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화산 삼명은 환천삼보를 둘러싸고 예전과는 다른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둘러 화산으로 소식을 전하고 다시금 그곳을 찾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함이었으나 화산 삼명이 되돌아갔을 때는 이미 텅 빈 곳으로 변해 있었다.
신출귀몰한 행사에 놀라운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산 삼명은 수색을 하기 위하여 근동에서 가장 큰 정파를 찾았다. 그곳이 바로 저가의 비용으로 의술을 펼치며 빈민들을 구제하는 데 힘을 쓰는 활선당이었다.
무공은 별 볼일이 없었으나 천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모여든 사람의 수효가 많았던 터라 충분한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화산 삼명은 그들에게 발견하는 즉시 물러서서 소식을 전해올 것을 당부하였고 그 지휘를 위하여 활선당의 공녀인 백이현과 함께 동행을 하였다.
백이현은 그 미모가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현명하고 슬기롭기로 유명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화산 삼명에게 씻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화산 삼명 중의 첫째요, 화산의 차기 장문인으로 지목받고 있던 군자검이 그녀의 재치 넘치는 행실에 마음을 빼앗겨버리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강호인들은 누구나 군자검과 요조검이 하나가 되어 화산의 앞날을 밝게 비출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건만 군자검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훗날의 일이지만 군자검과 요조검 사이에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만들고 말았다.
거칠게 솟아오른 절벽들이 한 칸의 모옥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색다른 느낌이 역력했다.
칼로 자른 듯이 매끈하게 잘려나가 만들어진 절벽들은 주위의 풍광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고 땅은 절벽과 다르게 거친 힘이 휩쓸고 간 자리. 게다가 면경같이 매끈한 절벽에도 군데군데 포탄이라도 맞은 듯이 구덩이가 깊게 파여 있었다.
그런데 또 그 모양이 문제였다.
누군가 세공이라도 해놓은 듯이 꽃잎의 형상이 겹겹이 겹쳐진 것처럼 보여 매화라는 것을 확연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바위로 면경을 만들 정도의 예리함과 거친 힘, 장인의 정교함이 함께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자리 잡은 모옥은 무엇이란 말인가?
허나, 색다르기는 하지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옥의 주인이 주위를 그리 만든 것이라면 설명이 되고도 남았다.
바로 이곳이 무당의 최고수 절검 영은의 처소였던 것이다.
“아……! 대단하네요.”
진건곤으로서는 면경처럼 매끈한 바위와 꽃모양이 가득한 이곳이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절검 영은 사숙조님은 화산이 자랑하는 고수이시다. 천하제일을 논할 때조차도 결코 빠지실 분이 아니지.”
운현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화산의 제자 운현이 사숙조님을 뵙습니다.”
운현은 모옥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나지막이 소리를 냈지만 내력을 실었기에 그 음성은 널리 퍼져나갔다.
끼이익!
모옥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는 작은 체구의 늙은 도인이 보였다.
어찌나 평범해 보이는지 길가다 마주친 적이 몇 번쯤은 있어 보이는 늙은 도인이었다.
“허허허! 왔느냐?”
절검은 운현을 위아래 훑어보더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대단하구나. 그 나이 때 나를 뛰어넘었어. 이미 하늘 아래 적수가 없다는 생각을 해보았겠구나. 그런데 왜 너의 이름이 천하를 진동하지 않을꼬?”
“사손에게 그럴 자격이 있겠습니까?”
운현이 또다시 포권하여 고마움을 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야.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 틀림없고말고. 들어오너라.”
“건곤은 인사 올려라!”
모옥에 들어가기 전에 인사를 올리게 하였다.
“군자검의 제자 진건곤이 어르신을 뵙습니다.”
군자검은 운현의 별호였다.
진건곤은 화산의 적통을 잇는 제자가 아니니 화산이 내린 도호인 운현에게 배웠다는 소리도 하지 못하였다. 도호가 아닌 별호로 사부를 칭할 수밖에 없었다.
절검이 손을 들어 진건곤을 가리키자 진건곤의 몸이 두둥실 떠올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찌 이런 일이……!’
진건곤은 깜짝 놀라 운현을 보았으나 운현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진건곤은 운현의 고갯짓 하나에 모든 걱정을 떨쳐버리고 그 힘에 몸을 맡겼다.
절검의 앞으로 옮겨간 진건곤의 오른손이 자연히 앞으로 내밀어졌고 절검의 손이 진건곤의 완맥을 덥석 부여잡았다.
“허허허! 장문의 눈이 많이 부족하구나. 가진 것이라고는 원정밖에 없는 아이를 검사하라니! 허나 자하기공이라니 만전을 기하기는 한다만 필요 없는 일이지 않겠느냐?”
운현은 절검의 한마디에 놀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명불허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니.’
절검이 흘려 넣은 기운은 진건곤의 몸을 구석구석 훑고 지나갔다.
진건곤은 청량한 기운이 자신의 몸에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에 전신대맥, 소맥은 물론이고 미세한 혈맥까지도 모두 검사를 하였다.
“역시 깨끗하다. 하긴, 장문의 눈을 속일 정도라면 굳이 자하기공이 필요할까?”
절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답을 기다리는 것이었으나 운현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장문은 네 무공이 자기와 비슷하다고 하더구나. 허허허! 어림도 없는 소리. 스승이 제자의 무위를 모르다니. 부족한 게지. 그나저나 늙으니 호기심만 늘더구나. 어디 한 번 사손의 솜씨를 볼까?”
갑자기 절검의 몸에서 폭풍과 같이 거친 기운이 터져 나왔다.
방안의 집기가 모두 휩쓸려 날아가 버리고 덮어둔 지붕마저도 날아가 버렸다.
허나 신기하게도 진건곤의 주위로는 아무런 압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운현은 포탄이라도 된 듯이 튕겨져 나갔으나 그에게도 역시 상처는커녕 옷자락 하나 상한 곳이 없었다.
이미 절검은 힘의 수발은 물론이오. 자신의 힘의 성질마저도 조절할 수 있는 고수였던 것이다.
“허허허! 계속 그리하다가는 크게 상할 것이야. 실력을 보여라.”
한눈에 진건곤의 내력이 원정뿐임을 알았던 절검은 애초부터 운현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운현이 모옥에 나타난 그때부터 많은 시험을 하였으나 그저 담담하게 참아 넘기는 운현이었기에 본격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운현도 역시 내력을 끌어올려 대비하기 시작했다.
절검이 오른손을 내뻗자 삼장 밖으로 떨어졌던 검이 홀로 떠올라 허공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검명을 토해냈다.
우우우웅!
빠아!
순식간에 사라진 듯한 검, 그 뒤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검이 움직이고 나서야 소리가 터져 나오니 도대체 얼마나 빠르다는 것인가?
파바박! 파바바박!
삽시간에 허공에는 불꽃이 가득하고 그 뒤로는 자색의 서기와 황금빛 물결이 어울려 사위를 물들었다.
모든 것이 운현의 주위로 만들어지는 장관이었던 것이다. 운현이 바로 자색 서기와 황금빛 서기의 근원이었다.
“허허허! 자하기공을 그렇게 사용하고 있었느냐? 하하하하하! 조사님들께서 웃으시겠구나. 이번 것은 조심하여라!”
파바바팟! 번쩍! 번쩍!
불꽃이 번쩍일 때마다 운현의 신형이 크게 휘청대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이미 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무인들이 보았다면 커다란 공부가 되었겠지만 진건곤은 신기하기만 하였다.
‘이런……! 화산에는 선인이 산다는 말이 맞았구나.’
도저히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장면에 절검과 운현이 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아름답던 불꽃들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절검의 검이 허공에 우뚝 서서 거칠게 검명을 토하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우우우웅!
“아이에게 자하기공을 전할 것이냐?”
“아닙니다. 비록 미완성이나 황금공의 내력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툭!
허공에 떠 있던 검이 힘을 잃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좋다. 허나 조건이 있다. 그 미완성의 심법을 네가 보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절검의 조건에 놀란 운현이었다.
