸다? 과연 마교의 주구로다.”

무장은 운현의 몸에서 황금빛 서기가 어리자 운현을 마교의 주구로 몰아가기에 바빴다.

“흥. 하압!”

운현은 대꾸할 값어치도 없다는 콧소리를 내더니 기합성을 울리며 강하게 검을 놀렸다. 진한 살기가 장내에 퍼졌다. 바로 광룡진천류의 한 초식이 전개된 것이었다.

꽈드드드등!

검과 검의 소리건만 쇠기둥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포영수합의 진법에 아주 작은 틈이 생겨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신형을 뽑아 올린 운현이었으나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무장이 어느새 그곳에 자리 잡고 자색서기가 서린 검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자색의 서기는 자하기공을 운영한다는 증거였으니 화산 최고의 검법이 나선 격이었다.

“네 이놈. 이제는 마교의 무공을 대놓고 사용한단 말이냐? 네놈이 마교의 주구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더냐? 내가 직접 너를 단죄하리라!”

무장은 아예 포영수합의 진법 안으로 뛰어들어 운현에게 검을 겨누었다.

‘이런! 이런! 좋지 않구나!’

[상공!]

진건곤이 상황을 지켜보며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소군의 전음이 들려왔다.

[말려야 합니다. 운현 사부가 무장 대장로에게 검을 겨누었다는 소문이 돌아서는 안 됩니다. 진법을 상대한 것과 사부를 상대한 것은 달라요.]

무장은 운현의 사부였던 사람이었다. 운현의 혼인 문제로 절연을 하였다고는 하나, 그 연원을 따지지 않을 수 없는 법.

운현이 무장에게 검을 겨눈다는 것은 패륜으로 통할 수 있는 길이었다.

스슷!

진건곤의 신형이 흐물흐물해지는가 싶더니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곳은 포영수합의 진법의 한가운데, 정확히는 운현과 무장의 사이에 나타났다.

물론 백색으로 일렁이는 그의 검도 역시 같이 움직였다.

“비켜라! 무곤!”

무장이 진건곤을 부르는 호칭은 달라져 있었다.

진건곤이 부리는 이기어검을 보고는 진건곤을 내쫓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제일의 고수라면 그 용도가 달라도 너무 달라진다.

“그들은 나와 함께 갈 것이외다. 운현 사부도 청명도 내가 데리고 갈 것이오.”

“무곤, 네 이놈! 내가 사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흥! 운현 사부와 청명이 없는 화산이 내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무장은 진건곤이 화산의 이름을 거부할 줄 몰랐었는지 당황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금방 전까지도 화산의 이름이 벼슬이라도 되는 양, 화산에서 쫓아낼 궁리만 하던 무장으로서는 진건곤의 행동이 뜻밖이었는지도 몰랐다.

진건곤의 몸에서 둥근 구체가 생겨나 그 크기가 점점 더 커져 가더니 운현을 그 안에 품었다.

슈앙!

또다시 허공으로 그대로 떠올라 쏘아진 듯이 날아가 버렸다.

“어기충소!”

“어기비행!”

일찍이 해동의 진인 백노신이 보여준 축지법에 비하면 손색이 있는 경공이었지만 화산의 무인들에게 진건곤의 경공은 경이로움의 대상이었다.

화산의 참회동은 그 유서가 제법 깊은 편이었다. 아울러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했는데 화산의 문규는 구파의 어느 곳과 비교해도 엄정한 편이어서 자연히 참회동에 드는 문도도 많았다.

하지만 참회동은 말 그대로 문도들의 참회를 위한 곳이어서 감옥 같이 문을 걸고 강제로 지키는 곳은 아니었다. 단지 죄인들의 식사나 대소변 등의 뒤처리를 위해 두 명의 제자들이 상주할 뿐이었다.

“저… 저것!”

“왜……?”

먼 산을 보고 있던 자가 저 멀리서 날아오는 구체를 보고 놀라 동료를 불렀다.

지척에 있는 동료가 동굴에서 나오는 것보다 진건곤과 운현이 참회동에 도착한 것이 더 빨랐다. 그 뒤로 소군과 화산의 고수들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휘익!

진건곤이 멈추어 구체 안에 서 있던 진건곤과 운현에게는 아무런 영향력도 없었는데 그 뒤로 바람이 불어 참회동을 지키던 자들의 옷깃이 날릴 정도였다.

“사숙을 뵙습니다.”

“사조를 뵙습니다.”

진건곤과 운현을 알아본 제자들의 인사가 이어졌으나 그런 인사를 받을 여유는 없었다.

“청명을 불러다오.”

