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진건곤이 정신을 차렸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소군의 촉촉하게 젖은 눈이었다.
떨어지는 눈물이 이미 처음은 아니었던 듯, 귓가의 머리가 흠뻑 젖어 있었다.
뭉클!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으로 전해졌다.
자신의 두 손이 무엇을 잡고 있었는지 깨닫고는 기겁을 하며 일어나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정신이 들었나요?”
“제… 가……!”
“진 공자는 마검에 취했었어요.”
소군의 음성에는 많은 떨림이 담겨 있었다.
진건곤은 눈 둘 바를 모르며 고개를 조아렸다.
소군의 하얀 나신이 눈에 가득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소군은 두 손으로 몸을 가리며 곁에 놓인 옷을 차려 입었다.
하지만 이미 길게 찢겨진 옷가지 사이로 하얀 속살과 함께 작은 유실이 보였다. 그리고 청석 위로 비치는 혈흔!
이래도 아무 일도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보였을 것. 진건곤은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체투지를 하며 입을 열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쿵!
진건곤이 석고대죄를 하듯이 청석에 머리를 찌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반응이어서 소군도 역시 막을 수가 없었다.
피가 튀고 진건곤의 머리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쿵! 쿵!
더욱더 세게 머리를 찌어 가는데 그 소리가 심상치 않게 크게 울렸다.
소군이 깜짝 놀라 얼른 진건곤의 곁으로 다가가 진건곤을 말렸다.
“그만! 그만두세요.”
진건곤을 구하고자 한 일이었지만 그것이 상황을 더욱 야릇하게 만들었다.
소군이 진건곤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말리려 했는데 진건곤은 이미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진건곤을 가슴으로 안을 수밖에 없었는데 옷이 찢겨진 부분으로 진건곤의 얼굴이 자신의 수밀도에 닿은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옷이 찢어져 맨살에 전해지는 생생한 느낌에 깜짝 놀라 얼른 진건곤을 가슴에서 떼어내었다.
하지만 더 크게 놀라며 다시금 진건곤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급하구나!”
소군은 진건곤이 머리를 찌었던 부분이 허옇게 벌어진 것을 보았다.
어찌나 세게 찌었던지 세 번 만에 거죽이 다 찢어지고 머리뼈가 드러나 있었다.
“아아!”
소군은 다시금 진건곤을 안아들었다.
가슴으로 전해지는 감촉 따위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의원! 의원을 불러야 돼!”
소군은 스스로 뇌까리며 의식을 잃어버린 진건곤을 안고는 황급히 연무실을 나섰다.
연무실을 나서 겨우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는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이리로 데려오세요.”
“언니, 진 공자를 이리로 데리고 오세요. 백자가 이미 준비를 끝냈어요.”
꼬마와 소영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소군은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영현아. 의원을 불러야 한다. 총관을 모시고 오렴!”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있잖아요. 전진자를 제 방으로 데리고 오세요. 영현 누이는 깨끗한 천과 물을 준비해 주시고요.”
“그래요, 언니. 백자는 이미 진 공자가 다쳤을 것을 대비하고 있었어요. 누이가 진 공자를 안고 나올 시간까지도 맞추었는걸요. 백자에게 맡겨 보세요. 백자는 훌륭한 의원이에요.”
“무엇이? 진 공자가 다쳤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게다가 이런 동자가 의원이라니?”
“헤에? 이럴 줄 알고 다른 사람을 치료했던 것이라고요. 나를 못 믿을까 봐서요.”
소군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백자라는 아이를 보았으나 선택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언니 틀림없어요. 제가 옆에서 치료하는 것을 모두 본걸요.”
진건곤의 상세는 시간이 흘러가면 어려울 것이 틀림없었다.
의원이라는 말에 백자라는 아이에게 기대볼 수밖에.
소군이 진건곤을 데리고 백자의 방에 들어가자 그곳에는 두 개의 촛불이 세워져 있었다.
‘대낮부터 촛불이라니?’
“그곳에 두고 물러나세요.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 않을 테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하지 말고 그냥 서 계시고요. 약속하시겠습니까?”
동자는 대뜸 소군에게 약속을 요구했다. 그 눈이 제법 진지해 소군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소영현은 소군에게 옷가지를 꺼내 소군의 상의를 덮어주더니 곁에 서서 소군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마음을 안정시키라는 뜻이 아니었다. 앞으로 놀라지 말라는 뜻이었다.
