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행하자제 관자재보살.
수리수음 지호리가당.
아미사에 가까이 다가가자 한가로운 불경이 울리고 있었다.
“늦진 않았나 보네요.”
소군은 뒤로 날아 내리는 진건곤을 보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진건곤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손을 들어 빈객당을 가리켰다.
“저쪽에 누님에 비견될 고수가 있습니다.”
“세외삼신인가요?”
“일단은 화령신에 버금갈 고수는 혼자입니다.”
“다행이군요.”
아미파의 입구로 빠르게 다가가니 입구에 서 있던 비구니가 반갑게 아는 척을 하였다.
[대사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울리지 않고 입만 꼬물거려 전음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법려구나. 아무 일도 없었느냐?]
[아무 일도 없을 리가 있나요. 본산은 지금 발깍 뒤집혀 있어요. 세외삼신 중에 둘이나 와 있으니까요.]
소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둘이라니. 이미 스스로 감탄한 바가 있는 진건곤의 기척을 읽는 능력이었다.
그런데 진건곤의 기감을 속일 수 있는 고수가 또 하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일단 장문인께 가보겠다.]
소군의 눈짓에 따라 진건곤도 역시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어서 오너라. 참으로 적절할 때 와주었구나.”
후덕한 인상의 장문인은 소군을 보며 반가워하면서도 걱정스러운 얼굴이 가득했다.
“삼 일 후까지 네가 도착하지 않았다면 본산에 큰 싸움이 있을 뻔했구나. 세외삼신 중에 두 명이 찾아와 무턱대고 너를 찾았다. 다행히 귀한 손님이 있어 그들이 행패를 막을 수 있었지만 열흘 안에 너를 부르지 않으면 아미파를 지워버리겠다고 하였다. 네가 혈영신과 싸웠단 소문이 사실이란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세외삼신은 모두가 따론 줄 알았더니, 복수를 하겠다고 나설 정도였단 말인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장문인은 눈을 감으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불호를 외쳤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느낀 탓이었다.
“그래 이분은 누구시더냐?”
장문은 그제야 진건곤에게 관심을 돌린 것이었다. 일전에 아미를 방문했을 때에는 장문이 직접 나서서 보아야 할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던 터인지라 모르는 사이였다.
“아버님이 정해주신 서방님이십니다. 상공. 인사드리세요.”
“화산의 무 자 배에 곤이라는 도명을 쓰고 있습니다.”
방장은 놀란 표정이 되었으나 이내 진정한 듯이 입을 열었다. 화산의 무 자 배가 너무 젊어 놀랐다는 뜻이리라.
“본승은 아미의 정해라고 합니다. 미력하나마 방장의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익히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젊으신 분이 절검 영은 진인의 제자라면 보통 인물이 아니시겠지요.”
그때 문득 밖에서 전갈이 들어왔다.
“방장님 빈객당의 손님들로부터 전갈이 왔습니다.”
“들어와라.”
사미승 하나가 서찰을 들고 들어와 전하고 나갔다.
“너는 추영반을 모시고 오너라!”
장문은 또 다른 심부름 시켜 보내고는 그 서찰을 펴보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들의 이목이 이리 영민한 줄은 몰랐구나.”
서찰을 내어주는데 그 내용은 이리했다.
<삼 일 후, 정오에 비무를 치를 것이오. 소검후에게 비무에 대비하라 전해 주시오.”>
빈객당에 앉아 나온 적도 없는 손님들이건만 소군이 아미에 도착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설마?”
“……!”
소군과 진건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떠오른 생각이 같았을까? 입 맞추어 탄식을 흘렸다.
“기감…….”
“몰아지경?”
소군과 진건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내렸다.
한순간에 딱딱하게 굳어 버린 소군의 얼굴을 보며 장문인도 역시 굳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당대의 소검후의 탄식이라면 아미파에는 누구라도 그 탄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거워진 분위기는 밖에서 울린 소리에 깨어지고 말았다.
“추영반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어서 오시지요.”
장문이 직접 문을 열어 추영반을 영접했다.
문으로 들어서는 추영반을 보며 진건곤의 얼굴이 밝아졌다.
“형님!”
“사부! 그간 잘 있었겠지?”
추영반은 바로 광우 고국양이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관복을 입고 있었으니 공무로 아미파를 찾은 듯하였다.
“다행히 별반 일은 없었습니다. 어떻게 여길 찾으신 겝니까?”
“하하하! 사부를 찾으려면 사모님이 가는 곳으로 가는 게 더 빠르려니 싶어 이곳에서 기다렸지. 참으로 아름다운 사모님이십니다. 하하하!”
광우는 슬쩍 고개를 돌려 소군에게 인사를 건네며 아부를 하였다.
“형님도 참 별소리를 다하십니다. 무슨 일입니까?”
“거두절미하고 공희국은 살아 있다. 공희국을 잡으러 가자.”
진건곤과 소군은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추영반의 감투를 쓰고 하는 일에 공희국이 걸려 있더구나. 놀랍게도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네 힘도, 그리고 사모님의 힘도 필요하고 말입니다.”