“사조님들의 행적을 살피면 심득을 화산의 문도가 아닌 자에게도 전한 바가 있거늘 어찌 안 된다고 하십니까?”
절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만든 무공은 그 뿌리가 어디냐? 지금도 당장 자하기공을 바탕으로 황금공의 힘을 빌려 쓰지 않느냐? 이대로라면 네가 만든 심공에는 자하기공의 묘리가 고스란히 들어갈 것이야. 알겠느냐?”
절검의 말에 운현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이제껏 다듬어온 가일구층황금공에 자하기공의 묘리가 섞여 들어갔단 말인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진건곤에게 자하기공의 금제가 전해질 뻔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을 피하려 한다고 해도 커다란 문제에 부딪힌다.
진건곤에게 물려줄 독문심법과 독문검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진의 현천기공과 무공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이미 먼 옛날의 무공이오, 웬만한 방파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무공이 되어버렸으니 익혀 보았자 삼류무사로 전략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전진의 무공을 기틀 삼아 무공을 발전시킬 수는 있으나 그것은 이미 한 문파의 조사들이나 가능한 것이니, 한평생 동안을 수련한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겉으로는 담담하였으나 운현은 깊은 실망에 빠졌다. 그리고는 탄식에 가까운 소리를 뱉어냈다.
“명이도 그랬는데 화산은 저 아이마저 망칠 것인가?”
화산이 직접 망친 것은 없건만, 실망스러운 마음에 청명의 기초가 부실한 것과 진건곤의 처지가 자연스레 연관 지어 생각이 되었다.
괜스레 화산이 원망스러워져 뱉어낸 탄식이었다.
“허허!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네놈의 능력이라면 능히 못할 것도 아니거늘. 당장 주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망발을 한단 말이냐? 제 놈이 못난 것은 생각도 안 하는구나! 쯧쯧쯧……! 화산은 이래서 안 된다. 너무나 쉬이 얻으려고 하기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야. 무량수불! 화산의 엄정함이 아이들 망칠 줄이야……! 에이이잉!”
절검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혀를 계속해서 차기만 하였다.
“건곤이라고 하였느냐?”
“네, 어르신!”
“저 녀석은 글렀으니 네가 고생 좀 해야겠구나. 어서 수련을 시작하여라! 에이이잉! 간만에 쓸 만한 녀석인가 싶었더니 기연뿐인 녀석이기는 마찬가지로다. 화산의 기풍이 바로 문제구나. 문제!”
절검은 실망한 듯이 혀를 차며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운현은 눈을 감고 사색에 잠긴 듯하였다.
진건곤은 홀로 수련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전진은 속세와 거리가 먼 순수한 도가의 집단. 그 무공 또한 실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육합은 사방을 넘어선 확장의 개념, 곧 우주를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치를 담았다는 원대한 사상의 소산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그랬는지 때로는 뜬구름처럼 여겨지는 동작도 많았다.
진건곤의 손과 발이 허공을 짚고는 그대로 두 개의 원을 그리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나 동작이 너무 커 실전에는 통할까 싶은 초식이었다.
“호호호호! 그런 것도 쓸모가 있을까?”
청린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진건곤은 일절 자신의 수련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흥! 그런 구닥다리 무공이나 익히고 있으니 보나마나 나중에는 나보다 더 약해지고 말걸? 호호호호!”
청린은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혹시 그곳에서 절검 사숙조님의 가르침을 받지는 않겠지요?”
“말로만 그곳이 거처일 뿐 절검 사숙조님은 그곳에는 머무는 날이 달에 서너 일에 불과하다. 게다가 네 할아버님께서 사숙조님과 단단히 약조를 하였다고 하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운현 사숙은요? 운현 사숙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그런 무공이 그대로 전수되면 어떻게 하죠?”
“그것 또한 걱정하지 마라. 운현은 그 아이를 가르칠 틈은커녕 청명조차도 가르칠 시간이 없을 것이다. 이미 할아버님의 명으로 조정에 나갔으니 말이다. 그곳에는 황상의 명이 있어야만 나올 수 있으니 쉬이 나올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
“흥! 시간만 지나면 그놈은 제 상대가 못 되겠네요. 그렇죠, 아버지?”
“하하하! 이를 말이겠느냐? 나중에는 분명히 네 손으로 모욕을 갚아줄 수 있을 것이야.”
진건곤은 절대로 제대로 된 사부에게 무공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 운령과 장문, 그러니까 청린의 할아버지의 계획이었다.
그런 계획도 모르고 겨우 전진의 무공에 전념하는 진건곤이 우습게 여겨지기만 했다.
진건곤의 모습이 자신의 손 안에 노는 꼭두각시처럼만 느껴졌다.
하지만 현실의 진건곤은 여전히 자신의 수련만을 할 뿐 자신의 신세를 조정하는 주인을 상대해 주지 않고 있었다. 그게 더 괘씸해지는 청린이었다.
“야! 내 말 안 들려?”
좀더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진건곤의 수련은 흔들림이 없었다.
“손님이 왔으면 아는 척을 해야 할 것 아니야?”
그 후로도 많은 말들을 꺼내었지만 진건곤은 자신의 일에만 매진할 뿐이었다.
“흥! 네가 그렇게 하면 청명이 괴로울걸?”
그제야 진건곤이 청린을 바라보았다.
청린은 막상 진건곤의 시선을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어 뒤로 물러섰다.
“계집! 청명의 일은 청명이 알아서 할 것이다. 내게 일일이 보고 하지 마.”
“흥! 계집이라니? 청린! 청린이라고 불러!”
진건곤에게 이름을 알려주는 것이 탐탁치는 않았지만 계집이라고 불리기는 더욱 싫었기에 이름을 알려주었다.
“필요 없다. 어차피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이름이니까. 그만 귀찮게 하고 그냥 가라, 계집!”
“이게? 청린이라니까 그러네. 내 이름은 청린이라고!”
진건곤은 또다시 자신의 수련으로 들어가 버리고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청명의 일을 꺼내 어떻게 골탕 먹였다는 둥의 말을 시켰지만 이제는 청명의 이름조차도 진건곤을 방해하지 못하였다.
“이게 정말?”
청린은 한참을 떠들더니 끝끝내 자신을 무시하는 진건곤을 참지 못하고 진건곤의 머리를 노리고 육합구소권을 펼쳤다.
허나 진건곤은 간발의 차이로 청린의 주먹을 피하고는 가볍게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계집. 꺼져!”
“계집이 아니라니까!”
청린이 소리를 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들자 권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예리한 기운이 일었다.
아까와는 달리 제법 예리한 공격이 진건곤에게 쏘아졌다. 게다가 진검이니 그 흉흉함은 말할 수가 없었다.
“미쳤구나.”
다행히 청린의 급한 성질 덕에 평소 수련했던 솜씨가 그대로 나오지 못하였다.
검의 움직임이 거칠고 커서 한눈에 보였다.
진건곤은 뒤로 피하며 심호흡을 하더니 마주 찔러 오는 청린의 검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며 청린의 몸에 바짝 다가섰다.
짜악!
진건곤의 온 힘을 담은 손바닥이 청린의 뺨을 때렸다. 청린은 그대로 검을 놓치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계집! 버르장머리를 고쳐줄까?”
청린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지척에 머리를 들이밀고 오른손을 하늘로 처든 진건곤을 볼 수 있었다.
“이 미친 놈. 때려! 때려! 때려 봐!”
짜악!
악을 써대는 청린의 뺨을 그대로 때려버린 진건곤이었다.
“이런 나쁜 놈!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철면피! 감히 누구에게……!”
또다시 뺨을 맞고도 악을 써대는 청린이었다.
짜악! 짜악! 짜악!
악을 쓸 때마다 연방 진건곤의 손이 움직이니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 청린이었다.
청린의 입가에는 이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악독한 놈! 죽여 버릴 거야!”
입가로 피를 흘리며 원독한 눈으로 진건곤을 노려보는 청린이었다.
