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살마군과 일비는 막궁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비와 살마군은 서역에서 들여온 기물인 천리경을 통해 막궁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 있었다.
일행이 들어간 지 이 각 여가 지나고 동굴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다.
“염화지옥이 벌써 터지다니. 과연 대단한 인물들이로군요.”
“그들이 천막밀밀을 뚫었을까?”
살마군이 물었다.
“천막밀밀과 염화지옥은 연계되는 기관이지요. 천막밀밀과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니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각만으로 천막밀밀이 설치된 곳까지 갔다는 것만으로도 놀랍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곳에 익숙한 자가 있었던 게지. 아주 익숙한 자가!”
일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그것이 더 빠르게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은 몰랐을 겁니다.”
살마군과 일비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얼굴이 되었다.
“천막밀밀과 염화지옥이라면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들이지. 막궁이 아깝기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손해는 아니지.”
동굴에 들어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로급의 인물들이 다섯 명. 미래를 책임질 동량들이 모두 열둘.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만으로도 능히 구대문파와 비슷한 문파를 세우고 남을 정도였다.
“지금은 피하지만 언젠가는 이 수모를 다 갚아주마!”
“려경!”
“린!”
청명과 청송이 단말마를 터트렸다.
진려경과 청린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모용가와 당가의 후지지수들 중에서도 이미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운현은 그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자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공기가 희박해지면 갑자기 사람들이 혼절하고 만다. 그것에는 당할 방법이 없었다.
공력이 높았다면 아주 잠시 더 버틸 수 있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잠시에 불과한 것이었다.
역시나 몇 호흡에 불과한 차이로 걸룡, 청명, 청암, 만공개 등등의 순서로 줄줄이 쓰러지고 말았다.
오직 운현과 진건곤, 청송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운현이 진건곤을 보았다.
진건곤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었다.
얼마 안 남았다는 손짓이리라.
운현은 다시 한 번 정신을 가다듬고 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깝구나! 저 어린 동량들이 이곳에서 가버린다면……!’
청송과 진건곤이 장로들보다 더 심후한 공력을 가졌다는 것이 기꺼웠지만 그것도 죽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청송도 쓰러지고……!
챙그랑!
의식이 끊어지며 검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운현은 그것을 보지도 못했다. 다만 자신의 손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진건곤은 운현이 쓰러지자 검을 뽑아 들었다.
운현이 했던 것처럼 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진건곤의 검은 운현의 검처럼 시원하게 벽을 깎아내지는 못했다.
진건곤의 공력이 운현의 공력에 미치지는 못했다.
다만, 진건곤의 현천기공은 긴 호흡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 덕을 지금 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미 호흡이 오백이 넘은 지가 오래되었다. 더 이상 호흡을 재어 본 적도 없었다.
진건곤의 공력이 아무리 높다 한들 운현의 괴물 같은 공력을 넘을 수는 없었다.
다만 평소에 호흡을 늘여가며 했던 현천기공의 효과를 지금 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빈 공간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라면 늦을 거야. 서둘러야 해. 다른 건 포기한다. 공기가 들어올 구멍만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오직 한 점에만 최선을 다한다.’
진건곤은 스스로 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쓰러져 있는 진려경과 다른 일행들에게 이 상황이 오래될수록 치명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직 동굴의 벽을 깎는 것만이 그들을 살릴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검에 흐릿한 일렁임이 일고 매화향이 가득했다.
바로 매화분분!
전과는 다르게 선명한 매화꽃이 피어났다. 개수는 모두 열두 개!
진건곤이 만들어낸 매화꽃은 그의 검이 가리키는 오직 한곳을 향해 부딪쳐 갔다. 열두 개의 꽃모양의 검기가 오직 한곳으로 중첩되어 갔다.
하지만 뚫리지 않는 구멍!
‘내가 읽은 것이 맞는다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대로 밀어붙여야 해!’
진건곤은 실망하지 않고 또다시 매화분분의 초식을 펼쳤다.
한 번.
움직이지 않고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무공을 발휘하자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과연 사부님이구나. 이렇게 힘든 것을 견디셨다니……!’
진건곤은 한 번의 무공시현만으로도 어지러움을 느꼈는데 운현은 이런 상황에서도 엄청난 거리를 바위를 베어내며 앞으로, 앞으로 진행해 왔다.
운현은 마지막 남았던 삼인 중에서도 진건곤이나 청송에 비해 비교도 안 되는 공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
또다시 열두 개의 꽃잎이 똑같은 구멍을 향해 쏘아졌으나 빛이 들지 않았다.