광우는 소군에게 고개를 돌려 그 의중을 확인하려 하였다.
“이곳을 찾은 세외삼신을 처리하고 나면 장문님과 상의하도록 하지요.”
“나는 이미 허락하겠노라고 추영반님께 뜻을 밝혔단다. 사실 추영반님이 아니라면 이곳에는 이미 피바람이 불었을지도 모른다. 나무아미타불.”
장문인은 또다시 광우에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두고두고 생각이 날 때마다 고마운 모양이었다.
“하하하하! 뭐 그런 일을 가지고 그러십니까? 당연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이제는 사부와 사모님이 왔으니, 한시름 덜었습니다. 하하하하!”
광우도 역시 누가 아미파를 찾아와 있는지 알고 있었는데도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그만큼 진건곤과 소군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상한 기류가 발견이 되었네. 돈의 흐름이 너무 한곳으로 몰린다는 것인데… 이상한 것은 주로 무관과 지방 관리들이 그 흐름의 정착지라는 것일세. 또한 그들은 그 돈을 가지고도 다른 곳에 쓰는 일이 없다네. 마치 모든 돈을 따로 모아두기라도 하는 듯한 일이란 말일세.”
광우의 말은 이랬다.
중원의 곳곳에서 관리들이 수익사업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들이 수입은 지대해졌는데도 돈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듯이! 그렇게 축적된 부가 무서울 정도로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전쟁을 치르고도 남을 만큼의 부가 되자 정부에서 추적을 시작하였는데 광우도 역시 그 일부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우리 앞에 남아 있을 것이야. 내가 사부와 사모를 청한 것은 그런 일을 막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어쩌면 사모가 아니라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일세.”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하기를 멈춘 광우는 얼굴에 묘한 미소가 들었다.
“하하하! 사부 덕에 내가 출세했다는 것 아니겠소? 하하하!”
뜬금없는 소리.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진건곤과 소군이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하하! 추영반이라는 자리는 급수가 제법 높다오. 나 같은 지방의 호족이라면 바라보지도 못할 자리지요. 원래는 다른 자가 이 자리를 맡을 예정이었는데, 그런데 말이요. 사부가 사모를 얻었다는 소식이 돌자. 내가 적임자가 된 것이오. 바로 사부와의 친분을 이용해서 사모를 이 일에 끌어들이라는 말이었소. 하하하하! 사부 덕에 출세했다오.”
광우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는 뜻이지요. 저를 원할 정도라면 상대방도 역시 제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고수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사모님의 무공을 뛰어넘는 자가 그리 흔하지는 않지요. 게다가……!”
광우의 눈이 진건곤을 향했다.
“난 사부를 믿소. 사부라면 어떤 일이라도 가능할 것같이 보인단 말이오.”
소군은 진건곤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두 사람이 묘하게 쳐다보니 난처해진 것은 진건곤이었다.
“허허!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구려. 그저 노력할 뿐입니다. 형님.”
광우와 회포를 풀고 싶었지만 이미 발등에 떨어진 일이 있었다.
소군은 자신의 본디 거처인 청암동에 올라 운기를 시작하였다. 근 십 년을 넘게 사용한 거처였는데 커다란 결전을 두고 보니 새삼스러웠다.
“걱정 마시오.”
진건곤은 소군의 얼굴에서 복잡한 마음을 읽고는 그녀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최선을 다해야지요. 그래도 전보다는 낫네요. 적어도 처녀귀신으로 구천을 떠돌지는 않을 테니까요. 호호호!”
“하하하하! 누님도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럼요. 상공. 아무래도 매번 부모님을 뵐 때마다 듣는 소리였으니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죠.”
소군의 고개가 살며시 기울어져 진건곤의 어깨에 기대어졌다.
“역시 짝이 생기니 좋긴 좋군요. 이런 순간에도 기댈 곳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소군이 벌떡 일어서려 했지만 진건곤의 손이 소군의 어깨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조금 더 기대고 있어도 좋아요. 운기조식이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잖습니까?”
소군은 더 이상 일어서려 하지 않고 진건곤의 어깨에 기대었다.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다시금 말이 새어 나왔다.
“절검님은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에요.”
“무엇이 말입니까?”
“사문의 제일 고수라는 것 말이에요. 영광도 있지만 그 책임이 막중하네요. 내일 싸움이 사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깨가 무거워요. 무조건 이겨야 하는 싸움이니 말입니다. 빙백신이 화령신만큼 강하다면 승패를 알 수 없어요. 그야말로 버텨내는 쪽이 강한 것이겠죠.”
“걱정 마세요. 누님. 누님은 충분히 강하니까요. 그건 사부님도 인정하신 일이에요. 사부님께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화령신이야말로 세외삼선 중에 가장 강한 자였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자야 박빙의 승부를 하였던 누님이라면 분명히 저들을 누를 수 있을 겁니다.”
스륵!
소군이 몸을 일으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고마워요. 상공! 이제는 겁나지 않아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부겠죠.”
