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영 기병대-39화 (39/107)
  • 39장 불귀도-시작

    용악은 허기짐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퀴퀴하고 비릿하고 무언가 썩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냄새....

    ‘아. 여기는 시체더미 안 이지.’

    슬슬 정신이 돌아오면서 주위에 맴돌던 냄새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해적들은 다들 갔나?’

    용악은 서서히 몸을 풀면서 밖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꽤 오랫동안 있었지만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아마도 해적들은 다 떠난 모양이었다.

    그는 시체를 다시 비집고 나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다행이도 사다리를 가져가지는 않았다. 사다리를 가져갔다면 정말 고생했을 것이다.

    ‘아닌가?’

    용악은 자신의 손에 느껴지는 힘을 새로이 느끼며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칼로 벽을 타고 오를 수도 있겠는걸.’

    사다리를 타고 불귀동 밖으로 나가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용악은 땅에 떨어져 있던 어느새 익숙해진 젠국도를 집어 들었다.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흐음. 해적들은 역시 갔나보군. 이제는 어쩐담.’

    용악은 터벅터벅 불귀도를 걸으며 생각을 이어갔다. 매일 있던 곳에 해적들이 안 보이는 걸로 보아 아마도 해적들도 다 떠난 것 같았다. 불귀도를 한 바퀴 다 돌아봤지만 해적들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불귀도 한쪽으로는 피의 강이 천천히 흘러서 모래 터가 아닌 모래 터 반대편으로 흐르고 있었고 화장터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아직도 불에 타고 있었다.

    ‘음.. 포로들을 다 저기에다 태운 모양이군.’

    용악은 자신이 평소에 생활하던 불귀동의 한 귀퉁이로 향했다. 화장터에 다가갈수록 머리가 아파온다.

    ‘왜 이러지.’

    희미하게 어디선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두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십 아니 수백의 사람들이 내지른 목소리였다.

    ‘뭐지. 뭐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이건 어디서 들리는거야?’

    용악은 머리를 감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것은 온통 검은색의 바다였다. 하지만 소리는 계속해서 들린다. 화장터에 가까이 갈수록 점점 더 크게 그리고 선명하게 들린다.

    아.....

    “악!”

    용악은 한순간에 허리를 뒤로 꺾으며 쓰러졌다.

    소리가 들려온다.

    수많은 사람들의 저주에 찬 울음소리가 온몸으로 파고든다.

    “아! 악!!”

    온몸을 칼로 난자하는 듯이 아프고 온몸을 불에 태우듯이 뜨겁고 온몸을 바늘로 찌르듯이 따갑다.

    “헉헉”

    “아악!”

    신음소리가 절로 입에서 튀어나온다.

    용악. 그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함께 튀어나온다.

    “키약! 키악!”

    -죽고 싶지 않아!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배를! 배가 있는 곳으로!

    -꺼져 이 새끼들아.! 야 빨리 포로들 막아!

    -빨리 타라! 빨리 타! 점점 이쪽으로 몰려온다!

    -비켜! 비켜! 너희들만 살고 우리는 죽으라는 말이냐!

    -아악. 네가. 어떻게 네가

    -시발 나라도 살아야 할 것 아냐! 컥.. 네 녀석이...

    -흥 저도 마찬가지인 주제에

    눈에 보이듯 독연에 쫓겨 배로 향하는 포로들과 해적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죽은 자들의 기억인가? 왜 나에게?’

    용악은 쓰러진 몸을 일으키며 화장터 반대편으로 천천히 기어갔다. 갑자기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다. 용악은 무감각해진 자신의 다리는 내버려 둔 체 두 팔로 기어서 반대편으로 점점 나아갔다. 화장터로 갈수록 더욱 심해지리라.

    ‘반대편으로 가야 돼! 모래터로.’

    화장터에서 멀어질수록 용악을 괴롭히던 환청이 줄어들고 다리의 마비도 점점 풀렸다. 용악은 크게 숨을 들이키며 달궈진 몸과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아. 뭐지. 방금 전 그것은. 왜 갑자기 그들의 사념이 나에게 달라붙은 거지.’

    -킥킥 그야 내가 죽어야 하는 자이기 때문이지

    -너는 죽어야 하는 자 큭큭

    -너는 죽어야 하는 자지 저들의 생명을 짓밟고 살아 났잖아

    “헉! 뭐야! 너희는 뭐지!”

    아까처럼 머리가 아프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리는 똑똑히 들려온다. 알 수 없는 기괴한 목소리다. 마치 음부(陰府)의 망혼(亡魂)이 내는 바람소리와 같은 소리다.

    -킥킥 모른척 하지마!

    -피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지 히히히

    -가린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지 큭큭큭

    아아아......

    머릿속에서 점차 기억들이 떠오른다. 시체더미를 뚫고 나온 칼이 누군가의 목을 가른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 누군가의 머리를 가른다. 그리고는 쓰러진다.

    눈 밑으로 오른쪽 빰에 길게 난 흉터..

    정리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

    ‘아. 나군. 나야...’

    스르르륵 머릿속으로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저승의 강에 있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용악은 저승의 강이 가지고 있던 기억들이 자신에게 흡수되는 것을 느꼈다.

