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장] 지성자 2
무황연합군과 은둔반선들이 천계 총단에 도착한 것은 사흘 후였다.
이중 무황연합군에는 새롭게 합류한 마교와 동방무맹, 은자림 무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백만이 훌쩍 넘은 지원 병력이 도착하자, 천제를 비롯한 천계 총단 무사들이 일제히 그들을 환영했다.
마침 폐쇄진법의 마지막 관문이 돌파되기 직전이라 그 기쁨은 매우 컸다.
일단 하루 정도지만 함께 대책을 수립할 시간이 확보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천계 태자로 행세하고 있는 백자안의 기쁨은 남달랐다.
비록 지난 사흘간 지성자 수련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지만 죽었거나 돌로 변했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과 재회했기 때문이었다.
천선생과 천상선녀 등을 통해 미리 이야기를 듣긴 들었지만 아무래도 직접 보니 실감이 났다.
특히 불패마왕, 임요요, 백두노인, 한강어옹, 생사신의, 동정어옹의 건재가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처럼 통성명하며 미소를 보내는 것으로 만족했다.
물론 기존 무황연합군을 이끌고 있던 방일화, 백소영, 절대황녀, 청룡선생의 무사함을 확인한 것도 기쁜 일이었다.
그 외 은둔반선들의 대표인 무법반선과의 재회 또한 든든한 마음을 가지게 했다.
하지만 백자안을 유독 긴장시킨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양신이었다.
양신은 외관상으로 백자안과 똑같았다.
백자안이 보기에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사실 그가 양신을 직접 이렇게 자세히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분신술을 펼쳤을 때 뭔가 불완전해져 그 역시 의식이 흐려졌기 때문이었다.
‘통제가 전혀 되지 않는다. 양신 역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구나. 일단 신중할 필요가 있겠다.’
백자안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일단 마계연합군을 격파할 때까지 양신의 힘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백자안이 양신과 통성명을 한 후 말했다.
“하하하! 반갑습니다. 앞으로 지존맹주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네.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직접 태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양신, 즉 지존맹주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백자안이 양신의 호칭을 지존맹주로 한 것은 혹시라도 모를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긴급 작전 회의에 참석한 이백여 명의 고수들이 아무 의심 없이 동의를 해주었다.
지존맹주가 말했다.
“먼저 전황을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조금 전에 들으니 내일 아침이면 마계연합군에 의해 폐쇄진법이 파훼될 것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네. 최대한 버텨봤지만 어쩔 수가 없을 듯합니다. 벌써 오늘도 해가 저물었으니 지금 바로 작전을 수립해야 할 겁니다.”
천선생이 천계를 대표해 말했다.
천제가 공력을 잃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일단 그가 실질적으로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셈이었다.
무법반선이 말했다.
“먼저 천계에서 생각하고 있는 계획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정확한 놈들의 병력과 기본 작전 계획을 듣고 수정하거나 보충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네. 먼저 놈들의 병력은 대략 천만 정도로 추정됩니다. 일단 마계 본대와 마물, 요괴 등이 대략 오백만입니다. 거기에다가 마계살수단 백만 명, 돌강시 부대 삼백만, 기타 특수부대 백만 이렇게 오백만 정도가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 중 마계살수단과 돌강시 부대, 특수부대 놈들의 움직임은 지금까지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놈들이 힘을 분산시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는듯하군요. 그에 비해 우리 병력은 대략 이백만 정도에 불과하니 수적으로도 매우 불리합니다. 가히 중과부적이라 할 수 있겠군요.”
무법반선이 안색을 굳혔다.
그는 천계와 무황연합군의 중간 위치에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황을 파악하려 하고 있었다.
지존맹주가 말했다.
“병력이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절대고수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소문대로 마제가 정말 지성자가 된 게 확실합니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스스로 지성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폐쇄진법이 그나마 지금까지 버텨준 것으로 봐서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듯합니다. 먼저 기본 계획을 말씀드리자면 기본적으로 전면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전면전에 앞서 놈들의 지휘부 고수들을 대거 제거해야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지존맹주님의 무공 경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저 말입니까?”
지존맹주가 당황해하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이 진짜 백자안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내가 양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구나.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백자안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였다.
자신이 아직 지성을 이루지 못한 사실이 천계 내에 알려져 있었기에, 지금 유일한 희망은 지존맹주였다.
사실 마계연합군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지존맹주가 진짜이든 가짜이든 그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과연 지존맹주가 마제를 제거할 수 있는가였다.
“저 역시 지성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제를 상대할 자신이 있으니 모두 저를 믿고 따라주십시오.”
지존맹주의 말에 지휘부 고수들이 술렁였다.
“총지휘권을 달라는 뜻이오?”
잠자코 있던 천제의 질문이었다.
지존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릇 모든 싸움에는 지휘체계의 통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총지휘권을 가지려는 것은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다른 뜻은 없습니다.”
지존맹주가 말을 한 후 몸 밖으로 금빛 기운을 뿜어냈다.
한데 그것은 바로 백자안의 최고 절기 중 하나인 지존금광이 아닌가.
자신의 무공 실력을 보여 동의를 끌어내기 위한 것으로, 다들 지존맹주의 기운에 눌려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훌륭한 무공이오. 지존맹주께서 총지휘권을 맡는 게 당연한 것 같소.”
천제가 먼저 수긍하자, 무법반선 역시 흔쾌히 수락했다.
“동감입니다. 실로 대단한 무공입니다. 그 정도 경지라면 마제와 충분히 겨룰 수 있을 겁니다. 돌로 변한 동생분을 회복시켰다는 말을 듣고 믿지 못했었는데, 이제야 믿게 되었습니다.”
