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독룡-17화 (17/61)

제1장

연무실을 나서다 느껴진 살기.

그리고 그 뒤로 날아온 철시.

‘허! 살기를 그토록 선명하게 느끼다니……!’

진건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들의 연속이었다.

살인막의 특기는 은신술에 의한 기습이었다.

하지만 진건곤은 살인막에 쫓기면서도 은신한 적에게 당해본 적은 없었다.

느껴지는 대로 피하고 느껴지는 대로 비수를 던졌을 뿐이었다.

스스로 되돌아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기이한 능력이다. 마치 점을 치는 복자라면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처럼 신이 내린 것이라면 차라리 이해가 쉬울 텐데.

복건성에서 자라면서 한 번도 겪지 못했던 능력이었다. 최근에 겪었던 것들과 상관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넋을 잃고 산 정상에 올랐던 일들과 상관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맞는다면 내력이나 무공도 역시 일취월장했어야 할 터. 그런데 그런 변화는 전혀 없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한 능력이 생긴 이유를 찾지 못했다.

막연히 자연과 동화되어 넋을 잃었던 며칠간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확신 없는 예측만이 있었다.

“이것이 누님께서 말했던 변화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야.”

며칠을 매달려 고민을 하고 있지만 정리된 것은 몇 가지에 불과했다.

대맥에서 세맥까지 스스로 꼼꼼하게 느껴가며 달라진 것을 찾았다.

그래서 발견한 것은 전중혈과 백회혈에 발견된 미묘한 이질감이 전부였다.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지 않으면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미묘한 기운에 불과했다.

한동안 그것이 원인일까 싶어 매달려 보았지만 그것들은 요지부동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것까지 신경 쓰게 되다니!”

혹시나 소군이 말한 것과 관련이 있을까 싶어 며칠을 집요하게 매달렸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며칠을 허비하자 진건곤은 또다시 예전의 수련으로 돌아갔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차고 넘치면 모른 척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법이니까.”

화살의 사건이 있고 난 후 삼 일 뒤, 보름 만에 연무실에서 나온 청송이었다.

전후사정의 이야기를 듣더니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철시를 쓰는 궁사라면 흔하지 않지. 저렇게 긴 철시라면 더더욱! 철혈궁왕일 확률이 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장담할 수 없잖아요.”

“틀림없다. 저곳에서 이곳까지 거리는 무려 삼백 보가 넘지. 이런 거리에서도 목표물을 정확하게 노릴 만한 실력자라면 알려진 자로는 그가 유일하다.”

청송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전날 청명과 청암이 보았던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형들은 못 보았다지 않아요? 정말 저곳이 아닐 수도 있다고요.”

청린이 투덜대며 토를 달았다.

“물론 건곤이가 한 말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청송이 고개를 돌려 진건곤을 보았다. 확인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아우의 말을 믿는다.”

청명과 청암은 청송의 말이 떨어지자 멀리 떨어진 건물을 번갈아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진건곤이 말을 했을 때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청송의 말 한마디에 대번에 달라진 태도가 놀라웠다.

진건곤과 진려경은 그런 태도의 변화에 놀라는 눈치였다.

“사형이 그리 생각하신다면 철혈궁왕이 맞겠지요.”

“철혈궁왕이라……!”

한술 더 떠 철혈궁왕을 머릿속에 새겨 넣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곳에서 이곳까지 정확하게 활을 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라고요. 좀더 가까운 곳에서 쏜 것 아닐까요?”

청린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하였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미 대세는 철혈궁왕으로 기울었다.

바로 청송의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청린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청송의 의견에 반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지 더 이상 투덜거리지 않았다.

“아우도 참으로 대단하군. 철혈궁왕은 무림 십대 기병 중의 하나인 철혈섬궁을 가지고 있다고 했네. 무공을 모르는 자도 그 활을 쥐면 무인을 상대할 수 있다고 전해지지. 더군다나 철시라니. 엄청난 위력일 것이야. 그런 화살을 세 대나 상대하고도 멀쩡한 것은 내가 알기로는 아우가 처음이네.”

청송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진건곤에게 모였다. 그러고 보니 진건곤의 무공이 의외라는 듯한 시선들.

“흥! 철혈궁왕이 실수했을지도 모르죠.”

청린은 여전히 투덜거리며 진건곤만큼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흥! 족보도 없는 낭인에 불과한 자가 무슨 재주로 대사형에게 저리 잘 보인 거지?’

