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독룡-15화 (15/61)

제7장

“섬서의 강줄기도 제법 볼만하구나!”

“그러게요. 내륙이라 뱃길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 강줄기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니 말이에요.”

뱃전에 앉아 느긋하게 풍광을 바라보며 즐기고 있었다.

배가 쉬어가는 곳마다 객잔에 들러 고급 음식을 사 먹였다.

“오라비는 어디서 그리 많은 돈이 났어요? 매일같이 이리 써도 된답니까?”

“너를 만나기 전에 얻은 일이 좀 있었다. 내 일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큰 이득이 되는 일이었지. 또다시 자기를 찾아 달라고 큰돈을 주더구나.”

“능력 있는 오라버니군요.”

“하하하! 그리 생각지는 마라. 또 가면 이번엔 그 사람의 아랫사람이 돼야 한다. 그자가 나를 품을 그릇은 아니니 또다시 그리 돈을 벌지는 못할 게다. 어쨌거나 이미 피장현에서 있는 돈은 다 썼다. 너를 만나 이제야 겨우 여유가 생기니 즐기는 것뿐이다. 어느 곳이든 자리를 잡으면 검소하게 살아야지. 어쩌면 네가 벌어서 먹고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피이! 십일 년 만에 찾아온 오라버니가 그 정도 준비도 없었어요? 전진자라고 명호도 그럴듯하던데 말이에요.”

“하하하! 피장현의 소향주가 재주가 비상하더구나. 급한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집어 토해내게 하더라. 그곳에서 가진 돈을 다 털렸다.”

말 대로였다.

피장현에서 쓴 돈이 컸다.

무국공이 집어준 전표는 다 썼고 지금 남은 돈이라고는 금덩이 몇 개가 전부였다.

음식을 사먹는 돈이야 그리 큰돈이 아니었으니 버틸 만했지만 자리를 잡고 살기 위해서는 벌이를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

진건곤과 진려경의 길은 편안하기 짝이 없었다.

두 번의 싸움으로 보이는 살수들을 모조리 죽이고 나니 더 이상 뒤따르는 자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싸울 것을 그랬구나.”

죽인다는 말을 싸움으로 바꿨다. 그래도 진려경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오라버니.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피하는 게 나아요. 그 업을 어찌 감당하려고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사람을 직접 죽여 본 진려경은 전과는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진즉 이랬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진건곤의 말에 언제나 토를 달고 나왔다.

진건곤은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언제라도 동생과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자들이 있다면 누구라도 벨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려경이 첫 살인을 한 충격이 아직도 다 가시지 않은 동생에게 대놓고 죽일 것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걱정 마라! 오라비가 더 강해지면 그런 놈들도 없어지겠지. 소군 누이를 보니 싸움이 필요치 않은 것 같더라. 그리 해보자. 오라비도 생명을 그리 간단하게 보지는 않는다.”

진건곤은 그리 말을 하였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목을 노리면 목을! 손을 노리면 손을!’

진건곤은 받은 만큼 갚아 줄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었다. 원래 성품도 그러했거니와 이번에 살수들과의 싸움에서 더욱 그렇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살수 녀석들. 소문을 들어보니 살인막이라고 했겠지? 언젠가는 깡그리 발본색원 하여 개미새끼 하나 남지 않게 해주지. 내 목을 노렸던 것이 크나큰 실수였다는 것을 알게 해주마!’

마음속으로 다시금 복수를 다지는 진건곤이었다.

“그건 그렇고 화산에 다 와가니 안 물을 수가 없구나. 청명과는 그간 연락을 주며 살았다고 했었지? 어느 정도냐? 매제가 되는 게냐? 매제 후보감인 게냐?”

진려경이 얼굴이 붉어져 입을 열지 못했다.

“하하하! 됐다. 네 입으로 들어야만 답이겠느냐? 이제 곧 알게 되겠지. 청명, 그 녀석의 볼기를 때려서라도 알아보면 된다.”

진건곤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청명이야 더 없이 좋은 녀석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화산이라니. 고초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진건곤이 하늘을 보자 초여름의 하얀 구름만 하늘 위에 떠 있었다.

