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독룡-3화 (3/61)

제2장

화산에는 속세와 구분되는 엄정한 기상과 천하를 호령하는 무공을 시작으로 수많은 자랑거리가 있었다.

그중에 세월이 흐르며 명멸하는 중에도 어김없이 한결같이 내세우는 자랑거리 중에 하나가 바로 화산의 인재들이었다.

당대에도 화산의 자랑거리는 있었다. 아니 어느 때보다도 더 걸출한 자랑거리가 있었다.

바로 화산 미래를 비춘다는 삼명(三明)이었다.

군자(君子)검 운현, 한빙(寒氷)검 운령, 그리고 요조(窈窕)검 운혜.

그야말로 용봉에 해당하는 인재들이었다. 개중에도 도드라지는 것은 바로 군자검 운현이었다.

엄정한 기상과 대의를 품었으면서도 따뜻한 가슴을 지녔고 지닌바 만인의 호의를 한 몸에 모았고 스스로에게 엄정함으로 무공은 당대의 무당을 넘어설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 군자검 운현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냉정한 일도 필요한 법, 필요한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미리 나서서 처리해 주는 한빙검과 빼어난 미모와 타고난 말재주를 무기로 기대 이상의 협상을 하는 요조검이 있었다.

군자검을 필두로 한빙검과 요조검의 존재는 화산의 미래를 밝히는 삼성(三星)이었다.

세 개의 밝은 빛이 꺼지지 않는 한, 무당과 소림을 제치고 화산의 시대가 다시 한 번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 무림호사가들의 공통된 예측이었다.

바로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방가락은 진건곤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지그시 완맥을 누르고 기를 흘려 넣어 진건곤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진건곤이 보였던 탁월한 움직임은 그 나이에서는 내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쉽게 볼 수 없는 재빠름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진건곤의 단전에는 이미 내공이 쌓여 있었다.

“역시 내공을 배운 적이 있구나.”

“아버님께 배웠습니다. 네 살 때부터 시켰다고 하셨으니 익힌 지는 육 년 정도가 되었습니다.”

진건곤의 말에 방가락은 도리어 놀랐고 크게 실망하였다.

‘하아! 육 년 동안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인가?’

“내공심법의 이름은 무엇이라 하시더냐?”

“그냥 토납법이라고 들었습니다.”

토납법이라면 그저 기혈이 굳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일 뿐이다.

방가락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없었으나 속으로는 실망하고 말았다.

“흐흠! 선친께서 네가 어려서 기본을 잡아주시려고 그러셨나 보다. 네가 이미 소환(단전을 중심으로 복부에서 기가 순환하는 것. 의지가 없어도 단전에 쌓인 진기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현상.)은 마친 상태니 아버님이 전해주신 토납법이 할일은 다 마친 게야.”

제대로 무공을 익힌 강호의 무인의 자손이었다면 소환이 아니라 대환(의념을 집중하여 기가 몸에서 움직이는 것. 힘을 모으는 동작처럼 시간이 걸려 실전에 사용불가.)을 넘어 소주천을 시도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방용호 역시 내공을 익히고는 있었지만 아직 대환을 넘어서지 못한 상태였다.

‘용호는 방치되어 그랬다고 치지만 이 녀석은 왜 이렇단 말인가? 하나같이 어렵게 출발하는 녀석들이구나.’

내공 심법이란 무인들에게도 생명과 같은 것이라서 전승이 아니고는 유출되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토납법조차도 그 원본이 전부 전해진 것이 아니라 그 입문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진건곤이 익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 고수라는 방가락조차도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진건곤의 호흡의 길이였다.

만일 그것을 물었다면 방가락은 또 한 번 놀라야 했을 것이다.

방가락조차도 감탄하고 말았던 몸놀림의 원천은 바로 호흡의 길이였던 것이었다.

어려서 배운 무공으로 가는 한 가닥을 세상을 떠돌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기에 더욱 열심히 정진해 왔다. 그 결과가 바로 긴 호흡이었다.

진건곤의 손을 놓은 방가락은 진려경의 손을 잡았다.

“한 가닥의 진기도 느껴지지 않는구나.”

“려경이는 여식이라 배울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방가락은 진건곤의 집안이 강호의 무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인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하지만 이제는 익혀야 한다. 관부의 무가에는 여식이 나설 자리가 없지만 강호에는 다르다. 려경이 너도 충심으로 익혀야 한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진려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려경으로서는 아직도 무섭기만 한 방가락이었다.

방가락은 정원으로 나서 검을 잡았다.

“네가 배울 검법의 이름은 독룡살검이다. 너의 사부는 본디 화산의 문하였다. 허나 연을 끊기로 한 지금 네게 화산의 무공을 전하진 못한다. 독룡살검은 사부가 세상을 떠돌며 한 가닥 인연으로 얻은 검이다. 화산의 무공이 아니니 전한다 한들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가 나중에 배워야 할 검법이니 잘 보아라!”