도가의 자락인 화산인지라 죽음을 논하는 것은 여간해서는 하지 않는 말이건만 청린은 쉽게도 내뱉는다.
“내 앞에 얼씬거리지 마라, 계집! 난 네게 알랑거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니까.”
“흥! 마인 같은 놈! 동생을 찢어 보내고도 그리 냉정하다니,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나를 때렸기 때문에 네 동생이 황량한 절간으로 쫓겨난 것이라고!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아!”
청린은 진실로 진건곤을 냉혈한으로 보는 듯 경멸에 가까운 눈으로 진건곤을 노려보았다.
진건곤은 청린의 날카로운 말에도 여유가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 말도 안 되는 세 치 혀에 놀아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는 그 모습이 청린을 더욱 기분 나쁘게 만드는 원인 중에 하나였다.
“멍청하긴. 이곳에 너 같은 마녀와 있는 것보다 아미파가 훨씬 낫지. 넌 오히려 나를 도와준 것이야.”
진건곤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수련으로 돌아갔다.
그 말에 청린은 발을 동동 굴렀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한참을 구르더니 진건곤을 향해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도망치듯이 달리며 한마디를 남겼다.
“흥! 나보다는 강해도 사천왕보다는 못 할걸? 굴러먹다 주워 배운 무공으로는 어림도 없을 거야!”
돌멩이쯤은 가볍게 피한 진건곤은 자신의 수련에 땀을 흘릴 뿐이었다.
청린이 사라지자마자 또다시 자신의 고민 속으로 깊게 빠져들었다.
‘무정 진인의 손은 그리 빠르지 않았어. 언뜻 보기에는 잠시 멈추는 듯, 더 느린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더 빠르고 다음 동작으로 이어가기도 편했지. 그것이 왜일까?’
진건곤은 무정진인의 동작에서 느낀 것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육합장권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알 수가 있었다.
매 초식, 매 동작마다 무정진인이 보여준 회회무망의 초식을 떠올리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비교하고 비교하여 나갔다.
‘이렇게 힘을 빼는 것인가? 이 부분에서는 더 빠르게 하고? 회수하는 것은 요만큼만? 아니지 이 초식은 원래 상대의 등을 타고 넘어가는 초식이니 이곳에서는 이리해야 할 텐데… 하, 이를 어쩐다?’
똑같은 초식을 여러 번 반복하며 이리저리 바꾸어 가며 최적의 조합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초식을 익히는 것이 재미가 있었는지 청린이 가고난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있었다.
“허허, 기가 막히는구나! 어린 녀석이 벌써 몰아지경이라니!”
절검은 거의 언제나 어딘가로 출타하여 오지를 않고 며칠이나 수십 일이 지나야 모옥으로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침 자신이 돌아오는 것도 모르고 수련을 하고 있는 진건곤을 보며 한 말이었다.
진건곤은 여전히 자신의 수련에 빠져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절검은 모옥에 들어 문을 열고 그런 진건곤을 바라보더니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어라라? 어르신께서…….”
진건곤은 절검이 잠든 것을 보고서야 모옥에 들어 침구를 가다듬고 절검을 자리에 눕혔다. 그리고는 다시 뜰에 나가 수련을 계속하였다.
‘허허허! 몰아지경이 아니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스스로 멈추지 않고 있다는 뜻인데… 허허허, 저렇게까지 열심일 수 있었던가?’
절검은 잠이 든 것이 아니었다. 진건곤의 진면목을 더 잘 살피기 위해서 한 일이었을 뿐이었다.
절검이 실눈을 뜨고 진건곤을 살피는데 몰아지경인지 아닌지를 도무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 쉬지 않고 열심히 하는 아이도 드물지, 아암!’
마음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는 절검이었다. 잠시 후에 또다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그럼 뭐 하나? 화산의 제자도 아닌데……!”
정말로 잠이 든 것인지 그 말을 끝으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절검이었다.
절검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떠나 버리고 없었다.
진건곤의 수련은 떠오르는 새벽해와 함께 또다시 시작되었다.
진건곤이 음양이 교차하는 순간의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 현천기공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흥! 사천왕?’
진건곤은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운 걸음 소리. 진건곤과 같은 나이 또래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청린의 앙칼진 음성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흥! 나보다는 강해도 사천왕보다는 못 할걸? 굴러먹다 주워 배운 무공으로는 어림도 없을 거야!’
진건곤이 가부좌한 자세에 운기를 하고 있었다. 보통의 심법이라면 이런 때에 기의 흐름을 뒤틀리게 만들 수 있는 일장을 날린다면 깊은 내상을 입거나 주화입마에 빠지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올라온 시간은 아주 악독한 의도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걱정 말고 운기를 끝내. 이 시간밖에 없기에 올라온 것뿐이다.”
사천왕들도 역시 그 자리에 앉아 운기하기 시작했다.
새벽의 운기는 중요한 것이었기에 그러자마자 진건곤이 벌떡 일어섰다.
사천왕들은 내심 놀라고 말았다. 상황이 바뀌어서 오히려 진건곤이 그들을 해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사천왕들은 이런 상황까지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무공이 높았기 때문에 운기를 먼저 끝내고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진건곤이 익히고 있는 심법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 이런 상황을 만들게 된 이유였다.
“걱정하지 마라! 난 군자검의 제자다. 네놈들처럼 비겁한 화산이 아니란 말이다.”
사천왕 중의 청암이라는 아이가 생각보다 빠르게 일어났다.
가장 무공이 강하기도 했고 경계심이 많았던 청암은 운기조식에 들어가지 않고 사태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었다.
청암은 진건곤보다 두 뼘은 더 컸다.
진건곤은 그제야 사천왕이 적어도 두세 살은 더 먹은 아이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눈을 부릅뜨고는 진건곤을 바라보았다.
“흥! 비겁하다는 말을 증명해 봐! 그렇지 않으면 오늘 큰 고초를 겪을 것이다.”
청암은 제법 무서운 기세를 피워낼 줄 아는 아이였다. 청린처럼 곱게 자란 화초는 아닌 듯하였다.
피식!
하지만 진건곤은 비웃음을 흘렸다.
“웃기는 소리. 이미 비밀로 하기로 한 이야기를 내가 토설하면 핑계 삼아 사부와 나를 내쫓을 건가? 입막음을 위해서 말이야. 하하하!”
“거짓말! 사숙이 먼저 화산을 배신했다. 사숙은 화산을 욕되게 한 자야. 장문의 자리를 버려 화산을 모독한 사람이 바로 네 사부란 말이다.”
“장… 문의 자리를?”
진건곤은 놀라고 말았다.
무언가 사연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장문의 자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흥! 그것 봐. 너는 모르지? 네 사부는 진실을 말하지 않아! 화산을 버릴 때도 그랬어! 침묵으로 일관했지 침묵으로 화산을 모독한 자라고!”
진건곤은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는 홀린 듯하였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청암을 보는 진건곤의 얼굴에는 싸늘한 비웃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흥! 나 같아도 버렸을 화산이다. 내가 사부님이라도 비겁한 곳의 수장이 되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
진건곤이 겪은 화산은 비겁함과 미움으로 가득한 화산이었지만 사천왕 같은 화산의 문인들에게는 자부심이 가득한 곳이었나 보았다.
“감히……!”
“이런 빌어먹을 녀석이!”
“화산을 모독하다니……!”
어느새 일어난 다른 세 명의 아이들.
목검을 뽑아 들고는 진건곤에게 다가들었다. 살기마저 진하게 피우고 있었다.
“물러서!”
청암이 다른 아이들을 제지하고 나섰다.
“하지만 청암!”
아이들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를 냈으나 이미 반쯤은 수그러든 상태였다.
그들의 태도를 보아 제지하고 나선 청암이 그들의 수장 격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화산은 비겁하지 않다. 숫자의 위의를 두어 핍박하지 않는다. 나 혼자서 싸우겠다. 내가 바로 보무제자 청암이다!”
청암은 아이들을 제지하고는 목검을 하나 뽑아 들고 진건곤의 앞에 섰다.