백자는 두 손으로 인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휘이잉!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촛불이 꺼질 듯이 심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용케도 두 개의 촛불은 흔들리기는 할지언정 꺼지지 않았다.
“허허허! 아이야, 시작하자꾸나!”
백자의 입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소영현은 얼른 앞으로 나와 깨끗한 천을 들어 주었다.
백자는 그것으로 진건곤의 상처를 닦으며 간간이 침을 꼽았는데 피마저도 완전히 멈추었다.
소군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로 흐르는 혈관은 그 혈맥이 매우 얇아 점혈로는 일정한 곳만 피가 멈추게 할 수 있었으나 백자는 겨우 세 개의 침만으로 지혈을 했던 것이었다.
“칼! 망치!”
소영현이 얼른 헝겊을 치우고는 이미 준비해 두었던 칼과 망치를 들어주었다.
“그런 것들로 무슨 짓을 하려고?”
소군이 소영현의 손을 잡아 제지하고는 물었다.
백자는 고개를 돌려 소군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흥! 머리를 찢고 정신을 잃었다면 머릿속에 혈이 잡혔을 공산이 크지. 어혈이 굳어 버리면 나중엔 손을 써도 회복이 안 된다. 나를 방해하지 마라. 거듭 말하거니, 계집! 나서지 마라! 이자가 어찌된다면 내 같이 죽어주마!”
목숨을 걸겠다는 백자의 눈에서는 신광이 번쩍였다.
무공으로 만들어진 신광이 아니었다.
한 가지 분야에 일가를 이루고 도(道)를 통한 장인의 눈빛이었다.
그 신광을 본 소군은 조금은 믿어볼 마음이 생겼다.
백자는 고개를 돌리더니 곧장 칼을 진건곤의 머리에 대고 망치를 들어 때렸다.
탁! 탁! 탁!
진건곤의 두개골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소군으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장면이었는데 어느새 다가온 소영현의 손이 소군의 두 손을 쥐고 있었다.
[언니! 믿어도 돼! 삼영신군은 저 방법으로 이미 여러 사람을 치료했는걸.]
[삼영신군이라고?]
[응. 저렇게 어려 보여도 모산파의 제자래. 세 분의 영을 모셔서 삼영신군이고 그중에 한 분이 유명한 의원이었데. 지금은 그분의 영을 모신 상태니까 어린 아이가 아니라 의원인 거야.]
[하지만 저렇게 머리를 쪼개는 방법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니야, 언니. 언니도 들어봤을걸. 전설상의 인물이라서 믿어지지 않는 것뿐일걸?]
[서…설마? 화타?]
[물어도 대답은 안 해주지.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머리를 쪼개신 분은 그분밖에 없을걸.]
“부드러운 천을 다오!”
백자의 음성은 무척이나 늙은 노인의 목소리로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소영현은 얼른 다가가 천을 건넸다.
“무림인들은 무식한 건지, 용감한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미안하다고 한들, 이런 식으로 머리를 박아대다니 말이야.”
그의 손은 입과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놀려 어혈을 천에 스며들게 하였다.
백자의 늙은 목소리는 두 눈으로 보기라도 한 듯이 그 상황을 주억거렸다.
소군은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그 사정을 알고 있을까 싶어 얼굴을 붉혔다.
“다 됐어! 당장 움직여도 상관은 없겠지만 무공을 사용하려면 이제 적어도 보름은 정양해야겠단 말이지. 그동안은 무공 같은 것은 펼치지 말고 그냥 누워만 있으라고 하면 된다. 아까 적어 주었던 처방전대로 약도 먹여야 하고 말이다. 알겠느냐?”
“네, 어르신!”
동자에 불과한 백자는 소영현을 아기 다루듯이 했고 소영현은 백자를 어르신으로 대하고 있었다.
소군은 자신이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을 겪으며 반신반의할 뿐이었다.
“휴우! 누님! 나 졸려요.”
백자는 그대로 쓰러져 잠들고 말았다.
소영현이 그런 백자를 들어 침소로 옮기고 있었다.
소군은 수건을 들어 진건곤의 이마에 서린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으…….”
무언가 차가운 기운이 이마를 적셨다.