세 번.
또다시 열두 개의 꽃잎이 날아갔다. 도합 모두 서른여섯 개의 검기로 만들어진 꽃잎이 한곳을 향해 쏘아졌을 때!
화아!
손가락 굵기만 한 구멍이 생겨나며 눈부신 빛이 새어 들어왔다.
눈부신 빛에 흙먼지가 날리는 것을 보았다. 공기였다.
공기의 흐름이 흙먼지를 거칠게 날리며 동굴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숨을 쉴 수 있는 신선한 공기가!
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진건곤은 느낄 수가 있었다.
공기의 물결이 퍼져 들어와 코끝을 스쳐 지날 때 동생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됐어!”
진건곤은 그만두고 그 자리에 쓰러지듯이 엎어지고 말았다.
“려경아!”
엉금엉금 네 발로 기어 진려경에게 다가갔다.
진려경의 손을 만지자 다행히 아직은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진건곤도 역시 탈진에 가까운 상태, 오직 한 가지 일념으로 지탱해 왔던 것이다.
동생이 무사함을 알게 되자 진건곤도 역시 정신을 놓아 버리고 실신하고 말았다.
“수고했네. 대단하이.”
투개가 나서서 치하했다.
“자네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이승을 하직했을 것이야.”
그 뒤로도 장로들의 치하가 줄을 이었다.
운현은 그런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그 옛날 살리지 못하고 죽어야 했던 그의 두 사제들이 생각날 뿐이었다.
‘그때 내가 이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살릴 수 있었을까?’
하지만 곧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진건곤을 보았다.
‘저 녀석의 능력이 있었기에 오늘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보이지도 않는 땅속에서 가까운 거리를 잡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허허! 내 제자가 기운을 읽는 자가 되다니! 그것도 전진 도문의 심법으로……!’
바위산과 동굴의 구조로 보아 다른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면 아직도 땅속을 파고 있었을 것이 확실했다.
중간에 다른 비밀통로라도 있었다면 몰라도 구조상으로는 진건곤이 잡은 방향이 가장 적절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쓰러졌을 때까지 서 있었던 것이 진건곤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니 구멍을 뚫어낸 것은 진건곤이리라.
그것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하지만 진건곤은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하고 있었다.
자신은 운현보다 더 먼저 쓰러져 공기가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온 전음 한마디.
[사부님. 사정이 있어 화산의 무공을 알고 있지만, 제가 매화분분을 사용한 것을 알려서는 안 됩니다.]
운현은 모든 것을 자신이 한 것으로 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자 진려경과 청린이 깨어났다.
그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찌……?”
“죽었다 깨어났지. 운현 숙부가 아니면 그대로 죽을 뻔했어.”
청린의 눈이 정좌하고 앉아 운기를 하고 있는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무공을 발휘했을 때는 괴물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 괴물 같은 능력 덕에 살아남자 고마움을 느꼈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를 전처럼 미워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이리로 와 보시오.”
남은 벽을 제거하고 밖으로 나갔던 질풍개가 소리를 질렀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시설들이 있었다.
바로 막궁. 살인막의 본거지였던 것이다.
“이런 곳이 지어질 동안 개방은 아무 눈치를 채지 못했다니.”
임시 거소가 아니었다.
철혈궁왕을 잡았던 곳에는 없던 커다란 전각이 여러 개 들어 있는 것이 본거지가 틀림없었다.
허나,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뒤쪽으로 뻥 뚫린 동혈의 끝에는 잔잔한 물결이 치는 호수만이 펼쳐져 있었다.
“먼지가 쌓인 지 오래요. 빠져나간 지 오래된 것 같소. 살인막이 대놓고 움직인 것은 함정에 불과했소.”
“제대로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로 나갔을까요?”
“찾아봅시다. 어쩌면 살인막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요.”
질풍개의 말에 다른 장로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들여 장소를 찾아보자 가장 커다란 전각에서 지하로 통하는 통로를 찾았다.
동굴의 끝은 살인막의 막궁 밖의 짙은 수림 사이로 이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있었는데 이미 보름이 넘어 한 달 정도가 지난 흔적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일행은 동굴의 입구로 돌아가 소군을 만났다.
“잡았나요?”
소군은 물어보면서도 기대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랬다면 들어간 곳으로 나올 터. 빙 돌아 다른 곳으로 나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질풍개가 나서서 소군에게 동굴 안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했다.
운현의 놀라운 무공에 관한 이야기도 했고 진건곤에게 길잡이를 시켰다는 이야기도 했다.
