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소군은 자신이 가진 요상단을 진건곤에게 먹였다. 그리고는 산적들로 하여금 진건곤을 옮기게 하였다.
가장 가까운 마을에 들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의원을 찾는 것이었다.
간단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소군이었지만 백안옥마의 일 장에 가슴뼈가 무너져 내리고 기식이 엄엄한 상처를 입은 진건곤의 상처는 자신이 돌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인상이 더러운 산적 팔십여 명이 줄줄이 동아줄에 묶인 채로 의원을 감싸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소군은 의원이라는 자를 찾았으나 산적들을 치워야 진료를 하겠다는 말에 진건곤을 홀로 두고 산적들을 관아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습니까? 환자는 무사하겠습니까?”
바삐 돌아온 소군이 의원을 찾아 물었으나 의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상이요. 최선은 다했으나 그 뒤는 모르겠소이다. 뼈를 맞춘 것이 고작이요. 저 정도라면 죽는다고 해도 내칙임이 아니오. 아시겠소?”
소군도 진건곤의 상세를 아는지라 무거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 의원의 말에 동의를 했다.
책임을 넘기고 나서야 의원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래도 어디서 좋은 약이라도 먹었는지 생각보다는 잘 버티고 있소. 어쩌면 깨어날지도 모르겠소이다. 일단은 직접 보시오.”
의원은 소군에게 진건곤의 침상을 안내하였다.
진건곤은 가슴에 천을 감은 채로 누워 있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도 신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소군은 그 신음만으로도 마음이 산란해졌다.
“하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어찌하겠소? 이곳에 머물겠소?”
의원은 바로 옆의 침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비록 환자라고는 하지만 남녀가 유별한데 연고도 없는 사내를 두고 같이 밤을 지낼 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혹시 이곳에도 병실 말고 거처가 따로 있습니까?”
“있기는 있소만 편한 곳은 아니라오.”
“상관없습니다. 방을 정해 주시면 그곳에 머물면서 간병하도록 하지요.”
일말의 안면도 없는 자였지만 소군은 진건곤이 그렇게 된 것에 책임을 느끼고 있었기에 진건곤의 상세를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그럼 그렇게 하시구려.”
의원은 물러나고 소군만이 남자 또다시 품안에서 작은 옥병을 꺼냈다. 옥병의 뚜껑을 열자 청아한 향이 흘러나와 삽시간에 방안에 가득하였다.
“귀한 약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의 생명만은 못하겠지.”
소군은 또다시 한 알의 요상단을 진건곤의 입으로 밀어 넣었다.
소군이 진건곤에게 먹인 약은 고심환이라는 요상단이었다. 고심환은 아미파의 비전의 요상약으로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소림의 대환단이나 무당의 태청단처럼 무가지보의 명약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역사를 가진 아미의 비전이 고스란히 담겨진 약이어서 보기 드문 명약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아미파의 마지막 자존심인 검후의 전설을 부활시킬 책임을 지닐 소군일지라도 겨우 열 알의 요상단만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던가?
그런 고심환이 벌써 두 알이나 진건곤에게 사용되고 말았다. 허나, 진건곤은 간혹 신음성만 흘려댈 뿐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소군도 역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아……!”
소군은 문득 의아함이 생각이나 진건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완맥을 짚었다.
아주 미세한 진기를 들여보내 진건곤의 몸을 살피다가 문득 탄성을 흘려내었다.
“세상에! 겨우 이 정도의 내력으로?”
소군은 놀라고 말았다.
진건곤의 내력은 너무나 작지 않은가? 아니다. 사실 진건곤의 내력이 턱없이 작은 것은 아니었다.
아미파의 모든 지원을 등에 업은 소군이나 중년의 나이까지 악명을 떨쳐온 백안옥마가 특별히 내력이 많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진건곤이 사용하는 무공에 비하면 내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초식을 부리는 경지는 자신과 견줘도 부족함이 없는데 내력은 그 반의반도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소군이 놀라는 것은 진건곤의 경지에 비해 턱없이 적은 내력이었을 뿐이었다.
“정말로 놀라운 자로구나! 이자가 공력만 갖춘다면 나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소군은 놀라고 놀라운 초식의 운용을 떠올리고는 진건곤이 자신의 길에 크나큰 장애가 된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아! 세상에는 정말 기인이사들이 많구나. 겨우 이 나이에 이런 무공을 지닌 자가 있으리라고는…….”
소군은 그 후로도 가끔씩 진건곤의 상태를 살폈다. 고심환의 효능이 있어선지 시간이 지날수록 기혈이 안정되고 신음도 수그러들었다.
진건곤이 깨어난 것은 이틀이 지난 후였다.
