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독룡-25화 (25/61)

제1장

“반갑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앞으로 강호를 밝혀나갈 신성(新星)이라고?”

소군의 아비인 소상기와 하씨 부인이었다.

소상기는 귀밑머리가 하얗게 보였으나 정광이 번뜩이는 눈초리와 나이에 맞지 않게 윤기 나는 피부가 절정을 바라보는 고수처럼 보였다.

무림에서라면 드물지는 않은 고수였지만 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수였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아닐세. 영라가 한 말이니 빈말은 아닐 것이고… 혹시 혼처는 정해진 곳이 있는가?”

“네?”

당황한 진건곤이었으나 소상기의 물음은 멈추지 않았다.

“혼처 말일세. 마음을 준 처자나 약속이 정해진 곳이 있냐는 말일세.”

“아… 직은 없습니다.”

“하하하하! 그런가? 마침 우리 딸 영현이도 혼처가 없다네. 영라가 혼기를 놓치고 저리 늙은 것을 보니 영현이는 직접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영라가 입이 마르게 자네를 칭찬했네. 어떤가? 짝이 없다면 우리 딸 영현이를 잘 살펴보게나. 하하하하!”

진건곤은 말을 하지 못했고 소영현도 얼굴이 벌게져 다른 곳만 쳐다보았다.

“우리 부부는 진심이에요. 둘째도 언니를 닮았는지 눈이 높아 짝을 고르지 못하고 있어요. 내 넌지시 물어보아도 딱히 싫다고 하지 않으니 저 눈 높은 것이 제 짝을 찾은 듯하네요. 장원에 머무는 동안 잘 살펴봐주시기 바랍니다.”

“큰아이가 저리 늙어가니 얼마나 걱정이 되는지 모른다네. 저 나이가 되었으니 짝이라도 만날까 싶다네.”

부부의 말이 거듭될수록 진건곤과 소영현은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염치없는 부부라고 탓하지 말아 주세요. 이게 다 영라를 보고 놀란 부모의 마음일 뿐이니까요.”

소군은 무심한 듯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진 공자, 연무실로 가죠.”

인사를 마치고 나서 진건곤과 소군은 연무실로 향하였다.

넓이는 사방으로 이십여 장. 바닥은 청석으로 깔려 있었고 제법 잘 만들어 놓은 벽곡단도 구비되어 있었다.

환기도 잘 되고 작은 물줄기도 있었다. 야명주는 없었지만 환기가 좋아 횃불을 피워도 좋았다.

“멋지네요.”

“먼저, 정확한 솜씨를 보여 주세요.”

스릉!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약간은 골이 난 듯이 보이는 소군이 다짜고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든 소군의 몸에서는 놀라운 위세가 일어나 주위를 압도하였다. 소군은 검을 드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보이는 보기 드문 고수였다.

진건곤은 신중하게 내력을 끌어올려 대비하였다.

그녀의 검에서 한줄기 진기가 솟구쳐 나오더니 가닥가닥 펼쳐져 실오라기처럼 얇은 가닥이 되어 거미줄처럼 사위(四圍)로 퍼져나갔다.

그 얇은 진기들이 어느새 진건곤의 몸을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진기들은 유형의 것도, 실체도 아니어서 피하거나 막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일찍이 삼영신군을 허공에 얽어매었던 것처럼 강력한 의지의 힘으로 만들어진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얇은 진기의 선들은 각각 저마다 다른 무리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탄(彈), 황(荒), 질(跌), 쾌(快), 환(幻), 변(變)…….

상천의 힘으로 기운을 읽지 못했다면 도저히 알아챌 수 없는 것이라서 진건곤이 아니라면 오직 남다른 위압감으로만 느낄만한 것들이었다.

“이 수많은 선들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이런 것들이…….”

“선이라……!”

소군은 고개를 끄덕여 감탄하는 몸짓을 보였다.

“역시! 또 성장했군요. 이제는 천수불영검의 의지까지도 알아보는군요. 하지만 알아본다고 해서 상대할 수는 없는 것. 조심하세요.”

소군은 진건곤이 놀랄 틈도 주지 않았다.

그녀의 경고가 들리자, 여러 가닥의 진기가 살아 있기라도 한 듯이 춤을 추며 진건곤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소군의 의지와 시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닿는 것이어서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는 그런 것들이었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예리함과 거친 힘. 터져나가는 듯한 강렬함과 이화접목의 부드러움이 그밖에도 수많은 무리(武理)가 동시에 느껴졌다.

수없이 많은 무리 속에 파도에 휩쓸린 난파선 같은 느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건곤에게는 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천의 힘이 더욱 굳건해졌다는 것이었다.

진건곤의 투지는 압도적인 위압감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다!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던 전과는 다르게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기예와 힘이 해일처럼 자신의 몸을 헤집어도 진건곤은 아주 끈덕지게 버텨냈다.

몸이 베어지고 쪼개지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엄청난 위압감 속에서도 눈을 번뜩이며 참고 견뎠다.

진건곤은 그 속에서도 한 가지를 노리고 있었다.

‘천수불영검이라고 해도 실제로 손이 천 개는 아닐 것이야. 언젠가는 하나가 되겠지. 그때를…….’

