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독룡-24화 (24/61)

제8장

모산파에서 나온 진건곤은 용병제 진가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진가기가 있는 곳은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곳이었다.

바로 중경의 사련포에 있는 흑시였다. 사련포의 흑시는 중원에서 가장 큰 흑시였다.

사련포의 흑시에는 일반적인 상품들이 나오지 않았다.

오래되고 사용하던 물건을 판다지만 말로만 그랬고 실제로는 장물들이 팔려나가는 곳이었다.

물건들로만 이루어진 흑시가 가장 큰 곳은 북경의 근처인 조양에 있었다.

하지만 사련포의 흑시는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어서 총규모 면에서는 조양에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컸다.

흑시에는 스스로 자신의 무공을 파는 용병들이 나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련포의 흑시를 중원에서 가장 크게 해주는 이유였다.

중원에서 가장 전쟁이 많이 일어나는 곳을 꼽으라면 바로 중경이었다.

중경에는 여러 소수 민족들이 뭉쳐 살면서 서로를 정복하려 하고 있었다.

일방적인 패자도 없이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나는 곳, 언제든지 일거리를 잡을 수 있는 그런 곳이야말로 용병들의 터전이었다.

용병제는 그런 곳에 자리를 잡고 그들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칠 년 전 홀연히 나타난 용병제 진가기는 흑시 용병시장의 정점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흑시의 용병시장은 모든 것이 용병제의 수족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평소 두 손에는 손가락이 나오는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고 그의 성명무기 아홉 개의 고리가 달린 구환패도였다.

진건곤이 찾는 조건에 딱 맞게 해당되는 자였다.

흑시는 밤에 열린다. 언뜻 보면 야시장 같지만 야시장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간단한 거적때기가 깔린 곳에 황금 수십 냥짜리 금붙이와 보석, 도자기, 서화가 굴러다녔다.

어차피 어디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진품인지도 모를 그런 것들이 거래되고 있었다.

능력이 좋아 진품을 사면 대박이었지만 그런 행운을 줍는 게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진건곤은 이곳저곳에서 번들거리는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능력이 없는 자가 물건을 손에 쥐면 바로 꼬리가 붙을 것 같았다.

흑시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되었다. 어차피 좋은 물건들은 모두가 조양으로 흘러간다.

이곳에는 조양까지 가지 않아도 처분이 될 만한 물건들만 남게 되는 것이었다.

막 흑시를 빠져나가려는데 유독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섬세한 세공으로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 가락지가 있었다.

하지만 진건곤의 눈에 띈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가락지에는 사방으로 뻗어 가시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고 어두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진건곤은 문득 깨닫는 것이 있어 손을 가져다 대어 봤는데 역시나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머 예쁜 반지네!”

하얀 손가락이 반지를 잡으러 왔다.

“위험한 물건이오.”

진건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손을 막았다.

“어머!”

여인의 교음이 울렸다.

진건곤의 눈이 여인을 보았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인의 용모는 상당히 빼어났다.

하지만 그런 것에 놀랄 진건곤은 아니었다.

여인의 용모가 소군을 빼어 닮았기에 놀랐던 것이었다.

여인은 놀라서 손을 잡아 뺐다.

진건곤이 놀라 잠시 동안 손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놈! 어디서 감히!”

뒤에서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살기가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맞는다면 위험한 물건임에는 확실했다.

진건곤은 보지도 않고 몸을 틀어 피하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하지만 그 물건에 손을 대어선 안 되오.”

여인이 나서서 노파와 진건곤의 중간에 섰다.

“할멈, 그만두세요. 위험한 물건이래서 만지지 못하게 한 거래잖아요.”

“그런 말을 믿으십니까? 아가씨에게 수작을 걸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놈은 그냥…….”

노파의 몽둥이가 흔들리자 여인의 몸을 피해 여섯 개의 그림자를 그리며 진건곤을 향해 쇄도했다.

진건곤은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놀랍게도 이미 여섯 개의 몽둥이를 막아가는 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여인의 하얀 교수가 맹렬한 몽둥이를 여섯 개를 모두 잡아 버렸다.

“할멈! 당장 그만둬! 안 그러면 나 혼자 가버린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그리 부드럽게 대하시니 저런 놈들이 끊이지 않고 나타나는 겁니다.”

여인은 얼른 등 뒤로 손을 흔들어 진건곤에게 가라는 표시를 했다.

진건곤은 머쓱해진 얼굴로 그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서도 여인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게 되었다.

소군과 너무나도 닮은 얼굴에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군 누님과 저리도 닮았다니. 세상에는 정말 닮은 사람들도 있구나.”

진건곤은 마지막으로 여인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의 길을 걸었다.

흑시가 끝이 나는 곳부터 시작되는 시장이 있다. 바로 용병시장.

언뜻 보자면 부랑자들의 집합소인 것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추레한 옷차림에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몸가짐들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다.

저마다 하나씩 손에 쥔 무기들이 없었다면 부랑자로 치부하고 말 상황이었다.

누가 찾아왔는지 관심도 없이 길거리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거나 누워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자신을 보이기 위해 제법 늠름하게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용병들의 눈빛은 날카로워졌고 차림새도 역시 좋아졌다.

하지만 그들을 부리는 가격도 역시 비싸졌다.

