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장] 시산혈해 1
[제79장] 시산혈해
거처로 돌아온 백자안은 서둘러 몸속에서 천상선녀와 천선생을 꺼내놓았다.
물론 두 사람 중 천선생은 백자안이 특수대법을 펼쳐 뇌옥대마신을 속인 것이었다.
겉으로는 특수 화골산을 부어 몸을 녹인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무영신투술을 가미해 미리 바꿔치기한 이후였다.
다시 말해 몸 전체가 녹아내린 천선생은 일종의 환영이라 할 수 있었다.
“천선생님. 괜찮으세요?”
천상선녀가 천선생을 흔들어봤으나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어떻게 하죠? 저보다 내상이 더 깊으신 것 같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혈도는 풀렸고, 내공 치료를 하면 깨어나실 겁니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으며 천선생에게 내공을 넣어주기 시작했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한시진은 더 있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천선생을 치료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러면서 향후 계획에 대해서도 생각을 계속했다.
이대로 천계 총단으로 가게 되면 아무래도 다시 마계로 복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시 마제를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 속이는 것은 어렵다. 차라리 천계 쪽 사람들과 힘을 합쳐 단체로 마계와 대항하는 것이 현명하다. 무엇보다 천계 태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 변명을 마제가 믿을 리가 없다.’
* * *
천선생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해뜨기 직전이었다.
놀란 그에게 백자안과 천상선녀가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준 것은 물론이었다.
천선생은 총군사답게 단번에 모든 상황을 간파했다.
“백 공자. 고맙소이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여전히 고민 중입니다. 이제 곧 사람이 올 것 같은데, 그들 의도대로 일단 천계 총단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놈들 의도대로 태자님을 시해할 수는 없겠지요. 한데 태자님은 이전 그 석실에 그대로 계십니까?”
“아마 그럴 것이오. 신체를 보존하는 기운이 가득한 곳이라 다른 장소로 옮기기 힘들 것이오. 다만 이대로 그냥 천계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래도 아쉬울 듯하오. 물론 나와 천상선녀 두 사람은 복귀해야 하지만, 백 공자는 천계로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마제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는 게 좋을 듯하오.”
“하지만 빈손으로 돌아오면 마제가 가만있겠습니까?”
“심장과 눈알은 만들면 되오.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쉽게 분간할 수 없을 것이오. 일단은 놈들 의도대로 천계로 돌아가서 다시 의논하도록 합시다. 천제님 상태도 살펴봐야 할 테니까.”
“네. 그럼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불편하시더라도 제 몸에 들어가 계시기 바랍니다.”
“알겠소.”
“알겠어요.”
천선생과 천상선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자안이 두 사람을 몸속에 다시 넣어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사람이 처소로 왔다.
한데 그는 이중마인이 아닌가.
그는 구천마녀의 죽음 이후 마계사자가 된 인물로 백자안을 무림에서 잡아 왔던 자이기도 했다.
“이중마인이라 하오. 만나서 반갑소이다.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나를 따라오시오.”
“알겠습니다.”
백자안이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폐쇄진법이 설치된 천계 총단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법보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 같았다.
가면서 이중마인이 물었다.
“혹시 뇌옥대마신이 은밀한 제의를 하지 않았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다 알고 있소. 마제께 알리지 않을 테니 나에게도 천계 태자의 몸뚱이 한 부위를 베어와 주시오.”
“어디를 말입니까?”
“태자 놈의 코가 필요하오. 내 무공과 연관이 있는 곳이라 큰 도움이 될 듯하오.”
“알겠습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시다니 어찌 속이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이오? 이런 상황에서도 거래하려 하다니 역시 보통 분이 아니구려.”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그 비밀이 계속 유지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궁금한 것은 돌강시들입니다.”
“돌강시 부대 말이오? 어떤 부분이 궁금한지 말해보시오. 마침 내가 그들의 조련 책임을 맡고 있으니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소.”
“하하하! 그것참 잘되었군요. 제가 궁금한 것은 돌강시들의 상태입니다. 제가 듣기로 돌강시들이 천계와의 전쟁 때 큰 역할을 했다던데, 어느 정도로 움직일 수 있는 겁니까?”
“돌강시들의 수준은 지금 오할 정도라고 보면 되오. 조만간 마제께서 지성자가 되시면 완벽해질 것이오. 하지만 지금 정도로도 그 위력은 막강하오. 천계 고수들이 일방적으로 당했을 정도이니까.”
“돌강시들은 여전히 몸 전체가 돌입니까?”
“그렇지 않소. 이미 얼굴 부위는 이전과 같이 회복되었소. 다만 아직 말은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소.”
“아! 그렇군요. 그럼 지금 그들은 실전배치가 된 겁니까?”
“그렇소. 대부분의 돌강시가 기본적인 임무를 수행할 정도로 개조가 끝난 상태요. 이미 많은 돌강시들이 총단 곳곳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니, 지금이라도 몇 구 정도는 볼 수 있을 것이오.”
천계 태자의 코를 구해주겠다는 백자안의 말에 이중마인이 기분이 좋은 듯 적극성을 보였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시간이 있겠습니까?”
“물론이오. 돌강시 부대 일부가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군사부 앞에도 배치되어 있으니까.”
“군사부라 하심은 총군사 마선생이 계신 곳입니까?”
“그렇소. 지금 총군사님을 비롯해 여러 대마신들이 맹주를 기다리고 있소. 아, 저기 돌강시들이 보이는군.”
이중마인이 거대한 전각 앞에 경계를 서고 있는 백여 구의 돌강시를 가리켰다.
백자안이 그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중마인의 말대로 얼굴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으나 나머지는 여전히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부동자세로 서 있는 그들의 표정은 무표정 그 자체였다.