어리다고는 하나 제법 매섭게 보였다. 이미 무공을 통해 정심을 세운 듯하여 보였다.
청암의 눈짓이 사천왕 중의 하나를 향하자, 진건곤에게도 목검을 하나 내밀었다.
진건곤은 상대가 녹록치 않음을 바로 알아보았다.
자신보다 더 오래 무공을 익힌 자와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화산의 제자였으니 절로 긴장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쉬익!
진건곤이 목검을 쥐고 자세를 취하자마자 청암의 두 손이 곧게 뻗어왔다.
목검이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직선을 그리며 진건곤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깨끗함 속에 정심한 내력이 깃들어 있어 어른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악!
진건곤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사선으로 목검을 쳐냈다. 그리고 그대로 청암의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청암은 보무제자라고는 하지만 과연 화산의 제자. 고르고 골라 뽑은 기재 중의 한 명이었다.
진건곤의 검이 맹렬하게 찔러오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진건곤의 검을 살짝 비껴 쇄도해 들어가는데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청암은 그대로 옆으로 미끄러지듯 돌아가며 검을 휘둘렀는데 아주 침착한 모습이었다.
화산의 보무제자들이 익히는 구궁검보의 사슬진격이라는 초식이었다.
전진은 도문의 발전과 함께 사라져간 도문이다.
전진도문의 교리가 성장하며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많은 도인들이 새롭게 틀 둥지를 찾아 세상으로 나섰다.
개중에 눈에 띄게 많은 수효가 찾은 곳이 무당산과 화산이었다.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무당산에는 천하에서 모여든 수많은 계파와 종파가 자리를 잡았는데 장삼봉이라는 걸출한 무선이 등장한 이후로 누대에 걸쳐 서서히 하나의 단체로 합쳐지는 일을 겪었다.
그것이 바로 당금의 무당이었다.
화산 또한 중원의 이름 높은 산으로 많은 도인들이 모여 각각의 계파를 가지고 있었으나 누대에 걸쳐 하나의 도문으로 거듭났다.
무당은 무선 장삼봉을 시조로 삼는 뚜렷한 출발점이 있었으나 화산은 그런 시조가 없었다.
하여 도문의 시작이라는 전진의 영향을 좀더 진하게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구궁검보는 그런 경유로 육합건곤검을 누대에 걸쳐 개선하여 만든 것으로 위력이나 매서움에서 육합건곤검을 한참이나 앞서는 것이었다.
구궁검보를 익혔다는 것은 육합건곤검의 검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과도 같았다.
상대보다 무위가 뛰어나도 이미 상대가 알고 있는 무공이라면 승산이 적어진다.
그런데 무위마저 높은 청암이 진건곤의 무공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무공만으로는 이미 청암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퍽!
묵직한 소리가 들리고 진건곤이 그 자리에 그대로 무너졌다.
청암의 내력이 실린 일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일격에 실신을 하였다하여도 이상치 않을 공격이었다.
“일어나! 화산을 모욕한 죄는 그리 가볍지 않다.”
청암의 목소리는 아직도 성이 나 있었다.
“모욕이 아니야. 비겁함을 비겁하다 하는 건 모욕이 아니다. 이깟 고통으로 그것을 뒤집을 순 없다.”
진건곤은 고통으로 벌게진 얼굴을 하고서도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지독한 놈이군.’
사천왕이라 불리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놀람이 떠올랐다.
목검이라고는 하나 아이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위력이 있다. 벌떡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진건곤은 또다시 검을 휘둘러 청암을 찔러갔다.
검영분청이라는 초식인데 2개의 검영이 흐릿하게 만들어지며 청암의 어깨와 명치를 노리고 들어갔다.
“흥! 그깟 구닥다리 무공!”
청암의 검이 아주 빠르게 흔들리며 진건곤의 검이 나갈 방향을 방해하고 들어왔다.
따다다닥!
아주 짧은 순간에 진건곤의 검이 튕겨나가 버리고 오히려 두 어깨와 명치를 맞고는 또다시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검을 집어! 아직도 멀었다.”
진건곤은 또다시 벌떡 일어나 검을 집었다.
하도 자연스럽게 일어나 멀쩡한가 싶을 정도였는데 목검이 찍혔던 자리에는 옷이 찢겨지고 혈흔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진건곤의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검붉어졌으니 극심한 고통을 참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빌어먹을! 역시 강하구나.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지!’
진건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무공을, 아니 오의를 사용하기로 했다.
아직은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가장 뛰어난 것임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건곤은 다시 검을 집어 들고 자세를 취했다.
이번에는 청암의 검두가 살랑살랑 흔들리며 진건곤을 향해 들었었다. 육합건곤검에는 없는 초식!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에 검이 어디를 향할지를 모르니 방어할 곳을 마땅치 않았다.
청암이 공들여 초식을 만드는 수법이니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빌어먹을! 먼저 치는 수밖에!’
진건곤은 대항할 수단이 없자. 가장 자신 있는 초식을 펼쳤다.
바로 회룡토월! 밤마다 한 가지 마음으로 펼쳤던 그 초식이 청암을 찔러 들어갔다.
딱!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두 검이 민활하게 움직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진건곤의 검을 감아가는 청암의 검과 그것을 넘어가려는 진건곤의 검.
서로가 서로의 검로를 막아서며 또다시 허공에 얽혀들며 부딪혔다.
검을 맞댄 채로 진건곤의 검이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흘러들어 갔다.
청암의 검도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듯이 아래로 내려서려는 찰라. 진건곤의 검이 청암의 검을 따라 맥없이 흘러내렸다.
간단한 움직임이었는데 청암의 눈이 홉떠졌다.
‘이런!’
어떻게 알았는지 진건곤의 검이 자신의 검로를 누르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검로를 미리 막아서는 것이 아닌가? 진건곤의 목검이 자신을 때릴 차례라는 것이 그림을 보듯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하아!”
기합소리와 함께 청암은 내력을 모두 끌어올리며 억지로 검로를 이어갔다.
나머지 사천왕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합성을 지른다는 것은 곳. 호흡의 끊어짐을 각오한다는 뜻이었다.
자신들 중에 최고 고수인 청암이 호흡을 이어가지 못해도 좋을 승부수를 던지려고 하는 것이었다.
진건곤이라는 꼬마 녀석은 청암이 모든 것을 던지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지경까지 몰았던 것이었다.
구궁탄검! 청암의 모든 공력이 투입된 구궁탄검이 억지로 진건곤의 검을 밀쳐내며 펼쳐졌다.
‘지금!’
진건곤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잠깐의 흐트러진 구궁탄검에 뛰어들 틈을 보았다.
하지만 청암의 전력이 담긴 구궁탄검이 주는 압박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위험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진건곤은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한 번의 기회가 가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궁탄검의 검영들이 진건곤의 몸을 찌르고 들어갔다.
찌이익!
구궁탄검의 검영들은 진건곤의 옷깃을 길게 찢으며 진건곤의 몸에 작렬하고 말았다.
‘됐어!’
청암은 구궁탄검이 초식이 정통으로 찔러가지는 않았지만 제법 묵직하게 진건곤의 몸을 찌르고 비껴나간 것을 느꼈다.
제자리에 무너질 정도는 아니라도 급격한 통증에 물러설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얼른 뒤로 물러서 호흡을 정비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이 까맣게 검어지는 것을 보았다.
딱!
경쾌한 소리가 울리고 그와 함께 청암의 신형이 무너져 내렸다.
실신! 단 한 방에 실신하여 쓰러진 것이었다.
나머지 사천왕들의 눈에 불이 켜졌다. 내공을 익혀 그 안광이 보통을 넘어서는 아이들이었다. 잡아먹을 것 같은 눈길들이 진건곤을 향했다.
하지만 진건곤의 눈에도 불길이 올라 있었다.
시선이 얽히는 순간 진건곤의 입이 열렸다.
