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장 비사 4
흑영기병대와 놀족이 지옥문에서 싸우기 며칠 전.
눈이 부시도록 온통 하얀 것으로 가득 찬 곳.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어지고 차원과 차원의 경계가 모호해 지는 곳.
백산.
그 백산에 백여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자신들 주위를 떠도는 정령들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정령들과 함께 인덱스(Index- 경전(經典)을 모아놓은 책)를 펼쳐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다른 차원 계에서 넘어온 호랑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호랑이는 투명하게 생겨 겉으로 보기에는 형체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움직이면 햇빛에 반사되어 푸른색 줄무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 했다.
그분에 의해 허락을 받아 이곳에 머물고 있는 동대륙에서 9대신전과 동방10도라 불리는 곳에서 온 주술사와 마법사들이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허공에서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그 새는 학처럼 생겼으나 학보다는 수배는 컸고 부리와 깃은 황금빛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영물이 누구의 말을 전하는지 알고 있는 9대신전의 대사제들과 곤제국에서 온 주술사들은 서둘러 영물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쩐 일로 그분은 안 오시고 선생께서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과거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곤제국 노인 주술사가 공손하게 학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건넸다.
“그 분께서 말하길 속히 사람을 모아 지옥문으로 오라고 했다.”
“예?”
“지옥문이라 하셨습니까?”
머리에 6개의 계인을 한 사제, 한제국에서 소림신전이라 불리는 곳에서 온 사제가 공손하게 물었다.
“그 분께서 지옥문이라고 말을 하면 알 거라고 했는데 설마 모르고 있나?”
“흐음.. 지옥문이라..”
소림사제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생각을 거듭하자,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곤제국 사람인 듯 곤제국 양식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주술사나 마법사들의 복장이 아닌 곤제국 장군들이 입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지옥문이라면 제가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유성이 떨어졌던 곳 중에 하나인데 놀족과 그레이엘프들이 지옥문이라고 부르는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호리병 모양으로 움푹 파인 곳이 아닌지요?”
“맞다. 내가 날아오면서 봤는데 그렇게 생겼다.”
곤제국 장수의 말이 맞는지 학은 커다란 날개를 마치 박수치듯이 부딪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했다.
“지금 당장 오라고 했다. 늦으면 큰일 난다고 했으니 바로 출발해야한다.”
“알겠습니다. 다들 준비는 되어 있으니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요. 선생께서는 어찌 하실지?”
“난 부탁받은 일이 하나 더 있어서 그곳으로 가봐야 한다. 너희들 끼리 가보도록 해라.”
학은 그렇게 말을 끝마치자마자 거대한 날개를 회쳐 하늘로 날아올랐고 각 신전의 대사제들은 품속에 가지고 있던 신물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서둘러 말에 올라 길을 떠났다.
“정녕... 지옥의 문이 열리는 것인가...”
*****
거대한 체구의 사내.
동대륙의 명성 높은 주술사들과 마법사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내.
그 분이라 불리는 그는 물끄러미 자신의 발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처절한 투쟁을 바라보았다.
한 떼의 인간들과 놀족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마치 꼬리를 무는 뱀처럼 두 무리는 끊임없이 싸우며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지옥문이라... 왜 이런 곳을 그동안 모르고 있었을꼬.”
그는 그렇게 말을 하고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을 이었다.
“운명이란 참으로 질기 디 질기군. 크고 큰 천하의 한 귀퉁이의 작은 섬에서 뿌려진 지옥의 씨앗이 결국 이런 변방의 오지에 있는 지옥의 문까지 와서 꽃을 피우는가.”
사내는 항상 입고 다니던 품이 넉넉한 곤제국식의 의복이 아닌 서대륙의 오래 된 기사나 입을 법한 온몸을 가리는 금빛 갑옷을 입고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내의 등 뒤에는 그 사내가 아니면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양손검이 검 집도 없이 검만 달랑 매달려 있다.
양손검에는 눈으로 보아서는 무슨 글자인지도 모를 정도로 미세한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푸른색과 자줏빛이 그 음각된 문양을 따라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수백년이 지났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그대로군...”
사내는 지옥문이라 불리는 곳 주변에 싸우고 있는 두 무리와 다르게 이질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한 떼의 인간들을 보고서 혀를 차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지옥문이라 불리는 협곡 꼭대기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치열하게 싸우던 두 무리는 점점 지옥문이라 불리는 호리병 지형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 쪽에서 한 떼의 기마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바로 그가 기다리던 9대신전과 동방10도의 주술사들과 도사, 마법사들이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오는군.”
사내는 그렇게 말을 하고서 주술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물리적 영역인 피지컬계, 내공과 마법, 주술의 영역인 에테르계, 정신과 존재의 영역인 아스트랄계를 넘나드는 그의 시야에 거대한 증오와 망령에 잠식되기 일보직전인 한 인간이 눈에 들어 왔다.
짙은 녹색의 안광 속에서 푸르게 불타는 망령이 보였다.
“이미 상당부분 진행이 된 상태군. 역시 저 녀석이 왕자의 후보자 인가...”