주르륵!

진건곤의 코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압도적인 기세가 자신의 몸을 헤집게 내어 놓은 대가였다.

하지만 소군의 얼굴에는 기꺼운 미소가 서렸다.

“버텨내다니 역시, 진 공자는 변했군요. 조심해요. 진짜가 갑니다.”

소군의 검이 움직였다.

아니나 다를까? 검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진건곤의 몸을 헤집고 다니던 진기의 가닥가닥이 세 개의 가지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바로 환(幻), 탄(彈), 패(覇)의 묘리를 담았던 진기들이었었다.

세 개의 진기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 움직이듯이 생생해 무엇을 상대해야 할지 알아채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은 하나! 검의 실체는 한 개! 검으로 펼쳐낼 수 있는 초식도 하나다. 찾아야 한다.’

진건곤의 눈이 번뜩였다.

‘이것이야!’

치리링!

진건곤의 검이 검집을 벗어나는 순간 화탄이라도 터지는 듯, 강력하게 터져나가는 검이었다.

진기가 움직이는 경맥 속에서 연달아 진기를 터트려 가속을 얻는 청광검의 쾌검의 묘리.

한줄기 검광이 소군의 검을 향해 번뜩였다.

환, 탄, 패 중에 환의 초식이 실초라는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진건곤의 눈에는 보였다. 상천의 힘이 탐지해 낸 진기들의 어울림!

소군의 진기는 환으로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진건곤의 검은 일말의 여력도 남기지 않고 환검이 피어나는 봉오리의 목을 그대로 쳐갔다.

늘어나기 시작한 검의 환영이 완성된다면 손도 못 써보고 제압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텅!

“읏!”

진건곤은 손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충격에 고통을 느껴야 했다.

분명히 소군의 검을 튕겨냈지만 소군의 검에 실린 역도가 너무나 대단하여 오히려 자신의 검이 튕겨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역시…….”

하지만 감탄을 하고 있을 시간마저도 없었다.

소군의 검은 허공에서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며 또다시 얇은 의지가 실린 기운의 가닥을 쏟아내었다.

또다시 순식간에 얽어지는 진기는 패의 묘리를 담았고 진건곤은 연이어 쾌검식을 터트려 막았지만 속도마저도 부족했다.

쾌검? 아니었다. 소군의 검은 그저 검초의 변환이 놀랍도록 빨랐던 것일 뿐!

챙그랑! 탱! 탱!

미처 진기를 이어가지 못한 진건곤의 검은 소군의 검에 실린 경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청석 위를 굴렀다.

진건곤의 표정은 암담했다.

무인이 검을 놓치다니. 처참한 지경이었다.

어느 정도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소군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역시 진 공자는 또 변했군요. 볼 때마다 달라지니 눈이 어지러울 정도군요.”

“겨우……! 두 합도 못 견디는 걸요.”

진건곤의 어두운 안색에서 스스로 못마땅해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두 합을 받아낼 사람이 세상에 많지 않다면요?”

“진짭니까?”

“진 공자가 본 것은 천수불영검(千手不影劍)의 정화(淨化)입니다. 강호 천지에 진 공자를 제외하고 아직 이 검을 본 사람은 없지요. 언젠가 무당의 검선님이나 화산의 절검님 같은 분들께 도전한다면 꺼낼 검이었지요. 용병제조차도 이 검을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검을 진 공자가 먼저 본 것이에요.”

소군의 말을 듣고도 진건곤의 눈에서는 아직도 참담함이 가시지 않았다.

소군은 그런 진건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 천수불영검을 겪고도 그리 낙심하면 안 돼요. 다섯 수를 견딘다면 능히 용병제에게서 벗어날 수 있고 열 수를 견딘다면 용병제를 누를 수 있을 겁니다. 진 공자의 사부인 군자검께서도 오십 수를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사부님마저 도요?”

소군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진건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살인막의 함정을 벗어날 때 보여주었던 사부의 무공은 얼마나 강대했던가?

그런데 그런 무공을 겨우 오십 초의 상대로 치고 있다니……!

소군의 무공이 높은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였을 줄이야.

그제야 진건곤의 안색이 조금은 풀렸다.

왜 소군이 구대문파의 장문인들마저도 경외(敬畏)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제 상대는 전대기인들입니다. 검후라는 이름은 그런 분들과 겨루어서 얻어야 할 이름입니다.”

소군의 음성과 눈에는 검후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해 있었다.

진건곤은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저지와(井底之蛙 : 우물 안 개구리)!

진건곤은 스스로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락없이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나는 절검 영은 사조님과 감히 상대가 되어 보겠다는 것조차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군 누님은 이미 그분들을 꺾을 생각을 하다니…….’

진건곤은 한 번도 연무실을 떠나지 않았다.

벽곡단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 연무실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연무실에서의 원칙은 하나뿐, 하루에 한 번씩 비무를 한다는 것뿐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스스로 꾸려나가는 것.

강해지는 것은 진건곤 스스로에게 달려 있을 뿐이었다.

진건곤은 그 방법으로 쾌검을 택했다.

용병제에게 먹혔던 바로 그 쾌검으로!

