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영 기병대-99화 (99/107)

99장. 최후. 비사 5

보고서 번호 : 3

보고서 일자 : 제국력 1348년 1월 2일

작성자 : 제갈소문

보고서 제목 : 흑영기병대, 흑영기병대장 용악

내용 : 흑영기병대와 놀족간의 결투는 양패구상으로 끝이 났습니다. 신임대장 용악의 첫 번째 전투는 ..... 중략 ..... 용악의 명령을 무시한 채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하던 흑영기병대는 파곡에서 몰살당할 뻔했으나 제 시간에 도착한 용악 덕택에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중략 ... 용악은 무난하게 적군을 몰아쳤고 놀족은 그레이엘프족과의 전투로 인해 흑영기병대에게 집중을 할 수 없었습니다.

.... 중략 .... 지옥문에 놀족을 몰아넣은 흑영기병대가 마무리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온 순간. 지옥문에 매설되어 있던 화약이 폭발하여 지옥문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조비대장군의 부하들이 미리 매설해 놓은 화약과 황도수비군에서 차출해 간 포병대로 보여 집니다.

조비대장군에 협력한 다른 장군 및 군기창의 조정대신들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 중략 .... 흑영기병대의 대원들과 놀족 모두 몰살 되었으며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불길이 잡히지 않고 있기에 정확한 사상자의 수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허나 지옥문 근처에서 조비대장군의 부관인 황산과 호위무사와 대장군부 소속 친위대 수백의 시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용악이 지옥문으로 가려는 것을 막으려 하다가 용악에게 당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후 용악이 지옥문으로 갔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여지나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용악의 애마인 백풍과 용악의 무기인 귀혈쌍도 역시 지옥문에서 모습을 보이지는 않고 있으나 이는 좀 더 수사가 이루어져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옥문에서 용악과 놀족을 노리던 조비대장군 및 휘하 장군들과 대장군부 호위병들 모두 알 수 없는 폭발로 인해 사상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대장군부 내의 조비대장군 파벌에 대한 공작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지옥문 전투에서 한 가지 의문점은 대장군부 호위병들을 피해 멀리서 지옥문을 지켜보고 있던 감찰대원들이 모두가 전투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동일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제 3의 존재가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며 자세한 사항은 지금 조사 중에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조비대장군의 수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사료됩니다.

.... 중략 .... 병사들을 잃은 적 놀족은 그레이엘프와 오크 및 다른 이종족의 노예로 팔려갔고 그 중 그레이엘프족은 우리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 한 동안 놀족의 준동은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허나 최근에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곤제국의 강습기마대 - 백룡단이 그들을 정벌하러 갔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빠른 시일 내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보고서를 다 읽은 사내는 한쪽 구석에서 은은하게 타오르는 벽난로에 보고서를 던져 집어넣었다.

얇디얇은 한 장짜리 보고서였지만 보고서는 흔들리지도 않은 채 비도처럼 일직선으로 날아가 벽난로에 쳐 박혀 서서히 검은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시대는 빠르게 변해 버렸지만 왕이 되지 못한 영웅의 최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군... 용천 자네나 자네 아들 용악이나 말이야. 이런 일을 꾸민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게. 이 모든 것은 그대가 말하던 천하 만민을 위한 일... 적어도 자네가문의 복수는 해주겠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벽난로의 온기마저 몰아내며 방안을 맴돌았다.

*****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

동대륙과 서대륙을 이어주는 거대한 사막

오크족과 놀족, 그레이엘프족 등 수많은 이종족이 패권을 다투는 곳.

그 광활한 사막 한 가운데 위치한 작은 오아시스

그 오아시스를 향해 한 인형이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피에 젖은 새하얀 머리칼은 이리저리 뭉쳐 엉망으로 흩날리고.

얼굴을 뒤덮은 녹색안개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푸른불꽃

짙은 녹빛의 비늘과 상처투성이인 다른 한 손은 피로 물들고.