소군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재밌다 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허어! 이 여인은 군자검의 이야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는구나. 오히려 웃음을 짓고 있어. 자기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뜻인가?’
질풍개는 운현의 무공을 보고 기겁하며 놀랐었는데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놀라지 않는 소군이 놀라워졌다.
하지만 곧 자신만의 해석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다. 말이 그렇지 바위를 두부처럼 파고들 무공이 흔할 리가 없지.’
일행은 신호를 받고 달려온 개방의 인물들에게 그곳을 넘기고는 금사로 돌아갔다.
금사에 도착하여 객잔의 후원에 들어 약간의 휴식을 취했다.
금사를 떠나는 순간부터 또다시 빠르게 이동하여 문파까지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후기지수들은 모두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얼굴을 익혀놓는 자리를 만들었다.
단연 돋보이는 것은 청린이었다. 일단 꾸미고 나자 같은 여자인 연법과 연흥조차도 가끔씩 그녀의 얼굴을 보고 눈을 돌리지 못할 정도였다.
다음으로 돋보이는 것은 진건곤과 청송이었다.
청송은 이미 무림대회를 통해 후기지수 중에 최고수로 인정받은 바가 있었고, 진건곤은 살인막의 특급살수들을 연거푸 격파하며 절정고수 이상의 솜씨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무림대회 이후에 후기지수들이 세상을 떠돌며 제마멸사의 기치를 드높이며 명성을 올렸는데, 진건곤의 행적이 가장 눈에 띄는 것이었다.
자연히 후기지수들은 은연중에 청송과 진건곤을 상수로 대하고 있었다.
“포사라면 특급살수 중에서도 광포하기로 유명한 자인데 상처도 없이 이겨내신 걸 보면 역시 사부님은 대단해요. 사부로 모실만 해요.”
연흥은 언행이 조심스러운 비구니였으나 자신이 사부로 대하는 진건곤의 일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살인막의 특급살수라면 후기지수들이 상대하기에는 꺼리는 고수들이었다.
같은 후기지수라고 해도 진건곤의 무공은 이미 비교가 불가한 것이 되고 말았다.
“흥! 대사형과 마주쳤다면 흑암과 포사 따위는 쉽게 잡았을 거예요.”
“사매!”
청송은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청린을 말리려 했지만 쉽게 말릴 수가 없었다.
“그거야……!”
연흥은 청린이 이렇게 당돌하게 나오자 당황하며 일단 그렇다고 말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전에 나온 말이 있었다. 바로 청암!
“청송 사형이 흑암을 건곤에게 양보한 것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포사라도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했을 겁니다.”
청암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동굴 속에서 운현이 진건곤을 딱 집어 방향을 정하라 하였다.
비록 진건곤이 운현의 제자라고는 하나 위기의 순간에 청송보다 더 신뢰받는 후기지수가 있다는 것이 청암에게는 인정하기 싫었다.
청송이 진건곤을 배려하는 이유를 알고는 있었지만 진건곤이 생각보다 더 많은 명성을 얻어 청송의 품을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청암의 어조는 지극이 딱딱했기에 갑자기 분위기는 어두워졌다.
청암의 이런 돌발행동에 청송도 어쩔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맞습니다. 형님은 흑암과 포사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가 있는 분이죠. 저와 달리 형님이라면 사로잡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진건곤이 입을 열었다.
“거봐요! 청송 사형은 후기지수의 무림대회에서 우승한 화산무적검이라고요. 말하자면 후기지수 중에 제일 무공이 높다는 거죠. 그리고 저랑……!”
청린은 부끄러워 끝을 맺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는데 이런 모습에 세가와 개방의 제자들은 모두가 반쯤 홀린 듯하였다.
다른 후기지수들도 진건곤이 그 말을 하자 수긍하는 분위기로 넘어갔다.
일단 분위기가 청송에게로 넘어가자 청린은 재미있는 말을 많이 꺼내어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과묵한 진건곤 역시도 가끔씩 미소를 지을 정도였다.
[진 공자. 나를 따라올 수 있죠?]
진건곤은 전음의 주인이 누군지 알았다.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진건곤은 객잔의 후원을 벗어나 마을의 외곽으로 달려갔다.
한참을 달려가자 소군이 있었는데 진건곤이 온 것을 보고는 소군은 더 먼 곳으로 달려 나갔다.
소군의 경공은 너무나 부드러워 고운 달빛에 유희를 나온 천녀를 연상케 할 만했다.
“아…름답구……!”
진건곤은 문득 자신이 하려던 말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겉으로는 자신과 별 차이 없는 연배처럼 보이나 그녀는 자신보다 나이가 열 살도 더 넘게 많은 중년의 고수였다.
