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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영 기병대-14화 (14/107)
  • 14장

    밤은 깊어지고 어렴풋이 구름사이로 달이 힐끗힐끗 얼굴을 내미는 듯했지만 낮 동안 잠시 주춤했던 비가 밤이 되자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낮 동안 내린 비도 엄청났는데 지금보니 낮에 온 비가 이슬비라면 지금 내리고 있는 비는 장대비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0미르 앞도 자세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는 거세게 땅을 내리치고 있었다.

    대장군부의 북쪽에 위치한 허승대장군의 거처도 다르지는 않았다. 허승대장군은 아직도 정리할 일이 남았는지 허승대장군의 집무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대장군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대장군부 무기고의 지붕 위에는 피풍의를 여려 겹 겹쳐 입은 여민이 앉아있었다.

    여민의 피풍의 위에 남겨진 빗자국과 창대에 맺혀 있는 빗방울로 보아 한참 오래전부터 여기에 앉아 있었던 듯 했다.

    그는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여인내가 달려가지 않고 말이다.

    여민은 얼굴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손으로 닦으면서 피풍의로 좀 더 머리를 가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시인성이 낮아지는데 빗물이 직접적으로 눈을 가리면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

    ‘하아... 이게 무슨 꼴이야.. 잘하면 감기 걸리겠는걸... 그나저나 이렇게 비가 많이 내려서야 원.. 앞이나 제대로 보일런지 모르겠네.’

    여민은 창대를 한번 휘둘러 맺혀있던 빗방울을 날려버리며 생각했다.

    여민이 생각하기에 오늘처럼 재수가 없는 날은 분명히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이다. 그것도 큰 일이 말이다. 그리고 큰 일이 일어날만한 인물은 적어도 이곳 대장군부에는 허승대장군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재수 없는 일 때문에 허승대장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정말 어리석은 말이지만 서대륙의 철학자인 흄의 인과론 분석을 감명 깊게 읽은 여민은 왠지 모르게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인과론이라... 뭐 그렇게 복잡한 이론을 가져다가 안 붙여도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고, 아무 일 없으면 그걸로 좋은 거고.”

    여민은 혼자서 중얼 거리며 피식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여기 올라와서 이렇게 비를 맞고 있는 게 정상적인 행동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뭔가 찜찜해. 찜찜하다고.”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시키고 여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칠흑같은 밤이었다. 그것도 마치 장마철처럼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가 별로 안 오는 북경인데 오늘 같은 경우는 정말로 드문 경우였다.

    여민은 애써서 불이 켜져 있는 전각들은 살펴보지 않고 어두운 밤하늘과 담장주위를 주로 바라보았다. 밝은 곳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눈이 밝음에 익숙해져서 어둠속을 자세히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을까.

    이미 북경시내 대부분은 심해로 빠져드는 물고기떼 처럼 어둠 속에 잠겨가고 있었고 환락가와 몇몇 밤에 활동하는 건물들만 불을 발하고 있었다.

    여민이 올라가 있는 건물은 꽤 높아서 꽤 먼 곳까지 볼 수 있었다.

    ‘신경질쟁이는 아직도 일하고 있군. 처음 온 날부터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하는지 원...’

    그 순간 북쪽 담 을 타넘고 들어오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멀리서 보아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사람의 형체였다.

    이렇게 깊은 밤에 저렇게 단체로 담을 넘었다면 좋은 의도는 아닐 것이다.

    여민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운 좋게 허승장군의 집무실을 바라볼 때 그들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생각이 미처 이루어지기도 전에 여민의 몸은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서둘러 호각을 부르며 밑으로 떨어지듯이 내려갔다.

    허승대장군은 자신 앞에 놓여 있던 수북한 보고서를 모두 정리하고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편하게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웠다.

    강소에서 해적들과 싸우고 중간보고를 위해 올라온 것이 바로 오늘 아침이다.

    자신의 집에 왔다는 안락함에 정신이 나태해 질 수도 있었지만 허승대장군의 정신은 오히려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그는 여민이 나가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몸조심하라고. 오늘은 뭔가 이상한 날이라고 말이다.

    비록 두 사람이 히히덕거리며 장난스럽게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둘 중 한명은 장군들을 거느리는 대장군이고 다른 한명은 병사 만 명을 지휘하는 장군이다. 그저 아부를 하고 돈을 가져다 바쳐서 얻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허승대장군도 여민의 말을 그저 스쳐가 듯이 지나 칠 수 없던 것이다.

    허승대장군은 손에 쥔 단검의 날카롭고 차가운 날을 느끼며 생각을 이어갔다.

    밖은 온통 비 내리는 소리가 화음을 이루고 있었고 그 속에서 낮선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뭔 가 있다.’

    허승대장군은 느껴질 듯, 말 듯하는 이질감을 찾으며 조용히 책상에 있는 단검 몇 자루를 더 챙겼다.

