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장
“백인장님? 백인장님?”
용악은 망령들과 대화에 빠져 옥항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옥항이 몇 번이나 불러서야 그제야 옥항을 바라보았다.
지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녀석들은 전과 달리 괴음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하며 사라지지도 않고 그저 차분히 자신에게 말까지 걸고는 사라졌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지... 햇빛에 적응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을 텐데... 큭큭 좋아. 뭐,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테니.’
“...?”
“아...예. 악진 천인장님이 부르십니다. 아마도 진령골에 있는 오크족의 뒤를 치러 가는 모양입니다. 그래야 본대가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으니깐 말이지요.”
“가자.”
“예”
용악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잠시 당황했던 옥항은 그렇게 대답을 하고 말을 돌려 유천에게 다가가 뭐라 이야기를 한 다음에 대원들을 이끌고 앞서 나갔다.
옥항은 용악이 오기 전에 54백인대의 백인장이였기에 다른 대원들의 거부반응은 없었다. 용악이 그를 처음에 봤을 때는 옥영 대장군의 이름값을 믿고 설쳐대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유천에게 이것저것 배우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뭐, 나야 편하니 좋군.’
5천인대와 3천인대가 진령골에 있던 오크족을 견제하는 동안 본대는 무사히 이곳 진령하가 위치한 평원에 도착해서 진을 치며 오크족을 기다렸고 오크족 역시 진풍령에 있던 선발대가 전멸한 것을 알고 이곳으로 병력을 모조리 이끌고 이곳.
진령하가 평원을 가로지르는 이곳으로 어제 도착했고 진을 갖추었다.
이제 이번전쟁의 기세를 정하기 위한 첫 번째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오크족은 철저히 부족민으로 이루어진 민족이다. 강한 자에게 굴복하고 나약한 자는 버려지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법칙이 이루어지는 민족이 바로 오크족,
처음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다른 부족들의 신임을 잃을 수 있다. 그 신임의 정도가 적든지 많든지 간에 말이다.
천황기갑단과 북경수비군의 진형은 용악이 생각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뭐 가장 기본적인 진형이었기도 했으니 말이다. 화포대와 쇠뇌대가 전투의 주력이 될 것이고 천황기갑단은 적이 화포대와 쇠뇌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보조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아군의 진형은 거의 직각을 이루며 휘어지는 강을 끼고 자리 잡고 있었다.
강을 끼고 천황기갑단과 강줄기가 삼각형의 3변을 이루며 정삼각형 모양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화포대와 쇠뇌대가 그 안에서 포화를 준비 하고 있었다.
적의 수는 약 10만 정도. 아군은 2만. 5배가 나는 병력차지만 아군이 불리하지는 않다.
창,검,도 등이 주류를 이루는 냉병군단 간의 전투의 전선(戰線)은 선(線)의 형식을 띌 수밖에 없다.
즉, 가장 최전방에 있는 병사들은 직접적으로 전투를 하지만 그 뒤에 있는 2진들은 전투에 참여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저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1진이 무너지면 그 1진의 역할을 대신한다거나. 2진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함으로써 다른 전장에서 1진의 역할을 한다거나, 적의 배후를 공략하는 등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렇더라도 1진만 전투를 수행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거리 무기가 있는 경우 다르다.
원거리 무기가 있다면 선(線)으로 이루어지던 전선(戰線)이 면(面)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갈수록 그 파괴력은 더욱 커져가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선에서 면으로 전선을 확장 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파괴적인 무기인 화포와 쇠뇌를 아군을 가지고 있고 적군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적이 궁병이 있다고는 하지만 궁과 화포를 비교 할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궁 역시 냉병기라고 할 수 있고 화포는 최신(最新)의 화기이다. 그렇기에 5배가 넘는 병력차를 극복하고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적군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화포대와 쇠뇌대를 파괴하려고 할 것이다.
어쩌면 화포대와 쇠뇌대를 보호하려는 천황기갑단을 노리고 역(逆)으로 천황기갑단을 포위, 섬멸할 수도 있을 수 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 진형은 좋다.