진건곤은 힘겹게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하얀 피부를 가진 두 손이 진건곤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결코 누님을 욕…….”
진건곤은 소군인 줄 알고 얼른 입을 열었으나 곧 소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얼른 닫았다.
한순간이나마 너무나 닮았던 탓에 소군에게 할 말을 소영현에게 할 뻔했다.
“일어났어요? 일어나지 마시고 그냥 누워 있어요.”
손의 임자는 바로 소영현이었다.
“고맙소!”
진건곤은 방안에 자신과 소영현, 단둘이 있는 것을 알고는 그녀가 자신을 돌봐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아마도 소군의 부모들이 원했던 것인지도!
그리고 소군은 자신을 보기가 싫어 떠난 것인지도……!
“아니에요. 전 뒤처리만 한 걸요. 진 공자를 치료한 것은 바로 백자라고요.”
진건곤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모르는 이름이었다.
“누구……?”
“백자라는 꼬마였지요. 그리고 언니도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사람을 부르는 것은 처음 봤어요.”
또다시 찬물로 적신 수건으로 진건곤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백자?”
“진 공자의 머리를 꿰맨 것은 아주 나이가 어린 아이지요. 백자라는 아이였어요. 대단한 의술을 가지고 있고요, 수술을 하는 동안에는 노인 같은 목소리로 이래라저래라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말이에요. 전혀 다른 사람 같지요.”
“목소리가 변했단 말이요?”
“네! 정말 노인이 된 것처럼 굴어서 무섭기도 했지요.”
그제야 진건곤은 백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청진자의 제자였을 것이었다.
‘사람이 달라졌다면 틀림없겠지.’
문득, 소영현의 숨결이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와 진건곤의 얼굴을 닦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인의 체취를 느끼니 연무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나 얼굴이 벌게지고 말았다.
마검에 취해 있어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깨어나 기억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짓이었다.
민망한 마음에 어찌해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이 되었다.
“언니가 눈을 뜨거든 연무실로 찾아오라고요. 한시가 급하다고 말이지요.”
“알았소. 잠시 비켜 주시오.”
진건곤은 몸을 일으켜 옷을 챙겨 입었다.
“죄송합니다.”
진건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괘념치 마세요. 진 공자의 뜻이 아니었잖아요.”
소군은 정말 사소한 일이었던 것처럼 가볍게 입을 열었다.
스스로 선을 긋는 듯한 느낌이었다.
“염정간옥의 검. 마검에 취한 것이지요. 진 공자가 사용했던 검법은 사람을 홀리고 주위를 황폐하게 만드는 마검이에요. 그 마검을 어디서 얻었죠?”
진건곤은 대답할 수 없었다.
사부에게서 배운 독룡살검이 바로 사람을 금수로 만드는 마검이라는 것을 어찌 말한단 말인가? 그것은 사부가 마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았다.
“말할 수 없단 말인가요?”
“죄… 송… 합니다.”
“괜찮아요. 진 공자도 그 검법이 마검인 것은 몰랐겠지요?”
진건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고 있었다고 당당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진건곤으로서는 마검에 홀려 했던 일도 모른다고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시는 그 검법을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울러 그 검을 남에게 전하지도, 다시는 펼치지도 않는다는 약속도 해주어야 합니다.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약속드리겠습니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답하는 진건곤이었다.
“좋아요. 이제 마검 때문에 있었던 사건은 잊기로 해요.”
“저… 는… 잊지 못합니다.”
진건곤의 음성에는 단호함이 들어 있었다.
“잊어야 해요.”
“절대로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진건곤의 고집스러운 얼굴이 더욱 고집스럽게 변했다.
‘아아……!’
소군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기쁨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잊지는 않았다.
‘진 공자는 너무나 젊다. 내게… 그렇게 될 수는 없어.’
“진 공자의 마음은 고맙지만 내겐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요. 전 검후가 되어야 합니다. 진 공자와의 인연은 검후의 길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주르륵!
또다시 소군은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숨기고 있다고 여겼건만 눈물이라니.
소군은 얼른 눈물을 감추었다.
진건곤이 여태껏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상관없습니다. 검후가 되는 것과는! 그게 언제가 되었든, 평생이 걸리더라도 제가 그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언제나 누님의 곁에서 기다릴 겁니다.”
