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독룡-37화 (37/61)

제4장

오백여 초수가 흘러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실제로는 일 각의 시간이 지났으나 모두가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고 있었기에 순식간이라고 느꼈을 뿐이었다.

장내에서 긴장감이 없는 자라고는 백노신이 유일했다.

[허허허! 자네는 진정 대단한 처를 얻었군.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네.]

갑자기 들려온 백노신의 전음이었다.

내용을 들어보면 소군의 승리를 점치고 있는 것인가? 전음의 내용은 둘째치고라도 백노신이 나선다는 말에 진건곤은 긴장된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나는 영원히 방관자로 남을 터이네.]

전음을 나누는 사이에도 수십여 초가 더 지나갔다.

돌연 빙백신의 신형이 뒤로 쑥 빠져나갔다.

“하하하하하! 과연 천하가 넓긴 넓구려. 오늘 빙모는 깨어지지 않는 벽을 보았으니 그만 물러나겠소. 소검후! 다음에 만날 때는 반드시 생사(生死)를 가를 테니, 조심하시구려.”

“저 역시 다시 만난다면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지요.”

소군은 빙백신과의 싸움을 통해 얻은 것이 있었다. 비슷한 경지의 고수들과 생사결을 연거푸 두 번이나 가지고 나니 천수불영검의 구성의 벽을 깰 실마리가 잡혔던 것이다.

그랬기에 스스로 다음에는 다른 모습이라고 공언할 수 있었다.

“크하하하하! 기대하겠소.”

빙백신은 살기 짙은 눈으로 소군을 바라보더니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백노신이 앞으로 나섰다.

“허허허! 대단한 무공을 보았소. 아직도 힘이 남았거든 늙은이도 상대해 주시겠소?”

백노신이 싸움을 청하며 앞으로 나섰다.

“비겁하구나! 이제 막 싸움이 끝났거늘. 그 틈을 타 이익을 취하려 하다니!”

아미의 고수들이 백노신을 타박하고 들었다.

“허허허! 너무 그러지들 마시구려. 본도에게 방법이 있으니 말이오. 안 그렇소, 진 공자?”

백노신이 느닷없이 진건곤을 불러 동의를 구했다.

“그렇습니다.”

진건곤은 소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도 아시겠지만 진인이야말로 천외천의 무위를 지닌 최고수요. 어차피 그가 악의(惡意)를 품었다면 모든 것이 결정지어질 터, 그의 뜻대로 따라 봅시다.]

백노신이 제안하는 모든 방법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소군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였으나 진건곤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여 승낙의 뜻을 보였다.

“어찌……?”

“소군!”

아미의 고수들이 모두가 반대를 하였지만 소군은 진건곤을 믿었다.

백노신이 조그만 환약을 꺼내자 소군을 그것을 받아들었다.

화아아악!

백노신이 건네주는 환약을 받는 순간 둘 사이에는 아주 조그만 접촉이 있었다.

그 조그만 접촉에 엄청난 양의 기운이 밀려들어와 소군의 몸에 가득 찼다. 환약이 아니라 백노신의 기력이 소군의 내력을 채워준 것이었다.

“아……!”

소군은 그가 장내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최고수라는 진건곤의 말을 믿었지만 이 정도일 줄을 몰랐다.

그가 북돋아 준 기운은 오히려 빙백신과 싸우기 전의 내력보다도 더 충만해진 것 같지 않았던가?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어떤 일이라도 성사되고 말았을 일이었다.

[환약은 버려도 좋소. 먹어도 상관은 없고 말이오. 몸에는 좋지만 제법 쓴 편이라서 말이오.]

백노신의 전음이 소군의 귀에 울렸다.

소군은 백노신의 눈을 보고나더니 그대로 환약을 삼켰다.

역시나 쓰디쓴 맛에 신물이 넘어오는 듯하였으나 참아내며 억지로 삼켰다.

“흐으으음……!”

참으로 고약한 맛, 신음성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약효가 지독하여 신음을 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준비되었습니다. 진인!”

소군도 역시 그를 진인이라고 불렀다. 진건곤이 그를 진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소군은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동시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화악!

소군의 검에 검강이 피어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검에는 순백을 넘어 청백으로 넘어간 검강이 오연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오오오!”

“으……!”

아미의 고수들이 모두 감탄을 흘렸고 빙백신은 침음을 흘렸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끌어올리지 않았던 검강이 나온 탓이었다. 자신과 동수라고 여겼던 소검후가 진신의 실력을 숨기고 자신을 상대했다고 생각하니 노여움이 피어올랐다.

‘세상에 이렇게나 강대한 기운을 주고받을 수 있다니 진인은 얼마나 강하다는 말인가?’

소군이 스스로 놀라고 있을 때, 백노신의 전음이 있었다.

