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영 기병대-100화 (100/107)

100장 비사 6

정신을 차린 용악은 자신의 몸이 온전히 있는지 살펴보았다.

왼 손을 매만지자 차가운 비늘의 미끈함이 느껴졌고 손을 올려 볼을 만지자 십자로 벌어진 상처가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거지...’

용악은 그렇게 눈을 감고 그가 지옥문에서 겪었던 그 꿈같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건 꿈이던가? 아니면 내가 원하던 그런 파멸이었던가?’

용악은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지옥문에서...

불에 타고

바위에 뭉겨지고

칼에 찢겨

죽은 부하들의 모습이 서서히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용악이 의식하지도 전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썩을 놈. 일어나자마자 울고 난리냐. 이놈아!”

용악은 갑작스럽게 들린 처음 듣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이미 중원에서 적수(敵手)를 쉽게 찾을 수 없는 고수인 그가 눈을 떠서 보지 않으면 자신의 앞에 있는 존재의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대체 이런 고수가...’

그런 생각을 하며 그 이름 모를 고수를 바라보자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 보였다.

민머리를 마치 면도를 하듯이 작은 칼로 머리를 밀고 있는 한 명의 노엘프가 보였다.

엘프족은 인간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종족으로 인간에 비해 조금 긴 얼굴에 귀가 길고 뾰족하고 삼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날카로운 하관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옆으로 길게 찢어진 두 눈은 그런 날카로운 모습을 한층 더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외모를 한 노엘프가 용악의 앞에서 머리를 밀고 있었다.

샤라락

탁탁

앞에 놓인 그릇에 머리칼을 털어낸 노엘프는 용악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깼으면 일어나서 따라와라. 늙은이 고생시키지 말고.”

노엘프는 그렇게 말하고서 문을 열고 나갔다.

열린 문 사이로 햇살이 길게 늘어져 용악의 얼굴을 뒤덮었다.

마치 빛이 그를 위로하는 듯 해 용악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가 그 동안의 일이 어떻게 지냈는지 듣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지옥문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고 알 수 없던 그 꿈을 꾼 자신이 낯선 곳에 있으니 그 노엘프가 자신을 데려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흰 천으로 둘둘만 옷 같지 않은 옷을 입은 용악은 천을 질질 끌면서 문을 열고 나갔다.

휘이잉

용악의 눈앞에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메마른 사막의 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에 그의 긴 흰머리가 휘날렸다.

‘흰머리....?’

용악은 갑자기 자신의 머리가 흰머리로 변한 것에 놀라면서도 조급해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지만 노엘프가 모든 것을 알려줄 것 같은 막연한 믿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사방을 바라보자 온통 금빛의 모래만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고 바로 앞에는 오아시스의 수면이 바람에 밀려 흔들리고 있었다.

‘오아시스라... 금빛 모래라면 중원의 서쪽 사막까지 온 건가...’

“이리와라 이놈아!”

용악은 또 다시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해 살짝 놀라며 건물 저편 오아시스의 옆에 세워진 곤제국 형식의 정자에 앉아 있는 노엘프를 바라보았다.

노엘프는 기다란 곰방대에 무언가를 넣어 피고 있었는데 용악이 맡아 본 적이 있는 살담배 냄새가 아닌 약초 타는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우우...

용악이 정자에 앉자 노엘프는 연기를 뿜어내고서 용악에게 조용히 말을 했다. 마치 용악이 무엇을 궁금한지 꿰뚫어 본 것처럼, 지옥문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근조근 설명을 했다.

‘지옥... 망자의 왕이라니 그런 존재가 실제 한다는 말인가?!’

용악은 노엘프의 말에 깜짝 놀라 충격에 빠졌다.

내력을 사용하고 귀신이나 다름없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망령을 느껴온 용악이지만 다른 세계의 지옥. 그 중에서 망자지옥의 왕이라는 존재를 쉽게 이해하긴 어려웠다.

“네 놈이 쉽게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으니 너무 고민하지마라. 넌 당분간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내 나중에 다 설명해 줄 테니.”

탁탁.

노엘프는 그렇게 말을 하고서 곰방대를 털어 약초를 덜어내고서 알 수 없는 눈으로 용악을 바라보았다.