채앵!

검명이 거칠게 울리고 그대로 발검부터 상대를 베어간다. 이름 그대로 살검이다.

허공을 휘젓는 검마다 검풍이 솟구쳐 올랐다. 회오리바람이라도 일어난 듯 강한 바람이 정원을 휩쓸었다.

바람이 지난 뒤에는 살이 떨리는 찌릿찌릿한 살기가 뒤따랐다.

한 수 한 수가 표홀하기 짝이 없어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기세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는 아이들마저도 주눅 들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오빠!”

진려경은 진건곤의 손을 잡고 등 뒤로 숨어들었다.

진건곤과 방용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방가락의 검을 보았다.

하지만 초수가 더해질수록 방용호는 검세에 눌려 얼굴이 파래졌지만 진건곤은 그런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가 저런 검을 익히고 계셨다니……!”

방용호 역시 모르고 있었던 검이었다.

‘내력을 빼고 펼쳤다고는 하나 그 기세가 아이가 감당하기는 어려운 것인데……!’

방가락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검에 담긴 기세를 감당하고 있는 진건곤이 대견하게 느꼈다.

“이것은 앞으로 려경이가 익힐 검법이다. 옥녀검이라고 한다.”

방가락이 다시금 검을 놀리니 세밀하고 정교한 검영이 번뜩였다.

물결치듯이 유려하고 화려한 검영 속에서 이따금씩 솟구치듯이 뻗어오는 기세가 있었으니 틀림없이 여인에게 어울리는 검법이었다.

“독룡살검은 모두 12식으로 이루어진 검이다. 짧기도 하지만 그런 만큼 어렵고 강력하지. 지금은 제대로 따라하기도 힘이 들 것이다. 또한 옥녀검은 36식으로 이루어진 검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검이다. 허나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어떤 검법 못지않게 강한 검이 되기도 한다. 너희들은 이검을 익히기 위해서 먼저 육합장권과 육합건곤검을 배울 것이다. 기초를 닦기 위함이니 소홀히 하는 바가 없어야 할 것이다.”

“네, 사부님.”

“아버지, 저는요?”

“너도 역시 건곤과 함께 독룡살검을 익힐 것이다. 하지만……! 아쉽지만 독룡살검은 무공에 어울리는 심법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 완성되는 대로 전할 터, 우선은 현천기공으로 시작한다. 현천기공 역시 도가의 토납법의 일종이지만 다행히 온전하게 알고 있으니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천기공은 이미 멸문해 사라진 도문 전진의 기공이었다.

비록 주인이 없어진 무공이라고는 하지만 한때는 모든 도문의 시작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빼어난 곳이었으니 그 기공 역시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화산의 제자였던 방가락이 참고 삼아 알아두었던 것인데 화산을 떠나고 나니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이었다.

“현천기공은 본디 도문의 현기를 담고 있어 정순하고 현묘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다. 세상에 모르는 이가 없다고 퍼진 토납법은 현천기공에 입문하기 위해 미리 배우는 호흡법에 불과하다. 현천기공을 배움으로서 이제야 진정한 기공을 수련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모두 가부좌를 하고 앉 … 중략… 그 진척은 느리나 현기에 있어서는 어떤 것 못지않은 것이니 꾸준히 익히기를 바란다.”

방가락은 토납법을 하는 기본적인 요령을 가르쳐준 후에 아이들을 보며 일일이 지적해 주었다.

입문과정에서는 시중의 토납법과 다를 것이 없었다. 새롭게 배우는 것은 진려경뿐이어서 진려경을 가르치는 것에 불과했다.

현천기공은 정순한 내공을 얻을 수 있는 반면에 아주 작은 성취를 얻는 데에만 몇 년의 기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방가락은 자신이 적절한 심법을 찾을 동안 아이들에게 가르치기로 했던 것이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런 사정이니 아이들의 심법에는 올바르게 익히고 있는 것에만 신경을 썼을 뿐, 그 성취나 진척에는 그리 신경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진건곤과 방용호는 입문을 건너뛰고 대환을 수련하게 하였는데 대환은 혈도나 기맥 등을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익숙해지는 과정이었다.

전적으로 본인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관여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방가락은 진건곤의 호흡의 길이를 또 한 번 살피지 못하고 지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오전이 지나고 오후에 들어서는 육합장권과 육합건곤검을 가르쳐주었다.

온종일 무공수련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저녁을 먹고 난 후 한 시진의 자유시간이 있었는데 방용호와 진려경은 쉬는데 시간을 썼으나 진건곤은 도무지 쉬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으나 한 달이 되도록 그 정성이 한결 같으니 참으로 대단하였다.

“조금이라도 쉬는 것이 어떻겠느냐?”

도무지 쉬는 것을 알지 못하는 진건곤이기에 엄하기만 한 방가락도 쉬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더 많이 배워야지요.”