이리저리 찢겨진 갑옷

허리춤에 덜렁거리는 두 자루의 도

기기묘묘한 모습을 한 괴인이 오아시스 속으로 점점 침전해갔다.

시간의 흐름이 멈춰진 그 곳에서 그는 서서히 눈을 떴다.

무슨 일이 었었는지.

지옥문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상황에서

기억나는 단 한 가지.

허공을 나는 네 장의 날개.

어둠을 흔드는 거대한 날개.

십자의 모양의 흉터

녹색의 눈의 푸른 불꽃

“으아아아아아!!!!”

그는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온 몸에서 그동안의 고통을 뿜어내고 있었고

머릿속으로 과거의 일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나는!

내 이름은...

그는 가까스로 자신의 이름이 떠올랐다.

내 이름은 용악...

하나의 단어가 떠오르자 다른 단어들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용천. 서축. 폭풍기마대. 모래바람.....

서서히 바다 속 깊숙이 숨어 있던 기억 들이 다시금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치 그물을 바다 속 깊이 집어넣어 놨다가 꺼내는 것처럼.

그 그물에 걸린 기억들이 서서히 물 밖으로 끌러 나왔다. 군무관, 사관관. 해적, 불귀도, 중경, 무계

계속해서 머릿속에 지난날의 기억들이 점점 떠오른다. 그가 경험하지 않은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그 그물에 걸려 다른 이들의 기억도 같이 끌려 올라온다.

저승의 강...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기억들을 감상했다.

천황기갑단.

오크족.

오크족의 왕 도마후악토!

흑영기병대.

놀족

그리고 놀족의 왕 도르트막!

그리고 그 다음은?

헤엄치듯 날리는 어둠...

다음 기억을 떠올리자 그의 몸에서 갑자기 어둠이 튀어 나왔다.

입이 저절로 열리며 신음이 터져 나온다.

“아...아...”

“그..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망령이 바로 나였나!?”

“으아아!!!”

용악은 가슴 속에서 끓어 올라오는 외침을 멈추지 않고서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

아니. 이미 어두운 밤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둠 속의 어둠이다.

어둠을 꿰뚫는 눈을 가진 용악이지만

지금... 이 어둠 앞에서는 어둠을 꿰뚫는 그의 눈마저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아이야 지금은 어떠냐...?”

그리고 음성이 들렸다.

어디서 흘러나오는 지도 모르는

그 음성의 주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린아이이니 노인인지 모를 음성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누구냐! 너는... 모습을 드러내라!’

용악의 궁금증을 무시한 채 그 존재는 방금 했던 물음을 다시금 그에게 던졌다.

“그래서... 아이야 지금은 어떠냐... 아직도 분노와 증오가 너를 지탱하느냐?”

그의 물음은 용악의 심혼을 흔들었다.

용악은

그가 누구인지!

왜 갑자기 나타나 자신에게 이러는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용악의 입은 생각과 다른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의 물음은 결코 벗어 날 수 없는 절대 진리

그가 묻는다면 용악은 대답을 해야 했다.

그 지옥 같은 고행 속에서도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절대적인 존재.

너는...

신인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용악은 자기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스스로 놀라면서도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세상이 저에게 어째서 이런 시련을 주는 것 인지 모르겠습니다.인간이냐고 물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이런 제 모습이 어찌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이 어찌 인간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저는 인간이고 싶습니다.”

용악은 말을 마치고 잠시 쉬었다.

후읍....

크게 숨을 쉬어 공기를 들이 마시고 뱉어냈다.

아까는 그의 질문에 의해 저절로 대답을 했다면 지금은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말.

자신의 마음속에서 잔뜩 숨겨 두었던 말.

저 존재라면...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왠지 모르지만 근거 없는 믿음이 생긴다.

저 존재라면 그의 말을 듣고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것이다!