청린은 진건곤에 대한 오래된 감정이 깨끗이 씻기지는 않아 껄끄러운 중이었는데 청송이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모습에 진건곤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청린의 말에도 불구하고 진건곤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은 전혀 없고 심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청송의 말을 들으며 지난날의 활을 또다시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살은 알고도 막기가 힘들었다. 미리 알지 못했다면 백이면 백, 그날 죽었을 것이야. 실로 대단한 위력에 엄청난 빠르기였어.’

이미 지난 일이지만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새삼스레 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그렇게 멀리서 쏜 화살을 난 어떻게 알았을까? 그저 직감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확실한 느낌이었는데…….’

스스로에게 떠오르는 물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물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청린이 곧 흥미로운 제안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철혈궁왕을 쫓으면 살인막을 찾을 수 있겠죠? 지금이라도 추적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청린의 말은 기실 청송과 청명의 의견이기도 했다.

그 둘은 청송의 허락이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추적을 시작할 준비를 미리 해놓고 있었다.

청린이 말을 꺼내니 이미 반쯤은 일어서서 청송의 말만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움직일 기세였다.

허나 청송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반대의견을 꺼내었다.

“그만두자. 철혈궁왕의 활에서 너희들을 모두 보호할 자신은 없으니까. 너희들을 담보로 명성을 얻고 싶진 않다. 운현 사숙이 오시면 그때 움직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청송의 말에 당장에라도 추적을 시작할 것 같던 청명과 청암이 차분해졌다.

그들의 태도는 청송의 말에 어찌나 쉽게 바뀌는지 신기해 보일 지경이었다.

청송이 대사형이 아니라 사부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언제 날아들지 안다면 막을 수 있겠습니까?”

진건곤의 목소리였다.

물은 것은 청송에게였지만 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당연하지! 너도 막았던 것을 대사형이 못 막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청린이 진건곤의 말꼬투리를 잡았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매! 그만 해라. 진제는 내가 청한 손님이 아니더냐? 사매가 하는 일은 나를 모욕하는 일이 된다.”

“너, 대사형 때문에 봐주는 줄 알아!”

청린은 청송의 말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이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청린이 물러나자 청송은 얼굴에 작은 미소를 띠우며 진건곤을 바라보았다.

“알 수 있겠느냐? 어느 방향인지 알기만 한다면 내가 일행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알 수 있습니다.”

“역시……! 정말로 놀랍구나. 하하하하!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대단해!”

청송은 새삼 감탄했다는 듯이 진건곤을 보았다.

하지만 진건곤의 말에 사심 없이 믿어주는 사람은 오직 청송뿐이었다.

“사형! 믿으시면 안 됩니다.”

청암이 벌떡 일어나며 청송에게 간언하듯이 말을 하더니 흉흉한 눈초리로 진건곤을 노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네놈이 사형도 하지 못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있겠느냐? 대사형이야말로 당금 무림의 최고의 후기지수다. 진신무공을 다 발휘한다면 후기지수를 벗어나 구파일방의 장로들과도 비할 수 있는 분이거늘, 네놈의 무공이 사형을 넘어선다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다. 절대로! 난 네놈의 거짓에 넘어갈 수 없다.”

청암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삼백 보 밖에서 쏘는 활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어떻게 알 수가 있나? 절검 사조님이라면 모를까! 네놈의 무공이 그 정도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으며 설혹 안다고 해도 네놈이 미리 알고 말하지 못하면 방비할 틈이 없다. 또한 이미 쏘아진 활이라면 안다고 해도 스스로 방비할 수밖에 없을 것이야.”

청암의 목소리에는 진건곤의 말이 거짓이라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형님. 밤이라면 안다고 해도 위험합니다. 스스로 방비하기 어려운 려경이도 있으니까요.”

청명도 역시 려경의 안전을 들먹였다.

그것은 대놓고 지적할 수는 없었으나 청암의 의견과 같다는 말이었다.

청린은 진건곤이 거짓말을 한다는 듯이 노골적인 눈초리로 진건곤을 비아냥거리듯이 보고 있었다.

상황이 그러하니 보다 못한 진려경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잠시 입술을 물더니 침을 삼키듯이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말이 가져올 파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는 그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운을……!”

“……!”

“……!”

한순간 찾아온 정적!

기척을 느끼는 것과 기운을 읽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기척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흘려내는 소리나 심장의 박동 등을 무공으로 예민해진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었으나 기운은 달랐다. 모든 사물이 가지는 고유의 기운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에도 현혹되지 않는다는 것과도 같았다. 일종의 깨달음을 얻고서야 얻을 수 있는 능력이었는데 절정을 넘어선 절대자들이 간혹 보이던 꿈의 경지가 아니었던가?