[나름 눈치라는 게 보여서 말이네. 자네와 비기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 속아 넘어갈 것 같으이. 천수불영검이었지? 예전에 아미의 고승과 인연이 있었지. 청영이라는 스님과 만났던 기억이 좀 나는 군. 내가 본 천수불영검은 이런 것이었다네. 잘 따라오게!]

소군은 백노신의 전음의 내용에 놀라고 말았다.

‘청영이라면 백 년 전의 검후님이거늘!’

백노신이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검이 날았다.

그런데 그 검이 바로 진건곤의 검집에서 날아오른 것이었다.

하지만 진건곤은 그것을 막지 않았다.

그대로 날아간 검이 허공을 선회하더니 백노신과 소검후의 중간에 우뚝 섰다. 그 모습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이기어검……!”

장내의 모든 자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기어검이라는 전설상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자는 없었다.

“이럴 수가……!”

백노신의 무공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빙백신 조차도 그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 보시게나. 자네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터! -

진건곤에게 전해진 소리는 전음이 아니었다. 몰아일여!

놀랍게도 백노신의 몰아일여는 이기어검뿐만 아니라 진건곤도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다.

몰아일여로 전해진 뜻에 비추어 보아 그 의도는 명백했다. 진건곤에게 이기어검을 부리는 것을 보여줘 가르침을 전하려는 것이었다.

백노신의 손은 검결지를 쥐고 있었다. 기실 그라면 그런 행위가 필요 없는 경지에 다다라 있었으나 자신의 무위를 낮추어 보이기 위해서 필요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어쨌든, 백노신의 손이 움직이자 그것에 맞추어 검이 날았다.

놀랍게도 백노신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진건곤은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진건곤이 느끼는 감정은 의외의 것이었다.

널리 이롭게 하리라!

널리 이롭게 하리라!

‘이기어검을 부리는 것이 이런 것이라니……!’

검이 움직일 때마다 무공과는 전혀 다른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 진건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빛살처럼 빠른 이기어검의 움직임.

까앙! 까앙!

번뜩거리는 순간 이미 공간과 거리를 무시하고 지척에 날아든 이기어검은 인간으로서 반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소군은 용케도 그것에 반응하고 있었다.

기실 천수불영검이어서 그나마 반응이라도 하는 것이었다. 천수불영검을 펼치기 위해 펼쳐 놓은 기의 실오라기들이 눈보다 이기어검을 먼저 느끼게 해주었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기의 느낌에 검을 틀어막고 보고 그제야 눈에 튕겨져 나가는 것이 보이는 이기어검이었다.

백노신이 펼치는 이기어검의 속도는 너무나 빨라 천수불영검을 극성으로 펼쳐 놓고서도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검을 비껴내지도 못하고 겨우겨우 정면에서 부딪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까아아아아아아아!

이기어검이 점점 빨라지니 그것을 막아가는 소군의 검도 빨라질 수밖에.

두 개의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이어져 그 소리가 끊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한계려니 하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검광이 번쩍거리며 더 빨라졌다. 일 각 여가 아니라 반각이 지나기도 전에 오백여 초수가 훌쩍 넘어갔다.

‘이상하구나. 진인께선 천수불영검의 진수를 진정 알고 있었단 말인가? 이기어검을 받아내기 위한 검로가 천수불영검을 펼치는 것과 완전히 같구나.’

놀라운 일이었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소군은 더 이상 검을 막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천수불영검의 초식을 연습하듯이 펼치고 있었는데 그곳에 검이 와서 부딪히는 것이었다.

오히려 부딪히는 이기어검과의 반탄력으로 검로를 이어가는 것이 더욱 편안해지고 검로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마침내 천수불영검의 그 기나긴 초식이 한 번에 검 획에 실리기 시작했다.

검은 소군이 무공을 익히고 난 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격렬하게 움직이건만 소군의 표정이 점점 더 평온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 각 여가 지났을 때는 이기어검의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고수들만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도 제대로 검을 쫓는 이가 없었다.

그나마 백노신과 몰아일여로 이어져 있는 진건곤만이 그 위치를 알 수 있었을 뿐, 그마저도 진건곤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아미타불!”

빙백신과 아미의 고승들이 탄성을 지어냈다.

이기어검은 더욱 빨라졌는데 소군의 눈은 오히려 반대로 감겨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국에는 완전히 눈이 감겨졌고 소군의 검도 주인과는 상관없이 검만이 홀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번쩍!

콰드드드드등!

소군의 검에서 청백의 빛이 솟구쳐 쏘아져 나갔고 백노신과 소군의 중간에서 엄청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양쪽을 딱 가른 중간에 벽이 선 것처럼 정확히 양쪽으로 터져나가는 엄청난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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