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진건곤은 서둘러야만 했다.
소군의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진력을 돌려 소군의 생기를 잡아두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당장에라도 숨을 거둘 것처럼 생기가 약해져 있었다.
소군을 구하기 위해서 운현을 챙겨 줄 시간도 없었다. 모든 것이 소군을 위해 움직여야만 했을 만큼 소군의 상태는 심각했었다.
진건곤이 처음 향한 곳은 사천당문이었다.
독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에 필적할 만한 의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역시 사천당문은 독의 대가. 분명히 사천당문에는 일반의가에서도 따를 수 없는 의술이 있었다.
지리적으로도 십만대산은 운남성에 있지만 사천성의 경계에 맞닿아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언 듯 보기에는 진건곤의 선택은 틀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처음 생각한 대로 계속 달릴 수가 없었다.
“으… 으… 으……!”
소군은 의식이 없으면서도 신음을 토해내었다. 소군에게 진력을 주입한 후로는 처음으로 나온 소리다.
새로운 변화였는데 역시나 나쁜 쪽이었다.
소군의 상태가 더욱 안 좋아졌던 것이다.
진건곤은 가던 길을 멈추고는 주위를 살펴 평평한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허공에 소군을 띄워 놓고 그녀의 단전에 손을 얹었다.
소군의 내력은 거대했으나 선천지력은 이미 다 흩어져 있었다. 아주 작은 실낱같은 생기만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도 진건곤의 진력이 붙잡아 놓은 것이 전부였다.
진력을 주입하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건곤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려 소군의 뺨을 적셨다.
그것을 알았을까? 소군의 눈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하지만 그것뿐.
아무리 안타깝게 보아도 더 이상의 반응이 없었다. 또다시 눈물이 흘러 소군의 뺨을 적셨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누… 님……!”
자신을 살리려고 목숨을 내어 놓은 소군이었다. 진건곤은 소군이 이대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절대로 볼 수는 없었다.
진건곤은 현천기공을 극성으로 운용하며 진력을 소군의 몸에 밀어 넣었다.
자신의 가슴에 생겼던 몸을 회복시켰던 진력이라면 소군의 상처도 회복시킬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일에 불과했다.
소군의 상태는 너무 엄중했다. 그녀의 신체는 이미 삶을 포기했는지 기맥이 흐르는 것도 아주 쇠잔해져 있었다.
의식이라도 있어 그 진력을 받아 운용한다면 몰라도 이렇게 의식을 잃고 있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진건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녀가 의식을 차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꽝!
“빌어먹을! 영력이라니! 그토록 조심을 했건만……!”
귀제갈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서탁을 내려칠 수밖에 없었다.
항상 귀제갈에게 소식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던 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반응을 본 것은 참으로 드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고루마군이 그리 말했더냐?”
“그렇습니다.”
재차 확인한 귀제갈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서렸다.
“지금 가지고 있는 강시의 수는 알아왔느냐?”
“일반 강시가 칠백열두 개, 가의단공으로 당장에라도 만들 수 있는 자가 삼십 개입니다.”
“아깝구나. 아까워! 그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다니! 십수 년 간을 모산파에 영력을 지닌 자가 들지 못하게 했거늘……!”
옥주궁파에 들어야 할 인재들을 중간에서 가로챈 것은 바로 귀제갈의 짓이었다.
모산파는 영력을 사용하여 제마를 행한다.
강시는 무공을 지니고 싸우는 자들에게는 아주 강했지만 영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단지 제마의 대상일 뿐이었다. 모산파가 나선다면 그들이 준비한 가장 강력한 무기인 강시들이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할 것이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영력을 지닌 자들을 따로 모아 오히려 신교의 가르침을 전하며 그들의 사람으로 만들어 두었다.
고루마군의 강시들이 선봉에 선다면 무림의 고수들을 막을 수 있는 힘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계획을 모두 송두리째 날려 버릴 만큼 뛰어난 영력을 지닌 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도 바로 악연이 이어진 진건곤에게서!
“빌어먹을……! 그가 천자(天子)라고 해도 이제는 멈출 수가 없다.”
귀제갈은 이미 황제가 그들의 뒤를 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일어서지 않으면 또다시 신세계를 향해 일어서 보지도 못하고 무너질 판이었다.
귀제갈은 참으로 아쉬운 듯했다. 너무나 아쉬워서 마치 고통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는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눈을 떴다.