‘전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 능력을 가지기도 전에 그놈들이 늙어죽으면 안 되니까요.’

답과는 다른 비장함이 진건곤의 눈에 있었다.

방가락 또한 그것을 짐작치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행여나 잠들기 전에 하는 운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빼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이렇게 무리를 하고서도 온전한 것은 오직 저녁 운기 덕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매번 이런 식이어서 방가락은 자기 전에 운기를 하라는 말밖에 할 것이 없었다.

“저토록 열심이라니……! 이제는 심법에 박차를 가해야 하겠구나!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노룡검을 가르쳐야 할 것 같구나. 적어도 노룡검을 모두 배우기 전에는 어울리는 심법을 만들어야 할 것인데……!”

누군가가 방가락의 말을 들었다면 놀라고 말았을 것이다.

무공을 만든다는 것은 곧 본인의 무공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말, 아니 절정의 무인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의 무인들이나 가능한 것이었으니 방가락의 무공은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것이었을까?

벌써 한 달의 끝으로 접어드는 수련인데 진건곤은 자유시간에도 수련에 몰두했다.

또한 그때에는 유독 육합건곤검의 한 가지 초식인 회룡토월에만 집착했다.

그것을 모를 방가락이 아니었다.

“어찌 너는 그 초식을 유난히 열심히 익히느냐?”

“제자가 듣자 하니 만 가지를 익힌 자보다 한 가지를 익힌 자를 더 두려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만 가지보다는 한 가지를 익히려고 합니다.”

진건곤의 답에 방가락의 얼굴에 웃음이 서렸다.

“너는 한 가지를 익힐 자격이 있느냐?”

“……!”

진건곤은 방가락의 질문의 뜻을 몰라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대답은 일 년 뒤에나 듣자꾸나. 지금은 두고두고 생각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야.”

방가락은 그 답을 주지도 듣지도 않고 진건곤에게 시간을 주었다.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두고 판단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말일까?”

방가락의 말은 화두가 되어 진건곤의 머릿속에 떠돌았다.

‘아직 육합건곤검이 익숙하지 않기에 하시는 말씀일까? 아니면 따로 차이를 두고 초식을 익히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씀일까?’

진건곤은 쉽사리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육합건곤검이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검법이라고는 하지만 한때는 전진의 성명무공이었던 것. 십 성에 이르기 전에는 초식이 끊어지는 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진건곤의 수준은 겨우 이 성에 불과하니 아직은 초식이 끊어지고 연결이 매끄럽지 못했다.

십 성에 이른다면 모든 것이 힘의 배분과 진퇴, 기세와 호흡이 절로 어울려 완전해지니 초식이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

‘십 성에 이르고서야 따로 초식을 연마하라는 뜻이신가?’

아쉽게도 진건곤이 내린 결론은 방가락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다.

아직은 어린 탓에 세월 속에 얻은 지혜를 상상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무공수련에 매진한 진건곤에게는 변화가 있었다.

저녁수련에도 한 가지 초식에 매달리지 않고 육합건곤검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르게 펼치는 수련을 하게 되었다.

깊은 밤.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쏘아진 인영이 밤하늘을 날았다.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깊은 계곡을 찾고서야 그 걸음이 멈추어졌다.

우연인지 인영이 찾은 곳에는 밝은 달빛이 세상을 비추고 계곡을 비추고 있어 무릉도원의 한 편과도 같은 풍경이 만들어졌다.

사내는 스스로 상의를 벗었다. 세상에……!

온몸을 빽빽하게 메운 굵직굵직한 흉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경을 밥 먹듯이 넘어든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흉터를 지녔을까?

놀랍게도 그런 흉터를 지닌 자는 바로 방가락이었다.

방가락은 계곡물에 비친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흉터를 만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흉을 하나씩, 하나씩 만질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운회! 운기! 단천! 월풍! 남궁기! 구양혜린! 너희들을 잊지 않겠다. 내게 견딜 수 있는 힘을 다오!”

차가운 계곡물에 몸을 닦은 방가락은 하늘을 향해 염원을 빌었다. 그리고는 돌멩이 몇 개를 던져 간단한 진을 만들었다.

넓적한 바위 위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운공을 시작하였다.

운공을 하자마자 방가락의 몸에는 황금빛이 감돌았다. 평소 정가장에서 하던 운공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진해지더니 달빛을 받아 번쩍이기 시작했다. 마치 황금으로 만든 등신불이라도 되는 양 했다.

더욱더 밝게 빛나던 황금빛이 어느 순간 일그러졌다.

쩌저저적!

알 수 없는 기음이 울리고 단전으로부터 빛의 음영이 갈라졌다.

거울이 깨지듯이 작은 파편으로 변한 황금빛의 편린이 방가락의 몸에 붙어 있었다.

그중에 작은 것부터 방가락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화려한 빛을 발하며 사라지고 말았다.