얼굴을 제외하면 이전에 보았던 망부석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백자안은 빠르게 그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였다.
그렇게 돌강시들의 얼굴을 살펴보던 어느 순간.
백자안의 눈이 빛났다.
‘아! 저들은?’
그랬다.
아는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두 명이었다.
바로 이전에 고향 마을에서 만나 지존비무에 참가하기 위해 낙양으로 왔던 천산객과 장초였다.
당시 많은 일이 발생함에 따라 그들과 헤어져 더는 볼 수 없었는데, 이렇게 돌강시가 된 그들을 보게 된 것이었다.
‘시기적으로 저들은 십만혈군에게 당해 돌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아는 얼굴을 보니 감개무량하구나. 시간이 걸리겠지만 반드시 내가 회복시켜 놓을 것이다.’
극히 일부의 안면 있는 사람을 발견했지만, 백자안은 오히려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느꼈다.
비록 돌강시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움직일 수 있다는 자체가 큰 의미로 다가온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기분을 내색할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옆에는 이중마인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던 사람이라도 있소?”
“아, 아닙니다. 사실 제가 돌강시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뭐든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도와주겠소.”
“감사합니다. 딴 게 아니라 한 때 강호를 떠들썩하게 했던 절세미인들의 행방 때문입니다.”
“절세미인이라 함은 혹시 악미미나 단목수련, 백리설아, 김지혜 그녀들을 말하는 것이오?”
“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으음, 그녀들이 돌강시 부대에 속해있는 것은 맞소. 하지만 내가 손댈 수 없는 곳에 있어 만나게 해줄 수는 없을 것 같소.”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녀들은 지금 마제님의 근접호위를 맡고 있소. 마제님은 돌강시들을 지성자 수련과 연계 하시고 있으므로 최근 호법들이 모두 돌강시들로 교체되었소. 참고로 돌강시 호법은 모두 열 명으로 그들 모두는 백자안 그놈과 관련이 매우 깊은 자들이오. 한데 역시 소문대로 맹주는 미녀를 좋아하는구려. 돌강시가 되었는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오?”
“하하하! 부끄럽습니다. 사실 일전에 한번 그녀들을 보고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어 돌강시라도 곁에 두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어렵겠군요.”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 이번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마제께서 지성자가 되시면 그녀들 중 적어도 한 명은 상으로 내리실 수도 있을 것이오. 자, 이제 안으로 들어갑시다.”
“네.”
백자안이 이중마인을 따라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군사부 소속 건물인 그곳은 마계군사전(魔界軍師殿)이라 했으며, 마계 총단의 모든 작전이 수립되는 곳이기도 했다.
“하하하! 어서 오시오. 혈괴자 맹주.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마계 총군사 마선생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마계군사전 대청 안에는 그 외에도 원로대마신, 허공대마신, 호법대마신, 뇌옥대마신 이렇게 네 명이 더 있었다.
이중마인과 백자안을 포함하면 모두 일곱 명이 있는 셈이었다.
백자안이 포권으로 인사한 후 대청 중앙에 놓여 있는 평평한 바위를 쳐다봤다.
바위는 한 번에 열 명 정도까지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제법 컸다. 붉은빛을 뿜어 내는 그 바위 위에는 푸른색 비수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백자안이 주목한 것은 비수보다 그 바위였다.
‘보통 바위가 아니다. 아마도 저 바위가 천계 총단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법보인 것 같구나.’
백자안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는 일종의 모험을 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아직 몸속에 있는 천상선녀와 천선생의 존재를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마제를 만나지 않고 가는 게 다행이라 할 수 있겠군. 그가 지성자에 근접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무영신투술을 알아낼 수도 있을 테니까. 일단은 아무 생각 없이 일단 천계로 들어가는 데만 집중하자.’
백자안이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 때.
마선생이 바위 위에 있는 비수를 들어 백자안에게 주었다.
“받으시오. 멸천비수(滅天匕首)라는 것이오. 이 비수에 찔리면 지성자가 아닌 한 즉사하고 마는데, 어떤 경우에도 부활할 수 없는 특징이 있소. 천계 태자가 아직 불사의 능력이 없긴 하나 천족의 후예인 것은 틀림없으니 이 멸천비수가 유용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백자안이 멸천비수를 받았다.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백자안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백자안의 질문에 마선생이 미소를 지었다.
“너무 서둘지 마시오. 준비는 모두 마쳤으니까. 일단 이 바위부터 설명해주겠소. 마계이동석(魔界移動石)이란 것인데 우리 마계의 법보 중 하나요. 그 기능은 특수 이동대법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오. 진행 방법 역시 간단하오. 맹주가 바위 위에 올라가면 우리가 마력으로 법보를 발동시켜 천계 태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주겠소.”
“알겠습니다. 저야 잘 모르니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한데 돌아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귀할 때는 더욱더 간단하오. 이곳 군사전 대청으로 돌아온다는 의념을 내기만 하면 금방 복귀할 수 있을 것이오.”
“마계이동석 없이 말입니까?”
“그렇소. 한번 이동석으로 특수 이동이 되면 한시진 안에는 의념만으로 복귀가 가능하오. 그러니 반드시 한시진 안에 모든 작업을 마쳐야 하오.”
“만약 놈들에게 들키든지 해서 시간을 지체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동 후 한시진이 넘으면 혼백이 달아날 것이오. 그러니 혹여 임무를 다 마치지 못하게 되더라도 속히 돌아오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절대 늦으면 안 될 것 같군요.”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변수가 생겼구나. 여차하면 천계에 계속 머물려고 했는데 그게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