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독룡-28화 (28/61)

제4장

“의뢰자가 누구지?”

정신을 차린 용병제가 눈을 뜨자마자 들었던 첫 마디.

침상이 있고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진건곤과 소검후, 정검과 무진. 태상제가 있었다.

진건곤의 일행은 객잔의 후원을 하나 빌려 그곳에 용병제를 데리고 간 것이었다.

임시로 마련된 용병제를 심문할 장소였던 것이었다.

용병제의 멍해 보이는 눈빛이 빠르게 이지를 회복했다.

역시 세파에 찌든 낭인들의 우두머리답게 빠르게 현실을 이해한 것이었다.

하지만 용병제의 입은 열리지 않고 단단한 눈빛만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거부!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눈빛이었다.

“흥! 모함을 하려던 놈이니 신의를 지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분골착근이라면 입을 열 수도 있겠지.”

“잠깐! 내가 시간을 주시오. 답을 들어 보겠소.”

진건곤이 고문을 시작하겠다고 하자 나선 태상제였다.

태상제는 진건곤에게 패배했지만 용병제의 보호자 자격으로 용병제를 따라왔다.

진건곤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완전히 물러선 것은 아니어서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용병제를 보고 있었다.

“가기야. 전날 소군처럼 그랬듯이 너를 구하기 위해 나도 역시 전진자와 싸웠다. 하지만 전진자에게 패하고 말았구나.”

용병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태상제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석 달 만에 그리 변했다면 세월이 지난들 다시는 복수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 것이었다.

“절검 어른과 소검후가 있다. 전진자가 화산의 제자로 너를 화산으로 압송하겠다고 하는구나. 너와의 약속을 세상이 다 알고 있으니 나로서는 그의 요구를 거절할 능력도 명분도 없구나. 너는 전진자에게 약속을 지키는 것이 좋겠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너는 화산을 참회동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더구나.”

참회동이라는 말에 용병제의 눈이 잠시간 흔들렸다.

화산은 도가였지만 기강이 엄하고 손속에 사정이 없는 편이었다.

화산의 손속에 살아남은 악인이 드물었고 한 번 화산의 참회동에 들게 되면 그곳을 벗어난 자가 아주 드물었다.

화산의 참회동은 곧 무덤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곧 이어 용병제의 눈은 예전의 단단함을 찾아갔다.

“낭인들의 수장으로서 의뢰자를 밝힌다는 것은 그 여파가 작지 않습니다. 사부님! 제가 의뢰자를 밝힌다면 내게 몸을 의탁했던 수천의 낭인들은 모두가 의리가 없는 자로 전락하여 일거리조차 얻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 입을 열겠습니까? 그냥 참회동으로 가고 말겠습니다.”

수장으로서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진건곤이 그런 이유를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흥! 너는 애초부터 지키지 않을 약속을 했단 말이구나. 나는 너처럼 신의가 없는 자를 수장으로 대접할 수 없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건곤의 손에서 분골착근의 수법이 펼쳐졌다.

분골착근의 수법은 기혈의 흐름을 끊어 근육에 마비를 불러일으키고 근육과 힘줄이 꼬이게 하는 수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근육과 힘줄이 완전히 꼬이고 말면 사람의 몸이 둥그렇게 말리고 마는데 몸을 웅크린 정도의 모양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고기 덩어리를 뭉쳐놓은 것처럼 되어버려 목숨을 잃고 마는 무서운 수법이었다.

일반인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으로 아주 널리 알려진 고문 수법이었다.

용병제에게는 아주 무서운 고통이 엄습했지만 용병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분골착근의 수법이 제대로 펼쳐졌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용병제의 얼굴에 땀이 올라오고 의복이 척척하게 젖을 정도가 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참고 있다는 것을 알뿐이었다.

진건곤도 더 이상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그만한 인물이 마음을 먹는다면 고문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세 시진이 지나면 그대의 단전을 깨트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화산으로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지. 그냥 이곳에 남겨두고 갈 것이다.”

분골착근의 고통 앞에 그토록 의연하던 용병제의 고개가 떨어졌다.

단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달랐다.

단전이 깨어진다면 그는 더 이상 무인이 될 수가 없었다.

“지… 금 죽… 게 해 다… 오.”

“흥! 그대는 무인의 자격이 없다. 무인의 명예와 약속을 져 버리고 훗날의 거래에만 집중하는 신의 없는 장사꾼에 불과하지 않는가? 장사를 하겠다면 무공이 없이도 충분하지 않더냐?”

하지만 용병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온몸이 땀에 젖어 커다란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이 확연한 데도 불구하고 세 시진 동안 입 한 번 벌리지 않았다.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가 용병제의 정신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진건곤은 정확히 세 시진이 지나자 검을 뽑아 그의 단전을 찔렀다.

진건곤의 검은 용병제의 아랫배를 정확히 두 자 반의 깊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용병제가 온몸을 떨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는 데려가도 좋소.”

태상제는 두말이 필요 없다는 듯이 용병제를 둘러업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를 보내서는 단서를 잡을 수 없지 않나요?”

소군의 질문이었다.

진건곤이 소군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특별히 원한을 산 것도 없었는데 나를 노리는 상대는 언제나 있었으니까요. 용병제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자를 시켜 나를 노리겠죠. 그게 정확히 공희국일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공희국을 파고드는 한 멈추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진건곤은 자신을 노리는 자들의 배후로 공희국과 관련된 자로 정했다.

“하지만 진 공자의 설명대로라면 장보도를 얻기 위해 검을 쓴 자가 바로 용병제일 수도 있어요.”

소군이 말을 에둘렀지만 그 말의 뜻은 명백했다.

용병제가 장보도를 얻기 위해 진건곤의 아버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진정한 복수를 원한다면 아버지를 죽인 칼에 할 것이 아니라 칼자루를 쥐었던 자에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의 용병제는 도구에 불과한 자니까요. 이제부터는 진정한 범인을 찾아야겠습니다.”

진건곤의 눈은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해 둔 것 같았다.

“그럼 화산에는 언제 올 작정이냐?”

진건곤의 말에서 화산으로 갈 마음이 없는 것을 읽은 절검이 진건곤의 의향을 물었다.

“이제 사부님을 모셨으니 화산으로 가지 않을 수 없지요. 하지만 이미 시작한 아버님의 복수를 마무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절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마무리하고 오너라. 필요하다면 나에게도 도움을 청하고. 나이는 먹었지만 짐이 되지는 않을 것이야.”

천하십대고수로 꼽히는 절검이라면 짐은커녕 누구보다도 더 도움이 될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진건곤은 절검에게 구배지례를 올렸다.

“허허허! 새삼스럽기는……!”

절검은 말은 그리했지만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진건곤의 구배가 끝이 나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사부님.”

“무슨 일이더냐?”

“사부님의 일입니다. 사부님.”