진건곤의 말에 소군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변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살아남아야겠지요. 살아남고서야 그런 말을 하든 말든 하란 말이에요. 이제는 그런 마검 따위는 잊어버리세요. 진 공자에게는 이미 좋은 검이 있잖아요. 바로 화산의 검이요.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이제는 화산의 검을 받아들이세요. 화산의 검이야말로 진 공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검이에요. 그날의 매화분분이라면 당장에라도 다섯 수는 버틸 수 있어요.”
그랬다.
진건곤이 어린 시절부터 닦아온 기초는 다름 아닌 절검 영은에게서 이어받은 것이었다.
절검 영은은 화산의 무공으로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그에게서 기초를 전수 받은 것은 화산 무공의 기초를 이어받았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화산의 무공을 따로 익히지 않아도 몸에 딱 맞는 무공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게다가 남의 눈을 개의치 않아도 될 때나 좀더 강력한 무공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매화분분이라는 초식으로 상대를 꺾어 오지 않았던가?
매화분분은 그 초식을 알고 있다고 해서 펼쳐지는 그런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다.
수년간 각고의 고련이 있고서야 겨우 펼쳐낼 수 있을 정도로 지난한 초식이었는데 진건곤은 실전에서 곧장 그것을 펼쳐내지 않았던가?
진건곤이 십여 년이 넘도록 해온 것은 바로 절검 영은이 남긴 기초가 바로 화산무공의 정화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찌 화산의 검이 제게 어울린다고 하십니까?”
“진 공자가 펼치는 검법은 언제나 화산의 검을 닮아 있어요. 초식은 육합건곤검이지만 그 운용이 화산의 검과 같지요. 처음에는 묘하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전날에 매화분분의 초식을 펼치는 것을 보니 확실해졌지요.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진 공자가 닦아온 무공은 화산의 검이 틀림없습니다.”
“결국은 화산이……!”
진건곤의 소군의 말을 들으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으나 부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소군에게 지적을 받고나니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느껴졌다.
십일 년 전 화산에 올랐던 그때, 군자검과 함께 올랐던 화산, 짧은 기간 동안 머물렀던 절검의 처소, 그리고 절검에게서 들어서 배웠던 기초들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전진자라는 이름을 듣고서 화산에 올랐을 때 절검 영은이 보여주었던 무공.
아지랑이 같던 절검의 무공이 머릿속에 맴돌고 그와 함께 머릿속에서 봉인이 풀린 화산의 수많은 무공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으나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탓에 은연중에 깊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화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자 그 검법들이 모두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매화검. 백매화검, 매향만리, 화련직검……!
진건곤은 그대로 입정에 들었다.
자연과 상천이 통교하며 주는 몰아지경이 있었다면 새로운 초식들을 깨달으며 드는 입정처가 따로 있었다.
진건곤이 빠져든 입정처에는 수많은 검이 떠돌고 있었다.
찌르고 베고 검 끝이 떨어 울리며 허공에 피어낸 매화들이 가득했고 그윽한 매화 향마저 느껴지는 듯해 보였다.
날카로운 예기와 호쾌한 직선이 의념 속에 그려지고 그 속에 화산의 고고하고 엄정한 기상이 느껴졌다.
진건곤은 자신도 모르게 매화 향에 젖어 흠뻑 빠져들었다.
놀랍게도 그렇게 시작된 진건곤은 입정은 무려 삼 일이나 계속되었다.
진건곤은 그렇게 입정에 들어 화산의 검과 함께 노닐었으나 아직은 낯선 무언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검은 다 화산의 검이요, 낯익은 검이었으나 오직 한 가지 스스로를 감추고 있는 검만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건곤은 수많은 검중에 그것을 찾기 위해 헤매고 또 헤매었다.
삼 일의 시간 동안 모든 검을 거치고 나서야 자신이 찾던 검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절검 영은이 보여주었던 검이었다.
흐릿한 기운이 마치 그물처럼 펼쳐진 것이었는데 강하며 질겼다.
다만 화산의 검에 어울리지 않게 무사지도(務死之道)를 추구한다는 것이 달랐다.
힘과 날카로움을 상징하는 화산의 검에 활검이라니, 진건곤은 이제껏 닦아온 화산의 기초만으로 그것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과연 절검의 일생일득(一生一得)이라 할 수 있었다.