“분명 검후가 치명상을 입고 당장 죽을 것 같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전진자는 지금 보이지 않는단 말이고?”
“그렇습니다. 워낙에 빠르게 사라진 터라 흔적조차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서둘러야겠구나. 강시가 없다면 우리에게 승산은 없다. 전진자가 소군의 치료에 전념하는 동안 대세를 결정지어 놓아야 한다. 모든 세력을 집결 시켜라. 정확히 열닷새 후에 운남 만독곡에서 신새벽이 울렸다는 것을 선포한다!”
“드… 디어!”
사내는 벅찬 표정으로 달려 나갔다. 그토록 기다리던 일이 드디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아주 흉한 소문이 돌았다.
구파일방 중의 하나인 화산의 운현이 정파의 무인들을 해치고 환천삼보를 독식하려고 했다는 소문이었다.
수백 수천의 무림 방파 중에 명문 중의 명문이라는 구파일방이었다. 세속의 명리를 초월했다고 알려진 구파일방이었는데 그곳에 도의를 져버린 악도가 나왔던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구파일방의 사람들에게 검을 휘두른 자가 바로 화산의 운현이었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그 소문의 근원지가 곤륜과 청성, 황보세가이고 전혀 근거가 없는 소문은 아니라고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화산에까지 전해졌다.
“무곤. 아니, 전진자와 함께 소군까지 없어졌다면 화산에 환천삼보를 가지고 올 일도 없겠군.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던 격이야. 원시천존!”
무장이었다.
무장의 앞에는 화산의 당대 장문인 운령과 무영이 앉아 있었다. 무장이 그 둘을 만나자고 했던 것이다.
무장이 저렇게 말을 꺼낸 것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더욱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어허! 아직도 운현과 청명, 그리고 전진자에게 미련이 있는 것이냐? 진작부터 그 악도를 단죄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지 않겠느냐? 화산의 이름이 땅에 떨어졌어. 원시천존!”
“원시천존.”
“원시천존!”
장문과 무영은 하는 말도 없이 계속해서 도호를 외울 뿐이었다.
하지만 마침 기회를 잡은 무장이 그냥 두고 볼 리는 없는 법.
“허허! 장문과 사제는 도호만 외워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합당한 조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는 이번 일로 운현과 무곤을 참회동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악도들을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울러 청명으로 하여금 참회동을 관리하게 하면 그들을 잘 보살피지 않겠느냐?”
‘청명에게 참회동이라……! 허허! 원시천존.’
무영은 기가 막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장문도 무영도 아무 소리를 하지 못하고 묵묵히 있었다. 무장의 마음이 저리도 편협하니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듯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무장은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자 결론을 내듯이 말을 했다.
“내 말에 반대한다면 손을 들어보게. 반대하는 자가 없다면 내 조치를 하도록 하지!”
무장이 행동에 나서려 하자 장문이 다급하게 나섰다.
“조금은 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림과 무당이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소리를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거짓과 진실을 구분할 능력이 있는 자들이 아닙니까?”
“흥! 그럼 청성과 곤륜, 황보세가는 눈 먼 장님이라는 것이냐? 그들은 상처 입은 제자와 장로가 있지 않느냐? 청명으로 하여금 참회동을 지키며 스스로 무공을 돌아볼 기회를 주자는 것이야. 만에 하나 후일 운현의 무고가 밝혀진다면 청명을 다시 중히 쓰면 될 일이 아니더냐? 지금과 같은 시기에 청명이 앞장서서 일을 할 순 없지 않느냐?”
장문이 나서서 소림과 무당을 언급하자 무장도 역시 살짝 물러서는 듯한 발언을 하였지만 결국에는 청명이 인질이 되고 화산의 일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 말이었다.
“허어! 왜 말들이 없는가? 그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장로원에서 그 일을 결정할 것이야. 원시천존!”
무장은 제멋대로 도호를 외치며 방을 나섰다.
“허허!”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는 장문이었다.
“허허허!”
답답하기는 무영도 마찬가지 한숨을 늘어놓기도 마찬가지였다.
“크… 크… 큰일입니다.”
무진이 들어와 놀란 얼굴로 소리를 쳤다.
“무슨 소란이냐? 장문과 대화를 하고 있거늘!”
무진은 손에 든 서찰을 앞으로 내밀고 무장은 그것을 받아 폈다.
