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영 기병대-27화 (27/107)
  • 27장 - 바다 : 시작

    아이는 꿈을 꾸고 있었다. 황량하고 거친 사막, 그리고 거기서 불어오는 후끈한 모래바람 그리고 하늘 높이 떠서 세상을 굽어보는 태양까지 그곳은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했던 곳이다.

    다시 끝없이 펼쳐진 녹색의 초지 하늘과 땅이 붙어 버린 곳. 그리고 붉은 물로 염색한 듯한 그의 아버지의 옷, 아버지의 옆에 박혀 있는 검푸르고 붉은 창.

    사막, 모래바람, 피, 창, 옷, 웃음, 사막, 모래바람, 피, 창, 옷, 웃음 계속해서 아이는 아비의 죽음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다. 이 년전. 바로 북경으로 오던 도중 꾸었던 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꿈에 몇몇 인물들이 추가 되었다. 잠깐 동안 있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었던 군무관과 사관관의 생활. 조운, 마충, 허산, 조식과 모용소천 그리고 관성빈... 사관관에서 사귄 친구들.

    그리고 나를 뒤에서 도와주던 허승대장군과 석교관님. 항상 웃는 모습인 여민형

    용악은 그들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고 나른한 몸을 느끼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아. 또 쓰러졌군. 여긴 어디지.’

    용악은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딱딱한 나무 침상에서 일어났다. 주위는 온통 나무로 되어 있는 방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조그마한 방이었다. 창문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나무침상과 작은 초롱불만 켜져 있는 그런 방.

    ‘내 눈이 이상한건가...’

    용악이 마주하고 있던 초롱불이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용악은 자신의 눈이 이상해진 듯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금 살펴보았으나 자신의 눈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내 눈은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 초롱불은 혼자 흔들릴 수 없지. 내가 흔드는 것도 아니야. 그럼 이 방이 흔들리는 건가? 흔들려? 방이? 흔들리는 방이 있는 곳은 배?’

    용악은 여민과 함께 보았던 운하에 있던 배를 떠올렸다.

    ‘그럼 여긴 배 안 인가? 일단 나가 봐야겠다.’

    용악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천으로 감겨 있는 자신의 배를 만지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있던 곳은 지하 인 듯. 갑판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상당히 걸어 올라가야 했다. 갑판 문을 열자 밝은 달빛이 눈을 가로 막았다.

    ‘윽 눈부시군.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건가.’

    용악은 달빛만으로도 자신의 눈이 아파하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눈을 가리며 빛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용악은 갑판으로 오를 수 있었다. 사방은 검은 무언가로 뒤 덥혀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단지 검은 무언가 뿐.

    이것은 마치 악마의 손길 같았다.

    용악은 책에서 읽은 악마를 떠올리며 피식 하고 혼자 웃었다. 이제야 슬슬 배가 물길을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거대한 무저갱의 암흑의 매혹에 빠져 용악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용악은 갑판 바깥쪽으로 좀 더 걸아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멋있게 갑판 난간에 앉고 싶었지만 그런 건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 잘못 하면 빠져죽기 십상이다.’ 라고 여민이 해준 말을 떠올리며 손을 뒤로 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원하게 바닷바람이 불어 왔다. 하늘에는 정말 말 그대로 셀 수 도 없을 만큼 많은 수의 별들이 박혀있었다.

    용악은 자신이 왜 여기 와 있는지,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이 배는 어디로 향하는 건지, 등의 상념을 애써 깊숙이 집어넣고 그저 자신을 감싸며 흐르는 바람과 찬란하고 황홀한 별들의 노래를 즐겼다.

    용악이 세상을 잊고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 석교관은 선선한 날씨의 북경시내를 걷고 있었다. 요 며칠간은 정말 힘들었다. 미친 조비대장군은 날뛰며 용악를 죽여야 한다고 반역자의 자손은 어쩔 수 없다고 하며 바락바락 난리를 피웠고 자신은 비무대에서 펼친 무공이 무엇인지 알아본 다른 교관들과 장군들에게 끌려 다니며 한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 보고를 하는 날이니.

    석철원은 북경시내를 돌아다니는 인파를 뚫고 어느 한 주루로 들어갔다. 그렇게 허름하지도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서민들이 애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주루였다. 주루에 들어서자마자 확~ 하며 술 냄새 풍겨져 나왔고 여기저기서 왁자지껄 떠드는 손님들이 보였다.