“무엇이라고?”

사부에게 사부의 일이라고 하니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절검이었다.

“군자검 사부님이 위험합니다.”

“운현이가? 무슨 이유로?”

“흐흠.”

진건곤은 작게 기침을 하며 눈짓으로 무진을 가리켰다.

“걱정하지 마라. 이렇게 하면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절검과 진건곤의 주위로 얇은 기막이 둘러졌다.

태상제가 보여주었던 것과 닮기는 했으나 절검의 그것은 상천의 힘을 가진 진건곤이 아니고 서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미약한 기운이었다.

“소군 누이도 같이 들어도 됩니다.”

절검의 기막이 스르르 넓어지더니 소군을 그 안으로 들어오게 감쌌다.

소군의 봉목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이것은……!”

“허허허! 늙은이의 잔재주에 불과하지.”

진건곤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독룡살검이 바로 사람의 광기를 격발시켜 살육과 욕망에 사로잡히게 했다는 것을.

또한 용병제가 보여주었던 것도 역시 똑같은 도법이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아울러 군자검이라고 불리는 운현도 역시 독룡살검과 가일구층황금공을 알고 있다는 것도 말을 하였다.

“군자검 사부님이 그런 검인 것을 알고 독룡살검을 배웠을 리가 없습니다. 틀림없이 함정에 빠졌던 겁니다. 생각해 보건대 환천삼보를 찾았던 것과 관련이 있을 듯해 보입니다. 어쩌면 용병제도 역시 환천삼보라는 이름 아래 함정에 빠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건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소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건곤이 용병제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이 이해가 갔다.

환천삼보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그 와중에 진건곤의 아비가 휘말린 것이라면 그 음모의 주범이야말로 진정한 원수일 것이었다.

용병제를 칼로 취급하며 칼자루가 아닌 칼을 쥐었던 사람을 찾겠다는 진건곤의 말이 완전히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독룡살검을 수련하였지만 처음에는 단지 살기가 강한 검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런 부작용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상천의 힘을 사용하고부터 그 무공의 오의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룡살검은 교묘하게도 십 성 이상의 수위를 지녔을 때만 그 마각을 드러내도록 숨겨놓은 무공이었습니다. 이미 절정의 고수라는 말을 듣는 자들이 마검에 씌움을 당하고 세상을 어지럽히게 된다면 세상은 극히 혼란스러워 질 것입니다.”

“가일구층황금공은 어떻더냐? 그것도 역시 문제가 될 것 같더냐?”

절검의 물음에 진건곤의 고개가 자신 없게 좌우로 흔들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가일구층황금공을 익히지 못했기에 그 무공에 어떤 것을 숨겨 놓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태상제가 가일구층황금공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독룡살검과 가일구층황금공은 분명히 환천삼보의 일을 주관했던 자들이 뿌려놓은 씨앗이라는 것입니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소군과 절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하긴 환천삼보의 전설에 얼마나 많은 무림인들이 휩쓸렸더냐? 심지어 구파일방의 제자들조차도 그랬으니 세속의 무인들은 더 심했을지도 모르지.”

“한꺼번에 그 사람들이 모두 이성을 상실하게 된 다면요? 그것도 평소에 숨겨오던 자신을 드러내야 할 만큼 중요한 순간에 말입니다. 물론 용병제보다 더 강한 자들이 말입니다.”

소군의 말에 진건곤과 절검의 안색은 모두가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말을 꺼낸 소군조차도 안색이 굳을 지경이었다.

“대혼란이 일어나겠지. 비장의 한수를 꺼내었는데 그것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고 말이야. 원시천존! 원시천존!”

“무량수불!”

그들의 입에서는 도호와 불호가 연달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사부님께 이 사실을 알려주시고 사부님을 보호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라. 운현은 내가 보호하도록 하마. 그런데 말이다. 네가 사용하는 무공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종류의 것들로 그것이 무엇인지 내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상천의 힘입니다.”

“상천이라고?”

“상천이요?”

진건곤의 답에 소군과 절검 모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상단전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하기 빠를 것입니다. 모산파의 비전입니다.”

모산파라는 말에 소군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절검의 반응은 더욱 컸다.

“허허! 상단전이란 말이냐? 허허허! 내 이 나이가 되어서야 명문혈에 진기가 모인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것을 중단전이라고 부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단전이라니……!”

절검의 말에 진건곤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하오나 정확히 상단전은 아닙니다. 이해하기 편하게 그리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상천의 힘은 하단전의 힘과는 전혀 다른 힘이 있습니다.”

“아니야. 맞을지도 모른다. 중단전의 힘도 역시 그러하니까. 안 그렇소, 소검후?”

절검은 진건곤의 말에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였다.

오히려 소군에게 동의를 얻고자 하는 물음을 던졌던 것이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말씀을 낮추어 주시기 바랍니다. 어르신, 감히 공대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일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잠시였다. 전 전대의 인물이거니와 반백 년의 나이를 더 먹은 절검이 자신에게 공대를 하자 감당할 수 없는 소군이었다.

“허허허! 그럼 그리하겠소. 소검후도 역시 중단의 힘을 알고 있지 않소?”

“미력하나마 본녀도 역시 중단의 존재를 조금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중단의 효과는 하단의 것과 전혀 달라 도저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두 고수의 결론은 같았다.

중단의 힘이 하단전과 다르듯이 상단전의 힘도 중단과 다를 수 있다는 것.

상천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상단전을 의미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었다.

하여튼 그 후로 진건곤의 말이 이어졌는데 그 내용은 상천의 힘을 다스리는 법을 모산파에게 얻었다는 말을 하였다.

본디 모산파는 귀신이나 요괴 등의 일에 관여하고 있으며 같은 구대문파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벌이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도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천의 힘이라는 말을 듣고서 놀라고 말았다.

“모산파의 신묘한 힘은 타고난 자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네가 그런 아이였단 말이냐?”

절검은 스스로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건곤의 무공이나 남들과 다른 묵념시용 등은 그마저도 놀랄 지경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 답은 전혀 달랐다.

“아닙니다. 제가 깨우친 상천의 힘은 전진의 비전을 이은 것이었습니다.”

“호오, 전진의 비전이란 말이냐?”

“그렇군요. 그래서 전진의 고수들이 쓰는 힘은 이해할 수 없는 힘이라고 선대 조사님들이 말을 하셨던 게로군요. 전진의 비전이 상단전을 깨치는 힘이라니……!”

절검과 소군은 각기 그들의 방식으로 진건곤의 말을 받았다.