소군이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자 진건곤은 그 앞에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하였다.
마음을 열고 호흡을 열었다. 천지간의 기운이 마음대로 들고나도록 유기를 하자 곧장 몰아지경의 경지로 빠져들었다.
진건곤은 청암대를 지나 바위와 하나가 되고 수목과도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내가 자연이 되고 자연이 내가 되고 있는 사이에 문득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 허허허! 대단한지고. 그사이 몰아지경에 들어섰단 말이더냐? -
마음속에 울림처럼 울려오는 음성이었다.
자신의 마음에서 울려나오지만 진건곤 자신이 아닌 것은 틀림없었다.
“누구십니까?”
- 허허허! 실수군. 자네는 나를 본 적이 없으니 나를 모를 수밖에. 우리는 예전에 한 번 스쳐 지나간 사이일 뿐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군. 허허허! -
상대는 자신을 알지만 진건곤은 상대를 몰랐다.
누구인지 생각을 하는 동안에 문득 전에 들었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천의 힘을 사용하도록 해주신 분이십니까?”
- 늙은이를 기억해 주는군. -
“은인을 뵙습니다.”
-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동쪽에 큰 바위에서 만나는 것이 어떤가? 내 자네를 직접 보고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네. -
상대가 말하는 순간 동쪽의 큰 바위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것도 또한 몰아지경의 효능.
진건곤은 지체 없이 움직이며 가겠노라고 대답을 하였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깨우쳐준 자라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리라. 궁금한 것이 많았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동쪽으로 움직여 아미파의 영역을 벗어나자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과 똑같은 바위가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와 있으리라는 기대와 다르게 아무도 없어 실망스러웠다.
쐐액!
갑자기 백색의 인영이 마치 공간을 뚫고 나오기라도 한 듯, 갑자기 나타났다. 그가 멈추고 나자 그의 주위의 공간이 출렁이는 듯하였다.
“이런, 원시천존……!”
진건곤은 그 놀라운 장면에 도호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놀란 모양이로군. 이건 중원에선 축지성촌이라고 부르는 경공일세. 내가 사는 곳에선 축지법이라 하지.”
백색의 일색으로 나타난 노인은 말 그대로 월하도인!
달이 떠 있는 하늘 아래 하얀 옷을 입고 하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트리고는 흰 수염을 날리고 있었다.
가히 신선의 모습이 있다면 이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할 만하였다. 외양만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는 묘한 광채가 나와 사람을 위압하는 것이 있었다.
그의 모습을 처음 보는 진건곤으로서는 가히 신선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장백산에서 왔네. 백노신일세. 이곳에서는 세외삼선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신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으니 백 노사 정도로 불러주게.”
“화산의 무곤이 백 노사를 뵙습니다.”
“호오! 화산이라고?”
“그렇습니다.”
“좋은 곳에 자리 잡았군. 제법 엄정한 구석이 있으니 난세에 어울리는 곳이고말고.”
백노신이 말을 마치고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거듭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나 신비로워 아마도 천기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난… 세… 입니까?”
“그렇다네. 난세일세.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릴 것이지. 수백도 수천도, 수만도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이 말일세.”
백노신의 눈이 진건곤을 향하자 그의 눈에서는 번쩍이는 안광이 토해져 나왔다.
그 안광을 받은 진건곤은 절로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상천의 문을 열고 난 뒤부터 그 심기가 굳건하여 두려움을 몰랐는데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갑작스레 진건곤의 머릿속에 전쟁과도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수많은 무인들이 싸움을 벌이고 군민들이 나서서 전쟁을 하였다. 처절하기 짝이 없는 장면들이 눈앞 펼쳐지고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강물 위로 흘러 강을 붉게 물들였다.
“이럴 수가……! 원시천존이시여.”
너무나 생생하기 짝이 없고 비참한 모습이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난 후 또다시 펼쳐지는 그림이 있었다.
그렇게 비참했던 전장을 겪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참으로 밝게 웃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그들의 겉모습만을 보았는데도 그들에게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겁박하고 주눅 들게 하는 것들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수십만의 목숨을 버려 수백만의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방법이 있네. 바로 자네의 눈앞에 보였던 피로 이루어진 강물이 바로 그 일일세.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만 하면 자네가 보았듯이 사람들이 모두가 즐거워하는 세상이 될 공산이 크네.”
“피의 강을 통해서 말입니까?”
“그러네. 안타깝게도 핏물이 강처럼 흐르고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면 말일세.”
진건곤은 그의 말이 정황도 없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내용이었지만 거짓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그가 피를 말하자 말 그대로 피가 강이 되어 흐를 것만 같았다. 연상되는 것은 오직 전쟁뿐이었다.
“또 한 가지는 피를 흘리지 않고 오랜 시일에 걸쳐 그렇게 되는 것일세. 하지만 이런 일은 참으로 오래 걸리네. 보통 사람들의 수명이 스무 번이 피었다 진다고 하여도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네.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고.”
진건곤의 머릿속에 또다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얼굴들.