검후의 길을 가기 위해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허울도 버리고 홀로 길을 가는 고독한 검도의 구도자였다.
‘경망된 마음을 버려라. 겉모습에 홀려 이런 생각을 하다니. 누님은 삿된 마음으로 평가할 사람이 아니다.’
한참을 달리자, 소군이 달리기를 멈추고 서 있었다.
그 자리는 예전에 포사와 검을 섞었던 자리였다.
“진 공자께 비무를 청합니다.”
진건곤은 재빨리 검을 뽑아 기수식을 취했다.
소군이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군은 희대의 천재다.
오랜 전통의 아미파가 속가와 내제자의 벽을 허물었을 정도의 희대의 천재였다.
소군의 무공은 이미 전대기인들과 비견되고 있었다.
어쩌면 사부인 운현이라고 해도 상대가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런 고수가 자신과 같은 후기지수에게 검을 섞자는 것은 가르침이었다.
“하교하여 주십시오.”
“호호호! 가르침을 내릴지 아닐지 어찌 알고 하는 말인가요? 저는 진실로 진 공자의 검이 궁금할 뿐입니다.”
소군은 믿을 수 없는 소리를 하며 검을 찔러왔다.
소군의 검은 예전에 보았던 백안옥마를 상대했던 검이 아니었다. 그때의 검도 역시 무서웠지만 진건곤을 상대하는 검은 더욱 정갈하고 무서워 보였다.
천수불영검!
아미가 자랑하는 검법이다.
역대로 검후가 되려는 자들은 대대로 이 검법을 수련하였다.
하지만 누구나 이 검법을 십 성으로 수련하지는 못했다. 하나의 검으로 천 개나 되는 부처의 손을 대신할 수 있는 검이 그리 만만할 리가 없었다.
분명히 중단으로 찔러오는 검이건만 그 검에는 창을 휘두르듯이 횡으로 거친 검세와 송곳처럼 날카로운 검세, 어디로든지 움직일 것 같은 표홀함의 검세가 담겨 있었다.
진건곤은 감히 검을 들어 막아갈 수가 없었다.
진건곤이 펼치는 중주일검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으나 결국에는 하나를 택해야 한다.
하지만 소군의 검에는 여러 가지 검의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소군은 이미 진건곤과는 비교도 안 될 경지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앗!
날카로운 검의 울음을 귓가에 울렸다.
역시나 소군의 검은 진건곤을 빗겨나더니 허공을 향해 검을 뻗기 시작하였다.
달빛에 비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하늘을 날며 마졸을 섬멸하는 천군의 강력함과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허공을 유영하는 천녀의 모습이 겹쳐 있었다.
그녀의 검이 그려내는 호선은 검도의 끝이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생각을 할 정도였다.
문득!
쿵쾅! 쿵쾅!
진건곤의 가슴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리는 검의 선이 진건곤의 마음속에도 그려지고 그녀가 펼치는 검결이 마음속에 담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군의 아름다운 모습도……!
허공에서 내려온 소군이 진건곤의 곁으로 다가왔다.
“우연히 절검 노사를 뵈었지요. 진 공자는 묵념시용의 묘가 통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건곤은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간신히 답을 하였다.
“오늘의 이 모습을 가슴에 담아 두세요. 언젠가는 저를 뛰어넘기를 바랍니다.”
소군이 가벼운 미소를 보이며 진건곤을 지나쳐 갔다.
“왜?”
소군이 돌아서 진건곤을 보았지만 진건곤은 아직도 돌아서지 않고 있어 진건곤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왜? 제게 이리도 잘 대해 주시는 겁니까?”
‘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쿵쾅! 쿵쾅!
가슴속에 커다란 바위가 사정없이 구르며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진건곤은 자신이 질문을 던져놓고도 스스로 난처해하고 있었다.
“진 공자는…….”
“……!”
“진 공자는 내가 모르는 무공을 익히고 있으니까요.”
진건곤은 잠시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뜻이든 저런 뜻이든 진건곤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대답이었기 때문이었다.
“무공의 발전의 속도가 예측을 불허할 정도로 빠르니까요. 만약 후일! 검후가 되기 위해서 마지막 관문을 넘어야 한다면 진 공자가 그 관문이 되어 주길 원해요. 내가 모르는 무공을 익힌 유일한 사람으로서!”
진건곤은 스스로 자신을 책할 수밖에 없었다.
검후의 길을 가는 구도자에게 무엇을 기대했던가?
