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하루하루는 속절없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주위사람들끼리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먹을 것은 들어오지 않았고 불귀동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곽철은 계속해서 용악에게 자신의 지식들을 알려주었다. 비록 이곳에서 살아나갈지 어쩔지는 모르지만 곽철은 그것과 상관없이 용악에게 가르쳤고 용악도 그저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5일이 더 지나자 사람들은 이제 슬슬 미쳐가기 시작했다. 굶주림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소한 말만으로도 싸움이 일어나기 일 수였고 심지어는 칼부림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곽철과 용악도 마찬 가지였다.
곽철이 가져온 고기가 떨어진지는 이미 오래였다.
용악은 이제 가끔 정신을 잃는 일이 생겼다.
다행이도 가끔씩 비가 내렸고 또 내린 비가 고여 있었기에 물은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다.
‘음...?’
기절과 수면의 경계에 머물던 갑자기 용악은 자신의 후각을 자극하는 피 냄새에 잠에서 깨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피 냄새와 함께 나는 생고기의 비린내에 잠에서 깼다. 용악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작은 고기토막을 보았다.
‘이게 어디서?’
용악은 곽철의 손 위에 있는 고기를 보고 곽철을 바라보았다. 곽철은 용악보다 더 힘든 모습이었다. 이미 그의 갑옷은 손질을 하지 못한지 오래고 그의 얼굴을 피로와 굶주림으로 하얗게 변해있었다. 곽철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용악에게 먹으라는 눈짓을 보였다.
‘이게 어디서 난거죠? 형? 설마?’
용악은 곽철의 허벅지에 있는 핏자국을 보고 자신의 생각이 맞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제만 해도 없던 핏자국이다. 곽철이 누군가 싸워서 부상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형이?
“형... 왜? 왜? 꼭 그래야 해요? 네?”
“조용...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안 돼. 조용히.”
곽철은 용악의 입에 손가락을 대며 말하기도 힘든지 느릿느릿하게 그리고 조용히 용악에게 말을 했다.
저것은
바로 곽철 형의 살이다.
인육을 먹니 못 먹느니 하는 것은 나중 문제다.
‘형... 왜... 나에게 이렇게 까지 하는 거죠? 왜?’
“조용히... 그냥 먹어둬... 너는 반드시 살아야 하니까...”
‘내가 왜?? 내가 뭔데 형이 이렇게 까지 해야 되는 거죠? 형은 어쩌라구요? 형은?’
용악은 그저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왜 그러는지 몰랐다.
그저 눈물이 나왔다.
다 말라버린 눈물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로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 했는데도 눈물이 막 흘러 나왔다.
곽철은 용악에게 계속해서 먹으라고 재촉했고 용악은 결국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은 지금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음식물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곽철의 생명이다.
용악는 추악한 자신의 몸을 저주하면서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다. 이 모순되는 모습에 용악은 스스로가 정말 혐오스러웠다. 용악은 은근히 다시금 고기를 바라는 자신의 모습이 몸서리 칠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곽철은 조용히 용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으며 잠이 들었다. 마치 잘했다는 듯 칭찬하는 모습이었다.
‘무엇을 잘했다는 겁니까!!’
용악은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그날 이후로 곽철은 밤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쯤 용악에게 자신의 살점을 하루에 한번 씩 띠어서 주었다.
이제 곽철의 바지에 핏자국이 없는 곳이 없었다. 곽철은 용악이 뭐라고 말도 하기도 전에 이미 자신의 살을 갈라서 용악에게 주었기에 용악은 항상 눈물을 흘리며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아기새가 어미새 에게서 음식을 받아먹는 것처럼...
그렇게 5일이 더 지나가자 30명의 사람들 중 5명은 서로 싸우다 죽어버렸고 이제 용악과 곽철을 포함해 25명만 남아 있었다. 그동안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자들도 있었지만 칼을 벽에 박고 불귀동을 나간 무림인이 나가자마자 화살꼬치가 되어 불귀동에 다시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는 아무도 나가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밤 용악이 불귀동에 가친지 보름이 되던 날.