“으으윽!”
진건곤은 통증 느끼며 눈을 떴다.
섬섬옥수 여인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누워 있으세요. 상처가 깊습니다.”
“으으으……!”
극심한 통증이 느껴져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기다리세요. 의원을 불러 오겠어요.”
‘으… 으… 지… 독… 한… 고… 통!’
진건곤이 느끼기에 엄청난 고통이었다. 마치 가일구층황금공의 일단공에 도전하다 실패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죽… 을… 수… 도.’
진건곤은 자신의 몸 상태가 아주 위태롭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현천기공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현천기공은 앉아서 하는 것이 최선이나 그 자세를 가리는 기공은 아니었다. 진건곤은 와공을 펼치며 스스로의 상처에 의지를 집중시켰다.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요양법이 바로 현천기공이 아니던가?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현천기공 속으로 깊게 침잠해 들어갔다.
그것이 아니었어도 진건곤의 선택은 매한가지였을지도 몰랐다. 아무리 아파도 운기를 거를 진건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의원은 바쁜 일이 있었는지 한참 만에 소군의 손에 이끌려 왔다.
“이런!”
의원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놀란 얼굴이 되어 진건곤의 완맥을 잡았다. 진건곤의 맥이 뛰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진정된 모습이 되었다.
“무슨 일인가요?”
“호흡이요. 아무리 안정적인 정양을 한 사람이라도 숨소리는 들리게 마련이오. 그런데 이 방에 들어서니 그 소리가 없더구려. 그래서 깜짝 놀랐소이다.”
소군은 그제야 진건곤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큰일이 아닙니까?”
소군이 놀라는 표정으로 말을 했으나 의원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어도 될게요. 그런 자들이 종종 있더구려. 무인이라는 사람들이었는데 호흡이 무척이나 가늘더구려. 허허! 직업상 하는 일인지라 가는 호흡이라도 놓치는 일이 없는데 이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오이다. 아마도 다른 자들처럼 토납법을 믿는 자들일 게요.”
“토납법! 신선이 되기 위해서 숨을 길게 쉬는 것을 최고로 친다는 신선술 말입니까?”
“그렇지요. 어디선지 그런 호흡법을 배운 자들은 길게 숨 쉬는 것을 최고로 칩디다. 이 청년도 역시 그런가 보오.”
소군이 의원의 말을 듣고는 신경 써서 살피니 진건곤이 숨은 완전히 끊어진 듯하였다.
“숨을 쉬지 않습니다.”
“별일 아닐게요.”
의원은 다시금 진건곤의 손을 잡았다. 맥이 뛰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예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맥은 뛰고 있소. 이런 자들을 가끔씩 보아왔지만 이자는 참으로 호흡이 길구려. 놀랐소이다. 이런 자들은 토납법을 생명처럼 믿더구려. 또 효과도 좋았고 말이오. 아마 이자도 역시 눈을 뜨자마자 그것에 매달리는 것일 것이오. 하지만 이렇게나 길게 호흡을 늘이는 자는 본 적이 없소. 이자는 마치 호흡이 멈춘 것 같구려. 어찌되는지 두고 봅시다.”
의원은 자리를 비웠고 소군만이 홀로 남았다.
‘토납법이라……! 익힌 심법이 겨우 그것만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리 빈약한 내력을 지녔을지도……!’
소군도 역시 토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도인들이 신선술이라고 믿고 있다는 호흡법이라는 정도.
실제로 그것을 하는 자들에게 무병장수의 효과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려졌으나 무인들의 심법으로서는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던가?
군문의 무인들이나 익히는 것이지 강호의 무인들이 익힐 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찌됐건 스스로 운기행공을 하는 것이라고 여기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흠… 호흡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호흡이라니. 보잘것없는 토납법이지만 이 정도까지 익혀내는 자가 있다니. 참으로 대단하구나.’
소군은 또다시 그 자리에 앉아 명상을 시작하였다.
다음 날 찾아온 의원은 조심스레 진건곤의 완맥을 짚어 진맥을 끝냈다.
“생명이 위태로운 단계는 이미 지났소. 정양하면 될 것이오.”
의원은 말을 마치고도 신기한 듯이 진건곤의 이곳저곳을 만져보았다.
“이렇게 빠르게 차도가 있는 환자는 처음입니다. 토납법만으로 효과를 본 자들은 보았으나 이렇게나 탁월하게 효과를 보는 자들은 본 적이 없소. 혹여 어릴 적에 영약을 밥 먹듯이 먹어둔 것 아니오?”
의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건곤에게 물었으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허허허! 소협은 참으로 말을 아끼시는구려. 토납법을 하는 자들은 아무 때나 호흡을 끊어도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건만…….”