대개의 사람들이 태어나서 살아가다 죽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일이 없는 사람들. 무언가에 잔뜩 눌린 채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피의 강도, 시신도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를 위해 살다 죽어가는 모습이 개미처럼 보일 뿐이었다. 수레바퀴처럼 둥글둥글하게 돌아가는 게 고작인 사람들이었다.
“무엇이 옳은 것일까? 나는 모르겠네. 내 대신 자네가 생각을 해보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네. 내일 같은 시각까지 참오하여 답을 주도록 하게.”
“무… 무엇을 말입니까……?”
진건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물으려 했지만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이미 상대는 공간을 뚫고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소군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진건곤은 다시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진건곤은 화령신의 무공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어서 세외삼신과 상대할 수 있는 무공으로 이기어검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기어검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천을 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기에 운기조식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소군의 천수불영검이었다. 천수불영검은 검강을 만들어내지도 않은 채로 화령신의 검강이 서린 주먹을 모두 비껴내며 수백 합을 겨루었었다.
이기어검이 아니더라도 검강을 상대하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여튼 진건곤은 또다시 운기조식에 집중하게 되었고 또다시 몰아지경으로 들어섰다.
나를 잊고 자연이 되고 자연을 잊고 하나가 되는 경지에 들어서자 모든 것이 나와 같았고 검마저도 그 일부가 되었다.
몰아지경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상천의 힘. 몰아지경의 경지가 깊어질수록 이기어검을 더 잘 쓸 것이라고 생각하는 진건곤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몰아지경을 더 깊게 이어갈 수는 없었다.
정신을 집중하면 또다시 신비인이 보여주었던 영상이 떠올라 진건곤의 심기를 어지럽혔기 때문이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생각을 하는 편이 낫겠구나.”
진건곤은 몰아지경을 포기하고 생각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신비인이 보여준 장면들이 계속하여 떠오르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듭하여 생각하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문득 그 내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혹여나 피를 흘리고 새로운 세상을 이룩한다는 것일까? 새로운 세상이라면 역모라도……? 하지만 어떤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역모를 한다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을 하자 신비인이 보여준 영상들이 너무나 잘 들어맞았다.
피의 강이 흐를만한 사건이라면 전쟁뿐이었다. 나라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것.
세외가 조용한 이 시국에 웬 전쟁이냐고 말할 수도 있었으나 광우가 했던 말을 들었으니 그렇지도 않았다. 전쟁이 치러질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피의 강을 통해서라도 모두가 즐거워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 같았다. 한 번만 참고 견뎌서 다음 세상이 바뀐다면 그것도 좋으리라!
하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그 생각은 바뀌고 말았다.
‘아버지! 혹여 아버지가 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을 위한 희생자였을까?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법에 아버지가 걸려든 것일까? 공희국이 그런 세상을 만드는 자들 중에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이고 그자에게 복수를 하려는 나를 없애기 위한 시도가 계속된 것이라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들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교라는 단체가 가지는 의미까지.
‘세상에 알려진 마교는 인두겁을 쓴 짐승이라 할 만큼 간악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는 말인가? 마교가 어떤 것들인지 알아보아야겠구나.’
어느샌가 진건곤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던 장면이 사라졌다. 아마도 진건곤에게 더 이상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는 것처럼……!
진건곤은 그 장면이 사라진 후에도 쉽게 운기조식으로 빠져들지 못했다.
오늘 생각하게 된 것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 깊은 곳을 뒤흔들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좀처럼 진건곤답지 않은 일이지만 그날 운기조식을 하다 말고 수마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깊은 잠에 빠져들어 꿈을 꾸었다.
“건곤아! 아비는 너를 믿는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어린 남매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던 아버지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여 너무 기분이 좋았다.
얼굴도 모를 사내가 단칼에 아버지를 베었다. 아버지는 민란의 주도자로 모함을 받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겁박과 재산을 빼앗기는 억울함뿐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된 두 남매의 떠돌이 생활은 가뭄이 겹쳐 유난히도 혹독했다. 남매를 따로따로 팔아먹으려는 자들도 있어 나뭇가지를 꺾어 얼굴에 찔러 넣고는 도망쳐 나온 적도 있었다.
그렇게 무작정 길을 떠나 떠돌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뜰 수 있을까? 행여나 얼어 죽는다면 이것이 마지막 날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잠을 잔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지만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방가락을 만나 화산에 들고 쫓겨나고 다시 방가락을 찾았던 일이 생각났다. 광우를 만나고 소군을 만나고 청풍과 청명을 만나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떠돌며 다시 소군을 만났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소군을 얻고 이제는 화산의 장로급의 배분이 되어 이렇게 아미를 찾았다.
자신이 살아온 일을 모두 되돌아보자 진건곤은 잠에서 깨어났다. 진건곤의 왼쪽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렸는지 한참을 생각을 했지만 그게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상공!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얼굴이 밝아요.”
마침 소군이 운기조식을 마치고 나오며 진건곤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군요. 나도 참! 이렇게 위태로운 순간에 기분이 좋다니 알 수가 없는 사람인가 봅니다.”