불귀도가 시끄러워지면서 불귀동 근처에도 해적들이 다가오는 듯 횃불의 빛이 밖에서 흘러 들어왔고 여기저기서 소란스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불귀동에 갇힌 자들은 모두 힘이 빠진 모습으로 과연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고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위에서는 해적들이 서로 뭐라고 하며 내기를 하고 있었고 불귀동 주위에 원을 그리고 앉아 불귀동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불귀동 안으로 어떤 바구니가 줄에 매달려 천천히 내려왔다.
정확하게 불귀동 가운데로.
용악은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살펴보다가 어디선가 나는 음식냄새에 잠이 화들짝 깼다.
저 바구니에 들어있는 것은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술도 함께 들어 있는 듯 주향도 함께 풍겨져 나왔다. 바구니가 땅에 닿자 한 사람이 칼을 팽개치고는 바구니를 향해 달려갔다.
“우아아! 내거다!”
바구니는 꽤 작아서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1인분도 채 되지 않았다. 용악은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칼을 쥐고는 바구니를 향해 뻗어가던 그의 손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깔끔한 솜씨!
실력 있는 무림인이다.
피 냄새에 취한 것일까?
달빛에 빛나는 칼날에 취한 것일까?
음식냄새에 취한 것일까?
사람들은 일제히 칼을 들고 바구니를 향해 달려갔다.
“우아아! 내거다. 내거야 내거!”
팔이 잘린 자는 그렇게 허우적거리며 바구니로 달려갔고 누군가 그자의 등에 칼을 박아 넣었다.
“아악 내 팔! 네가!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아는 사람이었던가?
배신을 당한 그자는 처절하게 자신을 베어버린 친구를 향해 소리쳤지만 그 친구 역시 어디선가 날아오는 칼날에 쓰러졌다. 전장도 이런 처절한 전장이 없을 것이다. 그 동안 시름시름 앓던 사람들이 어디서 이런 힘이 났는지 굉장한 실력으로 칼을 휘두르며 바구니를 향해 달려갔다.
해적들은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웃으며 박수를 치기도 했고 무언가를 던지기도 했다.
용악과 곽철은 그 미쳐버린 공간에서 조용히 호흡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용악과 곽철 말고도 그런 자세를 고수하고 있던 사람은 3명이나 더 있었고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나서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구니를 향해 달려가던 자중 남아있는 자들은 없었다. 남은 것은 이제 바구니를 향해 달려들던 자의 가슴을 쪼개 버린 자와 용악과 곽철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검객 2명이였다.
“역시 그대는 살아있군. 자네들도 말이야. 자네들은 젠국 검객들인가?”
바구니를 향해 달려들던 자들을 모조리 베어 넘긴 그 사람은 바구니 곁에 서서 곽철을 향해 칼을 겨냥하고 말한 후 이제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서는 2명의 검객에게 말을 했다.
“훗, 못 알아듣는 건가? 그나저나 그 꼬마가 누구이기에 그렇게 애지중지 하는 거지?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서 말이야. 설마 우리가 몰랐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겠지?”
그자는 칼등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했다. 하지만 그 와 상관없이 2명의 검객은 그 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해적들도 숨죽이고 조용히 있던 그 순간!
3명의 칼은 서로를 갈랐다.
칼집에 들어있던 2개의 도(刀)는 눈부신 광휘를 뿜어내며 그 자를 향해 날아갔고 그자의 어깨위에 있던 칼 역시 광휘를 뿜어내며 두 사람을 노렸다.
절정의 쾌검수 들의 결투!
승부는 한 순간 이었다.
번쩍하고 3개의 빛줄기는 상대를 향해 날아갔고 그 빛줄기가 끝나는 순간 3개의 핏줄기가 생겨났고 2명의 목숨은 사라졌다.
살아남은 자는 말없이 칼을 휘두르던 젠국 검객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부상을 입었는지 허벅지에 핏줄기가 보였다.