진건곤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망이었다.
하지만 진건곤은 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현천기공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직도 진건곤의 온몸에서는 극심한 고통이 일어나고 있었다.
현천기공을 통해 무심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진건곤은 무심의 경지를 깰 수가 없었고 깨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곁에 서 있던 소군은 의원의 소리에 한결 가벼운 얼굴이 되었다. 비로소 책임을 벗었다는 느낌이었을 것이었다.
진건곤은 의원의 말도 들리지 않을 만큼 현천기공의 운기행공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면서도 놀라운 점을 느끼고 있었다.
전과는 다른 새로운 힘이 자신의 몸을 돕고 있었다. 바로 약력(藥力)이었다.
몸속에 퍼져 있는 약력이 현천기공과 어울려 몸을 추스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현천기공은 본디 요상에 특별한 바가 있었는데 아미파의 비전인 고심환의 도움을 받으니 경이로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삼 일이 지나자 진건곤은 생명과 고통의 절박함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가끔씩 무심의 경지를 벗어나 주위를 살피기도 하였다.
진건곤은 여유를 가질 정도로 요양이 된 후로 소군이 곁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세상에 보기 드문 미인이 날마다 곁에서 자신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야릇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건 진건곤 혼자만의 느낌일 분, 소군은 그 자리에 굳은 듯이 눈을 감고 앉아 명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진건곤은 또한 그 모습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그리 나이도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저리 높은 수준이라니……!’
진건곤은 명상수련을 많이 보아왔다.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운현이 그랬다.
황족의 이름으로 초빙한 고수들이 적지 않은 와룡숙이었지만 개중에 명상으로 자신의 무공을 높일 수 있는 자는 겨우 하나 운현뿐이었다.
눈앞의 젊은 여인이 벌써 운현처럼 강호 명숙의 위치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볼수록 대단한 여인이었다.
‘하긴, 그러니 백안옥마 같은 고수를 보고도 사로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정말 대단한 무공이야.’
백안옥마는 강호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흉적이었다.
대개 일개 성에서 수위를 다투는 자들의 무공이 절정의 무공이다. 절정의 무공이라면 능히 그럴 자격이 있다.
또한 그 중에서도 기량이 뛰어난 자들이 비로소 천하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데, 백안옥마는 천하에 이름을 알리고도 살아남은 자였으니 적어도 절정의 무공을 지닌 자로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를 손안의 물건처럼 다룰 작정을 했던 소군이었으니 그 무공이 낮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십대에 불과해 보이는 그녀가 그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많은 생각을 하였으나 더 이상 궁금함을 참기 힘든 진건곤이 물었다.
또다시 며칠이 지나자 진건곤을 스스로 말을 하여도 지장이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나… 이… 를 알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음성이었는지 목소리는 메마른 땅처럼 쩍쩍 갈라져 나왔다.
“왜 그러시는지요?”
“소…군이라 부…르라 하셨지만 무턱대고 그럴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불혹은 아직 멀었습니다만…….”
놀랍다! 아직도 한창의 얼굴로 보이는 여인이 불혹을 말한다. 적어도 삼십대 중반, 더 많으면 사십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진건곤은 그 말을 듣고는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 정도는…….”
진건곤은 황급히 말을 끊었다.
하지만 소군이 그 말을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여인은 역시 여인 자신의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말을 듣기는 싫었을까?
“과연이라니요?”
“소군께서 보인 무공이 이해가 간다는 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겨우 이십대 같으시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십대라는 말에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올랐다.
“호호호! 진공이야말로 놀랐습니다. 진공이 보인 무공은 정말 놀라운 것이더군요. 진공의 연배는 어느 정돕니까?”
“말씀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제 약관에 불과합니다.”
약관이라는 말에 소군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약관이라……! 정말 놀랍습니다. 그 정도의 무공이라면 구파와 오대세가의 진산절기를 익힌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감히 비교할 자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나 초식에 관한한 동배에서는 비교할 자를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진건곤은 고개를 숙여 소군이 보지 못하게 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화산의 사부를 두고도 화산의 무공을 익히지 못했다.
진건곤은 그 점을 두고 억울해하지 않으려 애썼다. 십 년을 하루같이 노력했다.
그 안에는 아버지의 명예를 살리려는 일도 있었으나 자신의 무공을 갈고 닦아 화산의 무공에 못지않음을 보이려는 점도 있었다.
오늘 소군의 말을 들으니 그토록 노력했는데 아직도 그들의 벽은 넘지 못하였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역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빼고라는 말이구나.’
소군은 그 쓴웃음을 보지 못하였다.