“으… 으…윽!”

황금빛의 조각들이 공기로 변하듯이 허공에서 흩어지는 신기로운 장면이 연출되는 동안에 방가락의 입술에서는 한 가락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방가락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평소의 차갑던 얼굴은 일그러져 버린 지 오래였다.

식은땀에 젖어 비 맞은 듯하였다.

흠뻑 젖어버린 의복의 밑으로는 바가지의 물이라도 뿌려진 것처럼 땅이 흠뻑 젖어 있었다.

게다가 전신이 눈에 띄게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방가락의 의지를 따라가지 못하는 몸이 스스로 떨어 울며 고통을 호소했다.

‘령… 기… 천… 풍… 궁기… 혜린……!’

방가락은 마음속으로 사람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떠나갈 듯한 의식을 겨우 붙들어 매었다.

황금빛이 깨어지는 순간 그의 몸은 깨어지는 고통을 맛보았고 작은 편린들이 떨어져나가는 순간 살점이 떨어지는 고통을 맛보았다.

그리고 허공에 흩어지는 밝은 빛이 사라질 때마다 몸이 흩어지는 고통이 함께했다.

황금빛의 편린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방가락의 내공이요, 진원진기였다.

단순한 내공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되는 진원진기마저 흩어버리고 있었으니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황금빛의 편린들이 마지막 한 조각까지 허공으로 흩어졌다.

순간 놀랍게도 방가락의 단전에서 자색의 서기가 피어올라 커다란 구를 만들었다.

흐트러져 가던 황금빛 기운들은 커다란 구에 갇혀 운무가 되었다.

한 줄기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떠나고자 하였으나 자색의 서기로 만들어진 커다란 구가 그것이 떠나지 못하게 막아서는 형국이었다.

한동안 돌개바람처럼 떠돌던 황금빛 운무는 더 이상의 반항을 포기한 듯이 떠돌더니 다시금 방가락의 코로 들어가고 말았다.

한 호흡이나 지났을까? 방가락의 몸에서 새롭게 황금빛 서기가 치솟아 올랐다.

그제야 자색 서기는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황금색 서기는 방가락의 온몸으로 퍼져나갔고 방가락의 몸에는 은은한 황금빛이 감돌았다. 아울러 고통스러웠던 표정도 사라졌다.

“고… 맙… 다!”

한마디를 남긴 채로 그대로 쓰러져 버린 방가락이었다.

방가락의 마지막 말은 과연 누구에게 하였던 것일까?

차가운 밤공기만 방가락을 감싸 안을 뿐이었다.

여느 때처럼 한가로운 하루.

나른한 햇볕이 내리쬐어 사람을 게으르게 하고 있었지만 진건곤에게 그런 여유는 없었다.

진건곤은 방가락에게 배울 무공이 아버지의 누명을 벗길 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고민이 해결된 이상 그야말로 고향을 떠나온 목적을 달성하리라는 마음뿐이었다.

붕! 부웅!

진건곤의 검이 허공을 자를 때마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일었다.

하지만 그뿐. 그 모습은 그리 매끄럽지는 못했다.

벌써 석 달이 넘게 수련을 하였으니 각각의 초식모양은 나오고 있었지만 아직은 초식의 연결이 끊어지는 모양이 역력했다.

그래도 진려경과 방용호에 비하면 그 진척이 매우 빨랐다. 오늘도 역시 동생들은 진건곤의 수련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으아! 역시 오빠는 잘해! 정말 타고 났어. 나도 얼른 오빠처럼 컸으면 좋겠네.”

“바보! 형처럼 나이를 먹는다고 저게 될 것 같아? 내공이 없으면 불가능하지. 그러니까 졸립다는 소리 말고 열심히 내공을 닦으라고!”

“피이! 넌 몰라도 나는 돼요. 난 오빠 동생이니까 말이야.”

“안 된다니까 그러네!”

“난 된다니까? 두 살만 더 먹으면 나도 할 수 있어!”

“더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네! 그런 허풍을 칠 시간에 내공수련을 해도 이 년 안에는 안 돼! 형도 육 년이 넘은 거래잖아!”

“너어! 내가 이 년 후에 되면 어떻게 할…….”

진건곤의 검이 마냥 부러워 시작한 말이 작은 말다툼이 되어 소란스러워졌다.

한동안 이어진 소란은 용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야 끝이 났다.

“너랑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니 차라리 수련이나 해야겠네!”

방용호가 검을 들고 나와 진건곤을 따라 휘둘렀다.

“안 돼지! 네가 나보다 더 잘하는 꼴은 죽어도 못 봐!”

진려경도 작은 입을 쌜쭉거리더니 역시 검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방가락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흐뭇한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방가락이 일어서며 검을 챙겨 들었다. 그의 주위로 한기가 들 정도로 싸늘한 기운을 풍겨댔다.