스스로의 몸에서 터트리는 진기의 힘.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켜 그 힘을 일시에 품어내는 쾌검식이었다.

치리리리링! 텅!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검.

그저 번쩍이는 검광에 검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인 검인데도 소군은 잘도 막아내었다.

아니 고작 한 초식을 겨루는 게 전부였다.

“헉헉……!”

진건곤이 검초를 펼치다 말고 뒤로 물러서 급히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소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용병제가 방심했던 검. 이것이었겠죠? 과연 어제보다는 더 빨라요. 그렇지만 용병제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해요. 문제점은 누구보다도 진 공자가 더 잘 알 것이라고 생각되…….”

운기를 하며 소군의 말을 듣던 진건곤의 얼굴은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고통 때문이었다.

어제와는 다른 검이었다. 어제는 진건곤이 십 성으로 펼친 쾌검이었다면 오늘은 십이 성으로 만들어낸 쾌검이었다.

몸속에 진기를 과도하게 터트려 그 힘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스스로 내상을 입고 말았던 것이다.

“진 공자도 느꼈겠지만 이런 종류의 쾌검식은 스스로를 해칠 수 있는 무공이에요. 몸이 상하지 않게 적당히 쓰려니 무언가 아쉽게 느껴지죠. 막상 있는 무공을 모두 다 쏟고 나면 몸에 무리가 오죠. 고래(古來)로 이런 검술을 익힌 쾌검사치고 오래도록 싸우는 무인이 없었죠. 무공이 높아질수록 진력을 터트리는 쾌검식을 쓰는 무인이 사라지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죠. 무공이 높아지면 최단의 거리를 쫓는 검으로 변해가요.”

소군은 잠시간의 호흡을 끊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진 공자는 화산의 무공을 쓰는 것이 가장 좋아요. 알려져 있기로는 화련직검이 바로 그런 검이죠. 상대와 나의 최단거리를 짚어 찔러가는 검은 이미 쾌검식의 일절로 유명하지요. 왜 진 공자가 화산의 무공에 잘 어울리는지는 이미 진 공자도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소군은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연무장을 나섰다.

소군은 이미 진건곤의 화산의 무공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것이 진건곤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것도.

진건곤은 홀로 남아 운기행공을 해야만 했다.

진기를 내부에서 터트리는 방법은 경락에 많은 무리를 가져와 심심치 않은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화산의 무공……!”

소 무국공의 집을 지키는 장씨는 겨우 열 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가 똑바로 입구로 향해 오는 것을 보았다.

“꼬마야, 이곳은 네가 얼쩡거릴 곳이 아니다. 경을 치기 전에 다른 곳으로 가보아라.”

“이곳에 볼일이 있는 걸요. 전진자를 찾아왔으니 기별을 넣어주세요.”

“전진자라고? 그런 사람은 이곳에 살고 있지 않는데? 이곳에는 높은 벼슬을 하는 분이 살고 있단다. 괜히 경치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

“흥! 집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집을 지킨다고 할 수 있나요? 안에 기별이나 넣어주세요.”

“이런 맹랑한 녀석! 썩 물러가라!”

“허어! 기별이나 넣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경칠 사람은 아저씨니까요.”

아이는 팔짱을 끼고 서서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장씨를 바라보았다.

“네 녀석. 네가 찾는 사람이 이 장원에 없다면 볼기 맞을 줄 알아라!”

“그럴 일이 없다니까요.”

장씨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의 태도에 홀려 안으로 기별을 넣기로 하였다.

기별을 넣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소영현이 달려 나왔다.

진건곤은 강호에 이름이 높은 신진고수요, 소영라가 극찬을 아끼지 않으니 내심 호감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시기에 진건곤을 찾은 손님이니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어머! 귀엽구나. 혼자 왔어? 어디서 왔니? 진 공자와는 어떤 사이지?”

소영현이 호들갑 피우며 아이를 반기자 장씨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이는 그것 보라는 듯이 장씨를 보더니 장씨의 엉덩이를 툭 쳤다.

“그것 봐요. 있지요?”

소영현은 아이를 반기며 손을 잡고 들어가며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몇 살이니?”

“열 살이요. 그리고 천천히 한 가지씩 물어보세요.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 대답하기 힘드니까요.”

“호들갑?”

소영현은 잠시 기가 막혔지만 겨우 열 살의 어린 아이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알았어. 진 공자하고는 어떤 사이니?”

“음, 앞으로 당분간은 스승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제자가 될 사이에요.”

“엉? 스승이 되고 제자가 된다고?”

“지금은 가르쳐 줄 것이 있지만 나중엔 배워야 한단 말이죠. 어서 전진자님에게 안내해 주세요.”

소영현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묵게 될 처소는 어느 쪽이죠, 누나?”

“으응, 이쪽이야. 이름은 뭐지?”

“삼영진군이요. 백자라고 불러도 돼요. 아명이지만 누님은 착한 분 같으니까 허락해 줄게요. 그리고 가끔 제 방에 놀러 와도 돼요. 물론 당과 같은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누님이 가져온다면 먹어드리죠.”

“으…응. 고마워!”