“모두 덤벼! 너희들은 원래부터 비겁한 자들이었으니까. 이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도 비겁함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진건곤은 목검을 들어 그들에게 겨누었다.
그의 눈에 활활 타오르는 불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뜨거워 보였다.
하지만 속은 달랐다.
이미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오기가 발동한 것뿐, 방법은 없었다.
‘승산은 없다. 모두들 나보다 고수. 셋이라면 혹시도 없다. 하지만 피할 순 없다. 사부님의 명예가 달린 일이니까!’
한 아이가 앞장서서 나왔다. 그의 손에는 무기가 없었다. 적수공권.
앞으로 성큼성큼 나오더니 대뜸 맨손으로 손을 내밀었다. 진건곤이 들고 있는 목검을 빌려주었던 아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복수는 청암이 직접 한다. 청암이 방심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너의 승리다.”
사천왕은 청린의 등쌀에 진건곤을 찾았으나 하고 싶은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가야 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붙은 시비,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사천왕의 우두머리 격인 청암이 방심을 하다 쓰러져 버린 탓이었다.
사천왕이 가고 난 자리에는 진건곤만이 남았다.
진건곤은 그들이 떠나고 난 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는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청암과의 대련은 그만큼 힘이 들었다. 목검에 맞은 곳이 욱신거리고 온몸에 열이 올라왔다.
한순간에 고도의 정신력을 소모하고 난 터라 진건곤은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한숨 자고 일어난 진건곤은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의복은 여러 군데가 길게 찢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시퍼런 멍과 상처에서 흘러나온 딱지가 굳어 있었다.
“빌어먹을! 역시 화산이란 말이지. 사천왕 강해! 제대로 싸운다면 개중에 아무도 이길 수 없어. 방심하지 않았다면 비참해지는 것은 나였겠지. 고작 나이 어린 계집을 때린 것에 불과했어.”
진건곤은 스스로의 상태를 되짚었다.
사천왕이 아니라도 같은 나이에 화산의 제자라면 제대로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사부님의 제자가 화산의 제자보다 못할 순 없다. 나 때문에 사부님이 얕보이게 둘 순 없지.”
진건곤은 마음을 굳게 먹고 검을 들고 일어났다.
“윽!”
일어서던 진건곤의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잠시 움찔거렸을 뿐, 매일같이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쩔뚝거리는 몸으로 육합장권을 펼치기 시작했다.
처음에 흘린 신음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사천왕과의 시비가 있은 지 거의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진건곤이 있는 절벽을 향해 날아드는 인영이 있었다.
“어찌 이런 귀찮은 일을 하여야 한단 말인가? 도를 쫓아 무당과 견주는 것에도 벅차거늘, 쯧쯧쯧……!”
또다시 멀리로 나아갔다 한 달 만에 돌아온 절검이었다. 절검은 자신이 진건곤의 무공과 내공을 검사하기 위해서 모옥으로 돌아오는 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하기공이라기에 덜컥 그러자고 한 것이 잘못이었어. 이런 사소한 것이 나를 방해하다니. 녀석을 내쫓아야 하겠어.”
가뜩이나 진전이 없어 마음이 조급해진 터인데, 수련을 하다말고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일이 너무나 안타까워지는 절검이었다.
절검은 진건곤을 감시하는 역할을 사양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모옥으로 돌아오는 길에 벼랑 위에 굳은 듯이 서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절검은 벼랑 위에 굳어버린 절검의 눈에는 수련을 하고 있는 진건곤이 보이고 있었다.
범인의 눈으로는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한 모습이었는데 절검의 눈에는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천하를 다투는 위치에 있는 절검은 무인의 손짓 발짓만 보아도 무공의 경지는 판단할 수 있는 경지에 있었다.
“허허허!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변할 수도 있단 말인가?”
변한 것은 바로 진건곤이 펼치는 육합장권이었다.
손과 발이 허공을 짚기를 반복하는데 말 그대로 허공을 희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를 짚어 가는 것 같으면서도 절묘하게 상대의 투로를 막았고 동시에 자신의 투로를 선점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한 달 만에 무공이 이리 변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청암과의 비무 이후로 진건곤은 오의를 더욱 깊게 연구하고 연구하였던 것이다.
“아이야, 많은 것이 변하였구나.”
진건곤의 시연이 끝난 것을 본 절검은 어느샌가 진건곤에게 달려 내려왔던 것이었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허허, 그래. 그보다, 너는 그 무공을 어디서 배웠느냐? 운현은 한동안 이곳에 오지 못한다고 들었거늘, 따로 가르침을 줄 스승이라도 구했던 게냐?”
“아닙니다. 어르신. 이곳에서 어르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나지 못한 지가 벌써 오래전입니다.”
“그 말 틀림없으렷다?”
진건곤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투가 역력했다.
“네, 어르신.”
절검은 진건곤의 말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한 달 사이에 변한 무공 때문이었다. 곁에서 지도하는 스승이 있어도 겨우 한 달 사이에 그리 변하기가 지난한 일이었다.
절검은 그 원인으로 자하기공을 떠올렸다.
자하기공과 같은 신공의 경우 스스로 내력이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있었다.
보다 더 자연스럽고 더 필요한 곳으로 스스로 움직여 내력에 맞춰 무공이 변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인의 능력보다는 신공이 가지는 현기와 영험함이 만드는 결과다.
자하기공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혹여 전진의 무공 이외에 운현이 남겨둔 공부가 따로 있었더냐? 아, 아니다. 직접 보면 알겠지. 오늘이 그날인 것은 알고 있겠지?”
“네, 어르신.”
절검이 손을 들자 진건곤의 신형이 또다시 둥실 떠올라 절검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절검은 냉큼 완맥을 쥐고는 진건곤의 몸 안을 구석구석 훑었다.
하지만 절검은 진건곤의 변화를 설명할 아무런 원인도 찾지 못하였다.
‘허허!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을. 무공은 어찌 그리 변했단 말인가? 자하기공을 익히지 않고 구결을 깨우치는 것만으로도 이런 효과를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이 든 절검은 정색하여 진건곤에게 일렀다.
“네 무공이 한 달 전에 비해 크게 변하였구나. 무엇이 그런 변화를 주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지금 네 무공이 자하기공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을 하고 있다. 설명할 도리가 있더냐? 아주 작은 것이라도 소상히 밝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며 네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이야.”
절검은 사태를 엄중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내비쳤다.
“자하기공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지요. 이것은 무정 진인의 가르침이니까요. 그러니까…….”
진건곤은 화산으로 오는 길에 있었던 일과 지금도 역시 무정이 보여준 회회무망의 초식을 생각하며 맞추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짝!
절검은 손뼉을 치며 감탄을 하였다.
“허허! 묵념시용이로구나!”
묵념시용은 특별히 하나하나를 지적하여 전하지 않아도 스승의 올바른 자세를 보고 스스로 본을 삼아 발전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가르치지 않아도 그 경지를 대하는 것만으로도 제자를 성장시킬 수 있으니 훌륭한 스승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말이었다.
허나 진건곤으로서는 그 말의 뜻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것!
“네?”
“허허허! 무정이 심득을 남기다니 운이 좋았구나. 허나 네가 보여준 변화는 너무나 크다. 묵념시용이라고 해도 명쾌한 답이 되지 않는구나. 내 너를 시험해 볼 터인즉, 다른 것도 배워 보아라!”
절검은 묵념시용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허를 짚어내는 현기를 묵념시용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만약에 자하기공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구결을 풀어낸 결과라면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던가?
절검은 스스로 진건곤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육합장권을 배웠다고? 그럼 어디 보자. 그래. 이 초식은 어떻겠느냐?”
절검의 몸이 흐느적거리며 움직이더니 상체가 아래로 가라앉으며 구수(손가락을 모으고 손목을 구부려 위로 내민 손목, 타격용으로 쓰인다.)가 타원을 그리며 솟구쳐 올랐다.
천이도출! 절검이 펼친 초식은 바로 무정이 가르치고자 하였던 바로 그 초식이었다.