대략 보아도 이곳에 모인 자들의 수는 천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대부분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기운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류에도 못 미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기운을 뿜어내는 자들도 있었다.

진건곤은 개중에도 가장 특별한 기운을 가진 자에게 볼일이 있었으니 곧장 끝으로 나아갔다.

마지막에 다다르자 길은 외길이 되었다.

막다른 곳에는 마지막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에 진건곤의 볼일이 있었다.

개방에서 들은 대로라면 바로 그곳에 용병제 진가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길에 들어서자 그 주위에 있었던 자들이 모두 진건곤을 주시했다. 개중에 일부는 살기를 날리는 자들도 있었다.

진건곤은 그런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자 정순한 살기가 느껴졌다.

일시에 드넓게 일어난 살기가 온통 진건곤에게 집중되었다.

‘스물두 명! 두 개의 원이니 십방살?’

십방살은 모두 스물두 명으로 이루어진 진법으로 제법 유명한 진법이었다.

내원과 외원으로 두 개의 원을 가지고 있으며 내원이 천간을 의미하고 외원이 지간을 의미한다. 그렇게 짝이 되어 갑자가 돌아가듯이 빈틈없이 돌아가게 만들어진 진이었다.

진형은 건물 주위로 둥그렇게 펼쳐져 있었는데 진건곤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쉬잇!

진건곤의 눈앞에 불쑥 솟아난 자가 있었다. 그의 손에는 구환도가 들려 있었다.

용병제와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용병제를 숭상하는 자임에 틀림없었다.

“여기부터는 흑시가 아니오. 출입을 불허하오.”

사내의 신법은 출중하였다.

본 적은 없으나 이미 절정의 무공이라고 생각이 들 만큼 뛰어난 신법이었다.

이런 자들이 진법을 이루고 있다면 대단한 위력일 것이 틀림없었다.

진건곤은 굳이 구파일방이 아니라도 인재는 많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용병제에게 볼일이 있소.”

사내는 진건곤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용병제님을 뵈려면 만나는 것만으로도 돈이 필요하오. 전진자!”

사내는 말끝에 전진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미 신원은 파악되었으니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황금 열 냥짜리 전표요.”

그를 만나는 데에는 돈이 든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진건곤은 전날 공희국이 진영리의 재산을 맡아놓은 것이라며 주었던 것이었다.

다른 자가 나타나 진건곤이 내민 전표를 받아 들었다. 그 자리에서 확인하더니 사내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흥! 가짜 전표를 가지고 오다니 누구를 희롱하는 것인가?”

진건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반년에 가깝게 품에 넣고 다니던 것인데 이제와 그것이 가짜라니!

진건곤의 목소리에 살이 돋았다.

“확인해 봐야겠소.”

진건곤은 가짜라면 공희국의 목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럴 뜻이 없는지 고개만 가로로 저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 용병제를 희롱하고도 물증을 돌려 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진건곤은 매우 화가 났지만 그 대상이 이들이 아니라는 것쯤은 구분할 수 있었다.

“내 신분을 알고 있지 않소? 확인해 봐야 할 일이 있소. 잠시만 돌려주시오.”

“불가(不可)!”

“그럼 어쩔 수 없구려.”

사내가 불가하다는 소리를 내자 진건곤은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나서며 전표를 낚아채려 했다

치리링!

구환이 흔들리며 소리를 내고 도광이 번뜩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사내의 도가 진건곤의 손을 잘라왔다. 진건곤의 손이 가는 길목을 노린 매서운 수였다.

스르륵!

진건곤의 손은 가던 길을 돌아 다시 내뻗어졌다.

하지만 도광이 번뜩이는 순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움직임에 불과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랐다.

놀랍게도 진건곤의 손에 전표가 들려 있었고 번뜩였던 도는 허공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사내는 놀란 눈이 되었으나 반응은 지체 없었다.

“십방! 살!”

사내의 명령은 지체 없는 것이었으나 오히려 느린 감이 있었다.

십방살의 진은 사내가 도를 뽑았던 순간과 동시에 진건곤을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한꺼번에 열 개의 검이 진건곤의 몸을 노리고 쏘아졌으나 진건곤의 신형은 여유 있게 검과 도 사이로 움직이며 몸을 빼내고 있었다.

어찌나 부드럽게 피해나갔는지 내원의 십방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들어가지 못하고 잠시 허둥거릴 지경이었다.

진건곤의 경지는 또다시 변해 있었다. 광우와 있었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진기의 흐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확인만 하고 돌려준다. 물러서!”

“회(回)!”

진건곤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신호를 보내자 열 명의 사내들이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흥! 이곳이 네놈의 안방인 줄 알았더냐? 용병제를 희롱한 죄. 팔 하나는 놓고 가라.”

사내의 말에 진건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금방 보았을 텐데? 네놈들의 솜씨로는 어림도 없지.”

“네놈이 본 것은 십방의 힘이었을 뿐, 십방살의 힘이 아니다.

“유(幽)!”

사방에서 네 명이 튀어나와 진건곤에게 병장기를 휘둘렀다.

사내들의 공격은 절묘한 시간 차로 배합된 공격이라서 그 수를 뻔히 보는 진건곤으로서도 한 번에 피하는 방법은 없었다.

진건곤의 검이 뽑혀져 나오고 그 자리에서 바람개비처럼 돌았다.

챙챙챙챙!