‘허허! 원시천존! 장문이 눈앞에 있거늘 중요한 소식을 사형에게 전하다니……!’
무진의 행동이 눈에 밟히는 무영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곧 잊고 무영도 역시 흥분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바로 무장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도 역시 눈을 홉뜨고 무진처럼 평생에 다시없을 큰일을 치른 표정이 되어 버렸다.
무장은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서찰을 장문에게 올렸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또다시 장문조차 똑같아지고 말았다. 서찰을 받은 장문조차도 도호를 연방 외워야 할 정도의 큰 일이 벌어진 것이란 말인가?
장문이 전하는 떨리는 서찰 한 조각이 읽기가 너무 궁금해진 무영이었다.
쫙!
무영이 소리가 나도록 펼쳐본 서찰에는 놀라운 사실이 담겨 있었다.
<마교 재림.
운남성 만독곡에 조아로교. 중원의 말로 천지신교를 개파하고 천하를 상대로 포교를 시작한다고 선포한다고 함.
시일은 모월 모일.
-개방>
“원시천존! 이런 일이! 당장 운현을 본문에서 내쳐야 하오. 그와 동시에 청명도 역시 내쳐야 하오. 이것은 대장로의 부탁이 아니라 장문의 장인으로서의 명령이요.”
무장의 입에서 명령이라는 말이 나왔다. 비록 장인이라는 말을 달았지만 일개문파의 수장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장문을 그만큼 업신여긴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저로서도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부로 운현과 청명을 파문하고 화산에서 내쫓겠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운현과 청명을 내친다니요. 장문은 좀더 신중하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장문의 대답에 놀란 것은 무영이었다.
무영이 좀더 신중하라는 말을 하였으나 장문인 운령의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서렸다.
“무영 사숙! 사숙께서는 화산이 사라지기를 바라십니까?”
난데없는 장문의 반문에 무영은 말문이 막혀 아무 답도 하지 못하고 쳐다볼 뿐이었다.
“사숙께서는 모르는 일이 있습니다. 전 화산을 지키기 위해 결정을 내릴 뿐입니다. 저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무영은 장문의 말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장문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장문은 이미 운현에 대한 질시를 털어내고 진정으로 화산을 위해 공존하는 길을 선택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원시천존! 장문이 지금 믿어 달라 하심은 이유를 말하지 못하겠다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사숙! 지금으로서는 안 됩니다.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요. 하지만 원시천존께 맹세코 화산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원시천존!”
장문은 그 이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걱정이 밀려오는 양. 또다시 도호를 읊조리며 마음을 가라 앉혔다.
“이만 나아가봐야 하겠습니다. 이 소식을 발표하고 제자들을 단속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일어서서 나서는 장문의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정신이 혼미해져 길을 나서는 장문을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무장이었다.
“무곤… 아니. 전진자는 어쩔 셈이냐? 그 아이마저 내쳐야 하지 않겠느냐? 화산이 안전해지는 길은 운현의 그림자마저 모두 부정하는 일이다. 어쩌면 화산의 무공이 이미 전부다 마교의 손에 넘어갔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바로 그날. 청명을 안고 왔던 그날. 내손으로 베어야 했거늘……!”
무장의 말에 장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검 사숙조님께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반대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대 장문과 현 장문의 대화에 무영은 끼어들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장로원의 제2인자인 무영조차도 침묵해야 할 일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무영은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장문과 무장, 무진이 모두 나설 때까지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해가 지고 밤이 왔다.
가느다란 초승달은 마치 소군의 웃는 눈과 같았다.
또다시 해가지고 밤이 왔다. 달이 뜨고 지고…….
달의 모양이 차오르더니 보름달이 되었고 다시 소군처럼 웃었다.
그동안 소군은 한 번도 눈을 뜬 적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운현이 제정신을 차렸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진건곤이 소군 때문에 영력을 계속해서 발휘하며 현천기공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운현 안의 시기(屍氣)가 사라지게 해준 것인지도 몰랐다.
모든 사이한 기운을 정화하는 영력이 운현의 몸에 깃든 시기를 몰아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진건곤이었다.
정신을 차린 운현은 진건곤과 소군을 지키며 호법을 섰다.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진건곤의 내공을 가르친 자신이었으니 운공 중에도 진건곤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진건곤은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온 정신을 모두 담아 소군에게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본디 몰아일여의 경지에 들면 주위의 사물이나 동물들과도 정신을 나눌 수 있어 짐승들 스스로 주변을 침범하지 않았다.
