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장 은서-만남. 과거의 편린
그들은 제갈서문의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26명.
그가 말한 대로 정확하게 26명 이었다. 23명은 검은색 갑주를 입고 있었지만 나머지 3명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3명은 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나머지 병사들은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이 그들의 뒤를 따라 걸어 왔다. 그리고 제갈소문이 마련해 놓은 각장의 숙소에 쳐 박혔고 나오지도 않았고 그렇게 3달이 지난 오늘 드디어 정보부 대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단의 북군부 병사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쫒고 있는 자가 네 번째 검, 귀혈쌍도 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제갈소문은 동생에게 은서를 맡기고 -사실 은서는 거의 동생이 맡아 일처리를 하고 있었기에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그들을 따라 국경으로 향했다.
연락이 온지 벌써 4일이 지났다. 여기까지 오면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 북군부의 병사들이 쫒고 있는 그 자는 말을 달려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쫒는 병사가 북군부 기마대 100여명. 그런데도 아직도 못 잡고 있다니 아마도 그자는 네 번째 검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제갈서문은 국경선을 가로지르는 성벽위에서 깨끗하게 면도를 한 덩치가 엄청난 한명의 장군과 함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서한국의 평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내. 아마도 정체를 숨기고 있지만 장군일 것이다. 대충 보면 안다. 장군은 장군만의 냄새가 나니까. 그리고 자신 역시 그렇지 않은가.’
제갈소문은 그 옆에 서서 가만히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같이 바라보았다.
“자네. 제갈소문이라고 했나?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나?”
“약간은.”
둘은 거의 비슷한 나이 또래라고 생각을 하고 쉽게 말을 놓고 지내고 있었다. 이자 빼고 다른 2명의 장군. 그들 역시 장군의 냄새가 풍겼으니 아마도 장군일 것이다. 그들과는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둘이 쳐 박혀서 방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하다. 장군3명과 저 대충보아도 엄청난 실력일 것 같은 병사 23명이 네 번째 검을 만나기 위해서 달려오다니. 그것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이곳으로 오다니. 역시 수많은 수식어가 달라붙은 자의 명성을 다시 한 번 확인 했다고나 할까.
“어쩌면 짐작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서축에서 왔다. 그리고 너희들이 네 번째 검, 혹은 귀혈쌍도 수많은 수식어로 부르른 그 아이, 훗 이제 아이도 아니겠군. 그 아이는 내가. 아니 우리 서축 군이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의 하나뿐인 아이이다.
그 아이는 그 분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 서축군의 아들 이였다. 그 분만 아니었더라면 너희들. 모두 우리의 발굽아래 짓밟혔을 것이야. 이미 다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는 웃음을 지으며 무지막지한 이야기를 별거 아니 다는 듯이 말을 했다.
‘흠. 역시 서축에서 온자인가... 음. 서축이 아직도 용천 대장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인가? 10년이 다 되가는 지난일 인데?’
제갈소문이 그렇게 생각을 하며 이리저리 생각의 조각을 맞추면서 고개를 숙이며 생각을 할 때 자신의 옆에 서 있던 그 장수는 평원 넘어서 다가오는 무언가를 봤는지 제갈소문에게 소리친 후에 성벽 밑으로 내려갔다.
“온다! 먼지 구름이다. 적어도 기마50기 이상! 제갈소문! 성문을 열어라.”
제갈소문은 갑자기 들려온 그자의 고함소리를 듣고 상념에서 깨어나 성벽 밑에서 그 검은색 갑주를 입은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을 열라고 소리치는 그 장군을 바라보았다.
‘뭐가 보인다고? 설마 저기 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는 말이야?’
제갈소문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성문을 열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다른 2명의 장군과 함께 거대한 궁을 어깨에 걸고 성 밖으로 달려 나가는 그 장군을 바라만 보았다.
“용악! 대장군님의 아이! 서축의 아이! 정말 오랜 동안 기다렸다. 이제 내가 왔다! 용악! 나 하후양이 왔다!”