구름 너머로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아버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이제껏 떠올렸던 아버지는 원한에 묻혀 원통함을 부르짖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달랐다. 입가에 웃음마저 달고 있었다. 동시에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아들만 믿고 간다! 동생 울면 잘 달래서 재우고!’

아버지가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었다.

‘걱정 마세요. 안 되면 화산을 때려 부수고라도 잘 돌볼게요. 믿으시잖아요.’

구름 너머로 왠지 못 믿겠다는 듯한 아버지의 얼굴이 비치는 것 같았다.

‘알았다고요. 능력껏 최선을 다 할게요.’

진려경은 진건곤이 말이 없어 바라보았지만 진건곤이 하늘을 보며 행복한 듯 웃음을 짓자 말을 걸지 못했다.

뱃길은 참으로 편안하고 빨랐다.

진건곤과 진려경은 한 달 만에 화산에 도착하였다.

여전히 깎아지른 산에 뾰족한 절벽들이 있는 험준한 산이었다.

어릴 적에 보았던 그 산의 모습이 그대로 변한 게 없어 세월이 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자연은 그대로요, 사람만 늙는다더니, 그 말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자연이었다.

“허!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이곳은 전혀 변한 것이 없구나.”

“오라버니는 그게 기억이 나던가요? 전 전혀 새롭기만 한데요.”

“그거야 너는 너무 어려서 기억에 없는 것이겠지. 너는 그냥 옮겨가려니 했는지 몰라도 나로서는 사문이 될 곳이 나를 내쳤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

“오라버니……!”

진려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화산에 감정이 좋지 않은 진건곤이 자신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걱정 마라. 그래도 사부님의 사문이니 내가 별수 있겠느냐? 잘 지내는 수밖에. 다만 그 마녀가 걱정일 뿐이구나. 마녀는 기억이 나느냐?”

“호호호! 그럼요. 화산에 기억나는 건 오라버니와 청명, 그리고 마녀밖에 없었어요.”

“하긴 너는 겨우 이레도 머물지 못했으니 그것이 전부겠구나. 나는 네가 가고 나서도 반년이 넘게 이곳에 있었다. 그래도 제법 중요한 사람들은 대강 본 것 같구나.”

진건곤과 진려경이 옛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화산의 정문이 보이는 곳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곳에는 문지기들이 보였다.

“무량수불!”

진건곤과 진려경은 도호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용건을 꺼냈다.

“전진자 진건곤이 청명 도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진건곤이 스스로 전진자라고 밝히자 문지기들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서렸다.

진건곤은 자신의 이름이 제법 알려져 있었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이 아니었다.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로 꼽는 무당과 화산의 후기지수들이 언급한 이름이었다.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일단 저곳에서 잠시 기다리시오. 기별을 넣어 보겠습니다.”

지객당.

예전 청린과의 만남이 있었던 곳이다.

그전부터 군자검과 화산의 악연이 있었겠지만 마녀와 악연으로 또다시 점철된 곳. 진건곤의 감회는 새삼스러웠다.

“오라버니? 저 괜찮아요?”

잔뜩 긴장한 진려경이었다.

“괜찮아. 예쁘다. 걱정 마라.”

진려경은 여전히 좌불안석인 표정이었다.

이 각을 넘게 기다리자 그제야 지객당으로 발을 들이미는 사람이 있었다.

“려경아!”

청명이 들어서자마자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했다.

“돼지!”

걱정하던 종전과는 다르게 청명의 옛 별명을 부르는 진려경이었다.

진려경은 스스로도 놀란 표정이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 눈을 딱 감고 밀어붙였다.

“한 번 돼지는 영원한 돼지!”

“아이참! 아직도 그렇게 부르면 어떡해? 다 컸는데.”

“다 커도. 넌 영원히 돼지야.”

긴장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몰고 가는 진려경인지라 진건곤도 놀랐다.

“이젠 예전에 내가 아니니 조심하여라. 형님 그간 별고 하셨습니까?”

하지만 청명은 예전의 청명이 아니었다. 청명은 진려경을 아이 다루듯이 하고는 진건곤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래, 잘 있었다. 너는 또 많이 변했구나.”