진건곤 역시 모든 정신을 소군에게만 쓰고 있었기에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사부님. 고맙습니다. 지금 제가 잠시라도 영력을 멈춘다면 그 순간 누님의 숨도 끊어질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절대로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진건곤의 간절한 마음이 닿았는지 운현도 역시 주위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을 해결하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잔잔한 산중에……!
터엉! 터엉! 터엉!
인적 하나 없는 산중의 깊은 곳에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천하의 어떤 생물도 이런 소리를 낼 수 없을 없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면 모를까.
하지만 진건곤이 있는 깊은 산중에는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는 원시림이었다.
진건곤의 행적이 밝혀졌을 리도 없었다. 고루마군과의 싸움에서 상천의 사용법을 완전히 각성을 해버린 진건곤은 일절 흔적도 없이 허공을 날아 움직였으니 흔적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무언가가 엄청난 울림을 만들어 가며 다가오고 있었다.
스르릉!
운현은 검을 뽑아 들었다.
- 사부님. 가일구층황금공은 안 됩니다. -
진건곤이 하고 싶은 말이 운현의 머릿속에 직접 울렸다.
운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평리에서 환천삼보로 알려진 것들이 인위적으로 배포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운현도 역시 꺼림칙했던 것이다.
운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심법을 떠올렸다. 장문의 자격을 버렸을 때, 그때부터 잊고자 했던 내공이었다.
운현의 몸에 자줏빛 서기가 서리고 그 빛이 은은하게 발산되고 있었다.
쿵! 쿵! 쿵!
뿌지직! 뿌지직!
원시림의 거대한 나무가 부러졌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발에 나무가 부러지고 넘어지며 뿌리가 들어났다.
뿌지직! 뿌지직!
계속해서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지축을 울리는 소리의 주인이 숲의 나무를 뚫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거대한 곰이었다. 이제껏 알고 있던 곰의 두 배는 커 보이는 거대한 곰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 거대한 덩치에 두 발로 선 코끼리의 모습을 하고 두 손에는 거대한 검을 쥔 형상이 서려 있었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 하하하하하! 한동안 살펴보니 네놈 움직이지 못하더구나. 네놈에게 이런 날이 올 줄 몰랐겠지? 하하하하! 오늘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요괴의 왕이 되리라! 내게 이런 행운이 올 줄은 몰랐구나. -
진건곤과 소군의 행적이 요괴와 마물들의 세계에도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모산 옥주궁파의 삼영신군이 죽은 이후 물을 만난 고기 모양, 살판나게 살아가던 요괴들이었다.
허나 불현듯 나타나 전날의 삼영신군보다 더 강하고 더 무서운 무력으로 이름난 요괴들을 단칼에 죽이고 다녔으니 그들의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요괴들 사이에서는 이미 진건곤과 소군을 죽이는 녀석이 요괴들의 왕이 될 것이라는 묵계가 잡혀 있었던 것이다.
“흥! 내 제자에게 누가 손을 댄단 말이냐?”
운현이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오자 곰이 놀랍다는 듯이 운현을 바라보았다.
크어어어엉!
-네놈이 나의 말을 들었단 말이냐? -
그저 자신을 곰으로만 알고 있을 줄 알았던 운현이 자신에게 말을 걸자 코끼리 요괴는 상당히 놀란 듯하였다.
운현도 역시 영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며 놀랐던 것이다.
“흥! 네놈의 말말이더냐? 괴이 하기는 하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더구나.”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하하하하! 설마 네놈도 상천을……? 하하하하하! 그랬군. 그랬어. 상천의 문을 연 자가 아니라 겁 많은 감시꾼이었군. -
“감시꾼이라니?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하하하하! 당당하게 음에도 양에도 들지 못하고 음양의 경계에서 엿보다가 본뜬 방법이니 감시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하하하하하!-
운현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바로 자하기공을 말하는 것이다.
자하기공은 해가 질 무렵의 음양의 경계를 바라보며 그 기공을 만들었기에 음과 양이 교차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요괴의 말은 아마도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리라.
운현은 화산의 무공이 무시받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가듯이 쇄도하며 곰의 거대한 덩치에 검을 찔러 넣었다.