“그때 펼쳤던 초식이 전진도문의 중주일검이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허!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초식이거늘 도무지 그 끝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내 눈으로 보고도 육합건곤검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였지요. 아미타불. 선재로군요! 진공은 육합건곤검의 진정한 오의를 깨우친 것 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운이 좋아 뛰어난 사부님을 모신 덕입니다.”
“사문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사부님의 별호는 군자검이십니다.”
소군은 군자검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군자검이시라면 화산의 그분을 말하십니까? 아니면…….”
“맞습니다.”
“허나 진공의 검은 전진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정상 화산의 제자로 들지 못하고 따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호오! 그랬군요!”
잠시간 대화가 끊어졌다.
군자검의 제자로 화산의 사문에 들지 못했다면 그다지 좋지 못한 기억일 것이 틀림없었다.
소군은 잠시 시간을 두어 진건곤의 안색을 살피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혹시 전진의 도문을 이었습니까?”
소군의 표정은 자못 진지한 구석이 있었다.
진건곤이 전진의 도문을 이었는지가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나 보았다.
진건곤은 전진의 도문 중에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현천기공을 잇고 있었다. 허나 그런 것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할 수는 없는 법이 아니던가?
“이미 널리 알려진 무공이 아니었습니까? 사부님께서는 화산의 무공을 배우셨습니다. 사정이 있어 화산의 것이 아닌 것 중에 하나를 전해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전진의 도문을 이었다는 말은 당치 않습니다.”
교묘한 진실이었다.
진건곤이 이어 받은 현천기공은 전진의 진공이 아니던가? 널리 알려져 세상에 퍼진 것과는 다르게 전진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진공이었다.
다만 이런 진공은 화산, 무당 등에도 전해져 있으니 독문무공이라고는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소군은 그저 무공을 익혔을 뿐, 전진의 도문을 이은 것이 아니라고 받아들였다.
“그렇군요. 내력을 보니 그럴 것도 같았지만…….”
소군은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아쉽네요. 전진 검선의 재래를 보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말입니다. 만일 진공이 전진 도문을 제대로 이었다면 조사님들이 그렇게 감탄하시던 것을 나도 볼 수 있었나 싶었는데 말입니다.”
“무슨 말씀인지요? 제대로 이었다면 이라니 말입니다.”
진건곤은 소군의 말꼬리를 놓치지 않고 잡았다.
“아시겠지만 본인은 소군이라 불립니다. 소군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진건곤은 고개를 저었다.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에 소군의 얼굴에 웃음이 서렸다.
“호호호! 그랬군요. 본 파에서는 소군이란 별호도 이름도 아닙니다. 검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수련자들을 부르는 이름이지요.”
진건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호에 어두운 진건곤이라도 검후라는 말은 알고 있었다. 아미파의 전설을 일컫는 이름이 아니던가?
아미의 검후는 대대로 이어지는 직함이 아니었다.
그 이름은 오직 천하를 희롱하는 강자에게만 주어지는 이름이었다.
천지에 나아가 스스로의 강함을 증명한 여인에게만 주어지는 이름. 당대의 검후가 되기 위해서는 천하제일을 꼽을 때, 그 후보로 거론되어야 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아미의 검후는 천하를 오시하는 전설적인 무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소군이란 검후의 당대 후보를 말한다.
소군이라는 여인은 아미가 천하제일의 후보로 세상에 당당히 내놓은 고수라는 말이었다.
“역시 그러셨군요. 백안옥마라라는 희대의 흉적을 두고도 여유 있는 모습에 대단한 고수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세월마저 멈춰 놓으실 만한 무공이었습니다.”
진건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인 군자검에 비견할 수 있는 고수를 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군자검이 화산의 그늘에 들어가 전면에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천하는 아직도 군자검을 기억하고 있었다.
군자검은 천하에 긴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 뛰어난 고수였었다.
“호호호, 아직은 소군에 불과합니다. 소군이 되어서도 검후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사라진 자들도 많지요. 진공은 그 점을 잊지 마시고 저를 그저 소군으로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분들의 과분한 대접에 얼굴이 붉어질 일이 많았습니다.”
스스로 겸양하고자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게 다짐이기도 한 말이었는지 소군의 얼굴에는 다시금 진지함이 깃들었다.
“말을 계속하자면 소군은 전대의 영광을 재현해야 한다는 중임을 가지고 있지요. 하여 대대로 전해져 오는 가르침도 많습니다. 개중에 전진의 무공에 관한 것도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전진의 무공은 느린 듯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지요. 선대께서 타파의 무공에 관한 것을 세세히 기록하지는 않으셨기에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지만 연자가 전진의 무공을 깨닫는 날에는 당장 다음 날이라고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소군은 이야기를 끊고 진건곤을 보았다.