사내는 그렇게 말을 하고서 등 뒤에 있던 검을 꺼내 서서히 주문을 외우며 검에 각인되어 있는 마법을 발동시킬 준비를 했다.
그가 그렇게 준비를 할 때 때맞추어 도착한 도사, 주술사, 마법사들은 모두들 고개를 깊이 숙이며 공경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늦어서 죄송하옵니다.”
“아니다. 늦지 않았다. 서둘러 성역을 칠 준비를 해라.”
“성역 말이옵니까?”
사내의 말에 곤제국에서 온 노인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반문을 하고 말았다.
성역은 말 그대로 신의 신물(神物)을 이용해서 신의 힘을 불러와 신의 권능을 행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평상시에는 감히 행할 수도 없는 수준 높고 제약 많은 주술이었다.
‘그만큼이나 지옥의 왕들의 힘이 강하다는 것인가.’
“너희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 궁금해 하지 말라. 일단은 어서 성역을 칠 준비를 하라. 일이 이 정도까지 진행되었으니 신물들도 모두 사용할 수가 있을 것이리라.”
“예.”
어느 날 부턴가 기이할 정도로 강대한 힘을 내뿜는 신물의 존재로 인해 무언가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막연히 예상을 하고 있던 그들은 그 사내의 말을 듣고 신물이 힘을 되찾은 일이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과 관계있음을 깨닫고 서둘러 작업을 시작했다.
소림신전에서 나온 18명의 사제들은 기이한 문양이 그려진 목봉을 쥐고서 주술진을 펼쳤다.
화산신전에서 나온 32명의 사제들 역시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검을 들고 주술진을 펼쳤다
무당신전에서 나온 7명의 사제들 역시 별자리를 따라 발을 옮기며 주술진을 펼쳤다.
곤륜, 청성, 공동, 아미, 점창, 천산신전의 사제들도 각자의 진을 펼쳐 성역을 만들 준비를 했다.
주술진 가운데 각자의 신물을 가운데에 놓고 성역을 만들 준비를 하는 동안 협곡 안에서의 전투는 계속 되었고 어느 순간 거대한 폭발음과 밖에서 셀 수 없이 쏟아지는 포탄과 함께 협곡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라. 이곳은 내가 손을 써 놨으니 성역을 만드는데 집중해라. 이제 곧 강림이 시작될 것이다.”
난데없는 폭발음에 놀란 그들이 잠시 집중력이 흩어지자 사내는 그렇게 말을 하고서 미리 준비해 놓았던 마법을 발동시켰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한 바람이 그들 주변을 훑고 지나가자 사정없이 몰아쳐 오던 그 폭발의 여파가 그들 앞에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렇게 그들이 성역을 모두 완성했을 때 협곡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협곡을 가득 매운 그 검은 안개와 망령덩어리들은 먹이를 낚아채는 맹수마냥 사방으로 튀어나가며 무너져 내린 협곡 위로 튀어 올랐으나 성역에 가로 막혀 튕겨져 나갔다.
요괴퇴치를 비롯해 다른 세계의 존재들에게 익숙한 도사, 주술사, 마법사들이었지만 이처럼 지독하고 무서운 망령들과 기운은 처음이었기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각자의 경전을 소리 내어 외웠다.
그렇게 망령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동안에도 용악이 가지고 있던 2자루의 도....
지옥의 왕들이 그들의 왕자가 될 후보자에게 주는 축복 받은 무기이자 동시에 저주받은 무기가 빙글빙글 돌며 소환마법진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서서히 지옥의 왕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주술사들과 마법사들은 한층 강해진 망령들의 오염된 사념파에 깜짝 놀라 품속에 가지고 있던 부적과 보패, 마법스크롤을 아낌없이 사용하며 성역을 견고하게 유지시켰다.
‘역시 화신체군...지옥 중에서도.. 망자들의 지옥. 스올(Shole)인가.’
사내는 성역을 구축해 지옥의 왕들의 기운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외우고 있던 주문을 마무리 지었다.
그가 주문을 마치자 그가 들고 있던 검은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영롱한 빛을 뿜어내었다.
그 빛은 마치 태양과도 같아 눈으로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내는 품속에 가지고 있던 전에 한 번 꺼낸 적이 있던 자명종처럼 생긴 기계를 꺼내 무언가를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신들이 허락하는군. 계속 성역을 유지하고 있어라.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마무리를 짓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검은 갓을 쓴 노인은 이마에 땀을 송글송글 흘리면서도 걱정스러운 말투로 사내에게 말을 했다.
그 노인도 지금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신물을 이용해 성역을 만든 것처럼 저 밑의 협곡에서도 피에 물든 두 자루의 도에 의해 지옥의 왕들의 성역에 만들어 졌다는 것을.
“걱정하지마라. 금방 끝날 테니 최대한 망령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라.”
“예.”
사내는 그렇게 말을 하고서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이라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검을 협곡을 가득 덮은 검은 안개를 향해 집어 던졌다.
사내가 던진 그 검.