진려경이 말하는 것은 진정 모두를 놀라게 하고도 남는 발언이었던 것이다.

“흥! 도저히 믿지 못할 소리만 하는구나! 대사형! 이들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진건곤이 기운을 읽을 리가 없습니다.”

청암은 바로 앞에 사기꾼을 두고 있다는 듯이 청송에게 간언을 하고는 진건곤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는 경멸의 눈빛이 서려 있었다.

“기운이 아닙니다. 기운을 읽는 것은 아니고…….”

“흥! 거짓말이 안 통하니 없었던 일로 하려고?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지. 사형, 거짓을 일삼는 이들을 내치는 것이 옳습니다.”

청암이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진건곤의 말을 잘랐다.

여전히 진건곤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의 상대는 진건곤이 아니었다.

진려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청암을 흘겨보았다.

“흥! 말도 못 하게 자르고 들면 사실이 바뀌나요? 오라버니는 아니라고 하지만 맞아요. 나는 오라버니의 곁에서 오라버니를 지켜본 사람이에요. 오라버니가 확신할 수 없는 힘이기에 내세우지 않으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지요. 오라버니는 살인막의 추적을 받고도 단언컨대 살수들의 은신술 따위에는 한 번도 걸려들어 본 적이 없지요. 그건 오라버니가 멀쩡한 길을 두고 오밀조밀한 샛길이나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에요. 게다가 그들이 올 것을 미리 알고 항상 제게 경고를 해주었다는 것도 말이에요.”

진려경이 정색을 하고 나서니 청송과 맞섰다.

진건곤은 이제 전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 나더니 입을 열었다.

“정확히 모든 것의 기운을 읽는 것은 아니고 대강은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게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라서 내세울 만한 것은 못 됩니다. 다만, 살기라면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도 제법 명확하게 느껴집니다.”

“살기는 읽을 수 있다? 그럼 그날 철혈궁왕의 살기도 느꼈단 말이냐? 삼백 보나 떨어진 거리에서 살기를 느끼고 대비했단 말이냐?”

청송이 되물었다.

“그렇죠. 연무실의 문을 열려는데 살기가 느껴져 대비하고 있었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크게 낭패를 보았을 겁니다. 저는 아직 그런 화살을 모르고도 받아낼 정도의 무공은 아니니까요.”

진건곤의 말에 청송은 유쾌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하! 해보자! 나는 아우의 말을 믿는다. 암중의 철혈궁왕이라면 무섭지만 알고 있다면 무서운 상대는 아니지. 그의 활은 거리가 멀수록 위력이 있다고 들었다. 알고 피하고 다가선다면 감당할 수 없는 상대는 아닐 것이야. 사제들은 더 이상 진제를 의심하지 말고 준비해 주게.”

이제는 오히려 청송이 나서서 재촉하고 있는 판이 되었다.

‘치잇! 왜 대사형은 저 녀석에게 저리 잘해 주는 거지? 내 말이라면 무시하면서?’

청린의 눈이 진건곤을 향해 매서워졌으나 그것에 딱히 신경을 쓰는 자는 없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조금 전까지도 경멸의 눈초리를 보이던 청암의 태도였다.

청송의 말에 청암의 태도도 변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진건곤을 노려보던 태도와는 달리 반쯤은 놀라움의 대상으로 대하는 듯하였다.

청송의 입이 잠시간 작게 움직인 것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었든지 간에 청암은 청송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청암이 잔잔해지자 청린이 자기 차례인 양 앞으로 나섰다.

“좋은 방법이 있어요.”

청린의 눈초리가 매섭게 진건곤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험해 보면 알죠. 정확히 삼백 보 밖에서 말이에요.”

“좋아. 나는 오라버니의 말을 믿어.”

이미 겪어본 진려경이니 그녀는 진건곤의 능력을 믿고 있었으니 당당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을 본 청린이 덧붙였다.

“그것도 눈을 가린 채로 말이에요.”

“눈을 가려?”

“언니의 오라버니는 연무실 안에서 그것을 느꼈다고 했어요. 그러니 그쯤은 별것 아니겠죠.”

일이 그쯤 되니 청린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적당한 시험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핑계로 진건곤에게 창피를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필요 없다. 연무실에 들어가서 똑같은 조건으로 하지. 대신! 조건이 있다.”

“뭐지?”

“언제까지 네 버르장머리를 참아야 하지?”

“뭐얏? 이 쭉정이 같은 것이!”

청린이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는 오라버니라고 불러!”