무의 극을 열어가는 순수한 열망에 가득한 무인에게 무엇을 기대했던가?
달빛에 취하고 무공에 취했던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몸을 돌려 똑바로 소군을 보며 물었다.
“왜 제게 무공을 보여주신 겁니까? 마지막으로 싸우고 싶은 상대에게 말입니다.”
“진 공자와 승부를 내야 할 때가 온다면 그건 좀더 시일이 지난 먼 훗날일 겁니다. 그때라면 내 무공은 이미 변해 있겠죠. 지금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요.”
진건곤은 그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의미를 담은 묵념시용이었던 것이다.
진건곤이 앞으로 나아갈 무(武)의 계단에 방향을 제시한 것에 불과했다.
“알겠습니다. 진건곤은 반드시 누님의 뜻에 보답하겠습니다.”
진건곤은 자신의 마음이 흐트러지면 곤란하다는 듯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휘두르며 자신의 무공을 펼쳤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정성을 들여 육합건곤검을 펼쳤다.
전중에서 시작된 내력의 흐름이 거칠게 쏟아져 나와 승박혈을 거쳐 하박으로 이어지고 다시 맥문으로 이어졌다.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내력의 흐름이건만 내력은 거세고 거침없이 이어졌다.
전중혈을 단전으로 삼은 후부터 언제 내력이 끊어질 것인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전중혈 자체는 크게 변한 것이 없지만 그 주위로 산재한 진기를 끌어다 쓰는데 그 내력이 오히려 단전의 것보다 더 많았다.
적어도 수련을 하면서 내력이 부족해 그만두어야 한 적은 없었다.
소군의 검이 검리를 모두 담아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면 진건곤의 검은 정교하고 소박했다. 또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칠음이 같이 상존하고 있었다.
“역시!”
진건곤의 시연을 보고 있던 소군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미 변했어. 또 한 번 변할지도……!”
진건곤의 시연을 보던 소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진건곤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까지 달려서는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수줍은 홍조가 서렸다.
“진 공자라면 서운할 것 같지가 않으니까요.”
강호에는 커다란 소문이 불었다.
화산과 개방이 주축이 되어 비밀에 쌓인 살인막을 쳤다는 것. 살인막은 특급살수 중에 두 명을 잃는 심각한 타격을 입고 도망쳤다는 내용이었다.
그중에 놀라운 소식은 전진자에 관한 것이었다.
전진자가 홀로 특급살수 중에 두 명을 모두 해치웠으며 군자검 운현의 제자인 것이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결국 무림대회에서 말없이 사라진 것은 화산무적검과의 비무를 피한 것이라는 의견이 생겼다.
전진자는 화산의 무공을 배우지 못했으니 낭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과 어차피 스승이 화산이니 화산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화산의 성세가 무당의 것을 능가한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그런 자들은 화산무적검이라는 별호를 무당에서 주었다는 것을 증거로 삼았다.
전진자와 화산무적검의 이름은 새로운 무림의 질서로 자리 잡는가 싶었다.
하지만 소문이 퍼져 나가자 전진자에 대해 이를 갈아대는 자가 생겨났다.
뿌드드득!
“그곳에서도 살아났단 말인가? 구파일방은 정녕 신선이라도 된단 말인가?”
살인막의 본거지인 막궁을 포기하면서 파놓은 함정은 누구라도 피해가기 어려운 것이었다.
멀쩡한 동굴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데 어찌 피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와 동시에 동굴은 염화지옥으로 바뀐다.
만근의 기름이 부어지고 불이 당겨진다. 사방천지 피할 곳 없이 불이 피어오른다.
특별히 기름에 섞어 넣은 염화린은 불꽃을 용암처럼 타오르게 만든다.
동굴의 어딘가를 파고 들어간다고 해도 염화린은 그곳의 입구를 녹이고 들어갈 것이다.
위로 파고 들어간다고 해도 그 입구를 막을 것이다. 숨을 쉴 수가 없어진다. 스스로 파고든 독 안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 뻔했었다.
동굴이 무너질 곳은 이미 계산이 끝난 곳이다.
강호무림의 누가 온다고 해도 그곳에서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상식적으로 이해 못 할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구파일방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특급살수이자 살인막의 주인인 살마군은 그들이 정말 세외신선처럼만 느껴졌다. 막궁의 함정을 만든 자신이었기에 더욱더 그랬다.
“네 정체가 무엇이든지 네놈만은 꼭 죽인다.”
이를 갈며 살의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디로 갈 것이냐?”
“항주로 갈 것입니다. 아직도 한을 다 풀지 못했으니까요.”