터엉!
곰이 앞발을 들어 검을 때려갔는데 어찌나 날렵한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운현은 검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 모습을 본 코끼리 요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 하하하하! 네놈 정도로는 어림도 없대도! -
“흥! 곰으로 둔갑하더니 둔한 것도 그대로 탁했나 보구나.”
운현의 검을 쳐낸 곰의 앞발에는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송곳으로 찌른 정도밖에 안 되어 무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운현은 코끼리 요괴의 말에 개의치 않고 그대로 쏘아 들어가며 매화분분의 초식을 펼쳐 검기를 쏘아냈다.
크어어어엉!
- 어림없다. 이놈! -
코끼리 요괴가 소리치며 검기를 쳐내자 바위라도 두부처럼 자르는 검기가 그대로 튕겨져 나가며 소멸하고 말았다.
금강동신이라도 되는 듯이 당당하게 앞으로 나오며 운현을 내리쳤다.
운현이 암향표를 펼쳐 그 자리를 벗어나자 바위가 쪼개지고 깨져 그 조각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운현은 그대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곰의 발이 자신의 신법을 잡을 수 있을 만큼 빠르지 못하다는 것과 작은 상처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한 가지 계책을 내었다. 그 후로는 계속해서 암향표를 펼치며 검기를 뿌려가며 코끼리 요괴의 곁을 맴돌았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 빌어먹을 쥐새끼 같으니라고. 게 서지 못할까? -
일 각이 넘는 동안 운현은 검기를 쏘아대며 코끼리 요괴의 주위를 돌아갈 뿐, 직접 공격을 펼친 적이 없었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 빌어먹을!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거라! -
분에 받친 코끼리 요괴가 포호를 하자, 운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대로 앞으로 쳐들어가며 자줏빛이 넘실대는 검으로 눈을 갈라내었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 비…빌어먹을! -
요괴는 뒤로 물러서며 도망쳤다.
이제껏 운현이 피하기만 하며 피륙에 작은 상처를 주었을 몰랐으나 눈을 찔러오니 이대로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도망치며 한 소리 남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사람이나 요괴도 마찬가지였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 전진자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동료들을 데려오마! 그날까지 그 자리에 있어라! 내 꼭 네놈을 밟아 죽이고 말리라! -
“원시천존! 걱정이로구나. 저런 놈이 셋만 모여도 피하는데도 한계가 있을 것인데……!”
운현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진건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건곤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다가가 보면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소군이 죽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서 진건곤의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진건곤은 참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소군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조금 더, 조금 더 많은 영력을 몰아넣었는데도 생기가 흩어지려고만 하는 것이었다.
하여 점점 더 깊게 몰아일여의 경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영력을 좀더 많이 보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몰아일여의 경지로 들어가 소군의 모든 것을 공유하려 했다. 소군의 몸을 자신의 몸처럼 다룰 수 있다면 자신에게 있었던 기적이 소군의 몸에도 펼쳐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성공해 가는 듯이 보였으나 그때 코끼리 요괴가 나타났던 것이다.
다행히 운현이 나서주었으나 무심코 운현에게 잠시 신경을 분산시켰다.
그런데 그 것만으로도 소군의 몸에서 생기가 날아가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 돼! 절대로 이럴 수는 없다. 소군은 내 대신 이렇게 된 사람이야.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단 말이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제발! 제발 도와주십시오.’
하지만 소군의 몸에서 벗어나려는 생기를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소군의 몸을 감싸고 있는 영력을 풀게 되면 숨 한 번 돌릴 틈도 없이 그대로 떠나갈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도저히 손 써볼 방도가 없었다.
현천기공을 펼치고 있는 진건곤의 왼쪽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껏 추호도 소군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진건곤이었지만 이제는 소군의 죽음을 인정해야 할 시간이 오고 말았던 것이다.
툭!
진건곤의 눈물이 소군의 얼굴에 떨어져 내렸다.
꿈틀!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경련이 일었다. 몰아일여의 상태로 하나가 되지 않았다면 전혀 느낄 수 없는 미세한 경련이었다.
- 제… 발……! 날 떠나지 말아주오. -
몰아일여의 상태에서 소군에게 말을 걸었다. 전음이 아니라 그대로 전해지는 뜻이었다.
기적 같은 반응이 있었다. 진건곤의 마음에 애잔한 마음이 밀려왔다.