“아! 그리고 부탁할 것이 있어요. 얇은 명주실과 바늘이 필요한데요. 바늘은 손톱만 한 것으로 초승달처럼 휘어진 것이어야 해요. 내일 오전까지는 준비가 되어야 해요.”

“으…응!”

소영현은 당돌한 꼬마와의 대화가 당혹스러웠다.

웅성웅성!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무국공의 집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었다.

可治難治(가치난치)

一日一治(일일일치)

唯三人治(유삼인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한 명, 두 명씩 모여들었는데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자들도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보오, 저게 무슨 뜻이기에 사람들이 이리 모여 있다오?”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으나 하루에 한 명만 치료한다. 오직 세 명의 사람만 치료하겠다. 이런 뜻이라오.”

“난치병을 치료하겠다니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요? 치료하지 못하니 난치병이 아니겠소?”

“낸들 아우?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무국공의 집 앞에서 저러고 있으니 혹시 거짓이 아닐까 싶어 사람들이 모이는 거지요.”

사정은 이랬다.

백자가 깃발을 세워 사람들을 모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 모여드는 것을 본 경비 장씨는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맹랑한 놈을 보았나? 그런 허무맹랑한 짓으로 이렇게 사람을 모으면 어떻게 하냐? 어서 그만두라니까!”

“걱정 마시라니까요? 다 내가 책임져요.”

장씨는 강제로라도 백자라는 꼬마가 하는 짓을 말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무국공의 손님이니 힘으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얘야! 괜히 무국공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그만두라고.”

“걱정 마시라니까요. 그리고 여기서 이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요.”

때마침 소영현이 외출하였다가 돌아왔다.

“아가씨, 어서 오세요.”

소영현은 장씨의 인사를 받자마자 백자에게 물건을 건네었다.

“여기 있구나. 그런데 저 깃발은 네가 세운 것이야?”

“네, 틀림없이요.”

백자가 웃으며 입을 열자 소영현은 얼른 백자의 손을 잡아 뒤로 끌고 갔다.

사람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깃발에 적힌 말이 퍼져 나가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겠구나. 이미 한 번은 죽었던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이곳에 올 것이다. 네가 치료하지 못한다면 두 번 죽는 것이다. 생사를 가지고 사람들을 놀리는 것이라면 내가 용서하지 못한다. 제법 매운 벌을 줄 것이야. 알겠느냐?”

“훗! 걱정 마시라고요. 아주 짧은 시간에 일은 끝나게 될 테니까요. 그나저나 물건은 제대로 골라왔네요. 설명만 듣고도 의원들이 쓰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나 봐요.”

백자는 이미 물건을 꺼내어 휘어진 바늘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비키시오! 여기 환자가 왔소이다.”

가마에 탄 사람이 환자였는지 사람은 보이지 않고 가마만 덩그러니 놓였다.

“거기 서서 기다리시오. 오시가 되면 시작하겠소. 거듭 말하지만 오직 세 명뿐이요. 게다가 난치병이 아니면 치료하지 않소이다. 고뿔 같은 병으로 돈푼깨나 아끼자는 짓이라면 헛수고요.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요.”

우연인지 모르게 가마 안에서는 기침소리가 새어 나왔고 가마를 끌고 왔던 사람은 얼굴이 벌게지고 말았다.

“그냥 가는 게 좋을 것이요.”

그렇게 사람들은 한곳에 차곡차곡 모여들었다.

가마를 타고 온 사람들도 있었고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지게에 실려 온 자들도 있었다.

제법 멀리서 왔는지 지게를 짊어진 자는 이미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백자가 아침 일찍부터 깃발을 세워두었던 터에 외곽까지 소문이 퍼져 나갔었던 것이다.

오시가 되자 백자가 일어나 깃발을 치웠다.

사람들은 그런 백자를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벌써 깃발을 걷으면 어떻게 하나? 혹시 그렇게 깃발을 내걸고는 자신이 없어 피하는 것은 아니겠지?”

“맞다. 거짓말이라면 네놈을 그냥두지 않을 게다.”

사람들은 벌써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는데 그중에 가장 소리가 큰 사람은 고뿔로 돈푼이나 아낄 요량이라면 돌아가라는 소리를 듣고도 한 시진이 넘게 기다렸던 사람이었다.

“흥! 모르는 소리. 환자가 세 명이 모였으니 깃발을 걷은 것이야. 고뿔로 고생하는 사람은 데리고 가지!”

“네놈이 고뿔인지 아닌지 보지도 않고 어찌 아느냐? 고뿔이 아니라면 네놈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리겠다. 알겠느냐, 이 어린놈아?”

사내는 얼굴이 붉어져서 백자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제 한 일은 생각지도 않고 겨우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동자에게 반말로 빈정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나빴던 탓이었다.

하지만 백자는 전혀 위축된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치료하지 않아도 죽지 않는 것을 보면 알게 되겠지. 아무리 그래도 한 달은 넘게 살 테니 걱정 마라.”

“흥! 한 달이 넘어 죽으면 난치병이 아니라더냐? 네놈이 사기를 치는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귀한 시간을 쪼개어 기다렸으니 네놈은 분명히 치료를 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몸이 성치 못할 줄 알아라!”