“아마도 전진의 무공은 여타 문파들의 무공과는 달리 급격한 변화를 가진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만일 전진의 무공은 일정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그 진정한 위력이 드러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물론 전진의 도문이 사라진 것은 무당과 화산이라는 걸출한 도문의 출현도 있었겠으나 여타 문파에 비해 진전이 늦게 드러나는 단점도 적지 않게 작용했으리라고 봅니다.”
진전이라는 말을 내력이라는 말로 바꾼다면 그것은 분명 진건곤의 문제점이다. 그 점을 말하면서도 소군은 진건곤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진건곤의 무공은 초식과 어울리지 않는 내력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소군은 바로 그 점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이다.
“진공! 확실한 바는 아니나 그리 실망하지 않아도 될지 모릅니다. 선대의 기록에는 꼭 그렇지도 않다고 느껴지는 말들이 있었지요. 하루 만에도 달리 보아야 한다고 했으니 진공의 진전도 하루 만에 달라질 방법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선대들께서 전진의 도인들의 무위를 잘못 판단하여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히 선대의 말씀대로 하룻밤 만에도 전후가 크게 달라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선대들의 기록을 믿어요. 분명 전진의 무공에는 특별한 점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소군의 말을 듣던 진건곤은 무언가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덩이를 느꼈다.
전진의 무공을 익히며 스스로 견디기 힘들었던 점이 있었다. 바로 내공의 진전이 느리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약점을 극복할 방법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진건곤은 아픈 몸을 세워 일어나 소군에게 대례를 차렸다.
소군은 진건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다가 그 행동을 보고 나서 대경하며 소리쳤다.
“무슨 짓입니까? 진공은 아직도 몸이 성치 못하거늘! 어서 다시 눕도록 하세요.”
진건곤은 대례를 풀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갈 바를 가르쳐 주셨으니 어찌 감사를 드리겠습니까? 깜깜하기만 한 길에 한줄기 빛을 주셨습니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달려갈 힘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진건곤은 진심으로 소군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군자검은 강호를 종횡하며 환천삼보 중에 하나인 가일구층황금공과 독룡살검을 얻었다.
독룡살검은 그 위력은 경천동지의 위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펼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내공이 필요했다.
가일구층황금공은 독룡살검에 맞는 내공심법이었지만 완성된 심법이 아니었다.
가일구층황금공은 황금빛 서기를 뿌린다.
무형의 기운으로 황금빛 빛을 만들어내는 심법이다. 무형을 받아들여 유형으로 넘어가는 무공이니 신공임에는 틀림없었다.
다만, 죽음을 무릅쓰고 도전하여 단전의 그릇을 키우는 심법이나 그 대가가 너무나 혹독하였다. 주화입마와 그로인한 죽음.
군자검은 가일구층황금공을 익혔다. 그의 성취는 누구와 비교하기도 힘들만큼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허나, 그 속을 보면 오롯이 가일구층황금공만으로 얻은 것은 아니었다. 가일구층황금공으로 부족한 부분을 자하신공이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가일구층황금공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심법이었다. 스스로 신공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신공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랬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군자검조차도 분노로 끓어올랐던 그때가 아니라면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다행히 자하기공이 일어나 흩어지는 진기들을 흡수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죽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자신이 곁에 있지 않으면 어떤 때라도 진건곤 홀로 가일구층황금공을 시도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려놓았다.
가일구층황금공은 이미 완성된 신공을 기반으로 그 위력을 증폭시킬 수는 있으나 홀로 심법으로 삼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죽어나간다.
이런 것을 심법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군이 흘려준 정보는 어찌 반갑지 않았겠는가?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소군은 진건곤이 이리 고마워하는 것을 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전진과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떠올렸다. 무공이 아니라도 좋았다. 무엇이든지.
“[숭양진인의 무공은 무공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신묘한 면이 있었다. 그들의 무공은 숨을 쉬듯이 자연스러워 무릇 무공이라는 당연히 따라야 하는 형식조차도 지키지 않는 듯하였다. 초식을 잊었다거나 그런 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말 그대로 선술(仙術)이라는 게 있다면 저럴까 싶었다. 대저, 전진의 고수를 만날 때면 거듭 주의하라고 당부한다.]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이것이 고작이네요. 이게 무슨 단초라도 된다면 좋겠지만 앞뒤가 다 잘린 말이라서 도움이 될지 싶습니다.”
소군은 진심 어린 눈으로 진건곤에게 무운을 빌어주었다.
“충분합니다. 길이 없다면 모를까 길이 있다면 평생을 걸어 찾으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소군은 진건곤의 말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누구나 지킬 수는 없는 말이다. 그러나 눈앞에 선 사내는 그것을 지켜낼 것만 같았다.