진건곤은 그것이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소군의 마음이리라. 너무나 약해져 있는 지금 뜻조차도 전할 수 없는 지금. 소군의 마음이 그저 애잔함으로 전해지는 것이리라.
툭!
또다시 진건곤의 눈물이 소군의 얼굴에 떨어져 내렸다.
꿈틀!
- 제… 발……! 날 떠나지 말아주오. 이 세상에 또다시 홀로 남고 싶지 않소. 아버지가 가고 나서 난 참으로 외로웠다오. 또다시 누님이 가고 나면 그야말로 홀로 남는 세상이 될 것이오. 아마도 세상을 등지고 숨이 다하는 날까지 숨어 살지도 모르오. -
또다시 애잔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게다가 소군의 몸을 떠나려던 얼마 남지 않았던 생기가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진건곤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는지도 몰랐다. 또다시 진건곤의 마음이 전해지고 또 전해졌는데 그때마다 소군의 마음이 전해지고 또 전해졌다.
하지만 천륜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일까? 떠나기를 포기한 소군의 생기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고받았던 감정이 회광반조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게 소군의 생기를 어떤 수를 써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소군이 상처를 입고난 지 한 달 후의 일이었다.
쿵! 쿵! 쿵! 쿵!
또다시 거대한 소리와 함께 지축이 울렸다.
탁탁탁탁탁!
시간이 지나자 더 작은 소리들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뿌지직! 뿌지직!
또다시 숲의 한편에서 나타난 요괴들이 있었다. 바로 코끼리 요괴였다. 그리고 그 뒤로 강아지만 한 독오공(毒蜈蚣;독지네)과 요사스러운 여인의 모습에 덧씌워진 여우가 보였다.
“멈췄거라!”
운현이 앞으로 나서며 자하기송을 담아 소리를 질러 그들을 멈춰 세웠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 하하하하하하! 잘 있었느냐? 오늘이 네 제삿날이구나! -
코끼리 요괴가 광소를 터트리며 웃음을 지었다.
가아아아아! 가아아아아아!
- 네놈을 꺾으면 왕이 된단 말이더냐? -
독오공의 의지였다.
“호호호호! 오라버니. 설란이 오라버니를 뵙습니다.”
사람에 씐 여우가 다소곳하게 무릎을 구부리며 작은 인사를 해왔다. 요사하고 사이한 기운이 운현에게 느껴졌다.
가공할 염기였다.
“크으!”
정심(定心)이 굳은 운현마저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가아아아아! 가아아아아!
- 저놈. 약하잖아! 저 뒤에 있는 놈이 바로 전진자겠지? -
“호호호호! 독오공은 사내를 볼 줄 모르는구나. 모름지기 남자란 중후하고 자유로운 맛이 있어야지. 저놈처럼 제 계집을 끼고 다니는 놈들은 재미가 없지.”
여우가 재미없다고 한 것은 진건곤이었다. 품안에 소군을 품고 있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가아아아아아! 가아아아아아!
- 흥! 저런 놈은 네년과 거상(巨象)이 해치워라 나는 뒤쪽의 놈을 치지. -
독오공이 그대로 튕겨 오르며 진건곤을 향해 날아갔다.
쩡!
어느새 나타난 운현의 검이 독오공을 막아내었다.
독오공은 코끼리와 같은 힘은 없어 운현의 검으로도 쉽게 튕겨낼 수가 있었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 쳐랏! -
“오라버닛!”
요괴들이 운현에게 한꺼번에 쳐들어갔다.
거대한 힘이 실린 곰의 앞발과 빠르게 움직이며 날카롭게 찔러오는 독오공의 이빨과 발톱, 여인의 교수가 어지럽게 얽혀들며 운현을 공격해 들어갔다.
운현은 자하신공을 담은 암향표를 극성으로 펼치며 그들의 공세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반대편의 하늘에서 하나의 인형이 나타났다.
‘아뿔사! 이들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찌이익!
운현의 주의가 흩어진 사이 운현의 옷이 길게 찢겨져 나갔다. 찢겨진 옷 사이로 예리한 한줄기 선이 그어져 있었다.
“호호호호! 아무래도 짐승들보다는 여인의 손이 좋으신가 봐요. 꼭 제 손으로 죽여 드리지요, 오라버닛! 오호호호호호!”