진건곤이 주위를 살피자 도복을 차려 입은 자들 세 명이 숲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아주 빠르게 이동하여 진건곤의 집까지 도착하였다.

“호오! 상반진. 게다가 만척진까지 섞여 있군. 만척진은 화산만의 것! 이곳이 틀림없다. 운현 게 있느냐? 죄인은 얼른 나와 용서를 빌어라!”

상반진은 자신의 종적을 감추기 위한 간단한 진이며 만척진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진이었다.

방가락이 무공에는 경지에 달했으나 진법은 그러하지 못했다.

아는 것이라고는 화산에서 얻은 것이 전부였다. 화산에서 배운 진법을 사용했으니 그것을 보고 대번에 알아본 것이었다.

방가락은 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네 이놈! 임무를 맡고는 말없이 사라진 지 5년 만에 나타나 아들만 데리고 내뺀다고 화산이 널 못 찾을 줄 알았더냐? 당장 오체투지하고 죄를 빌지 못할까?”

“사형! 제가 먼저 이야기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운현아, 네가 할 이야기가 있다면 들어 보마. 어서 나오너라.”

또 다른 도인이 앞으로 나서며 방가락과 이야기를 하고자 나섰다.

“운현이라는 이름은 버린 지 오랩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무영 사숙!”

방가락은 싸늘한 목소리로 그를 내쳤다.

‘사숙! 당신께서 나서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내 안에 한이 너무 크단 말입니다.’

무영은 화산 내에서도 공정한 인물로 신망이 높았다. 실제로도 방가락에게 끝까지 믿음을 주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방가락으로서는 더 이상 이야기로 풀어갈 것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화산에 돌아가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것 봐라. 무영!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지 않았느냐? 사숙도 몰라보는 놈이 아니냐?”

계속해서 방가락을 죄인 취급하던 도인의 도호는 무진이었다.

무진이 다시 앞으로 나서며 무영의 말을 끊어내었다. 그 모습에 방가락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광소! 능히 광소라고 불러야 할 웃음이었으나 바로 방가락이 뿜어낸 웃음이었다.

“사숙? 당신 스스로 사숙이라고 창한단 말이오? 어찌 그리 뻔뻔하오? 사숙이 사질을 죽음으로 몰아간단 말이오? 그대가! 장문이! 화산이! 나를 사지로 몰아넣지 않았소?”

방가락의 음성에는 싸늘하다 못해 살기마저 느껴졌다.

“화산은 너를 버린 적이 없다.”

파라라락!

화산의 도인 무진의 말에 방가락의 몸에서 기운이 터져 나와 옷깃을 거칠게 울게 하였다.

“두말할 필요도 없소. 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 검이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허허! 화산이 너를 버린 적이 없다. 무공이 뛰어났기에 그에 어울리는 임무가 배정된 것일 뿐이야. 그것으로 화산이 너를 버렸다고 생각하느냐? 화산과 강호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겠다던 네가 아니었느냐?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화산을 등지려 한다면 화산이 일벌백계 하리라. 또한! 네가 나를 홀대하고 박대하며 사숙이라고도 부르지 않다니 화산의 법도가 두렵지 않더냐? 너는 정녕 기사멸조의 죄를 지을 작정이냐, 당장 오체투지하고 용서를 빌어라, 운현!”

도인은 자신의 말에 추호도 거짓이 없다는 듯이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당당함에 방가락은 치를 떨었다.

그와 함께 옷깃이 분연히 떨쳐 울더니 갑자기…….

피리릭! 콰과과광!

방가락의 검이 보이지 않고 소리만 울렸을 뿐인데 모옥의 주위의 땅이 화탄이라도 터진 듯이 모두 뒤집어지고 말았다.

아울러 진법이 모두 깨어져 서로가 볼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흙먼지가 내려앉자 도인의 눈이 놀란 듯이 크게 홉떠져 있었다.

방가락의 일 검이 땅을 뒤집는 위력을 보이자 도인은 놀란 가슴을 내려앉혀야 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며 일행들이 있음을 다시 확인한 후에 안심하는 기색을 보였다.

“무진! 애초에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었다면 나와 용호를 찾지는 않았겠지. 오라!”

방가락이 검을 들어 스스로를 사숙이라고 칭하는 도인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검이 그를 가리키자 검의 예기가 그를 향해 밀려들었다.

도인도 역시 절정의 검수였으나 방가락의 검세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안간힘을 써서 버틸 뿐이었다.

“흥! 내 화산과 맞서는 한이 있다 해도 무진. 당신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다.”

“하하하하하! 간악한 놈! 제 한 몸의 안위를 지키고자 사문을 배신하겠다는구나! 무정 사제. 자네도 들었지? 어서 역도 놈이 틀림없으니 제압하세.”

“특히나! 그 세치 혀를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검을 들어라!”

“흥! 역도의 검을 무서워할 것 같으냐? 시작하자.”