“전진은 많은 구도자들이 모여 상천의 힘을 얻는 자들이 드물기는 해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도를 깨달아 상천을 연 자들의 도는 높아 그 한두 명의 이름으로도 천하가 전진의 이름을 흠모하도록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모산파는 타고난 능력을 지닌 자들을 찾아 그들의 힘을 세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고자 하는 곳이었답니다. 전진의 도는 극히 얻기가 어려웠으나 무공을 얻는 일은 그에 비해 쉬웠으니 무공을 익히는 도기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자연히 무공이 발전했고 그렇게 무공이 발전하고 나니 후인들이 모두가 무(武)를 쫓아 전진에도 상천의 연을 이은 자가 사라지고 말았다더군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근자에 들어 모산파도 역시 상천의 힘을 타고난 아이들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여 우연케도 상천의 힘을 얻은 제게 그 힘의 사용법을 알려주고 그 힘을 기르는 법을 배워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낮에 보셨던 백자가 바로 그 임무를 띠고 온 아이였습니다. 삼영진군이라고 하여 선인들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아이였습니다.”

진건곤의 말에 소군과 절검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모산파란 말이지. 과연 모산파의 무공은 신묘한 구석이 있었지. 워낙 젊은 시절에 봐 놓은 것이라서 그때는 그것이 무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피를 뿌리거나 허공에 진을 그려 써먹기도 했지. 내 보기에도 그건 무공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제 네 말을 들어보니 조금은 이해가 가는구나. 상천이라……!”

절검과 무진은 화산을 향해 곧장 떠났고 진건곤과 소군은 소군의 집을 향했다.

“그간 극진한 대접에 감사드립니다.”

진건곤은 소 무국공의 부부에게 두 손을 모아 포권을 하며 인사를 올렸다.

진건곤의 예에는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다른 의미가 있어 더욱 공손하게 보였다.

그를 석 달 동안이나 빈객으로 대접해 주었던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 나중에는 어찌될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 점에 있어서는 소 무국공의 부부도 다르지 않았다.

“좀더 있었으면 싶네만.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들었으니 더 잡지는 않겠네. 하지만 일이 끝나거든 꼭 나를 보러오게. 알겠는가?”

소 무국공의 말은 어느새 하대로 변해 있었고 그 눈길에는 자식을 대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변변한 검이 없다고 들었네. 이것을 가져가게!”

소 무국공이 내민 것은 소영현이 내밀었던 예의 검이었다.

“이건……?”

진건곤의 눈에는 놀람의 뜻과 거부의 뜻이 동시에 떠올랐는데 소 무국공의 말이 진건곤에게 거부권을 빼앗아갔다.

“영현이 아니라 영라의 예물일세. 그럼 되었지 않나?”

“아버님!”

소군이 깜짝 놀라 소 무국공을 불렀으나 그들은 흐뭇한 웃음만 지을 뿐 소군의 말에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잘 부탁하네.”

소 무국공이 힘을 주어 진건곤의 손을 꾹 쥐었다가 풀어주었다.

진건곤과 소군이 놀라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호호호! 제가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언니라면 제가 양보해야지요.”

그랬다. 소영현은 비무를 치르며 자신이 보았던 일을 집에 와 이미 다 이야기했던 것이었다.

눈치가 빠른 소 무국공의 부부는 그 말을 듣고는 진건곤이 소군에게 마음을 두고 있지만 소군이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또한 소군도 역시 진건곤을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소군은 난데없는 일에 당황하며 소영현을 쏘아 보았다.

[영현아, 이 어찌된 일이더냐? 무슨 소리를 한 게야?]

그녀에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 전음을 보내 사정을 물어보았다.

“영현이를 나무랄 것 없다. 네 나이가 얼마더냐? 네가 정녕 불효를 저지를 것이 아니라면 어미의 뜻을 따라주려무나.”

하씨 부인은 단호하게 소군의 말을 잘라내었다. 그리고는 한술 더 떠 소군에게 보퉁이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진 서방이 위험한 일을 한다고 들었다. 네가 따라다니며 잘 보살펴야 할 것이야.”

“어머님!”

소군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소리를 내었으나 방 안에는 아무도 그녀의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진건곤마저 얼굴에 웃음을 지울 수 없는 표정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일을 치르는 대로 돌아와 혼례를 치르겠습니다.”

“하하하하! 고맙네.”

“호호호호! 우리 영라에게 이렇게 좋은 짝이 생기다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네. 잘 다녀오도록 하게.”

“호호호호. 잘 부탁드려요. 형부!”

마지막으로 백자의 음성이 울렸다. 그 음성은 뾰족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본녀가 월하노인을 자처했으니 술 석 잔은 할 자격이 있겠지?”

진건곤은 그제야 사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은 백자의 삼영 중의 하나인 우미인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해하(垓下) 성에 이르러 금존청을 준비하면 본녀가 다시 나올 것이야.”

해하라면 초왕이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져 실의했던 그곳이다. 우미인은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백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회복했다. 우미인은 이미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일단, 짐이라도 잘 챙겨주셨을 것이라고 믿어요. 어머님.”

소군이 웃음을 지으며 하씨 부인에게 물었다.

“이를 말이겠니. 빠진 것 없이 잘 챙겼구나.”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씨 부인이 무슨 말인지 멀뚱거리고 있을 때, 소군이 보퉁이를 받아 들고는 갑작스레 움직여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누님!”

“영라야!”

“언니!”

소군이 사라진 곳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만 하기가 다행이구나. 단전은 잃었어도 목숨이 살았으니 이제는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않겠느냐? 내가 네게 힘을 주마. 분명히 그들을 찾아 네게 단전을 돌려줄 것이야. 그들을 찾을 때까지만 조용히 몸을 사리면 된다. 복수는 그때에 다시 하자.”

태상제는 정신을 잃고 등에 업혀 있는 용병제에게 타이르듯이 조단조단 말을 하였다.

놀라운 소리!

깨어진 단전을 복구할 수 있단 말인가?

태상제가 말하는 그들이 누구란 말인가?

대체 누가 있어. 그것을 가능케 한단 말인가?

“다만 그들의 수하가 되어야 하지만 그 또한 나쁘지는 않다. 바로 세상의 주인을 섬기는 일이니까!”

세상의 주인? 황제라도 말하는 것인가?

태상제는 등에 업힌 용병제에게 이상한 말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가기야!”

태상제는 단전이 깨어진 자신의 제자의 이름을 불렀다. 얼마 만에 불렀던 이름이었는지 몰랐다.

태상제는 진건곤의 후원에서는 날듯이 빠져나왔지만 용병제에게 피해라도 갈까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득 길을 가던 태상제가 뒤로 돌아보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에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야행복을 입은 사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깊은 밤이었고 야행복의 색이 검은색이었지만 그런 것은 태상제의 시야를 방해하지 못했다.

태상제도 역시 그런 것에 구애받을 수준은 넘어선 무인이 아니던가?

“그대는 누군가?”

물어는 보았지만 대답을 원하지는 않았다.

태상제의 눈에서 살기가 솟구쳐 오르며 축객령을 내렸다.

“물러가라. 누구와도 이야기 하고 싶지 않으니까.”