공격은 끊어지지 않았다. 내진의 그림자 뒤로 있던 자들의 검이 갑작스레 나타나 진건곤을 사위에서 동시에 찔러갔다.

진법의 효과로 인해 내원의 인물 등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검들이었기에 무척이나 대처하기 힘든 검이었다.

하지만 그건 다른 무인들의 이야기.

진건곤은 그들의 기운을 이미 읽고 있었다. 아울러 검이 뻗어나갈 검로까지 눈으로 보듯이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천근추를 사용한 듯이 아래로 꺼지며 오른발을 축으로 왼발이 차고 휘돌았다.

여덟의 인형이 허수아비가 허공으로 던져지듯이 날아올랐다가 떨어져 내렸다.

쿠쿠쿠쿵!

중앙에는 진건곤 홀로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곤란해. 장난은 거기까지!”

진건곤이 검을 들어 가슴에 올리며 기세를 개방했다.

쿠콰콰!

무서운 기세가 퍼져나가자 차가운 바람이 일어 빈 공간을 메웠다.

하지만 진건곤을 에워싼 십방살의 인물들은 그 무서운 기세도 불구하고 위축됨이 없었다.

이 낭인들은 모두가 백전노장의 인물들로 오히려 더 흉흉한 눈으로 진건곤을 노려볼 뿐이었다.

한마디로 피를 보고 나서야 멈추는 늑대와 같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늑대들의 우두머리 되는 자는 진건곤을 향해 공격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수월하게 십방살을 상대하는 자는 본 적이 없다. 진법을 이루었는데도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한낱 후기지수의 소문이 너무 화려하다고 생각했는데, 그토록 화려한 소문도 오히려 축소된 것이었단 말인가?’

우두머리는 진건곤이 보여준 첫수에 차마 공격신호를 보내지 못했다.

너무나 뚜렷한 실력 차이를 보여준 경합이었다. 검을 쓰는 무인이 검조차 꺼내지도 않고 그들을 피한 것이었다.

“물러서!”

허공에서 두 개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흐릿한 검기 두 개가 진건곤을 향해 쏘아졌다.

밤이라서 흐릿한 검기가 눈으로 보기도 힘들 터였지만 진건곤은 아무런 불편함도 없이 피했다.

파바바박!

대리석을 깔아 만든 바닥이었건만 모래밭처럼 먼지가 피어올라 공격한 자들이 뛰어난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두 인영은 용병제의 좌우 호법으로 강호에 이름이 난 고수들이었다.

흑백이로!

희끗한 귀밑머리가 난 두 노인들이 쥐고 있는 검에는 손에는 백호와 흑호가 각각 새겨져 있었다.

“그대는 뛰어난 후기지수이나 장난이 지나쳤다. 감히 거짓 전표로 용병제를 희롱하고 검을 휘두르다니!”

흑백이로는 각기 검을 들어 진건곤을 향해 쏘아져 갔다. 전광석화 같이 품어져 나온 검은 무서운 쾌검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검에 맺힌 하얀 연기는 풀어지지 않았으니 쾌검식을 사용하면서도 충분히 내력을 유지할 수 있는 고수라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합벽진으로 잘 짜인 검이어서 앞뒤가 잘 들어맞았다.

하지만 진건곤의 눈에는 이번에도 역시 두 노인의 검이 움직일 검로가 선명하게 보였다.

두 개의 검 사이의 간극으로 들어갔다가 뒤로 빠져나오며 등 뒤로 제압할 생각을 하며 뛰어들었다.

채챙!

하지만 진건곤은 둘 사이로 뛰어들다 말고 검을 뽑아 황급히 막아야만 했다.

생각과는 다르게 몸이 느려 검극 사이를 매끄럽게 빠져나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눈에는 뻔히 보이는 방법이 있었으나 몸이 따르지 못했다.

‘이런! 상천의 눈을 몸이 따르지 못하는구나.’

하지만 그것은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혀 달랐다.

노인들은 중원천하에 퍼져 있는 수많은 낭인들의 정점 중에 하나인 자들이었다.

용병제라는 탁월한 인물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노인들이었는데 진건곤이 자신들의 협공을 막아내자 두 노인은 더욱 경각심을 품었다.

“전진자! 알려진 것보다 더한 고수로구나! 하지만 우리가 나선 이상 곱게 돌아가지는 못한다.”

흑백이로는 다시금 진건곤을 향해 짓쳐들어 갔는데 전과 다르게 심각한 표정이었다.

두 개의 검이 번쩍이며 검영을 풀어내자 달빛에 비친 검광이 사위를 감싸는 듯했다.

그들의 검은 광우가 가장 빠르게 쳐냈던 쾌검식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고 초식의 정교함마저 갖추고 있었다.

진건곤은 선명하게 덤벼올 검로를 피하다가 움직이지 따르지 못할 때만다 검을 뻗어 흑백이로의 검을 튕겨내며 버티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데도 몸이 따르지 못한다는 것이 괴롭구나.’

진건곤은 진건곤대로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장내의 인물 중에 그런 생각을 하는 자는 참으로 드물었다.

그들은 오히려 입을 벌리고 진건곤의 움직임을 살펴야만 했다.

작은 움직임으로 흑백이로라는 고수들의 움직임을 피해내고 있었고 이따금씩 검을 뻗어 튕겨낼 뿐이니 그들이 보기에는 진건곤이 한 수 위의 고수로 보였던 것이다.