육합장권에 들어 있는 초식으로 후발선수의 묘리를 담기 좋은 초식이었는데 후발선수는 낮은 경지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높은 경지였다.
‘허허허! 조금은 과했는지 모르겠구나.’
“어떠냐? 보았느냐? 이것도 따라 배울 수 있다면 네 말을 인정하기로 하지.”
진건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란스러워했다.
보기는 했으나 무정의 경우처럼 느껴지는 이상함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어르신.”
진건곤은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죄스러운 표정으로 답을 하였다.
그러나 절검의 해석은 전혀 달랐다.
‘그럴 테지. 묵념시용이라는 것은 너 같은 아이에게 통할 것이 아니니까. 아니 묵념시용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지는 못할 테니까 말이다. 네 무공을 좀더 세밀하게 보아주마! 만에 하나 자하기공과 관련이 되었다가는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허허허! 되었다. 일단은 말미를 주마. 무정의 것을 보고 두 달이 걸렸다면 이번에는 더 걸릴 것이야. 육 개월! 육 개월의 시간을 주마. 그 안에 충분한 변화를 보이지 못한다면 너에 대한 감시를 더 강화시킬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알 일이니 두고 보자꾸나! 여하튼 네 몸에 신공의 기미는 조금도 없으니 오늘의 시험은 통과했다.”
절검은 그 말을 끝으로 뿌옇게 흐려지며 사라지고 말았다. 말 그대로 한 달 만에 날아들었던 절검은 달랑 한 초식을 보이고는 사라지고 만 것이다.
진건곤이 하늘을 보았다.
“육 개월? 아……! 사부가 보고 싶구나!”
진건곤은 굶어 죽을 걱정을 덜었지만 여전히 세상이 어렵고 힘이 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절검은 진건곤을 감시하는 일은 귀찮게 여겼지만 자하기공에 대한 일만은 허투루 할 수 없었다.
모옥을 떠나는 척하며 간단한 상반진을 펼쳐 그 속에 들어가 자신의 종적을 숨겼다.
진건곤의 수련을 보며 진정한 묵념시용의 결과인지 자하기공의 구결을 풀어낸 효과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종적을 숨기고 난 후에 잠시 하늘을 보며 쉬는가 싶었던 진건곤은 다시 수련을 시작하였다.
진건곤은 무정의 것을 연마했듯이 머릿속으로 절검의 천이도출을 떠올리며 초식을 연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듭해서 몇 번이고 생각하고 고민했으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신기한 일이구나. 그 모습은 기억하는데 배울 것이 없다니. 분명 사부님께서 믿고 따르라 했으니 거짓을 일삼으실 리는 없는데…….’
아무리 고민을 해보아도 얻을 것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손짓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문득 주위를 깨달아 보니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세 시진은 족히 넘게 절검의 손에 매달려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었다.
그 후로도 시간가는 줄도 모르는 시도는 계속되었는데도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며칠을 허비하고 나서 진건곤은 천이도출에 대한 수련방식을 바꾸었다.
아침에는 절검의 시연을 떠올리면서, 점심에는 무정이 보여준 것을 떠올리면서, 저녁에는 스스로 원하는 것을 떠올리며 수련을 하기로 했다.
“아직은 시간이 남았으니 매일 아침마다 해보자! 다른 시간에는 다른 무공을 익힐 것이야.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스스로의 부족함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한 진건곤은 회회무망의 허를 짚는 수련뿐만 아니라 무공의 수준을 높여가기로 마음먹었다.
“사부님이 말씀하시기를 배우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지만 스스로 갈구하고 얻는 것도 그에 못지않다고 하셨지. 사부가 없는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어. 내가 찾아보는 수밖에!”
육합장권에 적용이 능숙해지자 다음으로 육합건곤검에도 적용하는 것을 넘어갔다.
진건곤은 매일 오전마다 절검이 보여준 초식을 생각하며 수련을 하였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록 절검이 보여준 초식에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진건곤의 심기가 끈기가 있다고는 하나 힘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끝없는 동굴 같구나!”
이제 막 오전수련을 마친 진건곤은 이마의 땀을 훔쳐내었다.
매일같이 하지만 전혀 진척이 없는 수련이었다. 막막함을 느낄 뿐이었다.
“잘 있었더냐? 천이도출은 깨우친 바가 있더냐?”
한 달 만에 모습을 나타낸 절검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지켜본 절검이었지만 짐짓 모른 척하며 물어 보았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진건곤은 바로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어르신. 외람된 말이나 다시 청해도 되겠습니까?”
“네 처우가 달린 일이거늘, 다시 청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몇 번이고 보여줄 테니 잘 보고 성과를 보여 주어라!”
말로는 몇 번이고 반복하겠다고 했지만 절검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이편이 너로서도 좋을 것이야. 잊으려 해도 잊어지지 않을 테니까.’
진건곤의 뇌리 속에 자신이 펼치는 무공을 심어 넣을 생각을 하였다. 절검이 내력을 끌어올리자 절검에게서 엄청난 기세와 위엄이 느껴졌다.
절검은 기세와 위엄을 담은 검식을 진건곤을 향해 펼쳤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온몸이 떨리고 심장마저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절검의 천이도출이 진건곤의 뇌리 속에 각인처럼 심어졌다.
‘무섭고도 대단하구나.’
진건곤이 놀란 표정을 짓자 절검이 웃으며 말했다.
“고작 한 가지 동작이니 평생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필요하다면 또 말하여라. 언제든 보여줄 테니 말이다.”
절검은 또 모옥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진건곤은 또다시 침상을 정리하고 절검을 눕혔다. 진건곤이 수련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는 절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절검이 새겨준 각인 덕에 또다시 열을 올리며 천이도출의 초식을 연구하였지만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진건곤은 이번에도 자신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예전과 같이 되돌아가 버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였다.
“이봐! 꼬맹이! 사조님은 계신가?”
진건곤이 고개를 돌려보니 서너 살이나 많을까? 아직은 어린 소년이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반말에 진건곤의 심사가 꼬이고 말았다. 화산과 관련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안 계신다.”
척 보아도 형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굽히고 들어가기가 싫었다.
“안 계신다고? 마침 잘됐구나. 사조님이 계시면 그냥 돌아가야 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런데 네놈은 말이 짧구나!”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지.”
“하하하하! 네놈은 사매에게 듣던 대로 대가 센 놈이구나.
“하하하하!”
진건곤이 그에 맞서 웃음을 터트렸다.
“화산은 선인들만 사는 곳인지 알았더니 마녀도 있고 그 졸개도 있구나. 어차피 싸우러 왔으면 긴 말 말고 덤벼! 검을 쓰나?”
소년의 허리춤에 검이 걸린 것을 본 진건곤은 다짜고짜 덤비라는 말과 함께 검을 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최근에 변한 무공을 써먹고 싶어졌다. 지거나 말거나 그런 것은 상관이 없었다. 그저 적당한 상대가 나타났으니 자신의 변화를 확인도 하고 화풀이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하하하!”
이번엔 소년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서라. 꼬맹이. 오늘을 그냥 부탁만 하러 온 것이니까. 청린이 네게 할 짓이라면 안 보고도 뻔하지. 제법 곤혹스럽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손찌검을 하면 곤란하다. 그래도 내게는 사매니까 말이야. 청린이 시비를 걸더라도 네가 제압하는 수준에서 끝내 달라는 말이다. 알겠냐?”
의외로 사리분별을 하는 말이었다.
제압하는 것 정도는 된다는 말이었으니 일방적인 주문도 아니었다.
“사매를 아끼고 싶다면 사매를 먼저 다스리지 그래?”
“하하하하!”
또다시 소년이 웃고 말았다.
“짜식! 그럴 수 있다면 너를 찾아왔겠냐? 여기는 화산이다. 화산 장문의 손녀딸이 손찌검을 당했다면 작은 일은 아닌 거다. 네게도 좋지 않은 영향이 있겠지. 뭐 무턱대고 참으라는 것은 아니야. 그냥 제압만 하고 넘어가 줘라, 그럴 수 있겠지? 내가 세 살 위니까. 앞으로는 형님이라고 그래라. 다음에 보자. 아…아니, 아니다. 안 보는 게 좋겠지. 웬만하면 안 보는 것으로 하지.”
