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장] 돌강시 3
깊은 밤.
마계 귀빈각에 머물고 있는 백자안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마계 쪽의 의심을 피하고자 일단 시키는 대로 해주려고 마음먹었으나, 당장 날이 밝는 대로 천계 총단으로 가서 태자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실제로 천계 태자를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죽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을 가져와야 하므로 마제를 속이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였다.
미리 그 대비를 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좋은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그렇다고 지금 바로 내 본색을 드러낼 수도 없지 않은가.’
백자안이 난감해했다.
사실 제일 좋은 것은 지금이라도 당장 마제를 비롯해 마계 고수들을 척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직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상황을 주재할 수 있으려면 지성자가 되는 것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지성자가 되는 것은 여전히 난망한 게 현실이었다.
오히려 현재 지성자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사람은 바로 마제였다.
‘위험이 따르겠지만 마제를 직접 한 번 보게 되면 그의 경지를 대충이라도 알 수 있을 텐데······ 상황이 조금 답답하구나. 으음, 지금으로서는 일단 천계에 갔다 온 후 태자를 죽이지 못한 이유를 적절히 둘러대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때가 되면 마제를 만나보든가 아니면 무림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백자안이 마음을 일단 정리한 후 잠을 청하려 했다.
그때였다.
인기척이 나며 한 사람이 그의 방에 왔다.
한데 그는 바로 뇌옥대마신이 아닌가.
자루 하나를 둘러메고 있는 그가 말했다.
“혈괴자 맹주! 주무시오?”
“아! 아닙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적적하실 것 같아 선물을 하나 들고 왔소. 마음에 들 것이오.”
뇌옥대마신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자루를 풀었다.
그러자 자루 안에 들어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백자안이 탄성을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루 안에서 나온 것은 바로 절세미녀였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알고 있는 천상선녀였다.
물론 그녀와 천선생이 마계에 포로로 잡혀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다.
하지만 이런 시각에 이런 모습으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 계집은 천계사자로 천상선녀라 하오. 지난번 전투 때 우리에게 잡혔는데, 내가 관리하는 중이오.”
“한데 어째서 이곳에 데리고 온 겁니까?”
“맹주가 미인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이왕 우리 마계에 온 이상 천계제일미녀를 품을 기회를 가지는 것도 좋지 않겠소?”
“제가 어찌······.”
백자안이 난감해하며 혈도를 찍힌 채 정신을 잃고 있는 천상선녀를 바라봤다.
‘내상이 심하구나.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구해야겠다.’
“하하하! 호색한으로 소문난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아무 말 말고 내 성의를 받으시오. 사실 오늘 밤 이 계집을 내가 취하고 죽일 생각이었으나, 맹주가 내일 천계 총단으로 들어갈 예정이라 큰마음 먹고 양보하는 것이오.”
“혹시 제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까?”
“하하하! 눈치가 빨라서 좋소. 다른 게 아니오. 내일 천계 태자를 죽일 때 심장뿐만 아니라 놈의 두 눈알을 뽑아서 내게 주시오. 가능하겠소?”
“가능은 합니다. 한데 눈알로 뭘 하시려고?”
“맹주는 잘 모르겠지만 천계 태자 그놈의 몸은 전체가 약 덩어리와 다름이 없소. 물론 가장 좋은 부위는 심장이라 할 수 있으나, 두 눈알 역시 큰 효능이 있소. 다만 그에 맞는 무공을 익히고 있어야 하는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맞는 사람이 바로 나요. 이제 알겠소?”
“네. 이렇게 선물까지 주시고 부탁을 하는데 제가 들어드려야지요.”
“고맙소. 내 비록 지금 지위가 그렇게 높지는 않으나 앞으로 신공을 완성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오. 그때가 되면 다시 한번 사례를 하겠소.”