“이놈! 우리를 희롱하는구나!”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흑백이로 스스로도 자신들이 희롱당하는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초수가 늘어날수록 그들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진건곤은 진건곤대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화산의 무공을 쓸 수만 있다면……!’

화산의 내공심법이 현천기공의 묘용을 모두 흡수하지는 못했지만 육합건곤검은 달랐다.

육합건곤검의 초수에 담긴 무리를 발전시키고 발전시킨 것이 바로 화산의 검결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화산의 검결을 쓰면 흑백이로를 패퇴시키고도 남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방법이 있구나!’

진건곤의 검이 갑자기 둥그렇게 돌았다.

이미 무림대회에서 보여주었던 초식으로 육합건곤검에 무당의 묘리를 섞었던 무시무종의 회풍무류검이었다.

효과는 없었지만 자유롭게 진건곤을 공격하던 흑백이로의 검이 진건곤의 검이 그려낸 원에 빠져들었다.

“이건?”

“무당?”

흑백이로는 경호성을 터트리며 검을 수급하기에 바빴다. 한 번이라도 빠져들면 뽑아내지 못할 것 같았기에 이제는 흑백이로가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진건곤이 끝도 없이 만들어내는 원형의 검광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는 흑백이로였다.

이미 수십 번의 초식 교환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뒤집어진 전세였기에 우열이 갈라졌다고 보였다.

패색이 짙어 보이는 흑백이로였기에 낭인들의 안색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두 분께서는 스스로를 믿고 앞으로 나가셔야만 합니다.”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리자 흑백이로는 얼굴이 달라졌다.

무언가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을 보이더니 뒤로 물러서던 보법을 바로잡아 각자 자신의 절초를 펼치며 정면으로 치달아 들어왔다.

흑검은 지나간 자리에 미끄러지는 듯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진건곤의 좌측을 베어갔고 백검은 날카로운 송곳처럼 무서운 예기를 만들어내며 오른쪽을 찔러 들어갔다.

비장의 초식답게 각각의 검에는 진하게 맺힌 운무 같은 것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흑백이로의 변화에 진건곤도 역시 내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맞부딪혀 갔다.

쩌저저정! 쩌저저정!

검과 검이 부딪히는데 마치 쇠기둥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내력이 약한 자들은 귀를 막고 몸부림쳤고 내력이 강한 자들이라도 스스로 몸을 방비할 시기를 놓친 자들은 얼굴을 찡그려야만 했다.

여러 번의 부딪힘이 있고 진건곤이 그려낸 원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진건곤은 다섯 걸음을 흑백이로는 각기 네 걸음을 뒤로 물러나 있었다.

피리리리릭!

진건곤과 흑백이로의 사이에 중년의 사내가 떨어져 내렸다. 그의 오른손에는 구환도가 들려져 있었다.

바로 용병제 구환도의 등장이었다.

“그의 검은 날카로우나 두 분의 내공을 한꺼번에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 싸우신다면 두 분의 승리입니다. 그렇지 않나, 전진자?”

“흥! 싸움 도중에 훈수를 두고서는 당당한 척하는군. 흑백이로는 나에게 졌어! 이제부터 제대로 상대해 줄 작정이었거든.”

“이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흑백이로는 감히 나서지 못하고 일렁이는 눈으로 진건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진건곤은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만나고 싶었던, 아니 만나야만 했던 자를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검을 들어 도발하듯이 용병제의 얼굴을 겨누었다. 눈에서는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아버지의 원수일지도 몰랐고 이렇게 첫 대면에 검부터 겨누고 나니 감정이 새롭게 생겨나는 용병제였다.

용병제는 손을 흔들어 흑백이로와 십방살을 물러나게 했다. 그러더니 다시 진건곤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크하하하핫! 내 도를 꺾고 다시 말해 봐!”

용병제 자신의 도를 들어 어깨 위로 얹었다.

진건곤은 고수인 양, 여유를 보이는 그의 모습이 짜증스러웠다.

‘화산의 무공만 사용해도……!’

아쉬움만 맴돌 뿐이었다.

‘하지만 아쉬움은 아쉬움일 뿐. 흑백이로를 상대하려던 방법을 써줘야겠지.’

진건곤의 검이 용병제의 가슴을 노리고 그대로 쏘아져 들어갔다.

바로 소군조차도 놀랐던 중주일검의 초식!

용병제도 역시 그 검의 끝을 알아보지 못하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용병제는 제(帝)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 세상에 적수를 보기 힘든 인물이었다.

구환도에 진기를 가득 넣어 넓은 도면으로 중주일검을 후려쳐갔다. 그의 구환도는 뿌연 연기에 가려져 신비해 보일 지경이었다.

중주일검의 변화를 애초부터 막겠다는 심산.

‘이런!’

진건곤의 눈에 그의 도로(刀路)가 훤히 보였지만 그의 도를 쉽게 피할 수가 없었다.

검을 회수해 보았지만 너무나 빠르게 다가오는 도에 그대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쾅!

구환도에 그대로 두들겨 맞은 검이 튕겨져 나갔다.

휘청!

검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자 몸이 흔들려 걸음을 옮겨 다시 중심을 잡아야만 했다.

“와아아아아!”