야행복의 사내는 태상제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등에 업힌 용병제를 관찰하고 있었다.

“흐음, 죽지는 않은 것 같고. 단전을 상했나? 십중팔구 그럴 것이라고 하더니 과연 귀제갈다운 예측이로구나.”

파라라락!

태상제의 옷깃이 경기에 흔들리며 소리를 내었다. 흔들리는 옷깃과 함께 살기가 충천했다.

“이제는 목을 내놓고 가거라.”

어느새 태상제의 손에 쥐어진 도가 구룡을 부르고 있었다.

“깨어진 단전을 붙여주마. 너에게 그랬듯이.”

부르르르!

태상제의 도가 허공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당신이?”

“내 뒤를 따라라!”

야행복을 입은 사내는 태상제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쳐 날듯이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보는 태상제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들이… 그들이 널 찾아왔구나! 하늘이 너를 버리지 않았다. 이미 끝난 목숨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날아보자꾸나.”

태상제는 한참 동안을 경공을 펼쳐 날았다.

등에 업은 용병제가 걱정이 되었지만 어차피 그들이라면 괜찮을 것이었다.

깨어진 단전도 회복시켜 주는 그들의 의술이라면 ‘외상쯤이야?’ 라고 생각을 하며 야행복의 사내를 놓치지 않는 것에 주력할 뿐이었다.

야행복의 사내가 멈춰 선 곳은 의외의 곳이었다.

태상제도 이미 여러 번 와 본 적이 있는 곳.

바로 중경의 명산지로 소문난 추리산의 추리사였다.

“이곳에……?”

야행복의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추리사를 돌아 뒷길로 돌아 들어갔다.

한 사람이나 지나다닐 만한 소로를 따라 가보니 의외의 곳이 나왔다.

숲 속 깊은 곳에 다관(茶館)이라니.

제법 전경이 뛰어나 충분히 다관을 차릴 만하였으나 진정 다관이 있다는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후미진 곳이었다.

야행복의 사내가 멈춰 선 곳에는 또 다른 자가 있었다.

그의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였는지 복면을 반절을 열고서 입 주위를 내세우고 있었다.

“판정은?”

“아! 이 사람이 급하기는. 차 맛도 좋은데 한잔 하겠나?”

그의 옆에는 다관의 주인인 듯 보이는 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차 주전자를 들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됐네. 두려움에 가득한 차를 마시느니 마시지 않는 게 나을 걸세.”

“하하하! 그러지 말고 마셔보지 그러나? 이 다관이 용도가 추잡해서 그렇지 차 맛은 일품일세. 찻물도 이슬만 받아서 쓴다고 하지 않은가? 그렇지 주인장?”

찻잔을 든 야행복의 사내가 주인장을 향하자 주인장은 사력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면 입쇼. 이곳에는 고관대작들의 마님들이 드나들기에 차의 품질을 유지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물은 아침에 일어나 이슬을 모아 만든 감로수만을 쓰고 차는 진품만 씁니다. 차… 차 맛은 보증합니다.”

주인장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차가 진품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었다.

“됐네. 판정이나 전해주게.”

태상제를 이끌고 온 야행복의 사내가 다시 묻자 차를 마시던 자가 입을 열었다.

“사(死)! 염정간옥(染情奸獄)의 검을 함부로 사용한 죄네. 태상제도 역시 약속을 어기고 제자에게 염정간옥의 검을 전한 죄. 게다가 황금공을 사용하였으니 둘 다 제거하라는 명일세.”

태상제의 고개가 땅으로 떨어졌다.

‘이런! 호랑이의 아가리로 들어왔다니.’

“하지만 너무나 슬퍼하지는 말게, 태상제. 당신과 당신의 제자가 전진자를 제거하는 데 특별한 공을 세우게 될 테니까 말이야. 하하하하!”

태상제를 이끌고 왔던 자가 검을 뽑았다.

태상제도 역시 용병제를 땅에 눕히고 도를 뽑아 들었다.

“하하하하! 자네는 너무 없어 보이나 보네. 태상제 따위가 감히 대적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하하하하하!”

차를 마시던 자가 웃으며 찻잔을 놓았다.

번뜩!

툭! 데구루루!

섬광이 일고 다관 주인의 목이 떨어졌다.

태상제는 그의 검을 보고 자신의 목이 오늘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네놈들의 시신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존재조차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태상. 하하하하!”

사내는 반쯤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어젖혔다.

“상… 상 장로. 네놈이?”

“쯧쯧쯧, 기껏 기회를 주었는데도 쓰지 말아야 할 무공을 사용하고 오히려 전진자의 무공만 늘려 놓다니. 네놈들이 아니라도 낭인들을 규합할 수 있다. 이제는 죽어랏!”

상 장로의 검은 전진자의 쾌검과 매우 흡사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연이어 나오는 매화분분의 초식을 보면서 태상은 자신의 용도를 깨달았다.

‘전진자를……! 전진자를 모함하기 위해서!’

이제 서른둘의 진람파는 세월이 좋은 청년이었다.

일찍이 이리저리 굴러 제법 돈도 모았겠다.

인물도 제법 반반하여 따르는 여인도 많았다.

물론 진람파는 아무하고나 성혼할 만큼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미 세파에 닳고 달았던지라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켜 줄 여인을 고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찾아오는 여인을 거부할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여인들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만나 음욕을 채우는 정도로 해결하곤 했다.

오늘도 역시 여인을 만나러 산에 오르고 있던 참이었다.

너무 이른 아침이어서 잠이 덜 깬 것을 빼고 나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경관이 빼어나기로 소문난 추리산. 추리산 중턱에 있는 추리사라는 절에 올라 불경을 들으며 빼어난 경치를 보고 나면 십이면 십 여인들의 방심이 흔들렸다.

더욱이 좋은 것은 수리사를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다 보면 작은 숲길이 있었다.

숲 속 깊은 곳에 그 존재가 의심스러운 다관이 있었다. 산중에 다관이라니!

물론, 다관은 찻값이 매우 비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찻값이 비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바로 밀실로 되어 있는 구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선 문을 걸어 잠그고 무엇을 하든지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으니까.

진람파가 여인을 이끌고 가는 곳은 바로 그곳이었다. 역시나 비싼 차만 마시고 나올 생각은 아니었다.

“고…공자님! 저… 저기!”

여인이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길게 자란 풀 속에 옷자락 같은 빛깔.

하지만 진람파는 그곳에는 더 이상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을 찾아낸 여인에게 속으로 욕을 할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알만한 년이 여기까지 와서 무슨 수작인 게야?’

하지만 속마음을 말로 뱉어냈다가는 당장 산통이 깨진다는 것을 진람파는 잘 알고 있었다.

“하하하! 걱정 마세요. 깊은 숲이기는 해도 사람이 많은 곳이라 짐승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 곳이랍니다.”