    ‘여민 이 녀석의 말을 듣기를 잘했군! 좋아! 무언가 느껴진다! 느껴져!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살기인가! 잘 정제된 살기. 오직 한 순간에 뿜어져 나오기 위해 천천히 쌓아놓고 단 한순간을 노리는 살기!’

    바로 자객의 살기였다.

    ‘그래.. 네 녀석이 왜왔는지, 누가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일단 사로잡으면 되니...’

    집무실 밖에 있는 호위들이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수준 높은 자객임이 분명했다.

    ‘그래. 어디냐. 어디 있는거냐? 천장? 바닥? 아님 책상 밑? 벽? 창문 뒤?’

    허승대장군은 단검을 쥔 손을 천천히 이완시키면서 자객이 어디에 있는지 탐색해 갔다. 전신의 감각을 모조리 동원하면서 천천히 기를 운용해 몸을 이완시켰다.

    ‘바닥? 아니..창문 뒤? 아니다.. 그럼. 천장?’

    허승대장군은 천장으로 주위를 집중 시키고 있을 때 찢어지는 듯한 호각소리를 들려왔다.

    ‘호각소리?!’

    호각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허승대장군이 자객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천장이 무너지며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역시 저기 였군!’

    허승대장군은 뭔가 자신의 머리위에서 부서지는 소리를 듣자마자 앞으로 튕겨지듯 몸을 날려 바닥에 등을 대며 한바퀴 굴렀다. 땅에 등이 닿는 순간에 단검을 던진 것은 당연한 말씀.

    ‘맞든지 안맞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허승대장군은 그렇게 생각하고 단검을 던지고 일어나자마자 무기가 놓여 있는 벽 쪽으로 달려갔다. 허승대장군의 빠른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자객은 단검에 어딘가 맞은 듯 했다. 쇠붙이가 살을 파고드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큭, 저걸 맞다니. 운이 좋군’

    허승대장군은 그 와중에도 피식 웃으며 벽으로 달렸다.

    ‘다 왔다! 거리는 이제 3미르! 조금만 더 가면된다!’

    허승대장군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왼발에 힘을 주었다.

    빠각!

    ‘빠각? 밑인가! 한 놈이 아니었던가! 여기로 올 줄 예측 했다는 건가!’

    허승대장군은 어디선가 나무판이 부러지는 소리를 듣고 바로 발을 멈추고 옆에 있던 의자를 손으로 집고 물구나무를 서면서 밑에서 튀어나오는 무언가를 피했다.

    피하는 동시에 집고 있던 의자를 집어 뒤에서 달려오는 자객에게 던지고는 밑에서 솟구친 자객에게 쇄도했다.

    ‘이 빌어먹을 놈들. 특수공작군 대장군이 나다! 이런 건 너보다 내가 익숙하다고!’

    양손에 든 단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대장군부 밀전무공인 은사검법을 펼쳐졌다.

    두 마리의 뱀이 상대방의 손을 타고 올라갔다. 자객은 자신의 단검을 타고 어깨로 올라오는 허승대장군의 단검을 피하기 위해 뒤로 몸을 날렸다.

    시간을 끄려는 수작!

    ‘뒤따라오는 놈을 기다리는 건가! 하지만 어리석다! 은사검법은 절대로 뒤로 물러서면 막을 수 없는 무공! 2마리 뱀을 너무 얕봤군!’

    허승대장군은 뒤로 물러서는 자객에게 더욱 다가가면서 단검을 휘둘렀다.

    은사검법(銀蛇劍法) 쌍비사(雙飛蛇)!!

    자객은 자신의 배를 스치고 지나가는 단검을 보고 자신의 동료가 목표물을 해치 울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만큼 시간을 끌고 자신도 살아남았으니 목표물은 이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웬걸 자신의 배를 스치고 지나갔다고 생각한 단검은 자신의 배에 박혀있었다.

    ‘스치는 순간에 검을 날려 보낸 건가!’

    자객은 신음 심키며 화려하게 움직이는 허승대장군을 바라보았다.

    허승대장군은 한손에 들고 있던 단검으로 자객의 배를 그으면서 순간적으로 시야를 가로막고서 다른 한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잘려진 옷가지 사이로 날려 보낸 것이었다.

    앞에 있던 자객에게 단검을 날려 보낸 후 지체하지 않고 자객의 어깨를 타넘으면서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면서 뒤에 따라오는 자객에게도 남은 단검 하나를 집어 던졌다.

    맞든 안 맞든 상관없었다. 그가 착지 할 곳에는 이미 다른 무기, 그것도 그의 애병이 위치하고 있으니!

    허승대장군은 바닥에 착지 하자마자 자신의 애병인 장군도를 집어 들고 궁기병들이 사용하는 조그마한 방패를 왼손에 끼웠다. 도를 집어 들고 방패를 차는 모습은 매우 숙달되었는지 자객이 덤벼들기도 전에 이미 무장을 완전히 했다!

    “하하. 자! 와라! 이제 2회전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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