낭인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진건곤과 부딪힌 인물들 중에서 처음으로 득세를 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송이! 아직 멀었다.”

진건곤은 애초에 생각했던 방법을 포기했다.

내력에 차이가 나도 너무나 차이가 났다.

검을 섞어 가며 상대의 무공에 담긴 묘리를 본 따 사용하려 했으나 검을 섞다가는 바로 승부가 갈릴 것만 같았다.

‘소군 누님 말고도 이런 자가 존재하다니……!’

진건곤은 전중혈로 내력을 일으키고 난 다음부터 또래에서 내력의 부족함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연배가 다른 고수들과는 여전히 차이가 나고 있었던 것이다.

진건곤은 검을 거둬들여 허리춤에 들었다.

그 광경을 본 자들은 진건곤이 패배를 받아들이는 줄 알고 기뻐했으나 몇몇의 고수들은 안색이 달랐다.

“쾌검인가?”

용병제는 거만하게 구환도를 다시 어깨 위로 올리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냥 다가오는 것 같았지만 기실 그 속에는 잔뜩 웅크린 진기가 뭉쳐져 있었다.

쾌검을 보고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깔린 공력의 운용이었다.

진건곤은 그의 태도를 보며 기분이 상했다. 자신을 얕보는 그에게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디 맘대로 되는지 볼까?”

진건곤도 잔뜩 진기를 모아 전중혈에 담아 놓고는 검을 뽑을 거리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일촉즉발의 시간은 용병제의 거만한 걸음에 의해 만들어졌다.

전중에서 내력이 터져나갔다.

견정으로 옮아가 또다시 내력이 터져나갔다.

상완 하박을 거쳐 맥문에 이르더니 또다시 터져나가는 내력!

피잉!

진건곤의 검은 장내의 아무도 보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동시에 튕겨지듯이 뒤로 쏘아져 나가는 용병제!

그의 얼굴에는 경악에 가까운 놀람이 서려 있었다.

잠시 후, 그의 가슴에는 길게 일자로 그어진 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얇은 선이 천천히 혈선으로 변하며 굵어지고 있었다.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놀라고 말았다.

전진자가 아무리 촉망받는 후기지수라고 한들 겨우 그 나이에 용병제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실력이라니.

믿을 수가 없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진건곤도 역시 입가에서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내상이었다.

자신의 몸조차도 견딜 수 없는 과도한 공력으로 터트린 내력에 스스로 손상을 입은 것이었다.

부지불식간에 십이 성의 공력을 끌어올렸던 것이었다.

모두들 용병제의 너무나 빠른 한 수가 내상을 입혔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용병제는 자신이 공격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놈! 무공을 숨기고 있었구나!”

“흥! 자신도 없이 왔을까?”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진건곤은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자신의 무공으로 당해낼 수 없어 광우의 무공을 빌렸는데 그것이 이토록 위력적일지는 몰랐다.

‘나의 내력이 쾌검에 더욱 어울렸다니 몰랐구나.’

선천의 기운이 서린 내력은 선천의 기운이 먼저 달려 나가 다른 기운을 끌어올린다.

선천의 기운이 움직이는 속도는 그야말로 동시, 마음먹기와 동시에 도달해 있는 지경이었다.

상천의 내력이야말로 쾌검에 가장 어울리는 내력이었다.

용병제의 상처는 상당히 깊어 자신이 가진 무공을 모두 다 발휘하지 못할 정도의 깊은 상처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도를 휘둘렀다.

쐐쐐쐐쐐쐐, 쐐액!

구환도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울리고 묵직한 구환도가 허공에 도영을 그려냈다.

다섯 개의 동영이었는데 모두가 진체라도 되는 듯이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천의 힘으로 기운을 읽는 진건곤이었지만 이 다섯 개의 도영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다섯 개의 도영이 모두 진체이리라.

다만 도로를 바라보고 몸을 움직이며 쾌검을 쳐냈다. 아까와는 다르게 십 성의 공력으로!

십이 성의 공력을 다시 몸 안에서 터트린다면 용병제의 도에 죽는 것보다 더 빠르게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진건곤을 알고 있었다.

몸을 상하게 하는 십이 성의 쾌검으로도 잡을 수 없었던 상대를 십 성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떠더더덩!

철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고 구환도의 그림자가 뒤로 튕겨져 나가며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하지만 하나의 도는 검에 부딪히고도 살아지지 않았다. 용병제는 손목을 돌려 진건곤의 쾌검이 날린 힘을 상쇄하고는 그대로 찔러 들어갔다.

용병제의 구환도가 진건곤의 목을 찌르려는 찰나!

아슬아슬하게 돌아온 검이 구환도의 도면을 때렸다.

쩡! 푸학!

허공으로 떠오른 진건곤의 몸이 내려앉자 그 위로 피가 떨어져 내렸다.

진건곤의 방어가 완전하지 않아서 왼쪽 어깨에 깊은 상처가 생겼고 피가 선홍빛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불의의 쾌검식에 상처를 입은 용병제의 무공이었지만 진건곤에게는 위협적인 것은 여전했다.

진건곤은 상처를 돌보지 않고 오직 용병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건곤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용병제도 역시 진건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진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힘을 아끼겠다? 아니면 아까와 같은 무공을 발휘할 수는 없는 건가?”