인간의 탈을 쓴 여우가 공격을 멈추고 서서 운현의 피가 묻은 자신의 발톱을 핥으며 비음을 토해 내었다.
여우가 잠시 공격을 멈추자 두 개의 짐승들과 싸우면 운현은 또다시 여유를 찾았다.
하지만 새로이 나타난 인영이 신경이 쓰여 승기를 잡지는 못하고 있었다.
“모산파의 삼영진군 백자입니다. 소군 누님은 제가 살필 터이니 한 시진만 벌어주십시오.”
“고맙네. 그럼 부탁하네.”
진건곤에게서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운현은 백자가 참으로 고마웠다. 막막하던 일에 작은 희망이 보였던 것이다.
“네놈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보자!”
답과 함께 운현의 자색 서기가 더 짙어졌다. 자하기공의 힘을 극성으로 끌어낸 것이었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 놈! 힘을 감춰두었구나. 하지만 우리 셋을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
“오라버닛! 가요!”
가아아아아아! 가아아아아!
세 마리의 요괴가 운현에게 쇄도해들었다.
독오공은 호시탐탐 전진자를 노리며 독을 쏘아보기도 하였지만 그때마다 운현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극성의 자하기공을 발휘한 운현은 그들과의 싸움에서 약간의 승기를 쥐고 있었다. 물론 극성의 내력을 펼치면 시간이 갈수록 약해진다는 약점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백자는 수인을 맺고 진언을 외웠다. 그러자 예의 늙고 갈라진 음성이 다시 새어 나왔다.
“켈켈켈! 대라신선이 아니라면 감당하지 못할 상세로고……! 하지만 나라면 그보다 못할 것도 없지. 물론 자네가 도와야만 한다네. 명부에 올라 있는 수명을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 다만 자네의 수명을 가져다 쓸 것이야 그래도 되겠지?”
- 부탁드립니다. -
진건곤의 뜻이 백자에게로 전해졌다.
“켈켈켈! 자네 제법 화끈한 사람이란 말일세. 지금처럼 그대로 그녀의 생명을 부여잡고 있게.”
백자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예리한 소검으로 소군의 상처를 베어내어 오래된 살을 베어내었다.
“켈켈켈! 천륜을 어기는 일. 한동안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겠지만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백자의 손이 붉게 빛나더니 진건곤의 어림에 허공을 저었다. 언뜻 보면 헛손질을 하는 것 같았지만 영력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백자의 손이 진건곤의 영력을 뜯어내는 것을 볼 수 있었으리라.
“놀라지 말게. 그녀의 생기가 날아가면 아무리 천륜을 어긴다고 해도 살릴 수가 없네. 자네가 흔들려서는 안 돼!”
백자는 손에 잡힌 영력을 그대로 꾹꾹 눌러 단단하게 모양을 잡더니 소군의 등뼈를 이었다. 또다시 영력을 길게 늘려 실로 만들더니 그 모양 그대로 꿰매어 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여러 가지 복잡한 작업이 계속되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미세한 줄기까지 만들어 가며 인체와 똑같은 모양들을 만들어 붙이기를 시작하였는데 엄청나게 빠른 솜씨였다.
과연 전설상의 인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진건곤의 영력을 뜯어 소군의 상처를 복원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독오공의 독이 운현의 방어를 뚫고 쏘아져 들어왔다.
“어허!”
백자의 손이 허공을 젓자 그 독운무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냉큼 일어나 또다시 진건곤의 영력을 한 움큼을 뜯어내더니 소군의 상처를 부드럽게 감싸 붙였다. 그리고는 표면을 세세하고 부드럽게 만들었다.
“됐다. 이제는 네가 나서야겠구나. 한 시진이 채 다 차지 않았는데 저놈들이 득세하고 있어. 내가 소군의 등에 손을 대고 치료를 시작하거든 저것들이 방해하지 못하게 해다오.”
백자의 손에 붉은 기운이 일렁이고 소군의 등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진건곤은 몰아일여를 통해 소군이 느끼는 것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화타의 손을 통해 들어오는 기운을. 무수하게 많은 생명을 살리며 쌓아온 공덕이 고스란히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화타가 쌓아온 영력이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화타의 공력은 진건곤의 공력과 하나가 되어 소군의 생기를 북돋우고 있었다.
진건곤은 그 힘이 소군의 생명을 지켜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챙그랑!