소년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을 건네 왔다. 그러리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꼬인 심사가 그렇게 하도록 놔두지는 않았다.
“싫어!”
진건곤의 얼굴에는 오히려 도발적인 기색이 서려 있었다.
“이래라! 저래라! 아무나 와서 시키는 대로 할 사람은 아니야. 난 화산의 문도가 아니니까. 사부님을 제외하고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소년은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바로 그때, 진건곤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검지를 까딱였다.
“하지만 나를 이긴다면 네 부탁을 들어주지!”
명백한 도발이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소년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동안을 웃고 나서 진건곤을 다시 보았을 때는 그의 눈에는 냉철한 기운이 맴돌았다.
“짜식! 어리석은 선택이구나. 내가 힘이 없어 부탁을 한 것으로 보이나? 정히 원한다면 힘으로 눌러주지. 네 수준에 맞추어 목검으로 해줄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는 그에게서는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진건곤은 그 박력에 눌려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왕이면 목검이 좋겠다는 생각도…….
‘이런, 무슨 생각을……!’
너무나 자신 있게 다가오는 소년의 박력에 무너져 목검을 청할 뻔했다.
“네 허리춤의 검은 목검인가? 아니면 장식용을 들고 다니나? 겁쟁이!”
“오호! 후회할 텐데, 그래.”
스릉!
발검의 소리가 나고 잘 다듬어진 예리한 검이 검광을 번득이며 뽑혀져 나왔다.
“화산의 2대 제자 청송이오. 한수 가르침을 받겠소.”
놀랍다. 청송은 겨우 열셋의 나이로 2대제자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청송은 희대의 천재가 틀림없었다. 보무제자를 지나 정식으로 제자가 되는데 보통은 그 나이가 열여덟을 넘어서야 했다.
겨우 열셋의 나이에 이미 보무제자로서의 성취를 지나 제대로 된 화산의 진경을 수련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묘한 박력이라는 것은 청송이 가진 무공이 만들어내 위압감이었는지도 몰랐다.
청송은 검을 역검으로 바꾸어 쥐더니 정식으로 비무를 치르는 무인들처럼 깔끔하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해왔다.
사람이 바뀐 듯한 변화에 얼떨떨했지만 상대가 변했으니 진건곤도 예의를 갖추었다.
“군자검의 제자 진건곤이오. 가르침을 부탁합니다.”
검을 든 청송의 눈이 진건곤을 훑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진건곤으로서는 순간 발가벗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청송이 자신보다 고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길만으로도 온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소름이 돋아? 이대로는 손도 못 써본다.’
찌르는 듯한 한기를 느낀 진건곤은 검을 떨쳐 청송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불길한 한기를 떨치기 위한 본능처럼 뻗은 검이었을 뿐이었다.
채앵!
놀랍게도 진건곤의 검이 다 뻗어나가기도 전에 청송의 검에 튕겨져 나왔다
막혔나? 아니었다. 오히려 진건곤의 검이 청송의 검로에 끼어든 것이었으니 진건곤이 방어를 한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었다.
청송의 눈이 놀라움으로 번뜩였다. 역시나 자신의 검이 막힐지 몰랐다는 듯한 눈빛.
진건곤의 눈도 역시 놀라움이 가득했다.
한기를 느끼며 본능적으로 뻗어낸 것이 아니었다면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청송의 검이 움직이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으니까!
‘또!’
한기가 일었다. 조금 전과 같은 한기가. 눈으로는 쫓지 못하고 그저 느낌이 일 뿐이었다.
진건곤은 또다시 한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역시나 다 뻗어나가기도 전에 불꽃이 튀고 진건곤의 검이 튕겨져 나왔다.
청송의 검과 부딪혀 튕겨난 것이었다.
단지 한기에 반응하는 것뿐이었지만 어찌어찌 청송의 검로를 방해하는 수준은 되었다.
또다시 한기가 일었다. 한기를 쫓아 진건곤의 검이 움직였는데 또렷하던 한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 한기가 일어났다.
허초! 이미 검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안 진건곤은 그대로 땅바닥에 몸을 눕혀 굴렀다.
나려타곤! 무인들은 패배할지언정 써먹지 않는다는 치욕스러운 회피 방법이었다.
진건곤은 얼굴이 벌게지며 급히 몸을 추슬러 일어섰는데 청송은 그 틈을 타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뒤로 물러서 진건곤이 자세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렇게나 만만하단 말인가?’
명백한 실력 차이.
패배를 수긍할 수도 있었겠지만 청송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 싫었다.
실력이 아니라 오기로 버티는 비무가 지속되었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한기에 반응하여 검을 뻗어내며 수차례의 나려타곤으로 구르기. 순식간에 백여 초가 넘어갔다.
그동안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로소 청송의 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무 경험이 없었던 탓에 상대의 검이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나와 같은 상대와는 처음으로 하는 비무겠지? 이제 좀 익숙해졌나?”
청송의 말에 진건곤이 고개를 쳐들었다.
상대는 진건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까지 해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얕보지 말란 말이야! 나에게도 비장의 수는 있으니까!”
진건곤은 무정이 보여주었던 수법을 떠올렸다.
“알았다. 이제는 제대로 간다.”
청송의 검이 묘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검이 그대로 진건곤의 목을 찌르고 들어왔다.
진건곤이 다급하게 검을 들어 막아섰다. 그러나!
전과는 달랐다. 진건곤의 검에는 아무것도 부딪히지 않았다.
‘헛……!’
분명히 막았는데 신기루처럼 자신의 검을 통과하듯이 들어오는 검이었다. 상승의 무리를 담은 검일 것이다.
진건곤은 사력을 다해 검을 피했다. 또다시 나려타곤을 사용해 피했지만 청송이 강자의 아량을 베푸는 것을 또 보아야만 했다.
‘제기랄!’
진건곤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다.
기껏 검이 보이기 시작했는데도 청송이 본 실력을 드러내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맹획을 잡는 제갈량이라는 것인가? 졌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겠어.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이겨야 하니까! 모든 것을 보아주지.’
진건곤은 스스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지만 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발악을 하며 청송의 검을 보아두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다음을 위하여!
“이것이 나의 비장의 무기다.”
진건곤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청송을 향해 검을 찔러갔다. 바로 무정이 보여주었던 허를 찔러 상대를 제압하는 묘리를 펼쳐보았던 것이었다.
과연 비장의 수였을까? 청송의 반응이 보이지 않았다.
청송이 손을 쓰기에는 늦은 듯하였으나 진건곤의 검이 자신의 목을 찌르기 위해 날아오는 것을 보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취리릭!
뒤늦게 청송의 검이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는데 놀랍게도 청송의 검이 먼저 움직인 진건곤의 검보다 더 빠르게 진건곤의 목을 찔러가고 있었다.
‘어떻게……?’
진건곤은 너무나 놀라고 순간적으로 평정을 잃고 말았다.
푹!
피가 튀었다. 그리고 상처를 감싸 쥐고 쓰러지는 자가 생겼다.
바로 청송이었다!
“이… 이런……!”
피를 뿌린 쪽은 청송이었으나 진건곤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자신의 검을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청송에게 물었다.
“왜?”
“내가 이겼다. 승부는 그것으로 끝이 났으니까.”
피를 흘린 것은 청송이었지만 승리를 거둔 것도 청송이었다. 그것도 완벽한 승리로!
뒤늦게 출발한 청송의 검이 먼저 진건곤의 목 한 치 앞에서 멈추어 섰던 것이다.
그러나 진건곤은 패배를 알면서도 검을 정확하게 멈추지 못했다.
아직은 내력과 무공이 부족했기에 검의 수납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승패가 이미 났음을 알면서도 검을 멈추지 못하자 청송이 피하다가 어깨와 볼에 상처가 생기고 말았던 것이다.