가슴에 검상이 새겨지자 용병제는 거만함을 버리고 절초에 해당하는 오룡단구도를 펼쳤다.

하지만 진건곤은 오히려 쾌검의 속도를 내렸던 것이다.

용병제는 그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진건곤이 스스로 몸을 상하게 할 수 없어 내렸던 내력의 수위를 알고 분노하는 것이었다.

“불의의 일 격을 맞았다고는 하나 나를 희롱하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느냐?”

용병제는 도를 상단으로 들어 올렸다.

“오룡참! 네 목을 칠 초식이다. 알아둬라!”

분노에 퍼덕이는 용병제와는 달리 이글이글거리는 눈으로도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는 진건곤은 검을 발치 아래로 내렸다.

“오라!”

오히려 진건곤이 오연하게 용병제를 도발했다.

용병제의 초식은 진건곤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쾌검을 보고 선택한 것이었다.

진건곤은 자신이 펼치는 쾌검으로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담담하게 화산의 무공을 생각하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진건곤의 검에 하얀 안개가 서렸고 근원을 모를 진향 향기가 퍼졌다.

용병제는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처음으로 느끼는 검에서 피어나는 향기!

화산의 전설로 떠도는 매화분분의 초식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진건곤이 충분히 진기를 끌어올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검상을 입어 전력을 다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진건곤 같은 후기지수에게 진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용병제였다.

휘익!

팽팽하게 마주보던 그들의 사이로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었다. 마치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이 둘은 서로에게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가까워질수록 위험한 승부!

둘 중에 하나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거리까지 좁혀지고 말았다. 도와 검의 간극이 없어지는 그 순간!

꽈드등!

다섯 개의 하얀 도영과 수많은 꽃잎이 부딪혔다.

가히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오고 진건곤의 검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그야말로 매화분분의 초식이 철검의 조각조각으로 변해 날아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구환도는 매화분분과 부딪히자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한순간 멈춰 서고 말았다.

박빙!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힘으로 멈춰버린 것이었다.

절묘하게도 전력을 다 사용하지 못하는 용병제와 십 성의 공력을 모두 다 사용한 진건곤의 위력이 박빙으로 맞서게 된 것이었다.

다만 진건곤의 검이 구환도처럼 튼튼하지 못했다는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용병제는 천천히 또다시 도를 들어 올려 상단에 올려놓았다.

그의 절초인 오룡참의 초식을 또다시 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건곤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손바닥을 펴고 그 앞에 육합장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검이 날아가 버렸지만 진건곤의 태도는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더 다부지게 용병제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흔들림이 없는 진건곤의 기개에 반해버린 용병제가 입을 열었다.

“아쉽구나. 좋은 검이었다면 승부가 길었을지도 몰랐거늘! 하지만 너의 앞날을 보는 게 두렵구나. 오늘로 끝내자.”

“잠깐!”

하늘에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 인영이 떨어지는 곳은 말 그대로 진건곤과 용병제의 사이였다.

용병제는 방해를 받고 싶지 않은 듯, 서둘러 오룡참의 초식을 펼쳤다.

오룡참을 그대로 맞고 싶지 않다면 허공에서 신형을 움직여 다른 곳으로 착지해야만 할 판이었다.

물론 그럴 경우에는 진건곤의 목숨은 건질 수가 없을 것이었다. 아무리 상천의 힘을 사용하는 진건곤이라고 해도 맨손으로 오룡참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쩌정!

놀라운 일!

허공에서 뻗은 검이 용병제의 구환도를 빗겨냈다.

아무리 용병제가 제 힘을 다 쓰지 못했다고는 해도 쉽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늦지 않아 다행이구나.”

진건곤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누님?”

“소검후!”

용병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인의 이름을 맞출 수 있었다. 전력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도를 허공에서 받아낼 정도의 여인은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아미파의 소검후!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네, 누님!”

소군은 고개를 돌려 용병제를 향했다.

“오늘은 이만 하지요.”

“그럴 수 없소!”

“아니라면 제가 나설 겁니다. 이미 심한 부상을 입어 전력을 쓰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양보하시지요.”

주변의 사람들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진자의 무례는 도를 넘었소. 그를 단죄하지 않고는 강호에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소.”

용병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당신은 상처를 입었으니 저의 상대가 되지 못해요. 정녕 저랑 승부를 보겠습니까?”

“소검후는 신의가 있다고 강호에 알려져 있소. 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그 점만은 믿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아니구려. 이런 식으로 승부를 가로챌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소.”

용병제는 강호를 들어 소군을 압박했다.

“누님!”

진건곤이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나섰지만 소군은 단호하게 진건곤을 말렸다.

진건곤의 훈혈을 찍어 다시는 진건곤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진건곤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상처가 낫게 된다면 전진자가 그리 무섭지는 않을 텐데요.”

소군은 말과 함께 검을 꺼내어 들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용병제는 소군이 검을 꺼내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의 설득이 통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하하하하! 그리하여 당신이 석 달의 시간을 얻는다면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겠소?”

“지금 당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요.”

막무가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용병제는 소군의 그런 행동에 이를 갈 정도였지만 감히 도를 들 수는 없었다.

“석 달! 한 달에 금 백 냥씩으로 치겠소. 이 자리에서 전진자와 함께 금을 보여주겠다고 약속을 하시오.”

“석 달 후를 기다리세요.”