    석철원은 자꾸 자신의 다리를 거는 누구의 다리인지 모르는 다리를 밀치며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그래도 1층보다는 조용했지만 50보100보란 말이 어울리게 2층도 마찬가지로 시끄러웠다.

    석교관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자신이 천하제일인 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작자를 발로 차주고 자신이 만나러 온 인물을 찾았다.

    2층 분위기와 동떨어진 분위기를 풍기며 술을 마시는 두 사람이 보였다.

    ‘두 사람? 한사람일 텐데.’

    석철원은 혼자 고개를 잠깐 흔들며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정답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사람은 자신이 만나야 할 사람이 맞았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처음보는 사람인데 말이다. 예사롭지 않은 창이 벽에 기대어 지친 몸을 쉬고 있었다. 술잔을 드는 그의 상처투성이인 손이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아 왔는지 알려주는 듯 했다.

    “아. 어서와 앉게”

    “예. 폐하”

    황제 유공은 석교관에게 의자를 건네며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자네도 한잔 하겠는가?”

    “아니요, 됐습니다. 보고 마치고 어디 가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런가?”

    유공은 그냥 예의상 물어 봤다는 듯이 별 아쉬움도 없이 마주 앉은 사내에게 술을 건네며 자신도 술잔에 가득찬 술을 비웠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지. 흠. 황제폐하와 같이 있는 것을 보니 무언가 있는 사람인 것 같기는 한데. 우리 일을 외인이 알아도 된다고 생각 하시는 건가? 석철원은 유공 옆에 앉아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렇다. 여민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역시 직업병이다.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

    “아. 내 친우 일세.”

    “친우. 누구신지”

    석철원은 누구와는 다르게 예의 바르게 다시금 물었다.

    ‘내가 말하고자 한건 친우건 무엇이건 간에 여기 왜 왔냐 이거다.’

    “아. 이 친구는 제 2감찰대장이야.”

    “그렇습니까?”

    ‘제2 감찰대장이라고? 흠... 제2감찰대장이라. 2감찰대장이면 보고를 들어도 괜찮겠지. 저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긴 하지만 이 직업이 원래 많이 알면 알수록 힘든 직업이지.’

    석철원은 그렇게 자신의 궁금증을 애써 억눌렀다.

    “누군지 안 궁금하나?”

    “네. 별로 안 궁금합니다만....”

    “허허.. 자네 별로 인기가 없구만.”

    유공은 석철원의 대답에 허탈해 하며 웃으며 술을 마셨다. 내심 누군지 물어보기를 원했나 보다. 석철원은 무슨 말이 나올까 유공의 입만 바라보았고 유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아. 내가 말하고 싶어서 안 되겠네.”

    “말씀 하시지요”

    “이 친구가 한설일세. 무림에서는 파검이라고 부르더군”

    “넵. 그렇습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도 반갑네.”

    유공은 마치 자랑한다는 듯이 말을 건넸고 석철원은 속마음은 감춘 채 파검 한설에게 인사를 했고 그 역시 인사를 했다.

    ‘뭐냐. 결국 자기 자랑 하고 싶었던 거냐? 내 부하 중에 이런 놈들도 있다고 말이냐? 파검이든 파도든 파창 이든 내 알바 아니다고. 젠장... 사람들 많을수록 안 좋은데 말이야.’

    석철원은 여민과는 전혀 상반되는 반응을 보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일단 보고부터 하겠습니다.”

    “아. 그렇게 해”

    유공은 관심도 없는지 그냥 술잔을 들어 한설이라 불린 사내와 건배를 하고는 술을 마시며 시큰둥하게 대답을 했다.

    “제 9감찰대장 석철원 보고합니다.

    보고서 번호 16 용악.

    첫째. 용악의 신체 능력. 무공이해력은 상상(上上) 무공과 신체의 조화 상상(上上) 무공활용력 상하(上下) 응용력 상하(上下) 체력 상중(上中) 체력회복력 상중(上中) 지구력 상중(上中) 근력 상상(上上) 무공에 대한 집중력 상상(上上) 돌발상황대처능력 상중(上中) 판단력 상중(上中) 판단 후 실행능력 상중(上中) 순발력 상상(上上) 민첩성 상상(上上) 유연성 상상(上上) 반사능력 상중(上中) 무의식중 반사능력 상상(上上) 주변기물활용능력 중상(中上) 기억력 중상(中上) 통솔력 증명안됨. 친화도 하하(下下) 호기심 하중(下中) 잠재능력 특상상(特上上) 신체적 한계는 두 번 정신적 한계는 한 번 뛰어넘음.