중주일검!
진건곤이 내력도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낸 중주일검은 소군이 보기에도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한 가지 더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세요.”
“혹여 아미의 속가제자 중에 진려경이라는 아이를 알고 계시는지요?”
“알고 있지요. 제법 쾌활한 아이지요. 하지만 저로서는 그저 이름을 알고 얼굴만 보아본 아이일 뿐입니다. 나 또한 수련하기에 바빴으니까요. 그런데 그 아이는 왜 묻는 것인가요?”
소군은 진려경의 이름을 부르자 반가워하더니 말을 삼가고 있는 듯하였다.
소군은 진건곤이 처음 만났던 날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인연으로 이어졌는지 알기 전에는 함부로 대답하기가 힘들어 조심스러워 하는 것이었다.
“려경이의 오라비 됩니다. 못 본 지가 너무나 오래되어서 소식이 궁금하군요.”
소군은 놀라는 눈치가 되어 다시 물었다.
“진공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진건곤이라고 합니다.”
“허! 틀림없군요. 사실은 그 아이와 멀지 않은 곳에 처소가 있으니 멀지는 않은 편입니다. 그 아이는 항상 오라비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하더군요. 어찌나 오라비 자랑을 하는지 아미파에 이름이 퍼진 지는 이미 오래지요.”
“하하하!”
진건곤은 너털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 참! 생각할수록 대단한 인연이군요. 이런 곳에서 려경이의 오라비를 만나다니 말입니다.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아미파는 화산에 비하면 그리 엄한 곳은 아니지요. 자자! 이제는 다시 정양을 하세요. 환자가 그런 자세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않습니까?”
소군은 진건곤을 일으켜 세웠다.
둘 사이에는 간간이 이야기가 오고 갔으나 더 이상 깊게 이야기가 오고 가지는 않았다.
진건곤은 현천기공에 힘써 몸을 회복하는데 힘썼고 소군은 명상을 통해 자신의 무공에 힘쓸 뿐이었다.
가끔씩 소군을 훔쳐보며 얼굴만으로는 나이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진건곤이었다.
의원을 찾은 지 보름이 지나자 진건곤은 자신의 몸을 제대로 놀릴 수 있게 되었다.
공희국을 찾아가는 길이 생각보다 지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이제 나도 움직여야 하겠네. 일단은 대회에 가보아야 하니까 말이네.”
“그간 감사했습니다. 누님.”
진건곤은 소군을 누님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소군이 진려경과 같은 배분의 제자였기 때문에 진건곤도 그것을 따르기로 하였다. 게다가 자신을 치료해 준 은혜가 있으니 살갑게 굴었다.
“거듭 당부합니다만 동생은 손속에 사정을 두어야 합니다.”
“하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누님처럼 인명을 아낀다면 그놈들은 또 덤비고 덤볐을 겁니다. 그렇게 상대가 싸워 볼만하다는 여지를 남겨둔다면 아마도 그놈들 전부를 상대해야만 했을 겁니다. 전부와 싸워도 충분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몇 놈을 본보기로 보이는 것이 낫습니다.”
진건곤의 말을 듣는 소군은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동생의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스무 명 남짓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건 본보기로 삼기에는 너무나 많은 수가 아니던가요?”
“전 누님처럼 내공이 강하지가 않으니까요. 누님처럼 느긋하게 싸울 수 있지가 않습니다. 애초부터 강하게 나가서 기를 꺾지 않는다면 정말 어려워집니다.”
내력의 이야기다.
진건곤의 내력은 그리 높지 않은지라 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초수도 적다.
소군은 그 이야기를 알아들었다.
“동생. 그렇다면 많은 수의 적이 아니라면 자비를 보이겠다는 말인가요?”
소군의 말에 진건곤이 미소를 지었다.
내심으로는 은인이나 다름없는 소군의 의견에 맞서는 것이 불편하였던 차였다.
“당연하지요. 누굴 살귀나 살성으로 알고 계십니까?”
소군의 얼굴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어렸다.
“혹시나 길 가다가 모르는 자들이 초계 살귀나 초계 살성이라고 부르면 아는 척을 해야 할 겁니다. 그건 바로 동생의 별호니까요.”
진건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설마 그런 별호라니! 생각지도 못하던 별호였다.
“하여간 앞으로도 그런 별호를 떼지 못한다면 상대를 해주지 않을 테니 그리 아세요!”
“자중해 보겠습니다.”
진건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세상이 자신을 살귀, 살성으로 부른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할까?
“그리 말하니 이제 그만 하지요. 나는 이제 떠나겠지만 동생은 반드시 몸을 다 추스르고 난 뒤에 움직이도록 하세요. 알겠지요?”