운현이 입을 열었지만 제자들은 뒤쫓아 오는 사문의 어른들을 보면서 무언가 사단이 났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진건곤은 더 이상 입을 여는 법이 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들어 갔다.

진건곤에게는 동굴의 어둠 따위는 전혀 어려움이 되지 않았거니와 소군을 치유하며 한층 더 높아진 몰아일여의 경지로 청명의 기운을 지체 없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명, 나오너라!”

동굴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음성에 공력을 실어 보내었지만 청명은 나오지 못하고 대답만 돌아왔다.

“지금은 나갈 수가 없습니다. 사조님.”

“나오너라. 장문의 명 따위는 지킬 일이 없다. 이제 우리는 이곳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동굴의 안에서 격동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그래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냐?”

진건곤은 청명을 부르기를 포기하고는 청명이 있는 곳으로 향해갔다.

십여 장을 더 들어가자 벽 쪽으로 작게 파인 곳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 청명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 이런!”

운현의 입에서 분노에 찬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청명의 발에 쇠사슬이 채워진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본디 참회동은 참회를 위한 곳이라 쇠사슬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 곳이었는데…….

청명은 무엇이 얼마큼 중한 죄를 지었기에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인가? 또한 이미 내력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단전이 파괴되어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단전을 파괴하고 쇠사슬을 채웠다니, 말로만 참회동이지 이건 마도의 무리를 가두는 뇌옥이 아닌가?

번쩍!

쿠궁!

일렁이는 백광이 번쩍거리자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발목을 옥죄던 쇠사슬이 떨어져 내렸다.

“청명. 단전은 누가 그랬느냐?”

“…….”

청명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화산이 그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것은 확신에 가까운 사실이었다.

“이… 이… 이런 후안무치한 것들!”

운현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진건곤의 검이 아무리 빠르게 쇠사슬을 잘라냈다고 해도 운현이 그것을 못 보았을 리가 없었다.

또한 자식의 단전이 파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분노가 끓어오르지 않을 리도 없었다.

운현이 분노에 휩싸이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그 빛깔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너무나 빨갛게 된 것이었다. 선홍빛의 핏빛이 되어 흉악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문득 진건곤이 얼굴을 찌푸리는 듯싶더니 오른손이 가볍게 흔들렸다.

운현은 마혈을 찔린 채로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듯 쓰러지는 것을 진건곤이 받아들었다.

“형님?”

청명이 얼른 다가와 운현을 등에 업으며 진건곤의 이름을 불렀다.

“광룡진천류에 사로 잡히셨구나.”

“하아……!”

자신의 몰골이 운현이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분노케 했다는 것쯤은 청명도 알 수 있었다. 청명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해 버렸다.

“화산을 나갈 것이다. 내 곁을 떠나지 마라!”

진건곤의 얼굴에도 분노가 서려 있었다.

운현의 분노는 광룡진천류의 내력을 타고 올라 운현의 이지를 상실하게 할 만큼 격렬하게 올라왔지만 진건곤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그만한 격류쯤은 충분히 다스릴 수 있는 대해 같은 영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진건곤의 몸에서는 둥그런 구체가 일어나고 청명과 운현을 담았다.

“혀…형님!”

진건곤의 몸이 그대로 비행을 하듯이 움직이자 그들의 신형도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에 청명이 놀라고 말았다.

밝은 햇볕이 비추는 입구로 나오자 볕이 아닌 다른 빛들이 진건곤을 겨누고 있었다. 바로 검광이었다.

화산의 고수들이 참회동의 입구를 둘러싸고 펼쳐 놓은 진법이 만든 것이었는데 그 수가 오십을 넘어섰고 예리한 기운이 피어올라 진건곤을 향하고 있었다.

“엄동매화진!”

서릿발이 퍼런 겨울에 피어난 매화처럼 예리하고 삼엄한 기운으로 상대를 베어낸다는 살상진이었다.

화산의 최고수인 절검이 없다고 해도 최고의 고수들이 즐비하게 모여 펼쳐진 진이었다. 그 진법에서 뻗어 나오는 예리한 기운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었는데…….

“아……!”

청명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경탄성을 금치 못했다.

진건곤이 만들어낸 구체에 들어있는 청명은 아무런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엄동매화진으로 만들어진 살기가 구체를 뚫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진건곤의 무공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네 이놈! 네놈이 화산의 죄인들을 빼돌릴 셈이더냐?”

또다시 이어지는 무장의 목소리에 진건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당신인가? 참회동을 뇌옥으로 쓴 인간이?”

진건곤은 더 이상 사문의 배분 따위를 지키지 않았다. 그 모습에 무장은 움찔하고 말았다.

‘저놈은 이기어검을 부린다!’