“흥! 돈푼 아끼려고 서 있는 주제에 더럽게 구네. 내가 아무 연고도 없이 이곳에서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느냐? 헛소리를 하려거든 무국공의 면전에서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야. 안 그래요, 누님?”

“으…응!”

소영현은 백자가 무슨 일을 벌이나 구경이나 하려고 서 있었는데 난데없이 백자의 보증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앗! 저분 무국공의 영애가 틀림없으시구나.”

“맞아. 나도 알고 있지. 저 아가씨가 바로 무국공의 따님이시지.”

뒤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더니 사내는 얼굴이 벌게져 가마를 몰고 달아나 버렸다.

사내가 달아나자 백자는 인을 맺고 주문을 외우더니 전혀 알 수 없는 눈빛이 되었다.

“순서대로 나와서 환자를 보여라. 돈푼이나 아끼려고 기다린 놈들은 알아서 모두 돌아가고.”

기괴한 목소리. 어린 동자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다 늙은 노인의 목소리였다.

그 기괴한 장면에 겁을 먹은 몇몇이 움직이자 여러 개의 가마와 사람들이 줄에서 이탈하여 사라졌다.

겨우 열세 명의 사람들이 남았는데 그들은 줄을 지어 백자의 곁으로 다가왔다.

백자는 환자에게 다가가 진맥을 하고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대뜸 먹을 찍어 옷자락에 글씨를 써주었다.

“아무리 못난 의원이라도 병명을 찾아주었으니 치료할 수 있겠지. 아무나 찾아가 이대로 보이면 치료할 수 있을 것이야.”

그렇게 몇 명의 사람을 보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허어, 고약한 반위구먼. 일단 이곳에 서 있게. 진찰을 끝내고 치료하세.”

백자는 환자를 곁에 따로 세웠다.

“자네는 환자를 다시 모시고 내일 이 시간에 찾아오게. 무국공의 집에서 나를 찾으면 될게야. 거기 자네도 마찬가지야.”

백자는 그렇게 세 명의 환자를 고르더니 다른 환자들에게는 병명만을 찾아주고는 돌려보냈다.

모두가 떠났으나 한 명의 청년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지게로 환자를 지고 온 청년이었다.

“제발 아버지를 치료해 주세요.”

이미 병명을 써 주었으나 청년은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병명은 이미 알고 있으니 가서 치료만 받으면 될 걸세. 어서 가보게나.”

백자가 한 명의 환자를 데리고 장원 안으로 들어갔으나 그 청년은 움직이지 못하고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문 앞으로 빠끔히 내다본 소영현의 눈이 있었다.

소영현은 얼른 백자를 쫓아가 물었다.

“백자야. 저 청년이 왜 그런지 아니?”

“것도 모르느냐? 아마도 돈이 없어서겠지. 치료하려면 돈이 제법 들어가는 병인데 가마도 아니고 지게로 환자를 지고 온 형편으로는 어림도 없을 게다.”

소영현은 갑작스러운 반말에 놀랐지만 호기심이 동해 계속 물어보았다.

“치료할 수는 있고?”

“치료야 별것도 없지. 처방전만 있어도 되는데 약재가 제법 비싼 게 들어갈 것이야. 치료를 못 하면 병으로 죽는 건 어쩔 수 없고.”

“백자야. 돈이 얼마나 드는데?”

“흥! 네가 돈을 내주려고?”

“응! 울고 있는 것을 보니 이미 그 병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네. 방법이 없으니 넋 놓고 울고 있는 것이겠지.”

“아가야. 고운 심성이기는 하지만 가난은 나라님도 살피지 못한다. 혹여 소문을 듣고 다른 사람들이라도 몰리면 오히려 원성만 산다. 동정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란다.”

말은 냉정했지만 백자의 눈빛은 측은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리 냉정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소영현은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번이라면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야. 처방전이나 써달라고.”

“허허허! 허허! 그렇구나. 내가 세상을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까짓 못 써줄게 있겠느냐? 일단 그 청년을 돌려보내고 오려무나. 네가 도울 일이 있다. 그러고 나서 처방전을 써주마.”

“응! 약속했다.”

“자, 당신은 이쪽으로 오게.”

백자는 자신의 숙소로 환자를 들이더니 침을 뽑아 마취를 시켰다. 그리고는 대뜸 칼을 들어 환자의 배를 갈랐다.

그 장면에 소영현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백자가 만들어내는 노인의 음성이 소영현을 불렀다.

“아가야. 거기 있는 천으로 피를 닦아 다오. 어서!”

소영현은 그 목소리를 거역하지 못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피를 깨끗이 닦아내었다.

백자의 손은 거침없이 환자의 몸속으로 들어가 툭 불거진 살점을 찾아내어 성둥성둥 잘라내었다.

“이런 악적 같으니라고!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냐?”

환자를 데리고 왔던 사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백자를 밀치려 했다.

백자는 오히려 침으로 마혈을 찔러 보호자가 정신을 잃게 하였다.

“네놈이 이것을 이해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치료가 끝날 때까지 있어라.”

백자는 바닥에 누운 사내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는 소영현이 사다 주었던 바늘과 실을 꺼내어 정성껏 내장을 기워나갔다.

소영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는데 백자가 하는 양이 너무나 진지해 방해할 수가 없었다.