“무사는 부상당한 자를 먼저 공격하지 않아. 그것이 바로 무사의 명예다. 너희 한제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그는 어눌하고 느릿한 한제국어로 자신들에게 뭐라 하던 그자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그리고는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고는 곽철에게 다가갔다.
‘부상당한 자를 공격하지 않는다니. 그래서 곽철형을 건들지 않고 그자에게 칼을 휘두른 것인가? 그리고 이제 자신도 부상을 입었으니 곽철과 싸우겠다는 것이고?’
용악은 곽철을 바라보았다.
그의 쾌검을 빨랐다.
과연 곽철이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곽철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용악을 향해 일그러진 웃음을 지어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형...’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선 곽철은 갑옷 안에서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검은색 표범무늬의 가면을 썼다.
‘표범무늬가면? 역시 호표기인가? 형 그런데 갑자기 그거는 왜?’
곽철이 가면을 뒤집어쓰자 젠국 검객은 젠국어로 곽철에게 말을 했다. 마치 당연히 곽철이 자기나라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표범무늬가면... 그렇다면 호표기인가? 전장의 말살자?!”
“보통 무사는 아닌 것 같군 호표기를 아는 걸보니. 그럼 이 가면을 쓰는 이유도 알고 있겠지?”
“물론! 그대가 호표기라면 나 역시 환영한다. 무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강한 상대와 싸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용악의 걱정과는 다르게 곽철은 능숙하게 그자의 말에 젠국어로 대답을 하고는 칼에 손을 댔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다.
초승달이여서 그런지 달빛은 아주 흐릿하고 희미했다.
그런 초승달이 구름에 가려 세상이 암흑으로 변한 순간!
두 사람의 칼은 서로를 향해 나아갔고 칼이 부딪치는 소리 하나 없이 서로를 베었다.
초승달이 구름을 밀어내고 달빛을 다시 비출 때 용악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가슴과 목에 피를 흘리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르륵... 쿨럭...
“빠르군... 과연 호표기인가.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도. 좋은 승부였다.”
목이 갈린 젠국 무사는 한차례 피를 뱉어 내고는 곽철에게 말을 했고 곽철 역시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둘 다 쓰러졌다.
한사람은 목이 베였지만 한사람은 가슴을 배였기에 아직 목숨은 붙어있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으리라. 갑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젠국 무사의 칼은 갑옷을 가르고 곽철의 가슴을 갈라놓았다.
누가 이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누가 이겼는지가 무엇이 중요하랴.
“형! 정신 차려요 형! 살 수 있어요. 형...! 흑흑...”
용악은 곽철의 흉갑을 벗기고 갈라진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조그마한 손으로 막아내며 애써 곽철에게 소리를 질렀다.
‘후후후.. 그래도 이 녀석은 살린 건가.
폐하 당신의 명령은 지켰습니다.
나의 임무를 완수 했습니다.’
용악은 곽철의 가면을 벗기고 그의 뺨을 치며 소리쳤다.
‘형 제발 살아줘! 제발.. 내가 어떻게 살아났는데...응? 제발 살아줘. 제발.....’
용악이 그의 얼굴이 얼굴을 대고 울부짖을 때 곽철은 애써 손을 뻗어 무언가를 집으려는 듯 했고 그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찼다.
곽철은 오래전 자신이 처음 호표기가 된 순간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연분홍의 꽃잎이 하늘 가득히 휘날리던 그 날.
검은색 표범과 호랑이가 엉켜있는 문양의 검은 갑옷과 표범무늬가면을 쓴 일련의 병사들.
그들 중 자신이 있었다.
황제께옵서 친히 검은색 가죽으로 감싸진 도파에 표범무늬가 장식된 검-호표기의 독문무기-를 건네주던 그 날의 기쁨과 환희를 지금... 이제 생의 마지막 순간에 느끼고 있었다.
“한제국에 영광을... 황제페하께 천하를...”
곽철은 그 말을 남기고 용악을 남겨 둔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형! 형!”
‘왜!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