하후양은 말을 타고 달려가면서도 전혀 불편하지도 어색하지도 않게 거대한 궁에 화살을 3개나 걸치고는 저 앞에 한 마리 상처 입은 호랑이에게 달려드는 늑대 때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상처 입은 채로 말의 등에 업혀, 말 그대로 업혀서 달려가는 용악을 노리던 병사들의 창은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가로막혀 이루려던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덤으로 다시 한 번 날아온 화살에 그 목숨까지 잃었다.
그렇게 선두에 서서 달려가던 자가 화살에 맞아 떨어지자 그 뒤를 따라 달려오던 기마대의 진형이 흐트러졌고 그 흐트러진 진형 사이로 검은 물결들이 거침없이 밀고 들어 왔다.
콰직.
콰지직.
정면으로 맞붙은 50의 기마대와 23명의 검은색 갑주를 입은 병사들의 정면충돌은 저 쪽 성벽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제갈소문의 팔에 소름이 끼치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콰과과과.
창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가 광활한 전장에 울려 퍼지고 서로는 서로를 뚫고 반대편으로 돌아 다시금 서로에게 돌격했다.
마치 암컷 산양을 놓고 서로 머리를 부딪치는 수컷 산양처럼.
하지만 첫 번째 충돌 때 반수 이상이 쓰러져 버린 50의 기마대 아니 이제는 30정도 밖에 남지 않은 서한국 기마대는 두 번째 충돌을 버티지 못하고 검이 대나무를 쪼개듯이 반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그리고 진형이 무너진 기마대는 손쉽게 여기저기로 휘몰아치는 검은 광풍에 의해 사그라 져버렸다.
“용악아! 나다! 양 숙부다! 하후양이라고!”
말 위에서 쓰러져 말에 업혀 가던 용악은 슬그머니 자신을 깨우는 소리를 듣고 살짝 눈을 떴다. 비록 낮이어서 녹색의 안광이 흘러나오지는 않았지만 녹색의 눈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하후양은 그런 용악의 모습을 보며 더욱 안쓰러워 눈물을 흘리며 그를 안아 주었다.
“설마... 그... 양 숙부? 서축의 양 숙부?... 어떻게...”
“그래 나다! 와하하하! 일단 가자. 치료부터 하고 나서 이야기 하자 하하하하!”
하후양의 웃음소리를 듣고서 기마대를 살육하던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모두 용악에게 다가왔다.
다들 표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뻐하는 듯 했다. 아니 기뻐한다고 용악은 생각했다.
“훗... 너희들 모두 왔군. 고맙다...”
용악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금 말위에 쓰러졌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편한 표정을 지으면서.
*****
여민과 석철원 그리고 하후양과 제갈소문과 그의 동생 제갈소운은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생명체. 인간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생명체를 보며 서로 할 말이 없어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며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용악을 검사한 의약당 당주는 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일 것이다. 그가 알아내지 못한다면 일단은 지금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하지만 대체 저 안구 밖으로 줄줄 흘러나오는 녹색안개 같은 것은 무엇이고 저 왼손, 손인지도 모르겠다. 저 비늘에 감싸여져 있는 왼손 이었단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새로 생긴 저 가슴에 난 수많은 상처들은 무엇이고 말이다.
“흐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요?”
“완전한 미친놈”
“...”
“괴수”
“귀신”
제갈소운의 질문에 4명 모두 한꺼번에 대답을 했다. 물론 미친놈은 제갈소문의 대답이었고 그 대답을 한 후에 하후양의 무서운 눈빛 공격을 받았어야 했으며 여민 그리고 석철원 순으로 대답했다.
“이거 정말 돌아버리겠군. 이거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일단은 깨어난 다음에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어요.”
“그래...”
제갈소문과 제갈소운은 멍해있는 좌중의 정신을 깨우며 대화를 나누었고 제갈소문의 의견에 모두 동의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다음날 용악은 5명의 사람과 10쌍의 눈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깨어났고 자기가 겪었던 일을 자기마음대로 자르고 붙이고 해서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용악은 아직 완전하지도 않은 몸으로 자신에게 온 병사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고 용악은 감옥에서 엉망이 된 자신의 몸을 회복했다.
“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건가요? 그리고 석교관 님 하고 량 숙부는 어떻게?”
용악은 간단히 창을 들고 몸을 풀고서 자신과 함께 연무를 했던 여민, 저기 연무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있는 여민에게 말을 건넸다.