진건곤은 청명의 신위가 또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단박에 느낌으로 전해졌다.

“아! 그걸……! 음,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좀 달라졌습니다만 형님께서 알아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청명은 무림대회에서 무당의 진금을 만나 선전을 펼친 끝에 패퇴하고 말았다.

그때 진금과 자웅을 가린 초수가 이백여 초에 이르렀다. 이백여 초라면 겨우 반수가 뒤진다고 할 수 있었다.

청명은 뜻밖에도 세상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한 고수였다. 또한 화산이 기대했던 것보다도 매우 뛰어난 고수였다.

청송의 뒤를 따라갈 후기지수로 청암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무림대회를 겪어보니 청명은 청암이 아니라 청송에 크게 뒤지지 않는 고수가 아닌가?

게다가 오히려 청암은 알려진 것보다 더 못하지 않았던가? 청송을 받쳐줄 인재가 아니라는 평까지 받았었다.

청명은 단박에 강호와 화산의 시선을 받으면 청송의 뒤를 받쳐줄 고수로 떠올랐다.

청송과 진금이 아니면 대회우승자는 청명이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나오고 있었으니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화산으로서는 청명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청송이라는 무당에 버금가는 고수가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청명이 받쳐준다면 무당을 누르고 화산이 강호제일로 우뚝 설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화산의 내부에서도 많은 의견이 오고 가고 있는 사이 전대 장문과 현 장문은 말을 아꼈다.

청명이 맘에 들지는 않으나 그 재주를 보니 중히 써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이 몇 가지 조건을 붙여 청명을 중히 쓰기로 하자 그 결론에 찬동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내용에는 군자검과 무영에게 굴욕적인 사항들도 들어 있었지만 그건 군자검과 무영도 역시 감내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로 청명에게는 자하기공을 제외한 모든 화산의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기회와 화산이 가지고 있는 영단 중에 세 가지가 주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청명은 화산의 검법 중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검법인 무극일로와 상승의 심법인 무량진기를 새로이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진건곤이 달라졌다고 느낀 것은 바로 무량진기로 인해 내력의 성질이 달라진 것을 말한 것이었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 다만 보이는 대로 말한 것뿐이다. 한 가지 묻겠다. 너는 앞으로도 화산의 충실한 문도로 살아갈 것이냐? 사부님의 처우를 잊었느냐?”

진건곤은 청명의 신위가 달라진 것이 화산에서의 지위가 달라진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진려경의 앞날과도 연관이 있기에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은 것이었다.

“그럴 것입니다. 아버님은 구연에 쌓여 당연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님조차도 정작으로 화산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화산을 떠나지 못한다면 화산에 중히 쓰일 사람이 될 것입니다.”

“너는 본디 화산에 적을 두면서도 마음은 충일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은 이유가 있느냐?”

진건곤의 물음에 청명은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있습니다. 청송 사형이 바로 화산의 미래입니다. 청송 사형이 만들어갈 화산에는 저 역시 동참하고자 합니다. 청송 사형의 인품과 무공이라면 화산은 무당을 넘어설 것입니다. 그런 화산의 영광에 제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청송의 이야기가 나오자 진건곤도 역시 동감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청송의 털털한 인간미는 진건곤이라도 빨려들어 가지 않았던가?

그러나 또 물어볼 것이 있었다.

“형님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을 텐데? 그들이 변해야 네가 말한 대로 중히 쓰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이라면 군자검과 청명, 진건곤을 입안에 가시처럼 생각하던 전 장문과 현 장문을 말했다.

“청린입니다. 사매가 그분들이 마음을 바꾼 이유죠. 청송 사형은 그 자체로 눈부신 사람입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어떻게 시대를 만들어갈지 기대가 되는 사람이죠. 그분들도 청송 사형이 만들어갈 화산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게다가 사매가 청송 사형을 좋아하니 그분들도 매한가지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하하하하하! 흥! 제 놈들의 친인에 그리 끌려가며 다른 사람의 친인은 천륜을 갈라 십일 년 만에 보게 하였더냐?”