“상공의 마음이 그렇다면 좋은 일이 있겠지요. 분명히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소군은 기원을 하기라도 하듯이 몇 번이고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뇌까렸다.
진건곤은 그런 소군의 손을 잡고 지그시 힘을 넣어 쥐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고 서로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더듬기 시작하였다. 마치 비무가 끝나면 서로 만나지 못할 사람인 것처럼!
눈으로 손으로 서로를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 넣기라도 하듯이 천천히 가슴에 담아두며 서로를 확인하였다.
그러다 문득 진건곤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눈물은 점점 더 진해지더니 나중에는 흐르는 물줄기처럼 끊어지지 않고 흘러내렸다.
“상공……!”
소군은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일까 싶었으나 점점 더 눈물이 짙어질수록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닫았다.
이윽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진건곤의 입이 열렸다.
“누님! 나 꿈에서 아버지를 보았소.”
진건곤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잠을 깨고서 눈물을 흘렸는데 그게 무엇인지 몰랐더랬소. 혹여나 잘못되어도 누님을 잊지 않으려고 가슴에 담아 두다가 문득 깨달았소. 내 마음 속에 소중한 얼굴이 또 있었소. 어려서 잃은 탓에 얼굴도 잊어버린 지 오래인 아버지의 모습이었소.”
소군은 손을 들어 말을 하면서도 계속 흘러내리는 진건곤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동생을 데리고 세상을 떠돌던 어린 나이에는 아버지를 선명하게 기억했었소. 힘이 들면 힘이 들 때마다 아버지 얼굴을 떠올리며 버텨냈는데 어느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사라지고 말았소. 아무리 생각해도 흐려지기만 하고 나중에는 윤곽조차 기억할 수 없었소. 그때부터는 오직 오기와 독기만으로 살아야만 했소. 그렇게 아버지의 얼굴을 잊은 지가 십 년도 더 넘었는데 말이오. 오늘 꿈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오. 아마도 기분이 좋았던 것이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소.”
소군은 문득 진건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어린 동생을 끌고 세상을 떠돌아야만 했던 그가 마음속으로 느껴야 했던 부담은 엄청났으리라!
그것을 버텨내고 지금에 이른 진건곤은 참으로 어려운 세월을 이겨낸 것이었으리라.
소군은 두 손으로 진건곤의 얼굴을 감싸 가슴에 품었다.
“울어요! 울어도 돼요. 이제는 제가 있어줄게요. 제가 감싸 줄 테니 울어도 된다고요.”
밤이 되자, 깊은 산의 밤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진건곤의 현천기공은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으나 날이 밝으면 불어올 광풍을 알고 있는지 여느 때보다 평온한 밤이었다.
그때 문득 신비인은 또다시 마음속에서 말을 걸어왔다.
- 그곳에서 보세나. -
진건곤이 움직였다. 역시나 진건곤이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공기가 출렁이며 신선의 풍모를 가진 신비인이 나타났다.
아무리 봐도 신기한 장면, 중원의 무공과는 상궤를 달리하는 것 같았다.
“진인을 뵙습니다.”
“허허허! 진인이라……! 그래 자네들이 부르기에는 그리 부르더군.”
백 노사가 쉬이 인정했다. 도가의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진인! 역모입니까?”
“역모라……? 역모라는 말은 옳지 않지. 세상의 주인에게 세상을 돌려주는 것이니까. 그들은 그것을 신세계(新世界)라고 표현하더군.”
말은 다르지만 세상의 주인은 황제가 아니었던가? 세상의 주인들에게 돌려준다는 것은 곧 황제를 없애겠다는 말, 역모가 틀림없었다.
“무엇을 위한 역… 것입니까?”
“만인이 똑같은 세상을 원하는 것이네. 모두가 똑같은 사람,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태어날 때부터 상하(上下)가 있고 주인이 있고 노예가 있는 것을 타파할 것이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어디 있겠나? 누구나 노력만 하면 왕이 되고 장상이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네.”
어마어마한 내용. 이미 광우에게서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들은 진건곤은 손발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세상의 판을 짜는 커다란 이야기가 왜 자신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지 모를 판이었다.
“후우후!”
호흡을 가다듬어 몸 안에 평정을 취했다.
“그럼 제게 물어보신 것은 왜입니까? 그리 옳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대로 행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그대는 나와 마찬가지로 상천(上天)을 연자네. 나는 본디 해동의 선문에서 자라 해동을 세상이라 여기는 자라네. 자네는 중원에서 태어나 중원을 세상으로 여기는 자가 아닌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자네의 책임이겠지.”
진건곤은 백노신의 알 수 없는 말에 혼란함을 느꼈다.
“헤아릴 필요 없네. 자네도 나처럼 시간이 지나면 알 게 될 것이니까. 나는 그것이 옳다고 믿네. 역설적이긴 하나, 나 또한 피의 강을 만드는 것을 꺼린다네. 하지만 중원은 넓지. 그 힘 또한 대단하지. 중원이 주인에게 세상을 돌려준다면 해동도 역시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터! 중원이 피를 흘려준다면 세외의 모든 세상은 피를 적게 흘리며 그것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네. 만일 꼭 한 번만 피를 흘려야 한다면 그게 중원이라는 생각이네. 하지만 그것조차도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네.”