진건곤은 소군을 앞에 두고 또다시 일대 기연을 겪고 있었다.
진건곤이 입정에서 깨어났다.
“삼 일 만이군요. 시작할까요?”
소군이 또다시 검을 들고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기꺼움이 가득해 있었다.
진건곤이 무려 삼 일이나 입정에 들었으니 또다시 달라진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누님. 이제는 비무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 일… 때문에……?”
자신이 말하고도 소군의 얼굴에 홍조가 일었다.
진건곤이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얻은 것이 있기에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호오, 화산의 검이라면 깨달음만으로 강해지는 것이 아니었나요?”
소군은 애써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을 하였다.
그것은 진건곤도 마찬가지였다.
차마 꺼낼 말이 없었던 진건곤으로서는 그저 소군이 하는 것에 맞추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진건곤은 소군이 검후가 되는 날까지 기다릴 것이었다. 항상 이렇게 모른 척하면서……!
“저는 누님처럼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모르는군요. 하긴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니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능했는지도 모르지요.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재능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지요. 바로 그런 재능을 뛰어넘을 정도로 노력한 사람이죠.”
소군의 눈이 그윽해졌다.
물론 그 시선의 끝에는 진건곤이 있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뜻이지요. 글을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큼 흔한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날마다 새롭게 변하는 사람은 드물죠.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자는 참으로 드물어요. 진 공자야말로 그 말에 부합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전진파가 특출한 후대를 잇지 못하고 사라졌지요. 그 후로 많은 사람들이 전진의 진공(眞功)을 가지고 퍼져나갔어요. 도문에도, 무파에도, 군문에도, 심지어 낭인들에게까지 퍼져나간 비공이었습니다. 물론 구대문파의 곳곳에도 퍼져 있지요. 전진의 비공은 아마도 재능이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다만 멈추지 않는 사람이 풀어내는 것이 아닐까요?”
“전진의 비공을 얻은 것은 맞지만 전 특별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온종일 애를 쓰는 것이 고작이니까요.”
소군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애를 써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노력이 부족하다기보다는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어쨌거나 지금은 진 공자의 말대로 비무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얻은 것을 정리하고 나면 먼저 비무를 청해주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소군은 자신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강제하지 않았다.
소군은 진건곤을 두고 연무실을 나왔다.
진건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나두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어린 백자가 불쑥 연무실에 들어가려는 게 아닌가?
“백자!”
“네, 소검후님.”
“그곳은 함부로 들어갈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네, 알고 있지요. 하지만 의원으로서 전진자를 살펴야 하기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명색이 모산파의 제자니까요. 연공을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구나.”
소군은 이미 백자의 신묘한 의술을 보았기에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너라.”
백자가 들어서자 진건곤은 기껍게 백자를 맞이했다.
진건곤은 백자를 생명의 은인으로 대하고 있었다.
백자가 수인을 맺고 주문을 외우니 안광이 번쩍거리며 사뭇 다른 분위기로 변하고 말았다.
백자는 대뜸 진건곤의 손을 잡아 맥을 보더니 얼굴의 이곳저곳을 눌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은 다 나은 것으로 보이네. 다음부터는 그런 허무맹랑한 짓은 하지 말게. 목숨보다 중요한 체면은 없는 것이야. 자네를 치료하기 위해서 천기를 얼마나 어겼는지 아는가? 무려 셋일세. 세 명의 목숨을 이었으니 내가 얼마나 구박을 받고 사는지 아는가?”
대뜸 백자가 진건곤의 머리뼈를 부쉈다면 누가 허락했겠는가? 진건곤을 치료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야 했다.
사실 체면보다 목숨이 중요하다는 말은 약선 화타가 할 말은 아니었다.
조조가 치료하기를 명했으나 스스로의 고집을 꺾지 않아 옥에 갇혀 죽었던 약선이 아니던가?
하물며 그 의서조차도 모두 불태워 없어져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약선이니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진건곤은 이미 백자의 강신술을 알고 있었던지라 누구라 하지 않고 공손히 대답하였다.
“운기해 보게!”
난데없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진건곤은 시키는 대로 운기를 시작하였다.