“뭐라고? 내가 왜? 너 같은 것에게…….”

진건곤의 말에 청린은 화를 버럭 내며 덤벼들었다.

“옳은 말일세. 아우. 나도 역시 사매가 올바른 호칭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네. 내기는 성립이야. 그렇지, 사매?”

청린은 분하다는 얼굴로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거짓말쟁이! 내가 승낙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런 식으로 거짓부렁을 하는 거겠지? 네놈의 거짓에 넘어갈 내가 아니지!’

청린은 진건곤의 요구는 자신의 거짓말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자신 있는 비웃음을 진건곤에게 보여 주었다.

“좋아. 하지만 너 스스로 네 말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넌 우리 일행에서 나가! 그래 줄 거죠, 대사형?”

청린은 살인막을 잡는 일의 시작에는 명성을 올리는 것보다 진건곤을 화산으로 들이고 싶어 하는 청송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생각 밖으로 청린이 커다란 조건을 들고 나왔다.

청송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자칫하다가는 진건곤을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청송도 역시 거짓말을 하는 진건곤이라면 필요 없기는 마찬가지. 그럴 리는 없지만 신의 없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내쳐야 할 사람이었다.

청린의 조건은 들어 줄 이유가 명확한 것이었다.

“아우가 거짓을 말했다면 내보내기로 하지. 허나 사매도 역시 약속은 지켜야 한다.”

청송이 매우 진지한 눈으로 청린을 보며 약속을 하라고 하자 청린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흥! 오라버니라는 소린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틀림없이 거짓말쟁이가 맞으니까요. 게다가 버릇 있는 말 중에 오라버니라는 말만 있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다른 말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말을 꼭 써야 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청린의 속마음은 승복할 마음이 없었다.

진건곤도 역시 울며 겨자 먹기는 마찬가지.

‘너 같은 것에게 오라비 소리를 들어봐야 좋을 것이 없지. 다만 네가 계속해서 반말을 지껄이면 려경이의 모양새만 이상해지니까. 어쩔 수 없이 나서는 것뿐이다.’

진건곤이 성큼 나서며 연무실로 향했다.

“그때와 같은 조건으로 하지. 청린과 지필묵을 들고 연무실로 따라 들어와. 형님이 밖의 상황을 조정해 주시지요. 열 번이면 되겠습니까?”

청송이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청린은 어쩐 일로 연무실에 따라 들어가며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청린의 눈가에 영악스러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호호호! 나를 끌어들이다니 넌 실수한 거야. 호호호! 틀림없이 무덤을 판 것이라고. 호호호호!’

청송은 청명과 청암으로 하여금 삼백 보의 밖으로 나아가 위치를 바뀌어가며 뿌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들의 신호를 받아 직접 기록하였다.

“동북동.”

“…….”

진건곤의 입에서 방위가 흘러나왔으나 청린은 멀뚱히 벽만 바라볼 뿐이었다.

“적어!”

“흥! 내가 왜?”

“그럼 뭐 하러 따라왔느냐?”

“그건…….”

“서남서! 정북!”

청린이 따지려고 했지만 진건곤의 입에서 방향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열 개의 방위가 나와 끝이 나고 말았다.

청린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진건곤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적어라!”

“다시 말하지만 왜 내가 적어야 하는 거지?”

“너무 빨라서 내가 적을 틈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적을 필요는 없을 텐데?”

“그럼 그렇게 형님에게 말하던가!”

진건곤은 청린의 약점을 찔렀다.

청린의 비협조로 방위를 기록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청송에게 볼 낯이 없을 것이었다.

“너어……!”

청린은 분한 듯이 진건곤을 노려보더니 지필묵에 방위를 적기 시작했다.

놀라운 기억력! 열 개의 방위를 모두 순서대로 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청린은 화산의 후기지수 중에 가장 머리가 좋다고 인정을 받고 있어 평소 진법 등에 힘쓰고 있었다.

머릿속에 간단한 진법을 떠올린다면 방위쯤은 열 개가 아니라 스무 개라도 간단하게 암기할 수 있었다.

모두 다 적고 나서 연무실을 나서려는 찰나.

“계집! 여섯 번째와 여덟 번째가 바뀌었다.”

청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단 말이지?’

애초부터 적지 않고 시간을 끌었던 것은 바로 노림수 때문이었다.

바로 한꺼번에 열 개를 적어낸다면 자신이 부른 방위라도 헛갈릴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처럼 진법을 공부하여 방위에 민감하지 않은 이상 열 개의 방위라면 헛갈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진건곤을 그리 만만하지 않았던 것이다.