두려움이 일었지만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니 그야말로 화산의 전력의 대부분이 모여 있지 않은가? 다시금 어깨를 피고 진건곤을 보았다.

“흥! 이제는 위아래도 없는 모양이구나. 그게 네놈의 본색인 게냐? 네놈을 징… 헉……!”

일렁이는 빛이 쏜 살처럼 자신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급히 몸을 날려 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화악!

무장의 상투가 잘려나가고 많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퍼지듯이 퍼트려졌다.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했던 것이었다.

“흥! 이것도 피할 수 있을까?”

허공에 일렁이는 백광이 또다시 무장을 향했다가 모습이 사라졌다.

번쩍!

쩌저저정! 쩌저저저정!

투화확! 투확!

굉음이 울리고 불똥과 수많은 검광이 연쇄적으로 허공을 번쩍이며 현란한 빛을 만들어내었다.

엄동매화의 진법을 구성하고 있던 고수들의 검이 진건곤의 검을 막아 갔지만 진건곤의 이기어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 일렁이는 빛을 막아선 검들이 모두 산산조각으로 터져나가며 허공에 번쩍이며 수놓은 것이었다.

“허!”

“원시천존!”

“운 자 배는 뒤로 물러서라.”

장문은 검을 들고 진법에 들어서며 명을 내렸다. 무 자 배 이상으로 늙은 고수들만이 그 자리에 남은 채로 물러섰다.

진법에 참여한 고수의 수는 줄었지만 엄동매화진이 뿜어내는 기운은 더욱 정순해지고 예리해져 그 의지만으로도 사람을 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진건곤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흥! 화산은 나서지 마라. 무장의 눈 하나를 뽑아 징치하리라!”

화산은 나서지 말라 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저벅! 저벅!

엄동매화진의 삼엄함 속에서도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진건곤이었는데 엄동매화진이 그 모습을 변하며 무장을 감싸고 삼각형의 모습으로 변하는 진이 되어 버렸다.

우우우우웅!

일렁이는 백광이 서린 이기어검이 어느새 진건곤의 앞에 서서 스스로 회전하며 맹렬한 기세로 힘을 웅축하고 있었다. 그 힘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검명을 토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숙! 이게 무슨 짓이오? 진정으로 화산을 버릴 셈이오?”

장문인은 자색의 서기를 끌어올리며 진건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흥! 참회동에 머무르는 제자가 어찌 뇌옥에 갇힌 마두들과 같은 대접을 받는가? 그런 화산이라면 필요가 없지.”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진건곤의 검이 노한 듯이 더욱더 크게 검명을 떨쳤다.

“사숙! 절검 사조님이 있지 않소? 화산을 버릴 수 있겠소?”

절검이라는 말에 일렁이는 백광이 회전을 멈춰 서고 말았다.

“흥! 그러니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게 아니라면 이미 네놈들을 모조리 베었을 것이야. 청명은 단전이 깨어졌거늘 겨우 눈 하나를 받아내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이리 나서는 것이더냐? 사부님도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진건곤은 말을 마치며 검결지를 지어 무장을 가리켰다.

번쩍!

황급히 몸을 던져 무장을 보호하고자 하던 고수들이 많이 있었지만 진건곤의 검은 그들의 틈새를 모두 뚫고 들어갔다.

무장에게 스스로 살아 있는 듯이 움직이며 다른 고수들의 검을 피하는 이기어검의 민활함은 뱀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악한 뱀의 대가리가 자신을 노리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공포가 온몸을 싸늘하게 식게 만들었다. 일순간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아……!”

그야말로 순식간에 검림을 뚫고 온 검이 무장의 눈을 향해 박혀들 찰나였다.

화악!

또 다른 백광이 허공을 물들였다.

그물처럼 얽혀드는 백광이 진건곤의 검을 얽어매었다.

[가거라! 그들은 화산에 있는 한 광명을 얻을 수 없을 인연이구나.]

순간, 진건곤의 눈이 감겨지며 검결지가 풀렸다.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그 음성은 바로 절검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진건곤은 무장의 왼쪽 숲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읍을 하였다.

“부디 강녕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진건곤의 몸에서 또다시 구체가 생겨나고 그 안에 청명과 소군이 들어섰다.

후우웅!

진건곤이 눈앞에서 사라지듯이 쏘아져 나가져 그 빈자리에 바람이 일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나서서 진건곤을 막아서지 못했다. 그저 그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는 듯하였다.

진건곤이 장내에서 사라지자 모두의 시선이 숲을 향했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기어검을 받아낼 만한 고수라면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기에 아무도 입을 함부로 열지 못했다.

휘이이잉!

어디선가 또다시 한줄기 바람이 불어 도인들의 몸을 식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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