청린이라는 말에 진건곤이 갑자기 광소를 터트렸다. 그리고는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너무나 차갑게 가라앉아 무서울 지경이었다.

고작 청송을 좋아하는 청린을 위한다는 이유로 군자검과 청명에 대한 미움을 지워버리겠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배곯는 것이 무서워 헤어졌으나 지금에 와서 그들이 하는 짓을 보니 헤어져 살아야 했던 세월이 분했다.

그들이 이렇게 사소한 이유로 지워버릴 수 있었던 감정에 휘둘려 살아온 것이 아닌가?

아비의 죽음도 남매의 운명도 모두가 부평초처럼 흔들릴 뿐이었다.

“형님! 형님과 려경이에게 갖은 고초를 겪게 해놓고 화산으로 돌아가 버린 저를 나무라십시오. 하지만 저는 청송 사형과 함께 화산을 천하제일로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원한 정도는 버릴 수 있습니다. 전대 장문인은 아버님을 싫어하신다고는 하지만 화산에 누가 되게 하신 적은 없습니다. 아버님에 관한 일을 제외하고는 공정치 못하다는 말을 들으신 적이 없지요. 현 장문인도 마찬가집니다. 저와 아버님에 관한 일을 제외하고는 공정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네놈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사실입니다. 형님.”

진건곤의 눈에서 심화가 튀었으나 청명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진건곤의 심화가 풀리지 않았는데 청명은 더 이상한 소리를 해대었다.

“저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점은 아버님도 그랬고 사부님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아버님과 사부님께 차별을 두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군자검과 무영이 동의하였다는 말을 들으니 그들은 천상 화산에 얽매여 그렇게 살으리라는 마음이 들었다.

진건곤의 눈빛이 겨우 사그라졌다.

“겨우 약속만으로 그렇게 마음이 돌아섰느냐?”

“그렇습니다. 그만큼 청송 사형과 함께 만들어갈 화산이 보고 싶습니다. 아버님과 사숙조님은 저 때문에 마음을 바꾸셨지요. 그리고 형님도 그러실 겁니다.”

“무슨 소리냐?”

“려경이가 화산의 사람이 될 테니까요. 제 내자로 말입니다.”

“……!”

“……!”

청명의 말은 진건곤과 진려경의 생각에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너무나 단도직입적이어서 두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제가 화산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려경이도 그리되겠지요. 형님도 그리되실 겁니다.”

진건곤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다 똑같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청명에게 인연이 있다면 진건곤도 역시 화산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자신도 역시 어쩌면 화산과 인연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바로 절검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네 마음도 그리하냐?”

진건곤의 눈이 진려경을 가리켰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흘러나온 말이지만 진건곤의 음성에 날은 이미 다 죽어 있었다.

려경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소리가 있었다.

“오라버니가 안 된다고 한다면…….”

“되었다. 내가 왜 안 된다고 하겠느냐? 축하한다.”

진건곤은 청명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젠 네 책임이다. 행복하게 해줘라!”

진려경은 부끄러운 듯이 머리를 숙였지만 청명이 그 옆에 서서 어깨를 잡았다.

“하! 인간사는 모두 다 그런가 보구나. 종전까지만 해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려경이 걸리고 나니 나도 참을 수밖에 없구나.”

[형님! 아버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이 길이 옳다고 믿습니다. ‘잘못하지 않아도 미움을 지고 살면 그릇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전대 장문과 현 장문이 했던 잘못을 또다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용서해 주세요. 제가 려경이를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청명은 자신이 말하는 것이 장문에 관한 흉이라는 것을 감안했는지 전음으로 진건곤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그리만 되면 무슨 상관이겠느냐?”

진건곤은 진려경을 데리고 절강성의 옛집을 찾아 터를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청명에게 맡길 생각을 하였다.

공희국의 일을 망가트린 것만으로도 살수들의 습격을 받았다. 앞으로는 어떤 일을 벌이게 될지 몰랐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화산이라면 안전하리라. 게다가 배필까지 정해졌다면 마음을 놓아도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절검 노사님을 뵙고 싶구나. 허락을 받아야겠지?”

청명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위치에 섰다는 듯이……!

절검은 여전했다.