“흥! 그러셔? 한꺼번에 적으려니 이만하면 잘 기억한 것이라고!”

말은 그리하면서도 일그러진 얼굴로 두 개의 방위를 고쳐 적었다.

“하하하하하!”

진건곤이 소리 내어 웃자 청린의 얼굴은 더욱 붉으락푸르락해질 뿐이었다.

‘참아야 해! 참자! 참아! 분명히 다 맞았을 리가 없잖아. 조금만 있으면 저 녀석을 내쫓을 수가 있다고. 제발! 제발!’

청린은 진건곤이 쫓겨나는 꼴을 상상하고서야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동북동.”

미리 기록된 것을 청암이 부르면 청린이 채점을 하는 식으로 하였다.

청린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동북동의 방위가 일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청린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다.

‘하나쯤이야 맞출 수도……! 우연의 일치라는 것이 있으니까.’

“서남서.”

틀림없이 서남서. 자신이 적은 종이에 자신의 글씨로 서남서라고 써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런……! 하지만 두 번뿐이라면 우연히 맞출 수도 있는 거지.’

“정북.”

세 번째 청암이 부른 방위가 틀림없이 맞아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였다.

세 번째부터는 청린도 진건곤이 살기를 느낀다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진건곤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나 싫었다.

“네 번째는요?”

“다섯 번째는요?”

거듭해서 물어보는 데 진건곤의 답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아니야. 안 돼!’

‘분명히 아닐 거야! 열 개가 모두 다 맞을 수는 없어!’

‘그렇게 먼 거리에서 살기를 정확하게 읽을 수는 없다고……!’

청린의 마음속에 간절한 소망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마음속의 메아리에 불과했다.

하나, 하나 확인할 때마다 청린의 백안은 붉게 물들어 빨간 능금과 같이 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정북!”

청린이 채점을 하고 있던 동안 가타부타의 말이 전혀 없자, 청린의 표정을 보던 다른 자들은 애가 탔다.

특히나 진려경은 진건곤의 꼴이 우습게 되지는 않을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와! 호호호호! 그럼 저는 이만……!”

청린의 채점이 모두 끝나자 청린은 채점한 종이를 두고 천천히 움직였다.

진려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른 그 종이를 받아 들었다.

마지막 답안에서 청린의 돌연 웃음을 터트리며 좋아할 때는 그녀는 가슴에 돌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진건곤의 실수를 기뻐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울컥하고 미움이 샘솟듯이 했다.

청린이 들고 있던 종이를 냉큼 받아 든 진려경이 종이를 다시 확인하자 모든 게 정확하게 맞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린!”

“사매!”

“너!”

삼인의 음성이 청린을 불러 세웠다.

“린! 어디 가?”

진려경이 친근한 목소리로 청린을 잡아 세웠다.

“아! 철혈궁왕 잡으러 갈 것 아니에요? 준비하러 가야죠. 어서 가요, 언니!”

“호호호호!”

“하하하하!”

“하하하하!”

청린의 앙큼한 짓에 모두가 웃고 말았다.

“사매, 약속한 것은 하고 가야지.”

청명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그동안 청린과 진건곤의 관계에 머리가 아팠던 청명이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지, 사매.”

청암마저도 나서서 채근하니 청린은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뒤돌아섰다.

차마 얼굴을 보고는 오라버니라는 말을 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오… 라… 버…….”

모기가 기어가는 소리로 뭐라 하더니 도망가 버리는 청린이었다.

진건곤의 얼굴에 작은 웃음이 서렸다.

“동생도 이제는 사매에게 호칭을 정리해라. 계집이나 너 같은 호칭은 나도 민망하더군.”

“알겠습니다. 형님.”

그래도 청린을 챙기는 건 청송뿐이었다.

“또 있다. 청암에게도 올바른 호칭을 써야 하겠지?”

“알겠습니다. 형님으로 모시지요.”

청암의 얼굴에 약간은 만족스러운 미소가 드리웠다.

진건곤의 일행은 살인막을 쫓기로 했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철혈궁왕을 쫓을 수 있는 흔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명은 진건곤이 지적했던 건물의 왼편의 숲을 샅샅이 뒤지더니 고개를 흔들며 청암에게 다가갔다.

“없습니다. 그쪽은요?”

“깨끗하구나. 사방 백 장을 뒤져봐도 남아 있는 흔적은 없다. 숲 속에 흔적이 없다면 당당하게 도로를 이용해 와서 건물 위로 움직였다고 봐야겠지. 아마도 퇴로도 역시 도로를 썼을 것이야. 보름이 지났으니 그의 행적을 찾는 것은 어려울 것이야.”