백노신의 답을 들어도 혼란하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피의 강을 건너서라도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왜 제게 그것을 묻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들과 자네가 맞서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네. 자네의 운명이라면 그들이 이제껏 해온 상당한 노력이 허망하게 돌아갈지도 모르네. 회유라고 해야 할까?”
“제가 반대한다면 진인께서는 저를 제거하실 생각입니까?”
진건곤은 똑바로 백노신을 응시하였다.
“허허허허!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가? 무릇 생명이란 소중한 것일세. 천하에 해악을 끼치는 악인이라면 몰라도 자네와 같은 사람을 어찌 해치겠는가?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난 그저 자네의 의중을 알고 싶은 것뿐일세. 그래야 해동의 세상에 끼칠 영향을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백노신의 눈을 응시했지만 그의 눈은 잔잔함이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지만 그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왠지 그가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 친인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살아 온 세월을 어제 되돌아보았습니다. 수십만의 피로 만들어진 강을 건넌다면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생길 겁니다. 일부의 희생도 아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슬픈 강을 디뎌야 한다면 전 신세계(新世界)라면 막아볼 생각입니다.”
진건곤은 진신을 담아서 한마디, 한마디 힘을 주어 말을 했다.
“알겠네. 아쉽지만 자네도 역시 그것을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네. 본디 상천을 연 자는 기쁨보다 슬픔에 더욱 매달리지. 하나하나의 마음을 너무 잘 안다고 할까? 그것이 옳은 것인지 정 때문에 일을 망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겠지.”
백노신은 또다시 허공을 뚫고 긴 꼬리를 남기며 사라지고 말았다.
- 큰 뜻을 품게. 무공을 쫓지 말고 대의를 쫓게. 정기신의 신은 대의를 쫓고 스스로를 믿을 때 생기는 것이네. 그것이 상천을 키우는 힘일세. -
백노신이 사라졌으나 진건곤의 마음에는 백노신이 남긴 가르침이 남았다.
“대의라! 무엇을 대의라 해야 할지……!”
난감한 일이었다. 대의란 다양하고 많아 그 갈래가 끝이 없었다.
하지만 진건곤은 세상을 평등하게 만든다는 대의에 맞서기로 하였다. 그런 이상 그것을 넘어설 대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정기신의 신을 기르는 방법이 바로 대의를 세우는 것이라는 말이 신기하기만 했다.
신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신기하게도 백노신의 말은 들을 때마다 그 뜻이 새겨진다. 아마도 몰아일여의 경지를 사용하는지도 몰랐다.
그가 알면 나도 아는 그런 것.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음 날. 정오가 될 시간 무렵.
소군과 진건곤은 청암동에서 나와 결전이 펼쳐지기로 한 곳을 찾았다.
그곳에는 이미 아미의 장문을 비롯하여 그 이상의 배분을 가진 자들이 모두 나와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일대제자 이하의 신분을 가진 비구니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오너라! 해량 사조님은 뵙고 왔느냐?”
해량이라면 이미 돌아가신 분으로 소군의 사부가 되는 분이었다. 인사로 하는 질문치고는 그 비장함이 넘쳤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장문인을 제외하고는 한꺼번에 인사를 건넸다. 그들도 또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심각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들이 보았던 빙백신의 무위는 그만큼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정오가 되자 빙백신은 자신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약속된 장소로 나타났다.
그가 나타나자 장내는 흉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의 몸에서 나온 흉흉한 살기가 장내를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진건곤은 전날에 보았던 신비인이 빙백신과 함께 나오는 것을 보고는 놀라고 말았다.
몰아일여의 경지에 오른 고수가 빙백신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예상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마시게. 빙 노사 혼자 나설 것이니까. 나는 방관자 정도로 생각해 주게.]
빙백신이 앞으로 나서며 소군을 찾았다.
“빙계의 빙백신이다. 화령신의 복수를 위해 아미파를 멸할 것이다. 소검후는 나서라.”
그렇게 소리를 치더니 냉큼 뒤로 돌아 백노신에게 양해를 구했다.
“백 노사! 미안하오이다. 허나 저 어린 것을 협공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그렇지 않아도 부탁을 드리려던 차였습니다.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입니까?”
빙백신은 공손히 백노신의 답을 기다렸다.
“빙 노사께서는 아미파를 멸절시키려고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백 노사께서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나도 그렇게 들었소. 하지만 부처를 모시는 자들이라선지 선량한 사람들이 틀림없구려… 향후 30년간의 봉문으로 바꾸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그라도 불만이 없을 것 같습니다.”
빙백신은 잠시 동안 생각하는 얼굴이 되더니 다시 말했다.
“백 노사께서 책임지시겠다면 그리하지요.”
“그리합시다.”