“허허, 좋구나. 벌써 호흡이 무경(無境)을 넘어갔어. 이 어린 것이 벌써 무경에 들은 것을 보면 그 늙은이들이 보면 기겁을 하겠구나.”
“허허! 좋아. 뇌궁(腦宮)에 상충(上蟲)이 없어. 뇌심이 정묘하구나. 상충이 없으니 백규가 깨끗하고 백규관연장(百窺關連章)이라 영신을 다듬을 수 있었구나.”
“호오, 상천이 벌써 반쯤은 열렸구나. 현천기공이라는 것이 반쪽짜리라고 들었는데 네놈은 그것으로 무슨 짓을 한 게냐?”
약선은 알 수 없는 말들을 혼자 지껄이고 있었는데 진건곤은 그 말들에는 아랑곳없이 그대로 자신의 운기를 할 뿐이었다.
“엉뚱한 놈이로구나. 받아들인 여기저기 뱉어내는 꼴이라니……! 회음으로 뱉고 백회로 뱉어내니 몸 안에 남는 기운은 거의 없어. 내공이 쌓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고… 오호라! 기운을 유기(流氣)로구나. 네놈이 어떻게 유기를 알았을까? 알고 한 짓은 아닐 게고… 천운이로구나. 천운이야.”
백자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알 수 없는 말들만 꺼내 놓던 약선은 제 볼일을 모두 보았는지 사라지고 백자의 눈은 어린 소년 본연의 것으로 돌아왔다.
백자는 진건곤의 옆에 앉아 낮은 소리로 진언을 외우며 명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무경이란 호흡의 길이를 말해요. 헤아리기를 천이 넘어가는 호흡이나 일 각이 넘어가는 호흡의 길이를 무경이라고 하지요. 원래 호흡은 천지간의 본디의 모습인 덕(德)을 모으는 도(道)를 행하는 방법 중에 한 가지에요. 무경은 그런 도의 가지 중에 극상으로 치는 경지고요. 하지만 무경만 할 줄 안다고 해서 상천이 열리지는 않지요. 오히려 몸의 균형을 해쳐 상기증이나 주화입마에 들기가 쉬우니까요. 그나저나 놀랍네요. 무경이라니요. 전진자가 제 사부님과 같은 경지를 가졌다는 것은 믿기가 어려워요. 사부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상천이 열려 있으셨고 평생을 덕을 쌓고 살아오신 분이었어요. 일견에도 그 덕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전진자는 그런 것이 없지요. 사부님에 비할 사람은 아닙니다.”
백자의 말에는 자신의 사부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묻어나왔다.
“상충과 뇌궁을 언급하시더라. 그것은 또 무엇이냐?”
진건곤의 말에 백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세상에. 상천을 열었다는 자가 상충과 뇌궁을 모른단 말인가요? 전진자는 도가의 제자가 맞나요?”
“하하하! 그게 사정이 있어서 도가의 제자가 아니라 무가의 제자가 되었단다.”
백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지만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하궁과 하천은 하단전, 중궁과 중천은 중단전, 상궁과 상천은 상단전을 말해요. 하지만 이런 말들이 전해져 오고는 있지만 구대문파에서 그런 말을 쓰는 곳은 모산파뿐이지요. 도를 깨우치지 않고 무공에 의지하고부터는 쓰지 않는 말이 되었어요. 전진파가 흩어진 것도 그 때문이에요. 전진파는 모산파와 같이 순수한 도가의 맥이었는데 도를 깨우쳐야 할 도기(道器)가 몇 백 년 동안 나타나지 않으니 도를 이어갈 힘이 떨어진 것이지요. 반면 다른 구파일방은 무공에 매진하여 그 힘을 키워갔고요.”
“하지만 모산파는 훌륭하게 그 맥을 이어오지 않았느냐?”
“달라요. 모산파는 강신술이나 부적에 더 의지하는 바가 크지요. 모영 사조님은 귀산에서 서왕모를 뵙고 태극현진경을 얻으셨어요. 한때 모산파의 큰 깨달음을 흉내 내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좌도방술이 유행하였습니다. 깨달음이 짧은 자들이 미천한 재주로 흉내를 내며 세상을 어지럽히자 세속과의 교류를 최소한으로 제한하셨지요. 모산파는 도를 깨우친다고는 하나 그 맥이 다릅니다. 전진과는 교류조차도 희박하지요. 모산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요괴와 요물을 제거하며 조용히 세상을 지키고 살아왔습니다.”