진람파는 여인의 손을 안으로 잡아끌며 생각했다.

‘여기까지 와 놓고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다지 탐탁지 않지만 이렇게 도망치려 하니 더욱 놓치기 아쉬운걸.’

하지만 진람파는 오늘따라 치솟는 욕정에 여인의 손을 더욱 세게 잡고는 앞으로 이끌었다.

물론 비명이 나와서는 곤란하니 상대가 부담스럽지 않게 부드럽게 말이다.

“꺄악! 꺄아아악!”

여인의 비명에 눈이 돌아간 진람파도 같이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으아아아! 으악!”

그곳에는 목이 잘린 시체 한 구가 숲 풀 속에 구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온몸에 칼 자욱이 가득한 노인이 있었다.

“이럴 수가! 화산파라는 곳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화산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어요. 전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흑백이로는 엄청난 흥분을 하며 화산파를 향해 증오를 뿜어내고 있었다.

“진정하시지요. 진정하세요.”

오 장로 중에 하나였던 항산 도부 경대수였다.

“화산과 싸우자는 말이오? 절검과 싸우자는 말이오?”

“당연하지 않소? 용병제님의 목이 잘렸고 태상제는 저리 당하고 정신을 잃고 있었소. 그들이 데리고 가서 저지른 짓이란 말이오.”

흑로가 얼굴이 벌게져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들의 짓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소?”

“흥! 하는 짓이 뻔하지 않소? 전진자가 그랬을 것이오. 다행히 태상제님이 도망을 친 것이고 말이오. 태상제님의 몸에 새겨진 무공은 화산파의 것이 틀림없소이다. 전진자가 펼치던 쾌검과 매화분분의 초식이지 않느냐 말이오.”

“만일 그들이 우리가 그랬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를 족치기 위해 음모를 씌운 것이라면 말입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단 말이오?”

“그들이 내세우는 말을 들을 필요가 있겠소? 우리는 우리식대로 하면 될 것이 아니겠소? 바로 상금을 거는 것이오. 전진자에게만 상금을 걸자는 것이오. 화산과 싸울 필요 없이 전진자만 죽이겠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명분이 서리라고 생각하오. 분명히 용병제님을 죽인 놈들이니 명분은 우리에게 있소이다. 황금 만 냥과 용병제의 무공을 내어 걸 것이오.”

황금 만 냥이라면 큰돈이다. 하지만 낭인들에게 그것보다 더 큰 조건은 바로 무공이었다.

비록!

도부가 흑백이로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말이오. 그들은 구더기가 아니지 않소? 전진자는 이미 화산의 제자란 말이오. 화산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오. 전진자는 그런 화산의 최고기인이라는 절검의 제자란 말이오. 적어도 태상제께서 깨어날 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립시다. 화산을 상대하는데 그 정도는 확인을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도부의 말에 흑백이로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그들의 눈에서 쏟아져 나온 살기가 새롭기는 했지만 도부는 그것이 전진자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날 밤 인시(寅時) 무렵.

태상제의 침실을 지키던 도부가 요의를 느끼고 잠시 일어났다.

자신 말고도 그곳을 지키고 있던 다른 장로가 있으니 아무런 걱정 없이 일어섰다.

하지만 도부는 측간에서 밤하늘을 울리는 곡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태상제님! 이렇게 가시면 어떡합니까!”

“빌어먹을! 빌어먹을 전진자! 이 원한은 꼭 갚고 말겠다.”

도부가 서둘러 태상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보았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태상제였다.

“세상에……! 상 장로 남기신 말씀은 없었소?”

“경 장로! 태상제께서는 마지막으로 전진자를 부르다 가셨소이다. 바로 전진자를 말이오. 그놈을 왜 불렀겠소? 전진자 이놈을 용서할 수가 없소이다.”

주위의 인물들도 모두가 똑같은 말을 하였다.

그들은 상 장로가 유언을 듣는 척하며 태상의 몸 안으로 내공을 불어 넣어 심맥을 모두 끊어 버린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듣기로는 상 장로의 말과 똑같이 전진자를 부르는 태상의 목소리만 들었던 것이다.

상 장로의 분노 서린 음성이 밤하늘을 갈랐다.

진건곤은 소군의 집에서 삼 일을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늦출 수 없어 짐을 싸들고 일어섰다.

하지만 진건곤은 멀리 움직이지 못하고 방해물을 만나고 말았다.

소 무국공의 집을 나서자마자 살기를 뚝뚝 떨어트리는 미행자를 만나고 만 것이었다.

‘흥! 누님의 부탁으로 살생을 피했지만 이렇게까지 살기를 흘리고 다니면 참기 어렵지.’

상대방이 진한 살기를 노골적으로 흘리고 있었기에 진건곤은 자연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는 진건곤이었다.

하지만 그저 따라붙을 뿐,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이동하는 동안 살기의 주인이 여럿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말을 타고 중경의 성도인 XX를 다 빠져나가, 한적한 곳에 이르자 살기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진건곤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무인이 모여들었다.

살기등등한 감시는 아마도 이것을 위한 것이었으리라.

“네 이놈! 강호의 도의를 똥통에 처박아 버린 놈아. 네놈이 아무리 화산을 등에 업고 있다고 해도 네놈을 용서치 못한다.”

흑백이로 중에 흑로였다.

“문초를 하겠다고 모셔간 용병제를 죽이고 원한도 없는 태상마저 죽게 하다니 네놈을 용서할 수 없다. 네놈이 죽을 때까지 낭인들은 네놈을 쫓을 것이다.”

“잠깐! 무슨 소리냐? 그들이 죽다니?”

진건곤은 금시초문의 일에 놀라 되물었다.

“흥! 가증스러운 놈! 죽어가는 태상께서 이미 너를 지목했거늘 자신이 한 일을 부인할 셈이더냐?”

흑로는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서며 진건곤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나서는 자들이 있었다.

오 장로와 십방살!

상대는 같았지만 비무 때와는 전혀 다른 압박감이 느껴졌다.

낭인들에게는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 당일, 용병제와 태상제를 놓아주었는데 무슨 억지더냐?”

진건곤의 말에 낭인들의 안색은 더욱 싸늘해졌다.

“오냐, 이놈. 네놈이 실토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는 공정한 척하더니 뒤로는 호박씨를 까는구나. 구파일방이 원래 그런 종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당해보니 치가 떨릴 뿐이다.”

장로 중의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전진자를 죽여 복수하고 강호의 도의를 살리자!”

“전진자를 죽여 복수하고 강호의 도의를 살리자.”

낭인들은 그의 선창에 따라 세 번을 외치더니 좌우로 움직여 그들의 진법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적은 오직 하나다. 고래로 열 손을 하나가 당하는 법은 없었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성공하리라!”

또다시 백로가 선창을 하자 다른 자들도 복창하며 쇄도해 들었다.