환자에게 꼽아두었던 침을 뽑으니 환자는 그제야 아픈 표정을 지으며 데굴데굴 굴렀다.

백자가 침을 들어 가슴의 한곳에 깊게 찔러 넣자, 환자는 통증이 가라앉은 듯이 반듯이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악귀 같은 놈. 사람을 치료한다더니 죽이는구나.”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보호자에게 꼽았던 침을 뽑았기 때문이었다.

“흥! 내가 아니었다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지. 목숨은 구했으니 집에 가서 한 달은 족히 요양을 해야 할 것이야. 나는 바로 이곳에 머물고 있을 테니 그동안 이상이 있으면 다시 연락을 하고. 도중에 네놈이 이상한 짓거리만 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나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백자는 보호자로 따라온 자의 몸에서 침을 뽑아내고는 환자와 함께 돌려보냈다.

소영현은 시종일관 그곳에 있었으나 어린 백자가 하는 일을 보고는 놀라서 백자를 경계할 따름이었다.

“게 있지만 말고. 이것이나 가지고 가거라. 나도 피곤하고…….”

어느새 붓을 들고 처방전을 써서 내미는 백자였다.

하지만 백자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소영현은 그런 백자를 들어서 침상 위로 옮겼다.

“강호무림에는 신기한 일이 많다더니 이 아이는 참으로 신기하구나. 몸을 고기 덩어리 자르듯 잘라내는 치료라니. 놀랍기 짝이 없구나.”

그 일은 다음 날에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다만 놀라운 일이라면 다음 환자는 도끼와 칼로 머리를 쪼개어내고 피를 닦아내었다는 것이었다.

보호자는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첫날과 마찬가지로 백자가 침을 꼽자 쓰러져 지켜보게 될 뿐이었다.

놀라운 것은 머리뼈를 쪼개었던 환자는 그대로 눈을 떠 한동안 안정을 취하더니 일어나 제 발로 걸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소영현은 백자의 신묘한 의술에 매료되어 세 번째 환자를 맞이했을 때는 그의 치료를 돕는 일을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고 있었다.

청석 위에 어두운 곳에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행공을 하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미부가 앉아 명상을 취하고 있었다.

바로 진건곤과 소군이었다.

그들은 오 일이 지나도록 연무실을 나서는 법이 없이 그대로 함께 보내고 있었다.

진건곤이 운용하는 현천기공에는 상천의 힘이 흘렀다.

상천의 힘은 그 묘용이 신비롭기 짝이 없어 웬만한 내상은 순식간에 치료하고도 남았는데 청광검의 쾌검식이 만들어낸 내상은 상천의 힘으로도 꼬박 오 일이 걸렸다.

“준비되었나요?”

겨우 내상을 치료하는 운기를 끝내고 일어나자마자 소군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마치 진건곤이 일어서기만을 기다린 사람 같았다.

“준비되었습니다.”

진건곤도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답하고는 검을 들었다.

진건곤의 현천기공은 이미 극에 달해 신경 쓰지 않아도 자연히 흘러가는 경지였으나 그동안 운기행공으로 몸을 다스리며 준비한 방법이 없을 리가 없었다.

진건곤의 기수식이 달라졌다.

검을 두 손으로 들어 오른 어깨 위로 올리자, 진건곤의 몸에서는 짙은 살기가 퍼져 나왔다.

찌르는 듯한 살기가 아니라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살기였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듯, 차고 넘치는 물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진한 살기와 끈적끈적한 눈길이 소군의 전신을 훑었다.

불쾌감이 느껴져 소군이 눈을 찌푸릴 정도였다.

“이런 흉포한 기운이라니……!”

파팟!

소군의 검이 움직이기도 전에 진건곤의 검이 움직였다.

진건곤의 검에서 엄청난 살기가 피어오르고 일직선으로 소군을 찔러간 검이었다.

땅!

소군은 진건곤의 검첨을 그대로 검배로 때려 튕겨내고는 그대로 진건곤의 견정혈을 찔러갔다.

하지만 소군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튕겨졌던 진건곤의 검이 어느새 자신의 머리를 찔러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기가 가득한 검은 이전에 비해 더욱 강해진 경력을 품고 있었기에 생각했던 것만큼 충분히 튕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진건곤이 동패구상의 수법을 펼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

분명히 진건곤의 입에서 나왔으나 어울리지 않는 소리!

소군은 그 소리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대로라면 동패구상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군은 세상이 알아주는 고수 중에 고수.

몸을 젖혀 진건곤의 검을 피하자마자 다시 찔러 들어갔는데 그 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마치 한 초식인 듯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마찬가지.

소군은 이번에도 역시 놀라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진건곤의 검이 자신의 가슴을 찔러오는 것이 아닌가?

정확히는 심장을 노린 검이었지만 남녀 사이의 비무에서는 이런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진건곤의 검은 수치도 모르는 것처럼 그런 것을 가리지 않았으니 난감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계집! 탐스럽구나.”

비열한 음적이 아니라면 도저히 뱉어낼 수 없는 소리였다.

소군이 진건곤을 살피자 진건곤의 눈에는 광기가 가득하고 얼굴은 붉게 흥분해 있음을 보았다.