용악은 인간의 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그 눈동자를 보며 뭐라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여 자신을 살려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됐다. 이놈아. 네놈 때문에 고생한건 내가 아니라 9대신전과 동방10도의 많은 사제들이니 내가 감사를 받기는 민망하구나.”

노엘프는 그렇게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끙차.”

“...”

“내일 부터 바쁠 테니 오늘은 쉬어라. 쉴 곳은 내가 일어났던 그 곳이다. 그리고 내가 시키기 전까지는 운기는 할 생각도 말고. 그럼 가서 쉬거라.”

노엘프의 말은 마치 주술의 주문과도 같아 용악은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물음과 의심, 고민을 묻지도 못하고 그저 자리로 돌아가 잠에 들었다.

*****

다음 날부터 용악의 일상은 그가 생각했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일상이 시작되었다.

용악과 노엘프가 살고 있는 건물은 짙은 황토색 벽돌로 지어진 객잔이었다.

오아시스 바로 옆에 지어진 4층 건물은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탑처럼 보여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끌게 생겼다.

“이제부턴 네가 이 객잔을 맡아라. 다 네놈 잘되라고 하는 일이니 군소리 말고.”

아침에 일어난 용악이 노엘프에 들은 말이었다.

어처구니없는 그다.

허나 손님하나 없는 이 객잔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공손히 물었고 노엘프는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청소하기.

요리재료 다듬기.

유랑악사를 대신하기 위해 악기 배우기.

양과 닭을 비롯한 가축 돌보기.

혹시 모를 손님들을 위한 대장간 유지하기.

용악은 의도를 이해할 수 없는 그 일을 시키는 대로 시작했다.

한 동안 객잔을 유지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는지 객잔의 일은 하루꼬박해도 부족할 정도로 많았다.

가축들 역시 이곳으로 끌려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지 항상 낯설어 하며 용악을 피했기에 말하지 않아도 그의 뜻을 알아듣던 백풍이 그리웠다.

백풍은 용악이 지옥문에 들어오기 전에 돌려보냈기에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아쉬움도 잠시 오히려 자신을 따라 지옥문에 들어오지 않아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용악이다.

어딘가에 있을 백풍의 모습을 한 번 그려본 용악은 일을 마치고 이름 모를 노엘프가 앉아 있는 정자로 걸음을 옮겼다.

노엘프는 객잔이 걱정도 되지 않는 지 용악에게 맞겨 두고서 무언가를 준비하러 간다고 말하고는 여러 날을 떠돌아다니다가 오늘에서야 도착했고 돌아 오지마자 용악에게 일을 마치고 정자로 오라고 말했다.

노엘프의 모습은 그 동안 보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잔뜩 긴장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정자의 주변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마치 창처럼 생긴 거대한 붓으로 붉은색 주사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는데 용악은 그것을 봐도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용악은 노엘프를 방해하지 않고 떨어져 그것을 바라보다 작업을 끝낸 노엘프가 자리에 앉자 정자로 올라갔다.

“에구구... 이 나이에 이 고생이니... 쯧쯧.”

뻐끔뻐끔

노엘프는 용악을 보며 그렇게 말을 하고서 예의 그 곰방대로 연초를 피웠다.

“거 자리에 가서 앉아라.”

노엘프는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눈으로 자리에 앉은 용악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용악 역시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통해 노엘프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 했다.

‘마음의 정리는 다 했느냐?’

‘편해지긴 했으나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할 것이다. 함께한 이들을 잃은 슬픔이 어디 가볍게 사라지겠느냐’

‘...’

‘증오와 분노도 사그라졌느냐?’

‘모르겠습니다. 허나 전과 달리 망령들이 들러붙지 않아 이런 고요함이 오히려 낯설 뿐입니다.’

‘그렇구나. 아직 시간이 많으니 좀 더 지내보면 나아지겠지.’

‘...’

용악은 마치 머릿속에서 노엘프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생각이 들어 놀랐다.

허나 흔들림 없는 노엘프의 눈빛을 보자 이 알 수 없는 고수라면 생각만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겨나는 듯 했다.

“오늘은 옛 이야기를 해주마. 네가 궁금해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하고...”

“...”