빙백신과 백노신 둘 사이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소검후의 인상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화령신의 무위를 알고도 그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섰다면 그보다 더 무서운 무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힘든 싸움이 될 것이었다.
“아미의 소군입니다.”
스릉!
검이 미끄러져 빠져나오는 소리가 청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군이 앞으로 걸어 나오자 소군의 몸에서 기세가 뻗어 나왔다. 천수불영검의 미세한 기운이 수십, 수백가닥으로 갈라져 빙백신을 향해 뻗어갔다.
“호오! 교검이로군!”
빙백신은 손속을 섞지 않아도 소군의 검이 무엇인지 알아내었다. 빙백신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쩌저저저적! 쩌저저저적!
빙백신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음이 퍼져 나갔다.
십 장, 오 장, 삼 장, 일 장!
빙백신의 손이 투명하게 변하며 그대로 뻗어 나갔다. 소군의 목을 움켜 쥘 기세.
소군의 검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호선을 그리며 빙백신의 손목을 그어갔다.
어찌나 빠른 검이었는지 검신이 헝겊처럼 휘휘 말려 손목을 감싼 것처럼 보였다.
까앙!
손과 검이 부딪혔는데 피가 튀지 않았다. 오히려 검은 반탄력에 튕겨나가며 빈틈을 보였다.
쩌저적!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어지는 빙백신의 왼손이 있었다. 왼손도 역시 소군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튕겨져 나간 소군의 검이 순간적으로 움직여 왼손을 정면에서 받아내었다.
떠어엉!
주르륵!
괴성이 울리고 소군의 몸이 뒤로 삼 장 여를 물러났다. 내상 등을 입은 것 같지 않은 것 같았지만 기세가 꺾여 있었다.
빙백신은 그런 기회를 놓칠 자가 아니었다.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서 시작된 하얀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얼음이 되어 소군에게 쏘아져 나갔다.
순간적으로 언 얼음 덩어리들은 무려 수십 개! 주먹만 한 얼음 덩어리들이 소군에게 쏘아져 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고수들 간에 대결에서 이런 것들은 하등의 수작이 되지 못한다.
까드드드드등!
순간적으로 연속으로 울리는 격타음과 함께 얼음 덩어리들은 사방으로 비산하며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불쑥!
빙백신의 손이 그 안을 파고들었다. 파드득거리며 얼음덩어리를 쳐내고 있던 소군의 검이 마지막 얼음 덩어리를 쳐내는 순간 빙백신의 손에 검이 잡히고 말았다.
쩌저저저적!
또다시 기음이 울렸을 때, 수많은 아미의 고수들이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바로 전날의 싸움에서 검을 얼리고 부러트릴 때 나는 소리가 그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텅!
굉음이 울리고 빙백신의 손이 사납게 튕겨져 나갔다. 그 속에는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검이 있었다. 소군의 검이 빙백신의 손을 튕겨낸 것이었다.
“흐흐흐! 과연 어린 나이에 천하제일의 후보로 꼽힌 이유가 있구나. 그 나이에도 밀리지 않는 공력에 놀라운 수 싸움. 대단한 경지로구나. 과연 화령신은 흡족하게 싸웠겠어.”
빙백신이 뒤로 물러나며 소군에게 남긴 말이었다.
치이이이!
소군의 검에 내려앉았던 서리가 녹으며 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검 속에 진기를 불어 넣어 검을 보호하고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검에 묻은 얼음의 흔적을 날려 버린 것이다.
“오오오!”
“아미타불!”
소군과 빙백신의 한 합을 본 아미고수들은 감탄을 터트렸다. 아울러 그 안에서 승산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군의 입에서는 더욱 오연한 소리가 나왔다.
“더 이상 숨겨 놓은 능력이 없다면 이 싸움은 제가 이길 겁니다.”
“크하하하하! 봐주었더니 기고만장이로구나. 이 정도는 감당을 하여야 제대로 싸워줄 수 있지.”
빙백신의 손이 올라가자 소군이 서 있던 땅바닥에서 집채만 한 얼음 바위가 솟아나왔다.
또 다른 손이 허공을 가리키자 소용돌이 같은 바람이 일고 그곳에 집채만 한 얼음바위가 생겨나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몸집의 얼음바위가 위아래에서 소군을 찍어 눌렀다.
빙백신의 빙공은 마음만 먹으면 어느 곳에서나 얼음을 만들어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독중독(毒中毒)에 이르러 독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자를 독인(毒人)이라고 부른다면 빙백신은 그야말로 빙인(氷人)! 마음만 먹는다면 장소와 수량에 관계없이 얼음기둥이 솟구치게 할 수 있었다.
취리리릿!
퍼버버버벅!
두 개의 얼음바위가 소군을 찍어 누르기 직전에 소군의 검이 허공에 호선을 그리자 무서운 기세로 떨어져 내리던 얼음바위가 터져 나갔다.
소군의 검이 그려낸 호선에는 파(破)의 묘리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북해의 전사들은 그 광경에 놀라고 말았다.