무진은 자신의 사제들에게 합공할 것을 제안하였다.

두 명의 도인이 나서자 팽팽하게 맞서며 일촉즉발의 사태를 맞이하였다.

저벅저벅!

갑자기 무영이 앞으로 걸어 나왔는데 진기를 끌어올리지도 않고 성큼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사숙! 이러지 마시오! 제발!’

방가락의 눈이 애절하게 무영을 향했으나 무영은 두 눈을 감고 그것마저도 외면하였다.

“무량수불! 나는 너를 믿는다. 그래서 내가 왔던 것이다. 나를 믿는다면 둘 다 싸움을 멈추기 바랍니다.”

말을 마치더니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기세가 맞부딪히는 곳으로 향해 들어갔다.

그곳에 들어서면 큰 내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으나 거침이 없는 무영이었다.

“사숙……!”

방가락은 서둘러 기운을 끌어내려야만 했다.

방가락은 본디 화산의 제자로 운현이라는 도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름은 화산이 강호에 내놓은 자랑거리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 중의 하나였다.

바로 차기 장문인으로서 그 인품과 재능이 어느 팔파일방에도 뒤지지 않았기에 화산을 무당의 이름 앞에 두어줄 기대주라고 불렸었다.

방가락이 차기 장문인의 지위를 잃었을 때 화산에서 유일하게 무영만이 한결같이 그를 대했던 존장이었기 때문에 차마 그를 해칠 수는 없었다.

무진도 역시 기세를 우그러트리고 물러섬을 보였다.

하지만 무진의 눈에는 눈엣가시 같은 운현이 더 크게 보였는지 다시금 내공을 끌어올렸다.

‘흥! 저놈만 해치울 수 있다면 사제가 다치더라도 상관없지! 내상만 입혀두어도 무정과 함께라면 충분할 것이야.’

무영이 운현의 손을 잡으려는 찰나, 무진이 뿜어낸 기세가 무영의 몸을 고스란히 통과하며 방가락에게 쏘아졌다.

무진이 쏘아낸 기세에 내상을 입은 무영이 놀란 얼굴로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런 악독한……!”

방가락이 황급히 내력을 끌어올리며 피하였는데 온전할 수는 없었다. 그의 입가에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사부님!”

“아버지!”

아이들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방가락을 불렀다.

하지만 방가락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아버지!”

방용호가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진건곤이 방용호를 막았다. 방용호는 진건곤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놔 줘, 형!”

“사부님께 방해된다.”

진건곤이 턱으로 가리킨 곳은 바로 방가락의 손이었다.

방가락의 손이 검을 오롯이 다시 쥐는 모습이 방용호의 눈에도 들어왔다.

그제야 안심하고 나아가기를 그만둔 방용호였다.

“다 아는 사람이냐?”

“으응!”

“그럼 됐다. 누군지나 말해. 알아두도록 하지.”

진건곤의 말에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가라앉는 방용호였다. 진건곤이 그들을 알아두겠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이었다.

“화산파 장문인과 동배에 있는 무진, 무영, 무정 도장이야.”

진건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방용호도 역시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방가락이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의 주위에는 강력한 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화산의 도인들이 자신의 사형제를 해하며까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던 것이다.

그 악독함에 질렸는지 이제와는 다르게 살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진은 자신의 술수가 통했다는 생각으로 승기를 잡은 김에 끝을 내려 했다.

“무정! 역도를 제압한다.”

“감히 사숙을 해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놈이로구나!”

무정은 운현이 무영을 해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의 검에도 살기가 가득 차 검초를 풀어냈다.

무진과 무정의 검이 화산의 삼절 중의 하나인 분매화칠검 중의 초식 두 개를 펼쳐내었는데 두 개의 검이 마치 한 짝이라도 되는 듯이 조화를 이루며 화려하게 허공을 점했다. 그와 동시에 은은한 매화향이 퍼졌다.

내공과 초식만으로 향기를 피워내는 고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검. 무진과 무정도 역시 절정의 고수였던 것이다.

검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절정의 고수였지만 제압이라는 말과는 달리 무진과 무정의 검은 사혈만을 노리고 있었다.

두 개의 검이 지척에 다다를 때까지 방가락이 움직일 줄을 모르자 무진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서렸다.

바로 그 순간 방가락의 검이 보이지 않게 흔들렸다.

쩌정!

농염한 매화향이 장내에 순식간에 차오르고 검에서 뿜어져 나온 자색서기가 공간을 지배했다.

무진과 무정은 놀란 눈으로 공격하던 검을 들어 방어에 돌렸으나 쇄도하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튕겨져 나가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단 일수의 교환으로 승패는 갈라졌다.

그들의 처지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미 그들의 검은 반으로 부러져 있었고 가슴에는 일자로 베어진 커다란 자상이 있었다.

무진과 무정은 비참한 꼴보다는 어느 때보다도 더 놀란 눈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두려움이 함께했다.