    둘째. 현재 용아창법 수련정도. 제 5초식인 흑산포까지 첫 번째 한계를 뛰어 넘음

    셋째. 성격. 내성적이나 자존심은 강함. 아버지와 관계된 일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나 속으로는 다 쌓아두고 있음. 다른 아이들과의 친화도는 떨어지나 특유의 권위가 있어 통솔력 있음.

    넷째. 현재까지의 상황. 비무대회 후 의약당에서 전해준 바로는 조창은 허벅지 뼈가 부러졌고 용악은 내장은 다치지 않았지만 옆구리에 길이 20센미르 깊이 5센미르 가량의 자상을 당함. 비무대회가 그렇게 격렬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다각도로 조사중이나 조비대장군의 입김이 닿아 있지 않나 의심 중.

    그 후 조비대장군에 의하여 현재 죄수들과 함께 동해군도 함락작전에 투입되기 위하여 동해를 통해 강소성 계동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가을대전이 끝난 지도 벌써 보름이 다 되어가니 지금쯤이면 강소성 동해해협을 지나고 있을 것으로 보임. 이상입니다.”

    유공은 보고서를 듣고 편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누워 술잔을 돌리며 생각을 했다.

    ‘후우. 역시 자네 아들인가? 어쩌면 자네보다 더 뛰어날 지도 모르겠어. 후후 그나저나. 미안하군. 알게 모르게 도와주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머니 속의 송곳은 삐져나온다고 자네의 아들 역시 그러하네. 하지만 2년이 지났으니 은근히 마음은 편하다고나 할까. 그래도 역시 미안하군.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이거 밖에 없어서 말이야.’

    유공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침묵에 잠겨 있자 석철원과 한설도 덩달아 침묵에 잠겼다. 아니 한설은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제외한다. 그 무거운 침묵을 깨고 유공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 아이에게 지금 누가 붙어 있지?“

    “예. 일단은 제 9감찰대원 중 한명이 배에 함께 타고 있고 강소에 도착하면 제 26감찰대가 맡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 아 참. 호표기대장 강서린이 강소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제 관할이 아니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강소에서 낭인들을 지휘해서 동해군도의 해적들과 싸운다 들었습니다.”

    ‘흐음. 그래? 강서린..... 20년 약속을 아는 자. 하지만 뭐 2년 동안 조용히 있었으니 지금 와서 뭐라 하기도 그렇군. 그가 지휘하는데도 해적들이 버티고 있다는 건가?

    해적들이라... 또 곤 제국에서 공작을 벌이는 건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복잡하군. 그나저나 강소에 있으면 용악을 맡겨도 괜찮겠군. 강소는 26감찰대가 맡고 있으니 말을 해놔야겠군. 아 그건 그렇고 이 친구 그때 비무대에서 감찰대 무공을 사용했었지 참... 이 친구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나? 쓸 만한 녀석 인거 같으니깐 말이야. 어디가 좋을까...‘

    “그래.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일단. 비무대에서의 제 무공을 보고 제 정체에 대해 의심을 품은 장군들이 늘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다른 곳으로 보내질 것으로 사료됩니다. 일단은 다른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일단은 사관관에 머물 생각입니다.”

    “그래 그렇게 해. 일이 있다고 했지?”

    “예.”

    “그럼 가보게”

    “예. 만세만세 만만세”

    석철원은 유공에게 인사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흠 여민과 함께 감찰대에서 손꼽히는 녀석이라... 여민이 웃음 속에 칼을 숨기고 있다면 저 녀석은 무표정 속에 칼을 숨긴 녀석이다. 재밌어... 역시 감찰대 녀석들은.’

    “어때 보이나? 저 녀석은?”

    “꽤 강하군요. 자기 절제도 할 줄 알고.”

    “자네보다?”

    “하하. 그렇지는 않지요. 몇 년이 좀 더 지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한설은 자신과 비교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웃으며 받아 넘겼고 유공도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제 몇 남지도 않은 친우에게 보이는 따스한 웃음이었다. 그렇게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을 나누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가을기운이 만연한 선선한 오후, 어느 객잔에서나 볼 수 있는 사소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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