“그럼 이제는 흔적이 아니라 철혈궁왕을 찾아야 할까요?”

“그렇게 하자. 개방을 부릴 돈은 없으니 탐조각에 힘을 빌려야겠다. 개방에 의뢰를 하도록 하자.”

개방에 의뢰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같은 구파일방의 문도라고 해서 어느 때고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지나가던 개나 소나 개방의 십만방도를 수족으로 부려먹을 수는 없는 일이니 일정한 요건이 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구파의 장로급 이상의 인물이나 각파의 정보조직의 정식의뢰가 필요한 요건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거금의 돈이 필요했지만 진건곤의 일행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니 탐조각의 정식의뢰를 통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호오! 철혈궁왕을 찾아 달라?”

공손개는 운경이 가져온 탐조각의 문서를 내리며 물었다.

공손개는 반백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기백과 체구가 위풍당당하기 짝이 없어 중년처럼 느껴지는 자였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지. 그런데 왜 그자를 찾는 건가?”

“별일 아닙니다. 저희 아이들의 강호행에 철혈궁왕을 만나보고 싶은가 봅니다.”

화산파의 정보를 담당하는 탐조각 하남지부의 대표인 운경이 별다른 일은 아닌 듯이 태연하게 대응했지만 공손개는 입가에 웃음을 띠웠다.

“헐헐! 별일 아닌 것에 개방이 나선다는 건가?”

공손개는 말실수를 물고 늘어졌다.

당황한 운경은 얼른 고개를 조아려 화를 풀려고 했다.

“쯧쯧쯧! 숨긴다고 숨겨지나? 화산의 후기지수들은 이미 강호의 최대 관심거리지. 화산무적검이 하남을 찾은 그날부터 내 눈에서 벗어날 수 없었네.”

화산무적검은 청송의 별호였다.

무림대회 당시 우승을 했던 청송의 별호는 노룡이었으나 후일 무당의 장문이 붙여준 별호가 바로 화산무적검이었다.

대대로 화산의 앞길을 막던 무당도 그를 꺾지 못했으니 그의 앞길을 막을 자는 없다는 뜻이었다.

“허허허!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제 막 강호에 나온 신출내기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운경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공손개가 누구던가? 천하제일방이라는 개방의 총분타인 하남 개봉지부의 우두머리다.

무려 팔결의 매듭을 달고 있으니 십만방도의 개방에서도 손꼽히는 위치에 있는 자였다.

장로를 해야 마땅하나 타고난 성정이 뒷방 영감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지라 개방의 총분타인 개봉 분타를 관리하고 있었다.

십만방도를 책임지는 자리인 총분타주의 자리는 장로에 비하여도 비중이 적지 않은 자리다.

그런 곳에 앉은 자. 개방의 실세 중의 실세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화산무적검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니 화산의 무게가 그만큼 더 중해졌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당의 그늘에 가려 있던 화산의 행보였으나 청송이 무당에 못지않다는 것을 보자마자 화산을 보는 강호의 눈길이 달라졌다는 것을 통감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허 참! 아는 게 있으면 풀어 놓아보게. 개방은 화산무적검과 가까이 지내려 하네. 이미 자네 안방에서 철시가 나왔다는 소리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 어떤가? 철혈궁왕을 찾는 이유가 그건가?”

운경은 놀란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탐조각은 자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속의 일이 자신의 허락도 없이 울타리를 넘어선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탐조각에서의 일도 비밀이 아니란 말이구나…….’

“허허허! 과연 개방은 천하제일방! 세상의 구석구석에 벌어지는 일을 모르는 것이 없군요. 사실은 말입니다. 철혈궁왕이 살인막의 주구인지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공손개는 운경의 한마디만으로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진자로군! 철혈궁왕이 노린 자가 전진자였어! 그래서 철혈궁왕이 바로 살인막의 주구로 지목된 거고?”

운경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살인막이라는 말 한마디로 전후사정을 다 꿰어 맞추는 것을 보니 개방의 총분타를 맡을 만한 능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허허! 개방의 눈은 정녕 무섭군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나? 무림대회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받던 청송과 전진자가 함께 다니니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지. 그런데 말일세, 전진자는 화산과 어떤 관계인가? 아니, 어디서 나타난 것인가? 아무리 찾아봐도 초계산 이전의 행적은 도통 알아낼 수가 없더군.”