백자의 음성에는 모산파에 대한 자부심이 그득하였다.
“유기라는 말씀도 하시더구나.”
“유기? 분명 유기라고 했습니까?”
“그렇구나. 유기라고 하셨다.”
“유기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구나.”
진건곤은 자신이 상천을 열게 된 것이 유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산의 지식으로도 다른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만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면, 모산에서는 상천을 열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
“애초에 상천 열려 있는 아이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 비범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아이들을 귀신이나 요물이라고 부르고 경원합니다. 아이들로서도 모산에 와서 자신의 힘을 이해하고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되니 그것이 더욱 좋은 일이지요.”
“허면 선천적으로 상천이 열리는 방법뿐이더냐?”
“아직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진자를 따르러 온 것입니다. 근자에 들어 상천이 열린 아이들의 수가 부쩍 줄었다고 합니다. 상천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상천을 여는 수련법을 배워오라는 것이 모산이 제게 내린 임무입니다. 오늘부터 저는 상천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칠 것입니다. 전진자는 제게 현천기공의 수련법을 가르쳐 주시면 됩니다.”
“모산파에는 현천기공이 없느냐?”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전진의 진공을 제일 중히 여기고 많이 가진 곳은 우리 모산파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산파의 누구도 현천기공으로 상천을 열 수 없습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전진자의 현천기공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니 그것을 배우려는 겁니다.”
진건곤은 백자에게 자신의 현천기공을 가르치고 상천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기로 하였다.
“흠! 소검후의 집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있단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용병제의 확인에 사내는 지체 없이 답했다.
“흥! 계집이 전진자를 가르치나 봅니다. 하지만 그 계집이 아무리 여중제일인이라고 해도 겨우 석 달 만에 전진자를 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흑로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연놈들은 석 달간의 여유를 얻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좀더 확실하게 전진자의 목이 떨어지는 일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하! 이를 말이겠습니까? 전진자는 물론이고 소검후의 명성이 허명이라는 것을 밝혀 보이겠습니다.”
흑백이로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가능하겠습니까?”
“하하하하! 그날 부딪혀 보니 감당할 만하여 보였습니다. 소검후를 상대한다면 숨겨둔 한 수까지 다 보여야겠지만 십대고수의 일인이 되는 것이라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겠지요.”
“허허허! 용병제께는 아직도 속하들이 상상치도 못한 경지가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참으로 대단합니다. 미리 경하 드려야겠습니다. 허허허!”
“허허허! 낭인들의 흥복입니다. 낭인들이 어깨를 펴는 시대가 오기를 빌겠습니다.”
흑백이로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흑백이로는 어려서부터 낭인으로 잔뼈가 굵은 고수들이었다.
허나 그 긴 세월을 활동하면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게 부대낀 적도 많았다. 그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라는 명문정파에게서 받았던 설움이 적지 않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용병제가 그들의 한을 씻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용병제 진가기가 소검후를 꺾고 십대고수의 자리에 오른다면 낭인들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괜스레 전진자 따위와 손을 섞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용병제님.”
진건곤을 모함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전표를 빼앗겼던 조진상이었다.
“전진자는 그날 무당의 무공과 화산의 무공을 사용했습니다. 전진파의 무공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지요. 화산의 무공을 사용할 때가 가장 강했지요. 해서 속하가 따로 알아보니 전진자는 화산에서 무공을 익혔으나 화산의 제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군자검이 몇 가지 전수했을지는 모르나 화산에서 허락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전진자가 화산의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알면 화산이 나서서 전진자를 제압할 것입니다. 화산의 고수를 초빙한다면 전진자는 감히 화산의 무공을 사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허허허! 그렇구나. 용병제께서 그 애송이를 혼내는 것도 좋겠지만 힘을 아껴 소검후를 상대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허허허!”
“묘책입니다. 허허허!”
“화산의 무진 장로야말로 전진자의 사부인 군자검과 앙숙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를 초빙한다면 전진자는 화산의 무공 따윈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만 된다면 용병제께서는 오직 소검후를 상대할 생각만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조진상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고 모두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허나 용병제의 표정만이 달랐다.
“하지만 화산이 전진자의 신병을 확보하려 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 우리는 전진자의 목을 쳐야만 하지 않느냐?”