“그다음엔?”
“일이 잘 풀리면 세상을 떠돌며 제 무공의 비밀을 풀까 합니다. 그게 끝나고 나면 화산에 둥지를 틀겠습니다.”
청송의 손이 진건곤의 어깨를 두드렸다.
“꼭 돌아오기를 바란다. 믿고 기다리겠어.”
“믿어도 됩니다.”
“오라버니!”
“잘 있어라! 혼사에 관해서는 사부님께 말씀을 올렸다. 사부님도 좋아하시더구나. 길일을 잡아 연락을 하도록! 개방에는 가끔씩 들르도록 하마.”
살인막을 치면서 알게 된 개방은 진건곤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만공개의 친우라는 이름으로 개방을 들른다면 어떤 의뢰도 다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형님! 얼른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든든한 처가가 되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하! 무슨 소리를. 사부님의 무위를 너도 보지 않았더냐? 오히려 내가 부탁을 해야지.”
청명은 진려경의 손을 꼭 잡고 다시 인사를 올렸다.
“형님의 동생 걱정은 하지 마시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잘 돌보겠습니다.”
진건곤은 지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떠났다.
또다시 항주로 돌아갔는데 그것은 공희국 때문이었다.
“살행을 의뢰할 때는 뒤가 구리는 법!”
자신을 의뢰할 자는 아무리 보아도 공희국이 유일했다. 거기에서부터 실마리를 잡고자 했다.
무국공의 도움을 받는다면 수월할 터였지만 무국공의 식객이 될 수는 없었다.
또다시 하오문에 의뢰를 했지만 이번에는 공희국의 행사는 아주 깔끔했다.
정치적인 몰락을 만들어내는 일이 요원해 보였다.
공희국의 장원에 가까운 곳에 처소를 만들고 그들을 감시하는 것이 전부였다.
“손님, 만날 그렇게 방안에만 있으시려면 심심하지 않습니까? 좋은 곳이라도 알려 드릴까요?”
진건곤이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에 객잔의 점소이가 말을 붙여왔다.
“됐다.”
“그러지 말고 말입니다. 이곳이 바로 항주 아닙니까? 구경할 곳도 많고 좋은 곳도 많지요.”
“허허허! 젊은 사람이 그렇게 구석에 처박혀 있으면 곤란하지. 그러지 말고 나들이라도 해보도록 하지.”
진건곤의 눈이 말을 던진 노인에게 돌아갔다.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어찌 아십니까?”
진건곤이 매섭게 노려보았는데 노인은 태평하기만 했다.
“어찌 알기는? 저 녀석이 말해 주니 알지! 내가 이래 봬도 여기 단골이라서. 저 녀석과 꽤 친하지.”
노인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진건곤의 탁자로 다가왔다.
“술 한 잔 할 텐가? 저 녀석이 자네에 대해 참 궁금해 하더군. 궁금증을 풀어주면 대신 내 거한 식사를 내도록 하지.”
“관심 없습니다.”
“어허! 이 사람 보게. 이렇게 무심하게 지내니 홍로가 걱정할 만도 하겠네.”
“홍로가 누굽니까?”
“어허! 이 사람 보게 이 객잔에 묵은 지 한 달이라면서 아직 점소이 이름도 모른단 말인가?”
마침 점소이가 노인이 시킨 음식을 들고 나왔다.
“홍로야, 이쪽으로 가져와라. 이 젊은이랑 같이 먹기로 했다.”
“어르신!”
진건곤은 거절하려고 했으나 노인은 완강했다.
“괜찮아. 어차피 혼자 먹기도 힘드니까. 가족도 없고 정붙인 사람도 없네. 한 달에 한 번 음식 먹는 것이 취미지. 같이 먹어도 괜찮아. 다음에 또 같이 먹자고 해도 그건 한 달 후의 일이니 귀찮지는 않을 게야.”
노인이 자꾸 권하자 계속 거절하기도 힘이 들었다.
노인은 자꾸 이야기를 걸며 자신의 이야기도 하였는데 그중에 진건곤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항주의 제2인자라는 문국공 공희국 어르신의 총애를 받는 몸이라는 거지. 그 어른을 따라다닌 지 얼마나 오래됐냐면 벌써 20년은 족히 넘었지. 그럼!”
‘아버지의 사건이 있을 때도 공희국의 곁에 있었단 이야기구나.’
진건곤은 상대가 뿌린 이야기에 관심이 없을 수 없었다.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진건곤이 노인에게 말을 꺼내자 진건곤의 뒤쪽에 서 있던 점소이가 미소를 베어 물고는 돌아갔다.