운경은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군자검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화산의 제자가 되지 못한 것도 자연히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군자검 운현의 일이라면 개방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공손개 같은 자가 허심탄회하게 나오는 것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화산이 무당을 앞지르는 데에는 개방의 도움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군자검의 제자입니다.”

“군자검? 운현 말인가?”

“그렇습니다. 운현 사형의 제자입니다.”

“이런, 이런! 그럼 전진의 무공을 쓰는 화산의 제자란 말인가? 헐헐헐!”

공손개는 생각도 못했다는 듯이 놀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또… 사형이 화산과는 상관없이 개인의 인연으로 따로 얻은 제자인지라 화산의 제자라고는…….”

“허어! 그만큼 뛰어난 인재였다는 건가? 본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얻어야 할 만큼? 군자검이 허락을 받지 못했고 전진의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는 이야기겠군. 하지만 결국에는 그게 그거 아닌가? 전진의 무공을 쓰고 있다고는 해도 사부가 군자검이라면 결국에는 화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아니겠는가? 지금 화산무적검과 같이 하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는 부분이고…….”

운경은 공손개의 지레짐작을 풀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려면 화산의 복잡했던 내부 사정을 언급해야 할 일이 아닌가?

어쩌면 노회한 공손개는 속사정을 다 알면서도 지레짐작인 것처럼 말을 지어내는 건지도 몰랐다. 이런 때 굳이 이야기를 정정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그… 건… 아마도 그렇겠지요.”

“좋네. 개방은 화산이 차기 무림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데 한 표를 던지지. 전진자까지라면 틀림없는 패가 될 것이네.”

공손개는 고개를 내밀어 운경의 눈에 맞추었다.

“이건 일개 늙은이의 감이 아니라네.”

운경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개방 전체의 뜻이었다. 충분히 내부적으로 검토를 끝내고서야 얻은 결론이라는 것이었다.

‘허……! 청송이 뛰어나기는 하나 천하의 개방이 스스로 굽어올 정도였단 말인가?’

운경은 새삼 청송의 재질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리 대단했을까?

공손개는 운경이 놀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헐헐헐! 이런 아둔한 사람하고는. 사질의 무공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화산무적검은 적어도 자네의 아래는 아니라네.”

운경은 제자 벌의 사질이 자신의 무위를 넘어선다는 말에 또 한 번 놀라야만 했다.

“무림대회가 끝나고 난 뒤, 청송은 노룡이라는 이름을 얻었지. 하지만 나중에 별호가 바뀌었네. 무당으로 돌아간 무당의 장문이 만든 별호가 바로 화산무적검이지.”

운경은 작은 탄성을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듣기 좋으라고 붙인 이름은 아니야. 그때의 화산무적검은 진실로 무적이었네. 화산무적검은 무당과 만금당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하여 진신의 무위를 숨기고 삼백초를 채워 공동 우승이라는 결과를 이끌어 내었지. 누구라도 속을 만치 절묘한 수위조절이었지. 허나 그렇다고 해서 무당 장문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겠지. 물론 소검후의 눈도 속일 수가 없었을 테고… 그래도 참으로 대단했네. 결승에서 싸우기 전까지는 화산 장문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고 했을 정도니. 얼마나 스스로의 무공을 잘 통제했는가 말일세.”

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 장문의 눈을 속일 정도라면 청송의 무위가 상상초월의 경지라고밖에는 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 당연히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것이었다.

“화산무적검이라는 칭호는 그에 대한 답례인 걸세. 그 나이에 얼마만한 절치부심으로 만들어 내었는지 모를 압도적인 무공과 인품에 대한 답례였다네. 세상이 다 아는 일을 어째 자네만 모르는 게야? 헐헐헐! 그러고도 탐조각의 일을 보는 겐가?”

공손개의 말에 운경은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송이 실력을 감추고도 무림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는 것.

그 수위 조절이 어찌 능수능란했던지 무당의 장문을 빼고는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

참으로 놀랄만한 일들이었다.

‘허! 어찌 화산이 변한다 했더니. 사질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었을 줄이야.’

운경은 그제야 최근의 화산의 급격한 변화가 이해가 되었다.

청송이 하고자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원한도 접고 고집도 접는 장문과 전대 장문의 처사도 이해가 되었다.

그들은 이미 청송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아울러 강호에 우뚝 설 영웅의 행보를 즐기는 심정으로 지켜보고 싶어진 것이었으리라.

운경은 생각을 하다 보니 더욱 놀라게 되었다.

화산은 이미 당대를 호령할 영웅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헐헐헐. 이 사람아, 정신 차리게. 갈량개야! 가지고 와라!”