소군은 그제야 진건곤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곧장 움직여 진건곤의 검을 마주 찔러갔다.

떠엉!

놀랍게도 진건곤의 검이 소군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 순간 소군의 검이 기이한 곡선을 그려내자 진건곤의 검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동패구상의 방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네년이 감히……!”

진건곤의 얼굴은 더욱 붉어지고 평소의 진건곤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울러 소군을 찢어 죽일듯한 살기가 솟구치고 살벌하기 그지없는 검이 소군을 노렸다.

모두가 동패구상을 노리는 살벌한 수법들이었다.

소군은 이미 겪어본 동패구상의 수법인지라 바짝 다가서지 않고 보법을 펼치며 주위를 돌며 진건곤을 상대하였다.

떠더더더덩!

순식간에 수십 번의 불꽃이 튀고 진건곤의 검은 마치 항아리에 둘러싸인 듯이 진로를 나아가지 못하고 묶이고 말았다.

소군이 진건곤의 검을 봉쇄한 탓이었다.

“크아!”

진건곤이 기함을 지르며 용을 쓰자 그 검이 불쑥 솟아 나왔는데 소군도 역시 그 검을 향해 똑바로 찔러 들어갔다.

두 개의 검이 정확히 나란히 선 순간, 소군의 손목이 돌아가고 소군의 검이 진건곤의 검을 옭아매 진건곤의 검을 낚아챘다.

땅! 땡그랑!

“아앗……!”

소군이 뱉어낸 단말마. 검이 부딪히는 소리!

진건곤의 검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진건곤 손에서 검이 떨어지게 되는 순간 진건곤은 검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쏘아내어 소군의 손속을 어지럽게 하더니 가벼워진 손이 향한 곳은 놀랍게도 소군의 가슴이었다.

“진 공자!”

찌이익! 찍!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진건곤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고 두 손에는 소군의 옷가지에서 뜯어낸 천 조각이 잡혀 있었다.

민망하게도 소군의 상의는 길게 찢겨졌고 하얀 속살이 출렁였다. 그 위로 작은 유실이 얼핏 스쳐보였다.

파바팟!

소군은 재빨리 가슴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흐흐흐, 계집!”

진건곤은 욕정 어린 광기로 눈을 번들거리며 소군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진 공자. 정신 차려요!”

소군이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이 진건곤은 가까이 다가설 뿐이었다.

“흐… 흐… 흐……!”

진건곤의 입에서는 평소였다면 상상도 못할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극… 락… 을… 보… 여… 주…….”

진건곤의 눈에는 한 조각의 이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그 눈에서 번들거리는 광기의 노예가 되어버린 듯하였다. 소군의 소리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소군은 눈빛을 차갑게 하고는 호흡을 가다듬어 소리를 질렀다.

“갈!”

엄청난 소리가 지하연무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연무장의 천장에서는 흙먼지가 떨어져 내리고 바닥에 깔린 청석들마저 들썩였다.

진건곤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삼 장의 거리를 튕겨져 나가 비칠거리더니 다섯 걸음을 넘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군이 토해낸 어마어마한 굉음은 아미파의 항마법음이었다.

소림의 사자후에 비견되는 음공으로 파마(破魔)의 기운을 가진 법음(法音)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계… 집……!”

또다시 진건곤이 일어나 소군을 향해 손을 뻗어오고 있었다. 진건곤의 눈에는 정염이 가득했다.

처음에는 파괴의 욕구만이 가득했는데 소군의 옷가지가 찢겨 속살이 드러나자 파괴의 욕구가 정염으로 돌아섰다.

‘항마법음으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니……! 이런 지독한 것이 있을까?’

피핏!

소군의 검이 허공을 격하게 움직이자, 진건곤의 몸이 멈추고 말았다. 검기점혈의 수법으로 마혈이 짚였다.

“항마법음으로도 깨어지지 않는 몽마라니, 이런 지독한 수법이 있을 줄이야.”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숨을 돌리려는 소군이었는데 한순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진건곤의 남성이 욕정에 가득 차 불뚝 선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무아미타불!”

“크으으… 크으으……!”

진건곤이 내쉬는 숨소리조차 거북하게 느껴졌다.

“어서 풀어내지 못한다면 마기가 골수에 박힐지도 몰라. 항마법음으로 안 된다면 무엇으로 감당해야 한단 말인가?”

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개중에 항마법음보다 더 강한 수법은 없었다.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난감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건곤의 숨소리는 커져만 가고 상처 입은 짐승의 것처럼 거칠어지고 있었다.

물론 상처 입은 곳은 없었다.

눈이 핏발이 서고 남성이 더욱더 성나 바지를 찢고 나올 것처럼 부풀어 있었을 뿐이었다.

“크르르르……! 크르르르……!”

[전진자는 염정간옥(染情奸獄)의 검을 익혔어요.]

청아한 여인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소군은 놀라고 말았다.

염정간옥이라니 저승에 존재한다는 지옥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시에 욕정을 참지 못하고 그로 말미암아 죄를 지은 자들을 처벌하는 지옥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사방 천지에 욕정을 자극할 여인들이 있으나 그 욕정을 풀어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곳에서 벌을 받는 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남성에 피가 몰리고 굳세어지나 풀 곳이 없다.

