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장 vs.도르트막
눈발이 사납게 평원을 몰아쳤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먹구름은 사정없이 눈을 떨어뜨리기 시작했고 마지막 전투를 축하라도 하듯 갑작스럽게 불어온 바람은 그 눈들을 사방으로 휘날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대지의 양쪽으로 거대한 기마집단이 대치하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친 눈발 속에서도 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사내의 녹색의 눈은 저 멀리 있는 놀족들이 보기에도 뚜렷하게 보였다.
그 녹안의 사내는 천천히 말머리를 돌려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대원들이 움찔 하는 것이 느껴졌다.
쿵.
쿵.
쿵.....
대원들은 서서히 자신의 심장이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호오오오.......
바람이 자신들의 기세에 밀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후읍.......
크게 심호흡을 하자 폐 속 가득히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녹안의 사내.
전투의 마왕은 하나도 남김없이 대원들을 모두 바라본 다음에 말머리를 돌려 적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의 입에서 고저 없는 낙막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주성무와 왕호는 1차 접전 후 작전대로 움직이도록!”
“예!”
두 부장의 대답을 들은 용악은 옆에 끼고 있던 투구를 양손으로 들어 서서히 자신의 머리에 씌우며 모든 대원들이 다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소리쳤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이면 우리는 지옥에서 벗어나 장성넘어 집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쓸데없이 지옥에서 죽지마라!”
우!!!!
오!!!!
대원들 모두 투구를 눌러쓰며 창을 쥐고 있는 손을 하늘 높이 들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것이 마지막 전투이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이제 벗어난다!
이 전쟁을 반드시 승리하게 만든다!
우리를 이끄는 자는 전투의 마왕!
이곳은 이제 그의 땅이 된다!!!
“전군(全軍)! 진군(進軍)!”
쿠콰콰
콰코카
2갈래로 나누어진 검은 물결들이 저 멀리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놀족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은 그들의 기세에 밀려 오히려 하늘위로 다시 올라가고 있었고. 그들의 말발굽을 따라 흰 눈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드디어 시작이다!
그들의 마지막 전투가!!!
흰 눈을 배경삼아 2개의 검은 색의 물결은 거침없이 서로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진형도.
전술도 필요 없다.
오로지 정면 승부!!!
와아아아!!!
콰아!!
서로의 함성의 서로의 귓가를 때린다.
서로의 창이 서로의 창을 때린다.
서로의 피가 서로의 피를 뜨겁게 달군다.
지금.
이곳은 전장.
이곳이 바로 대장의 땅.
우리는 이곳에서 절대 죽지 않는다.!!
“와아아아!!!”
주성무는 다른 대원들과 함께 놀족의 선발대를 사정없이 몰아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칼에 한명씩 베어 넘기고 한 발짝에 한명씩 밟아 넘기며 앞으로 전진 한다!
“전투가 시작되면!”
적군의 얼굴에 녹안의 눈동자가 떠오르면서 대장의 모습이 투영됐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한 명령들도 함께 떠올랐다.
“어설픈 유인책 따위는 통하지 않도록 전력으로 놈들의 선발진을 격파하고 적 본진 까지 단숨에 몰아 붙여야 한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우리에게 끌려올 수 있도록!”
대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과 왕호를 바라보았다.
‘유천. 적조부는 대장과 함께하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래야 수가 맞겠군. 그래.’
“놈들의 선발진을 최대한 빨리 무너뜨리는 것이 이번 작전의 희생을 최소로 줄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라!”
“야아아압!!”
주성무의 입에서 거친 함성과 함께 입김이 마치 연기처럼 뿜어져 나온다!
나를 막지 마라!!!
창을 커다랗게 휘두르며 적군을 몰아쳐 간다.
적의 창날마저 자신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쳐 내버리고 적에게 달려들어 적의 손을 갈라 버린다.
적의 기마의 목을 떨어뜨려 버린다!
“뚫었다!! 놈들의 흩어지기 전에 전력으로!”
주성무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적군을 바라보며 잠깐 뒤를 돌아 대원들을 격려 했다.
선발진을 뚫었다.
이제 본진을!
‘억! 이것은.’
주성무는 얼핏 바라본 놀족들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녀석들! 기다리고 있었나?’
놀족은 선발대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선발대를 무너뜨린 주성무와 흑영대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창이 그들을 향해 날아 왔다!!
“큭.. 제길...”
“뭐하고 있는 거냐. 주성무! 그대로 죽을 작정이냐!”
후욱.! 퍼억!!
‘누구! 누가?’
주성무는 갑자기 자신의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붉은 색의 기가 넘실거리는 창이 자신을 노리던 창들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창을 넓게 잡고 양쪽으로 한번 씩 휘두르자 놀족들이 사방으로 퍼지며 날아간다.
엄청난 신위!
적의 기마마저 그 창에 맞아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 버린다!!
한 차례 창을 휘둘러 자신만의 공간을 만든 녹안의 사내는 창을 들어 적군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유령들이여! 속도를 늦추지 마라!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잊었는가!”
“우와아아!!”
주성무는 자신을 스치며 나아가는 대원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지. 지금. 내가.’
주성무를 구한 녹안의 마왕은 그을 바라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한 눈 팔지 마라.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잊었나?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
주성무는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확 치밀어 올라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전투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너의 모든 것을 불 태워라. 지옥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네가 손닿을 곳에 있다. 손만 뻗으면 되는 걸 잊지 마라.”
“...”
“주성무! 왕호!”
“옛!”
멍하니 있던 주성무와 저 쪽에서 적군을 몰아치던 왕호가 그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말을 돌려 달려 왔다.
“이곳은 내가 맡겠다. 지금 즉시 작전지역으로 이동!”
!