차원을 찢는 검.
갸르트라벨.
동대륙의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 먼 옛날의 마도시대에 만들어진 그 검은 9대신전과 동방10도의 성역은 물론이거니와 망자의 왕들의 성역까지 찢어 발겼다.
사내는 그 찢어진 틈 사이로 한 점 머뭇거림도 없이 몸을 날렸다.
사내가 던져버린 검.
갸르트라벨은 성역을 구축하고 있던 2자루의 피의 검과 정확히 충돌하며 망자의 왕들을 지탱해 주던 소환진을 없애 버렸지만 망자의 왕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힘을 개방하고 있었다.
강대한 마력장이자 망자의 왕들의 힘이 자신의 몸을 강타하는 것을 느낀 사내는 자신 스스로에게 걸어두었던 마법을 거두어 들였다.
그러자 황금빛 갑옷은 서서히 그의 몸속에 스며드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이 났다.
그와 동시에 4장의 황금빛 날개가 어둠을 움켜잡고 몸을 일으켰다.
4개의 황금빛 뿔에서 빛이 흘러나와 자신의 위에서 날아다니는 망령들은 모조리 녹여버렸다.
그의 입이 열리자 그 어떤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검은 빛을 뿜어내는 이빨들이 드러났고 그의 앞에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쿠쿠하하!!!!
협곡을 감싸는 어둠과 망령들이 그 포효에 맞추어 흔들린다.
50미르가 넘는 그의 본체가 서서히 어둠 속에서 드러나자 그의 강대한 힘이 흘러넘쳐 주체하지 못하는 마력들이 물리력으로 변해 그가 까마득히 높이 떠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래에 있는 땅들이 포탄이라도 맞은 듯 함몰했다.
그가 자신에게 걸어둔 금제마저 풀어버리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자 망자의 왕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우리의 의식을 방해하는 것이냐! 이것은 유일한 분(The One)께서도 허락하신 우리의 의식이다. 그것을 감히 방해 하겠다는 것이냐!”
“유감이오. 망자의 왕들이여. 하지만 이 세계는 타차원의 왕들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오. 그것은 신들의 규칙. 그것을 어길 생각이시오?”
드래곤의 입에서 용언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용의 언어의 힘을 빌린 마법.
그 어떤 주문보다도 강력한 그의 용언이 터져 나오자 망자의 왕들은 그 힘에 밀려 흔들거리면서도 계속 힘을 방출하면서 소리쳤다.
“신들의 규칙에 따라
우리는 씨앗을 뿌리고
꽃이 피면
수확한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
설령 그 씨앗이 이 세계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포기 해야만 하는 것인가!”
“미안하오. 돌아가 주기를 부탁하오. 다른 세계에서 다른 왕자의 재목을 찾으시오.”
다시 한 번 그의 입에서 용언이 터져 나왔다.
그의 주위에 있던 공기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땅 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휘청거리게 만들고
굳게 박혀 있는 나무들은 흔들리며
땅 속에 박혀 있는 바위들이 땅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의 외침만으로 성역을 두드리던 망령들이 녹아내렸다.
“그럴 수 없다!
이 아이와 같이 순수한 분노와 증오를 어디서 다시 구할 수 있다는 말이냐!
포기 할 수 없다.”
“정녕 그렇다면...”
말을 마친 드래곤의 온몸에서 수많은 마법 문양 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천상계의 천사들이 사용하는 신력부터 지옥. 게헨나와 어비스의 악마들이 사용하는 마력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의 문양이 동시에 빛을 발하면서 황금빛의 그의 몸이 더욱 밝아졌다.
그렇게 조금 지나자 그는 어두운 우주 속에 떠있는 태양 마냥 홀로 빛을 내며 그의 푸른색 눈동자만이 남아 허공에 뜬 채로 무시무시한 눈으로 지옥의 왕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둡던 공간이 그의 뜻에 따라 흔들리며 어디선가.
아니.
모든 곳에서 마법의 언어가 터져 나왔다.
“나는!!!
이 세계에 남은 유일하고 진실 된 마지막 드래곤.
수많은 신에게 이 세계를 지킬 권한을 위임받은 자.
신의 이름으로 명한다.
지옥의 망자들의 왕들이여.
스올(Shole)의 왕들이여.
이 땅에서 사라져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온 세상을 뒤덮은 어둠이 지옥문 안으로 쏘아지듯 들어갔고 망자들의 왕은 절규의 외침과 저주를 내뿜으면서 강제로 소환이 깨지며 스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여파로 이미 엉망이 되어 버렸던 지옥문이라 불리던 협곡은 더욱더 완벽하게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 지옥문 위에서 용악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포탄을 쏘아대던 조비대장군도, 항도수비군의 포병대는 물론이고, 포격에도 살아남은 흑영기병대원과 놀족들을 죽이기 위해 준비한 수백의 대장군부 병사들 모두 집어 삼키면서...
그 파괴의 공간에서 살아남은 건 오로지 드래곤이 펼쳐놓은 결계에 있던 주술사,도사, 그리고 마법사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