“감사합니다. 한데 이 계집은 나중에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하하! 간단하오. 이럴 줄 알고 미리 특수 화골산을 가져왔소. 마음껏 즐긴 후 화골산 한 방울만 뿌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오. 나중에 계집년의 몸속에 있던 고독이 발동해 소멸했다고 보고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뇌옥대마신이 품속에서 약병을 꺼내 백자안에게 주었다.
백자안이 약병을 받은 후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일을 해주는 대가로 이런 귀한 선물을 받게 되나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나중에 제가 무림으로 돌아가게 되면 절세미인을 찾아 대마신께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그럼 가보겠소. 아, 이건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이번 일은 우리 두 사람만 알고 있어야 하오. 마제께서 혹시 알면 오해를 하실 수도 있으니까. 아시겠소?”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하하하! 시원해서 좋소. 그럼 즐기도록 하시오. 내일 아침에 봅시다.”
뇌옥대마신이 흐뭇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갔다.
이제 방에 남은 사람은 백자안과 천상선녀뿐이었다.
“휴우! 이제 어떻게 한다?”
백자안이 한숨을 돌리며 천상선녀를 쳐다봤다.
한눈에 봐도 특수 점혈을 당해 다른 사람이 쉽게 풀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찌 될지 모르니 일단 천계로 데려가서 해혈을 하든지 해야겠다.’
백자안이 고민 끝에 천상선녀를 다시 자루에 담은 후 무영신투술로 자신의 몸속에 넣어두었다.
‘함께 포로로 잡혀 있다던 천선생도 데려가면 좋겠지만 그것은 지금 상황에서 무리일 듯하구나.’
백자안이 가부좌를 하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몸속에 사람을 넣어둔 것은 처음이라 몸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구중천심공을 한번 일주천한 순간.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몸속에 넣어두었던 천상선녀가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분명 해혈이 어려워 보였기에 뜻하지 않은 성과였다.
백자안이 급히 천상선녀를 담은 자루를 몸속에서 끄집어냈다.
자루를 풀자, 천상선녀가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으으······ 당신은?”
천상선녀가 놀란 눈으로 백자안을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백자안 역시 천상선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순간적으로 역용을 풀고 본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백 공자!”
“네. 오랜만입니다. 천상선녀님.”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천상선녀와는 천계비고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진 사이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분명 마제 그놈에게 혈도를 찍혀 정신을 잃었었는데······.”
“제가 설명을 해드릴 테니 마음을 편히 하십시오.”
백자안이 미소를 지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해줬다.
천상선녀가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백자안이 모든 설명을 마치고 다시 혈괴자의 모습으로 역용하자 천상선녀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정말 대단해요. 그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어떻게든 극복을 하고 계셨군요. 사실 지난번에 백 공자가 천계 총단에서 갑자기 사라지자 저 역시 많이 당황했어요.”
“천계 분들은 다들 제가 도망친 것으로 생각했습니까?”
“네. 하지만 나중에 그 모든 것이 마제의 음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한데 무저곡에 계셨다니 뜻밖이에요.”
“운이 좋았지요.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니까. 그나저나 천계 상황이 심각한 것 같군요.”
“저 역시 백 공자 말씀을 듣고 처음 알게 되었어요. 일단 본계 총단으로 돌아가 상황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봉문을 했다지만 아마도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아무래도 좀 더 백 공자의 도움이 필요할 듯해요.”
“제 몸속으로 다시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네. 폐쇄진법이 가동되고 있다고 하니 무리하는 것보다 차라리 마계 법보의 힘을 빌려 백 공자와 함께 천계 총단에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게다가 정신이 들기 시작할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백 공자 몸속이 상당히 편안했던 것 같아요. 숨을 쉬는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귀식대법을 펼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하지요. 한데 정말 우리 태자님의 심장과 눈을 가져가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입니다. 어찌 제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호호. 하기야 백 공자께서 그럴 분은 아니시지요. 혹시라도 우리 천제님께 불만이 있으셔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세요. 그분은 태자님 걱정이 너무 커서 백 공자를 배려하지 못했을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감사해요. 하지만 이제는 다를 거예요. 태자님의 생사천겁과 백 공자님의 관계. 그리고 우담화 등 많은 추측이 사실과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으니까 일방적으로 백 공자님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저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풀어가면 제일 좋겠지요.”