소군이 냉랭한 목소리를 남기고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용병제도 더 이상 소군을 찾지 않았다.

용병제는 무거운 안색으로 그대로 처소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쿨럭!

문을 닫자마자 용병제는 피를 토해냈다.

“빌어먹을! 그토록 강할 줄이야. 과연 소검후라 불릴 만하구나.”

비록 용병제가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겨우 한 번의 격돌로 용병제에게 내상을 입혔을 줄이야.

“하지만 그 애송이의 목숨을 구하진 못한다. 석 달 동안 세상이 쪼개진다고 해도 그 애송이는 나를 이길 수 없지! 석 달이 필요한 건 그 계집과 싸울 수 있도록 몸이 회복되는 시간일 뿐이지.”

용병제는 스스로 다짐을 하듯이 말하고는 의자에 앉아 손을 놀렸다.

그그그긍.

기계음이 울리고 용병제는 의자와 함께 지하로 꺼져 버렸다. 그곳에는 아까와 똑같은 의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언니! 어때요? 그 사람 살 수 있을까요?”

“영현! 함부로 호들갑 떨지 마라. 그럴만한 상처를 입은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저 잠든 것뿐이다.”

소군이 나무라듯이 소영현이라는 여자를 보았다.

“언니, 죄송해요. 저는 그냥 걱정이 돼서.”

소군은 소영현과 진건곤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크게 한숨을 쉬며 방을 나섰다.

“잘 돌봐 주어라!”

“언니는 어디로 가는가요?”

“바람을 쏘일까 싶구나.”

“저도 같이 가요. 언니!”

“아니다. 혼자서 나갈 테니. 그 아이를 돌봐 주려무나.”

“네, 언니.”

소영현은 소군의 말에 시무룩해져 대답하고 말았다.

소군은 소영현의 친언니였다.

나이 차이가 열두 살이나 나는 큰 언니였는데 아미파로 나가 아주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영현은 기억에도 없는 언니가 돌아온 것을 반겼다. 자신의 친언니가 강호의 여협이 되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여중제일인이며 천하제일인을 넘보는 아미의 소검후라는 것도 놀라웠다.

소영현은 소군을 대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소군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답답한 마음이 되어서 길을 나섰다.

소군이 나선 곳은 중경의 성도 내의 무국공의 집이었다.

단지 무국공의 벼슬이 아니라 개국공신의 집안인지라 대대로 내려오는 특권이 있는 집안이었다.

스스로 방비할 수 있는 사병을 길러낼 권한마저 있었던지라 소군의 집안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진건곤은 눈을 떴다.

자신이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그 자리에 누웠다.

“누님은 어디로 가신 것이지? 기다리면 오겠지.”

그대로 침상에 누워 현천기공을 운기하며 소군을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자 문이 열리면서 여인이 들어왔다. 여인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혼자말로 입을 열었다.

“아직도 잔단 말인가?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가?”

그 말에 진건곤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오. 일어났소이다.”

“아! 이런!”

여인은 잠시간 버름한 듯이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러니까. 여기는 우리 집. 그러니까 무국공의 집이고… 당신은 언니가 데려온 환자. 아니 사람이지요. 저는 소영현이고 언니는 소영라. 아… 아니 소군이라고 해야 알아들을까요? 언니는 당신을 제게 맡겨놓고 나가셨지요.”

횡설수설하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이미 다 들어 알고 있었던지라 진건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소군을 꼭 닮아서 놀랐던 여인을 다시 만났다는 것이 놀라웠을 뿐인데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소군 누님의 동생이구나. 과연 내가 놀랄 만큼 닮을 만도 했어.’

“누님은 어디로 가셨는지요?”

“몰라요. 언니는 행선지를 말하고 나가시지 않으니까요.”

또다시 말이 끊어졌다.

“저기요. 고마웠어요. 그 반지 알고 보니. 그 반지를 낀 사람들이 원인 모르게 불행해져서 버려졌던 반지래요.”

“아! 역시……!”

진건곤은 원래 말이 짧았다.

소영현은 말이 많은 편이었으나 처음 보는 남자에게 말을 쉽게 할 정도의 성격은 아니었다.

또다시 잠시간의 침묵이 들고 소영현이 일어서 다시 나갔다.

문 사이로 얼굴만 남기더니 빠끔히 입을 열었다.

“또 올게요, 필요한 게 있으면 사람을 불러주세요.”

진건곤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진건곤의 웃음이 방문을 넘어 울리자 걸어 나가던 소영현의 얼굴에 걱정 반, 울음 반인 얼굴이 되었다.

“뭐야? 내가 뭘 또 잘못한 건가?”

소영현은 자신을 다시 한 번 탓하더니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무엇이라고? 소군이 전진자를 구해가? 쯧쯧쯧쯧!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리는구나.”

“하지만 석 달 후에 다시 만나 겨룬다는 약조를 받았다고 합니다. 너무 심려치 않아도 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석 달이라! 그동안 전진자가 또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안단 말이냐?”