“알겠습니다.”
소군은 진건곤에게 더 오랫동안 몸을 추스르기를 거듭 당부하더니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럼 몸조리 잘하세요.”
진건곤은 몸을 놀려 소군을 배웅하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돌아와 행낭을 꾸려 진건곤도 역시 길을 떠났다.
역시나 그 자리에 멈춰 있을 진건곤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건곤은 혹시나 움직이는 길에 소군을 만나게 될까 저어하며 마차를 타고는 창문을 모두 가리고 길을 떠났다.
절강성의 성도인 항주에 도착한 진건곤은 놀라고 말았다. 항주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상유천당 하유소항’이라 하여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지상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이 있다.
소주와 항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이었는데 직접 항주를 본 진건곤은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하였다.
복건성 성주의 거처에 객으로 머물며 도회의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느꼈으나 항주의 경치와 건물들은 생각 밖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보는 것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요, 절경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건물들로 하여 천국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금치 못했다.
진건곤은 무뚝뚝한 편이었는데 일만 없다면 유람 삼아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공희국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생각이더냐?”
진건곤은 스스로 마음을 다 잡고 성도를 총괄하는 관가를 찾았다.
진건곤은 성곽의 정문을 지키는 자들에게 다가갔다.
“공희국 문국공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물건을 전달해야 하는데, 그냥 이곳에 가서 물으면 된다고 합디다.”
“이쪽으로 쭉 가시오. 막다른 곳이 성주님의 처소이오. 그리고 그 왼편과 오른편에 장원이 하나씩 있을 것이오. 개중에 왼편의 것이 바로 문국공의 장원이라오.”
경비의 말에 진건곤의 눈길이 싸늘하게 변했다.
‘아직도 장계가 도착하지 않았단 말인가?’
공희국에게 변고가 있었다면 경비들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국공이 이미 바뀌었다느니 이미 다른 곳으로 좌천되었다느니 이런 말들이 나와야 했다.
허나 경비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것과는 달리 아직도 잘 해먹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진건곤은 또다시 하오문을 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관가의 소식에 밝은 것은 하오문이었다.
‘장하균이 올린 장계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아보아야겠군.’
<…중략…
표면적으로 장하균은 과거 리만리 사건 때 농민의 난을 진압하려다 순직한 진영리 교원의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알려졌음.
최근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공희국은 성주에게 장하균을 태형에 처하게 했음. 성주의 명으로 장하균은 태형 일백 대를 선고받았음. 장하균은 태형을 맞던 도중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음.
하지만 실제로는 장계를 중간에서 빼돌린 공희국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렸음.
공희국이 뒷구멍으로 부리는 조직들이 최근 돈이라면 아무것도 안 가리고 덤비는 것을 보아 성주에게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 것으로 보임.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황금 오백 냥이라는 소문이 있음.
공희국은 겉으로는 문국공의 위치에 있으나 그 뒤로는 많은 이권사업에 직접 개입하고 있음. 매달 거액의 금액이 성주에게 들어가고 있음, 성주도 알면서 용인하고 있음.
공희국은 사실상 성도를 한손에 틀어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중략…
현재 문국공 공희국의 가장 큰 정적은 무국공 하기오임. 문국공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무국공이 뒷배를 봐주며 충족하게 지냈으나 문국공이 직접 사업에 뛰어들어 자금줄 무국공의 수입원이 줄었음.
문국공의 이야기만 나와도 학을 떼고 있으나 성주의 비호에 문국공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음.
…중략…>
진건곤의 손에 쥐어 쥔 종이들은 하오문에 조사를 의뢰하고 받은 결과였다.
“성주까지 손에 쥐고 있단 말인가?”
진건곤은 난감했다. 성주는 정관계에서는 밀려나 있다고 해도 중앙정관계를 거쳐 올라가는 자리이다.
황권으로 임명을 하는 자리인 만큼 성주를 무인이 쥐락펴락 할 수는 없다.
중원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소중와 항주 중에 한곳을 차지하고 있다면 오히려 정관계의 굵직한 선이 뒷배를 봐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성주 본인이 황제의 먼 친척일 수도 있으니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판국이었다.
당장 공희국이 차지하고 있는 문국공이라는 자리만 해도 그리 만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문국공과 무국공은 가희 성주의 양팔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다.
그들에게 변고가 생기고 그것이 무인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당장 커다란 사건으로 비화되고 말 터였다.
“공희국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한 힘이 금력이라면 금력부터 씨를 말려야겠지. 자연스럽게 망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때 가서는 어떤 짓이 벌어져도 상관하지는 않을 테니까. 행여나 성주가 공희국을 아낀다면 그건 그때 가서 처리하기로 하고……!”