“네. 그것이 순리면 더욱더 좋겠지요. 한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그게 뭡니까?”
“저 혼자 천계로 복귀할 수는 없어요. 반드시 총군사님을 데려가야 해요.”
“천선생님 말씀입니까?”
“네. 좋은 방도가 없을까요?”
“천선생께서 갇혀 있는 곳을 아십니까? 생각보다 놈들에게 천선생의 이용가치가 그렇게 크지 않아 보이니,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도 있을 겁니다.”
“천선생님이 갇혀 있는 곳은 아마 뇌옥일 거예요. 굳이 저와 분리해서 가둬놓지는 않았을 거예요.”
“으음, 알겠습니다. 일단 간단한 치료부터 해드리고 작전을 짜도록 하지요.”
“같이 가는 건가요? 좋아요. 다만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주세요.”
“네.”
* * *
“하하하! 혈괴자 맹주. 어떻게 날 찾아오신 것이오? 제가 드린 선물은 어떻게 잘 처리했소?”
뇌옥대마신이 백자안의 방문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상선녀를 백자안에게 주고 돌아간 지 한 시진 정도밖에 되지 않은 때문이었다.
백자안이 껄껄 웃었다.
“선물은 잘 사용했습니다. 만족스러웠고 뒷마무리까지 잘 처리했습니다. 한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말씀해보시오. 뭐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구해드리겠소.”
뇌옥대마신이 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놈이 계집 하나로 만족을 하지 못한 것인가. 색마가 따로 없군. 종잡을 수 없는 놈인 것 같으니, 태자의 눈알을 확보한 후 때를 봐서 죽여 입막음해야겠군.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 내가 금지마공(禁止魔功)을 익히려 한다는 것을 마제께서 알기 전에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곳에 갇혀 있다는 천선생 역시 제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몸속 고독이 발동되어 천상선녀가 소멸했다고 주장하려면 함께 잡혀 온 천선생 역시 마찬가지로 소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것 때문에 오신 것이오? 좋소이다. 안 그래도 천선생 그자의 생사에 대해 마제께서도 더는 관심을 두지 않으시니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혹시 내가 준 특수 화골산을 가져왔소?”
“네. 한 방울 사용하고 남았습니다.”
“좋소. 그럼 나를 따라오시오. 사실 어차피 며칠 내로 본보기로 처형할 예정이었으니, 소멸하였다고 해서 문제 삼을 사람은 없을 것이오. 난 또 뭐라고. 하하하.”
뇌옥대마신이 앞장을 서서 뇌옥 구석에 있는 한 감방 안으로 향했다.
백자안이 그 뒤를 따라갔다.
그의 몸속에 있는 천상선녀 또한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얼마 후 도착한 감방 안에는 예상대로 천선생이 누워있었다.
천상선녀와 마찬가지로 내상이 깊어 보였다.
혈도 또한 찍혀 있었다. 백자안이 주저 없이 화골산을 그의 몸에 부어버렸다.
정신을 잃고 있던 천선생의 몸뚱이가 한 줌 고름으로 변하더니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다만 그 과정에 연기 같은 것이 생겨났는데, 그 연기가 백자안의 몸쪽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 이채로웠다.
뇌옥대마신은 그 점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맹주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으니 내 부탁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거듭 말하지만, 태자의 눈알 두 개를 반드시 가져다주시오.”
“혹시 한 개는 안 됩니까?”
“절대 안 되오. 두 개가 있어야 음양의 조화가 되니 반드시 명심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겠습니다.”
“그러시오. 나중에 보도록 합시다.”