“무언가?”
“11년 전에 가뭄이 들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음……! 가뭄이 들었을 때라. 아마도 문국공 어르신께서 현령을 하던 시절 같구먼.”
“그 당시 환천삼보의 보물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진건곤은 묻고 싶은 건 다른 것이었지만 경계심을 불러일으킬까 싶어 다른 말을 물었다.
“허허허! 환천삼보라고? 환천삼보라면 오래된 전설이 아니던가? 딱히 어르신을 따라다니면서 들어본 적은 없네만.”
“리만리에서 환천삼보와 관련된 물건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리만리라……! 음.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은 없구먼.”
진건곤은 답답했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어르신 좀 생각해 봐주십시오. 무언가 기억이 나는 것이 있다면 말씀 좀 해주시고요.”
“알았네. 뭐 생각이 난다면 알려주지 못할 거야 뭐 있겠나? 그런데 말이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를 어쩌나?”
노인은 세상살이 이야기를 하면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더니 나중에 또 보자는 말과 함께 돌아가고 말았다.
진건곤이 뒤를 밟아 보니 과연 문국공 공희국의 장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문지기들이 정색하며 인사하는 것을 보니 그 지위가 꽤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허허허! 그 녀석이 환천삼보에 대해서 물어봅디다. 정작 묻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려서부터 장계를 올려 귀찮게 하더니 지금은 더욱 귀찮아졌습니다. 머리를 굴리다니.”
“끈질긴 녀석이로군요.”
“제 녀석을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디다. 어차피 문국공 주위를 배회할 녀석이라면 죽여 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화산이라는 배경이 생겼으니 자연스럽게 죽여야 한다는 부담만 늘었지요.”
“이렇게 죽치고 앉아 장원을 감시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얼른 죽여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총관은 아까부터 죽인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방법이 있겠습니까? 물론 꼬리가 드러나면 곤란하지요.”
“허허허! 환천삼보를 물었으니 환천삼보를 주어야지요. 제 놈이 환천삼보를 찾으러 갔다가 죽었다고 하면 의심받을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총관이라고 불린 자는 진건곤이 환천삼보를 물었다고 했다. 노인의 정체는 바로 진건곤과 같이 식사를 나누었던 늙은 노인이었다.
“살인막이 함정을 팠다가 본궁만 날린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어찌 모를까? 살인막에 두 번씩이나 청부를 넣은 것이 바로 총관 본인이거늘.
하지만 총관은 시치미를 뚝 뗐다. 문국공의 명에 반해 비밀리에 했던 일이었다. 괜히 말이 돌아서 좋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허허허! 그것이야 살인막의 이야기지요. 본단의 귀제갈이 나선다면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귀제갈께서 나선다면 능히 그러하겠지요. 하지만 귀제갈은 공녀님의 명령만 받습니다.”
“귀제갈께서는 화산에 원한이 있을 겁니다. 그 녀석의 인연이 화산과 이어져 있다고 하면 충분히 나서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하하하!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으셨다니 놀랍습니다. 한 번 추진해 보세요.”
“허허허! 늙으니 잔재주만 늘어갑니다. 허허허!”
노인이 열흘도 되지 않아 다시금 객잔에 들었다.
“헤헤! 나리, 어쩐 일이십니까?”
한 달에 한 번 나오던 분이 어쩐 일로 빨리 왔냐는 말이었다.
“예전에 그 손님을 모셔주어라.”
진건곤은 점소이의 전갈을 받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어서 오게! 내 자네의 말을 듣고 생각나는 게 있어서 들렸네. 나는 총관이어서 집안일만 했지 않는가?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았지. 그랬더니 놀라운 말들을 하지 않겠는가?”
“무슨……?”
마음이 급한 진건곤은 채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더군. 문국공 어르신도 그때 곤란하셨다고 하더구먼. 리만리에 어느 부자에게 보물이 들었었다고. 그래서 그 보물을 빼앗기 위해서 리만리의 사람들을 이용했다고 하더군. 그것도 모르고 관원을 보냈는데…….”
진건곤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은 고개를 굽히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좌우를 살피더니 소리를 낮추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관원도 희생을 당하고 일이 커졌다는구먼. 때마침 가뭄이 들어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농민들이 그 일이 끝난 뒤에 농민의 난에 가담했다는 거야. 조정에서 조사가 나오고 중앙까지 일이 알려지자 꼼짝없이 문국공 어르신이 문초를 당하게 될 만한 일이 되었다는군. 어르신은 어쩔 수 없이 죽은 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군.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군.”