‘그래... 이왕 파괴력이 줄어들게 된 것. 그가 지휘를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분위기도 반전 시킬 수 있을 것이고..’
주성무와 왕호는 그의 말을 듣고 바로 말을 돌려 작전지로 향해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주성무의 상념은 계속 됐다.
얼굴로 날아드는 차가운 눈이 자신의 집중력을 점점 높여주었다.
주성무는 떨어지는 눈을 받아먹으며 자책하며 웃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 때문에 잊을 뻔 했군.’
주성무의 머릿속에 서서히 어떤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눈에 안개가 낀 짙은 녹색의 눈.
그 녹색의 눈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
검녹색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왼손.
바로.
우리의 대장.
우리를 지휘하는 자는 전투의 마왕.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결코 질 리가 없다는 것을!
우우!!
부욱!!
푸악!!!
놀족의 왕 도르트막은 본진을 뚫고 전진하려는 흑영기병대원들을 훌륭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저곳 때문에 흐름이 끊기는 군!
대원들을 좌우로 갈라 버린 그 자
적들은 도르트막라고 부르는 자.
그 자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흥. 건방지군. 감히!!’
“!”
“백풍! 가자!”
용악의 명령을 받은 백풍은 자신의 옆으로 달려드는 적 기마를 발로 차 그 탄력으로 하늘로 뛰어 올랐다.
수십의 기마를 뛰어 넘고 하늘을 향한 수십의 창을 뛰어넘고 백풍은 정확하게 놀족의 왕 도르트막이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허나 기다리고 있던 그 자는 용악의 창을 받아낼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다.
“이야아아!”
“크아아압!”
서로의 기합이 터져 나오고 서로의 창은 정확하게 맞부딪혔다.
카아앙!!!!
그를 둘러싸고 있던 눈들이 그 충격으로 원형을 이루며 단숨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카가가각!!!
서로의 창은 한 치도 떨어지지 않고 서로를 밀어 내려 하고 있었고 그 여파로 쇠를 긁는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르트막란 자가 타고 있는 말 역시 보통은 아니었는지 백풍과 맞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서로의 몸을 부딪혀가며 싸우고 있었다.
촤아아아!!
도르트막의 창이 한번 스쳐 지나가고
쏴아아아!!
용악의 창이 한번 스쳐 지나간다.
서로의 창이 스쳐 지나갈 때 마다 말들은 계속해서 자리를 바꾸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은 허공으로 다시 올라가고 땅에 떨어져 쌓여 있던 눈들 역시 창의 궤적을 딸라 창을 타고 올라온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충돌!!!
카아앙!!!
카가가각!
다시 한 번 힘겨루기를 하자 쇠를 긁는 소리가 온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촹!
힘겨루기를 마치고 서로는 서로를 튕겨 냈다.
그리고 다시 말들은 서로 좋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몸싸움을 시작했고 그 위에 타고 있는 자들 역시 사방으로 창을 휘두르며 다시금 덤벼들었다.
용악의 창이 도르트막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지자 도르트막의 말을 알아서 옆으로 피하며 용악의 창을 피했고 도르트막은 그 틈을 노려 용악의 옆구리를 향해 횡으로 길게 창을 휘둘러 베어 갔다.
용악은 두 손으로 창을 세로로 세워 그 공격을 막아냈고 백풍은 사납게 그 말에게 달려들어 도르트막을 밀쳐냈다.
촤차장!!!
쿠아앗!!!!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그들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서로는 가만히 대치하며 그들의 승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용악의 창이 빛살과도 같은 빠르기로 도르트막의 몸을 수십 번 찔러나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도르트막의 갑옷에 용악의 창날이 닿았다.
도르트막은 그 찌르기를 다 막지 못하고 하나를 빗겨내던 중에 어깨를 허용했다.
빗겨 맞았음에도 공격이 엄청났는지 단번에 갑옷이 날아가 버리고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두 사람은 다시금 맞부딪쳤다!!
뿌악!
이번에는 도르트막의 창을 피하지 못한 용악의 옆구리 갑옷이 통째로 찢겨져 나갔다!
*****
말을 탄 3명의 사내는 전장이 한눈에 보이는 저 높은 언덕에 서서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 침묵.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군인이기는 하지만 그 전에 무인이기도 했다.
이런 결투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 자체가 이 결투에 대한 불경이다.
“...”
“잃어버렸던 영웅의 시대가 재림한 건가.”
그들 중 가운데 있는 사내를 호위하는 듯이 뒤에서 그를 보호하던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으음.”
“한 사람은 이종족 중 가장 약했던 놀족들을 하나로 모아 다른 이종족들을 몰아내며 단기간 내에 왕위에 오른 영웅!”
사내는 신음을 흘리며 저기 창을 휘두르는 사내를 바라보며 말을 멈추었다.
“또 한 사람은 역적 가문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사선을 넘나들며 살아온 전투의 마왕”
자신에게 날아오는 창을 빗겨내며 막아내는 사내를 바라보며 다시금 말을 계속했다.
“변방의 이런 곳에서 쓰러질 영웅들은 아니지만.”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들의 수장처럼 보이는 자가 말을 이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영웅의 숙명이란 저잣거리의 평범한 농부보다 못하는 것이 세속의 이치”
“...”
그 사내의 말에 다른 이들 역시 입을 다 물었다.
영웅이라.
저들은 과연 영웅이라 불릴 만한가?
스스로 자문해 봤으나 대답은 그렇다 였다.
누가 감히 저들.
그 둘이 행한 일들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아쉽게도 둘 다 모두...’
“아무튼 그동안 대장군께서 어째서 저런 역적후손에게 그토록 심려를 기울이는지 몰랐지만 오늘에서야 알겠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