“일찍도 물어본다. 네가 그때 서축으로 편지 전해 달라고 했지? 그 때부터 너만 찾으러 다녔다. 저 하후형하고 같이 말이다.”
‘그때부터? 호오... 꽤 오랜 동안 찾아 다녔네..... 그런데 왜지? 왜 날?’
“왜냐고 묻지 마라 나도 잘 모르겠다. 왜 그렇게 널 찾으러 다녔는지는... 어쨌든 그렇게 서축에 가서 하후 형을 만났고 북경으로 돌아와서는 석 형을 만났지. 알고 보니 석 형하고 하후 형하고 아는 사이였더군. 어쨌건 그렇게 하후 형은 너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하며 우리를 끌고 다녔던 것 아니냐. 뭐 우리는 장군이니깐 무림패니 뭐니 하는 것은 필요도 없었으니 편했기도 했고”
여민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와 창을 닦고 있는 용악의 목을 감싸고는 자신을 끌고 어디론가 가며 계속 말을 했다.
“석 형이 네가 사관관에서 쫓겨났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 그래서 우린 강소로 갔는데 너를 찾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서 지내다가 네 소식을 듣고 다시 강소로 갔는데 한발 늦어서 네 녀석을 못 만났지. 그렇게 계속 우리는 한 발짝 씩 늦게 도착해서 네 녀석을 못 만났고 이제야 너를 만난 것이지.”
‘아... 그랬었군...’
용악은 임무가 끝난 뒤에 대장군부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다시 다음번 작전에 투입되고 했으니 대장군부에서 기다린 여민은 그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용악이 그런 생각을 하며 여민을 따라간 곳은 국경수비대의 군용 마사였다. 그리고 수많은 건장한 전마들 사이에 눈에 확 띄는 흰색 털을 가진 말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단하지. 이거 하후 형이 너 주려고 지금까지 데리고 다니던 말이다. 이름은 백풍이라고 하더군. 뭐 이 녀석의 어미가 바로 백룡이다...”
백룡.
용천의 말.
용천이 타던 그 하얀 갈기 속에 수많은 상처를 숨긴 전마 중에 전마.
‘네 녀석은 그런 어미 밑에서 자란 아이라는 것이냐?’
용악은 손을 들어 백풍이라 불리는 하얀색 갈기를 휘날리는 백마의 커다란 눈망울을 어루만졌다. 마사는 어두웠기에 용악의 두 눈은 포식동물처럼 녹색의 안광과 함께 푸르른 귀화가 터져 나오고 있었지만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게 이 녀석은 무서워하지도 않고서 용악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후후. 네 녀석도 엄마를 닮았다. 이거냐? 조금만 기다려라. 곧 너와 함께 전장을 휩쓸어 주마.’
“하하하. 좋네요.”
“그렇지? 이 녀석 성깔도 장난 아니야. 나도 이 녀석 어미를 한번 봤는데 이 녀석은 지 어미하고 비교도 안 되는 놈이야. 더 무서운 놈이야.”
“후후”
‘그렇겠죠...’
용악은 백풍의 저 순순해 보이는 똘망똘망한 커다란 눈망울 속에서 터져 나오는 귀화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후후 너 역시 그렇게 용가(龍家)의 비전을 받아 키워진 녀석이라는 거냐? 좋군. 귀신과 귀신이 만난다? 하하’
“오! 백풍을 만났나? 이런 내가 소개시켜 주려고 했는데...”
저 멀리서 하후량이 손을 흔들며 오며 말했다.
용악은 아련한 눈으로 하후량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수 년이 지났어도 똑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는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울렸다.
용악은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아직도 자신을 잊지 않는 그 따스한 마음 때문에
“이 녀석. 아무리 오랜만에 봤다지만 이게 무슨 모습이냐! 넌 용청대장군님의 아들이자 우리 서축의 아들 자부심을 가지고 가슴을 펴라!”
하후량은 용악의 등을 소리내며 팡팡 치고는 용악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어디론가 끌고 갔다.
조용한 별채
장군부에 딸려 있는 숙소에 하후량과 용악 둘 만이 앉아 조용히 바람소리를 듣고 있었다.