빙백신이 만들어내는 얼음에는 빙백신의 내공이 스며 그 단단하기가 일반 얼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여 자신들의 일 장으로도 일 검으로도 깨트릴 수 없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진천뢰에도 견뎌낼 만큼 단단한 얼음이 아니었던가?
과연 중원의 강자라는 소군의 검에는 그런 것 따위는 우습게 부수고도 남을 힘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소군이 오연한 표정을 버리지 않고 또다시 말하자, 빙백신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허허허!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네 자격을 시험한 것뿐이었으니 이제는 제대로 상대해 주마.”
빙백신의 손이 허공을 향했다.
그 손바닥 위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바람이 일어났다. 바람이 멈추었을 때는 검의 형태를 지닌 투명한 얼음이 솟아나 있었다.
“이것을 꺾는다면 건방질 자격이 있는 것으로 하지.”
빙백신은 검을 들어 소군을 가리켰다.
검으로 가리킨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찬바람이 일어 소군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빙천오검 일식 혼천사위!”
빙백신의 빙검이 움직이자 수백, 수천 개의 빙검의 생겨나 소군을 찔러 갔다.
소군의 몸을 둘러싸고 온 사방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검뿐이었다.
빽빽한 검이 도저히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검이 일시에 소군을 찔러들어 갔다.
하지만 상대는 소군. 길고 긴 아미의 역사를 이어온 천수불영검의 전승자였다.
천수불영검의 천수(千手)가 괜히 천수가 아니었다. 많은 검을 다스리는 것으로는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소군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소군의 검에서도 검영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검영이 솟아나더니 각기 살아 움직이듯이 빙검을 상대했다.
각각의 검에 실린 힘은 미끄러트려 튕겨낸다는 질전(跌前)의 묘리였다.
상대의 검을 흘려내는 묘리가 빙검들을 한곳으로 튕겨내자 끝도 없던 검들이 서로 엉켜 부딪히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수천에 달하는 모든 빙검들이 서로가 부딪혀 힘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진신의 힘이 아니라면 당해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화령신의 힘은 이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빙백신은 소군의 말에 정색을 하며 태도를 고쳤다.
소검후가 아무리 뛰어난들 순수한 무공으로 화령인을 상대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빙백신이었다.
내공이라는 것은 수련해 온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기에 마흔에도 이르지 않은 소검후의 내공이 세외삼신이라는 자신들과 비슷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데 오늘 상대해 보니 그것이 오해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간 빙백신은 말로는 소검후를 상대한다고 했으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징치하겠다는 의도가 없지 않았었다.
이제야 진실로 상대를 인정하고 싸울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소군을 향한 말투부터 바뀌고 있었다.
“정녕 그대가 불혹에 가까운 나이밖에 되지 않았단 말이오? 좋소. 소검후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리다. 바로 이것이 원하던 것일 것이오. 빙천오검 오식 빙백신강!”
빙백신은 빙천오검의 삼식을 건너뛰고 곧장 오식인 빙백신강을 펼쳤다.
투명하기 짝이 없던 빙백신의 검에서 백색의 빛이 솟구쳤다. 과연, 빙백신도 역시 강기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오시지요.”
아미의 고수들이 모두가 걱정스럽게 그녀를 보고 있었는데 소군은 담담한 목소리로 빙백신을 청했다.
빙백신이 앞으로 나아가며 왼손을 흔들자 허공에서는 커다란 얼음 덩어리들이 폭사하며 소군을 괴롭혔다.
빙백신이 강기를 뽑아내고도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란 수단은 모두 사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군의 검에는 아무런 빛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오해였다. 소군의 공력은 검을 감싸지 않고 검 속으로 들어가 속을 채웠다.
천수불영검이 아무리 대단한 초식을 부린다하여도 강기와 부딪혀 검이 부러진다면 방법이 없었다.
소군은 자신의 내력을 검속에 불어넣어 부족한 내력으로도 오래 싸울 준비를 한 것이었다.
소군의 검이 흔들리자 허공에 폭사되었던 얼음 덩어리들이 홀로 터져나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사방 어느 곳에도 얼음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 사이 지척에 다가온 빙백신의 백색의 빛의 기둥이 소군을 찔러 들어갔고 소군의 검이 작은 원을 그리며 빙백신의 검을 비껴냈다.
치링!
검들이 비껴나는 소리와 함께 불똥이 피어올랐다.
빙백신은 과연 고수 중의 고수, 소군의 검에 휘말린 검이 잡아당겨지며 중심을 잃어야 하건만 빙백신의 검은 호선을 그리며 빠져나가 또다시 소군의 목을 노려갔다.
소군의 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반대되는 호선을 그리며 빙백신의 검을 막아갔다.
치리리링!
또다시 검이 부딪히고 불똥이 튀었다. 초식으로는 천수불영검이 우세하고 그 위력이나 공세적인 면에서는 빙백신의 공세가 더 뛰어났다.
뛰어난 두 무인의 무공에 순식간에 이곳저곳에서 불똥이 피어오르고 검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