“그 또한 걱정할 일이 없다고 봅니다. 평생 동안 화산의 죄인으로 갇혀 있어도 좋고 무공을 폐지당하고 풀려난다면 오히려 더 쉽게 죽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흐흠……! 그렇게 될까?”
“틀림없습니다. 구대문파라는 것들은 자신들의 무공에 관해서는 미친 듯이 잔인하지 않습니까? 전진자라도 그 칼날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게 그들은 전진자를 얽어맬 묘책을 짜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르게 귀제갈의 묘책도 역시 이어지고 있었다.
소군은 그 후로 한 번 연무실에 들른 후로는 전혀 찾아가지 않았다.
진건곤과 백자가 서로 자신의 무공을 내어놓고 교류를 하고 있는 터라 그곳에 가면 절로 타인의 무공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었다.
진건곤이 비무를 하자고 자신을 불러주기를 원했으나 진건곤은 아무런 청이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소군에게는 진건곤을 걱정하는 마음이 커져만 갔다.
그렇게 용병제와 약속한 석 달의 시간이 끝을 향하고 있었다.
“진 공자는. 그날의 일에 마음을 쓰고 있는 건가? 아니면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말인가?”
소군은 정자에 앉은 채로 밝은 달빛을 보며 생각에 잠겨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명상에 잠겨 있는가 했는데 문득 탄식이 흘렀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잡념이 가득하구나.”
무엇이 답답했을까?
진건곤의 무공이 어느 정도 진척되어 가는지를 몰라서일까? 무엇이 그녀를 답답하게 하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아씨, 진 공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시비의 말에 명상을 하던 소군이 벌떡 일어났다.
“들라 해주세요.”
용병제와의 비무를 하루 앞둔 전날에서야 진건곤이 소군을 찾아온 것이었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진건곤이 들어섰다.
소군은 진건곤을 보자 그간의 답답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녀의 기분이 그대로 얼굴로 올라와 소군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더 상쾌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미모를 자랑하는 소군이 싱그러운 웃음을 담자 진건곤의 간담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문득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여인의 체취가 떠올랐다.
‘무슨 생각이더냐? 그런 무례를 범하고도 아직도 떨치지를 못하다니……!’
“격조했군요. 깨달음은 있었습니까?”
“깨달음이 아니라 배움이 있었습니다. 모산파의 비공은 신묘하고 영험한 점이 있어 흉내를 내기에도 쉽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지요. 비공으로 능히 용병제를 감당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대책을 세우기가 힘이 들겠어요. 하지만 전 진 공자를 믿고 있어요. 그래도 되겠지요?”
소군의 말에는 너무나 늦었다는 뜻도 함께 있었지만 용병제의 이야기가 나오자 진건곤은 그저 가벼운 미소를 띨 뿐이었다.
소군은 그 미소를 보며 같이 웃음을 지었다.
소군은 진건곤의 가벼운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진건곤의 목숨과 관련된 일이 될지도 모르니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다.
“신비에 쌓여 있는 모산의 비공이라면 꼭 한 번 보고 싶군요. 보여줄 수 있겠지요?”
“믿으신다면서요. 하지만 원하신 다면요.”
진건곤과 소군은 자리를 옮겼다.
장소는 연무실이 아니었다.
소군이 앞장서서 가까운 산으로 들어갔는데 산에 들어서자마자 경공을 펼쳐 한참을 가고 나서야 도착한 곳이었다.
소군이 진건곤의 앞에 버티고 서서 검을 뽑아 들었다.
소군의 진기가 또다시 가닥가닥 미세한 기운으로 변해 진건곤의 몸을 꿰뚫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하였다.
진건곤의 몸에서 뻗어 나온 기운이 둥그렇게 진건곤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 구형의 막을 뚫지 못하고 비껴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진건곤은 전과 다르게 태연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소군은 그런 것을 볼 수는 없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진건곤이 천수불영검이 만들어내는 기세에서 해방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역시……! 또 변했어요.”
소군의 눈가에 웃음이 서렸다.
그동안 또다시 변해버린 진건곤의 성장이 기꺼웠던 것이었다.
“그럼, 각오하세요. 제대로 갈 겁니다.”
소군의 검이 전과 달리 빗살처럼 빠르게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