한계 이상으로 시간이 흐르면 남성이 견디지 못하고 괴사하기 시작한다고 했다. 또한 그때쯤이면 신장(腎臟)도 역시 상해 되돌릴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온다고 했다.

신장이 상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 육체는 점점 썩어가기 시작하는데 그 고통이 가히 비할 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 일을 반복하는 곳이 바로 염정간옥이었다.

“염정간옥이라고요?”

[그래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염정간옥의 검을 살짝 비틀어 놨어요. 스스로 죽음을 부를 만큼 강한 욕정을 살기로 비틀어 놓은 것이죠. 그런데 전진자는 비틀린 것을 넘어 그 본연의 것을 보고 말았군요.]

“당신은 누구죠? 누구기에 그런 것을 알고 있죠?”

소군은 고개를 돌려 보고 되물어 보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지는 못하였다.

연무실 어느 곳에도 진건곤과 자신을 제외한 타인의 흔적이 없었다.

[그런 것은 나중에 알아도 돼요.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까요. 급한 것은 당신의 결정이죠. 당신은 여인이에요. 당신은 전진자를 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인의 정절은 때로는 목숨보다도 더 귀하지요. 난 당신을 이해할 수 있어요. 당신의 정조를 희생해 전진자의 생명을 구할 생각이 없다면 어서 그곳에서 나오세요. 전진자 홀로 괴로워하다가 죽겠지요.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아주 괴로운 일이 될 것이에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전음에 소군은 또다시 주위를 보았지만 여전히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나를 찾고 있나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나요? 더 이상 시간이 지나면 전진자는 물론 당신도 구하지 못해요. 당신은 눈앞에서 전진자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태연하게 살아갈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의 일부가 터져나가고 죽음을 향한 길을 밟기 전에 어서 그곳을 벗어나세요. 그것이 당신을 위한 길이에요.]

목소리의 주인은 소군에게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의 정신이 붕괴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자리를 벗어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소군의 눈이 감기고 아미가 부르르 떨렸다.

아마도 목소리의 주인은 소군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목소리의 주인은 소군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운명에 순종하라는 것을.

그리고 소군은 그 말을 아주 잘 알아들었다.

스으으! 톡!

비단옷이 미끄러지며 나는 소리였다.

서른다섯의 나이였지만 외관만으로 그녀의 나이를 맞추라면 백이면 백, 이십대의 초반을 부른다.

드높은 무공이 그녀에게 한창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새하얀 피부가 드러나고 분홍색의 유실이 나타났다.

손을 써 자신의 나신을 드러내고도 그녀의 손은 또다시 자신의 가슴을 감싸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또 다른 옷고름을 풀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스르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모습이 드러나자 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염정간옥의 검을 알고 있나요?]

소군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그런 지옥이 있다는 것 정도밖에 몰랐다.

애초부터 그런 검이 있다는 것조차도 알 리가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물어본 것은 몸을 섞는 그 순간에 타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소군의 마음을 배려해 본 것에 불과했다.

필요하기 때문에 나의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이유……!

[이왕 나섰다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전진자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될 것이에요. 명심하세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어야 해요.]

소군은 답을 하지 못하고 진건곤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얼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이 온몸이 팽창되어 있었다.

흉측한 얼굴이었지만 그 위로 평시의 진건곤의 얼굴이 떠올려졌다.

‘고집스러운 얼굴. 그리 빼어난 용모도 아니지만 처음부터 친근해 보였지. 이리될 운명 때문이었던가?’

소군의 손이 진건곤의 얼굴을 감싸더니 소군의 왼쪽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눈물이 입술을 적실 때, 그녀의 입이 열렸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을 것입니다.”

[황천혈과 옥음혈. 수영혈과 첨계혈을 서푼의 힘으로 동시에 점하세요.]

소군은 그렇게 들려오는 소리에 따라 진건곤의 혈을 짚었다.

[천명 오류의 다섯 개 혈을 이푼으로 짚으세요. 이제는 등추의 혈을 닷푼의 힘으로 찍을 겁니다. 놀라지 마세요. 등추의 혈을 찍으면 전진자는 사납게 당신을 탐할 것이에요. 애정도 없고 배려도 없죠. 그저 본능만으로 당신을 탐할 것이에요. 몇 번이 될지도 모르죠. 그저 본능이 만족할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사나움이 식고 나면 당신이 또다시 해야 할 일이 생길 겁니다. 아프고 힘든 일이 되겠지만 이왕 시작한 일이라면 꼭 성공해야 해요. 당신도 이미 바란 일이니까요. 그때 다시 말하도록 하겠어요. 부디 견뎌내세요.]

그 말을 끝으로 여인의 음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소군의 손이 진건곤의 등추혈 위로 천천히 옮겨져 갔다.

꿀꺽!

침을 삼키며 두 눈을 질끈 감은 소군의 손이 진건곤의 등추혈을 눌렀다.

“크르르르!”

짐승의 숨소리가 울리고 사나운 손이 소군의 몸을 거칠게 유린하기 시작했다.

툭! 툭!

거칠게 흔들리는 여인의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이 바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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