진령하를 넘어 뒷쪽인 진령골에 있던 2만의 오크족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들이 후방에서 화포대와 쇠뇌대를 노리기 위해서는 강을 직접적으로 건너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힘든 어쩌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어찌됐건 적군이 후퇴하지 않는다면 지리의 이점은 한제군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저렇게 살기를 풀풀 흘리며 돌격준비를 하는 것을 보면 적은 후퇴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용악이 생각한 것을 유천도 생각을 하고 있었고 유천은 마치 스승처럼 옥항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있었다.
용악이 뒤를 슬쩍 쳐다 보자 유천의 말에 다른 병사들 역시 귀담아 은근슬쩍 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그들 자신들도 이미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유천의 설명은 조리 있고 논리 정연했기에 꽤 도움이 되는 듯 했다.
‘그나저나 이곳으로 아마 적이 가장 많이 몰아칠 텐데. 악진 천인장은 따로 계획을 세워둔 것이 있나 모르겠군.’
용악이 이끄는 54백인대는 아군 진형의 제일 왼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즉 강을 바로 옆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정면에서 중앙을 파고들기 보다는 측면을 파고들어서 삼각형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화포대와 쇠뇌대를 공격하거나 천황기갑단을 포위하기 편하기 때문에 적군은 이곳으로 몰릴 것이다.
중앙을 돌파하려는 시도 역시 당연히 같이 할 것이다. 그리고 중앙으로 십자포화가 이루어 질 것은 당연한 말씀. 그렇기에 강을 옆에 끼고 달리면 그나마 포화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북경수비군의 화포대와 쇠뇌대를 보호하던 중보병들 중 2천이 용악이 있는 천인대로 합류했다. 나머지는 2천은 반대편으로 갔다.
‘훗. 그래도 북경수비대를 이끄는 장군이 멍청이는 아닌가 보군. 십자포화나 잘해 줬으면 좋겠군. 중앙이 뚫린다면 역으로 우리가 포위를 할 수 있으니 말이야.’
중보병들과 천황기갑단이 진형을 다 맞추었을 때 쯤 되서야 오크족의 기마병들이 돌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쿠쿠쿵쿠우
거의 9만이 넘는 기마병들이 일시에 달려오는 그 모습은 정말 압도적이고 전율이일 정도로 엄청났다. 지축은 수많은 말발굽에 의해 흔들리며 신음을 하며 오크족들의 알 수 없는 고함소리가 전장을 가득 채웠다.
용악이 다시 뒤를 바라보자 옥항은 약간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유천은 뭐 호표기여서 이런저런 전장에 많이 투입이 되어서 그런지 어쩐지는 몰라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다른 54백인대의 병사들 역시 약간은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한마디 해주는 것이 나을까... 이 녀석들의 생사에 별 관심은 없지만 그 찢어죽일 조비 개자식의 말을 내가 안 들을 수 도 없는 노릇이고...’
“너희들은 나만 따라오면 된다. 겁먹을 것 없어. 어차피 지금 달려오고 있는 것들은 모조리 화포에 죽을 테니.”
용악의 말이 끝나자 천황기갑단의 뒤편에서 오크족들의 고함소리를 단번에 비명소리로 바꾸어 버린 화포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콰과
과과광.
300문의 화포가 동시에 불을 뿜는 소리는 정말 엄청났다.
오크족 들뿐만 아니라 천황기갑단의 전마들 까지 놀라서 날뛸 지경이었다.
용악은 한순간에 먼지로 가득 덥혀버린 전장을 바라봤다.
‘아쉽군. 조금 더 늦게 쏘는 것이 나았을 텐데 말이야. 뭐 이정도면 양호한 것이지만. 이제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인가. 흐흐흐.’
*****
사방에서 피가 튀기고 땅이 파이며 적군이 포탄에 맞아 날아가고 어디선가 쇠뇌가 날아들어 말과 사람을 한 번에 꿰뚫는다.