“이제껏! 능력이 부족해 참은 것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만 더 나를 찾아온다면 목숨을 남겨두지 않을 것이야! 무진, 그 더러운 욕망으로도 화산의 옷을 입을 수 있었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울분에 가득한 방가락이었지만 한때나마 자신의 문파였던 화산의 제자를 차마 베어 넘기지는 못하였다.

그때 무영이 일어나 재빨리 무진과 무정의 혼혈을 짚어 기절하게 하였다.

“사형제들의 악심이 차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나를 상하게 할 정도라니! 운현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내가 너를 돕겠다. 화산으로 돌아가자. 내가 중론을 몰아준다면 네 처지가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아닐 것이다.”

무영이라면 그 인격과 공정함으로 인정받아 이미 차기 대장로로 지명을 받고 있는 바, 중론을 몰아주기에 충분한 자였다.

“사숙……! 저는 이미 화산에서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너도 알 것이다. 네가 보였던 서기는 자하기공이 아니더냐? 장문만의 무공인 것을… 화산은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야.”

“가르쳤기에 배웠을 뿐입니다. 자하기공을 누구에게도 전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믿어주겠느냐?”

무영이 고개를 돌려 무진과 무정을 보았다. 그리고 방가락의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장문이 사형과 사제를 보낸 것은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끝까지 화산을 떠나기를 고집한다면 게다가 저 아이들까지 쫓기게 될 일. 고집 피울 일이 아니야.”

“사숙!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방가락이 되물었지만 무영은 단호하기만 했다.

“화산이 전력으로 쫓는다. 개방에도 협조를 요청하겠지. 하오문에도 의뢰할 것이고. 강호에 퍼진 중소방파에도 요청을 할 터! 그런데도 숨는 것이 가능하겠느냐?”

방가락의 고개가 돌아갔다.

피할 수 없는 일이 자명하다. 구파일방 중의 하나가 전력을 다한다면 피할 수 없는 것.

“돌아가자. 내가 너의 편이 되어주마!”

“…….”

방가락은 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세상에 가장 강한 방파 중의 하나인 화산이다. 그 화산이 쫓고자 한다면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한때 자신의 사문이었던 그들에게 칼을 겨눌 수도 없었다. 원한의 대상은 화산이 아니라 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두 개의 마차로 갈라 타고 움직였다.

하나는 방가락의 일행이었고 또 다른 것에는 무당의 세 도인이 타고 있었다.

마차로 이동하면서도 아이들의 수련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움직이는 마차 안이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은 토납법에 불과했다.

“흐아, 또 호흡이야? 내공수련은 항상 하고 있으니 토납법 정도는 하지 않아도 되잖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끄응!”

진건곤의 당연하다는 답에 방용호와 진려경은 당해낼 수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진건곤은 순식간에 토납법의 세계로 빠져들고 말았다.

‘하나, 둘, 셋… 서른여덟, 서른아홉, 마흔. 하나, 둘…….’

진건곤의 호흡은 들숨이 마흔이오. 유기가 서른, 날숨이 마흔이었다.

보통사람으로는 상상도 못할 긴 호흡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긴 호흡이 된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건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직 아버지가 물려준 토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토납법이 소환이 끝이 나고 대환을 시작하자 조금씩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도망칠 때도 정신을 집중하면 놀랍게도 빠른 민첩성을 발휘하게 해주었고 맞을 때도 정신을 집중하면 그 아픔이 덜했다.

매일같이 절차탁마하여 닦아온 토납법의 길이는 범인의 것을 초월하는 것이 되어 있었다.

방용호와 진려경은 토납법 속으로 빠져든 진건곤을 보며 기가 막힌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그들도 역시 토납법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방가락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가부좌하고 앉아 토납법을 하고 있으니 마차 안은 조용할 대로 조용해졌다.

문득 정신을 차린 방가락이 아이들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차 안에는 아이들의 호흡이 들고나는 작은 소리만 있었는데, 방가락은 돌연 이상한 기색을 느끼고 말았다.

방가락은 자신의 기감을 총동원하여 마차의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런 기미도 느끼지 못하였다.

방가락은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나를 데려가기 위해 사숙들만 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임무를 받아 화산을 떠날 때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르다. 나의 이목을 속일 고수는 흔치 않지. 이만한 고수라면 영은 사숙조님뿐일터! 사숙조님께서 움직이셨을 리는 없는데…….’

광오했다. 구파일방에서도 강자로 손꼽히는 화산. 개중에 자신보다 더 강한 자는 오직 한 명으로 국한시키는 방가락이었다.

방가락이 마지막 임무로 화산을 떠났을 때는 이미 오 년 전이었다.

환천삼보 중의 하나를 찾아 떠났던 일행들이 모두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방가락도 역시 개중에 하나로 여겨졌던 것이다.