아무리 진건곤이 무공이 높았더라도 생명을 도외시하며 덤비는 모습에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뿌옇게 흐려진 검. 검기가 서린 검과 도, 창, 부 등의 여러 가지 병기들이 일시에 진건곤에게 쏟아졌다.

물러섬이 없는 기세가 담긴 병기들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눈먼 칼이라도 맞는다면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다.

하지만 진건곤은 상천의 힘을 사용하는 자.

상천의 힘을 사용하면서 얻은 힘 중에 한 가지 모용이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었다.

진건곤은 자신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병기들의 존재를 모두 느낄 수가 있었다.

도합 열일곱 개가 한꺼번에 들어왔고 그 속도의 약강을 모두 느낄 수가 있었다.

‘이곳!’

진건곤이 선택한 곳은 개중에 무공이 강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바로 장로들이 병기를 쳐내고 있는 곳이었다.

진건곤은 어깨에 메어진 두 개의 검중에 철검을 뽑아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아가며 매화분분의 초식을 펼쳤다.

허공에 뿌옇게 아지랑이가 생겨나더니 어느새 매화꽃이 되어 전면으로 쏘아졌다.

따다다다당!

장로들은 급하게 매화꽃 검기를 막아내었다.

그들은 그 충격으로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 뒤로 들어온 낭인들이 진건곤에게 쏘아낸 검기가 진건곤의 육신을 난도질할 것 같았다.

진건곤의 검과 몸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번득!

따다다다당!

화련직검의 쾌검이 검광을 번뜩이며 거듭 여섯 번이 쏘아지며 주위에 원을 그려내었다.

둔중한 손의 감촉과 복수의 통쾌함을 기대했던 병기가 강대하고 빠른 힘에 튕겨지자 그들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흑백이로와 오 장로를 한꺼번에 뒤로 물려내었던 경력이었다.

무공이 높아 선봉에 섰지만 장로들에 비하면 격에 떨어지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그들로서는 연방 뒤로 물러나며 검을 놓치지 않으려 애쓸 뿐이었다.

그들이 물러나자 진건곤의 주위로 반장 정도의 공간이 열렸다.

치리릿!

진건곤의 주위로 반장의 공간에 땅이 파이며 원을 그렸다.

“흥! 숫자로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경고는 끝이다. 이 원을 넘어 내게 검을 들이대는 자, 이제는 목을 칠 것이다.”

낭인들에게 기본적으로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진건곤으로서는 그들의 살기를 참아낼 마음이 없었다.

그 원은 손속에 사정을 두기를 바라는 소군의 바람에 따라 그려진 선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낭인들에게 그런 경고가 통할 리가 없었다.

도끼를 휘두르며 원안으로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흥! 네놈이 죽을……!”

피윳!

허공에 피가 튀고 목이 쩍 벌어지더니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들고 있던 병기도 역시 갈라져 있었다.

검기를 두르지 않고는 일 검도 막아낼 수 없는 진건곤의 검이었다.

그 모습에 장로들이 즉각 반응하며 진건곤에게 쇄도해 들었다.

“쳐라!”

“죽엿!”

“간악한 놈!”

일시에 밀려들었지만 진건곤이 그어 놓은 원은 깨어지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곳에 꽉 차 있어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진건곤의 검은 놀라운 속도로 번뜩이며 사방을 휩쓸었고 진건곤은 마치 한자리에서서 춤을 추는 듯했다.

다만 춤사위와 다른 점은 너무 빠른 모습에 그 모습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진건곤의 손과 발은 뿌옇게 흐려져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낄 정도에 불과했다.

피윳! 핏! 떠덩! 더더더덩!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가운데 간간이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묵직한 소리가 들릴 때마다 검기를 끌어올려 진건곤의 검을 막아가던 장로들이 하나씩, 하나씩 죽어갔다.

“물러서! 더 이상의 희생은 무의미하다.”

용병제에게 특별한 충성심을 보이던 흑백이로와 두 명의 장로가 죽었을 때, 그제야 퇴각명령이 내려졌다.

태상제의 죽음을 알렸던 상 장로의 음성이었다.

“상 장로님!”

“우우우우!”

가까운 곳에서는 반기를 들었고 멀리서는 비난의 신음이 울렸다.

“흑백이로와 오 장로가 함께 덤볐으나 그를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용병제와 태상제를 꺾었다. 정면으로 그를 감당할 자가 없어. 분하지만 다른 방법을 알아봐야겠다.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이 이리도 분할 줄은 몰랐구나.”

상 장로는 이야기를 마치며 스스로 고개를 떨어뜨렸는데 그 음성은 침울하기 이를 데 없어 아무도 그의 퇴각명령에 반기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음성에 설득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진건곤이었다.

“하하하하! 낭인들이라더니 그야말로 모래알 같은 조직이로구나. 모래알 위에 여우 한 마리가 앉아 이리 그리고 저리 그린다 하더니 딱 그 짝이로구나. 개중에 가장 고수로 보이는 놈은 뒤로 물러나 앉아 퇴각명령을 내리고 나머지 두 놈은 흉내만 내어 몸을 사리는군. 흥! 의도대로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쫓지 않겠지?”

진건곤의 말에 상 장로는 얼굴이 벌게졌다.

하지만 진건곤과 싸우기 위해 앞으로 나서는 짓은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내 무공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사용한 적이 없는데 저놈이 어찌 아는 척을 한단 말인가? 저놈이 혹시 다른 사람의 기운을 읽는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면서도 연기만은 기가 막혔다.

얼굴이 붉어져 분노한 모습으로 소리를 질렀다.

“네놈, 참으로 집요하구나. 용병제님과 태상을 돌아가시게 하고도 원한을 잊지 못한단 말이구나. 아직도 그런 소리로 우리를 이간질하려 한단 말이냐?”

상 장로의 말에 진건곤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경멸의 눈초리가 되어 상 장로를 바라보았다.

“흥! 웃기는 세상이로구나. 용병제보다 더 강한 무공을 가지고도 그를 구하지 않았던 자가 그가 죽고 나니 충정을 보인단 말인가? 남은 자들은 저자를 경계하는 게 옳을 것이야. 틀림없이 살아남은 자들은 저자의 수족일 테니까.”

진건곤은 한마디를 남기고 걸음을 옮기자, 낭인들은 진건곤의 발걸음을 감히 방해하지 못했다.

두려움과 혼란함이 혼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건곤이 떠나고 난 자리에 낭인들의 눈이 상 장로를 향하고 있었다.

진건곤의 말대로 남은 두 장로는 평소 상 장로와 장단을 맞추기로 유명한 자들만 남았던 것이다.

이제 낭인들의 단체는 상 장로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에잇, 퉤!”

“빌어먹을! 용병제의 피가 식지도 않았는데 권력싸움이나 하고 있다니.”