공손개가 소리를 크게 내자, 거적을 제치고 들어온 거지가 서신을 내밀었다.

“받게. 철혈궁왕의 위치가 담겨 있네.”

운경은 놀라서 공손개를 보았다.

청하기도 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정보라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뭘 그리 놀라나? 탐조각에서 철시가 나왔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보고 있었네. 화산의 탐조각이 일개 낭인의… 아니 아니지 살인막의 도발을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지 않는가?”

당연한 듯이 말하는 공손개를 보며 운경은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또 하나 선물이 있네. 앞으로는 일일이 분타를 찾아 정보를 청하지 않아도 될 걸세. 내 사람 하나를 보낼 테니 일행에 끼워 준다면 그를 통해서 원하는 것을 직접 알아볼 수 있을 것이야.”

“허허허! 그리해 주신다면 감사한 일이지요. 감사합니다. 어르신!”

“헐헐헐,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지. 그리 감사할 것까지야.”

운경은 공손개의 말에서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리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필요에 의해서 만나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지금은 든든한 화산의 미래에 투자를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운경은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운경이 나간 것을 확인한 갈량개가 입을 열었다.

“살마군은 매우 치밀한 자입니다. 화산무적검이 뛰어난 것은 알지만 아직은 무리가 아닐까요? 자칫하면 만공개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헐헐헐! 강호인이 목숨을 나누지 않고 어찌 친우라 하겠느냐? 만공개는 이번 일이 끝나면 든든한 친우를 가지게 될 것이야.”

“…….”

공손개의 방식이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갈량개는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 자네처럼 정이 많은 사람이 만공개 같은 인재를 길렀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구먼. 자네는 만공개에 대한 사랑이 지나치네. 이제는 놓아 주어야 하지 않겠나? 자네 손을 떠나서 강호를 휘저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아이가 아닙니까?”

“헐헐헐! 자네야 사부니까 그리 보일지 몰라도 만공개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자기 몫은 하고도 남지. 괜한 걱정이라네.”

“하지만 살인막이 상대라면 아직은…….”

공손개는 웃음을 띠우며 갈량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 말게. 화산무적검과의 친분을 맺어줄 생각뿐이네. 아직은 버거운 상대지. 살마군의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도록 조치하겠네. 특급살수들도 무리지.”

공손개가 말을 꺼내고야 갈량개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헐헐헐! 자네는 걱정이 너무 많아. 진정으로 만공개를 아낀다면 이런 자리를 나서서 만들어 주어야 하는 법이라네. 그리 감싸기만 해선 안 되는 데 말일세.”

“전진자가 하남의 일궁을 향하고 있다고?”

살마군의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울려 퍼졌다.

“철혈궁왕의 뒤를 쫓은 듯합니다.”

“전진자의 힘으로 그 뒤를 따랐을 리는 없고 또 하오문이더냐?”

“아닙니다. 개방의 만공개와 화산무적검의 일행이랍니다.”

“화산무적검과 만공개까지? 화산과 개방이 본격적으로 개입된 것인가?”

살마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만공개라면 개방의 후개 후보 중에 하나다.

무림대회에 나가지는 않아 걸룡이라는 이름은 다른 자가 얻었지만 개방의 유력한 후개의 후보라는 평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후개가 되어 있는지도 모를 인물이었다.

살마군은 두 개의 거대방파의 장문인 후보와 후개의 행보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 개방과 화산에서는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은 그 일행으로만 철혈궁왕을 쫓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살마군은 어둠 속에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일궁을 포기한다. 꼬리를 감추도록! 만공개와 화산무적검이라면 분명히 화산과 개방이 같이 움직인다. 그들의 미래라고 해도 좋을 자들이 아니더냐? 단순한 후기지수들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상하게 한다면 분명 전면전이 시작될 것이야. 아직은 그럴 수 없다. 분하지만 피할 수밖에!”

“존명!”

“잠깐!”

살마군의 말에 일비가 멈춰 섰다.

“이비에게 금령을 내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전진자만큼은 척살하도록 이르라! 이번에 실패하면 같이 죽으라는 말도 전하고!”

“금령이라면 이비도 서운해하지 않을 겁니다.”

일비는 확신에 찬 듯이 말했다.

금령이라면 살인막에서도 겨우 세 명에 불과한 특급의 살수마저도 부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살인막의 살수들은 천하의 각지에 산재해 있었기에 거리상으로 부를 수 있는 자는 한 명에 불과했지만 특급살수를 부리는 것이라면 목숨 값으로도 박하지 않다고 여기리라.

아니, 실패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특급살수들은 괜히 특급살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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