청풍이 갑자기 사라지자 화산은 그 사건을 파고들었고 그 결과로 그것이 방가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을 뿐이었다.

이제껏 벌어진 사건들은 그 후의 일련의 사건이었을 뿐이었다.

바로 화산제일검인 절검 영은!

‘아니다. 절검 사숙조님께서 이 일에 나설 리가 없다.’

방가락은 확신에 가까운 답을 얻고서 더욱더 깊게 기감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살펴도 외부에서 기척을 느낄 수 없자, 방가락은 마차의 내부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방가락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을 감고 기척으로 느낀 아이들은 둘에 불과하지 않은가?

얼른 눈을 떠 다시 살펴보니 틀림없이 셋이 다 호흡을 하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아 보니 다시금 셋이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금 또 하나의 호흡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시 눈을 떠 보았으나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셋.

방가락은 또다시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고서야 자신이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허허! 허허허! 건곤이가 원인이었다니.’

바로 지척에 있는 아이의 호흡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으니 그것이 이상했던 것이었다.

방가락은 진건곤의 호흡을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서른여덟, 서른아홉, 마흔…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 서른여덟, 서른아홉, 마흔. 세상에……! 이렇게 긴 호흡을 하고 있었다니.’

방가락은 놀라고 말았다. 진건곤의 숨이 너무나 길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애를 쓰고 있었구나, 너는!”

방가락은 진건곤이 그렇게 긴 호흡을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간혹 긴 호흡이 토납법의 경지를 높이는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긴 호흡을 하려면 힘들지 않았느냐?”

방가락의 눈이 애잔한 눈빛으로 진건곤을 보았다. 허나 진건곤의 눈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다른 선택이 없었으니까요!”

진건곤은 하마터면 울음을 터트릴 뻔하였다.

호흡을 늘이기 위해서 참고 견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자신의 어려움과 아픔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진건곤은 그런 마음이 들킬까 무서워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도 놓지 않은 방가락의 손에서는 유난히 따스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너를 날게 해주마!”

방가락의 음성에 힘이 깃들었다.

무진은 심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무영의 앞에서 입이 있어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양심이 오래가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사제가 크게 상할 일을 벌이지도 못했을 터, 사흘이 가기 전에 입이 열렸다.

“사제, 운현은 자하기공을 익혔네. 그러니까…….”

“더 이상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화산의 제자를 화산이 없애자는 말이오? 부끄럽지도 않소이까? 누가 화산을 위하고 화산을 자랑스러워하겠소이까? 무량수불!”

무영은 무진의 말을 사납게 잘라내었다.

“하지만 자하기공은 장문인만의 무공이 아닙니까? 사형! 자하기공을 두 갈래로 나눌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무정이 나서 무진을 두둔하고 나섰다.

“허허! 허허……!”

뚜껑으로 꽉 막힌 마차 안이건만 하늘을 보듯 혀만 차던 무영의 입이 드디어 다시 열렸다.

“무정! 너는 나를 믿느냐?”

돌연한 무영의 말에 무정이 당황하였다.

그러나 무영이 누구던가? 화산의 차기 장로감이며 대장로 감으로 꼽히는 인품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사형의 말씀이라면 믿을 수 있지요.”

진심 어린 대답이었다.

“운현과 싸우던 날, 나를 다치게 한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사제……!”

말이 나오자 무진이 급히 나서서 무영을 말렸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사형께 묻지 않았습니다. 무정에게 물은 것입니다. 사제는 말해 보아라!”

“그거야 운현이 사형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역도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벌하지 않고 화산으로 데려가려는 사형의 마음이 넓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일벌백계로 다스려…….”

무정은 당연하다는 듯이 운현을 지목하며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었다.

“무진 사형이다.”

“네……?”

뜻밖의 답에 무정의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운현이 아니라 바로 무진 사형이다. 자하기공 앞에는 사형제간의 안위도 필요가 없단 말이냐?”

무영의 말에 무정은 사색이 되고 말았다. 무정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사… 사제! 오해하지 말게! 사제를 상하게 할 마음은 아니었네. 그저 운현을 제압하고 난 후에 사제의 상세를 돌볼 생각이었네.”

무진의 변명이 이어졌지만 그 말을 듣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허어, 허어……! 그럼 운현이 아니라 사형이었단 말이구… 려……! 무량수불! 원시천존이시여!”

사실을 알게 된 무정마저도 무진을 보며 실망한 눈초리를 참지 못하게 되었다.

“내 마음을 모른단 말인가? 사제를 해칠 생각은 없었단 말일세! 그저 운현을 제압하기 위해서…….”

툭!

무정이 나서서 무진의 혼혈을 짚어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소이다. 어찌 이런 일이……!”

무영과 무정은 하늘을 보며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난 운현을 믿는다. 이제 사제도 운현을 믿어주기 바란다.”

무영의 음성이 넋이 나간 무정의 귓가를 간질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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