“증오와 분노가 저를 지탱 하냐고 물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조비대장군에 대한 증오가 과연 제대로 된 증오인지, 아버지의 죽음을 과연 조비 탓으로 돌려야 하는지, 저를 사지로 몰아넣은 조비를 증오해야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분노는 크고도 커서 조비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까 걱정됩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남긴 유언을... 그 유언을 지켜야 하는지 아니면 복수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습니다.

어째서 내가 이렇게 인형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지. 또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것에서 벗어 날 수 있음에도 어째서 벗어나지 않고 이렇게 계속해서 피를 마시며 살아가야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비도, 여민도, 곽철도, 유천도, 호표기도, 흑영대원들도, 도르트막도!

모두 그들의 기준으로만 저를 파악했을 뿐이지 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저 역시 저의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그들을 움직이려 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 입니까!”

용악은 격한 감정을 어김없이 뿜어내며 푸른 불꽃이 허공이 흩날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이것의 저의 속마음입니다.

저에게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이라면.

우리가 믿는 신이라는 존재가.

당신이라면.

“너의 인생은 너의 것.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그러니.”

“이제.”

“그만.”

“쉬어라.”

또 다시 어디선가 흘러나온 그 말에 용악은 반 쯤 잠긴 오아시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오아시스에 쓰러진 그를, 한 명의 드래곤과 한 명의 노엘프는 용악에게 펼친 비의(秘儀)를 끝내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드래곤이 입고 있던 찬란하게 빛나던 황금갑옷은 이제 빛을 잃어 잿빛을 띄고 있었다.

낡은 무명옷을 입은 노엘프가 존경을 담은 모습으로 드래곤의 뒤에 서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망자의 씨앗이 꽃이 피는 것은 막았지만 그래도 타고 남은 씨앗의 재가 남았구나.”

“예.”

드래곤은 강철같이 단단하게 꼬고 있던 양팔을 풀고서 하늘을 한 번,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한 번, 마지막으로 오아시스에 떠 있는 용악을 보았다.

“...”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망자지옥의 왕들의 선택을 받은 자라면 차라리 지금...”

노엘프는 그렇게 말을 하다 드래곤이 고개를 흔들자 입을 다물었다.

“저 아이를 없애면 오히려 망자지옥의 왕자가 탄생하는 것을 도와주는 꼴이다. 인세(人世)에서 지옥의 강에 발을 담그고 마인의 길을 걷던 아이다. 이미 비인마도의 길에 빠진 자. 그를 죽인다면 망자의 지옥으로 끌려가 오히려 여기서 강림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존재로 강림할 것이다.”

“...”

“그 일의 여파가 얼마나 될지는 내 눈에도 읽히지 않는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문제는 아니나 내가 이 일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

노엘프는 드래곤의 말에 깜짝 놀라면서도 조용히 시립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드래곤은 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신적인 존재

반신(demi-god)으로서의 영성을 얻고 외계의 왕들로부터 이 세계를 지켜온 존재

그런 존재가 읽어낼 수 없는 일이라면...

비록 그가 해결할 수 있다곤 허나 큰 문제임이 분명했다.

“지독한 수라의 장에서도 인간이 되고 싶어 발버둥 치던 아이이니.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돕거라. 그게 이 세계를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 일터.”

“...”

“오아시스 주변으로 결계를 쳐 놨으니 이곳에서 아이를 가르치거라. 망자 지옥의 향(香)을 없애려면 그와 반대되는 신들의 힘을 얻게 하는 것도 도움이 될 터...”

“...”

“네가 알아서 잘 하리라 믿는다. 아이가 준비가 된다면 스스로 신들의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거라. 그것이 아이를 지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 길이다.”

“뜻대로 하겠습니다.”

노엘프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고 대답을 들은 드래곤은 용악과 노엘프를 다시 한 번 바라보고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이름 없는 사막.

이름 없는 작은 오아시스에서

용악이 알지 못하는 그의 운명이 또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