노인은 자신 주인의 흉을 보게 되어 송구스럽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어른신은 그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많은 고민을 하셨다는군. 그 관원의 어린 자식들이 있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하셨다네. 그래서 평소 그 관원과 친한 사이였던 자에게 그 뒤처리를 맡겼다네. 어르신이 직접 손을 쓰자니 남들의 눈이 있어 힘들었다네. 혹시라도 조정에 소식이 들어가면 목이 달아날 판이 아니던가? 민란 죄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네도 알지?”
“알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없던 죄를 만들어내면 안 되지 않겠소?’
진건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친분이 있었으니 좀더 잘 대해 줄 것을 기대한 거지. 그런데 그 작자가 글쎄. 그 어린 것들을 협박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네. 어르신은 그 일을 알고 그자의 재산을 다시 빼앗았다네. 휴우! 어떤가? 어르신도 사정이 만만치 않기는 마찬가질세. 공직이라는 것도 빈틈만 보이면 한순간에 날아간단 말일세. 어떤가? 살기 위해 한 일이니 보아주면 안 되겠는가?”
노인은 마지막 말을 하며 진건곤의 손을 덥석 잡았다.
“……!”
진건곤은 노인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달에 한 번 나온다는 노인이 이렇게 관례를 깨고 나온 것이 바로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장하균의 말은 당신의 말과는 달랐소.”
진건곤의 말투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놈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말을 못했겠는가?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직접 어르신을 만나 판단해 보게.”
노인은 입구를 보며 소리쳤다.
“어르신, 들어오시지요.”
촤르르!
주발을 제치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진건곤의 얼굴에는 핏발이 섰다. 절로 손에 들어간 힘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바로 공희국. 본인이 객잔에 나타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공희국이 들어올 때 함께 들어온 자들이 객잔에 있던 자들을 모두 물렸다.
객잔에는 공희국과 총관, 진건곤. 이렇게 삼인만 남게 되었다.
공희국은 진건곤에게 다가왔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이……!”
진건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쩔 수 없어 신음을 흘렸다.
“자네가 진 교원의 아들이겠지? 미안하네. 나도 살고자 어쩔 수가 없었네. 고인의 명예를 더럽혀서 미안하네.”
“이… 이제 와서! 그렇게 간단히 과거를 씻으려 하다니. 그렇게 쉽게 원한이 지워질 것이라 생각했나?”
진건곤은 거침없이 반말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많이 원망하고 미워했던 불구대천의 원수인지라 당장 베어버리지 않은 것도 진건곤으로서는 대단히 많이 참은 것이었다.
“미안하이! 허나! 나 역시도 희생자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되겠나? 누군가가 만들어낸 농민들의 난이라면 말일세. 그자가 바로 자네의 진실한 원수가 아니겠는가?”
“흥! 무슨 말이지? 아버지를 죽인 흉수가 따로 있단 말인가?”
“그렇다네. 진 교원, 그러니까 자네의 아버지는 대단히 유능하고 무공도 뛰어난 공정한 관원이었네. 나는 진 교원을 믿고 빠르게 파견하여 일을 마무리 지을 셈이었지. 그런데 믿었던 진 교원이 예리한 검에 단칼에 베어져 죽어… 돌아가셨네. 시신을 본 나는 무인들의 수작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당시 현령에 불과했던 나로서는 무인들의 행사까지 파고들 수는 없었다네. 그저 커다란 사건의 틈에서 몸을 사린 것에 불과하다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인의 명예를 더럽힐 수밖에 없었지. 다시 한 번 자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겠네.”
“무인이라고?”
“그렇다네. 나중에 알고 보니 리만리에 흘러들어간 환천삼보를 노린 무림인의 소행이었다는군.”
“그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모르네. 다만 그 당시 중앙에서 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나왔던 조사관이 있네. 다행히 그분의 행적을 알고 있으니 그분이라면 소개해 드릴 수는 있네. 최대한 협조를 하겠네.”
진건곤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허탈함을 느꼈다.
자신이 원수라고 생각했던 자가 단지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쳤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다니!
그리고 새로운 원수의 단초를 들고 올 줄이야.
너무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이제껏 알고 있던 상황과는 너무나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진건곤은 스스로 감정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내가 당신을 벨 능력이 없었어도 이렇게 와서 죄를 토했겠소?”
진건곤의 말에 공희국은 눈을 감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있었으나 진건곤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총관과 공희국은 그런 진건곤을 감히 부르지 못했다.
늙은 총관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희미하게 웃음이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