어디론가 떠나버려서 수행을 하고는 돌아온단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니 절검을 만나려면 기다리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했다.

진건곤은 모옥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곳에 돌아온 것이 십일 년 만이구나. 반갑구나.”

진건곤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달 묵었던 기억은 있지만 왜 모옥이 편안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절검이 바로 진건곤의 마음속에 스승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십여 년간 군자검의 지도를 받으면서도 절검이 그 짧은 며칠간 말해 주었던 것을 잊은 적이 없었다.

진건곤이 검을 잡으면 언제나 따르는 것은 절검이 말해 준 기본기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능히 전진자라라고 불리며 후기지수로 꼽히는 무위를 이루었다.

소군 같은 절세의 고수가 진건곤의 무공을 눈여겨보게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절검이 진건곤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기본이 아니라 그 이상, 어쩌면 절검의 평생절학일지도 몰랐다.

초식이야 익히고 닦으면 되는 육합장권과 육합건곤검이 있으니 초식이 아닌 것을 전해준 것일까?

모옥에 앉아 명상을 하듯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느끼는 바가 컸다.

절검은 자신에게 생각 이상으로 커다란 존재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껏 느끼지 못했으나 십일 년 동안을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사부와 같은 존재였다.

“절검 노사께서 오의를 얻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은 왜일까? 더 멀리 보기를 원하신 것인가?”

진건곤은 다시금 모옥의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린 시절 수련을 했던 장소와 수련을 하면서 만났던 사천왕과 청송이 떠올랐다.

화산으로부터 천대를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받은 것은 화산최고수의 가르침이었고 화산 최고의 후기지수와의 인연이었다.

게다가 늦기는 하였지만 자신에게는 화산의 검학이 모두 전해지지 않았던가?

청송이 전해준 절학을 익히지는 않았으나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재현할 수 있었다.

언제든 화산의 무공을 재현할 수 있는 자가 있고 그 무공을 화산으로부터 받았다면 화산의 제자라 해야 할지 아닐지…….

“결국 나도 화산의 제자였단 말인가?”

불현듯이 느껴지는 게 있었다.

진건곤은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일어나 한곳을 향해 대례를 올렸다.

그 방향으로 까마득한 곳에서 절검의 모습이 순식간에 확대되어지듯이 나타났다.

진건곤 스스로도 모를 신기한 능력의 발현이었다. 절검의 진퇴를 이리 멀리서 알 수 있으려면 지금의 실력으로는 턱도 없었다.

“헐헐헐! 반갑구나!”

“진건곤이 노사님을 뵙습니다.”

“헐헐! 아직도 노사라고 부를 테냐? 청송에게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냐? 노사라는 말로 외인 취급을 하는구나. 앞으로는 이목이 없는 곳에서는 사부라고 부르도록 하라! 너는 이미 화산수문위로 정해진 지 오래다.”

모옥에 앉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낯설었다.

“화… 산… 수문위? 하오나, 저는 이미 사부님을 두고 있습니다.”

“걱정할 것 없다. 화산수문위라는 직함은 원래 그런 것이다. 여타의 다른 항렬과는 달리 너와 나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네가 네 직위를 밝힌다면 장문의 말도 거역할 수 있는 위치가 될 수는 있다. 물론 화산수문위의 직함을 수행하기 위해서만 그렇지만 말이다. 앉아라! 네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이야기를 해보자.”

진건곤은 절검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화산수문위는 화산의 무공을 이어가야 한다.

화산의 무공을 제대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화산무공의 진수를 알아야만 했다. 그것도 모든 무공에 걸쳐서!

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가지고는 한꺼번에 여러 무공을 익혀 대성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파의 존속을 위한 일에 포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방법을 찾고 찾아 시행착오를 하며 누대에 걸친 화산수문위들이 만들어낸 비법이 있었다.

그게 바로 화산의 무공이 가져야 할 기본기를 전수하는 방법이었다.

오직 기본기에 충실하게 무공을 익히고 익힌다면 언젠가는 모든 것에 우선하여 기본기를 충실히 발현하는 무공 습관을 얻게 된다.