무법반선의 말에 지휘부 고수들이 일제히 포권으로 동의를 표시했다.
절대황녀 역시 다시 한번 확인을 해주었다.
“이미 황군의 지휘권은 지존맹주께 모두 넘긴 상태라는 것을 확인시켜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지존맹주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백소영과 방일화 역시 지존맹주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오라버니가 저를 회복시켜준 것은 사실이에요.”
“사부님의 무공은 최근 들어 거의 완성되셨어요. 충분히 마제를 제거할 수 있으실 거예요.”
“오!”
“하하하!”
지휘막사에 웃음꽃이 피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마제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한데 지존맹주가 그것을 상당 부분 해소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백자안의 마음은 갈수록 불편해지고 있었다.
지존맹주가 잘 나갈수록 자신의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고 할까.
큰 전쟁을 앞두고 최대한 자제하려 했으나 본능적인 시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일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다고 하지만, 직접 당해보니 비로소 실감할 수 있겠구나. 하지만 구태여 내가 진짜라는 것을 주장하고 밝혀낼 필요가 있을까.’
백자안은 문득 초연한 마음이 들었다.
지존맹주가 비록 자신의 양신이기는 하지만 자신 대신 마계연합군을 격파해준다면 이 상태로 계속 지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가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특히 가족들을 지존맹주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일단은 좀 더 지켜보자. 이미 저자의 능력이 나를 훨씬 능가한 것 같으니, 마제를 제거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처리하면 된다. 다만 한 가지 확인할 필요는 있겠구나.’
백자안이 마음을 정리한 후 지존맹주에게 물었다.
“맹주께서는 돌강시 부대를 백 소저처럼 회복시킬 자신이 있습니까?”
“네. 마제를 소멸시키게 되면 많은 부분이 가능해질 겁니다. 사랑하는 제 부모님과 남동생이 여전히 돌로 변해있으니, 어찌 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방법이 있다니 다행이군요. 맹주께 기대가 큽니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아직 지존맹주가 자신에게 어떤 적의도 보이지 않았기에 마치 쌍둥이 형제를 보는 듯 친밀감까지 느껴졌다.
바로 그때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지존맹주가 갑자기 백자안에게 전음을 날린 것이다.
「후후후! 태자 네놈의 진정한 정체가 나의 본신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양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다니, 내가 마제를 제거한 후 힘이 빠질 때를 기다려 제거할 속셈임을 모를 줄 아느냐? 네놈의 생각을 내가 모두 간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가증스러운 놈!」
부르르.
백자안의 손이 떨렸다.
전음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양신인 지존맹주가 대담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지금의 상황에 자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백자안이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지존맹주에게 전음을 날렸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지금이라도 그대의 정체를 사람들 앞에서 밝힐 수 있소.」
「후후후! 과연 누가 네놈의 말을 믿어주겠느냐? 비록 너는 나의 본신이지만 나를 위협할 유일한 적이기도 하다. 분명히 너는 이번 전투가 끝난 후 나를 제거해 몸을 회수하려 했겠지?」
「그렇소. 한데 지금 보니 내 생각을 완전히 읽지는 못하는 것 같구려.」
「그건 당연하다. 나는 너의 불완전한 양신이니까. 내 말을 잘 들어라. 지금 당장 네놈을 죽일 수도 있으나 그렇게 되면 나 역시 소멸할 우려가 있으니, 전투가 끝날 때까지 참겠다. 대신 내 몸을 회수할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마제를 제거해준다면 약속하겠소. 다만 그대가 먼저 나를 죽이려 한다면 그때는 나 역시 가만히 당하지는 않을 것이오.」
「후후후! 너를 죽이면 나 또한 소멸할 가능성이 큰데 어찌 함부로 공격하겠느냐? 그 점은 의심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너는 지금대로 태자 행세를 하면서 살도록 해라. 대신 마제를 비롯한 마계연합군은 내가 책임지고 제거해주겠다.」
「마제를 죽이려면 지성자가 되어야 할 것이오. 그대가 마제를 직접 제거하려는 것은 위기를 이용해 지성자가 되려는 때문이 아니오?」
백자안의 전음에 지존맹주가 처음으로 흠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양신만이 아니오. 본신 역시 알 수 있소. 아니 본래는 훨씬 더 잘 알게 되지. 하지만 그대는 불완전한 양신이기 때문에 대강 추측해보는 것이오.」
「그랬었군. 좋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만약 내가 지성자가 되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지성자가 되면 양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너 역시 지성자가 되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게 아니냐?」
「물론이오. 그대는 사실 마제보다 더 위험한 존재요. 양신의 폭주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오. 결국 우리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지성자가 되는가의 싸움이 될 것이오. 그때까지 서로 자제하도록 합시다. 어떻소?」
「후후후! 좋다! 어차피 최후 승리자는 내가 될 테니까. 그 이유를 알고 있느냐?」
「모르오. 앞날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소?」
「솔직하군. 이유는 간단하다. 너는 혼백만 살아있지 진짜 본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남의 몸에 들어간 본신은 절대 양신보다 앞서 나갈 수 없다. 너는 내가 지성자가 될 때까지만 살게 되는 시한부 인생이라 할 수 있지.」
「그럴 수도 있을 것이오. 하지만 스스로를 돕는 자는 하늘도 돕는 법이오. 일단 이 정도로 합시다.」
「좋다. 어차피 내일 전장에서 나는 지성자가 되고 너는 소멸할 것이다. 그것이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