상대는 감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처음 강호에 나와서는 백안옥마의 일 장에 죽을 뻔했다. 하지만 겨우 두 달 후에는 무림대회에 나와서 무공을 뽐냈다. 그리고 또 두 달 후에는 살인막과 부딪혀 동생의 희생으로 살아남았지. 하지만 불과 한 달 뒤에는 살인막의 살수들을 모두 죽였다. 또 석 달 만에는 철혈궁왕을 꺾었지. 특급살수로 알려진 흑암도 그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석 달 뒤에는 포사도 잡았다. 또 육 개월 후에는 용병제라는 절대자에게 상처를 입힐 만큼 변했지. 석 달이라는 시간이 전진자에게는 결코 짧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자 석 달 동안의 기간이 정말 길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상대는 용병제 구환도였다.

“하… 지만 설마. 용병제가 그런 후기지수 따위에게 지겠습니까?”

“그리 말해 줘도 모르겠느냐? 용병제라면 충분히 믿을 만하지만 조금이라도 변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반드시 전진자를 없애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래, 나 귀제갈이 세운 계획에는 변수란 없다. 이미 이중 삼중으로 함정을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추호도 실수가 없도록 살피고 또 살펴 계획을 보완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귀제갈과 그의 제자는 스승님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강호인들이 잘 쓰지 않는 말이었다.

소군은 밤이 되어 돌아와 진건곤을 찾았다.

“고맙습니다. 누님!”

“공치사는 그만 하죠. 그런데 확인해 보니 전표는 진짜라고 하더군요.”

진건곤은 공희국에 대한 분노를 버렸다. 대신 낭인들의 총두목인 용병제에 대한 분노를 얻었다.

“그들이 왜 나를 노렸을까요?”

“살인막도 낭인들도 청부가 가능합니다. 일단은 그게 의심스럽네요.”

“청부란 말이죠. 하지만 그게……!”

자신을 청부할 자는 공희국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희국과 거래를 한 뒤가 아닌가? 자신을 청부할 이유가 없었다.

“석 달 뒤입니다.”

석 달의 시간이 정해진 것은 진건곤이 실신하고 난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진건곤은 무슨 말인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석 달 뒤에 용병제와 다시 싸우기로 했어요. 용병제는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때까지 더 강해지지 못하면 가망이 없어요.”

“못 이길 정도는 아니죠.”

진건곤이 이를 악물며 뱉어낸 말이었다.

“아닙니다. 져요. 그것도 반드시라고 할 만큼이요.”

진건곤이 놀라서 소군을 보았다.

“진 공자와 용병제의 싸움을 조사해 보았어요. 운이 좋았더군요. 용병제가 방심했을 때, 쾌검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제가 가기 전에 이미 승부는 끝났을 것이에요.”

진건곤은 소군의 말을 듣고 수긍할 수 있었다.

처음에 느꼈던 용병제의 역량은 거대한 벽과 같았으나 싸울수록 만만해져 갔다. 아니! 자신의 쾌검과 부딪히고 난 뒤에 예상과 다르게 어찌해 볼만한 상대로 변해 있었다.

“용병제로서는 방심의 대가가 컸습니다. 족히 석 달은 정양해야 할 부상이었습니다.”

진건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석 달 후를 약속한 것은 진 공자를 향한 것이 아니에요. 저를 향한 것이죠.”

그랬다. 용병제가 원했던 석 달이란 몸을 추스르고 진건곤을 처리할 때 방해할지도 모르는 소군을 막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몸에 부상만 없어진다면 소군이라도 무섭지 않다는 뜻이었다.

진건곤은 용병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석 달 후에 그를 꺾어야 해요. 할 수 있죠? 아니 진 공자는 할 수 있어요. 내가 꼽은 마지막 경쟁자니까요.”

소군은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마지막에 보았던 진 공자의 실력으로는 방심했다고 해도 용병제에게 상처 입힐 수 없었어요. 어찌된 거죠? 아아! 그동안 또 늘었군요. 말해 봐요.”

“아… 그게 저…….”

진건곤은 자신이 겪은 것을 말해야만 했다.

모산파의 청진자를 찾아가며 또다시 몰아지경에 들었던 일, 그때부터 상대의 기운을 선명하게 느끼고 기운이 지나갈 길을 볼 수 있게 된 것을 말이다.

하지만 청진자에게서 듣게 된 하천, 중천, 상천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몰아지경이라니……! 부럽네요. 저도 몰아지경을 겪어 보았지만 단 두 번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진 공자는 수시로 그런 일을 겪다니 부러워요.”

소군은 진심으로 진건곤이 겪는 일에 대해서 부러워했다.

“어쨌든 진 공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진 공자의 무공이 그렇게 변한다는 것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무공이라는 거죠. 석 달 동안 그 완성되지 않은 무공을 갈고 닦으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안 되면 용병제를 부상 입혔던 그 쾌검식을 쓸 수도 있고 말입니다.”

“할 겁니다. 용병제쯤 되는 인사라면 오직 돈으로만 움직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반드시 용병제를 꺾어 그 배후를 밝힐 겁니다.”

“그래요. 우리 같이 해봐요. 반드시 석 달 안에 용병제를 꺾을 실력을 만들 수 있어요.”

‘우… 리?’

진건곤은 소군의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제가 진 공자의 상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조심해야 할 겁니다. 제 검은 용병제의 것보다 날카로우니까요.”

꿀꺽!

진건곤은 소군과 단둘이 함께할 생각을 하니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소군의 아름다운 용모가 이렇게 무섭게 느껴질 때가 올 줄은 몰랐었다.

‘누님……!’

<4권에서 계속>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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