둘 앞에는 작은 탁자 위에 술잔 두 개와 작은 초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비록 작은 초였지만 숙소를 가득 채울 정도의 빛이 나오고 있었고 용악이 뿜어내는 기세에 맞추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어찌 생각하느냐.”
하후량은 앞에 놓인 술잔에서 입을 떼며 용악에게 조용히 물었다. 용악은 빛바랜 두 개의 서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살기를 가다듬고 있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이야기가 서찰 안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져오긴 했다만 나는 물론이거니와 우장군님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서찰이다. 이건 용천대장군님이 떠나시기 전에...”
하후량은 말을 하다가 감정이 북받쳐 목이 메었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술을 한잔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떠나시기 전에 네가 크면 전해달라고 우장군님에게 맞겨 놓았던 서찰이다. 그동안 너에게 직접 전해 주려고 이리저리 떠돌았는데 수년이 지난 이제야 전해주는구나.”
“숙부님도 읽어보시지요. 저 혼자 읽어서는 안 될 일 같습니다.”
용악은 그렇게 말을 하며 먼저 읽은 서찰을 전해주고서 술잔을 들었다.
작은 술잔에 아버지. 용천의 얼굴이 비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저는 어찌하란 말입니까. 그저 천명이라고,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잊어야 하는 겁니까?’
서찰에는 용천, 그의 죽음에 대한 비사가 적혀 있었다.
황제와 용천과의 10년의 약속, 그리고 그 비밀을 아는 자들, 서축과 천하를 위해 했던 결정. 그리고 천하안민을 위해 택했던 자신의 결정을 이해해 주고, 아비로써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용악은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체 멍하니 흔들리는 촛불만을 바라보았다.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그 동안 제가 겪어왔던 그 지옥 같은 일들은 어찌해야 합니까? 야속하십니다. 아버지...’
“음...”
“...”
하후량도 서찰에 담긴 비사를 읽고서 알 수 없는 신음만 흘렸다. 그리고 용악에게 한 잔을 따르고 자신 역시 한 잔을 마셨다.
“너도 알다시피, 서축의 병사들은 아직도 용천대장군님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움직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지. 여차하면...”
“여차하면 반역이라도 일으킬 생각이었습니까?”
용악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복수의 마음이 다시금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미는 것을 느끼며 울부짖듯 내 뱉었다.
하후량은 눈물 젖은 용악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어떻게든 너를 찾아 서축으로 데려와 거병할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겠느냐? 비록 남들에게 세어나가지 않았다만 앞으로 서축군이 어찌할 지에 대해서 서축군부도 말이 많았다.”
“그러시겠지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니...”
용악과 하후량은 그렇게 말을 하시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말이 쉽지 황제를 향해 칼을 빼드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거기에 이미 10년도 지난 과거의 일. 비록 3개의 나라로 쪼개졌지만 서축은 평안하고 천하 역시 평온하다. 그런 상황에서 한제국을 지키는 방패라 불리는 서축이 한제국을 향해 칼을 빼드는 것은 지난 200년간 용씨가문이 서축에서 일어나 천하를 위해 이종족과 싸워온 모든 영광을 시궁창으로 내 던지는 꼴이다.
그랬기에 용악 역시 지옥 같은 생활 속에서 서축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일어서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꿈을 펼치기도 전에 아버지와 관련된 비사를 듣게 된 용악은 허무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쪼르륵.
쪼르륵.
용악은 자신과 하후량의 술잔에 술을 다시 채우고서 말없이 마셨다. 마치 그 동안의 설움을 한 잔 술에 담아 마시듯 조용하고 천천히 술을 부어 넣었다.
탁.
소리 내며 술잔을 내려놓은 용악은 마음속 결정을 끝냈는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천하를 위해 희생하신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조비. 그 놈에게는 복수 해야겠습니다. 이 몸...”
용악은 타오르는 녹색 눈으로 그렇게 말을 하고서 지룡의 비늘로 감싸여 있는 왼손을 하후량이 보기 쉽게 들고서 말을 이었다.
“제 몸을 이 꼴로 만들고 제 인생을 지옥에 쳐 박은 그놈만큼은 절대 용서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래...”