성주의 태도에 따라 어려운 일로 변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진건곤은 먼저 공희국의 가장 강력한 힘을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공희국의 금력을 말이다.
결정이 나자 진건곤은 바로 무국공의 장원을 찾았다.
“무슨 일이시오?”
“이만한 장원이면 식객을 구하지 않겠소?”
경비는 위아래로 진건곤을 훑어보았다.
허리에 달랑 하나 검이 걸린 것을 제외하고는 복식에 특이함이 없었다.
검을 보아하니 대장간에서 대충 주워온 것 같으니 여행길에 호신용으로나 쓰는 물건 같았으니 어떤 인물인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식객이라면 특이한 재주가 있어야만 되오. 그런 재주가 있는지 모르겠소.”
재주가 있다면 성주에게 가거나 요즘 세가 높은 문국공을 찾아갈 터, 무국공을 찾아온 것 자체가 자신이 떨어지는 인물일 것이다.
사람을 얕잡아 보는 경비의 말이 나오자 기분이 좋지 않았던 진건곤의 손이 가볍게 흔들렸다.
검광이 번쩍이고 경비의 양쪽 귀밑머리가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경비는 깜짝 놀란 눈으로 진건곤을 보았다.
“초계 살귀라면 되겠느냐?”
경비들은 갑자기 두려운 눈초리로 변하며 급히 허리를 굽혔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지극하게 예를 차렸다.
“이리로 드시지요.”
진건곤을 청하더니 남아 있는 자에게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무엇을 하느냐? 나는 빈객을 모셔야 하니 너는 총관님과 국공 어르신께 고하여라!”
명을 받은 자는 때 아닌 난리처럼 허둥거리며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지극한 태도의 안내를 받고 지객당에 들어서자 시비가 차를 내어왔다. 차를 따르기도 전에 향긋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 찼다.
“용정차이옵니다. 귀빈의 입에 맞기를 빌겠습니다.”
용정차는 귀하디귀해서 원산지인 항주에서조차도 비싼 값에 거래가 되는 것. 웬만한 식객에게는 구경조차 시켜주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다.
초계 살귀라는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놀라게 되었다.
진건곤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어렸다.
‘이런! 초계 살귀라는 별호가 이런 것이었나?’
무공을 익혀온 진건곤은 몰랐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게 오십을 세는 사이 이십여 명을 죽인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야말로 삽시간에 도륙을 내버리는 수준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 상대가 산적 같은 자들이고 무공을 익힌 자도 섞여 있었다는 소문은 초계 살귀의 위명을 더욱 높게 하였다.
근자에 들려온 소식 중에는 가장 놀라운 살성의 출현이었던 것이었다.
“귀빈을 뵙습니다. 장 총관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빈객당에 든 자는 전형적인 염소수염을 달고 있었다. 머리 꽤나 돌리게 생긴 모습.
밝히지 않더라도 총관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무국공 어르신께도 연락이 갔으니. 아마도 곧 당도하실 겁니다. 그동안 궁금한 점이라도 있으시면 제게 하문해 주십시오.”
진건곤으로서는 입맛이 써졌다.
초계 살귀라는 별호에 난리다.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다.
총관이라는 자는 오십이 넘어 보이는데도 스스로 낮추고 있다. 게다가 듣자 하니 무국공이 집무를 보던 중에 달려오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건 단순히 초계 살귀라는 이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국공이 제법 잘나간다는 소문이 나고부터는 무국공에게는 쓸 만한 식객이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전부터 데리고 있던 식객들조차 콩고물이 떨어지는 문국공에게 가버리고 말았으니 도무지 세를 회복할 일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문국공에게 아부라도 해야만 살아남을 판이었는데 초계 살귀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자가 등장했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공희국과 무국공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만?”
다짜고짜 예민한 이야기에 총관이라는 자는 입을 열지 못했다.
“본인은 공희국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오. 그와 맞서기 위해 이곳에 왔소. 무국공께서는 바람을 막아주실 수 있는지 궁금하외다.”
역시나 총관으로서는 답을 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
진건곤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어디를 가시려 하십니까? 무국공께서 오고 계십니다.”
총관이 서둘러 진건곤의 행보를 말렸다.
“총관께서는 무국공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분이오. 그런데도 총관께서 시원한 답이 없는 것을 보니 있어 봐야 공일이겠다 싶어 그러오.”
“흐흠흠! 무국공의 의견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라면 원하는 답을 들려드릴 겁니다.”
털썩!
총관의 말이 나오자마자 진건곤은 의자에 깊숙하게 앉았다.
“부탁드리오. 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