남아 있던 용병들 중에 일부는 이미 전진자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병기를 집어넣고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이미 죽어버린 두 장로들의 수족이었다.

평소부터 상 장로의 견제를 받았던 탓에 전진자의 말을 수긍하며 돌아선 것이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자들은 용병제와 흑백이로를 따르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낭인들의 육 할에 해당하는 자들이었다.

낭인들의 중심이며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도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웅성거림 속에는 상 장로를 향한 불신이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그들마저 떠나버릴 지경이었다.

“자…잠깐! 너희들은 전진자의 말을 믿는단 말이더냐? 그자야말로 용병제와 태상을 베고 흑백이로와 두 장로님을 벤 자다. 진실로 우리의 적은 그자가 아니던가? 나를 믿어야 할 것이다. 나 초리검 상산운은 이날 이후로 전진자를 제거하는데 총력을 기할 것이다.”

“흥! 지금 당장 전진자를 잡지 그러시오.”

“무얼 보고 그 말을 믿어야 하겠소?”

“우리는 따로 움직여야 하겠소.”

상 장로를 불신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일부는 걸음을 옮기려고 하고 있었다.

상 장로는 급히 입을 열었다.

“아직도 전진자의 말을 믿는단 말인가? 그 간악한 자의 이간질에 속아서는 안 될 것이야. 그자가 노리는 것이 장로들의 멸절인지도 모른다. 지도부가 없는 낭인이라면 그야말로 모래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상 장로는 자신이 지도부라고 여기고 있단 말이오?”

낭인들의 음성이 울렸다.

상 장로는 대뜸 그 말을 받아쳤다.

“그렇다. 나야말로 살아남은 장로들 중에 대표가 아니겠는가? 나 말고 누가 용병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전진자의 말대로 어부지리를 노린 것이 아니냐?”

“이런 비겁한 자!”

상 장로는 자신이 용병제가 되겠다는 야망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 말을 기화로 낭인들의 입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상 장로는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 있는 목소리로 남은 자들에게 공력을 실어 소리쳤다.

“화령신을 모실 것이다. 전날 인연이 있었으니 화령신은 나를 외면하지 못할 것이야. 내가 화령신을 모신다면 그대들은 내 진심을 믿을 수 있을 것이야.”

화령신!

화령신이라면 세외의 신으로 불리는 자였다.

세외에는 삼신이 있었는데 서장의 신장으로 화령신이 있고 북해의 신장으로 빙백신이 있다. 동이의 신장으로는 백노신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들이라면 강호에 들어서도 능히 천하제일을 다투고도 남을 것이라는 평이 자자했었다.

적어도 소검후 이상이 확실한 고수들이었다. 그 중에 하나인 화령신은 능히 용병제의 복수를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언제 데려올 것이오?”

“말로만 그런다면 어찌 당신을 믿겠소?”

상 장로의 신의는 진건곤의 몇 마디 말로 이미 금이 가 있는 듯하였다.

화령신을 초빙한다는 말에도 약속보다는 증거를 원하는 자들이 더 많았다.

“석 달! 석 달 안에 그를 초빙하여 전진자의 목을 가져오겠다. 그때까지는 나를 차기 용병제로 인정하여야 한다. 약속하겠느냐?”

낭인들의 눈에는 반신반의가 서렸다.

스스로 용병제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말에 상 장로의 탐욕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석 달이라는 기한을 정한 마당에 그 말을 따라주지 못할 것은 없었다.

말 그대로 석 달 동안을 지켜본 후에 따로 갈라서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한동안의 웅성거림이 있은 후에 용병제를 따르던 자들이

“좋소이다. 하지만 한 달 안에 화령신을 초빙해야 할 것이오. 그것이 우리의 조건이요.”

한 달이라면 아무리 서장에 가까운 중경이라고 해도 촉박한 시간이었다.

“한 달 보름. 그때까지 화령신을 초빙하지. 그리고 석 달 안에 전진자의 목을 베어 전대의 용병제와 태상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겠다.”

상 장로는 한 달이 아니라 한 달 보름을 이야기하였다.

“알겠습니다. 상 장로님. 하지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전진자의 목을 베었을 때로 늦추겠습니다.”

상 장로를 대하는 말투가 달랐다.

이제는 상 장로가 화령신을 초빙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었다.

한동안 떨어져 나갔던 살기가 다시 붙었다.

하지만 관도를 따라 한 시진가량 달려 왔을까?

이제야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진건곤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관도에는 이곳저곳에 살기가 담겨져 있었다.

소위 매복이라는 것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거친 살기를 그대로 뿜어대면서.

히히이잉!

진건곤은 말 머리를 돌려 관도가 아닌 벌판으로 뛰쳐나갔다.

“쫓아!”

“이런!”

관도의 좌우에서 매복을 풀고 일어나는 자들이 거의 백에 달했다.

개중에 경공에 자신 있는 자들은 진건곤을 쫓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았다.

말을 쫓을 자신이 있는 경공을 가진 자들은 겨우 스물 정도에 불과했다.

진건곤은 고개를 설레 돌렸다.

“의리는 있을지 몰라도 사실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덤벼들다니. 부나방들이군!”

기운을 살펴보니 위협이 될 만큼 강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스쳐본 얼굴이 있는 것을 보니 낭인들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으로 복수를 하려는 자들 갔다.

진건곤의 뒤쪽에서 활과 암기 등이 날아왔다.

따다다당! 따다당!

진건곤이 철검을 뽑아 휘젓기를 몇 번 하자 모두가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가장 가까이 다가온 자가 진건곤의 머리를 노리고 유성추를 쏘아냈다.

진건곤이 뒤도 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검이 번뜩이자 유성추는 진흙 덩어리라도 되는 듯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떨어져 내렸다.

말을 달리며 뒤도 보지 않은 채로 쇠로 된 유성추를 갈라내는 진건곤을 본 그자는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그 뒤로도 창과 부, 도 등을 든 자들이 공격해 왔지만 진건곤이 뒤도 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일 검에 자신들의 병기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는 진건곤에게서 멀어져 갔다.

수효는 스무 명에 가까웠는데 겨우 여덟 번의 검 가름에 모두가 포기하고 돌아섰다.

철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진건곤은 예물로 받은 검은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등에 매어두고는 또 다른 철검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무뎌진 건가?”

진건곤은 더 이상 자신을 쫓는 자들이 없자 말을 늦추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살기를 뿜어내며 자신에게 병장기를 들이밀었는데 개중에 다친 사람조차 하나도 없었다.

“무뎌진 게 아니라 강자들만의 여유인가?”

그들에게 검을 들이밀지 않아도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생겼다.

그들이 한 공격은 필사의 것이었는지 몰라도 진건곤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인 듯이 받아준 것뿐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진건곤과 낭인들의 마주침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전진자. 그들은 떨어져 나간 떨거지에 불과하다. 그게 낭인들의 힘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지. 우리의 추적은 이제 시작이다. 전진자! 비룡대가 화령신이 올 때까지 너를 쫓아주마. 그동안 추호대의 괴롭힘을 받아보시지.”