피와 땀에 젖어 눅눅해진 나의 가죽장갑과 투구를 벗고 싶지만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적군은 그럴 여유도, 틈도 주지 않는다.
옥항은 자신의 앞을 가로 막던 한 오크군의 반월도를 피하며 창으로 그의 목을 꿰뚫었다.
어지럽다.
이런 것이 전쟁인 것 인가!
이것이 실전인가!
화포의 위력이 이정도 일 줄은 몰랐다. 아니 화포가 아니라 300문의 화포의 십자포화가 저런 위력을 낼 줄은 몰랐다. 전장의 중심부는 아예 무슨, 조그마한 저수지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구덩이가 여러 군데 보였다.
처음 발사된 화탄에 의해 처음 달려오던 기마병들이 모조리 전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수의 기마병이 죽었다.
말과 사람이 함께 정말로 하늘로 5미르 이상 날아올라 떨어졌다.
그렇게 십자포화가 몇 번 떨어지자 오크족들은 중앙이 아닌 양 옆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로 작전을 바꾼 듯 했다.
그래서 오크족의 진형은 중앙을 비워둔 체로 양쪽으로 길게 늘여지고 있었다.
마치 뾰족한 창날의 양쪽처럼 말이다.
전선의 앞부분은 슬슬 난전으로 변해버리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전선은 유지되고 있었다.
화포대 와 쇠뇌대는 십자포화는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길게 늘어선 적군을 향해 발포하고 있었고 천황기갑단들은 그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적군의 돌격을 막고 있었다.
옥항은 자신들을 말없이 이끄는 녹안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 전투가 시작된 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명령을 내리고 있는지.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백인대원 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옥항은 지금 알고 있었다.
그렇다.
이해가 안 된다.
지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마치 추수를 하는 농부처럼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오크족의 목을 갈라내고 있었다.
투쟁심도 살기도 뿜어져 나오지 않는다.
그저 의무적이고 기계적으로 적군의 목을 가르고 적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더 무섭게 느껴졌다.
옥항은 자신이 왜 이렇게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 그는 용악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왠지는 몰랐지만 그가 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전투의 마왕이라고 불리는 것인가...
전장을 지배하는 자.
전장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자...
이미 저 자가 나오면서 전쟁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부르... 부르셨...습니까!!!”
옥항은 자신의 옆머리를 쳐오던 오크의 반월도를 가까스로 피해내고는 그의 머리를 창끝으로 휘둘러 날려버리고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숨을 가다듬고 소리쳤다.
그의 곁에는 오크족도 접근하지 않고 있었기에 그에게 다가가기는 어렵지 않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옥항을 바라보았다.
소름끼치게 무심한 눈이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이다.
녹색의 안광이 눈 밖으로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 타오르는 푸르른 귀화는 자신 눈에 똑똑히 보였다.
“유천에게 54백인대를 모아 나에게 오라고 하고 악진 천인장에게 전해라. 나에게 백인대 다섯을 넘기고 북경수비군과 함께 수비에 전념하라고 말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오크족을 향해 달려 나갔다.
‘악진 천인장 에게? 그래도 되나? 당신은 그저 백인장중에 한명일 뿐인데... 하지만 전투의 마왕이기도 하지!! 하하! 그렇게 하지요. 악진 대장군 역시 당신의 명령에 따를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 역시 당신을 보고 있을 테니 말이지요.
이런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 저를 부르신 겁니까? 아무래도 저의 조부께서 옥영 대장군이시니 악진 천인장이 저에게 뭐라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하하 어쨌든 좋습니다. 곧 따라 가겠습니다!’
옥항은 갑자기 자신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괜한 이유 없는 자신감이 생기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 함부로 대하지 못하던 악진 천인장 에게 그런 무모한 명령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 당신이 내게 주는 힘인 것입니까? 와하하하.’
옥항은 왔던 길로 다시 말을 채찍질해가며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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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 흑영기병대 - 256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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