때마침 운현이 검을 떨어트리고는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극성의 자하기공으로도 요괴세상의 왕의 자리를 노리는 세 마리의 요괴를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던 것이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 하하하하하하! 죽어랏! -
어려운 상대였던 운현의 힘을 모두 빼놓았으니 마지막으로 가뿐하게 죽여 버리면 그만이리라! 세 요괴는 기쁜 마음으로 쇄도해 들었다.
코끼리 요괴의 앞발이 운현을 찍어 눌러갔고 여우와 독오공 요괴가 운현의 퇴로를 막았다.
운현이 피하지 못하고 코끼리 요괴의 발에 그대로 압사당할 순간이었다.
번쩍!
그들의 사이를 뚫고 지나간 한줄기 섬광!
운현과 요괴, 모두가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건곤이 허공에 떠올라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를 일렁이는 백광을 가진 검이 살아 움직이기라도 하듯 번쩍거리며 선회하고 있었다.
쩌저저적! 쩌저적!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다.
코끼리 요괴가 그 소리를 찾아보니 자신의 심장이 있는 곳에 커다란 균열이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 사이로 순백의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그제야 고통을 느낀 코끼리 요괴의 포호가 울렸다.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흰빛의 균열이 퍼져나가기 시작해 마른 논바닥처럼 깊고 깊은 균열을 일으켰다.
곰의 전신으로 퍼져나간 균열.
크어어어엉! 크어어어엉!
곰의 포호가 울리고 또 울렸다.
화악!
거대한 빛의 구가 곰의 내부에서 터져 나가는 것처럼 빛이 터져 나갔다. 순백의 기운이 장내를 지배했다. 그 장엄한 순간에 모두가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사부님!”
정적을 깨고 진건곤의 음성이 들리자 여우과 독오공은 그대로 뒷걸음질 쳐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코끼리 요괴가 단 일합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소멸된 것을 보았으니 그들도 역시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너야말로 수고 많았다. 다행이구나.”
진건곤이 운현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운현은 신음처럼 탄성을 흘렸다.
“허어……!”
자신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엄청난 진기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군을 살리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몰아일여에 매달리며 진건곤의 영력이 또 다른 단계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전날, 해동의 신선이었던 백노신이 소군에게 했던 일을 그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소군의 위기가 진건곤에게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뒤로 물러선 독오공과 여우가 달리기 시작하였다. 타고난 능력으로 경공을 펼치지 않아도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저놈들……!”
화악!
운현은 그놈들을 잡아야 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진건곤의 검이 섬광을 일으키며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며 두 마리의 요괴를 꼬치 꿰듯이 꿰었던 것이었다.
그 두 마리는 멀리서 맥없이 빛의 폭발을 일으키며 소멸되고 말았다.
운현도 역시 강호에 적수가 그리 많지 않을 만큼 강한 편이었는데 그를 그렇게 애먹이던 놈들이 진건곤에게는 겨우 일초지적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켈켈켈! 되었다. 좀 있으면 깨어날 것이야. 분명히 말해 두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생기(生氣)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소군은 네 영력에 깃든 생기를 사용하여 회복시킨 것이다. 네 수명도 조금은 줄어들었을 것이야. 그리고 네가 죽으면 그녀도 역시 죽고 말 것이야. 나는 간다.”
백자의 눈에 힘이 빠지고 어린 백자로 돌아왔다.
“사부님. 경하 드립니다.”
백자는 진건곤이 소군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던 사이 더 큰 진전이 있었던 것을 알아차리고 축하의 말을 건넨 것이었다.
진건곤과 운현, 백자는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백자는 자신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들었던 무림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이미 마교는 개파를 하고 운남의 인근의 사람들에게 포교를 시작하고 있었고 정파는 건곤일척의 대전을 준비하며 무인들을 모이고 있다고 했다.
“그래 이제 어쩔 것이더냐?”
운현이 진건곤에게 물었다.
“소군의 원수를 갚아야지요!”
진건곤이 다짐을 하듯이 뇌까렸다.
화악!
그때까지만 해도 검집에 얌전히 꼽혀 있던 검이 갑자기 하늘로 치솟았다. 저 높은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듯이 순백의 빛이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하늘을 가득 메웠다.
운현과 백자는 넋을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이기어검으로 펼쳐지는 무량망회라는 것을 알 수가 없을 따름이었다.
<6권에서 계속>
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