    저승의 강을 지나면 사람은 기억을 모두 잃게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저승의 강에 기억을 빼앗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승의 강은 물로 이루어진 강이 아닌 정신과 기억의 집합체, 정신적이지만 물리적이고 물리적이지만 정신적인 그 절대적인 존재.

    전 우주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기둥 중에 하나가 바로 저승의 강.

    그랬기에 그 강에 한발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용악이 강에 흘려보내는 기억만큼 용악에게 수많은 자들의 기억들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아 그래서 이렇게 힘이 생기는 건가. 그리고 너희들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는 건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못 보던 것들을 볼 수 있는 것인가?’

    용악은 마치 또 다른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기억들을 자신의 머릿속에 다시 저장하는 기분을 느끼며 저승의 강에서 얻은 조각난 기억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이다.

    농부의 기억도.

    무인의 기억도.

    예술가의 기억도.

    용악은 허락된 자가 아닌 그야말로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힘이 아닌 다른 자의 힘으로 인해서 저승의 강에 발을 담근 자. 그랬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기억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동 시대의 동 시간의 기억들은 받아들일 수 있었고 비록 정확하게 완성되지 않은, 누군가의 듬성듬성한 기억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났다. 하지만 그 대가는 바로 이것이다.

    끊임없이 망령들의 저주와 질시와 유혹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

    쿨럭.....

    헉.....

    ‘숨을 못 쉬겠어. 여긴 어디지.’

    용악은 눈을 살짝 떴다.

    ‘아프다. 눈이 아프다.’

    용악은 발버둥을 치며 손에 무언가 잡히기를 바라며 움직였다.

    ‘다리는 내 다리는 뭐하고 있지?’

    용악은 다리를 움직였고 이윽고 자신이 어딘가에 액체가 있는 곳에 누워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다? 바다면 내 발에 땅에 닿을 리는 없는데 그럼?’

    용악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났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이 얕은 피의 강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인가.’

    용악은 몸을 일으키고는 밖으로 기어 나갔다. 얼마나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저기에 빠져 있던 것인가. 용악은 어젯밤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래 기억을 찾고 나서 망령들에게 시달렸지. 그리고는 잠깐 잠이 들었고 그리고 깨어나 보니 저기 안에 있었고 아. 내 칼은 어디에 있지. 저녁때까지만 해도 가지고 있었는데.’

    용악은 붉은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젠장 잃어버린 모양이군. 어디서 잃어버린 지도 모르겠고.’

    용악은 축축이 젖은 옷을 던져버리고는 모래 터로 가서 바닷물로 몸을 씻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을 한다.

    ‘잠을 자면 나의 몸을 누군가가 조종하는 건가? 그래서 그 곳에 빠져 잠을 잔 것이고?’

    용악은 몸을 씻으며 생각을 이어갔다. 해는 언제나처럼 불귀도를 비추고 있었다. 망령들은 낮이 되어서 인지 용악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밤이 되면 아니 해가 지면 또 다시 용악을 괴롭힐 것이다.

    ‘그렇다면. 잠을 낮에 자야 하나.’

    용악은 대충 몸을 씻고 피에 절어버린 옷은 버려둔 체 포로들이 생활 하던 곳으로 향했다. 포로들이 생활하던 곳은 그대로였다. 독연으로 인해 사람들이 발버둥친 탓에 엉망이 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물건들을 사용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널려 있는 옷 중 아무 옷이나 대충 입고 나서 자신과 곽철이 생활하던 천막으로 향했다.

    그대로였다.

    아무도 건들지 않은 모습.

    용악은 자신의 짐 꾸러미를 바로 찾을 수 있었고 그곳에 들어 있던 창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아버지...’

    차가운 쇠붙이로 만들어진 창날이지만 따스함이 느껴진다. 용악은 알지 못했지만 저승의 강에 발을 담근 후유증이었다. 능력도 아닌 그저 발을 담갔다 뺀 것만으로도 물체에 서려있는 혼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창날에는 용천이 남긴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 했다.

    용악은 자신의 짐을 다시 챙기고 곽철의 짐도 챙겨서 한 곳으로 모아두고는 다른 포로들의 짐들을 뒤져 보았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냥 불귀동에서 죽었던 자들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의 물건만 있을 뿐이었고 그 물건마다 다른 느낌이 느껴지는 것은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다.

    저녁에 이 물건들을 만진다면 혼령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세계에 남아 있는 혼령들 중 제대로 된 혼령이 있을 리 만무하니 그냥 만지지 않는 게 나아 보였다.

    용악은 그렇게 대충 정리를 하고는 불귀동에 있을 때 생활하던 천막으로 향했다. 화장터 근처로 다가갔지만 어제 밤만큼 심하게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조금 욱신거리는 정도?

    용악은 천막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또 다른 젠국도를 꺼내들고 육포를 비롯해서 몇몇 물건을 가지고 모래 터 근처로 갔다. 더 이상 불귀동 근처에서 살 필요는 없으리라.

    ‘어떻게 될지 모르니 되도록 시체가 있는 곳에는 되도록이면 안 가는 것이 좋겠어.’

    그렇게 용악은 혼자 남은 불귀동에서 새롭게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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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 - 흑영기병대 - 249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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