하후량도 용악의 단호한 결심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그저 동의뿐이랴 그의 속마음으로는 서축의 모든 힘을 모아서 용악의 복수를 돕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숙부님을 비롯해 서축의 힘을 이용하진 않을 겁니다. 서축이 움직이면 당장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조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아버지의 뜻을 알았는데 그 뜻을 어기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요. 저 역시 용씨가문의 일원이니... 이제 곧 있으면 저만의 군사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결심이 섰다면 됐다. 우린 언제나 너의 편이니 너의 뜻대로 하거라. 더 도와줄 일이 없겠느냐?”
“함께 온 녀석들만 부탁드립니다. 세뇌당하다 시피 황제에게 얽매여 있던 녀석들을 제가 살려 놓은 것입니다. 저잣거리에서 장사를 하든, 농사를 짓든 그저 그 동안의 일을 잊고 황제나 저에게서 벗어나 그들만의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그랬다.
용악은 운명의 인형과도 같은 그들의 인생에서 자신과 같은 그들을 보며 슬퍼하고 아파하며 그들의 의미 없는 삶을 끊어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지금까지의 삶을 잊고 자기 뜻대로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 곧 자신 역시 운명의 끈에서 해방되는 듯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그들을 살린 용악의 바람이고 뜻이었다.
하후량은 그런 용악의 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허나 여기 같이 온 녀석들 말고 네가 보낸 녀석들 중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3명이 더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혼수상태에서도 운기를 하는지 기세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만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더구나. 네가 시간을 내서 한번쯤은 보는 것이 좋겠다.”
“예... 허나 제가 서축으로 간다면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헛수고가 될 것. 일이 끝난 후에 뵙겠습니다.”
“그래라. 언제나 우린 너를 기다리고 있을 터니 힘들면 언제라도 오거라.”
“예. 숙부님.”
용악은 하후량의 두터운 손을 꼭 잡으며 각오를 다진 대답을 했다.
하후량과 헤어진 용악은 혼자 남은 방 안에 앉아 두 번째 서찰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두 번째 서찰은 하후량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는 용천이 용악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서찰이었다.
용악이 알고 있던 용아창법 이외에 가주에게만 구전으로 전해지는 용아창법의 2식 그리고 용아심법에 대한 용천의 생각과 그동안 조상들이 남겨 놓은 주석이었고 용악이 알지 못했던 서축용가의 내력이 담겨져 있는 가문의 역사서였다.
‘200년 전 한제국의 건국과 함께 세워진 우리가문이 서대륙에서 넘어온 가문이었다니...’
솔직히 용악도 자신의 가문이 조금 이상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했다. 비전의 단약을 만들어서 말에게 먹여 영마(靈馬)로 키운다던가, 그가 수련관이나 다른 자들을 통해 보고 배웠던 운기법과는 조금 다른 형식의 운기법인 용아심법이라든지.
하지만 그저 조금 다를 뿐이라 생각했는데 서대륙에서 넘어온 가문이라니.
역사서에는 서대륙에는 동대륙에서 용이라 부르는 존재가 실제로 존재하고 그들과 함께 살았던 선조들의 역사가 적혀있었고 끝에는 용악 역시 마음을 추스르고 동대륙에 미련이 없다면 서대륙에 한번 가보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 정말 아버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끝내시려는 생각이셨습니까? 한제국을 위해 고생한 그 긴 세월의 서축용가의 역사와 서축의 짐이 그리도 무거우셨습니까.’
용악은 소리 없이 방문을 열고서 하늘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구름에 가린 달은 아무말 없이 용악을 바라보고 있었고 용악은 아버지를 기리며 조용히 술을 마실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끄럽던 망령들마저도 오늘만큼은 달과 함께 침묵했다.
그리고 2 달 후.
용악이 완전히 몸을 회복한 그 날.
제국력 1347년 6월 10일.
그 날. 서축의 폭풍기마대가 청해성를 침공했다.
그리고 용악이 이끄는 국경수비대는 5일 만에 무계로 가는 길목에 있는 4개의 성을 무너뜨리고 제국력 1347년 6월 15일.
마지막 5일째가 되는 날.
무계에는 한제국기가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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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 흑영기병대 - 25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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