노엘프는 정좌를 하고 앉은 용악을 보지도 않고서 다 새로운 연초를 곰방대에 집어넣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어떤 역사서에도 적혀져 있지 않은 비사(祕史) 중에 비사를

“언젠지도 모를 옛날. 서대륙에서 동물의 머리를 한 이종족들이 동대륙으로 넘어왔다. 그들은 지금 너희들이 사용하는 무공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너희들이 존경하고 신으로 칭송하는 초대황제와 함께 동방제국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들이 처음 동대륙에 왔을 때, 동대륙은 혼란 그 자체였다.

대륙 여기저기에서 동대륙인들이 무리지어 어디선가에서 나타났고 수많은 요괴와 마물들이 떼 지어 다니며 싸우고 있었다.

그 뿐이랴.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힘에 의해 인간들뿐만 아니라 요괴와 마물들도 인외(人外)존재로 변하던 시기였다.

초대황제와 서대륙에서 넘어온 이들은 동대륙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거대한 마법이자 주술이자 신들의 비의를 펼치기로 했다.

그들은 서대륙에서 룬마법이라 부르는 마법에서 실마리를 얻어 룬어라 불리던 마법의 언어를 변형시켜 동방제국의 언어로 만들어 동대륙인들에게 전수했다.

말은 있었으나 통일된 글은 없었던 동대륙인들은 새로운 언어를 환영하며 초대황제를 칭송했다.

그렇게 뜻글자로 이루어진 너희 동방제국어가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가자 동대륙은 강력한 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마법을 위한 언어인 룬어에 바탕을 둔 동방제국어는 동대륙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마법과 주술에 무지한 인간들이지만 수억 명의 의지가 말과 글을 통해 동대륙을 뒤덮자 초대황제는 동대륙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마법진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서대륙이나 중앙대륙에서 몬스터라 부르는 요괴나 마물들이 동대륙에서 사라져 간 것이다.

그 뿐이라 이 거대한 결계는 인간이 번영해 갈수록 더욱 강대해져 다른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힘 역시 억눌렀다.”

“...?”

잠시 말을 끊고 뻐끔뻐끔 곰방대를 피우던 노엘프는 용악을 잠깐 보고 말을 이었다. 마치 용악의 머릿속을 살펴보는 눈길이었다.

“그래 네 놈이 궁금해 하던 지옥이라는 곳과 같은 세계의 힘이 이 세계로 흘러나오는 것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막지 못한 다른 세계의 힘의 통로는 수많은 주술사와 비의를 익힌 선인들에 의해 봉인되었고 그들로도 막지 못한 강대한 힘의 통로에는 신전을 세워 외인(外人)들의 방문을 막았다.”

“...”

‘설마??’

“그래. 그곳이 너도 익히 아는 중원의 9대신전과 동방의 10도라는 신전이다.

너희들이 그저 무공의 본산이자 주술과 도술의 본산으로 알고 있는 것은 9대신전과 10도의 껍데기니라. 그 신전의 본진은 다른 세계의 신들의 힘이 동방대륙으로 뻗어 나오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용악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말문이 막혔을 뿐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비사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가 비록 저승의 강에 한발 걸쳐 죽은 다른 이들의 기억을 얻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 대한 티끌만큼의 정보도 알지 못했다.

용악 뿐이랴.

동대륙에서 살고 있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던 비사 중에 비사였다.

“허나 동방제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 변방까지는 그 힘이 미치지 못해 다른 세계의 힘의 통로가 남아 있는 곳이 있었고 그 곳이 바로 네 녀석이 그렇게 싸우던 지옥문이라는 곳이다.”

‘그랬던가...’

용악은 노엘프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못했지만 지옥문에서 있었던 그 비현실적인 일들이 어떻게 일어  났는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네 놈이 어찌하여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힘에 물들었는지는 나도 알지 못하나 지옥문이라 불리는 그 곳에서 그렇게 피를 흘리며 증오와 분노가 타오르니 망자지옥의 왕들이 이 세계로 넘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

“믿기 힘든 사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하자. 내일부터는 또 다시 바쁠 터이니 이제 그만 쉬거라.”

노엘프의 말에 용악은 또다시 최면이라도 걸린 듯 상념을 접고 방으로 돌아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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