그는 진건곤의 머리 위로 시선을 돌렸다.

까마득하게 먼 창공에는 매가 선회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전진자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였다.

푸르르르!

밤이 깊어지자 진건곤은 야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말이 달릴 수가 없었으니 동이 터 오를 때까지는 쉬어가는 것이 옳았다.

“휴우! 그나저나 좀 많군.”

불을 피워 물을 끓이며 주위를 살폈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기척들이 가득했다.

“이곳을 가득 메울 셈인가? 그나마 살기는 적으니 좀 나은가?”

낮에 세 번이나 낭인들의 무리들을 만났다.

그들은 어차피 진건곤에게 위험하지 않은 자들 어설프게 숫자만 믿고 나섰거나 나섰다고 해도 치밀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앞으로가 점점 더 문제겠지.”

진건곤은 자신을 노리고 있는 많은 수의 낭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느긋하게 식사준비를 하였다.

어차피 상대가 되지 못하는 자들이니 그리 곤란하지는 않을 것이었으니까.

끓인 물에 건량 등을 넣어 간단한 음식을 만들고는 먹어볼까 하는 순간이었다.

슈슈슉! 슈슉!

티디딩!

암기들이 날아오며 파공성이 일었지만 진건곤의 손에 쥐어 쥔 철검이 움직이자 불꽃이 튀며 튕겨나가는 게 고작이었다.

슈슈슉! 슈슉!

티디딩!

진건곤의 손이 계속해서 움직여야만 했다.

“이런!”

진건곤은 숫자가 많다는 것이 왜 유리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낭인들은 진건곤의 휴식을 방해할 생각인 것이 틀림없었다.

더 영리하고 노련한 사냥꾼들이 나선 것이었다.

슈슈슉! 슈슉!

티디딩!

암기가 날고 불꽃이 튀어 오르고 진건곤의 손은 계속해서 움직여야만 했다.

날아온 암기의 수도 많지 않았다. 그저 진건곤이 하려는 동작을 방해하는 정도밖에.

다른 손으로 음식을 떠올리자 상대방의 의중이 대번에 나타났다.

슈슈슉! 슈슉! 슈슈슉! 슈슉!

암기의 수는 급격하게 늘고 진건곤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펼쳐져 날아들었다.

도저히 그 자리에 앉아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결국에는 일어서야만 했다.

진건곤이 일어서자 또다시 암기의 양이 줄었다.

진건곤은 다시 앉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암기가 쏟아져 쉬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나를 상대할 줄이야.’

진건곤은 자신의 물건을 챙겨 일어섰다. 건량 등의 물건을 가지고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였다.

말이 있는 곳으로 다가서자 암기가 더 많이 떨어져 내렸다.

불허(不許)!

‘말도 두고 가란 말인가?’

진건곤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말 못 하는 미물이라도 특별한 이유 없이 죽어가게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푸핫! 내가 이렇게나 마음이 고왔던가?”

진건곤은 뒤로 물러서 손에 들고 있던 철검을 검집에 꼽았다.

슈슈슉! 슈슉!

또다시 암기가 날아왔지만 이번에는 받아치지 않았다.

암향표!

화산의 절기가 펼쳐지고 진건곤의 신형이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암기가 쏘아지는 곳. 낭인들이 서 있는 곳이었다.

언제 꺾어 들었는지 진건곤의 손에는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퍼버벅! 퍼벅!

“피해!”

“물러나!”

경고성이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순식간에 일곱 명의 낭인들이 바닥을 굴렀다.

슈슈슉, 슈슉!

암기를 던지던 자들이 모두 바닥을 구르게 된 순간, 잠시의 틈도 놓치지 않고 진건곤을 노린 암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미 진건곤은 다른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난 후여서 암기는 허공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무공이 높은 낭인들이 없었는지 허겁지겁 피하기만 할 뿐, 나서서 진건곤의 나뭇가지를 막아서는 자도 없었다.

마치 늑대 한 마리가 양떼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이었지만 진건곤에게 그리 녹녹한 상황은 아니었다.

[전진자가 검을 들지 않는 한 항전하지 말고 도주하라. 까짓 몽둥이야 한 대씩 맞으면 그만이다.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향후 다시 합류하도록!]

낭인들의 우두머리가 내려놓은 명령이었다.

이미 수많은 싸움을 하며 노회한 낭인들은 진건곤의 자비심까지도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이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들은 깨어나거나 고통이 가시면 또다시 진건곤을 압박하기 위해 동원될 것이었다.

어느새 주위를 다 휩쓸어 양떼를 몰아낸 진건곤이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곳에서 진건곤은 낭패를 맛보아야만 했다.

“이런! 네놈들은 도둑질도 하는 건가?”

말도, 그리고 건량과 몇 가지 의복 등을 담고 있던 보퉁이도 모두가 사라지고 난 후였다.

몸에 지니고 있던 귀중품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으하하하! 애송이. 도둑질이라니? 넌 우리 낭인들과 전쟁 중인 것이다. 물자를 차단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 물건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한시도 쉬지 못할 것이다. 결국 대꼬챙이처럼 말라서 쓰러질 것이야.”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가 진건곤의 귀를 간질였다.

슈슈슉! 슈슉!

어느새 돌아온 낭인들이 암기를 쏘아대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휘둘러 아무렇지도 않게 암기를 튕겨내고는 있었지만 진건곤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버렸다.

‘무인의 자존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들과 싸움을 하게 됐구나. 이건 무인이라기보다는 군인과 같지 않은가?’

개인의 능력보다는 정해진 계략에 의해 전체가 하나처럼 움직이는 단체와 싸우게 된 것이었다.

‘애초에 이곳에 멈춰 선 것이 잘못이로군. 그러니까 저들이 따라오지 못할 곳으로 가야 한단 말이지?’

진건곤의 신형이 갑자기 쏘아져 나갔다.

말이 아니라면 밤이라고 해서 움직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으니 달려 나가 낭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면 될 일이었다.

“쫓아! 잡아!”

“막아! 막으라고!”

퍼버버벅!

진건곤이 달려간 곳으로 다섯 명의 낭인이 머리를 쥐고 쓰러져 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고함을 지르며 진건곤을 쫓아와 봤지만 진건곤으로서는 산책하듯이 빠져나간 것뿐이었다.

이미 진건곤의 뒷모습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몇 호흡을 하는 동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휴우! 우리로서는 넘볼 수 없는 고수라는 건가? 저 정도라면 비룡대는 쫓을 수 있을까?”

사내의 고개는 절로 저어졌다.

“비룡대라면 가능하겠지. 땅으로 꺼지지 않는 한 그들의 시야를 피할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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