“다치지 않을 수도 있었잖아?”
“말이 되냐? 그 상황에서 다치지 않다니?”
청송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나…날 찔렀다면 멈추었을 텐데?”
진건곤이 더듬거리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멍청한 소리! 내가 그대로 찔렀다면 넌 피하지도 못하고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야. 고작 다치지 않겠다고 그런 살수를 쓰란 말이냐? 이깟 피륙이야 다쳐도 그만이지만 넌 피륙이 아닐 수도 있었단 말이다.”
자신이 다칠 것을 알았지만 진건곤을 차마 찌르지 못했다는 소리.
진건곤은 청송의 말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라면 분명히 찌르고 말았을 테니까.
“아…알았어. 혀…형! 형이 말한 대로 할게.”
진건곤의 말투가 바뀌자 청송은 싱긋이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이런 상황에 익숙한 것 같은 웃음이었다. 청송에게는 타인을 작게 만드는 천품이 있는 듯하였다.
“하하하핫! 귀여운 놈! 그래, 고맙다. 사매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다오. 너도 알게 되겠지만 사매가 운현 사숙과 청명에게 그러는 것은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네가 자극하지만 않으면 너에 대한 관심은 식어갈 것이야.”
청송은 어깨와 볼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고서도 웃음을 지으며 떠나갔다.
“아, 참! 청린은 이곳에 당분간 오지 않을 것이다. 너를 혼내준다는 조건으로 일 년 간 이곳에 얼씬거리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동안은 맘 놓고 수련해도 돼! 혹여나 청린을 만나며 나에게 당했다는 얘기도 해주고…….”
뒷걸음질로 물러나며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뱉어내는 청송이었지만 진건곤에게는 청송의 상처만이 눈에 보일 뿐이었다.
청송의 상처는 진건곤의 마음에 남아 화산에 대한 기억을 바꾸고 있었다.
“화산! 어쩌면 내가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허허! 저 녀석에게는 운도 함께하려는가?”
청송과 진건곤의 비무를 지켜본 절검의 한마디였다.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고 또다시 입을 열었다.
“기회가 온다고 다 잡는 것은 아니니까. 흐흠흠……!”
청송이 내려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급하게 절검의 처소를 찾아오는 인형이 있었다.
바로 청명이었는데 어찌나 빠르게 달려왔는지 옷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다.
멀리서 진건곤이 보이는데 바위 위에 앉아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청명은 걱정이 서린 목소리로 멀리서 고함을 질렀다.
“형! 괜찮아?”
생각에 잠겨 있던 진건곤이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허얼!”
청명은 달려오던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움직이지 마! 무리하지 마! 내가 갈게, 형!”
“무슨 소리야?”
가까이 다가온 청명이 진건곤을 바라보는데 그 눈이 참으로 야릇했다. 걱정의 눈에서 서서히 변해가는 이상하다는 눈빛!
“뭐야? 안 다쳤어? 팔과 다리에 검상을 입고 움직이지도 못한다더니.”
“무슨 소리냐?”
“청송 대사형이 그랬단 말이야. 형이 지금 거의 다 죽어가니까 가서 보살펴 주라고!”
“청송 형이?”
“에에? 대사형을 형이라고 불러?”
청명은 놀라운 눈초리로 진건곤을 보았다.
“그렇게 됐다. 왜? 기억해야 할 사람이냐?”
“아… 아니! 대사형은 좋은 사람이지. 대사형이 없었다면 완전히 따돌림 당했을 거야. 그나마 사매와 다른 사형들도 대사형의 면전에서는 감히 못 그러니까. 무공도 무공이지만 대사형이야말로 호탕하고 대범하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니까.”
진건곤이 여봐란 듯이 청명의 어깨를 쳤다.
“그런 사람일 줄 알았다.”
“그런데 왜 형이 다쳤다고 했을까?”
“간만에 얼굴이라도 보라는 것 아니었겠냐?”
“그런가?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청명이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엄청나게 큰소리로 웃어댔다.
“하하하하! 청린이 그것은 지금 형이 사경을 헤매는 줄 알고 얼마나 고소해하고 있는데. 하하하하! 형이 이렇게 멀쩡한 줄 알면 어떨까?”
“흥! 그 계집 보나마나 청송 형님을 붙잡고 또 늘어지겠지. 걱정 마라. 청송 형님이 제압하는 것은 해도 된다고 했으니 오면 쫓아내는 데는 문제없다. 그건 그렇고 너는 그간 어찌 지냈냐?”
진건곤과 청명의 사이에는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운현이 조정의 초빙으로 조정에 들어가게 된 이야기와 운현이 수련하라고 어떤 무공을 남겼다는 둥. 무영 사조가 가끔씩 들러서 지도해 준다는 둥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런데 형! 청린이 고것이 또 알게 되면 귀찮아질 텐데?”
“이렇게 하면 된다.”
진건곤은 절검의 처소에 빨간 깃발을 내어걸었다. 빨간 깃발은 절검이 무공에 전념하니 손님을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빨간 깃발이 쳐져 있을 때 모옥에 올 수 있는 자는 긴급한 명령을 가진 자뿐이었다.
물론 청린뿐만 보무제자들은 그런 긴급한 임무를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하하하! 역시 형은 잔머리도 좋단 말이야. 그럼 나도 가볼게. 물론 형은 팔다리가 성치 못하다고 해야겠지?”
“그래라. 그래야 청송 형님도 편할 테니까. 마녀가 졸라대면 형도 편치는 않을걸?”
“그렇지? 하하하하! 하하하하!”
청명은 무엇이 그리 유쾌한지 가는 내내 웃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진건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절검의 초식을 떠올리며 육합장권을 수련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불현듯이 청송의 검이 떠올랐다.
뒤늦게 출발하고도 먼저 도착했던 청송의 검은 바로 후발선수의 묘리를 가진 검이었다.
청송이 그렸던 기묘한 곡선을 떠올린 진건곤은 자신의 검과 비교해 보았다.
직선과 약간의 곡선이 들어간 직선의 차이였다.
청송의 검은 곡선인 듯하였지만 빨라지는 순간부터는 직선을 가지고 있었다. 곡선으로 움직이는 부분이야말로 청송의 검의 비밀인 듯하였다.
“그랬나? 필요 없는 곡선인 듯하였지만 그 부분이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인가?”
진건곤은 육합장권을 멈추고 검을 뽑아 들었다. 청송의 검을 떠올리며 육합건곤검을 펼쳤다.
한 번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육합건곤검을 펼치며 떠오르는 청송의 검을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어르신의 초식을 풀어가는 것인데. 왜 청송 형의 검이 생각이 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진건곤이었다.
절검의 초식에 담긴 것이 후발선수후수였으니 후발선수의 묘리를 지닌 청송의 검이 연상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진건곤은 절검의 초식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 진건곤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안 돼! 잡념에 휘둘릴 수는 없어. 어르신의 초식을 떠올려야 해!”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떠오르는 청송의 검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잡념아 사라져다오!”
진건곤은 떠오르는 잡념을 떨치기 위해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허허허! 허허허! 거짓이 아니로구나! 허허허허! 묵념시용이 가능한 녀석이라니!”
절검은 진건곤이 청송의 비무에서 후발선수의 묘리를 담은 검을 쓰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아울러 다음 날 진건곤의 무공에 청송이 보여준 것을 담으려하는 변화를 보게 되었다.
물론 후발선수의 묘리가 담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향한 시작이 보였던 것이다.
절검은 그런 차이를 몰라볼 자가 아니었다.
대번에 진건곤이 묵념시용을 적용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절검은 진건곤에 대한 의심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진건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런 녀석을 보고 있으니 절로 흥이 나는구나.”
절검은 무엇이 좋은지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로 진건곤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나도 늙은 것일까? 나 아닌 다른 자에게 흥을 느끼다니……! 슬슬 제자나 구해볼까?”
절검은 자신이 펼쳐둔 상반진에서 벗어나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의 걸음은 다른 때보다도 더 가벼워 보여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