물론 아무에게나 통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지극히 인내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면 흉내 내기조차 어려운 방법이었다.

기본기를 수련하는 방법은 그 진척이 매우 느리기 때문이었다. 수련을 하고 또 수련을 하는데 얻은 것이 없다면 스스로 지치기 십상이었다.

하여 예부터 재능과는 상관없이 꾸준한 품성을 위주로 화산수문위를 선발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통해 무공을 익힌 자는 책이나 구결만으로도 화산의 무공을 구 할 이상을 재현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화산수문위의 정체였다.

기본기로 다져져 어떤 책이나 구결이라도 무공으로 바꾸어낼 수 있는 무인!

물론 다른 문파의 무공도 재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화산의 무공이 될 터였다.

화산수문위가 익힌 기본기는 화산의 무공을 펼치기 위한 기본기일 뿐, 다른 무공을 펼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진건곤은 갑작스러운 내용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 청송에게 네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고 깨달은 것을 재현할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수고하였다. 너를 37대 화산수문위로 인정하마! 당분간은 이 사실을 너와 나, 청송! 이렇게 셋만 알고 있자구나. 청송은 너와 동시대를 살아갈 장문인의 재목이다. 너를 알아도 될 것 같아 미리 언질을 주었다. 또한 너를 화산수문위로 삼아도 될 재목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덕도 있다.”

진건곤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자 혼란스러웠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들이 지독하게도 남들에게 휘둘려 온 것이 아닌가?

한참 동안 말이 없는 진건곤이었다.

그런 혼란을 인정이라도 하듯이 절검은 그저 곁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진건곤은 자신의 마음을 굳히기라도 하듯이 눈을 크게 감았다가 다시 떴다.

“떠날 것입니다.”

“헐헐! 그러고 싶으냐?”

“그렇습니다.”

절검은 진건곤을 잡지 않았다.

“이것을 보아라.”

절검이 손을 들자 절검의 손에는 희뿌옇게 흐린 안개가 검처럼 자리 잡았다.

의기수형!

놀랍게도 뜻과 기만으로 만들어진 검이다. 이미 검이 필요하지 않은 경지에 올라 있는 절검이었다.

“헐헐! 느지막이 얻은 무공인데 이름도 아직 정하지 않았구나.”

절검은 그저 반듯하게 손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진건곤은 충격에 휩싸였다.

반듯하게 내밀어지는 절검의 손에서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요동치는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진건곤의 수준에서는 아무리 집중을 해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비한 능력이 그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느낌으로는 한 가닥 그물 같았는데 그것이 진건곤을 옥죄어왔다.

그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선명하게 느껴지지만 눈으로 보지 못하니 감히 빠져나가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느 곳으로 나가도 그 검이 펼쳐낸 그물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느꼈기 때문이었다.

진건곤의 얼굴은 낭패라는 듯이 진중해졌다.

동시에 절검의 표정도 변하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함께하고 있었다.

절검은 진건곤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허어! 이 아이가 이렇게나 뛰어난 기재였던가? 그저 묵묵히 참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기재가 아니었던가? 내가 모를 만큼의 기재가 아니고서야 이런 반응을 보일 수는 없다. 정녕! 이 검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인가?’

절검은 그저 자신의 평생의 절학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려 했다.

어차피 진건곤이 알아볼 수 없는 검학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보여주고 전하면 그것을 목표로 언젠가는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는데…….

그런데 그런 검학을 알아보고 있다.

절검의 판단은 분명히 옳았다.

진건곤의 능력으로는 아직 몰라볼 것이 당연했다. 진건곤보다 한참 고수라고 하여도 몰라볼 것이었다.

그런데도 진건곤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검 뒤에 숨은 오의를 본다는 것인가?

‘허허! 나야말로 이 아이의 끝을 모르겠구나.’

진건곤은 진건곤 나름대로 놀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데 이토록 선명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신기한 느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믿어도 될 것인가?’

진건곤도 화산의 최고수라는 절검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건곤아,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느냐?”

절검의 늙은 지혜는 힘을 주면 부러지는 진건곤의 성격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바라시는지요?”

진건곤은 그동안 마음속에 스승으로 모셨던 그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